베르나르 루이 볼리외
1. 개요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조선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천주교 사제이다. 1864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입국, 경기도 광주에서 사목 활동을 준비하며 조선어를 배웠다. 병인박해로 체포되어 한양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은 후,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는 1968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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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루이 볼리외 |
|---|---|
| 출생 | 1840년 10월 8일 |
| 출생지 | 프랑스 지롱드 랑공 |
| 사망 | 1866년 4월 8일 (25세) |
| 축일 | 9월 20일 (로마 달력,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
| 이름 (한국어) | 볼리외 베르나르도 |
|---|---|
| 출생일 | 1840년 10월 8일 |
| 사망일 | 1866년 3월 7일 |
| 축일 | 9월 20일 |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 출생지 | 프랑스 보르도 랑공 |
| 사망지 | 한국 서울 새남터 |
| 직업 | 사제, 순교자 |
| 시복일 | 1968년 10월 6일 |
| 시복자 | 교황 바오로 6세 |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 매장지 | 절두산 순교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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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거주한 프랑스인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한국에 거주한 프랑스인 -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은 프랑스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제8대 조선 교구장으로, 조선 가톨릭 교회 확립에 기여하고 여러 활동을 펼쳤으나 조선인 차별과 안중근 의거에 대한 부정적 입장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
조선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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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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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 -
조아킴 부베
조아킴 부베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 청나라에서 활동하며 강희제의 총애를 받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이자 학자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고 외교 사절 역할을 수행하며 동서양 문화 교류에 기여했고, 라이프니츠에게 이진법 연구에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례 논쟁에 참여하고 『강희제전』을 저술했다.
2. 생애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는 프랑스 보르도 교구 랑공 출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어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볼리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2.1. 초기 생애와 사제 서품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는 프랑스 보르도 교구의 랑공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모친은 아들을 낳자 성모에게 봉헌하였다. 루이 볼리외는 여섯 살에 공민학교에 입학했고, 일곱 살 때부터 천주교의 복사를 하였으며, 아홉 살 때인 1849년 10월에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청나라 쓰촨성의 선교 경험이 있는 한 신부로부터 청나라의 사정을 듣고서 동양 선교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 1857년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듬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동양 선교의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교회법상 연령 미달로 사제 서품을 받지는 못하였고, 1862년에 부제 서품을 받았다.
보르도 교구의 교구장 대주교가 볼리외 부제에게는 출국을 허락하여, 1863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교하였고, 1864년 사제 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2.2.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
1864년 7월 15일 도리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위앵 신부와 함께 파리를 떠나 이듬해 5월 27일 충청도 내포에 도착하여 조선에 입국하였다. 베르뇌 주교와 교우들이 그를 반겼다.
볼리외 신부는 경기도 광주 (현 성남시 운중동의) 뫼논리라는 교우촌에서 사목활동을 준비하며, 신입 교우 장제철의 집에서 조선말을 배웠다. 볼리외 신부는 "이렇게 선교를 잘 펼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되어 다행입니다."라며 행복해 했고, 조선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말에 능숙해졌다. 그 무렵 배교자 이선이가 볼리외 신부를 고발하였으므로, 광주 산답리의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볼리외 신부의 조선말 실력과 노력을 알고 충청도 공주 지방에 배속시켰지만, 병인박해가 발발하여 베르뇌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의 교우 집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볼리외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었던 장제철과 이선이의 밀고로 1866년 2월 27일에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튿날 볼리외 신부는 한양의 의금부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결국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도리 신부 등과 함께 참수되었고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망나니의 세 번째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2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