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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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민족주의의 고조로 인해 쇠퇴했다. 전쟁 중 군대의 사기 저하, 좌익 및 평화주의 정치 운동의 확산, 그리고 미국의 14개조에 따른 민족 자결주의 요구로 제국 내 분열이 심화되었다. 1918년 10월 17일 헝가리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고, 카를 1세가 퇴위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제국의 해체 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각각 공화국을 선포하고,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영토가 축소되었다.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 여러 국가가 새롭게 탄생하거나 영토를 확장했으며, 제국의 해체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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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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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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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속 기간 | 1867년 3월 30일 ~ 1918년 11월 3일 |
정치 체제 | 이원제 군주국 |
역사 | |
주요 사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타협 (1867년 3월 30일) 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 (1918년 11월 3일) |
해체 원인 | |
요인 |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민족주의 운동의 확산 경제적 어려움 |
결과 | |
국가의 분할 및 독립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헝가리 왕국 (1920-1946)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왕국 폴란드 제2공화국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루마니아 왕국 자카르파탸 우크라이나 |
관련 사건 | |
주요 사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타협 제1차 세계 대전 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 |
기타 | |
영향 | 중부 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 새로운 독립 국가들의 등장 합스부르크 가문의 몰락 |
2. 제국의 쇠락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장기화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사회적 혼란에 직면했다. 순무의 겨울로 대표되는 식량 부족과 스페인 독감의 확산은 제국 전역에 걸쳐 고통을 가중시켰고, 사회 전체는 전쟁에 지쳐 평화를 갈망하는 상태였다.[27]
경제 파탄과 기아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전선 유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군부의 권한 남용과 민족 차별 정책은 제국 내 민족주의 운동을 더욱 자극했다.[28] 특히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패배는 제국의 군사적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파 및 평화주의 정치 세력이 부상하여 파업과 항명을 주도했으며,[29] 독일 제국의 패배와 빈, 부다페스트 등지에서 발생한 혁명적 움직임은 제국 붕괴를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정은 1918년 가을, 급격하게 와해되었다.
2. 1. 경제 악화와 사회적 불안
1918년에 이르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제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고, 정부는 국내 정책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역사학자 알렉산더 왓슨에 따르면, 1918년 봄까지 중부 유럽 대부분 지역 주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여름에는 식량 공급이 순무의 겨울 수준으로 감소하고 전 세계적으로 최소 2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유행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회는 완전히 지쳤고 평화를 갈망하는 상태였다.[27]제국 경제가 극심한 침체에 빠지고 심지어 굶주림까지 발생하자, 다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져 전선을 유지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시 권한이 늘어나면서 군부가 일상적으로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고, 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다른 민족 집단을 차별하는 태도를 보이자 제국 내 여러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이 커져갔다.[28] 특히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마지막 공세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식량과 군수품 보급 없이 전투에 나서야 했으며, 사실상 제국의 정치적 지원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싸워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정은 1918년 가을에 매우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좌파 및 평화주의 정치 운동은 공장에서 파업을 조직했고, 군대에서는 항명과 봉기가 일상화되었다.[29] 이러한 좌파 또는 좌익 자유주의 성향의 친연합국 독립파 정당들은 군주제에 반대했으며, 국가 수호보다는 국제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독일의 패배와 빈,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난 소규모 혁명은 이들 좌익 및 자유주의 정당에게 정치적 권력을 넘겨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2. 2. 정치적 혼란과 군사적 붕괴
1918년에 이르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정부의 국내 정책은 큰 실패를 겪었다. 역사학자 알렉산더 왓슨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중부유럽 전역에서... 1918년 봄까지 대부분이 극심한 고통 속에 살았고, 1918년 여름에는 '순무의 겨울' 수준으로 식량 공급이 감소하고 전 세계적으로 최소 2천만 명이 사망한 스페인 독감 유행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사회는 완전히 지쳤으며 평화를 갈망했다."[27]제국 경제가 심각한 침체에 빠지고 기아까지 발생하자, 다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져 전선을 유지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또한, 전시 권한 확대로 군부가 시민의 권리를 일상적으로 제한하고, 오스트리아 지역 내 여러 민족 집단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면서 제국 내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28][4]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최후 공세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식량과 군수품 보급 없이 전투에 나서야 했으며, 사실상 와해된 제국으로부터 어떠한 정치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싸워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정은 1918년 가을, 매우 빠른 속도로 붕괴했다. 좌파 및 평화주의 정치 운동은 공장 파업을 조직했고, 군대 내에서는 항명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29] 이러한 좌파 또는 좌익 자유주의 성향의 친연합국 독립파 정당들은 군주제에 반대했으며, 국가 수호보다는 국제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독일 제국의 패배와 빈,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난 소규모 혁명은 이들 좌익 및 자유주의 정당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3. 민족 분열
제1차 세계 대전이 길어지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여러 민족 간의 통합은 점차 약화되었다. 연합국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제국 내 소수 민족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부추겼고, 이는 제국의 해체를 가속화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30][5] 전쟁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이전까지는 제국 내에서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던 민족주의 운동 세력들이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수도인 빈과 부다페스트에서는 좌파 및 자유주의 운동 세력과 반정부 세력이 소수 민족의 분리주의를 지지하며 힘을 얻었다.[31][5]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제국 군대는 여러 전선에서 고립되었다. 특히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군사적 패배는 제국을 구성하던 다양한 민족들이 더 이상 의미 없어 보이는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31]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제 카를 1세는 제국 영토가 와해되면서 통치력을 급격히 상실해갔다.[31]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시한 14개조 평화 원칙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민족들에게 자율적인 발전 기회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독립 움직임에 영향을 주었다.[31] 이에 카를 1세는 제국을 연방제로 개편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미 독립을 결심한 각 민족 지도자들의 불신과 거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31][5] 결국 미국의 외교적 입장 변화와 함께 각 민족 의회는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고, 이는 제국의 최종적인 해체로 이어졌다.[31][5]
3. 1. 민족주의 운동의 강화
전쟁이 길어지면서 제국 내 민족 간 통합은 약화되었고, 연합국은 소수 민족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부추겼다.[30][5] 연합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승리가 확실해지자, 이전까지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던 민족주의 운동 세력들은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수도인 빈과 부다페스트의 좌파 및 자유주의 세력, 그리고 반정부 세력들은 이러한 소수 민족의 분리주의를 지지하며 세력을 키웠다.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시한 14개조 평화 원칙 중 하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각 민족에게 자율적인 발전 기회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독립 움직임을 더욱 촉진했다. 이에 카를 1세 황제는 1917년 제국 의회를 다시 열고 각 민족이 자치권을 가지는 연방제 국가 구성을 제안했지만,[31] 각 민족 지도자들은 빈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이 제안을 거부하고 완전한 독립을 선택했다.
제국 곳곳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 전선이 붕괴되면서 제국을 구성하던 여러 민족들은 더 이상 의미 없어 보이는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31] 1918년 5월에는 체코인 부대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군법에 따라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1918년 10월 14일, 외무장관 부리안 폰 러예츠 남작은 14개조 원칙에 기반한 휴전을 요청했다.[32][6] 이틀 뒤인 10월 16일, 카를 1세는 제국을 연방제로 개편하겠다는 선언(1918년 10월 16일 제국선언 또는 인민 선언)을 발표했다.[7][8] 이 구상은 폴란드계 지역(오스트리아-폴란드 해결책)에 분리독립 선택권을 부여하고, 나머지 치슬라이타니아(오스트리아 측)를 독일, 체코, 남슬라브, 우크라이나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연방을 구성하려는 것이었다.[9][10][11][12][13] 트리에스테는 특별 지위를 부여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이미 제국이 붕괴하던 시점에 너무 늦게 발표되었고,[14][15][16] 헝가리 정치 엘리트들의 반대로 센트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 측)에는 적용되지도 못했다.

나흘 후인 10월 18일, 미국 국무장관 로버트 랜싱은 연합국이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남슬라브족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랜싱은 민족 자결 원칙에 따라 단순한 자치권 부여(14개조 중 10번째 조항)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으며, 워싱턴은 더 이상 14개조를 기반으로 휴전 협상을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 통보는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사망 진단서와 같았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 임시정부는 10월 14일 연합국에 가입했으며, 남슬라브인들은 이미 1917년 코르푸 선언을 통해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선언한 상태였다.
이미 각 민족 의회는 독립 국가의 임시 정부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패배가 확실시되자(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10월 28일 체코 정치인들은 프라하에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장악했고,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일이 되었다. 10월 30일에는 슬로바키아인들이 마르틴에서 이에 합류했다. 10월 29일, 제국 내 남슬라브인들은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의 독립을 선포했으며,[34]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통합하여 거대한 남슬라브 국가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같은 날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수립을 공식 선포했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의 강화와 제국의 붕괴는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 부족,[4] 스페인 독감의 확산, 군대의 사기 저하와 반란 확산 등 총체적인 사회 위기와 맞물려 가속화되었다.[31]
3. 2. 카를 1세의 연방제 제안과 거부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시한 14개조 조항 중 하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각 민족에게 자율적인 발전을 기회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31] 이에 카를 1세 황제는 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1917년 제국 의회를 다시 소집하고, 각 민족 집단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연방 국가 구성을 제안했다.[31] 그러나 제국 내 각 민족 단체의 지도자들은 이미 빈 정부를 깊이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거부하고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31][5]전세가 기울고 제국의 패배가 명확해지자, 1918년 10월 14일 외무장관 스테판 부리안 폰 러예츠 남작은 윌슨의 14개조 조항을 기반으로 한 휴전을 연합국에 요청했다.[32][6] 카를 1세는 연합국에 대한 선의를 보이고 제국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노력으로, 이틀 뒤인 10월 16일 '인민 선언'(Völkermanifest)[7][8]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오스트리아 지역(치슬라이타니아)을 독일, 체코, 남슬라브, 우크라이나 4개의 자치 지역으로 나누어 연방제를 구성하고, 트리에스테에는 특별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31][9][10][11][12][13] 또한, 폴란드계가 다수인 마워폴스카와 갈리치아 일부 지역은 제국에서 분리되어 폴란드 섭정왕국에 합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31][33] 하지만 이 선언은 헝가리 지역에는 적용되지 않았는데, 헝가리 정치 엘리트들이 센트이슈트반 왕관령의 통합 유지를 고수하며 타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31]
그러나 카를 1세의 이러한 노력은 이미 너무 늦은 것이었다. 선언이 발표될 당시 제국은 이미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고, 각 민족 대표 기구들은 이 선언을 제국 개혁의 기회가 아닌, 독립을 위한 명분으로 받아들였다.[14][15][16] 결정적으로, 10월 18일 미국 국무장관 로버트 랜싱은 연합국이 더 이상 윌슨의 14개조 조항에 얽매이지 않으며,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남슬라브인의 완전한 독립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랜싱은 민족 자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못 박으며,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종말을 고했다.[31][5] 이 발표 이후, 각 민족 의회는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했다.[31][5]
3. 3. 제국 정부의 대응과 한계
전쟁이 길어지면서 제국 내 민족 간의 통합은 약화되었고, 연합국은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부추겼다.[30][5]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이전까지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던 민족주의 운동 세력들은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수도 빈과 부다페스트에서는 좌파 및 자유주의 운동 세력이 소수 민족의 분리주의를 지지하며 힘을 키웠다.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고, 군대는 전선에서 고립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이 무너지면서 제국을 구성했던 여러 민족들은 더 이상 의미 없어 보이는 전쟁을 지속하기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 카를 1세는 제국 영토가 와해되면서 통치력을 급격히 상실했다.[31]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시한 14개조 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각 민족에게 자율적 발전을 위한 최대한의 기회를 보장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카를 1세는 1917년 제국의회를 다시 소집하고 각 민족 집단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연방 국가를 구성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각 민족 단체의 지도자들은 빈 정부를 깊이 불신하며 이 제안을 거부하고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1918년 10월 14일, 외무장관 스테판 부리안 폰 러예츠 남작[6]은 윌슨의 14개조 원칙에 기반한 휴전을 요청했다.[32] 이틀 뒤인 10월 16일, 카를 1세 황제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오스트리아 지역의 군주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내용의 선언(1918년 10월 16일 제국 선언, 일명 인민 선언[7][8])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오스트리아 지역을 독일, 체코, 남슬라브, 우크라이나 4개 부분으로 나누어 연방을 구성하고, 각 지역 의회가 빈과 제국의 미래를 협상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트리에스테는 특별 지위를 부여받을 예정이었다. 또한, 마워폴스카와 갈리치아 일부의 폴란드계 다수 거주 지역은 제국에서 분리되어 독립 폴란드 국가 건설을 목표로 이미 수립된 폴란드 섭정왕국에 합류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받았다.[33]
하지만 이 선언은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제국 정부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간의 분쟁을 조장하여 폴란드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했으며,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전체를 유지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비밀 조항에 따른 우크라이나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헝가리의 정치 엘리트들은 다른 민족과의 협력 없이도 센트이슈트반 왕관령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 선언의 발표 자체를 막았다. 결정적으로, 이 선언은 제국이 이미 붕괴하고 있던 시점에 너무 늦게 발표되어, 각 민족 대표들에게는 제국 개혁의 기회가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고 제국을 떠날 기회로 받아들여졌다.[14][15][16]
결국 제국 정부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흘 후인 10월 18일, 미국 국무장관 로버트 랜싱은 연합국이 이제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남슬라브족의 대의를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랜싱은 14개조 원칙의 10번째 조항인 '민족 자치'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으며, 미국은 14개조 원칙을 기반으로 휴전을 논의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 통보는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사망 진단서와 같았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 임시정부는 10월 14일 연합국에 가입했고, 군주국 내 남슬라브인들은 1917년 코르푸 선언을 통해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선언한 상태였다. 크로아티아는 10월 초부터 부다페스트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 시작했다.
제국 정부의 통제력이 완전히 상실된 가운데, 각 민족 의회는 독립 국가의 임시 정부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제국의 패배가 임박하자, 10월 28일 체코 정치인들이 프라하에서 평화적으로 권력을 장악했고(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일로 기념됨), 며칠 뒤 다른 주요 도시에서도 행정권이 넘어갔다. 10월 29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남슬라브 지역이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의 독립을 선포하며 남슬라브 민족의 통합 국가 수립 의지를 밝혔다.[34] 같은 날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공식 선포했으며, 10월 30일에는 슬로바키아인들이 마르틴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제국 정부의 대응은 시기적으로 늦었고 내부적 한계에 부딪혀 제국의 해체를 막지 못했다.
4. 제국 해체
미국 윌슨 대통령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존속을 전제로 한 협상을 거부하면서[35] 제국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32] 윌슨의 입장은 1918년 10월 20일 도착한 답신을 통해 확인되었으며, 이는 제국 외무장관 부리안 폰 라예츠가 보낸 편지에 대한 회신이었다.[32][35]
1918년 10월 17일, 헝가리 국민의회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가 연합 종료와 독립 선언 안건을 가결했다. 이후 카로이 미하이가 이끄는 국화 혁명이 성공하여 10월 31일 정권을 장악했고, 같은 날 대타협 합의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며 오스트리아와의 연합 관계를 청산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사실상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10월 말에 이르러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력은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다뉴브강 유역과 알프스 지방에만 겨우 미치는 수준으로 약화되었고, 이곳에서조차 카를 1세의 권위는 도전을 받고 있었다.[36] 마지막 오스트리아 총리 하인리히 라마시는 카를 1세에게 통치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알리고 주권 행사를 잠시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카를 1세는 11월 11일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국가 형태를 결정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국정 참여를 포기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37] 이 포고문을 통해 그는 오스트리아 정부를 해산하고 관리들의 충성 맹세 의무를 면제했다. 이틀 뒤인 11월 13일에는 헝가리에 대해서도 비슷한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비록 공식적인 퇴위는 아니었으나, 이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가 실질적으로 끝났음을 의미했다.
카를 1세의 퇴위 거부는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국정 포기 선언 다음 날인 11월 12일, 독일계 오스트리아 국가의회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헝가리에서도 카로이 정부가 11월 16일 헝가리 제1공화국(헝가리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제국의 해체는 공식화되었다. 이후 카를 1세는 헝가리 왕정 복고 시기에 왕위 복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추방되었다.
4. 1. 헝가리의 독립 선언
1918년 10월 17일, 헝가리 국민의회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가 연합을 종료하고 독립을 선언하는 안건을 가결했다.[35] 오스트리아와의 연합 유지에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카로이 미하이 백작은 10월 31일 국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황제였던 카를 1세는 상황에 밀려 카로이를 헝가리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카로이 정부는 집권 즉시 1867년의 대타협 합의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며, 오스트리아와의 국가 연합을 사실상 해체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종식을 공식화했다.[35]11월 13일, 카를 1세는 헝가리 국정에 대한 참여 권리를 포기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지만, 공식적인 퇴위는 거부했다.[37]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실질적인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카로이 미하이는 11월 16일 헝가리 제1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종식을 분명히 했다.
4. 2. 카를 1세의 퇴위와 공화국 선포
카를 1세의 마지막 오스트리아 총리였던 하인리히 라마시는 제국이 더 이상 통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그는 카를 1세에게 주권 행사를 잠시 포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득했다.[36]결국 1918년 11월 11일,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국가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신중하게 작성된 포고문을 발표했다.[37] 이 포고문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국정에 대한 모든 참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며, 라마시 내각을 해산하고 오스트리아 제국 소속 관리들의 충성 맹세 의무를 면제해주었다. 포고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38]
:즉위 이후 짐은 국민을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짐은 독일계 오스트리아가 차후의 정부 형태에 대하여 내릴 결정을 미리 알고 있다... 국민은 자신의 대표를 통해 정부를 수립했다. 짐은 어떠한 국정 지분도 포기했다... 동시에 짐은 오스트리아 정부를 해산한다... 독일계 오스트리아 국민이 화합과 용서 속에서 개편된 조직을 만들고 통합하길 바란다... 내면의 평화만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이틀 뒤인 11월 13일, 카를 1세는 헝가리에 대해서도 비슷한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공식적으로 '퇴위'하지는 않았고, 두 국가의 국민이 자신을 다시 부를 경우를 대비하여 군주 직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포고문 발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가 실질적으로 끝났음을 의미했다.
카를 1세의 퇴위 거부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가 오스트리아 국정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 날인 11월 12일, 독일계 오스트리아 국가의회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헝가리에서는 카로이 미하이가 이끄는 정부가 11월 16일 헝가리 제1공화국(헝가리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며 뒤를 따랐다. 이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5. 여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는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국의 법적 승계 국가는 독일 오스트리아(이후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와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후 헝가리 왕국)이었으나[20], 실제로는 여러 신생 독립 국가들이 등장하고 기존 국가들의 영토가 재편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경을 새로 획정하여 두 국가를 작은 내륙국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은 종종 신생 독립 국가들의 주장을 지지하여, 다수의 독일어 및 헝가리어 사용 인구가 새로운 국경 밖에 남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제국 해체와 새로운 국경 설정은 심각한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과거 제국의 광대한 시장을 기반으로 구축되었던 산업과 기반 시설은 더 이상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웠고, 새로 만들어진 국경은 경제 교류의 장벽이 되었다. 이로 인해 신생 국가들은 경제 구조를 재편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러한 경제적 불안정은 정치적 불안과 극단주의 운동의 확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5. 1. 후계 국가들의 등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법적으로는 두 개의 승계 국가가 등장했다.[39][20] 하나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으로 발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헝가리 인민공화국(이후 여러 단명한 국가를 거쳐 헝가리 왕국이 됨)이었다.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은 오스트리아와 생제르맹 조약을, 헝가리와 트리아농 조약을 맺어 두 국가의 새로운 국경을 확정했다. 이 조약들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영토가 크게 줄어든 내륙국이 되었다. 연합국은 특정 민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지역의 영유권 문제에서 새로 독립한 국가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독일어나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많은 넓은 지역들이 신생 독립국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국경 조정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 제국 시절의 빠른 경제 성장은 새로운 국경이 경제적 장벽으로 작용하면서 주춤하게 되었다. 기존의 산업 시설과 사회 기반 시설 상당수는 제국 전체의 수요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새로 독립한 국가들은 경제 구조를 재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해당 지역에서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극단주의 운동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옛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의 약 60%를 잃었다. 또한 국제 연맹의 승인 없이는 독일과의 통일이 금지되어, 독일과의 통일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새로운 오스트리아 국가는 헝가리에 비해 기반이 불안정했다. 오스트리아는 과거 700년 이상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이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지되었을 뿐, 독립적인 국가 정체성은 약했다. 수도 빈은 제국을 잃고 과대해진 도시가 되어 "국가적 수두증"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짧은 혼란기와 연합국의 독일 통일 반대 이후, 오스트리아는 연방 공화국으로 자리 잡았다. 비록 나치 독일에 의한 일시적인 병합이 있었지만, 영구적인 독일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헝가리는 900년 이상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는 영토의 72%, 인구의 64%를 잃고 대부분의 천연자원을 상실하는 등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제1 헝가리 공화국은 단명했고, 곧 공산주의 국가인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1919년 헝가리-루마니아 전쟁 중 루마니아 군대가 벨러 쿤의 공산 정부를 무너뜨렸다. 1919년 여름, 카를 1세의 사촌인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섭정을 맡았으나, 연합국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자 2주 만에 사임했다. 결국 1920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이자 반혁명 세력 조직에 기여했던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 정부는 1920년 6월 4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그랑 트리아농 궁전에서 항의의 표시와 함께 트리아농 조약에 서명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인해 다음과 같은 국가들이 새롭게 형성되거나, 재건되거나, 영토를 확장했다:[20]
- 독일 오스트리아 (이후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
- 제1 헝가리 공화국은 이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으며, 잠시 복원되었다가 헝가리 공화국으로 대체되었고, 궁극적으로 헝가리 왕국으로 변모했다.
- 제1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는 1920년부터 1938년까지)
- 제2 폴란드 공화국, 단명한 원시 국가인 타르노브제크 공화국 및 폴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의 분쟁
-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국과 세르비아 왕국, 두 국가 모두 나중에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흡수되었다.
- 대루마니아
- 이탈리아 왕국
- 중화민국 (구 톈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조차지)
- 단명한 루테니아(우크라이나 및 루신) 원시 국가인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에 흡수), 후출 공화국, 렘코 공화국, 코만차 공화국 및 갈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이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흡수되었지만,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및 유고슬라비아에도 흡수되었다.
이전에 빈에 보호를 의존하고 통치 가문이 시스라이타니아에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했던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스위스와 관세 및 방위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 통화 대신 스위스 통화를 채택했다. 1919년 4월, 오스트리아의 최서단 지방인 포어아를베르크는 스위스 합병에 대한 압도적인 찬성 투표를 했지만, 스위스와 연합군은 이 결과를 무시했다.



5. 2. 트리아농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제의 법적 승계 국가는 두 곳이었다.[39][20]-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이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됨)
- 헝가리 인민공화국 (이후 여러 단계를 거쳐 헝가리 왕국이 됨)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은 오스트리아와 생제르맹 조약을, 헝가리와 트리아농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들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새로운 국경이 확정되었고, 두 나라는 영토가 크게 줄어든 내륙국이 되었다. 연합국은 특정 민족이 명확한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지역을 분할할 때, 많은 경우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에게 유리하게 영토를 배분했다. 그 결과, 독일어나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많이 사는 넓은 지역이 이들 신생 독립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조약의 결정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 제국 시절의 빠른 경제 성장은 새로운 국경이 경제적 장벽으로 작용하면서 정체되었다. 기존의 많은 산업과 기반 시설은 광대한 제국 전체의 필요에 맞춰 설계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독립하거나 영토가 변경된 국가들은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해당 지역에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고, 일부 경우에는 극단주의 운동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5. 3. 정치적, 경제적 혼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법적으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헝가리 인민공화국(이후 여러 단계를 거쳐 헝가리 왕국)이라는 두 개의 승계 국가가 등장했다.[39][20]오스트리아와 맺어진 생제르맹 조약, 헝가리와 맺어진 트리아농 조약은 두 나라의 새로운 국경을 확정하며 이들을 소규모 내륙국으로 만들었다. 특정 민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지역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은 새로 독립한 국가들에게 유리하게 영토를 배분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로 인해 독일어와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넓은 영토가 신생 독립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조약 결정들은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파장을 낳았다. 기존 제국 영토 내에서의 빠른 경제 성장은 새로운 국경이 주요 경제 장벽으로 작용하면서 정체되었다. 많은 산업 시설과 기반 시설은 광대한 제국 전체의 수요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기 때문에, 신생 국가들은 경제 구조를 재편하기 위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해당 지역에서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고, 일부 경우에는 극단주의 운동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옛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의 약 60%를 상실했다. 또한 국제 연맹의 승인 없이는 독일과의 통일이 금지되어, 독일과의 통일 정책을 포기해야 했다. 새로 수립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보다 더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 오스트리아는 과거 700년간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이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지되었을 뿐, 실질적인 의미의 독립 국가였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수도 빈은 이제 뒷받침할 제국 없이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로 남아, '국가적 수두증'이라고 조롱받았다. 즉, 몸(국가)에 비해 머리(수도)가 지나치게 크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고 연합국이 독일과의 통일을 불허하자, 오스트리아는 연방 공화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비록 나치 독일에 의한 안슐루스로 잠시 통일되기도 했지만, 영구적인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헝가리는 약 900년간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제국 해체 후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헝가리는 영토의 72%, 인구의 64%, 그리고 대부분의 천연자원을 상실했다.[40][41] 헝가리 제1공화국은 짧게 존속하다가 공산주의 혁명으로 무너지고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1919년 헝가리-루마니아 전쟁에서 루마니아군이 침공하여 쿤 벨러가 이끄는 공산주의 정부를 무너뜨렸다.
1919년 여름, 합스부르크 가문의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잠시 섭정 자리에 올랐으나, 연합국이 합스부르크 가문 인사를 국가 원수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2주 만에 물러나야 했다.[42] 결국 1920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제독 출신으로 반혁명 세력 조직에 기여했던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으로 취임했다. 이 정부는 1920년 6월 4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그랑 트리아농 궁전에서 항의하며 트리아농 조약에 서명했다.[40][41]
1918년에 이르러 제국 전반의 경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정부는 국내 문제 해결에 심각한 실패를 겪었다. 역사가 알렉산더 왓슨은 당시 중앙 유럽 전역에서 1918년 봄까지 대다수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 속에 살았고 상황은 악화되었으며, 1918년 여름 식량 공급은 '순무 겨울' 수준으로 떨어지고 전 세계적으로 최소 2천만 명을 사망케 한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이 시작되어 사회가 지치고 평화를 갈망했다고 보고한다. 제국의 경제가 심각한 어려움과 기아로 붕괴되면서,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는 사기를 잃고 전선을 유지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더욱이, 전시 권한 확대로 군대가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제국 내 여러 민족 집단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면서 민족주의 감정은 더욱 격화되었다.[4] 마지막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공세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식량과 탄약 부족에 시달렸고, 정치적 지지 기반이 사실상 사라진 제국을 위해 싸워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8년 가을, 극적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좌익 및 평화주의 정치 운동이 공장에서 파업을 조직했고, 군대 내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좌익 또는 좌파 자유주의 성향의 친연합국 정당들은 군주제 자체에 반대했으며, 민족주의보다는 국제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결국 독일의 패전과 빈,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난 소규모 혁명은 이들 좌파/자유주의 정당들에게 정치 권력을 넘겨주었다.
5. 4. 합스부르크 왕가의 추방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법을 통과시켜 합스부르크 왕가를 폐위시키고 모든 합스부르크 가문을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추방했다. 카를 1세는 다시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올 수 없었지만,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은 폐지된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면 돌아올 수 있었다.한편, 1921년 3월과 10월에 카를 1세는 헝가리 왕위를 되찾으려 부다페스트에서 두 차례 시도했으나, 준비 부족으로 실패했다. 당시 헝가리의 섭정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연합국과 소협상 국가들이 간섭하겠다고 위협하자 카를 1세에 대한 협력을 거부했다.[42] 그 직후, 헝가리 정부는 국사 조칙을 무효화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를 사실상 폐위시켰다. 이후 영국은 카를 1세를 구금하여 그와 그의 가족을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으로 이송했고, 그는 이듬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6. 영토 유산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고, 과거 제국이 지배했던 광대한 영토는 여러 민족국가 및 기존 국가들로 분할되었다. 이 과정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체결된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제국의 영토는 오늘날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이탈리아 등 13개 주권 국가의 전부 또는 일부 영토를 구성하고 있다.[20] 또한, 중국에 설치했던 톈진 조계지는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20]
과거 제국을 구성했던 주요 지역별 영토 분할 현황은 다음과 같다.
6. 1. 오스트리아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지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제국의 서부 지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치슬레이타니아)은 여러 국가로 분할되었다. 다음은 해체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치슬레이타니아)의 경계 안에 있던 지역들이 현재 속해 있는 국가 및 지역 목록이다.[20]현재 국가 | 포함된 지역 (구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 |
---|---|
오스트리아 | 부르겐란트주(쇼프론 제외)를 제외한 전역 |
체코 | 흘루친스코 지역 제외 |
슬로베니아 | 프레크무르예 제외 |
이탈리아 | 트렌티노, 남티롤, 벨루노현 일부,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의 일부 |
크로아티아 | 달마티아, 이스트라 |
폴란드 | 마워폴스카, 포드카르파체, 실레지아 최남단(비엘스코, 체신) |
우크라이나 | 리비우, 이바노-프란키우스크, 테르노필(북쪽 모서리 제외) 대부분, 체르니우치 대부분 |
루마니아 | 수체아바주 |
몬테네그로 | 코토르만, 부드바, 페트로바츠, 수토모레를 포함한 해안 및 인접 내륙 지역 |
이전에 빈의 보호에 의존했던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스위스와 관세 및 방위 동맹을 맺고 스위스 통화를 채택했다. 1919년 4월, 오스트리아 최서단 주인 포어아를베르크는 주민 투표를 통해 스위스 합병을 압도적으로 지지했으나, 스위스와 연합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6. 2. 헝가리 왕국 (트란스라이타니아) 지역
- 헝가리
- 슬로바키아
-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쇼프론 제외))
- 슬로베니아 (프레크무르예)
-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의 바라냐와 메지무레, 피우메는 슬라보니아와 중앙 크로아티아와 함께 헝가리 본토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후자는 독립 왕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일부였다)
-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티아)
-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파르티움 지역 및 바나트, 크리샤나, 마라무레슈 일부)
-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 및 북부 베오그라드 지역)
- 폴란드 (오라바 및 스피시의 폴란드 지역)
6. 3.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 통치 지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이 지역은 현재 다음과 같은 국가 및 지역에 해당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비하치 시 서쪽과 그 인근 지역인 자발리에, 말리 스코차이, 벨리키 스코차이 마을을 포함한다.
- 몬테네그로: 소토리나 지역. 이곳은 현재 크로아티아(남서쪽)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북서쪽)와의 국경 사이에 위치한 헤르체그노비 시의 서쪽 부분, 아드리아해 동쪽 해안, 그리고 이갈로 마을(북동쪽)을 포함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사실상 식민지처럼 다루었는데, 이는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이 해외 영토를 통치하는 방식과 유사했다.[24] 과거 1878년부터 1908년까지는 산자크-라슈카 지역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점령 하에 있었으나, 제국 해체 시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지역은 형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
6. 4. 기타 영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중국에 설치했던 톈진 조계지는 당시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20] 해당 지역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이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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