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스부르크 폭스바겐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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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프스부르크 폭스바겐 공장은 독일 볼프스부르크에 위치한 폭스바겐의 주요 생산 시설이다. 1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기공식으로 시작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용 차량 생산에 기여했다. 종전 후 영국 군정 하에서 운영이 재개되었으며, 폭스바겐 비틀, 골프, 투란, 티구안, 타론 등 다양한 모델을 생산해왔다. 2026년부터는 트리니티 전기차 생산도 계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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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스부르크 폭스바겐 공장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볼프스부르크 폭스바겐 공장 |
원어 이름 | Wolfsburg Volkswagen Plant |
현지 이름 | Wolfsburg Volkswagen |
현지 이름 (언어 코드) | de |
![]() | |
위치 | 독일 볼프스부르크 38440 |
좌표 | 52° 26′ 1.68″ N, 10° 46′ 46.56″ E |
이전 이름 | 해당 없음 |
다른 이름 | 해당 없음 |
어원 | 해당 없음 |
상태 | 완공 |
취소됨 | 해당 없음 |
최고 높이 도달 | 해당 없음 |
건물 유형 | 해당 없음 |
건축 양식 | 클래식 산업 양식 |
재료 | 콘크리트 및 강철 |
분류 | 해당 없음 |
고도 | 해당 없음 |
이름의 유래 | 해당 없음 |
기공 날짜 | 해당 없음 |
착공 날짜 | 해당 없음 |
중단 날짜 | 해당 없음 |
예상 완공 날짜 | 해당 없음 |
완공 날짜 | 1938년 5월 26일 |
개장 날짜 | 1938년 5월 26일 |
폐쇄 날짜 | 해당 없음 |
파괴 날짜 | 해당 없음 |
해체 날짜 | 해당 없음 |
비용 | 4천만 달러 (2019년 기준 8억 6700만 달러) |
리모델링 비용 | 해당 없음 |
고객 | 해당 없음 |
소유주 | 폭스바겐 |
소속 | 해당 없음 |
높이 | 92m (가장 높은 굴뚝 높이) |
건축 높이 | 해당 없음 |
구조 시스템 | 해당 없음 |
크기 | 해당 없음 |
층수 | 해당 없음 |
바닥 면적 | 650만 m² |
엘리베이터 수 | 해당 없음 |
부지 면적 | 해당 없음 |
건축가 | 해당 없음 |
건축 회사 | 해당 없음 |
개발자 | 해당 없음 |
엔지니어 | 해당 없음 |
알려진 점 | 해당 없음 |
웹사이트 | 해당 없음 |
포함 | 해당 없음 |
내장 | 해당 없음 |
참고 자료 | 해당 없음 |
각주 | 해당 없음 |
2. 역사
폭스바겐 볼프스부르크 공장은 아돌프 히틀러가 구상한 '국민차'(Volkswagen|폭스바겐de) 생산을 목표로 계획되었다. 1934년 페르디난트 포르셰와 계약 후 나치 조직 "기쁨을 통한 힘"(KdF) 주도로 설립이 추진되었으나 초기에는 독일 자동차 업계의 참여가 저조했다.[5] 결국 독일노동전선(DAF)이 주도하여 1937년 "독일 폭스바겐 준비 협회"를 설립하고, 강제 편입된 노동조합 자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6]
1938년, 현재의 볼프스부르크에 교통 및 군사적 이점을 고려하여 공장 부지가 선정되었고[7], 같은 해 히틀러 참석 하에 기공식이 열렸다.[7]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민간용 차량 생산 계획은 중단되고, 공장은 국방군과 친위대를 위한 군용 차량 및 군수품 생산 기지로 전환되었다.[9] 이 과정에서 약 2만 명의 전쟁 포로 및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동원되었으며, 관련 수용소도 운영되었다. 공장은 전쟁 중 연합군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종전 시 주요 설비는 보존되었다.[10]
1945년 종전 후 공장은 영국 군정 관리 하에 들어갔고, 아이반 허스트 소령의 지휘로 영국군 차량 수리와 비틀 생산이 재개되었다. 점차 생산량이 회복되었으며, 같은 해 첫 노사 협의회가 선출되고 이후 노동자의 공동 결정권을 보장하는 협약이 체결되는 등[11] 전후 노동 환경 개선의 기틀이 마련되었다.[12]
1948년 하인리히 노르트호프가 경영을 맡은 이후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1949년 서독 연방 정부와 니더작센 주 관리 하에 놓였고, 1955년에는 100만 번째 비틀 생산을 달성했다. 1950년대 폭스바겐 트랜스포터 생산 시작과 함께 공장이 확장되었으나, 부지 한계로 트랜스포터 생산은 1956년 하노버 공장으로, 부품 가공 시설은 1958년 카셀 공장으로 이전되었다. 1959년에는 행정 타워가 완공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이탈리아 등지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유치했으며, 1960년대 후반에는 에라-레시엔 시험장을 건설하고 1970년대 초 기술 개발 센터 등 기반 시설을 확충했다.
1974년 비틀 생산이 종료되고 후속 모델인 골프 생산이 시작되었다.[13] 1980년대에는 자동화 공정을 도입했으며, 1999년에는 공장 내 강제 노동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2000년 자동차 테마파크 아우토슈타트가 개장했고, 2001년 누적 생산 33,333,333대[14], 2007년 골프 누적 생산 2,500만 대를 돌파했다.
코로나19로 생산 차질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는 전기차 전환을 준비하며 차세대 모델인 트리니티 프로젝트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2026년 시작 예정).[15]
2. 1. 설립 이전 (1934년 ~ 1938년)
아돌프 히틀러가 대중을 위해 요구한 자동차, 즉 '국민차'(폭스바겐de, VW) 생산을 위한 공장 설립의 기초는 1934년 6월 22일 독일 자동차 산업 연합과 페르디난트 포르셰의 슈투트가르트 설계 사무소 간에 체결된 계약에서 시작되었다. 나치 조직인 "기쁨을 통한 힘의 공동체"(KdF)가 생산 시설 부지 선정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당시 독일 자동차 산업계는 아돌프 히틀러가 요구한 판매 가격 990 RM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하여 폭스바겐 생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5]이에 따라 독일노동전선(DAF)이 유럽 최대 규모의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DAF 국장 로베르트 레이의 감독 아래, 1937년 5월 28일 베를린에 본사를 둔 "독일 폭스바겐 준비 유한책임회사"(Gesellschaft zur Vorbereitung des Deutschen Volkswagens mbHde, Gezuvor)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생산 예정 제품은 "KdF 자동차"였다. 폭스바겐 유한책임회사(VW GmbH)의 예정된 전무 이사였던 보도 라페렌츠(Bodo Lafferentz)는 공장 건설 및 운영 자금으로 최소 2억 RM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자금 조달을 위해 독일노동은행(Arbeitsbank)은 1937년에 5천만 RM의 대출을 제공했고, DAF 자체 보험 회사는 1939년에 3천만 RM 이상의 대출을 추가로 제공했다. 또 다른 주요 자금원은 1937년 12월 9일에 발효된 법률을 통해 마련되었는데, 이 법은 1933년 나치 정권이 강제로 해산시킨 노동조합의 자산을 DAF가 처분할 수 있도록 합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DAF는 이렇게 확보한 이전 노동조합 소유 재산을 매각하여 약 1억 RM에 달하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6] 이 외에도 "KdF 저축자"(KdF-Sparer)들의 자금도 동원되었다.
한편, 새로 설립된 폭스바겐 유한책임회사(VW GmbH)의 총괄 관리자가 된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미국으로 연구 여행을 떠나 헨리 포드가 성공시킨 조립 라인 생산 방식과 같은 현대적인 대량 생산 기술을 연구했다.[7]
2. 2. 공장 설립과 위치 (1938년 ~ 1939년)
1938년, 6개월간의 부지 탐색 끝에 폭스바겐 공장을 설립할 위치가 결정되었다. 선정된 곳은 새로 건설될 '폴러스레벤 인근 KdF-Wagen 도시'로, 1945년부터는 볼프스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도시는 1930년대 말부터 공장과 함께 계획되어 건설되었다. 공장 부지는 미텔란트 운하와 알러강의 빙하 계곡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도 라페렌츠가 폴러스레벤과 볼프스부르크 성 근처의 인구 밀도가 낮은 시골 지역을 답사하던 중 거의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이전에는 Schulenburgsche Gutshof|슐렌베르기셰 구트호프de 영지가 있던 자리였다.이 부지는 당시 독일의 거의 중앙에 위치했으며, 다음과 같은 편리한 교통망을 갖추고 있었다.
- 미텔란트 운하 이용 가능
- 베를린과 하노버를 잇는 Reichsautobahn (오늘날의 연방 고속도로 2) 인접
- 베를린-루르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철도 노선(베를린-레르터 철도) 통과
- 산업 도시인 잘츠기터 및 브라운슈바이크와의 가까운 거리
이러한 지리적 이점 외에도 군사적인 고려 사항이 있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공장이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적의 공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7]
공장 시설 건설은 세 건축가 팀에게 공동으로 위임되었다. 쾰른의 에밀 루돌프 메베스, 에센-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한 프리츠 슈프와 마르틴 크렘머, 그리고 가게나우의 카를 콜베커가 참여했다. 이들은 미텔란트 운하 북쪽 둑을 따라 약 1.3km 길이에 달하는 공장 전면부와 열병합 발전소를 설계했으며[8], 운하 남쪽에는 새로운 도시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1938년 5월 26일, 히틀러가 참석한 가운데 공장 기공식이 열렸다. 이 행사에는 약 7만 명의 관중과 나치 사회주의 조직이 동원되어 대규모로 치러졌다. 사실 건설 작업은 기공식 1년 전부터 이미 수천 명의 노동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7] 또한, 공장이 완공되기도 전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KdF 자동차 구매를 위한 저축 계약에 이미 가입한 상태였다.
1939년 가을 무렵, 생산 홀의 골조 공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준비로 인해 KdF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특수 공작 기계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연간 15만 대 생산이라는 당초 계획은 시작부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생산에 필요한 강철은 주로 인근 잘츠기터에 새로 설립된 국영 제철소인 헤르만 괴링 공장에서 공급받을 예정이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1939년 ~ 1945년)
1930년대 말 생산이 시작되었으며, 당시 공장장은 포르쉐의 사위인 오스트리아 변호사 안톤 피에히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민간 물품 생산은 중단되고,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를 위한 군수품 생산이 중심이 되었다. 1940년 8월부터 1945년 4월까지 50,788대의 폭스바겐 퀴벨바겐과 14,276대의 폭스바겐 슈빔바겐 (166형)이 생산되었다. 슈빔바겐 생산은 1942년 가을부터 1944년 8월 초 마지막 공습으로 중요 차체 프레스가 파괴되면서 중단되었다.[9] 또한, 홀 I의 지하 "비밀 부서"에서는 V-1 비행 폭탄이 제조되었고, 루프트바페의 융커스 Ju 88 항공기 수리를 위한 날개, 방향타, 객실 등 부품도 생산했다.전쟁 기간 동안 약 20,000명의 전쟁 포로와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폭스바겐 공장에서 무기 생산을 위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이를 위해 1942년 4월 8일부터 10월 11일까지는 건설 작업을 위한 아르바이트스도르프 강제 수용소가 운영되었고, 라아그베르크 분소는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다.
"팔러슬레벤 근처의 국민차 공장"으로 불리던 이곳은 1944년 한 해 동안 4월 8일과 29일, 6월 20일과 29일, 8월 5일 등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다. 마지막 공습으로 프레스 8대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50대의 기계 공구와 생산 기계가 파괴되었다. 1945년 4월 10일, 독일 국방군을 위한 마지막 퀴벨바겐 50대가 생산된 후, 다음 날인 4월 11일 미 육군 부대가 공장을 점령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공장 건물의 20%가 파괴되었지만, 기계 설비의 93%는 여전히 사용 가능한 상태였다.[10]
2. 4. 종전 이후 (1945년 ~ 1974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영국 군정은 아이반 허스트 소령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공장 운영을 재개했다. 영국 점령군 정비공들은 이곳에 '볼프스부르크 모터 공장'을 설립하여 전쟁 중 파손된 차량들을 수리하는 데 활용했다. 동시에 KdF 차량의 생산이 재개되었고, 이 차량은 이후 폭스바겐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당시 공장에는 약 6,000명의 인력이 있었는데, 절반은 차량 생산에 투입되었고 나머지 절반의 인력은 전쟁으로 인한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영국은 초기에 생산된 폭스바겐 차량 몇 대를 평가 목적으로 본국으로 보냈으나, 영국의 자동차 전문가들은 해당 차량이 기술적 요구 사항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공장 철거를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볼프스부르크 지역에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영국 군정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공장을 부분적으로나마 가동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45년 한 해 동안 약 2,000대의 폭스바겐 차량이 수작업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듬해인 1946년에는 생산량이 약 10,000대로 증가했다. 다만, 초기에 생산된 20,000대의 차량은 연합국 당국에 우선적으로 공급되었다.전후 혼란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45년 11월 27일,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는 최초의 노사 협의회가 선출되었다. 이는 노동자들이 공장 운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1947년 5월 10일에는 노사 협의회의 공동 결정 권한을 명시하는 노사 협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11] 이 협약은 고용 및 해고, 부서 이동, 임금 및 급여 문제, 공장 운영 방식 변경 등 주요 사안에 대해 노사가 함께 결정하도록 규정했다. 이러한 협약은 1946년 하노버에서 발생했던 보데 탱크 공장 파업 이후 니더작센 주 금속 산업 전반에 걸쳐 체결된 40여 개의 유사한 협약 중 하나였다.[12] 1948년에는 독일 최대의 산업별 노동조합인 IG Metall이 폭스바겐과 최초의 단체 협약을 체결했으며,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폭스바겐만의 독자적인 단체 협약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볼프스부르크 폭스바겐 공장 노동자의 95% 이상이 IG Metall 조합원이며, 이 단체 협약의 적용을 받고 있다.
1948년 1월, 영국 군정은 공장 관리 책임을 하인리히 노르트호프에게 이관했다. 이듬해인 1949년에는 서독 연방 정부가 볼프스부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에 위치한 두 폭스바겐 공장의 신탁 관리자가 되었다. 당시 포드의 헨리 포드 2세가 공장 인수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절하면서, 최종적으로 니더작센 주 정부가 공장의 감독권을 인수하게 되었다. 노르트호프의 지휘 아래 폭스바겐의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하여, 1955년에는 100만 번째 비틀이 생산되는 기념비적인 성과를 달성했다.
1950년에는 VW 트랜스포터 (Type 2) 모델의 생산이 볼프스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트랜스포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공장은 지속적으로 확장되었지만, 1950년대 중반에 이르자 볼프스부르크 부지 내에서의 추가 확장이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새로운 생산 기지를 물색하게 되었고, 트랜스포터 생산 라인은 1956년 새로 건설된 하노버 공장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1958년 여름에는 조립 부품 가공 시설이 카셀 공장으로 이전되었다. 한편, 볼프스부르크 공장 내에는 1957년부터 1959년까지 13층 높이의 벽돌 건물인 폭스바겐 행정 타워가 건설되었으며, 이 건물은 2013년까지 폭스바겐 그룹의 본사로 사용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면서 동서독 간의 인력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전까지 동독 출신 노동자들이 중요한 인력 공급원 역할을 했으나, 장벽 건설로 인해 이들의 유입이 중단되자 폭스바겐은 노동력 부족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로부터 외국인 노동자, 소위 '가스트아르바이터'(Gastarbeiter|가스트아르바이터de)를 적극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1962년 1월 17일, 첫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볼프스부르크 기차역에 도착했으며, 회사는 공장 동쪽에 이들을 위한 막사 형태의 숙소를 마련했다. 이 숙소는 '이탈리아 마을'(Italienerdorf|이탈리에너도르프de)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생활 조건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결국 1963년에는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나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경찰이 개입하는 등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장의 기반 시설 역시 꾸준히 확충되었다. 1966년에는 철도 선로와 미텔란트 운하 아래를 통과하여 공장 부지로 직접 연결되는 두 개의 보행자 터널이 개통되어 직원들의 출퇴근 편의성을 높였다. 또한, 자동차 모델이 다양해지고 시험 주행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기존의 시험 시설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1967년부터 1968년까지 공장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대규모 에라-레시엔 시험장을 건설했다.
1971년에는 현재 기술 개발(TE, Technische Entwicklung|테히니셰 엔트비클룽de) 부서가 사용하는 고층 건물이 완공되었으며, 1972년에는 공장 남쪽 도로(Südstrasse|쥐트슈트라세de) 변에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건강 센터가 새로 문을 열어 직원들의 복지 향상에 기여했다.
2. 5. 1974년 이후
1974년 7월 1일, 본 공장에서 1,190만 대가 넘는[13] 마지막 비틀이 볼프스부르크 생산 라인에서 생산되었고, 골프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1981년 6월 9일에는 연방 고용청장 요제프 슈팅글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교육 센터가 문을 열었다. 1982년에는 산업용 로봇을 갖춘 고도로 자동화된 54번 홀이 가동되었다. 1995년 8월 25일, 록 밴드 롤링 스톤스의 콘서트가 동부 공장 주차장에서 열렸으며, 약 10만 명이 참석했다. 1999년에는 폭스바겐 공장 부지에 강제 노동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폭스바겐 그룹은 엑스포 2000을 위해 2000년 6월 아우토슈타트를 개장했다.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생산된 33,333,333번째 자동차가 2001년 11월 26일에 생산 라인에서 나왔다.[14] 2007년 6월 3일, 폭스바겐은 2,500만 대의 골프 생산을 기념하는 대규모 파티를 열었다. 2016년, VW 행정 타워는 Markenhochhaus|마르켄호흐하우스de (브랜드 타워)라는 이름으로 폭스바겐 브랜드 본사로 재개장했다.
코로나19 제한으로 특징지어진 2020년에는 볼프스부르크에서 50만 대가 조금 안 되는 자동차만 생산되었고, 2021년 첫 3분기에도 공장 가동률이 낮았다. 많은 직원이 단축 근무를 했다. 2020년 6월, 독일에서 전기 자동차 구매 보조금이 인상되었으며, 이는 수요 변화에 기여했다. 트리니티 전기차 프로젝트는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생산될 예정이며, 생산은 2026년에 시작될 예정이다.[15]
3. 역대 공장장
wikitext
이름 | 재임 기간 |
---|---|
오토 딕호프 | 1939–1941 |
안톤 피에히 | 1941–1945 |
루돌프 브뢰르만 | 1945–1946 |
카를 훌란트 | 1946–1947 |
빌헬름 슈타인마이어 | 1947–1959 |
오토 횔네 | 1959–1971 |
귄터 하르트비히 | 1971–1972 |
헬무트 암텐브링크 | 1972–1988 |
폴커 바이스게르버 | 1989–1991 |
한스-위르겐 리디크 | 1992–1995 |
한스-요아힘 파울 | 1995–1996 |
게랄트 베버 | 1996–1998 |
베르너 노이바우어 | 1999–2004 |
디트마어 코르체크바 | 2004–2007 |
지크프리트 피비히 | 2007–2014 |
옌스 헤르만 | 2014–2016 |
슈테판 로트 | 2016–2020 |
라이너 페셀 | 2021년~ |
4. 생산 차종
(내용 없음)
4. 1. 현재 생산 차종
참조
[1]
웹사이트
WebContent Anzeige (Facettensuche) - volkswagen-media-services.com
https://www.volkswag[...]
[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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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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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웹사이트
Vorlage:Inflation
https://de.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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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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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stein Verlag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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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popularm[...]
201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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