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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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활호는 한국 전쟁 중인 1953년 대한민국 공군기술학교에서 개발된 국산 경비행기이다. 27명의 제작 요원들이 참여하여, 기존 항공기 부품과 자체 설계 및 제작을 통해 1953년 10월 10일 완성되었다. 꼬리바퀴식 항공기이나 꼬리바퀴가 2개인 점이 특징이며, 수상기로도 활용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부활'이라는 휘호를 하사받았으며, 이후 실종되었다가 2004년 발견되어 복원되었다.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20년에는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지정되었다. 복원기 외에도 개량복원기, 모형 등으로 제작되어 전시 및 활용되고 있으며,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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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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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명칭 | 부활호 |
용도 | 연습기 정찰기 연락기 |
설계자 | 이원복 |
제작자 | 대한민국 공군 (원형기) |
운용자 | 대한민국 공군 |
첫 비행일 | 1953년 10월 11일 (원형기) |
생산 수량 | 3기 |
운용 상황 | 퇴역 (원형기) |
문화재 지정 번호 | 411 |
문화재 지정일 | 2008년 10월 1일 |
문화재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공군사관학교 내 |
제작 시기 | 1953년 10월 |
문화재청 번호 | 79,04110000,33 |
항공기 정보 | |
![]() | |
기종 | 연락기 정찰기 훈련기 |
원산국 | 대한민국 |
제조 | 대한민국 공군 기술학교 (원형기) 대한민국 공군 제81항공정비창 (복원기) 경남테크노파크, 경상대학교, 수성기체산업 (개량복원기) |
첫 비행 | 1953년 10월 11일 (원형기) 2011년 6월 20일 (개량복원기) |
도입 | 1953년 |
은퇴 | 대한민국 공군: 1960년 (추정) 한국항공대학: 1967년 (추정) |
현황 | 원형기/복원기: 1대 (국립공군박물관 전시 중) 개량복원기: 2대 (1대는 경남테크노파크 항공우주센터 보유 중, 1대는 사천시청에 전시 중) |
주요 사용자 | 대한민국 공군 경상남도 사천시 |
생산 시기 | 1953년, 2011년 |
생산 대수 | 1대 (원형기/복원기) 2대 (개량복원기) |
사업 비용 | 10억 원 (개량복원기) |
웹사이트 | 국립공군박물관 |
기타 | 수상기로 개조 가능 |
2. 개발
한국 전쟁 중이던 1953년 6월, 대한민국 공군은 자체적인 항공기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공군기술학교(현 공군군수1학교) 교장 김성태(金成泰) 대령의 지시에 따라[7], 이원복(李元馥) 소령[8]을 중심으로 한 제작팀[9]과 일부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 학생[10]들이 참여했다. 개발 목적은 기술 연구 및 연락기, 관측기 활용 등이었다.[7][11]
개발 작업은 공군사천기지의 격납고에서 이루어졌다. 열악한 산업 기반 속에서 기존 항공기 부품, 잉여 자재, 미군 군사고문단의 협조[12] 등으로 자원을 조달했으며, 일부 부품은 기존 연락기(L-4, L-5, L-16 등)의 것을 활용하고 동체 등은 자체 제작했다.[1]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개발팀은 1953년 10월 10일, 대한민국 공군 주도로 설계부터 제작까지 완료한 첫 항공기인 부활호 1호기를 완성했다.[1] 완성된 항공기는 이중 꼬리바퀴, 수상기 전환 가능 구조, 전단 살포 등을 위한 투하창 설치 등의 특징을 가졌다.[1] 기체 번호 '1007호'는 한국 전쟁 중 전사한 조종사 천봉식(千奉植) 중위를 기리는 의미가 담겼다.[13][1]
1953년 10월 11일 시험 비행 후 대구 동명비행장에서 공군 지휘부 시찰 및 김신 작전국장의 평가 비행이 있었다.[1] 1954년 4월 3일 공군김해기지 명명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부활(復活)' 휘호를 하사했으며,[14][1] 이는 국가 재건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이날 개발 공로자 포상도 이루어졌다.[1]
2. 1. 개발 배경 및 초기 설계
한국 전쟁 중이던 1953년 6월, 당시 '''공군기술학교'''(현 공군군수1학교) 교장 김성태(金成泰) 대령은 기술학교 장병과 훈련생들의 항공 기술 관련 실험 및 연구 목적으로 경비행기 설계를 지시했다.[7] 이 임무는 공군기술학교 정비교육대 정비과장 '''이원복'''(李元馥) 소령[8]을 중심으로 교관, 조교 등 27명의 제작요원이 맡았다. 제작팀은 해방 이후 정규 항공공학 교육을 받은 인력, 일제강점기 민간항공 및 일본군 경력자, 대한민국 공군 창설 후 양성된 기술 병력 등 다양한 배경을 가졌다.[9] 서울대학교 조선항공학과 4학년 학생들도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명단은 확인되지 않았다.[10]개발은 1953년 6월 이후 본격화된 것으로 보이며, 초기 프로젝트 명칭은 '''국산기 신형 비행기'''였다. 개발 과정 사진에서 확인된 설계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다.

개발은 '''공군사천기지'''의 한 격납고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항공산업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기지 내 기존 항공기 부품, 잉여 자재, 또는 미 제6146공군군사고문단(6146th Air Force Advisory Group)의 협조로 구한 부품을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12] 제작 기간 단축을 위해 기본적인 기자재를 최대한 활용했으며, 엔진, 프로펠러, 착륙장치, 계기 등은 기존 L-4, L-5, L-16 연락기의 것을 사용했다. 동체와 날개 등 기체 구조물은 군사원조로 공급된 알루미늄 합금 골격재와 판재를 사용하여 자체적으로 설계 및 제작했으며, 조종석 일부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연구개발 환경이 미비하여 개략설계 후 현장맞춤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제작팀은 1953년 10월 10일 기체를 완성했다.
완성된 부활호는 꼬리바퀴식(tail-dragger) 항공기였으나, 일반적인 항공기와 달리 꼬리바퀴가 2개이고 동체 중간 아래쪽에 설치된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이는 지상 활주 시 기수 높이를 낮춰 전방 시야를 개선하기 위한 설계였다.
또한,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주 바퀴다리 대신 부주(float)를 장착하여 수상기로 전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때 2개의 꼬리바퀴는 부주를 고정하는 하드포인트 역할을 했다. 동체 뒤쪽에는 전단지 살포나 사진 촬영을 위한 투명한 여닫이식 투하창이 설치되었다. 엔진은 85마력의 컨티넨탈(Continental) O-190-1(C85-8FJ)을 사용했다.
기체 번호는 1호기가 아닌 '''1007호'''가 부여되었는데, 이는 1950년 9월 1일 의성 전투에서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전사한 조종사 천봉식(千奉植) 중위[13]의 성 '천(千)'과 발음이 같은 숫자 1,000에 행운의 숫자 7을 더한 것이다. 기체 완성 다음 날인 1953년 10월 11일, 민영락(閔泳洛) 소령이 조종하고 이원복 소령이 동승하여 첫 시험 비행을 실시했다. 이후 부활호는 대구 동명비행장으로 옮겨져 최용덕 당시 공군참모총장 등 지휘부의 시찰을 받았으며, 이때 김신 작전국장이 평가를 위해 시승하기도 하였다.
2. 2. 제작 과정
한국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당시 대한민국 공군 기술학교(지금의 공군군수1학교) 교장 김성태(金成泰) 대령은 학교 내 정비교육대에 경비행기 설계를 지시했다.[7] 이는 당시 기술학교에 근무하던 장병들과 교육생들의 항공 기술 관련 실험 및 연구를 위한 목적이었다. 이 임무를 위해 공군기술학교 정비교육대 정비과장 이원복(李元馥) 소령[8]을 중심으로 교관, 조교 등 27명의 제작요원이 투입되었다. 제작요원들은 해방 이후 정식으로 항공공학을 배운 전공자, 일제강점기 민간항공 및 일본군 경력자, 공군 창설 후 양성된 기술 병력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9]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 4학년 학생들도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나[10] 정확한 명단은 확인되지 않았다.개발은 김성태 대령의 지시가 있었던 1953년 6월 이후 본격화된 것으로 보이며, 프로젝트 이름은 '''국산기 신형 비행기'''였다. 개발 과정 사진에서 확인된 설계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다.
개발 작업은 공군사천기지의 한 격납고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항공산업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부품은 기지 내 기존 항공기에서 가져오거나 잉여 자재를 활용했으며, 미 제6146공군군사고문단의 협력을 통해 조달하기도 했다.[12] 개발 기간 단축을 위해 엔진, 프로펠러, 착륙장치, 계기 등 주요 부품은 기존의 L-4, L-5, L-16 연락기의 것을 사용하고, 동체와 날개 등 기체 구조물은 자체적으로 설계 및 제작했다.
군사원조로 공급된 알루미늄 합금 골격재와 판재를 사용했으며, 조종석 일부는 나무로 제작되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개략적인 설계 후 현장에서 맞춰가며 제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제작팀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1953년 10월 10일 기체를 완성했다.[1]
완성된 부활호는 꼬리바퀴식(tail-dragger) 항공기였으나, 일반적인 항공기와 달리 꼬리바퀴가 2개이며 동체 중간 아래쪽에 설치된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이는 지상 활주 시 기수 각도를 낮춰 전방 시야를 개선하기 위한 설계였다. 또한,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주 바퀴를 떼어내고 부주(float)를 장착해 수상기로 전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때 2개의 꼬리바퀴는 부주를 고정하는 하드포인트 역할을 했다. 동체 뒤쪽에는 삐라 살포나 사진 촬영을 위한 투명한 투하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엔진은 85마력의 컨티넨탈 O-190-1(C85-8FJ)이 장착되었다. 기체 번호는 1호기가 아닌 '''1007호'''로 부여되었는데, 이는 1950년 9월 1일 의성 전투에서 전사한 공군 최초의 전사 조종사 천봉식(千奉植) 중위[13]의 성 '천(千)'과 발음이 같은 숫자 1,000에 행운의 숫자 7을 더한 것이다.
시험 비행은 기체 완성 다음 날인 1953년 10월 11일에 실시되었다. 민영락(閔泳洛) 소령이 조종을 맡고 개발 책임자인 이원복 소령이 후방석에 동승하여 오전 10시경 비행을 시작, 약 2시간 동안 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공군본부 지시에 따라 대구 동명비행장으로 옮겨져 최용덕 당시 공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지휘부의 시찰을 받았으며, 평가를 위해 김신 작전국장이 직접 시승하기도 했다.
1954년 4월 3일, 공군김해기지에서 부활호 명명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復活'''(부활)이라는 휘호를 친필로 하사했다. '부활'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의미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1] 명명식에서는 개발 공로자들에 대한 표창 수여와 시험 비행 재현도 이루어졌다. 제작에 참여한 장병들에게는 「공본일반명령 제10호」에 의거하여 화랑무공훈장(은성)이 수여되었는데, 표창장 명단에는 제작요원 27명 전원이 포함되었으나 훈장은 장교를 제외한 사병들에게만 수여되었다. 명명식에는 함태영 부통령(이승만 대통령 대리), 손원일 국방부장관, 이형근 합동참모의장, 최용덕 공군참모총장, 박옥규 해군참모총장, 김석범 해병대사령관, 김신 작전국장 등 군 고위 인사들과 미군 고급참모들이 참석했다.[15][16]
계급 | 성명 | 훈장(은성화랑무공훈장) 수여 여부 |
---|---|---|
중령 | 김석환(金石桓) | 수여받지 못함 |
소령 | 김용배(金容培) | |
소령 | 이원복(李元復) | |
소령 | 김우석(金尤錫) | |
대위 | 이희명(李熙明) | |
중위 | 임달연(林達淵) | |
중위 | 이건호(李健浩) | |
일등상사 | 김정혁(金鼎赫) | 수여받음 |
일등상사 | 전형규(田亨奎) | |
일등중사 | 문용호(文龍浩) | |
일등중사 | 이현재(李玄宰) | |
일등중사 | 류일선(柳日善) | |
이등중사 | 고명식(高明植) | |
이등중사 | 정기효(鄭竒孝) | |
일등중사 | 이영수(李英洙) | |
일등중사 | 오영교(吳永敎) | |
이등중사 | 이경완(李慶完) | |
이등중사 | 지수홍(池壽泓) | |
이등중사 | 김부환(金富煥) | |
이등중사 | 박두원(朴斗源) | |
이등중사 | 손재하(孫在夏) | |
이등중사 | 박노정(朴魯正) | |
이등중사 | 어한우(魚韓愚) | |
이등중사 | 이기웅(李起雄) | |
하사 | 고재일(高在一) | |
하사 | 조경구(趙璟九) | |
하사 | 서성수(徐晟洙) |
2. 3. 시험 비행 및 명명식
완성된 부활호는 꼬리바퀴식 항공기였는데, 보통의 꼬리바퀴식 항공기와 달리 꼬리바퀴가 2개이며 동체 중간 아래쪽에 설치된 점이 특징이다.[1][2] 이는 지상 활주 시 기수를 낮춰 전방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설계였다.[1] 또한,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수상기로도 운용할 수 있도록 주 바퀴다리의 바퀴를 떼어내고 부주(float)를 장착할 수 있었다.[1][2] 이때 2개의 꼬리바퀴는 부주를 고정하기 위한 하드포인트 역할을 했다.[1] 동체 뒤쪽에는 전단 살포나 사진 촬영을 위한 투명한 여닫이식 투하창이 설치되었다.[1][2] 엔진은 출력 85마력의 컨티넨털(Continental) O-190-1(C85-8FJ)이 사용되었다.[1][2] 기체 번호는 1호기가 아닌 '''1007호'''가 부여되었는데, 이는 1950년 9월 1일 의성 전투에서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적기에 피격되어 전사한 조종사 천봉식(千奉植) 중위[13]의 성 '천(千)'과 발음이 같은 숫자 1,000에 행운의 숫자 7을 더한 것이다.[1][2]부활호의 시험 비행은 기체 완성 다음 날인 1953년 10월 11일에 이루어졌다.[1][2] 조종은 민영락(閔泳洛) 소령이 맡았고, 개발 책임자였던 이원복(李元馥) 소령이 후방석에 동승하여 오전 10시경 비행을 시작했다.[1][2] 이때 부활호는 약 2시간 동안 1300m 고도까지 비행했다고 알려져 있다.[2] 그러나 이 비행이 부활호의 공식적인 초도 비행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 이후 공군본부의 지시로 부활호는 대구 동명비행장으로 공수되어 최용덕 제2대 공군총참모장을 비롯한 공군 지휘부의 시찰을 받았다.[1][2] 이때 성능 평가를 위해 김신 작전국장이 직접 시승하기도 하였다.[1][2]
1954년 4월 3일, '''공군김해기지''' 내 공군기술학교에서[14][2] 부활호의 명명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부활(復活)'이라는 휘호를 친필로 하사하였다.[1][2] 이 이름에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부활을 염원하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해석되나,[2] 휘호가 갖는 정확한 의미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1] 명명식에서는 개발 공로자들에 대한 표창장 수여와 시험 비행 재현도 이루어졌다.[1][2] 개발에 참여한 장병들에게는 「공본일반명령 제10호」에 의거하여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는데, 표창장 명단에는 제작요원 27명 전원이 포함되었으나 훈장은 장교들을 제외한 사병들에게만 수여되었다는 특이점이 있다.[1] 명명식에는 부통령 함태영 (이승만 대통령 대리), 국방부장관 손원일, 합동참모의장 이형근 대장, 공군참모총장 최용덕 중장, 해군참모총장 박옥규 중장, 해병대사령관 김석범 중장, 작전국장 김신 준장 등 각군 주요 인사와 미군 고급참모들이 참석하였다.[15][16]
부활호는 단 1대만 제작되었으며, 1960년까지 공군기술학교에서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7] 1960년 10월, 공군 김해기지(공군기술교육단)에서 폐기 처분될 뻔했으나 대구시 대명동에 있던 '''한국항공대학교'''[18]로 이관(기증)되어 교육 실습용으로 사용되었다.[19][20][2][3] 이 학교는 1963년 한국항공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66년 2월 28일 폐교했다.[21] 1967년 3월 2일 같은 자리에 '''경상공업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21][4] 부활호는 학교 측에 의해 분해되어 심각하게 훼손되었고,[22] 이후 수십 년간 창고에 방치된 채 잊혔다. 부활호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1980년대 중엽 이후 항공우주 과학자들과 국방과학기술자 등의 저술을 통해 조금씩 언급되는 정도였다.[23]
3. 실종 및 발굴
한편 부활호 제작을 지휘했던 이원복은 1955년 3월까지 미 공군 기술학교에서 1년간 정비관리 연수를 받았다. 그는 귀국 직후 부활호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주한 미군 군사고문단이 시험평가를 위해 미국으로 가져갔다는 소문, 세스나 사가 인수하여 O-2 설계에 참고했다는 소문 등을 접하고 세스나 사에 알아보았으나 확인하지는 못했다. 1999년에는 대한민국 공군이 남아있던 사진과 제원, 이원복의 증언을 토대로 부활호를 실물과 비슷하게 복원하여 3월 25일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하기도 했다.[24][5]
2003년 12월,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 성공 100주년을 맞아 한국 항공 역사를 취재하던 중앙일보 심재우 기자가 이원복과 연락이 닿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2003년 12월 17일 중앙일보에 부활호를 찾는다는 기사[25]가 실렸고, 1974년까지 경상공업고등학교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던 이방치 씨로부터 경상공업고등학교 창고에 비행기가 보관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마침내 2004년 1월 13일, 이원복과 부활호 제작 당시 판금 작업을 맡았던 '''문용호'''(文龍浩, 당시 일등중사)가 경상공업고등학교 제도실 건물 지하창고에서 부활호를 발견했다. 발견 당시 부활호는 외피가 거의 없는 뼈대 상태였고 날개, 엔진, 프로펠러 등 주요 부품이 모두 사라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기수(카울링) 측면에 남은 친필 휘호가 반쯤 벗겨진 채 남아 있어 부활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2층 창고에서 프로펠러도 발견되었다.
부활호 발견 사실은 2004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대한민국 공군 내부에서 부활호의 회수 및 복원에 대한 검토와 계획이 이루어지게 된다. 발견된 동체는 재활용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복원 작업에 들어갔으며, 복원은 이미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 중인 모형을 만들었던 '''제81항공정비창''' 소속 정비사들로 이루어진 복원전담팀이 맡게 되었다. 이 전담팀의 인원은 부활호를 최초로 제작한 공군 측 제작요원과 동일한 27명으로 구성되었다. 2004년 6월 9일, 이원복과 문용호가 참관한 가운데 81창 소속 정비사들이 기체 손상을 막기 위해 중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인력만으로 부활호를 지하창고에서 꺼냈다.
4. 복원
부활호는 2004년 발견 이후 제작자의 복구 및 비행 희망에 따라 복원이 추진되었다.[26] 발견 당시 수십 년간 방치되어 훼손 상태가 심각했으나, 대한민국 공군은 원형기 기골을 사용하여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27]
복원 작업은 2004년 6월 9일 경상공업고등학교에서 기체를 공군 제81항공정비창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설계도가 없어 남은 기골을 바탕으로 역설계를 진행했고, 제작자 이원복과 문용호의 도움으로 200여 장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부품은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엔진 등 필요한 부품은 미국 등지에서 수소문하여 확보하거나 기증받았다. 2004년 10월 6일에는 지상 시동 점검이 이루어졌다.[28] 다만, 복원 과정에서 예산, 기간, 사전 연구 부족 등의 한계로 원형기와 일부 차이가 발생하기도 했다.[29]
복원은 2004년 10월 말 완료되었고, 기념행사는 같은 해 10월 22일 제81항공정비창 주기장에서 열렸다. 이날 부활호는 비행 대신 대한민국 최초 양산형 항공기인 KT-1과 함께 지상 활주를 했다.[30][6] 행사에는 설계자 이원복,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등이 참석했으나, 부활호 제작과 복원의 주요 인물이었던 문용호는 행사 전 별세하여 참석하지 못했다.[31]
이후 부활호는 2008년 10월 1일 등록문화재 제411호로 지정되었고, 2020년 7월 1일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의해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산업기술-4(2020)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10월 23일에는 설계자 이원복의 흉상 제막식이 사천항공우주박물관에서 열렸다.
4. 1. 복원 과정
부활호는 발견 이후 곧바로 복원이 추진되었다. 공군의 문건에 따르면, 이는 부활호 제작자가 복구 및 비행을 희망했기 때문이었다.[26] 발견 당시 부활호는 수십 년 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훼손 상태가 심각했다. 이 때문에 공군군수사령부는 남아있는 기골을 활용한 비행 가능한 복원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공군은 원형기의 기골을 사용하여 복원하기로 최종 결정했다.[27]
복원 작업은 2004년 6월 9일, 부활호 기골이 경상공업고등학교로부터 제81항공정비창으로 옮겨진 직후 시작되었다. 동체 옆면에 쓰인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 '復活(부활)'이 지워질 것을 염려하여 미리 글자 모양을 본떠 둔 뒤, 뼈대의 녹을 제거하고 비파괴검사를 수행했다. 설계도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 치수는 남아있는 기골을 바탕으로 역설계 방식으로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설계자 이원복과 기술자 문용호의 도움을 받아 200장이 넘는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각 부품은 제작 전 종이로 모형을 만들어 실험하고 검증했으며, 기체 제작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을 따랐다. 다만, 친필 휘호와 기체 번호는 컴퓨터를 이용해 자료 사진과 비교하며 훼손된 글자의 원형을 되살렸다. 또한, 50년 전 부품과 동일한 것을 찾기 위해 미국의 항공기 제조사와 중고품 시장을 조사했으며, 비슷한 사양의 엔진(O-190 계열)을 수소문한 끝에 7월 서동화 씨로부터 엔진을 기증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10월 6일에는 지상 시동 점검(run-up)이 이루어졌다.[28] 하지만 복원 과정에서 충분한 예산과 기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사전 연구 부족으로 인해 원형기와 다른 부분도 생겨났다.[29] 복원은 2004년 10월 말에 완료되었으며, 이때 실물 크기의 모형(mock-up) 1대가 추가로 제작되어 전쟁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부활호 복원 기념행사는 원래 첫 비행 날짜인 10월 11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2004년 10월 22일에 제81항공정비창 주기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부활호는 실제 비행은 하지 않았고, 대신 대한민국 최초의 양산형 항공기인 KT-1과 나란히 지상 활주를 하며 상징적인 의미를 더했다.[30] 행사에는 설계자 이원복, 민영락,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그리고 제81항공정비창의 장병 및 군무원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부활호 제작과 발굴, 복원의 또 다른 주역인 문용호는 행사 전인 2004년 9월 8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참석하지 못했다.[31]
이후 대한민국 공군은 부활호의 문화재 등록을 신청했고, 2008년 10월 1일 등록문화재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2008년 10월 23일에는 설계자 이원복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으며, 이 흉상은 경상남도 사천시에 위치한 사천항공우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2020년 7월 1일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의해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산업기술-4(2020)호로 지정되었다.
4. 2. 복원 기념식 및 문화재 등록
부활호는 발견 이후 제작자 이원복의 복구 및 비행 희망에 따라 복원이 추진되었다.[26] 그러나 수십 년간 방치되어 훼손 상태가 심각했고, 공군 군수사령부는 남은 기골 활용 복원이 비행 안전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공군은 원형기 기골을 사용한 복원을 최종 결정했다.[27]
복원 작업은 2004년 6월 9일, 부활호 기골이 경상공업고등학교에서 공군 제81항공정비창(81창)으로 옮겨진 직후 시작되었다. 동체 옆면에 쓰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復活'(부활)이 지워질 것을 우려해 미리 글자 모양을 본뜬 뒤, 뼈대의 녹을 제거하고 비파괴검사를 수행했다. 설계도가 없어 남은 기골을 바탕으로 역설계를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설계자 이원복과 문용호의 도움으로 200장이 넘는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각 부품은 종이 모형으로 실험 및 검증 후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으로 제작했다. 다만, 친필 휘호와 기체 번호는 컴퓨터를 이용해 자료 사진과 비교하며 훼손된 글자의 원형을 복원했다. 50년 전 부품을 구하기 위해 미국 항공기 제조사와 중고 시장을 조사했고, 비슷한 사양의 엔진(Continental O-190)을 수소문한 끝에 2004년 7월 서동화 씨로부터 엔진을 기증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10월 6일 지상 시동 점검(run-up)이 이루어졌다.[28] 하지만 부족한 예산과 기간, 사전 연구 부족 등의 문제로 복원된 기체는 원형기와 일부 달라진 부분도 생겼다.[29] 복원은 2004년 10월 말 완료되었으며, 이때 실물 크기 모형(mock-up) 1대도 함께 제작되어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었다. 또 다른 모형 1대는 2005년 5월 8일 경상공업고등학교에 기증되었다.
복원 기념 행사는 당초 첫 비행일인 10월 11일에 계획되었으나, 2004년 10월 22일에 제81항공정비창 주기장에서 열렸다. 이날 부활호는 실제 비행 대신 국산 훈련기 KT-1과 나란히 지상 활주를 했는데,[30][6]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항공기와 최초의 양산형 항공기가 함께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행사에는 설계자 이원복,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81창 장병 및 군무원 등이 참석했다. 부활호 제작과 복원의 또 다른 주역인 문용호는 행사 전인 2004년 9월 3일(또는 9월 8일)[31] 78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참석하지 못했다.[31]
이후 대한민국 공군의 신청으로 2008년 10월 1일 부활호는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2008년 10월 23일에는 설계자 이원복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으며, 이 흉상은 경상남도 사천시에 위치한 사천항공우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2020년 7월 1일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의해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산업기술-4(2020)호로 지정되었다.
4. 3. 원형기와 복원기의 차이점
복원 과정에서 충분한 예산과 기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사전 연구 부족 등의 문제로 인해 복원기는 원형기와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했다.[29]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5. 개량복원
2008년 경상남도와 사천시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항공기인 부활호를 단순 복원이 아닌 성능 개량을 포함하여 복원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2004년 공군이 복원한 기체의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설계를 전산화하고 최신 기술을 적용하여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한, 이 사업은 경상남도의 항공산업 기반을 활용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대한민국을 항공 선진국으로 도약시키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총 1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개량복원 사업은 2009년 4월부터 경남테크노파크 주관 하에 시작되었다. 경상대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가 설계 및 해석을, 수성기체산업이 제작 및 시험을 담당했으며, 공군의 협조와 항공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진행되었다. 2011년 3월 개량복원 작업이 완료되어 출고식이 열렸고, 같은 해 6월 제3훈련비행단에서 성공적인 초도비행을 마쳤다. 이후 7월에는 김두관 당시 경상남도지사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 및 축하 비행 행사가 개최되었다.
개량복원된 부활호는 총 2대가 제작되었으며, 비행용 기체는 안전을 위해 국토교통부(당시 국토해양부)의 특별 감항증명을 받아야만 비행할 수 있다. 현재 이 기체들은 확보된 기술 및 비행 데이터를 통해 항공 분야 연구개발에 활용되고 있으며, 사천항공우주엑스포 등 각종 행사에서 시범 비행을 선보이며 대한민국 항공 역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5. 1. 개량복원 사업 추진
2008년 10월 16일, 경상남도와 사천시는 부활호 2대를 복원하여 한 대는 박물관에 보관하고 다른 한 대는 사천항공우주엑스포 등에서 실제 비행 임무를 수행하게 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단순 복원이 아닌 개량복원으로, 2004년 공군이 복원한 기체 형상을 유지하면서 설계 과정을 전자화하여 영구 보존하고, 최신 기술로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경상남도의 항공산업 인프라를 활용해 고유 소형항공기 개발을 촉진하고, 나아가 중형 민간항공기 최종 조립공장을 유치하여 사천시를 동북아시아 항공산업 중심지로 만들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개량복원 사업은 2009년 4월 시작되었으며, 경상남도와 사천시가 각각 5억원씩 총 10억원을 투자했다. 사업은 경남테크노파크가 주관하고, 경상대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가 총괄관리, 개념/기본설계, 성능해석을, '''수성기체산업'''이 부품제작, 시험평가, 조립, 비행시험을 맡았다. 2004년 복원 작업에 참여했던 '''제81항공정비창''' 소속 정비사들의 지원을 받았고, 이원복 등 항공 전문가 7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2009년 7월 6일에는 대한민국 공군으로부터 2004년 복원 당시의 설계도면을 받아 설계 및 제작 시간 단축과 비용 절감을 도모했다. 공력해석, 비행성능 해석, 안정성 해석, 축소모형 풍동실험 및 비행실험, 구조해석 등을 수행하여 설계에 반영했으며, 이후 조종, 계기, 연료 등 각 계통 설계를 진행했다. 2010년 4월 10일에는 경상대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에서 중간보고회를 열어 제작 과정과 일부 사양을 공개하고 경상남도의 항공산업 육성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상세설계, 하중/추력/연료 계통 지상시험, 부품 가공 및 조립을 완료했다.

2011년 3월 개량복원 작업이 마무리되어, 3월 16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가연리 소재 '''수성기체산업''' 함안공장에서 출고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원복과 이인수가 참석했다. 2011년 6월 15일 고속지상활주시험이 이루어졌고, 6월 20일에는 제3훈련비행단에서 개량복원 부활호의 초도비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28일까지 총 3회의 비행시험이 추가로 진행되었다. 2011년 7월 14일에는 제3훈련비행단에서 부활호 개량복원 기념식 및 축하비행이 열렸다. 기념식에는 김두관 당시 경상남도지사를 비롯해 사천시, 공군, 경남테크노파크 관계자 및 항공 관련 기업 대표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축하비행에서는 부활호가 KT-1 2대와 함께 편대 비행을 선보였으며, 조종은 예비역 공군 중령 '''배영호'''가 맡았다.
개량복원된 부활호는 총 2대(부활-001호 전시용, 부활-002호 비행용)가 제작되었으며, 두 기체 간 성능 차이는 없다. 비행용 기체는 과거 설계도를 바탕으로 한 실험용 항공기이므로 비행 시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의 특별 감항증명이 필요하다. 2015년 10월까지 총 5회(2011년 6월, 8월, 2014년 8월, 9월, 2015년 9월) 증명을 받았다. 2인승이지만 실제 비행은 사전에 신청된 조종사 1명만 탑승할 수 있다.
현재 경상남도와 사천시는 부활호 개량복원을 통해 확보한 기체 설계, 조립, 제작 기술 및 시험비행 데이터를 항공기 연구개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개량복원기는 주기적인 정비와 시험비행을 통해 비행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며, 사천항공우주엑스포 등 여러 행사에서 축하비행 및 교육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5. 2. 개발 과정
2008년 10월 16일, 경상남도와 사천시는 부활호 2대를 복원하여 한 대는 박물관에 보관하고 다른 한 대는 사천항공우주엑스포 등에서 실제 비행 임무를 수행하게 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단순 복원을 넘어, 2004년 공군이 복원한 기체의 형상은 유지하되 설계 과정을 전산화하여 영구 보존하고, 최신 기술로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경상남도의 항공산업 인프라를 활용해 소형 항공기 개발을 촉진하고, 나아가 사천시를 동북아시아 항공산업 중심지로 성장시키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개량복원 사업은 2009년 4월 시작되었다. 경상남도와 사천시가 각각 5억원씩 총 10억원를 투자했고, 경남테크노파크가 사업을 주관했다. 사업 총괄 관리, 개념/기본 설계 및 성능 해석은 경상국립대학교가, 부품 제작, 시험 평가, 조립 및 비행 시험은 수성기체산업이 맡았다. 또한, 2004년 복원 작업에 참여했던 제81항공정비창 소속 정비사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원복 등 항공 전문가 7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2009년 7월 6일에는 공군으로부터 2004년 복원 당시의 설계도면을 받아 설계 및 제작 시간을 단축하고 개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후 공력 해석, 비행성능 해석, 안정성 해석, 축소 모형 풍동 실험 및 비행 실험, 구조 해석 등을 수행하여 개량형 부활호 설계에 반영했다. 기체 설계 완료 후에는 조종, 계기, 연료 등 각 계통 설계가 이루어졌다. 2010년 4월 10일에는 경상국립대학교에서 부활호 개량복원사업 중간보고회가 열려 제작 과정 보고, 일부 사양 공개, 경상남도 항공산업 육성 계획 발표 등이 진행되었다. 중간보고회 이후 상세 설계를 마무리하고 하중 시험, 추력 계통 시험, 연료 계통 시험 등의 지상 시험과 부품 가공 및 조립을 완료했다.
2011년 3월, 부활호 개량복원 작업이 마무리되었고, 같은 해 3월 16일 경상남도 함안군에 위치한 수성기체산업 함안공장에서 출고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부활호 개발 주역인 이원복과 이인수가 참석했다. 2011년 6월 13일에는 제3훈련비행단에서 개량복원 부활호의 초도비행이 이루어졌으며, 6월 15일부터 28일까지 고속 지상 활주 시험과 함께 총 4회의 비행 시험이 실시되었다. 2011년 7월 14일에는 제3훈련비행단에서 부활호 개량복원 기념식 및 축하 비행이 열렸다. 기념식에는 김두관 당시 경상남도지사를 비롯해 사천시, 공군, 경남테크노파크 등 관계자와 항공 관련 기업 대표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축하 비행에서는 부활호가 KT-1 2대와 함께 비행했으며, 조종은 배영호 예비역 공군 중령이 맡았다.
개량복원된 부활호는 총 2대(부활-001호 전시용, 부활-002호 비행용)가 제작되었으며, 두 기체 간의 차이는 없다. 비행용 기체는 과거 설계도를 바탕으로 한 실험용 항공기이므로 비행 시마다 국토교통부(당시 국토해양부)의 특별 감항증명을 받아야 한다. 2015년 10월까지 총 5번(2011년 6월, 8월, 2014년 8월, 9월, 2015년 9월)의 특별 감항증명이 이루어졌다. 부활호는 2인승이지만 승객 탑승은 불가능하며, 국토부에 미리 신청한 조종사 1명만 탑승할 수 있다.
현재 경상남도와 사천시는 부활호 개량복원을 통해 확보한 기체 설계, 조립, 제작 기술과 시험 비행 데이터를 산업계, 학계, 연구계의 항공기 연구개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개량복원기는 주기적인 정비와 시험 비행을 통해 항상 비행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며, 사천항공우주엑스포 등 여러 행사에서 축하 비행 및 교육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5. 3. 출고, 시험 비행 및 기념식
2011년 3월 부활호의 개량복원작업이 마무리되었고, 같은 해 3월 16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에 위치한 수성기체산업 함안공장에서 출고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부활호 개발의 주역인 이원복과 이인수가 직접 참석하였다.출고 이후, 2011년 6월 13일 사천시에 위치한 공군 제3훈련비행단에서 개량복원된 부활호의 첫 비행(초도비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6월 15일부터 28일까지 고속 지상 활주 시험과 함께 총 4차례의 비행 시험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비행 시험이 완료된 후, 2011년 7월 14일에는 제3훈련비행단에서 부활호 개량복원을 기념하는 기념식과 축하 비행 행사가 열렸다. 행사에는 당시 김두관 경상남도지사를 비롯해 사천시, 공군, 경남테크노파크 관계자 및 항공 관련 기업 대표 등 약 300여 명이 참석했다. 축하 비행에서는 부활호가 국산 훈련기인 KT-1 2대와 함께 편대 비행을 선보였으며, 조종은 예비역 공군 중령인 배영호가 맡았다.
개량복원된 부활호는 총 2대가 제작되었는데, 1호기(부활-001호)는 전시용으로, 2호기(부활-002호)는 실제 비행용으로 구분되지만 두 기체 간의 성능 차이는 없다. 다만 비행용인 2호기는 과거 설계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실험용 항공기이기 때문에, 비행을 위해서는 국토교통부(당시 국토해양부)의 특별 감항증명을 받아야 한다. 2015년 10월까지 총 5번(2011년 6월, 8월, 2014년 8월, 9월, 2015년 9월)의 특별 감항증명을 받았다. 2인승 항공기이지만 안전 규정상 승객을 태울 수는 없으며, 사전에 국토부에 등록된 조종사 1명만이 탑승하여 조종할 수 있다.
5. 4. 원형기/복원기와 개량복원기의 차이점
- '''기체 구조'''
- * 원형기는 날개, 동체, 조종면 등을 천(우포)으로 감쌌으나, 개량복원기는 꼬리날개, 날개 끝, 동체 외피를 복합재로 만들었으며 주날개 외피는 알루미늄을 사용했다.
- * 원형기의 수직안정판과 수평안정판은 평판이었으나, 개량복원기는 NACA 0006 익형 형상으로 만들었다.
- * 원형기는 외피가 천 재질이어서 날개보 플랜지가 외피와 접촉하지 않으나, 개량복원기는 날개 외피가 알루미늄이므로 날개보가 외피에 닿도록 높이를 더 높게 설계했다.
- * 원형기의 상반각과 붙임각(받음각)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개량복원기에서는 상반각을 1°, 붙임각을 1.5°로 확정하였다. 상반각은 도면상의 각도를 측정하여 정했고, 붙임각은 수평 비행을 위한 공력 계산을 통해 산출했다.
- * 원형기의 주날개 리브 간격은 500mm~600mm였으나, 개량복원기는 600mm~700mm로 늘어났다.
- * 트러스 구조 해석을 통해 불필요한 부재를 제거하여 구조를 최적화했다.
- '''엔진 및 연료 계통'''
- * 엔진은 원형기(85마력)보다 더 강력한 100마력의 912ULS2를 채택하였으며, 프로펠러는 조정식 2A0R5R70EN으로 변경되었다.
- * 엔진 변경에 따라 연료 계통, 엔진 장착 위치 및 카울링이 재설계되었다.
- * Smith Miniplane|스미스 미니플레인영어의 연료 탱크를 개조하여 16gal의 연료를 탑재할 수 있도록 하였다.
- * 연료량 감지 센서, 저연료량 경보기, 연료 압력 센서, 연료 밸브, 역류 방지용 체크 밸브 등이 추가되었다.
- '''조종/계기/전기 계통'''
- * 조종 계통, 계기 계통, 전기 계통은 FAR Part 23을 기준으로 재설계되었다.
- * 조종 계통은 2004년 복원기의 설계를 최대한 유지하되, 기내 공간 확대 및 조종성과 편의성 향상을 위해 일부 수정되었다.
- * 원형기는 아날로그식 계기를 사용했지만, 개량복원기는 전자식 계기를 주 계기로 사용하고 아날로그식 계기(속도계, 고도계, 인공수평의 등)를 보조 계기로 사용한다.
- '''착륙 장치'''(바퀴다리)
- * 원형기의 주바퀴는 6.00-6 4ply 규격이었으나, 개량복원기는 하중 여유를 늘리기 위해 6.00-6 6ply 규격의 것을 사용하도록 변경되었다.
- * 원형기의 바퀴 버팀대(지주)는 Aeronca L-16|에어론카 L-16영어의 것을 사용하였으나, 개량복원기는 동급 항공기인 Aeronca 11 Chief|에어론카 치프영어의 버팀대를 사용하도록 변경되었다.
- * 원형기는 플로트(수상 착륙용 부주)를 설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실제 장착은 하지 못했다. 개량복원기는 FULL LOTUS FL950 모델의 플로트를 구매하여 설치할 수 있게 하였다.
- '''안전 장치'''
- * 항공기용 낙하산(Ballistic Recovery Systems)[32]과 블랙박스를 추가로 장착하였다.
- '''기타'''
- * 그 외 여러 부분에서 원형기 및 복원기에 비해 수정 및 추가가 이루어졌다.
6. 활용 및 전시
2008년 10월 16일, 경상남도와 사천시는 부활호 2대를 개량 복원하여 한 대는 박물관에 보관하고 다른 한 대는 사천항공우주엑스포 축하비행 등 실제 비행 임무에 활용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개량복원 사업은 단순한 복원을 넘어, 2004년 공군이 복원한 기체의 형상을 유지하면서도 최신 설계 및 제작 기술을 적용하여 성능을 향상시키고 모든 설계 과정을 전자화하여 영구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경상남도의 항공산업 인프라를 활용해 고유 소형항공기 개발을 촉진하고, 나아가 사천시를 동북아시아 항공산업의 중심지로 성장시켜 대한민국을 항공산업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개량복원 사업을 통해 확보된 기체 설계, 조립, 제작 기술과 시험비행 데이터는 산업계, 학계, 연구계의 항공기 연구개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개량복원기는 주기적인 정비와 시험비행을 통해 항상 비행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며, 사천항공우주엑스포와 같은 여러 행사에서 축하비행 및 교육용으로 활용된다.
2011년 3월 개량복원 작업이 마무리되었고, 같은 해 6월 20일 제3훈련비행단에서 초도비행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총 3회의 비행시험을 거쳤다. 2011년 7월 14일에는 제3훈련비행단에서 개량복원 기념식 및 축하비행이 열렸다. 이 행사에는 김두관 당시 경상남도지사를 비롯한 관계자 300여 명이 참석했으며, 부활호는 KT-1 2대와 함께 비행했다. 축하비행 조종은 예비역 공군 중령 배영호가 맡았다.
개량복원기는 총 2대(부활-001호, 부활-002호)가 제작되었으며, 001호는 전시용, 002호는 비행용이지만 두 기체 간의 차이는 없다. 비행용 기체는 과거 설계도를 바탕으로 한 실험용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비행 시마다 국토교통부(당시 국토해양부)의 특별 감항증명을 받아야 한다. 2015년 10월까지 총 5번의 특별 감항증명이 이루어졌으며, 2인승이지만 승객 탑승은 불가능하고 사전에 신청된 조종사 1명만 탑승할 수 있다.
현재 부활호의 복원기, 개량복원기, 모형은 다음 장소에서 보관 또는 전시되고 있다.
구분 | 보관/전시 장소 및 활용 |
---|---|
복원기 | |
개량복원기 | |
모형 |
7. 미디어
8. 제원
구분 | 원형기 | 개량 복원기 |
---|---|---|
전장 | 6.6m | 6.7m |
전폭 | 12.7m | 12.7m |
전고 | 3.05m | 3.1m |
날개 면적 | 불명 | 16.9m2 |
공허 중량 | 380kg | 495kg |
최대 이륙 중량 | 600kg | 692.7kg |
엔진 | 콘티넨탈 O-190-1 공랭 수평대향 4기통 (이륙 85 hp) × 1 | 로탁스 912ULS2 액랭 수평대향 4기통 (이륙 100 hp) × 1 |
프로펠러 | 센세니히 W72GK 2엽 고정 피치 | 센세니히 2A0R5R70EN 2엽 가변 피치 |
최대 속도 | 180 km/h | 225.4 km/h |
순항 속도 | 145 km/h | 166.7 km/h |
실속 속도 | 78 km/h | 64.5 km/h |
실용 상승 한도 | 4900m | 4572m |
항속 거리 | 314km | 541.5km |
상승률 | 불명 | 7.6 m/s |
승원 | 2명 | 2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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