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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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주는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 시대의 인물로, 사마의의 아들이자 동진을 건국한 사마예의 증조부이다. 위나라에서는 남안정후, 정로장군 등을 역임했고, 조모의 쿠데타를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서진 건국 후에는 동관군왕에 봉해졌으며, 오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손호의 항복을 받아 아들들이 정후가 되는 공을 세웠다. 최종적으로 대장군과 개부의동삼사까지 올랐으며, 28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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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의 대장군 - 사마유
사마유는 서진 시대의 인물로, 사마의의 손자이자 사마소의 차남이며, 사마염의 동복 동생으로, 총명하고 온화한 인품을 가졌으나 정치적 모함으로 청주 제군사로 임명되어 귀국 후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이 팔왕의 난의 시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 227년 출생 - 제갈첨
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자 촉한의 장군 겸 정치가로, 무향후 작위를 계승하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263년 위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충신으로 칭송받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 283년 사망 - 산도 (서진)
산도는 죽림칠현 중 한 명으로, 위나라 말부터 서진 시대에 이르러 이부상서, 태자소부, 사도를 역임했으며 노장사상에 심취했고 사마씨 정권에 협력했다. - 283년 사망 - 사마유
사마유는 서진 시대의 인물로, 사마의의 손자이자 사마소의 차남이며, 사마염의 동복 동생으로, 총명하고 온화한 인품을 가졌으나 정치적 모함으로 청주 제군사로 임명되어 귀국 후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이 팔왕의 난의 시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 사마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사마주 |
| 자 | 자장(子將) |
| 시호 | 무왕(武王) |
| 작위 | 초대 낭야왕(琅邪王) 동관왕(東莞王) |
| 생몰 | 227년 ~ 283년 6월 12일 (향년 56세) |
| 가계 | |
| 아버지 | 선제(宣帝) |
| 어머니 | 부태비(扶風國太妃) |
| 배우자 | 제갈씨 (제갈탄의 딸, 제갈정의 누이) |
| 자녀 | 사마근(司馬瑾) 사마단(司馬দান) 사마요(司馬繇) 사마최(司馬崔) |
| 가계도 링크 | 사마의 가계도#사마주 |
| 관직 및 경력 | |
| 임관 시기 (동관왕) | 266년 2월 9일 |
| 해임 시기 (동관왕) | 277년 10월 4일 |
| 임관 시기 (낭야왕) | 277년 10월 5일 |
| 해임 시기 (낭야왕) | 283년 6월 12일 |
| 주요 직책 | 대장군(大將軍) |
| 출생 및 사망 | |
| 출생지 | 하내군원현 효경리 |
| 사망지 | 미상 |
| 섬긴 국가 | |
| 소속 국가 | 위(魏) 진(晉) |
2. 조위 시대의 생애
위나라 정시(240년 ~ 249년) 초, 사마주는 남안정후에 봉해졌고, 영삭장군이 되어 업을 감수했다.[3] 이후 산기상시로 전임했다가 동무향후로 승진하고 우장군이 되어 연주제군사와 연주자사를 감독했다. 오등작이 부활하자 남피백이 되었다. 정로장군으로 재임명되었고, 가절을 받았다.
감로 5년(260년) 고귀향공의 친위 쿠데타 당시 둔기교위였던 사마주는 거문에서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고귀향공 측근이 꾸짖자 거느린 무리가 모조리 달아났다.[5]
태시 원년 (265년) 12월, 사마염이 진나라 황제로 즉위하자 사마주는 동완군왕에 봉해졌으며, 식읍 10600호를 받았다. 태시 4년 (268년) 2월 상서우복야·무군장군으로 승진했다.
태시 5년 (269년) 2월, 지방으로 나가 진동대장군·가절·도독서주제군사가 되었다. 하비군을 통치하며 장병들에게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여 오로부터 두려움을 받았다. 『진서』석포전에 따르면, 도독양주제군사의 석포가 모반 혐의로 도성으로 소환되었을 때, 하비에서 수춘으로 향하여 반란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함녕 3년 (277년) 8월, 개부의동삼사·낭야왕이 되었다. 함녕 5년 (279년) 11월, 오나라 정벌에 수만 군대를 이끌고 도중으로 진군했다. 오나라 황제 손호는 항복할 때 사마주에게 서신과 인수를 보냈다. 조칙에 따르면 "장사의 왕항을 진군시켜 장강을 건너게 하여 적의 변경군을 격파했다. 도독의 채기를 포박하여 살해·항복시킨 자가 5만여 명에 달했다" 등의 공적을 세웠다. 지위는 대장군까지 올랐으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노력했기 때문에 부하들은 최선을 다했고, 민중들도 마음으로 복종했다.
태강 4년 (283년) 5월 1일, 57세로 사망했다. 생모의 능에 장례를 치르고, 4명의 아들에게 소유지를 분할하여 상속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겨 허락받았다. 무왕으로 시호되었으며, 적자인 사마근이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위나라 정시(240년 ~ 249년) 초, 사마주는 남안정후에 봉해졌고, 영삭장군이 되어 업을 감수했다.[3] 그는 어린 나이부터 재능과 명성을 떨쳤으며, 업성 감독으로 치적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후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승진했으며, 동무향후(東武鄉侯)로 봉작이 승격되었다. 258년 4월, 장인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킨 후 살해되었으나, 아내 제갈 부인은 목숨을 건졌다.[4]감로 5년 (260년) 5월, 위나라 황제 조모가 사마소를 배척하기 위해 거병했다(감로의 변).[5] 당시 둔기교위였던 사마주는 이를 공격했지만, 조모 측근의 호통에 군세가 흩어졌다.
이후 사마주는 산기상시에서 우장군·감연주제군사·연주자사를 역임했다. 함희 원년 (264년), 5등작이 설치되자 남피백·정로장군·가절이 되었다.
2. 2. 조모의 쿠데타 진압
정시(240년 ~ 249년) 초, 사마주는 남안정후에 봉해졌고, 영삭장군이 되어 업을 감수했다.[3] 그는 어린 나이부터 재능과 명성을 떨쳐 업성 감독으로 치적을 높이 평가받았다.감로 5년 (260년) 5월, 조모가 사마소를 배척하기 위해 거병했다(감로의 변).[5] 당시 둔기교위였던 사마주는 군대를 이끌고 조모를 막으려 했으나, 조모가 호통을 치자 부하들이 두려워 흩어졌다. 결국 조모는 사마소의 고문 가충의 부하인 성제(成濟)에게 살해당했다.
2. 3. 오등작 부활과 정로장군 임명
위나라 정시(240년 ~ 249년) 초, 사마주는 남안정후에 봉해졌고 영삭장군이 되어 업을 감수했다. 이후 산기상시로 전임했다가 동무향후로 승진하고 우장군이 되어 연주제군사와 연주자사를 감독했다. 264년, 오등작이 부활하자 남피백이 되었고, 정로장군으로 재임명되었으며 가절을 받았다.[3]감로 5년 (260년) 고귀향공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자 둔기교위였던 사마주는 거문에서 맞닥뜨려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고귀향공 측근이 꾸짖자 거느린 무리가 모조리 달아났다.[5]
3. 서진 시대의 생애
사마주는 위나라 정시(240년 ~ 249년) 초에 남안정후에 봉해졌고, 영삭장군이 되어 업을 감독했다. 이후 산기상시, 동무향후를 거쳐 우장군 및 연주제군사와 연주자사를 겸임했다. 오등작 부활 후에는 남피백, 정로장군, 가절을 역임했다.
감로 5년 (260년) 5월, 조모가 사마소를 배척하기 위해 거병하자(감로의 변), 둔기교위였던 사마주는 이를 공격했지만, 조모의 측근에게 호통을 듣고 군세가 흩어졌다.
함희 원년 (264년)에 5등작이 설치되자 남피백, 정로장군, 가절이 되었다.
태시 원년 (265년) 12월,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자 사마주는 동완군왕에 봉해졌으며, 식읍 10600호를 받았다. 태시 4년 (268년) 2월에는 상서우복야, 무군장군으로 승진했다.
태시 5년 (269년) 2월, 지방으로 나가 진동대장군, 가절, 도독서주제군사가 되었다. 하비군을 통치하며, 장병들에게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여 오로부터 두려움을 받았다. 석포가 모반 혐의로 소환되었을 때, 하비에서 수춘으로 향하여 반란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함녕 3년 (277년) 8월, 개부의동삼사, 낭야왕이 되었다.
함녕 5년 (279년) 11월, 오나라 정벌에 참전하여 병사 수만을 이끌고 도중으로 진군했다. 오나라 황제 손호는 항복할 때 사마유에게 서신과 인수를 보냈다. 조칙에 따르면 "장사의 왕항을 진군시켜 장강을 건너게 하여 적의 변경군을 격파했다. 도독의 채기를 포박하여 살해·항복시킨 자가 5만여 명에 달했다" 등의 공적을 세웠다. 대장군까지 올랐지만, 겸손하게 노력했기 때문에 부하들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3. 1. 서진 건국과 동관군왕 책봉
서진이 건국되자 사마주는 동관군왕에 봉해져 1만 6백 호를 식읍으로 받았다.[6]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우복야, 무군장군이 되었고,[7] 외직으로 나가 진동대장군, 가절, 서주도독제군사가 되어 위관을 대신해 하비를 수비했다.[8]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지고, 낭야왕이 되었으며, 이전의 영지였던 동관군도 함께 다스렸다.[9]사마주는 오나라 정벌에 수만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오나라 황제 손호의 항복을 받았다. 이 공로로 그의 아들 두 명은 정후가 되었다. 얼마 후, 사마주는 독청주제군사도 겸하게 되었고, 대장군, 개부의동삼사의 지위에 올랐다. 높은 지위와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손하고 검약했으며, 수하 관리들도 백성 교화에 힘을 다했다.
3. 2. 서주 도독과 낭야왕 책봉
위나라 정시(240년 ~ 249년) 초, 사마주는 남안정후에 봉해졌고, 영삭장군이 되어 업을 감독했다. 이후 산기상시로 전임되었고, 동무향후로 승진하여 우장군 및 연주제군사와 연주자사를 겸임했다. 오등작 부활 후에는 남피백이 되었으며, 정로장군으로 전임되었고 가절을 받았다.[6]서진 건국 후, 사마주는 동관군왕에 봉해져 1만 6백 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중앙으로 복귀하여 상서우복야, 무군장군을 역임했고, 이후 외직으로 나가 진동대장군, 가절, 서주도독제군사가 되어 위관을 대신해 하비를 수비했다.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지고 낭야왕으로 봉해졌으며, 이전 봉지인 동관군도 함께 다스렸다.[7] [8]
사마주는 오나라 정벌에 수만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오나라 황제 손호(孫皓)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공로로 그의 아들 두 명이 정후에 봉해졌다. 얼마 후 독청주제군사를 겸하게 되었고, 대장군, 개부의동삼사의 지위에 올랐다.[9] 그는 높은 지위와 공적에도 불구하고 공손하고 검약했으며, 수하 관리들은 백성 교화에 힘썼다.
3. 3. 오나라 정벌과 대장군 승진
서진이 세워지자 사마주는 동관군왕에 봉해져 1만 6백 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우복야, 무군장군이 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진동대장군 · 가절 · 서주도독제군사가 되어 위관을 대신해 하비를 수비했다.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지고, 낭야왕이 되었으며 옛 영지 동관군도 아울렀다.[6][7][8][9]279년 말, 사마주는 진나라의 동오 정벌에 참전하여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도중(塗中)에 있는 오나라 진지를 공격했다. 280년 5월, 오나라 마지막 황제 손호는 진나라에 항복했다. 이로써 중국은 진나라의 통치하에 통일되었다. 사마주는 이 공로로 아들 두 명이 정후가 되었고, 얼마 후 독청주제군사도 아우르고, 대장군 · 개부의동삼사가 되었다. 이렇게 그 지위와 공이 높았으나, 공손하고 검약하였으며 수하 관리들도 힘을 다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3. 4. 죽음과 유산
사마주(司馬伷)는 공손하고 검약했으며, 그의 지위와 공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수하 관리들도 힘을 다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켰다.[6] 태강 4년(283년)에 죽었으며,[6] 유언으로 어머니의 능 곁에 묻히고, 아들 넷에게 봉국을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으며, 모두 시행되었다.[6]《삼국지연의》에서 사마주는 끝에 동오를 물리치러 갈 때 일지군마를 거느렸던 장군으로만 나온다.[6] 팔왕의 난 이후에 그의 아들 낭야공왕(瑯琊恭王) 사마근(司馬覲)의 장남, 즉 장손인 낭야원왕(瑯耶元王) 사마예(司馬睿)가 서진이 유요(劉曜)에게 망한 후 사마씨 황족들이 대부분 숙청되자 진의 명맥을 잇는 동진(東晉)을 세웠다.[6]
사마주가 283년에 위독해지자, 사마염(진 무제)은 그의 가족에게 여러 선물을 하사하고 심지어 관리를 보내 그를 방문하여 건강 상태를 문의했다.[6] 사마주는 그해 말, 동아시아 나이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마염(진 무제)은 그에게 시호 "무왕"(武王)의 시호를 내렸다.[6] 죽기 전에 사마주는 사후에 그의 어머니 부부인 옆에 묻히고 그의 영지를 네 아들, 즉 사마근, 사마담(司馬澹), 사마요(司馬繇), 사마최(司馬漼)에게 분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마염(진 무제)은 그의 요청을 승인했다.[6] 사마주의 네 아들 중 장남인 사마근(사마예의 아버지)은 아버지의 낭야왕 작위를 상속받았다.[6]
사마주 자신은 진나라에 충실했지만, 요절한 사마근 외의 아들 사마담·사마요·사마최는 팔왕의 난에 관여하여 진나라를 혼란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6] 사마요는 영안 원년 (304년)에 사마영에게 살해되었고, 사마담은 영가 5년 (311년)의 석륵의 공격으로 사망했다.[6] 사마근의 아들이자 낭야국을 계승했던 사마예는 강남으로 피신하여 동진을 건국하고 제위에 올랐다(원제).[6]
4. 가계
참조
[2]
서적
Jin Shu
028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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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n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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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n Shu
[5]
서적
Hanjin Chunq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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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n Shu
026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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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n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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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n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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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n Shu
0277-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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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晋書
[12]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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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晋書
[14]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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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16]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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