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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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필오는 대한제국 말기의 교육가이자 관료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위로 변절하여 비판받는 인물이다. 그는 대구 달성학교 교장, 국채보상운동 참여, 영양군수 등을 역임하며 교육과 계몽 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일진회 가입, 자제단 참여, 국민협회 활동 등 친일 행적을 보였으며,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사후에는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의 손녀 윤덕주는 농구선수, 손자사위 서정귀는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가족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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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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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윤필오 (尹弼五) |
출생일 | 1860년 10월 23일 (음력 9월 10일) |
출생지 | 경상도 달성군 |
사망일 | 1924년 3월 30일 |
사망지 | 식민지 조선 |
직업 | 관료, 교육자, 계몽 사상가, 사회운동가 |
별칭 | 호: 매석(梅石) |
국적 | →→ |
학력 | 한학 수학 |
자녀 | 아들 윤홍렬, 아들 이름 미상 |
친척 | 손녀 윤덕주, 손녀사위 서정귀, 며느리 이숙경, 사돈 허억, 사돈 이상화, 사돈 이상정, 사돈 권기옥, 사돈 이상백, 사돈 이열희 |
2. 생애
2. 1. 국채보상운동과 계몽운동
1899년 7월 대구 달성학교(達成學校) 건립에 참여하였다.[2] 1900년 3월 29일 달성학교 교장이 되었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계몽 강연을 통해 신문물 수용과 실력 양성을 통한 독립을 역설하였다.1907년(광무 10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이 국채 1,300만 환을 보상하기 위해 담배를 끊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자 이에 동참하였다. 5월 서상돈, 양기탁, 윤웅렬 등과 함께 경상북도를 돌며 국채보상운동 모금 활동을 펼쳐 6,700여 환의 자금을 마련했다. 당시 경상북도관찰사 이충구(李忠求)의 도움으로 대구군 동서 청사 자리에 협성학교를 설립하고, 서재필, 이승만 등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였으나 후임 관찰사 박중양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에 전념하였으나, 운동은 지지부진했고 내부 갈등으로 실패했다.
1906년(광무 9년) 대구광학회 발기인이 되는 등 사회단체 활동을 했다. 1907년(광무 10년) 5월 서상돈, 어니스트 베델, 윤웅렬, 양기탁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국가와 민족을 살리는 길은 교육의 힘이라고 판단한 그는 구한말부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계몽 운동에 동참하였다. 1900년대 초반 대구 달성학교 교장을 지냈고, 관료 생활 중에도 부임지의 학교를 후원하였으며, 1908년 영양군수 재직 시에는 영흥학교 건설을 후원했다.
1907년(융희 1년) 고종이 양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양위를 주관한 정부 관리들을 규탄하였으나, 고종 양위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1908년(융희 2년) 7월 26일 달성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
2. 2. 관료 생활과 일진회 가입
1908년(융희 2년) 통감부의 영향 아래 지방관 인사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경상북도 영양군 군수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에 들어섰다.[3] 같은 해 11월 영양 군수 윤필오를 위시한 마을 유지들이 모여 읍내 영흥회 건물을 가교사로 하여 사립영흥학교(영양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3] 당시 윤필오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촉구하며 각종 선전 작업을 벌이던 일진회에 가입, 회원이 되었다.[3]1910년(융희 4년) 6월 30일 주임관 3등으로 승급되었다.[3]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뒤 관직을 사퇴했지만, 조선총독부의 권고로 복직, 그대로 조선총독부 소속의 영양군수로 재임했다. 11월 1일 조선총독부 군수로 정식 임명되고 고등관 8등에 서임되었다. 바로 경상북도청으로 발령되었다.[3] 1911년 6월 10일 청송군지방금융조합이 설립될 때 지방금융조합 설립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6월 17일 경북 예안군(안동시) 군수로 부임하였고, 청송군 지방금융조합 설립위원에서 해촉되었다. 6월 22일 고등관 7등이 되었다.[3]
1912년 8월 1일 칙령 제56호로 한국병합기념장을 특별히 수여받았다. 그해 10월 8일에는 경상북도 비안군(의성군) 군수로 발령받았다. 이어 청송군수로 이임하였다.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청송군의 청송지방금융조합 발기인,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대구부지부 간부이자 일본적십자사 대구부지부 예안군 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경북 지역의 유지로 활동했다. 예안군수 재직 중에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서훈받기도 했다. 1913년 6월 20일 경상북도물산공진회 평의원(慶尙北道物産共進會評議員)에 위촉되었다.[3]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개편으로 부군통폐합을 실시할 때 공직에서 퇴직하였다.[3]
2. 3. 조선총독부 관리 시절
1908년 통감부의 영향 아래 지방관 인사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경상북도 영양군 군수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에 들어섰다. 당시 윤필오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촉구하며 각종 선전 작업을 벌이던 일진회에 가입, 회원이 되었다.[3] 같은 해 11월 영양 군수 윤필오를 위시한 마을 유지들이 모여 읍내 영흥회 건물을 가교사로 하여 사립영흥학교(영양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3]1910년 6월 30일 주임관 3등으로 승급되었다.[3]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뒤 관직을 사퇴했지만, 조선총독부의 권고로 복직, 그대로 조선총독부 소속의 영양군수로 재임했다.[3] 11월 1일 조선총독부 군수로 정식 임명되고 고등관 8등에 서임되었다.[3] 바로 경상북도청으로 발령되었다.[3] 1911년 6월 10일 청송군지방금융조합이 설립될 때 지방금융조합 설립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3] 6월 17일 경북 예안군(안동시) 군수로 부임하였고, 청송군 지방금융조합 설립위원에서 해촉되었다.[3] 6월 22일 고등관 7등이 되었다.[3]
1912년 8월 1일 칙령 제56호로 한국병합기념장을 특별히 수여받았다.[3] 그해 10월 8일에는 경상북도 비안군(의성군) 군수로 발령받았다.[3] 이어 청송군수로 이임하였다.[3]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청송군의 청송지방금융조합 발기인,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대구부지부 간부이자 일본적십자사 대구부지부 예안군 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경북 지역의 유지로 활동했다.[3] 1913년 6월 20일 경상북도물산공진회 평의원(慶尙北道物産共進會評議員)에 위촉되었다.[3]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개편으로 부군통폐합을 실시할 때 공직에서 퇴직하였다.[3]
2. 4. 3.1 운동 이후 친일 활동
1919년 초 대구경찰서장의 추천을 받고 그해 1월 8일 대구경찰서가 주민통제를 위해 설립한 교풍회의 대구지부인 대구 교풍회라는 단체의 회장직에 올랐다. 2월 27일 경상북도청 학무국의 대구 여자공립보통학교(女子共立普通學校) 학무위원으로 위촉되었다.3·1 운동이 일어나고 전국 각지에서 소요 사태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자제단이 결성되었다. 윤필오는 박중양이 단장을 맡아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대구 자제단에 서병조, 정재학, 이일우, 정해붕 등과 함께 창립 발기인(67인)으로 참여했고, 경주에도 직접 내려가 경주 자제단을 조직하면서 3.1 만세 운동 비판 및 해산 권고를 하였다.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데 이어 경주에서 면장들을 모아 놓고 자제단 결성을 주도하는 등 세 확산에 앞장섰다.
3·1 만세 운동 당시 유언비어와 무력 시위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2월 18일 3·1 운동이 보여준 독립 열망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 '신일본주의'를 내세운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대구지회(國民協會 大邱支會)에 가입하고, 1920년에는 국민협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았다. 이듬해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각 지역의 유지들을 포함하도록 개편되었을 때,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구를 대표하는 참의 후보로 추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참의직을 고사하기도 했다. 1924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3. 사회 및 친일 단체 활동
1919년 초 대구경찰서장의 추천을 받고 그해 1월 8일 대구경찰서가 주민통제를 위해 설립한 교풍회의 대구지부인 대구교풍회라는 단체의 회장직에 올랐다. 2월 27일 경상북도청 학무국의 대구 여자공립보통학교(女子共立普通學校) 학무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나고 전국 각지에서 소요 사태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자제단이 결성되었다. 윤필오는 박중양이 단장을 맡아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대구자제단에 서병조, 정재학, 이일우, 정해붕 등과 함께 창립 발기인(67인)으로 참여했고, 경주에도 직접 내려가 경주자제단을 조직하면서 3.1 만세 운동 비판 및 해산 권고를 하였다.
윤필오는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데 이어 경주에서 면장들을 모아 놓고 자제단 결성을 주도하는 등 세 확산에 앞장섰다.[4]
그는 3·1 만세 운동 당시 유언비어와 무력 시위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2월 18일 3·1 운동이 보여준 독립 열망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 '신일본주의'를 내세운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대구지회(國民協會 大邱支會)에 가입하고, 1920년에는 국민협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았다. 이듬해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각 지역의 유지들을 포함하도록 개편되었을 때,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구를 대표하는 참의 후보로 추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참의직을 고사하기도 했다. 1924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3. 1. 교풍회
1919년 초 대구경찰서장의 추천을 받고 그해 1월 8일 대구경찰서가 주민통제를 위해 설립한 교풍회의 대구지부인 대구교풍회 회장직에 올랐다.[4] 2월 27일 경상북도청 학무국의 대구 여자공립보통학교(女子共立普通學校) 학무위원으로 위촉되었다.[4]3. 2. 자제단
1919년 초 대구경찰서장의 추천을 받고 그해 1월 8일 대구경찰서가 주민통제를 위해 설립한 교풍회의 대구지부인 대구교풍회 회장직에 올랐다. 2월 27일 경상북도청 학무국의 대구 여자공립보통학교(女子共立普通學校) 학무위원으로 위촉되었다.3·1 운동이 일어나고 전국 각지에서 소요 사태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자제단이 결성되었다. 윤필오는 박중양이 단장을 맡아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대구자제단에 서병조, 정재학, 이일우, 정해붕 등과 함께 창립 발기인(67인)으로 참여했다. 경주에 경주자제단을 조직하면서 3.1 만세 운동 비판 및 해산 권고를 하였다.
3·1 만세 운동 당시 유언비어와 무력 시위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3. 3. 국민협회
1919년 초 대구경찰서장의 추천을 받고 그해 1월 8일 대구경찰서가 주민통제를 위해 설립한 교풍회의 대구지부인 대구교풍회 회장직에 올랐다. 2월 27일 경상북도청 학무국의 대구 여자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으로 위촉되었다.3·1 운동이 일어나고 전국 각지에서 소요 사태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자제단이 결성되자, 윤필오는 박중양이 단장을 맡아 전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대구자제단에 서병조, 정재학, 이일우, 정해붕 등과 함께 창립 발기인(67인)으로 참여했다. 경주에 직접 내려가 경주자제단을 조직하면서 3.1 만세 운동 비판 및 해산 권고를 하였다.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데 이어 경주에서 면장들을 모아 놓고 자제단 결성을 주도하는 등 세 확산에 앞장섰다.
3·1 만세 운동 당시 유언비어와 무력 시위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2월 18일 3·1 운동이 보여준 독립 열망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 '신일본주의'를 내세운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대구지회(國民協會 大邱支會)에 가입하고, 1920년 국민협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았다.
4. 사후 평가와 비판
윤필오는 초기에는 애국적인 활동을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적으로 변절하여 비판을 받는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7년에 윤필오를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중 정치·사회단체 부문에 포함시켰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한국 근현대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4. 1.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비판
윤필오는 초기에는 애국적인 활동을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적으로 변절하여 비판을 받는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7년에 윤필오를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중 정치·사회단체 부문에 포함시켰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한국 근현대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5. 저서 및 가족 관계
- 저서: 《매석집초》(梅石集草)
윤필오는 최남선 가문과 사돈간이다. 며느리 이숙경은 소남 이일우의 딸로, 이상화, 이상정, 이상백 형제의 사촌 누나이며, 박창암의 처당고모이다.
6. 기타
윤필오는 국가와 민족을 살리는 길은 정치 활동이 아닌 교육의 힘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구한말부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1900년대 초반 대구 달성학교 교장을 지냈고, 1906년 대구광학회 발기인이 되었다. 관료 생활 중에도 부임지의 학교를 후원하였고, 1908년 영양군수 재직 시에는 영흥학교 건설을 후원하는 등 새 학교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며느리 이숙경은 이일우의 딸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작가 시인 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독립운동가 겸 체육인, 역사학자 이상백 형제의 사촌 누나였다.
참조
[1]
뉴스
윤덕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5-07-08
[2]
뉴스
null
매일경제
1982-04-01
[3]
웹사이트
영양초등학교
https://terms.naver.[...]
[4]
뉴스
친일중의 친일 '3·1운동 자제단'은 누구?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0-03-01
[5]
뉴스
윤덕주 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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