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캴드보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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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캴드보르그는 고대부터 중세 시대까지 사용된 군사 전술로, 병사들이 방패로 빽빽한 벽을 형성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 로마의 테스투도 대형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며, 훈련된 병사들이 밀집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와 헤이스팅스 전투 등에서 사용되었으나, 기병의 등장과 폴암의 발달로 쇠퇴했다. 현대에는 경찰이 시위 진압 시 방패 벽을 형성하는 데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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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캴드보르그 | |
|---|---|
| 개요 | |
![]() | |
| 전술 | |
| 설명 | 방패 벽은 병사들이 어깨를 맞대고 방패를 겹쳐서 형성하는 밀집 대형이다. 이 대형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효과적인 방어벽을 제공하며, 병사들은 방패 뒤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
| 장점 | 전면 공격에 대한 강력한 방어 사기 유지 |
| 단점 | 기동성 제한 측면 및 후방 공격에 취약 |
| 역사 | |
| 고대 그리스 | 호플리테스 병사들이 방패 벽과 유사한 팔랑크스 대형을 사용했다. 팔랑크스는 밀집 대형으로, 병사들이 긴 창을 사용하여 적을 공격했다. |
| 로마 | 로마 군단병들이 테스투도 대형을 사용하여 화살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았다. 테스투도는 병사들이 방패를 머리 위와 옆으로 겹쳐서 거북이 등껍질 모양을 만드는 대형이다. |
| 바이킹 시대 | 바이킹들이 방패 벽을 사용하여 적의 공격을 막고,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다. 바이킹의 방패 벽은 종종 도끼와 칼을 든 병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
| 기타 | 방패 벽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사용되었으며, 중세 시대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
2. 역사
방패벽은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화권에서 사용된 보병의 중요한 방어 및 공격 대형이다. 고대 수메르의 기록에서부터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 로마 군단의 전술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중세 북유럽 등지에서도 중요한 군사 전술로 활용되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사용하는 방패의 종류, 대형의 구성, 주력 무기 등 세부적인 모습은 변화하였으나, 방패를 이용해 밀집 대형을 구축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집단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기본 개념은 유지되었다.
2. 1. 고대


방패벽 대형은 페르시아의 스파라바라, 그리스의 팔랑크스, 초기 로마군 등 여러 고대 군대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기원과 전파 경로는 명확하지 않으며,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 군대의 전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기원전 3천년기 수메르 병사들이 방패벽 대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독수리비에 묘사되어 있다.
기원전 7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방패벽은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다. 방패벽 대형의 병사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ὅπλα, ''hópla'') 때문에 호플리테라고 불렸다. 이들이 사용한 아스피스 방패는 지름이 약 약 0.91m였으며, 때로는 청동으로 표면을 덮기도 했다. 호플리테는 개별 전투보다는 밀집 대형을 이루어 집단으로 싸웠는데, 방패로 앞 사람을 밀면서 전진하여 수적 우위를 활용했다. 방패의 왼쪽 절반은 옆 병사의 보호받지 못하는 오른쪽 측면을 가려주도록 설계되었다. 경험이 부족한 신참 병사들은 대형 중앙 전면에 배치되어 물리적, 심리적 안정감을 얻었다.[1]
팔랑크스 대형에서 각 병사의 오른쪽에 위치한 동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신의 방패로 옆 병사의 오른쪽 측면을 보호함으로써, 모든 방패가 서로 겹쳐져 견고한 방어선을 형성했다. 팔랑크스의 두 번째 줄은 적 방패벽의 첫 번째 줄 병사를 공격하여 전선을 돌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로마 군단병이 사용한 스쿠툼 방패는 서로 맞닿아 벽을 형성하도록 설계되었지만, 그리스의 아스피스처럼 겹치지는 않았다. 로마 군단은 테스투도 대형(거북이 대형)이라는 극단적인 형태의 방패벽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대형은 바깥쪽 병사들이 빽빽하게 수직으로 방패벽을 만들고, 안쪽 병사들은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올려 마치 거북이 등껍질 같은 방어 형태를 구축했다. 이는 투사 무기로부터 병사들을 효과적으로 보호했지만, 기동성이 느리고 적에게 고립되어 포위될 위험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서 게르만족이 방패 위로 긴 창을 내밀며 조밀한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고 기록했다.
후기 로마군과 비잔틴 군대에서는 방패를 맞대고 창을 내미는 유사한 대형을 ''풀쿰''(그리스어: φοῦλκον, ''phoulkon'')이라고 불렀다. 이 용어는 6세기 말 ''마우리키우스의 군사학''이라는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로마 군단은 일반적으로 훈련 수준이 높았으며, 방패벽이 적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근접전에서 글라디우스와 같은 짧은 찌르기용 칼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무장이 약했던 보조군은 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여 방패벽을 형성함으로써 방어력을 높이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다일람 지역의 보병들은 적을 향해 진격할 때 견고한 방패벽을 형성했으며, 방패벽 뒤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짧은 창과 전투 도끼를 사용했다.[2]
2. 2. 중세
방패 진형(스빈필킹)은 중세 잉글랜드와 스칸디나비아 등 북유럽 여러 지역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잉글랜드에서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족 간의 전투에서는, 색슨족 군대의 대부분이 경험이 부족한 자유 농민으로 구성된 민병대인 ''피르드''였다. 방벽의 첫 세 줄은 호스칼과 테인과 같은 정예 전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데인 도끼와 같은 더 무거운 무기를 휴대하고 일관되게 방어구를 착용했으며, 종종 에올도르만의 가신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원은 방패와 창만 장비하고 상대방의 보호받지 않는 다리나 얼굴을 공격했다. 병사들은 단순히 앞을 찌르는 것 외에도, 서로의 왼쪽이나 오른쪽을 찌르고 베는 방식으로 서로를 지원하기도 했다. 널리 사용된 색스와 같은 짧은 무기도 방벽의 좁은 공간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궁술과 던지는 투사 무기는 방패 진형 전투 초반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전투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방패 진형 전술의 주요 단점은 진형이 한번 뚫리면 전체 대형이 빠르게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훈련이 부족한 피르드 병사들의 사기는 동료와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유지되었지만, 부대 응집력이 무너지면 쉽게 공황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일단 방어선이 뚫리면 이를 재건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으며, 이는 종종 대패로 이어졌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기병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방패 진형 전술은 점차 쇠퇴했지만, 대규모 방패 진형은 12세기 말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특히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알프스, 스코틀랜드와 같이 대규모 기동전이 어려운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용되었다.
이 전술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다. 비교적 잘 무장한 색슨족 군대가 노르웨이의 하랄 시구르드손 왕이 이끄는 노르웨이 군대를 기습했을 때, 노르웨이 군은 쇄자갑을 배에 두고 와 헬멧만 착용한 상태였다. 두 방패 벽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후, 갑옷이 부족했던 노르웨이 군은 공황 상태에 빠져 거의 전멸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는 양측 모두 방패 진형을 사용한 것으로 바이에 성서[3]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노르만족 기병의 효과적인 가짜 퇴각 전술과 앵글로색슨 전사들의 성급함 및 피로가 겹치면서 노르만족의 승리로 끝났다.
2. 3. 중세 이후 쇠퇴와 부활
방패를 이용한 밀집 대형 전술은 역사적으로 쇠퇴와 부활을 거듭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팔랑크스(phalanx) 대형이 대표적이었으나, 주력 창이 기존의 도리에서 더 긴 사리사로 바뀌면서 변화를 맞았다. 사리사는 양손으로 다뤄야 했기에 기존의 큰 방패를 들기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병사들은 더 작은 방패를 사용하게 되면서 방패벽의 형태도 달라졌다.[1]중세 후기에도 방패의 중요성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양손으로 사용하는 폴암과 같은 무기가 널리 보급되고, 판금 갑옷이 발달하면서 방어력이 향상되자 병사들은 점차 방패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파이크와 같은 긴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밀집하여 파이크 스퀘어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방어 대형을 구축하는 전술이 등장했다.[1]
3. 현대의 사용
화기 및 폭발물의 등장으로 군사 전술로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방패로 벽을 만드는 전술은 전 세계 경찰이 대규모 시위대에 대응할 때 흔히 사용하는 대형으로 남아 있다. 이는 즉석 무기나 주먹, 발차기, 또는 벽돌, 병, 화염병과 같은 투척물로부터 경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다.
4. 전술
방패벽 대형은 페르시아의 스파라바라,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 초기 로마군 등 많은 고대 군대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확한 기원과 확산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의 군사 전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독수리비에는 기원전 3천년기 수메르 병사들이 방패벽 대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기원전 7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의 방패벽은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다. 방패벽 대형의 병사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ὅπλα|호플라grc) 때문에 호플리테라고 불렸다. 이들이 사용한 아스피스 방패는 지름이 약 약 0.91m에 달했으며, 때로는 청동으로 덮여 있었다. 호플리테들은 개별 전투보다는 밀집 대형 안에서 방패로 앞 사람을 밀며(수적 우세를 활용하기 위해) 하나의 응집된 부대로 싸웠다. 방패의 왼쪽 절반은 옆 병사의 보호받지 못하는 오른쪽 측면을 가려주도록 설계되었다. 경험이 부족한 신참 병사들은 대형의 중앙 전선에 배치되어 부대의 신체적, 심리적 안정감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1]
팔랑크스 대형에서 각 병사의 오른쪽에 있는 동료는 매우 중요했는데, 그의 방패가 옆 병사의 오른쪽 측면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방패가 서로 겹쳐져 견고한 전투 대열을 형성했다. 두 번째 열의 병사들은 적 방패벽의 첫 번째 줄 병사를 공격하여 전선을 돌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로마의 스쿠툼 방패는 다른 방패와 맞닿아 방패벽을 형성하도록 설계되었지만, 그리스의 아스피스처럼 겹치지는 않았다. 로마 군단은 테스투도 대형이라는 극단적인 형태의 방패벽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앞, 옆, 위를 모두 방패로 덮는 방식이었다. 바깥쪽 병사들은 빽빽한 수직 방패벽을 형성하고, 안쪽 병사들은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올려 거북이 등껍질 같은 방어 형태를 만들어 투사 무기로부터 병사들을 효과적으로 보호했다. 이 대형은 투사체 방어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이동 속도가 느리고 적에게 고립되어 포위될 위험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게르만족이 방패 위로 긴 창을 내밀며 조밀한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고 기록했다.
후기 로마군과 비잔틴 군대에서는 방패를 맞대고 창을 내미는 유사한 대형을 'fulcum|풀쿰la'(그리스어: φοῦλκον|포울콘grc)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6세기 말 ''마우리키우스의 군사학''에 처음 묘사되었다. 로마 군단병들은 일반적으로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방패벽이 적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근접전에서 글라디우스와 같은 짧은 칼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반면, 무장이 비교적 약했던 보조군은 창을 든 방패벽을 사용하여 방어력을 높이는 경우가 많았다.
다일람 보병은 적을 향해 진격할 때 견고한 방패벽을 사용했으며, 방패벽 뒤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짧은 창과 전투 도끼를 활용했다.[2]
방패벽 진형은 중세 잉글랜드와 스칸디나비아 등 북유럽 여러 지역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잉글랜드에서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족 간의 전투에서 색슨족 군대의 주력은 경험이 부족한 자유 농민으로 구성된 민병대인 ''피르드''였다.
방패벽의 첫 세 줄은 호스칼이나 세인과 같은 정예 전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데인 도끼와 같은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고 갑옷을 잘 갖춰 입었으며, 종종 에알도르만의 가신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방패와 창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이를 이용해 상대방의 보호되지 않은 다리나 얼굴을 공격했다. 병사들은 단순히 앞을 찌르는 것 외에도, 서로의 좌우를 찌르거나 베는 방식으로 협력했다. 색스와 같은 짧은 무기도 방패벽의 좁은 공간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활쏘기나 투척 무기는 전투 초반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전투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방패벽 전술의 약점은 한번 방어선이 뚫리면 전체 대형이 빠르게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훈련이 부족한 피르드 병사들의 사기는 동료와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유지되었지만, 부대 응집력이 깨지면 쉽게 공황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일단 방어선이 뚫리면 재정비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했고, 이는 종종 대패로 이어졌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기병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방패벽 전술은 점차 쇠퇴했지만, 대규모 방패벽 진형은 12세기 말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특히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알프스, 스코틀랜드와 같이 기병의 대규모 기동이 어려운 지역에서 활용되었다.
이 전술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비교적 잘 무장한 색슨족 군대가 노르웨이의 하랄 시구르드손 왕이 이끄는 노르웨이 군대를 기습했을 때, 노르웨이 군은 쇄자갑을 배에 두고 와 투구만 착용한 상태였다. 양측의 방패벽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후, 노르웨이 군은 공황 상태에 빠져 거의 전멸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는 양측 모두 방패벽 대형을 사용한 것으로 바이에 성서[3]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노르만족 기병의 거짓 후퇴 전술과 앵글로색슨 전사들의 성급함 및 피로가 겹치면서 노르만족의 승리로 끝났다.
참조
[1]
서적
The Western Way of War: Infantry Battle in Classical Greece
[2]
간행물
ARMY ii. Islamic, to the Mongol period
http://www.iranicaon[...]
Encyclopædia Iranica
2012-12-30
[3]
웹사이트
Bayeuxtapestry.org
https://web.archive.[...]
200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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