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봉경회
1. 개요
신궁봉경회는 일본의 신궁을 숭배하고 한국에 신궁을 건립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신궁, 부여신궁 등 신궁과 경성신사, 대구신사, 광주신사, 강원신사, 평양신사 등 신사가 건립되어 한국인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또한 조선황전강습소, 황도학회, 황도문화관, 황도선양회 등 교육기관과 단체를 통해 신토 교리를 가르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황도사상을 전파하여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에 동화시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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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류 | 유사 종교 단체 |
|---|---|
| 창립 | 1937년 |
| 해산 | 1945년 12월 |
| 본부 소재지 | 일본 제국 조선 |
| 활동 지역 | 조선 |
| 관련 단체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
| 목적 | 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 강요 및 황민화 정책 협력 |
|---|---|
| 주요 활동 | 신사 참배 강요 국민정신총동원 운동 협력 징병 제도 협력 애국기 헌납 운동 협력 국방헌금 모금 협력 |
| 설립 배경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정책의 일환 |
|---|---|
| 주요 사건 | 1937년 창립 1945년 해산 |
| 조직 체계 | 중앙본부 각 도별 지부 각 군별 지부 각 면별 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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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인물 | 미나미 지로 (초대 회장)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
|---|
| 비판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정책에 적극 협력한 단체로 비판받음 |
|---|---|
| 영향 | 한국 사회의 친일 잔재 논란과 관련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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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설립된 단체 -
청년학우회
청년학우회는 1909년 신민회 주도로 조직된 청년 계몽 단체로, 표면적으로는 수양 단체를 표방하며 개인의 역량 강화에 힘썼으나 실제로는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청년운동을 전개하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해산되었다. -
1909년 설립된 단체 -
피어너 에런
피어너 에런은 1909년 아일랜드 독립을 목표로 결성된 청소년 단체로, 스카우트 활동, 군사 훈련, 아일랜드어 교육 등을 제공했으며, 아일랜드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
일제강점기의 신토 -
경성신사
경성신사는 일제강점기 서울에 세워진 일본 신사로, 남산대신궁으로 시작하여 경성신사로 개칭되었고 국폐소사로 격상되었으나, 일본 패전 후 폐지되어 현재는 숭의여자대학교가 위치하며, 식민지 지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일제강점기의 신토 -
조선신궁
조선신궁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식민지배 강화와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건립한 신사로, 천조대신과 메이지 천황을 주신으로 모셨으며, 신사 참배 강요 논쟁과 해방 후 철거, 그리고 건립 과정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일제의 식민 통치와 한국인들의 저항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한국사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사 -
토기
토기는 점토를 구워 만든 그릇으로, 일본에서는 구움 정도에 따라 도자기, 자기와 구분되며 인류 최초의 화학적 변화 응용 사례로 식생활과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다원설이 유력한 발상지와 일본 열도 1만 6500년 전 토기 발견이 특징이며, 일본어 관점에서 정의, 역사, 제작 과정, 용도, 세계 각지 토기 문화를 설명한다.
2. 한일병합 이전
1910년 한일병합 이전,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신토를 보급하기 위한 초기 단체들을 설립하였다. 이들은 신궁 건립과 신토 신앙 확산을 목표로 했다.
2.1. 신궁봉경회
신궁봉경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신궁을 숭배하고 대한제국에 신궁 건립을 위해 조직된 단체이다.
1909년 11월 4일에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가 열렸을 때,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토 추도회 발기인 겸 간사 김재순(金在珣)은 이완용 내각의 각료 송병준, 조중응 등과 함께 이토를 신궁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9년 11월 27일, 김재순(金在珣)은 신궁봉경회를 조직하고, 이토를 추모하기 위해 신궁을 건립할 것을 건의했다. 신궁봉경회는 발기 취지서에서 이토를 '문명정치의 선각자'이자 '동양 평화의 확보자'로 칭송하며, 그를 위해 신궁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궁봉경회는 신궁 건립을 위해 각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 국민에게 1인당 20전씩의 신궁 건립 비용을 모금하려 했다. 그러나 신궁봉경회의 신궁 건립 계획은 대한제국 국민의 반발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신궁봉경회는 일제강점기 친일단체로 변질되었으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앞장섰다.
2.2. 신궁경의회
신궁경의회는 신궁봉경회와 비슷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신토 신앙을 보급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3. 일제 강점기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신토를 강요하고 한국인의 황국신민화를 추진하기 위한 다양한 단체들을 설립하였다. 신궁봉경회는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춰 신궁 건립, 신사참배 강요, 황도사상 전파 등 활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한국인의 신앙을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신궁을 건립하고, 신사를 통해 신토 신앙을 일상에 침투시키려 했다. 또한 조선황전강습소를 통해 신토 교리를 가르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으며, 황도사상 관련 단체를 통해 황국신민화를 꾀했다.
3.1. 신궁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국인의 신앙을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신궁을 건립했다. 신궁은 일본 천황과 관련된 신들을 모시는 곳으로, 한국인의 신앙을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핵심적인 조치였다.
3.1.1. 조선신궁
조선신궁은 일제강점기 경성부(현재의 서울특별시) 남산에 건립된 신궁이었다. 1925년 10월 15일에 완공되었으며, 일본의 국가신토에서 가장 중요한 신사 중 하나였다. 조선신궁은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민족 신앙을 억압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3.2. 신사
일제강점기 신사는 신궁보다 작은 규모의 신토 시설로, 전국 각지에 건립되어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신토 신앙을 침투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주요 신사로는 경성신사, 대구신사, 광주신사, 강원신사, 평양신사 등이 있었다.
3.2.1. 주요 신사
경성신사, 대구신사, 광주신사, 강원신사, 평양신사 등은 주요 신사로, 각 지역에서 한국인에게 참배를 강요하고 신토 신앙을 확산시키는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3.2.2. 용두산신사 및 용미산신사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한국의 민족 신앙을 탄압하고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신사를 건립했다. 그중 대표적인 신사가 부산의 용두산신사와 파주의 용미산신사였다.
용두산신사는 1915년 부산에 건립되었으며, 지역 주민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용미산신사는 1938년 파주에 건립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신사 참배 강요와 민족 신앙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3.3. 교육기관
일본은 신토 이념을 교육하고 황국신민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신궁봉경회는 조선황전강습소를 설립하여 신토 교리를 가르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3.3.1. 조선황전강습소
1919년 9월 19일 경성부에서 신궁봉경회가 주최한 제1회 강습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11월 10일 제21회 강습회까지 총 21회에 걸쳐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신토 교리를 가르치고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실시하여,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다.
강습 과목은 수신, 일본어, 창가, 체조 등이었으며, 강습회 수료자에게는 조선신궁 참배 자격을 부여하고 각 지방의 신사 참배를 장려하는 특전이 주어졌다. 강습회는 1회에 50명 정원으로 10일간 진행되었으며, 수료생은 5,000여 명에 달했다.
강습회는 주로 조선 각지의 유지나 유지 자제,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청의 관리, 학교 교원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협력할 인력을 양성하고, 이들을 통해 일반 민중에 대한 신사 참배 강요 등 황민화 정책을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