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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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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달리야는 열왕기 하, 역대기 하에 기록된 인물로,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딸 또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 여겨진다. 유다 왕 여호람과 결혼하여 태후가 되었으며,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왕위를 찬탈하고 왕족들을 살해했다. 이후 6년간 통치하며 바알 숭배를 유다에 확립하려 했으나, 요아스가 즉위하자 반란을 진압하려다 살해되었다. 그녀는 장 라신의 희곡, 헨델의 오라토리오 등 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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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리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아달리야
원어 이름עתליה ʻAtalya ʿĂṯalyā
다른 언어 표기그리스어: Γοθολία
라틴어: Athalia
통치 정보
작위유다 여왕
재위 기간기원전 841년경 – 기원전 835년경
이전 통치자아하시야
다음 통치자요아스
섭정 기간기원전 842년경 – 기원전 841년경
배우자 지위유다 왕비
배우자 기간기원전 ? – 기원전 842년경
배우자여호람
자녀아하시야
가문 정보
왕가오므리 가문
아버지아합 또는 오므리
어머니이세벨
생애 정보
출생일기원전 898년경
출생지사마리아, 이스라엘 왕국
사망일기원전 835년경
사망지예루살렘, 유다 왕국

2. 성경 속 이야기

아달리야의 생애는 열왕기 하 8장 16절부터 11장 16절, 역대기 하 22장 10절부터 23장 15절에 기록되어 있다.[1]

아하시야가 죽자 아달리야는 왕위를 찬탈하고, 왕위 계승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7][8] 여기에는 아하시야의 아들들과 그의 친척,[9] 여호람의 다른 아내의 자녀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0]

아달리야는 바알 숭배를 장려하여 유다 왕국 내 종교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조 출신으로, 아합 왕의 딸이자 오므리의 손녀였다.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보다 바알과 같은 다신교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유다 왕족, 제사장,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아달리야는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반항을 억누르기 위해 유다 왕족의 자녀들을 모두 제거했다.[7][8]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존망을 위협하는 폭거였으며, 다윗 혈통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예언에 대한 도전이자 유다 두 지파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아달리야는, 왕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아스를 옹립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2. 1. 가계와 결혼

귀스타브 도레, ''아달리야의 죽음''.


아달리야는 북이스라엘 왕국 오므리 왕의 딸로 알려져 있으나,[1] 일반적으로는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딸로 여겨진다.[2] 일부 학자들은 아달리야가 실제로 오므리의 딸이었지만 아합의 궁정에서 고아로 자랐다고 생각한다.[3][4]

아달리야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간의 조약을 체결하고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유다 왕국의 여호람 왕과 정략결혼을 하였다.[5] 여호람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그의 여섯 형제를 죽였다.[5]

2. 2. 유다 왕국의 상황

여호람은 8년 동안 유다 왕국을 다스렸다.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과 할아버지 아사는 야훼를 숭배한 경건한 왕이었지만, 여호람은 이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고 야훼 신앙을 저버렸다. 그 결과, 그의 통치는 저주를 받았다.[6] 에돔이 반란을 일으켰고, 블레셋인, 아랍인, 에티오피아인의 침략으로 왕궁이 약탈당했다. 여호람과 아달리야의 막내 아들 아하시야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끌려갔다.

여호람이 죽은 후, 아하시야가 유다의 왕이 되었고, 아달리야는 태후가 되었다. 아하시야는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예후에게 살해되었다.[5]

2. 3. 아달리야의 즉위와 통치

아하시야 왕이 죽은 후, 아달리야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유다 왕국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했다.[7][8] 여기에는 아하시야의 아들들과 그의 친척,[9] 그리고 여호람의 다른 아내의 자녀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0] 아달리야는 바알 숭배를 장려하여 유다 왕국 내 종교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아달리야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조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합이며, 오므리의 손녀이다. 그녀는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보다 바알과 같은 다신교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유다 왕족, 제사장,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아달리야는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반항을 억누르기 위해 유다 왕족의 자녀들을 모두 죽였다.[7][8]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존망을 위협하는 폭거였으며, 다윗 혈통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예언에 대한 도전이자, 유다 두 지파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아달리야는, 왕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아스를 옹립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여호야다는 궁궐 경비병들의 지지를 얻어 솔로몬 성전에서 요아스에게 대관식을 거행했다. 아달리야는 이 소식을 듣고 성전으로 달려갔지만, 붙잡혀 처형되었다.[12][13][14]

2. 4. 요아스의 즉위와 아달리야의 최후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 부부에 의해 비밀리에 양육되었다. 여호야다는 솔로몬 성전에서 요아스를 왕으로 즉위시키고 쿠데타를 일으켜 아달리야를 처형했다. 아달리야는 성전 밖에서 군인들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는 그녀의 피가 성전을 더럽힐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12][13][14]

3. 통치 연대

윌리엄 F. 올브라이트는 아달리야의 통치 기간을 기원전 842년-837년으로 추정했다. 반면 에드윈 R. 틸레는 그의 역작 3판에서 아달리야의 통치를 기원전 842/841년부터 836/835년으로 추정했다.[15] 그러나 틸레가 아달리야의 아들 아하시야의 죽음을 기원전 841/840년으로 제시하여, 아달리야의 통치 시작 연도(기원전 842/841년)와 1년 차이가 나는 모순이 발생했고, 틸레는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4. 평가 및 영향

아달리야는 구약성서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오므리 왕조 출신으로, "북 왕국의 역대 왕 중 유례없는 폭군"으로 칭송된 아합의 딸이자 오므리의 손녀였다. 유다 왕국 제5대 왕 여호람의 아내가 되었으며, 아들인 제6대 왕 아하시야가 전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북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달리야는 유대교보다 다른 종교, 특히 다신교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달리야의 통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재해석의 여지도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 통치자는 매우 드물었으며, 아달리야는 이러한 사회적 제약 속에서 권력을 유지하려 노력했을 수 있다. 또한 그녀의 통치 시기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어쩌면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왕국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결국 쿠데타로 인해 희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달리야는 보카치오의 ''저명한 여성들에 관하여''(De Mulieribus Claris)와 크리스틴 드 피장의 ''여인들의 도시의 책''(The Book of the City of Ladies)에서 언급된다. 1691년, 프랑스의 비극 작가 장 라신은 이 성경 속 여왕에 관한 희곡 ''아탈리''(Athalie)를 썼다. 독일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은 라신의 희곡에 맞춰 부수 음악(작품 74번)을 작곡했으며, 이는 1845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멘델스존 음악의 가장 자주 연주되는 발췌곡 중 하나는 "사제들의 전쟁 행진곡"("Kriegsmarsch der Priester")이다.[16] 1733년, 헨델은 그녀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오라토리오 ''아달리아''(Athalia)를 작곡했으며, 그녀를 "유다의 바알 여왕, 이세벨의 딸"이라고 칭했다. 바알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타나크/구약성경에서 숭배에 빠지곤 했던 가나안의 다산 신이었다.

4. 1. 부정적 평가

오므리 왕조 출신으로, 구약성서에서 "북 왕국의 역대 왕 중 유례없는 폭군"으로 칭송된 아합의 딸이자 오므리의 손녀였다. 유다 왕국 제5대 왕 여호람의 아내가 되었으며, 아들인 제6대 왕 아하시야가 전사하자 반강제적으로 즉위했다.

북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달리야는 유대교보다 다른 종교, 특히 다신교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아달리야의 즉위는 유다 왕족, 제사장, 귀족들에게 큰 반감을 샀다.

아달리야는 반항을 억누르기 위해 유다 왕족의 자녀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존망을 위협하는 폭거였다. 메시아다윗의 혈통에서 나온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유다 왕족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며, 유다 두 지파에 대한 모욕이었다.

이러한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아달리야는 왕족의 유일한 생존자인 요아스를 옹립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에게 차츰 실권을 빼앗겼다. 여호야다는 궁궐 경비병들의 지지를 얻어, 성전 뜰에서 요아스를 즉위시켰다. 그 환호성을 들은 아달리야는 성전에 들어가려 했지만, 붙잡혀 궁궐에서 처형되었다.

4. 2. 긍정적/재해석의 여지

아달리야는 구약성경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몇 가지 재해석의 여지가 있다.

  • 여성 통치자로서의 어려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의 통치는 매우 드문 일이었으며, 아달리야는 이러한 사회적 제약 속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을 수 있다.
  • 정치적 격변기의 희생양: 아달리야의 통치 시기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녀는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왕국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결국 쿠데타로 인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역사 기록의 왜곡 가능성: 구약성경은 아달리야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후대에 의해 기록이 과장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아달리야가 저지른 악행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통치 배경과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무조건적인 비난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할 수 있다.

4. 3. 문화적 영향

아달리야는 보카치오의 ''저명한 여성들에 관하여''(De Mulieribus Claris)와 크리스틴 드 피장의 ''여인들의 도시의 책''(The Book of the City of Ladies)에서 언급된다.

1691년, 프랑스의 비극 작가 장 라신은 이 성경 속 여왕에 관한 희곡 ''아탈리''(Athalie)를 썼다. 독일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은 라신의 희곡에 맞춰 부수 음악(작품 74번)을 작곡했으며, 이는 1845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멘델스존 음악의 가장 자주 연주되는 발췌곡 중 하나는 "사제들의 전쟁 행진곡"("Kriegsmarsch der Priester")이다.[16]

1733년, 헨델은 그녀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오라토리오 ''아달리아''(Athalia)를 작곡했으며, 그녀를 "유다의 바알 여왕, 이세벨의 딸"이라고 칭했다. 바알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타나크/구약성경에서 숭배에 빠지곤 했던 가나안의 다산 신이었다.

5. 자손

아달리야의 아들 아하시야의 후손들이 유다 왕국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아달리야는 오므리, 아합, 이세벨의 혈통을 유다 왕가에 남긴 셈이 된다.

참조

[1] 성경 2 Kings 8:26
[2] 웹사이트 2 Kings 11:1 Multilingual: Now when Athaliah the mother of Ahaziah saw that her son was dead, she arose and destroyed all the royal family. http://mlbible.com/2[...]
[3] 논문 Who Were the Parents of Athaliah? https://www.jstor.or[...]
[4] 논문 Queen Athaliah: The Daughter of Ahab or Omri? https://www.research[...]
[5] 백과사전 Jehoram http://jewishencyclo[...] Jewish Encyclopedia
[6] 서적 A New Universal Biography: First series, from the creation to the birth of Christ https://books.google[...] Sherwood, Jones, and Company 1825
[7] 성경 2 Kings 11:1
[8] 웹사이트 Athaliah: Bible http://jwa.org/encyc[...] Jewish Women's Archive
[9] 웹사이트 2 Kings 11:1 Ellicott's Commentary for English Readers https://biblehub.com[...] 2023
[10] 웹사이트 2 Kings 11:1 Jamieson-Fausset-Brown Bible Commentary https://biblehub.com[...] 2023
[11] 서적 1 and 2 Chronicles https://b-ok.org/dl/[...] Barton, J. and Muddiman, J.
[12] 성경 2 Kings 11:14–16
[13] 성경 2 Chronicles 23:12-15
[14] 웹사이트 jwa.org/ https://jwa.org/ency[...]
[15] 서적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Zondervan/Kregel
[16] 웹사이트 Classical Archives' All Music Guide http://www.classical[...] 201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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