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부 무슬림 이븐 무슬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부 무슬림 이븐 무슬림은 8세기 압바스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페르시아 출신의 군사 지도자이다. 그는 출생과 배경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하며, 쿠파에서 성장하여 시아파 무슬림들과 접촉했다. 아부 무슬림은 아바스 왕조의 선교 활동을 지휘하며 호라산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고, 747년 흑기를 들고 봉기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그는 압바스 왕조 하에서 호라산 총독을 지냈으나, 알 만수르 칼리프와의 갈등으로 755년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은 호라산 주민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는 민중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다양한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부 무슬림은 페르시아 문화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이야기는 다양한 서사 로맨스와 문화적 작품으로 재해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755년 사망 - 왕창령
    당나라 시인 왕창령은 진사 급제 후 관직 생활과 좌천을 겪었지만, 칠언절구와 변새시에 능해 "시가의 천자"로 불리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 페르시아인 - 가셈 솔레이마니
    가셈 솔레이마니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으로서 이란의 대외 정책 및 군사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2020년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하여 이란과 미국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국제적으로 엇갈린다.
  • 페르시아인 - 교황 호르미스다
    교황 호르미스다는 6세기 초에 재위했으며 아들 실베리오를 둔 인물로, 아카키우스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1세와의 협상을 통해 519년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회복시켰다.
아부 무슬림 이븐 무슬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598년
1598년 "역사 크림" (Zübdet-üt Tevarih)의 계보 (silsilanāma)에서 아부 무슬림 (755년 사망)의 초상화
본명알려지지 않음, 아마도 베흐자단 또는 이브라힘
출생718/19년 또는 723/27년
출생지메르브 또는 이스파한
사망755년
사망 장소알-마다인, 이라크
알려진 이유아바스 혁명
직위호라산의 아바스 왕조 총독
임기748년–755년
군사 경력
전투아바스 혁명
탈라스 전투
자브 전투

2. 초기 생애와 배경

골람 호사인 유소피에 따르면 "출처에 따라 그의 본명과 출신에 대한 정보가 다르다. 일부 자료는 그를 고다르즈의 후손이자 보조르그메르의 재상으로 묘사하며, 그를 에브라힘이라고 부른다; 어떤 자료는 그를 완다드 호르모즈의 아들 베흐자단이라고 명명하며; 또 다른 자료는 그를 압바스 왕조 또는 알리드와 관련짓는다. 이러한 제안들은 모두 의심스럽다."[3] 그는 페르시아인 출신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4] 메르브 또는 이스파한 인근에서 태어났다.[3]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718/9년 또는 723/7년 사이로 추정된다.[3]

그는 쿠파에서 성장했으며,[3] 그곳에서 바누 일 부족의 노예이자 안장 제작자로 일했다.[5][4] 아부 무슬림은 그곳에서 시아파 무슬림들과 접촉하게 되었다.[4]

당시 쿠파는 통치 세력인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는 사회적, 정치적 불안의 온상이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비 아랍인(''마왈리'')보다 아랍인을 선호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이슬람의 평등 약속을 위반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프들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과 알리드에 대한 박해는 경건한 사람들을 더욱 소외시켰다.[3] 이는 무함마드 가문의 일원이 통치하는 시아파의 대의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켰다. 이들은 신의 인도를 받는 ''이맘'' 또는 ''마흐디''로서 ''코란''과 ''순나''에 따라 통치하고 무슬림 공동체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 줄 진정한 이슬람 정부를 수립할 것이었다.

737년경, 그는 ''갈리''( "극단주의자, 이단") 알-무기라의 추종자들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4]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741/2년에 아바스 왕조의 주요 선교사들(''나캅'', 단수형 ''나키브'')이 메카로 가는 길에 그를 석방했다.[4] 그는 아바스 왕조 가문의 수장인 무함마드 이븐 알리 이븐 압달라에게 소개되었고, 그는 745/6년에 그를 호라산에서 선교 활동을 지휘하도록 보냈다.[4]

741년경에 아부 무슬림은 메카에서 투옥되었을 때 아바스 가문의 사람에 의해 석방되었다.[15] 744년에 아부 무슬림은 쿠파에서 파견된 선전원과 함께 동방의 호라산 지방을 방문한 뒤 쿠파로 귀환했다.[15]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비 이슬람교도에게 포교 활동을 했다.[15]

호라산, 그리고 일반적으로 칼리프국의 이란 동부는 아바스 왕조의 선교 활동을 위한 비옥한 토지를 제공했다.[3] 시리아의 우마이야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호라산은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많은 아랍 정착민 공동체가 있었고, 그 결과 많은 수의 현지 개종자가 생겨났으며, 아랍인과 이란인의 결혼도 이루어졌다. 끊임없는 전쟁에 노출된 변경 지방으로서, 현지 무슬림들은 군사적 경험이 풍부했고, 공동의 투쟁은 다마스쿠스의 중앙 집권적 경향과 시리아 총독의 수탈에 대한 공통된 반감과 함께 호라산의 아랍인과 현지 무슬림을 더욱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718/9년에 아바스 왕조는 12명의 ''나키브''를 이 지역에 파견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며, 740년에 자이드 이븐 알리의 반란이 실패한 후에야 아바스 왕조 선교 운동이 호라산에서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745년, 호라산의 카흐타바 이븐 샤비브 알-타이는 서쪽으로 가서 이브라힘 이븐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아부 무슬림은 그와 함께 동쪽으로 보내져 지휘권을 맡게 되었다.

아부 무슬림이 호라산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은 제3 피트나의 진행 중인 우마이야 내전의 영향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이 내전은 야만 부족과 카이스 부족 간의 갈등을 재점화했다. 이 지역의 많은 야만 세력은 오랫동안 통치해 온 나스르 이븐 사야르에 반대했고, 그를 그들의 챔피언인 주다이 알-키르마니로 교체하려 했다. 알-키르마니는 이븐 사야르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746년 말에 그를 지방 수도인 메르브에서 몰아냈으며, 총독은 카이스의 거점인 니샤푸르로 도망쳤다.

2. 1. 출신과 성장

골람 호사인 유소피에 따르면 아부 무슬림의 본명과 출신에 대한 정보는 출처에 따라 다르다.[3] 일부 자료는 그를 고다르즈의 후손이자 보조르그메르의 재상으로 묘사하며 에브라힘이라고 부르는 반면, 다른 자료는 그를 완다드 호르모즈의 아들 베흐자단이라고 명명하거나, 압바스 왕조 또는 알리드와 관련짓기도 한다.[3]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신빙성이 떨어진다.[3] 그는 페르시아인 출신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4] 메르브 또는 이스파한 인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3]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718/9년 또는 723/7년 사이로 추정된다.[3]

아부 무슬림의 아버지는 불분명하며, 어머니는 이란계 여성 노예로 추정된다. 유프라테스강 연안의 도시 쿠파 근교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스파한, 혹은 메르브[14]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아부 무슬림은 자신의 출신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말을 흐렸으며, 내부 분열을 막기 위해 일부러 출신을 숨겼다는 의견도 있다.

아부 무슬림은 노예, 혹은 마왈리(해방 노예)로서 아랍계 이주르 가문에 속했다. 741년메카에서 투옥되었다가 아바스 가문의 사람에 의해 석방되었다. 744년 쿠파에서 파견된 선전원과 함께 동방의 호라산 지방을 방문한 뒤 쿠파로 돌아왔다. 745년/746년 아바스 가문의 당주 이브라힘의 대리로서 다시 호라산에 파견되어 메르브로 갔다.[15] 우마이야 왕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초라한 당나귀를 타고 호라산에 나타났으며, 호라산에서 우마이야 왕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규합하고 비 이슬람교도에게 포교 활동을 했다.[15]

2. 2. 시아파 활동

그는 쿠파에서 성장했으며,[3] 그곳에서 노예이자 안장 제작자로 일했다.[5] 바누 일 부족의.[4] 아부 무슬림은 그곳에서 시아파 무슬림들과 접촉하게 되었다.[4]

당시 쿠파는 통치 세력인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는 사회적, 정치적 불안의 온상이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비 아랍인(''마왈리'')보다 아랍인을 선호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이슬람의 평등 약속을 위반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프들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과 알리드에 대한 박해는 경건한 사람들을 더욱 소외시켰다.[3] 이는 무함마드 가문의 일원이 통치하는 시아파의 대의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켰다. 이들은 신의 인도를 받는 ''이맘'' 또는 ''마흐디''로서 ''코란''과 ''순나''에 따라 통치하고 무슬림 공동체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 줄 진정한 이슬람 정부를 수립할 것이었다.

737년경, 그는 ''갈리''( "극단주의자, 이단") 알-무기라의 추종자들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4]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741/2년에 아바스 왕조의 주요 선교사들(''나캅'', 단수형 ''나키브'')이 메카로 가는 길에 그를 석방했다.[4] 그는 아바스 왕조 가문의 수장인 무함마드 이븐 알리 이븐 압달라에게 소개되었고, 그는 745/6년에 그를 호라산에서 선교 활동을 지휘하도록 보냈다.[4]

741년경에 아부 무슬림은 메카에서 투옥되었을 때 아바스 가문의 사람에 의해 석방되었다.[15] 744년에 아부 무슬림은 쿠파에서 파견된 선전원과 함께 동방의 호라산 지방을 방문한 뒤 쿠파로 귀환했다.[15]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비 이슬람교도에게 포교 활동을 했다.[15]

호라산, 그리고 일반적으로 칼리프국의 이란 동부는 아바스 왕조의 선교 활동을 위한 비옥한 토지를 제공했다.[3] 시리아의 우마이야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호라산은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많은 아랍 정착민 공동체가 있었고, 그 결과 많은 수의 현지 개종자가 생겨났으며, 아랍인과 이란인의 결혼도 이루어졌다. 끊임없는 전쟁에 노출된 변경 지방으로서, 현지 무슬림들은 군사적 경험이 풍부했고, 공동의 투쟁은 다마스쿠스의 중앙 집권적 경향과 시리아 총독의 수탈에 대한 공통된 반감과 함께 호라산의 아랍인과 현지 무슬림을 더욱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718/9년에 아바스 왕조는 12명의 ''나키브''를 이 지역에 파견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며, 740년에 자이드 이븐 알리의 반란이 실패한 후에야 아바스 왕조 선교 운동이 호라산에서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745년, 호라산의 카흐타바 이븐 샤비브 알-타이는 서쪽으로 가서 이브라힘 이븐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아부 무슬림은 그와 함께 동쪽으로 보내져 지휘권을 맡게 되었다.

아부 무슬림이 호라산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은 제3 피트나의 진행 중인 우마이야 내전의 영향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이 내전은 야만 부족과 카이스 부족 간의 갈등을 재점화했다. 이 지역의 많은 야만 세력은 오랫동안 통치해 온 나스르 이븐 사야르에 반대했고, 그를 그들의 챔피언인 주다이 알-키르마니로 교체하려 했다. 알-키르마니는 이븐 사야르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746년 말에 그를 지방 수도인 메르브에서 몰아냈으며, 총독은 카이스의 거점인 니샤푸르로 도망쳤다.

3. 아바스 혁명에서의 역할



747년 6월 15일, 아부 무슬림이 지휘하는 군대는 메르브 근교에서 압바스 왕조의 상징인 흑기를 내걸고 봉기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아부 무슬림의 군대는 흑색 군기와 의복을 사용했다. 주변 주민들이 잇달아 혁명군에 가담하여 병력은 7,000명에 달했으며, 시아파를 신봉하는 아랍인뿐만 아니라 민족 차별에 반감을 품은 이란계 이슬람교도도 종군했다.[15] 야만계 아랍인이 혁명군의 중핵을 구성했다. 혁명군 참가자는 자신의 이름과 출신 마을만 명부에 등록했으며, 각각 소속된 부족의 이름은 명부에서 제외되었다.

748년 2월 4일 아부 무슬림은 메르브를 점령하고, 우마이야 왕조의 호라산 총독 나스르 이븐 사야르를 추방했다. 같은 해 니샤푸르를 점령했다. 아부 무슬림은 740년대 후반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인 종파 지도자였던 비하파리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장군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아부 무슬림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정통 무슬림과 조로아스터교도 모두의 지원을 받았다.[6] 그의 휘하의 카프타바 이븐 샤힙, 하산 부자가 이끄는 혁명군은 서진하여, 748년 9월 2일 쿠파에 입성했다.

748년 8-9월경, 이브라힘이 우마이야 왕조에 체포되어 살해되자 아부 무슬림은 칼리프 선출에 강한 발언력을 행사했다. 749년 11월, 아부 무슬림과 혁명군은 이브라힘의 동생 아부 알 압바스 (사파)를 칼리프로 선출하고, 가장 먼저 바이야(충성의 맹세)를 했다. 아부 무슬림은 사파로부터 재상 아부 살라마의 살해를 의뢰받고, 자객을 고용하여 아부 살라마를 암살했다. 아부 살라마를 암살한 후, 아부 무슬림은 자신도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3. 1. 호라산에서의 활동



747년 6월 15일, 아부 무슬림이 지휘하는 군대는 메르브 근교에서 압바스 왕조의 상징인 흑기를 내걸고 봉기하였다.[15]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아부 무슬림의 군대는 흑색 일색의 군기와 의복을 사용했다. 주변 주민들이 잇달아 혁명군에 가담하여 병력은 7,000명에 달했으며, 시아파를 신봉하는 아랍인뿐만 아니라 민족 차별에 반감을 품은 이란계 이슬람교도도 종군했다.[15] 야만계 아랍인이 혁명군의 중핵을 구성했다. 혁명군 참가자는 자신의 이름과 출신 마을만 명부에 등록했으며, 각각 소속된 부족의 이름은 명부에서 제외되었다.

748년 2월 4일 아부 무슬림은 메르브를 점령하고, 우마이야 왕조의 호라산 총독 나스르 이븐 사야르를 추방했다. 같은 해 니샤푸르를 점령했다. 아부 무슬림은 740년대 후반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인 종파 지도자였던 비하파리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장군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아부 무슬림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정통 무슬림과 조로아스터교도 모두의 지원을 받았다.[6] 그의 휘하의 카프타바 이븐 샤힙, 하산 부자가 이끄는 혁명군은 서진하여, 748년 9월 2일 쿠파에 입성했다.

748년 8-9월경, 이브라힘이 우마이야 왕조에 체포되어 살해되자 아부 무슬림은 칼리프 선출에 강한 발언력을 행사했다. 749년 11월, 아부 무슬림과 혁명군은 이브라힘의 동생 아부 알 압바스 (사파)를 칼리프로 선출하고, 가장 먼저 바이야(충성의 맹세)를 했다. 아부 무슬림은 사파로부터 재상 아부 살라마의 살해를 의뢰받고, 자객을 고용하여 아부 살라마를 암살했다. 아부 살라마를 암살한 후, 아부 무슬림은 자신도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3. 2. 혁명의 성공



747년 12월(또는 748년 1월), 아부 무슬림은 메르브를 점령하여 우마이야 총독 나스르 이븐 사야르와 하와리즈의 칼리프 후보인 샤이반 알-하리지를 격파했다. 그는 호라산의 사실상 총독이 되었고, 740년대 후반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인 종파 지도자였던 비하파리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장군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아부 무슬림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정통 무슬림과 조로아스터교도 모두의 지원을 받았다.[6]

747년 6월 15일, 아부 무슬림이 지휘하는 군대는 메르브 근교에서 아바스 왕조의 상징인 흑기를 내걸고 봉기했다.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아부 무슬림의 군대는 흑색 군기와 의복을 사용했다. 주변 주민들이 잇달아 혁명군에 가담하여 병력은 7,000명에 달했으며, 시아파를 신봉하는 아랍인뿐만 아니라 민족 차별에 반감을 품은 이란계 이슬람교도도 종군했다.[15] 호라산으로 이주한 야만(예멘)계 아랍인이 혁명군의 중핵을 구성했다. 혁명군 참가자는 자신의 이름과 출신 마을만 명부에 등록했으며, 각각 소속된 부족의 이름은 명부에서 제외되었다. 748년 2월 4일 아부 무슬림은 메르브를 점령하고, 우마이야 왕조의 호라산 총독 나스르를 추방했다. 같은 해 748년에는 니샤푸르를 점령한다. 아부 무슬림이 기용한 인물 중에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이 많았으며, 그의 휘하의 카프타바 이븐 샤힙, 하산 부자가 이끄는 혁명군은 서진하여, 748년 9월 2일 쿠파에 입성했다.

748년 8-9월경, 이브라힘이 우마이야 왕조에 체포되어 살해된다. 남은 아바스 왕조의 인물 중에서 누가 칼리프가 되어 혁명을 주도할지 정해지지 않았고, 아부 무슬림은 칼리프 선출에 강한 발언력을 행사했다. 749년 11월, 아부 무슬림과 혁명군은 이브라힘의 동생 아부 알 압바스 (사파)를 칼리프로 선출하고, 가장 먼저 바이야(충성의 맹세)를 했다. 아부 무슬림은 사파로부터 재상 아부 살라마의 살해를 의뢰받고, 자객을 고용하여 아부 살라마를 암살했다. 아부 살라마를 암살한 후, 아마도 아부 무슬림은 자신도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4. 아바스 왕조 치하에서의 활동과 죽음

아바스 왕조가 수립된 후,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의 총독으로 남았다.[4] 이 직책에서 그는 750/1년에 부하라에서 일어난 샤리크 이븐 셰이크 알-마흐리의 시아파 봉기를 진압했고,[4]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정복을 더욱 발전시켜 아부 다우드 칼리드 이븐 이브라힘을 동쪽으로 원정 보냈다.[4] 또한 아미르 알 무함마드(무함마드 가문의 사령관)의 칭호를 얻었다.

"아부 무슬림이 이야기를 하는 남자를 꾸짖는 모습," 나시르 알딘 투시(Nasir al-Din Tusi)의 『나시리의 윤리』(『아흘라크-이 나시리』)의 삽화. 라호르에서 1590년에서 1595년 사이에 제작됨


그는 혁명에서의 영웅적인 역할과 군사적 기술, 그리고 시아파, 수니파, 조로아스터교도, 유대인, 기독교인에 대한 화해적인 정치 덕분에 대중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아부 무슬림은 발흐에 잔존하는 우마이야 왕조의 주둔군을 격파하고, 키슈, 부하라를 점령했다. 750년에는 석국(타슈켄트)이 당나라 장군 고선지의 공격을 받아 재보가 약탈당하고 국왕이 장안으로 보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석국 사람들은 당나라에 대한 신종을 파기하고 아부 무슬림에게 당나라 군대의 행위를 호소했고, 아부 무슬림은 부하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동방의 페르가나로 파견했다. 751년에 지야드 이븐 살리흐의 군대와 고선지의 군대는 타라스 근교에서 충돌했고, 아바스 군이 승리했다.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 중앙아시아의 토착 영주들에게 회유책을 써서 그들에게 자치를 인정하고 정복 시에 약속한 세액만을 징수하는 데 그쳤다. 종속된 토호 중에는 자진해서 아바스 혁명에 참여하여 이라크에 정주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영지에 머물며 아부 무슬림에게 종속했고, 호라산은 아부 무슬림과 영주들의 연합 정권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아부 알-아바스 알-사파는 그를 일반적으로 신뢰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권력을 경계하여 754년 하지를 위해 이라크에 도착했을 때 그의 측근을 500명으로 제한했다. 아부 알-아바스의 형제인 알-만수르(재위 754–775)는 알-사파에게 아부 무슬림의 영향력과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라고 여러 번 조언했다. 아부 무슬림이 더 많은 권력을 열망하고, 알-만수르를 멸시하며, 알-만수르가 자신의 지위에 아부 무슬림에게 빚을 졌다고 느끼면서 이러한 싫어함은 상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아부 무슬림은 지야드 이븐 살리흐 등 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를 지지하는 일파를 처형했다. 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의 형 아부 자파르(후의 칼리프 알 만수르)는 동생에게 아부 무슬림의 제거를 진언했지만, 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는 공적이 큰 아부 무슬림의 처형을 망설였다.

아바스 왕조 수립 후,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의 총독으로 남았다.[4] 그는 750/1년에 부하라에서 일어난 샤리크 이븐 셰이크 알-마흐리의 시아파 봉기를 진압하고,[4]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정복을 더욱 발전시켰다.[4] 혁명에서의 영웅적인 역할과 군사적 기술, 그리고 시아파, 수니파, 조로아스터교도, 유대인, 기독교인에 대한 화해적인 정치 덕분에 그는 대중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알-사파는 그를 신뢰했지만, 그의 권력을 경계하여 754년 하지를 위해 이라크에 도착했을 때 그의 측근을 500명으로 제한했다.

알-만수르(재위 754–775)는 알-사파에게 아부 무슬림의 영향력과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라고 여러 번 조언했다. 아부 무슬림이 더 많은 권력을 열망하고, 알-만수르를 멸시하며, 알-만수르가 자신의 지위에 아부 무슬림에게 빚을 졌다고 느끼면서 이러한 싫어함은 상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754년 아부 무슬림은 메카 대제의 순례단 총지휘에 입후보하지만, 총지휘는 역대 칼리프가 맡는 것이 관례였다. 결국, 사파는 아부 자파르에게 총지휘를 위임하고, 아부 무슬림에게는 보좌를 명했다. 순례 도중에 아부 무슬림과 아부 자파르 사이에 불화가 생기지만, 대립은 표면화되지 않았다. 순례 귀로에서, 아부 무슬림 일행은 사파의 부고를 접한다.

새로운 칼리프의 삼촌인 압둘라 이븐 알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알-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에게 이 반란을 진압하도록 요청했고, 그는 754년 11월 니시비스 전투에서 압둘라에게 승리를 거두고 압둘라를 조카에게 포로로 넘겼다. 압둘라는 결국 처형되었다.

압둘라의 반란이 진압된 후, 알-만수르는 자신의 시종 아부 알-카십을 보내 전리품을 조사하고 아부 무슬림을 시리아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관계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아부 무슬림과 알-만수르 사이의 점점 더 격렬해지는 서신 교환 이후, 아부 무슬림은 칼리프 앞에 나타나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했다. 만수르의 의도를 이해한 아부 무슬림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호라산으로 귀국하려 했다. 일설에 따르면 만수르는 시리아, 이집트를 통치하는 서방 총독 취임을 아부 무슬림에게 제안했지만,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의 포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불복종으로 인식되는 점, 호라산의 총독으로 그를 유지하겠다는 알-만수르의 약속, 그리고 일부 측근들의 확언, 그중 일부는 알-만수르에게 매수되었다는 점들을 결합하여 마음을 바꾸어 그의 앞에 나타나기로 결정했다. 755년 2월, 아부 무슬림은 적은 호위를 데리고 쿠파 근교의 하심이야로 향했다. 그는 755년 알-마다인에서 알-만수르를 만나기 위해 이라크로 갔다. 알-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열거했고, 아부 무슬림은 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칼리프에게 계속 상기시켰다. 아부 무슬림에게는 진디크 또는 이단자라는 혐의도 제기되었다.[7] 궁전을 방문한 아부 무슬림은, 만수르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죄목을 열거하며 책망받았고, 아부 무슬림은 변호 후에 적과의 싸움에 대비해 자신을 살려두라고 만수르에게 간청했지만, 만수르는 "너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알-만수르는 그런 다음 현관 뒤에 있는 다섯 명의 경호원에게 그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부 무슬림은 만수르가 배치한 자객들에게 살해당했고, 유해는 티그리스 강에 던져졌다. 그의 지휘관들은 이 살인에 동의하도록 매수되었다.

4. 1. 호라산 총독

아바스 왕조가 수립된 후,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의 총독으로 남았다.[4] 이 직책에서 그는 750/1년에 부하라에서 일어난 샤리크 이븐 셰이크 알-마흐리의 시아파 봉기를 진압했고,[4]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정복을 더욱 발전시켜 아부 다우드 칼리드 이븐 이브라힘을 동쪽으로 원정 보냈다.[4] 또한 아미르 알 무함마드(무함마드 가문의 사령관)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혁명에서의 영웅적인 역할과 군사적 기술, 그리고 시아파, 수니파, 조로아스터교도, 유대인, 기독교인에 대한 화해적인 정치 덕분에 대중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아부 무슬림은 발흐에 잔존하는 우마이야 왕조의 주둔군을 격파하고, 키슈, 부하라를 점령했다. 750년에는 석국(타슈켄트)이 당나라 장군 고선지의 공격을 받아 재보가 약탈당하고 국왕이 장안으로 보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석국 사람들은 당나라에 대한 신종을 파기하고 아부 무슬림에게 당나라 군대의 행위를 호소했고, 아부 무슬림은 부하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동방의 페르가나로 파견했다. 751년에 지야드 이븐 살리흐의 군대와 고선지의 군대는 타라스 근교에서 충돌했고, 아바스 군이 승리했다.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 중앙아시아의 토착 영주들에게 회유책을 써서 그들에게 자치를 인정하고 정복 시에 약속한 세액만을 징수하는 데 그쳤다. 종속된 토호 중에는 자진해서 아바스 혁명에 참여하여 이라크에 정주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영지에 머물며 아부 무슬림에게 종속했고, 호라산은 아부 무슬림과 영주들의 연합 정권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아부 알-아바스 알-사파는 그를 일반적으로 신뢰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권력을 경계하여 754년 하지를 위해 이라크에 도착했을 때 그의 측근을 500명으로 제한했다. 아부 알-아바스의 형제인 알-만수르(재위 754–775)는 알-사파에게 아부 무슬림의 영향력과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라고 여러 번 조언했다. 아부 무슬림이 더 많은 권력을 열망하고, 알-만수르를 멸시하며, 알-만수르가 자신의 지위에 아부 무슬림에게 빚을 졌다고 느끼면서 이러한 싫어함은 상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아부 무슬림은 지야드 이븐 살리흐 등 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를 지지하는 일파를 처형했다. 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의 형 아부 자파르(후의 칼리프 알 만수르)는 동생에게 아부 무슬림의 제거를 진언했지만, 아부 알 압바스 아스 사파는 공적이 큰 아부 무슬림의 처형을 망설였다.

4. 2. 알 만수르와의 갈등

아바스 왕조 수립 후,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의 총독으로 남았다.[4] 그는 750/1년에 부하라에서 일어난 샤리크 이븐 셰이크 알-마흐리의 시아파 봉기를 진압하고,[4]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정복을 더욱 발전시켰다.[4] 혁명에서의 영웅적인 역할과 군사적 기술, 그리고 시아파, 수니파, 조로아스터교도, 유대인, 기독교인에 대한 화해적인 정치 덕분에 그는 대중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알-사파는 그를 신뢰했지만, 그의 권력을 경계하여 754년 하지를 위해 이라크에 도착했을 때 그의 측근을 500명으로 제한했다.

알-만수르(재위 754–775)는 알-사파에게 아부 무슬림의 영향력과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라고 여러 번 조언했다. 아부 무슬림이 더 많은 권력을 열망하고, 알-만수르를 멸시하며, 알-만수르가 자신의 지위에 아부 무슬림에게 빚을 졌다고 느끼면서 이러한 싫어함은 상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754년 아부 무슬림은 메카 대제의 순례단 총지휘에 입후보하지만, 총지휘는 역대 칼리프가 맡는 것이 관례였다. 결국, 사파는 아부 자파르에게 총지휘를 위임하고, 아부 무슬림에게는 보좌를 명했다. 순례 도중에 아부 무슬림과 아부 자파르 사이에 불화가 생기지만, 대립은 표면화되지 않았다. 순례 귀로에서, 아부 무슬림 일행은 사파의 부고를 접한다.

새로운 칼리프의 삼촌인 압둘라 이븐 알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알-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에게 이 반란을 진압하도록 요청했고, 그는 754년 11월 니시비스 전투에서 압둘라에게 승리를 거두고 압둘라를 조카에게 포로로 넘겼다. 압둘라는 결국 처형되었다.

압둘라의 반란이 진압된 후, 알-만수르는 자신의 시종 아부 알-카십을 보내 전리품을 조사하고 아부 무슬림을 시리아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관계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아부 무슬림과 알-만수르 사이의 점점 더 격렬해지는 서신 교환 이후, 아부 무슬림은 칼리프 앞에 나타나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했다. 만수르의 의도를 이해한 아부 무슬림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호라산으로 귀국하려 했다. 일설에 따르면 만수르는 시리아, 이집트를 통치하는 서방 총독 취임을 아부 무슬림에게 제안했지만, 아부 무슬림은 호라산의 포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불복종으로 인식되는 점, 호라산의 총독으로 그를 유지하겠다는 알-만수르의 약속, 그리고 일부 측근들의 확언, 그중 일부는 알-만수르에게 매수되었다는 점들을 결합하여 마음을 바꾸어 그의 앞에 나타나기로 결정했다. 755년 2월, 아부 무슬림은 적은 호위를 데리고 쿠파 근교의 하심이야로 향했다. 그는 755년 알-마다인에서 알-만수르를 만나기 위해 이라크로 갔다. 알-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열거했고, 아부 무슬림은 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칼리프에게 계속 상기시켰다. 아부 무슬림에게는 진디크 또는 이단자라는 혐의도 제기되었다.[7] 궁전을 방문한 아부 무슬림은, 만수르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죄목을 열거하며 책망받았고, 아부 무슬림은 변호 후에 적과의 싸움에 대비해 자신을 살려두라고 만수르에게 간청했지만, 만수르는 "너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알-만수르는 그런 다음 현관 뒤에 있는 다섯 명의 경호원에게 그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부 무슬림은 만수르가 배치한 자객들에게 살해당했고, 유해는 티그리스 강에 던져졌다. 그의 지휘관들은 이 살인에 동의하도록 매수되었다.

4. 3. 아부 무슬림의 죽음에 대한 한국 내 시각

5. 유산과 영향

그의 살해는 호라산 주민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알-만수르가 사용한 잔혹한 방법에 대해 대중들 사이에 불만과 반란이 일어났다.[7] 그는 페르시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여러 페르시아 이단자들이 그가 죽지 않고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7] 후자에는 그의 선전 담당자였던 이샤크 알-투르크, 니샤푸르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순파드, 카이산파 시아파의 하위 종파인 아부 무슬림야, 그리고 알-무카나가 포함되었다. 심지어 바바크도 그에게서 혈통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중앙아시아, 이란, 아프가니스탄에는 아부 무슬림에 대한 다양한 전설과 숭배 형태가 존재한다. 특정 지역의 전통에 따라, 일부 지역 성인들은 아부 무슬림과의 가상적인 연관성을 통해 정당성을 얻는다.[13]

아부 무슬림 휘하의 군대는 만수르로부터 많은 금품을 받은 후 해산되었다.

아부 무슬림의 열렬한 숭배자는 많았고, 그들은 아부 무슬림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6세기에 성립된 마즈다크교의 흐름을 잇는 호람교는 아부 무슬림을 이맘으로 여겼다. 아부 무슬림의 봉기에 참여한 호람교도는 그의 죽음 후에 반 아랍, 반 아바스 왕조를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호라산 지방의 이슬람교도는 만수르에 의한 아부 무슬림 암살을 배신 행위로 받아들여, 아바스 왕조의 동방 지역에서 지지자들의 반란이 여러 번 발생했다. 776년에 아부 무슬림의 서기를 지낸 호라산 출신 하시므가 아부 무슬림 살해의 복수를 내걸고 '무칸나의 반란'으로 알려진 종교 반란을 일으켰다.[16]

5. 1. 민중 영웅으로서의 이미지

아부 무슬림의 살해는 호라산 주민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알 만수르의 잔혹한 처형 방식은 대중의 불만과 반란을 야기했다.[7] 그는 페르시아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았고, 여러 페르시아 이단자들은 그가 죽지 않고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7] 이들 중에는 그의 선전 담당자였던 이샤크 알-투르크, 니샤푸르의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순파드, 카이산파 시아파의 하위 종파인 아부 무슬림야, 알-무카나 등이 있었으며, 심지어 바바크도 그에게서 혈통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중앙아시아, 이란, 아프가니스탄에는 아부 무슬림에 대한 다양한 전설과 숭배 형태가 존재하며, 일부 지역 성인들은 아부 무슬림과의 가상적인 연관성을 통해 정당성을 얻기도 한다.[13]

아부 무슬림의 열렬한 숭배자들은 그의 죽음을 믿지 않고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6세기에 성립된 마즈다크교의 흐름을 잇는 호람교는 아부 무슬림을 이맘으로 여겼다. 호람교도는 그의 죽음 후에 반 아랍, 반 아바스 왕조를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호라산 지방의 이슬람교도는 만수르에 의한 아부 무슬림 암살을 배신 행위로 받아들였고, 아바스 왕조의 동방 지역에서 지지자들의 반란이 여러 번 발생했다. 776년에는 아부 무슬림의 서기를 지낸 호라산 출신 하시므가 아부 무슬림 살해의 복수를 내걸고 '무칸나의 반란'으로 알려진 종교 반란을 일으켰다.[16]

아부 무슬림은 키가 작고, 검은 피부에,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아랍어페르시아어를 모두 구사했으며, 많은 시를 암기하고 있었다.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로, 사건에 직면해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바스 가문의 이브라힘은 아부 무슬림의 재능을 "지하의 거석"과 같은 인간으로 평가했고, 칼리프 마문은 알렉산드로스 3세, 아르다시르 1세에 비견되는 영웅으로 평가했다.

5. 2. 종교적 영향

아부 무슬림의 몰락과 처형은 그의 이슬람 신앙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모바드 순파드와의 긴밀한 관계,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칭찬은 이러한 의혹을 증폭시켰다.[8][9]

고르간에서의 성공적인 군사 작전 이후, 한 부족민이 아부 무슬림의 경계를 피해 수염을 깎고 쿠스티를 착용하여 조로아스터교도인 척하며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 소식을 전했다는 기록은 그의 군대에 조로아스터교 출신이 있었음을 시사한다.[10] 또한, 아부 무슬림이 호라산의 모든 아랍어 사용자를 처형하려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10]

《정치학》에서 알-물크는 아부 무슬림이 조로아스터교 부흥에 능숙했다고 강조했다.[11] 그는 조로아스터교도들과 있을 때마다 "사산 왕조의 책에 따르면 아랍 제국은 끝났다. 나는 카바를 파괴하고 옛날처럼 태양을 우리의 키블라로 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1]

베하파리드의 이단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자신도 조로아스터교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Zand-i Wahman yasn과 Zaratosht-nama는 아부 무슬림을 비난하고 있어 중세 페르시아 전통의 조로아스터교 정통주의자들에게는 긍정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12]

아부 무슬림을 따르던 군대는 만수르에게 많은 금품을 받고 해산되었다. 아부 무슬림을 열렬히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믿지 않고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6세기에 성립된 마즈다크교의 흐름을 잇는 호람교는 아부 무슬림을 이맘으로 여겼다. 아부 무슬림의 봉기에 참여했던 호람교도들은 그의 죽음 이후 반 아랍, 반 아바스 왕조를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호라산 지방의 이슬람교도들은 만수르의 아부 무슬림 암살을 배신으로 여겼고, 아바스 왕조의 동방 지역에서 지지자들의 반란이 여러 번 발생했다. 776년에는 아부 무슬림의 서기를 지낸 호라산 출신 하시므가 아부 무슬림 살해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무칸나의 반란'을 일으켰다.[16]

5. 3. 문화적 영향

아부 무슬림에 관해 최소한 세 편의 서사 로맨스가 쓰였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의 『아크바르 아부 무슬림 사히브 앗다아와』(아랍어 소설), 아부 타히르 아타르투시의 『아부 무슬림 나마』(페르시아어 소설)가 그것이다. 술라이만 알바쌈은 쿠웨이트의 연출가로 역사극 「칼릴라 와 딤나 왕자들의 거울」이 있다.

참조

[1] 백과사전 Abū Muslim al-Khurāsānī Brill Online
[2] 웹사이트 Encyclopedia.com https://www.encyclop[...] 2019-08-30
[3] 문헌
[4] 문헌
[5] 웹사이트 Abu Muslim Biography, History, & Facts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1-12
[6] 웹사이트 ABBASIDES http://www.universal[...] 2019-06-28
[7]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Middle East https://archive.org/[...] Westview Press
[8] 서적 Mystics, Monarchs, and Messiahs: Cultural Landscapes of Early Modern Iran Harvard CMES 2002
[9] 서적 Islamic Iran and Central Asia (7th–12th centuries) https://www.worldcat[...] Variorum Reprints 1979
[10] 서적 The Persian Presence in the Islamic Worl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10-29
[11] 서적 The Book of Government, Or, Rules for Kings: The Siyar Al-Muluk, Or, Siyasat-nama of Nizam Al-Mulk Psychology Press
[12] 학술지 Apocalypse Now: Zoroastrian Reflections On the Early Islamic Centuries https://brill.com/vi[...] 2020-10-29
[13] 간행물 The Cult of Abu Muslim and His Companions in Central Asia: Variants of Mythologization in Etnograficheskoe Obozrenie
[14] 백과사전 ABŪ MOSLEM ḴORĀSĀNĪ http://www.iranicaon[...] 1983
[15] 서적 イスラーム帝国のジハード 講談社 2006-11
[16] 서적 世界各国史 山川出版社 1972-05
[17] 문헌
[18] 백과사전 Abū Muslim al-Khurāsānī Brill Online
[19] 웹사이트 Encyclopedia.com https://www.encyclop[...]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