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리차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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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암리차르 학살은 1919년 4월 13일, 영국령 인도 펀자브 암리차르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레지날드 다이어 준장의 명령에 따라 영국군이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인도에서 발생한 사회·경제적 불안과 롤라트 법에 대한 반발 속에서 일어났으며, 바이사키 축제를 기념하고 사티아팔과 사이푸딘 키치루의 체포에 항의하기 위해 잘리안왈라 바그에 모인 군중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이 가해졌다. 학살 이후 다이어는 지휘에서 해임되었지만, 영국 내에서는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인도 민족주의 운동을 격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기사 작위 포기,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 확산 등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1940년에는 마이클 오드와이어가 암살되었고, 잘리안왈라 바그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사건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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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차르 학살 | |
---|---|
사건 개요 | |
명칭 | 암리차르 학살 |
다른 명칭 |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 |
위치 | 인도 펀자브주 암리차르 잘리안왈라 바그 |
목표 | 잘리안왈라 바그에 모인 비폭력 시위대와 바이사키 순례자들 |
날짜 | 1919년 4월 13일 |
시간 | 저녁 시간 |
유형 | 학살 |
사망자 | 379명 – 1,500명 |
부상자 | 약 1,500명 |
가해자 | |
주체 | 영국령 인도 육군 |
지휘관 | 레지널드 다이어 준장 |
병력 | 제9구르카소총연대와 제54시크연대 소속 병사 51명 |
무기 | 리엔필드 소총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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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영국은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식민지 지배를 확대하며 점차 인도에 진출했다. 17세기 말까지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1757년의 플라시 전투에서도 프랑스를 꺾고 지배 규모를 확대했다. 마라타 전쟁과 시크 전쟁을 통해 번왕(마하라자)과 시크교도의 세력을 꺾는 데에도 성공했다. 실론 섬도 네덜란드로부터 빼앗아 빈 회의에서 승인을 얻고 세력이 쇠퇴한 무굴 제국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1857년에는 동인도 회사에서 고용했던 인도인 병사(세포이)에 의한 반란(인도 대반란)이 발발했다.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옹립했고 그 기세는 전 인도에 파급되었다. 그러나 반란군 측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동인도 회사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반란으로 동인도 회사는 해산되었다. 무굴 황제의 버마로의 추방으로 제국도 멸망하고, 당시 왕위에 있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를 겸임함으로써 영국 정부에 의한 전 인도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 인도 방위법 (1915) ====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령 인도는 인력과 자원을 제공하며 영국의 전쟁 노력에 기여했다. 수백만 명의 인도 군인과 노동자들이 유럽, 아프리카, 중동에서 복무했으며, 인도 행정부와 토후국들은 막대한 양의 식량, 돈, 탄약을 보냈다. 벵골과 펀자브는 반식민 활동의 근원지로 남아 있었다. 벵골에서 일어난 혁명 공격은 펀자브의 소요와 연관되어 지역 행정부를 거의 마비시킬 정도였다.[18][19] 이 중에서도 1915년 2월에 계획된 영국령 인도군 내의 범인도 반란은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인도, 미국, 독일의 인도 민족주의자들이 구상한 다수의 음모 중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계획된 2월 반란은 영국 정보국이 가다르 운동에 침투하여 핵심 인물들을 체포하면서 결국 좌절되었다. 인도 내의 소규모 부대와 수비대에서의 반란도 진압되었다. 영국의 전쟁 노력과 인도 내의 분리주의 운동의 위협을 배경으로, 시민 및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1915년 인도 방위법이 통과되었다. 당시 펀자브 부총독이었던 마이클 오드와이어는 이 법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는데, 이는 펀자브에서의 가다르 운동의 위협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20]
==== 롤라트 법 (1919) ====
장기간에 걸친 전쟁은 엄청난 돈과 인적 자원을 소모했다. 전쟁 중 높은 사상자, 전쟁 후 인플레이션 증가, 과도한 세금 부과, 치명적인 1918년 인플루엔자 대유행, 그리고 전쟁 중 무역의 혼란은 인도 내에서 인간의 고통을 심화시켰다. 전쟁 전의 인도 민족주의 정서는 인도 국민 회의의 온건파와 강경파가 분열을 끝내고 통일하면서 부활했다. 1916년, 국민 회의는 럭나우 협약을 성공적으로 수립했는데, 이는 전인도 무슬림 연맹과의 임시 동맹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정치적 양보와 화이트홀의 인도 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몬태규-체름스포드 개혁이 통과되면서 1917년 인도 아대륙에서 첫 번째 정치 개혁이 시작되었다.[21][22][23] 그러나 인도 정치 운동은 이러한 개혁이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최근 인도에 귀국한 마하트마 간디는 점점 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그의 지도력 아래 시민 불복종 운동이 정치적 불안의 표현으로 급속도로 성장했다.[24]
최근 진압된 가다르 음모, 라자 마헨드라 프라탑의 카불 원정의 아프가니스탄 주둔 (볼셰비키 러시아와의 연관성 가능성), 그리고 특히 펀자브와 벵골에서 여전히 활발한 혁명 운동 (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의 악화되는 시민 불안)으로 인해 1918년 영국-이집트 판사 시드니 롤라트가 위원장을 맡은 반역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위원회는 특히 펀자브와 벵골에서 인도 내 무장 운동에 대한 독일과 볼셰비키의 연관성을 평가하는 임무를 받았다.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시민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1915년 인도 방위법을 확대한 롤라트 법이 제정되었다.[20][25][26][27][28]
1919년 롤라트 법 통과는 인도 전역에서 대규모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다. 1919년,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아미르 하비불라의 암살과 그의 자리에 아마눌라 칸이 옹립된 직후에 시작되었다. 롤라트 법에 대한 반발로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봄베이 의원직에서 사임하면서 부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법안 통과와 통과 방식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사임을 제출합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그러한 법을 통과시키거나 승인하는 정부는 문명 정부라고 불릴 자격을 상실합니다."라고 썼다.[29] 롤라트 법에 대한 간디의 항의 촉구는 전례 없는 격렬한 불안과 항의의 반응을 얻었다.
2. 1. 인도 방위법 (1915)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령 인도는 인력과 자원을 제공하며 영국의 전쟁 노력에 기여했다. 수백만 명의 인도 군인과 노동자들이 유럽, 아프리카, 중동에서 복무했으며, 인도 행정부와 토후국들은 막대한 양의 식량, 돈, 탄약을 보냈다. 벵골과 펀자브는 반식민 활동의 근원지로 남아 있었다. 벵골에서 일어난 혁명 공격은 펀자브의 소요와 연관되어 지역 행정부를 거의 마비시킬 정도였다.[18][19] 이 중에서도 1915년 2월에 계획된 영국령 인도군 내의 범인도 반란은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인도, 미국, 독일의 인도 민족주의자들이 구상한 다수의 음모 중에서 가장 두드러졌다.계획된 2월 반란은 영국 정보국이 가다르 운동에 침투하여 핵심 인물들을 체포하면서 결국 좌절되었다. 인도 내의 소규모 부대와 수비대에서의 반란도 진압되었다. 영국의 전쟁 노력과 인도 내의 분리주의 운동의 위협을 배경으로, 시민 및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1915년 인도 방위법이 통과되었다. 당시 펀자브 부총독이었던 마이클 오드와이어는 이 법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는데, 이는 펀자브에서의 가다르 운동의 위협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20]
2. 2. 롤라트 법 (1919)
장기간에 걸친 전쟁은 엄청난 돈과 인적 자원을 소모했다. 전쟁 중 높은 사상자, 전쟁 후 인플레이션 증가, 과도한 세금 부과, 치명적인 1918년 인플루엔자 대유행, 그리고 전쟁 중 무역의 혼란은 인도 내에서 인간의 고통을 심화시켰다. 전쟁 전의 인도 민족주의 정서는 인도 국민 회의의 온건파와 강경파가 분열을 끝내고 통일하면서 부활했다. 1916년, 국민 회의는 럭나우 협약을 성공적으로 수립했는데, 이는 전인도 무슬림 연맹과의 임시 동맹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정치적 양보와 화이트홀의 인도 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몬태규-체름스포드 개혁이 통과되면서 1917년 인도 아대륙에서 첫 번째 정치 개혁이 시작되었다.[21][22][23] 그러나 인도 정치 운동은 이러한 개혁이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최근 인도에 귀국한 마하트마 간디는 점점 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그의 지도력 아래 시민 불복종 운동이 정치적 불안의 표현으로 급속도로 성장했다.[24]최근 진압된 가다르 음모, 라자 마헨드라 프라탑의 카불 원정의 아프가니스탄 주둔 (볼셰비키 러시아와의 연관성 가능성), 그리고 특히 펀자브와 벵골에서 여전히 활발한 혁명 운동 (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의 악화되는 시민 불안)으로 인해 1918년 영국-이집트 판사 시드니 롤라트가 위원장을 맡은 반역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위원회는 특히 펀자브와 벵골에서 인도 내 무장 운동에 대한 독일과 볼셰비키의 연관성을 평가하는 임무를 받았다.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시민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1915년 인도 방위법을 확대한 롤라트 법이 제정되었다.[20][25][26][27][28]
1919년 롤라트 법 통과는 인도 전역에서 대규모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다. 1919년,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아미르 하비불라의 암살과 그의 자리에 아마눌라 칸이 옹립된 직후에 시작되었다. 롤라트 법에 대한 반발로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봄베이 의원직에서 사임하면서 부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법안 통과와 통과 방식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사임을 제출합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그러한 법을 통과시키거나 승인하는 정부는 문명 정부라고 불릴 자격을 상실합니다."라고 썼다.[29] 롤라트 법에 대한 간디의 항의 촉구는 전례 없는 격렬한 불안과 항의의 반응을 얻었다.
2. 3. 인도 국민 회의와 무슬림 연맹의 협력
3. 학살 전 상황
펀자브 지역은 철도, 전신, 통신 시스템의 장애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30] 1919년 4월 첫째 주가 끝나기 전, 시위 운동은 절정에 달했고, 일부 기록에서는 "사실상 라호르 전체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아나르칼리 바자르를 통과한 엄청난 군중은 약 20,000명으로 추산"되었다고 한다.[30] 인도군 장교들은 1857년 반란과 같은 조직적인 반란의 가능성을 믿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31] 마이클 오드와이어 펀자브 부총독은 1857년 반란과 유사한 조직적인 반란이 5월경에 발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31] 암리차르 학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펀자브 행정부가 음모를 진압하기 위한 계획적인 결과였다고 일부 역사가들은 주장한다.[32] 제임스 하우스메인 듀 보울레이는 펀자브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가다르 봉기에 대한 두려움과 학살로 이어진 영국의 대응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33]
1919년 4월 10일, 마일스 어빙 암리차르 부관의 거주지에서 인도 독립 운동 지도자 사티아팔과 사이푸딘 키칠루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은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지지자였으나, 체포되어 비밀 장소로 이송되었다.[34] 군중에게 군사 초병이 발포하여 여러 시위대가 사망했고,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폭도들은 영국 은행에 방화 공격을 가하고, 영국인을 살해했으며, 영국 여성 두 명을 폭행했다.[34]
4월 11일, 영국 선교사 마르셀라 셔우드는 인도 어린이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학교를 폐쇄하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다 폭도들에게 폭행당했다.[35][36]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고빈드갈 요새로 피신한 그녀를 방문한 인도군 지휘관 다이어 준장은, 이 공격에 격분하여 그 거리를 이용하는 모든 인도 남성에게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도록 명령했다.[35][37][38] 그는 영국 조사관에게 "어떤 인도인들은 신 앞에서 얼굴을 아래로 하고 기어다닙니다. 저는 그들에게 영국 여성이 힌두 신만큼 신성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 역시 그녀 앞에서 기어가야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39] 그는 또한 라티 길이 내에서 인도 제국 경찰에게 현지인들에 대한 공개 채찍질을 허가했다.[38] 마르셀라 셔우드는 나중에 다이어를 "펀자브의 구세주"라고 묘사하며 옹호했다.[38]
이틀 동안 암리차르 시는 조용했지만, 펀자브의 다른 지역에서는 폭력이 계속되었다. 철도 노선이 끊기고, 전신 기둥이 파괴되었으며, 정부 건물이 불탔고, 유럽인 3명이 살해되었다. 4월 13일까지 영국 정부는 펀자브 대부분을 계엄령 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 법안은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포함한 여러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여, 4명 이상의 집회를 금지했다.[40]
4월 12일 저녁, 암리차르의 ''하르탈'' 지도자들은 힌두 칼리지-다브 카티칸에서 회의를 열었다.[41] 이 회의에서 한스 라지는 다음 날 16시 30분에 잘리안왈라 바그에서 공개 시위 집회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41] 이 집회는 무하마드 바시르가 조직하고, 존경받는 고위 의회 지도자인 랄 칸야랄 바티아가 의장을 맡을 것이었다. 로울라트 법, 영국 당국의 최근 조치, 사티야팔과 키칠루의 구금에 항의하는 일련의 결의안이 작성되어 승인된 후, 회의는 산회했다.[41]
3. 1. 펀자브 지역의 긴장 고조
펀자브 지역은 철도, 전신, 통신 시스템의 장애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4월 첫째 주가 끝나기 전, 시위 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사실상 라호르 전체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아나르칼리 바자르를 통과한 엄청난 군중은 약 20,000명으로 추산"되었다고 한다.[30] 인도군 장교들은 1857년 반란과 같은 형태로, 영국군이 여름을 위해 언덕으로 철수하는 5월경에 조직적인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믿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31]
암리차르 학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은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펀자브 행정부가 그러한 음모를 진압하기 위한 계획적인 결과로 묘사되었다.[32] 제임스 하우스메인 듀 보울레이는 펀자브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가다르 봉기에 대한 두려움과 학살로 이어진 영국의 대응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33]
1919년 4월 10일, 마일스 어빙 암리차르 부관의 거주지에서 인도 독립 운동 지도자 사티야팔과 사이푸딘 키칠루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34] 군중에게 군사 초병이 발포하여 여러 시위대가 사망하면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폭도들은 영국 은행에 방화 공격을 가하고 영국인을 살해했으며, 두 명의 영국 여성을 폭행했다.[34]
4월 11일, 영국 선교사 마르셀라 셔우드는 폭행을 당했다.[35][36] 4월 19일, 인도군 지휘관 다이어 준장은 이 공격에 격분하여 그 거리를 이용하는 모든 인도 남성에게 손과 무릎으로 그 길을 기어가도록 명령했다.[35][38] 다이어는 라티 길이 내에서 인도 제국 경찰에게 현지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개 채찍질을 허가했다.[39]
이틀 동안 암리차르 시는 조용했지만, 펀자브의 다른 지역에서는 폭력이 계속되었다. 철도 노선이 끊기고, 전신 기둥이 파괴되었으며, 정부 건물이 불탔고, 유럽인 3명이 살해되었다. 4월 13일까지 영국 정부는 펀자브 대부분을 계엄령 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 법안은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포함한 여러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여, 4명 이상의 집회를 금지했다.[40]
4월 12일 저녁, 암리차르의 ''하르탈'' 지도자들은 회의를 열고, 다음 날 16시 30분에 잘리안왈라 바그에서 공개 시위 집회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41]
3. 2. 사티아팔과 사이푸딘 키칠루의 체포
1919년 4월 10일, 암리차르 부관 마일스 어빙의 거주지에서 인도 독립 운동 지도자 사티아팔과 사이푸딘 키칠루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34] 이들은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지지자였으나, 체포되어 비밀 장소로 이송되었다.[34] 군대가 군중에게 발포하여 여러 시위대가 사망했고,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34] 폭도들은 영국 은행에 방화 공격을 가하고 영국인을 살해했으며, 영국 여성 두 명을 폭행했다.[34]3. 3. 마르셀라 셔우드 폭행 사건
1919년 4월 11일, 약 600명의 인도 어린이의 안전을 염려한 영국의 선교사 마르셀라 셔우드는 학교를 폐쇄하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길을 나섰다.[35][36] 쿠차 쿠리찬이라는 좁은 거리를 지나던 중, 그녀는 폭도들에게 붙잡혀 폭행을 당했다. 그녀는 현지 인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학생의 아버지 중 한 명이 폭도로부터 그녀를 숨겨 고빈드갈 요새로 안전하게 데려갔다.[35][37]4월 19일 셔우드를 방문한 후, 인도군 지휘관인 다이어 준장은 이 공격에 격분하여 그 거리를 이용하는 모든 인도 남성에게 손과 무릎으로 그 길을 기어가도록 명령했다.[35][38] 다이어는 영국 조사관에게 "어떤 인도인들은 신 앞에서 얼굴을 아래로 하고 기어다닙니다. 저는 그들에게 영국 여성이 힌두 신만큼 신성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 역시 그녀 앞에서 기어가야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39] 그는 또한 라티 길이 내에서 인도 제국 경찰의 경찰관에게 다가오는 현지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개 채찍질을 허가했다. 마르셀라 셔우드는 나중에 다이어를 옹호하며 그를 "펀자브의 구세주"라고 묘사했다.[38]
3. 4. 계엄령 선포
펀자브 지역은 철도, 전신, 통신 시스템의 장애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30] 1919년 4월 첫째 주가 끝나기 전, 시위 운동은 절정에 달했고, 일부 기록에서는 "사실상 라호르 전체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아나르칼리 바자르를 통과한 엄청난 군중은 약 20,000명으로 추산"되었다고 한다.[30] 인도군 장교들은 1857년 반란과 같은 조직적인 반란의 가능성을 믿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31]
1919년 4월 10일, 마일스 어빙 암리차르 부관의 거주지에서 인도 독립 운동 지도자 사티야팔과 사이푸딘 키칠루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은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사티아그라하 운동의 지지자였으나, 체포되어 비밀 장소로 이송되었다. 군중에게 군사 초병이 발포하여 여러 시위대가 사망했고,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폭도들은 영국 은행에 방화 공격을 가하고, 영국인을 살해했으며, 영국 여성 두 명을 폭행했다.[34]
4월 11일, 영국 선교사 마르셀라 셔우드는 인도 어린이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학교를 폐쇄하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다 폭도들에게 폭행당했다.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고빈드갈 요새로 피신한 그녀를 방문한 인도군 지휘관 다이어 준장은, 이 공격에 격분하여 그 거리를 이용하는 모든 인도 남성에게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도록 명령했다.[35][37][38] 그는 영국 조사관에게 "어떤 인도인들은 신 앞에서 얼굴을 아래로 하고 기어다닙니다. 저는 그들에게 영국 여성이 힌두 신만큼 신성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 역시 그녀 앞에서 기어가야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39] 그는 또한 라티 길이 내에서 인도 제국 경찰에게 현지인들에 대한 공개 채찍질을 허가했다.[38]
이틀 동안 암리차르 시는 조용했지만, 펀자브의 다른 지역에서는 폭력이 계속되었다. 철도 노선이 끊기고, 전신 기둥이 파괴되었으며, 정부 건물이 불탔고, 유럽인 3명이 살해되었다. 4월 13일까지 영국 정부는 펀자브 대부분을 계엄령 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 법안은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포함한 여러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여, 4명 이상의 집회를 금지했다.[40]
3. 5. 잘리안왈라 바그 집회 계획
1919년 4월 초, 펀자브 지역은 철도, 전신, 통신 시스템의 장애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30] 인도군 장교들은 가다르 봉기와 같은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여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33] 마이클 오드와이어 펀자브 부총독은 1857년 반란과 유사한 조직적인 반란이 5월경에 발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31] 암리차르 학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펀자브 행정부가 음모를 진압하기 위한 계획적인 결과였다고 일부 역사가들은 주장한다.[32]4월 10일, 마일스 어빙 암리차르 부관의 거주지에서 인도 독립 운동 지도자 사티야팔과 사이푸딘 키칠루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34] 군중에게 군사 초병이 발포하여 여러 시위대가 사망했고,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폭도들은 영국 은행에 방화 공격을 가하고 영국인을 살해했으며, 영국 여성 2명을 폭행했다.[34]
4월 11일, 영국 선교사 마르셀라 셔우드가 폭도들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5][36] 고빈드갈 요새로 피신한 셔우드를 방문한 다이어 준장은 이 공격에 격분하여 해당 거리를 이용하는 모든 인도 남성에게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도록 명령했다.[35][37][38] 그는 영국 조사관에게 "어떤 인도인들은 신 앞에서 얼굴을 아래로 하고 기어다닙니다. 저는 그들에게 영국 여성이 힌두 신만큼 신성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 역시 그녀 앞에서 기어가야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39] 그는 또한 라티 길이 내에서 인도 제국 경찰에게 현지인들에 대한 공개 채찍질을 허가했다.[38]
이틀 동안 암리차르 시는 조용했지만, 펀자브의 다른 지역에서는 폭력이 계속되었다. 철도 노선이 끊기고, 전신 기둥이 파괴되었으며, 정부 건물이 불타고, 유럽인 3명이 살해되었다. 4월 13일, 영국 정부는 펀자브 대부분을 계엄령 하에 두기로 결정하고, 4명 이상의 집회를 금지했다.[40]
4월 12일 저녁, 암리차르의 ''하르탈'' 지도자들은 힌두 칼리지-다브 카티칸에서 회의를 열었다.[41] 이 회의에서 한스 라지는 다음 날 16시 30분에 잘리안왈라 바그에서 공개 시위 집회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41] 이 집회는 무하마드 바시르가 조직하고 랄 칸야랄 바티아가 의장을 맡아 로울라트 법과 영국 당국의 조치, 사티야팔과 키칠루의 구금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다룰 예정이었다.[41]
4. 암리차르 학살 (1919년 4월 13일)
1919년 4월 13일 일요일, 레지날드 다이어 준장은 대규모 봉기가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하여 모든 집회를 금지했다. 하지만 이 통지는 널리 배포되지 않았고, 많은 마을 사람들은 잘리안왈라 바그에 모여 바이사키 축제를 기념하고, 두 민족 지도자 사티아팔과 사이푸딘 키치루의 체포 및 추방에 평화적으로 항의했다.[43]
집회가 예정대로 17시 30분에 시작된 지 한 시간 후, 다이어는 50명의 병력과 함께 바그에 도착했다. 50명 모두 .303 리-엔필드 볼트 액션 소총으로 무장했다. 그는 영국에 대한 충성이 입증된 구르카와 시크족 출신 병사들을 특별히 선택했을 수 있다.[46] 그는 또한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 2대를 가져왔지만, 차량은 좁은 입구를 통과할 수 없어 바깥에 세워둬야 했다. 잘리안왈라 바그는 모든 면이 집과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고, 좁은 출구가 5개밖에 없었고, 대부분 영구적으로 잠겨 있었다. 주요 입구는 비교적 넓었지만,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병력에 의해 겹겹이 경계되어 아무도 나갈 수 없게 했다.
군중에게 해산을 경고하지 않고, 다이어는 악랄하게도 병력에게 주요 출구를 막고, 공황 상태에 빠진 군중이 바그를 떠나려 했던, 이용 가능한 좁은 출구 앞의 군중 밀집 지역을 향해 사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50][47] 사격은 약 10분 동안 계속되었다. 남녀노소, 어린이 등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암리차르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병력이 탄약의 약 3분의 1을 발사한 후 휴전이 명령되었다.[50][47] 다이어는 후에 이 조치의 목적이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복종에 대한 인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진술했다.[48] 그는 학살을 정당화하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혀 뉘우치지 않는 뻔뻔함을 보였다.
다음 날, 다이어는 보고서에서 "군중 200명에서 300명이 살해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제 부대는 1,650발을 발사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49][50]
사격으로 직접 사망한 많은 사람들 외에도, 좁은 문에서의 압사나, 사격을 피하기 위해 구내의 외로운 우물에 뛰어들어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독립 후 현장에 설치된 현판에는 우물에서 120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고 적혀 있다. 다이어는 평소보다 더 이른 통행금지 시간을 부과했고, 그 결과 부상자들은 쓰러진 곳에서 옮겨질 수 없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밤중에 부상으로 사망했다.[51]
4. 1. 바이사키 축제와 집회
1919년 4월 13일 일요일, 다이어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모든 집회를 금지했지만, 이 통지는 널리 배포되지 않았다.[43] 많은 마을 사람들은 바이사키 축제를 기념하고, 사티아팔과 사이푸딘 키치루의 체포 및 추방에 평화적으로 항의하기 위해 바그에 모였다.[43]1919년 4월 13일 오전 9시, 다이어는 암리차르를 돌며 도시 출입 통행증, 통행금지, 4명 이상의 공공 집회 금지를 발표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44]
오후 중반, 수천 명의 인도인들이 하르만디르 사히브 근처 잘리안왈라 바그에 모였다.[46] 참석자들은 골든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그를 지나가거나, 연례 바이사키 말 및 가축 박람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었다.[46] 도시 경찰이 그날 오후 14시에 박람회를 폐쇄했기 때문에, 박람회 참석자들은 잘리안왈라 바그로 흘러 들어갔다.
바그는 약 6-7에이커 크기의 열린 공간으로, 모든 면이 높이 약 10피트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46] 3~4층 높이의 집 발코니가 바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5개의 좁은 입구가 바그로 열려 있었으며, 그중 몇몇은 잠금 가능한 문이 있었다.[46] 바그 중앙에는 ''사마디'' (화장터)와 큰 우물이 있었다.[46]
헌터 위원회는 다이어가 도착했을 때 10,000명에서 20,000명 사이의 군중이 모였다고 추정했다.[46][53] 다이어와 암리차르의 최고 민간 권력자인 부서장 어빙은 군중의 집회를 막거나 평화적으로 해산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46][53]
집회가 예정대로 17시 30분에 시작된 지 한 시간 후, 다이어는 5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그에 도착했다.[46] 50명 모두 .303 리-엔필드 볼트 액션 소총으로 무장했고, 다이어는 영국에 대한 충성이 입증된 구르카와 시크족 출신 병사들을 특별히 선택했을 수 있다.[46] 그는 또한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 2대를 가져왔지만, 차량은 좁은 입구를 통해 진입할 수 없었다.[46] 잘리안왈라 바그는 모든 면이 집과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고, 좁은 입구가 5개밖에 없었고, 대부분 영구적으로 잠겨 있었다.[46] 주요 입구는 비교적 넓었지만,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병력에 의해 겹겹이 경계되어 아무도 나갈 수 없게 했다.
군중에게 해산을 경고하지 않고, 다이어는 병력에게 주요 출구를 막고 사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50][47] 사격은 약 10분 동안 계속되었고, 남녀노소, 어린이 등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50][47] 이 사건은 암리차르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50][47] 병력이 탄약의 약 3분의 1을 발사한 후 휴전이 명령되었다.[50][47] 다이어는 나중에 이 조치의 목적이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복종에 대한 인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진술했다.[48]
다음 날, 다이어는 보고서에서 "군중 200명에서 300명이 살해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제 부대는 1,650발을 발사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49][50] 사격으로 직접 사망한 사람들 외에도, 좁은 문에서의 압사나, 사격을 피하기 위해 우물에 뛰어들어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51] 독립 후 현장에 설치된 현판에는 우물에서 120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고 적혀 있다.[51]
4. 2. 다이어 준장의 발포 명령
1919년 4월 13일 일요일, 다이어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하여 모든 집회를 금지했다. 하지만 이 통지는 널리 배포되지 않았고, 많은 마을 사람들은 바그에 모여 바이사키 축제를 기념하고, 두 민족 지도자 사티아팔과 사이푸딘 키치루의 체포 및 추방에 평화적으로 항의했다.[43]다이어는 비행기를 동원하여 바그 위를 비행하며 군중의 규모를 추정했고, 약 6,000명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헌터 위원회는 다이어가 도착했을 때 10,000명에서 20,000명 사이의 군중이 모였다고 추정했다.[46][53] 다이어와 암리차르의 최고 민간 권력자인 부서장 어빙은 군중의 집회를 막거나 평화적으로 해산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다이어와 어빙 모두에게 심각한 비판이 되었다.
집회가 예정대로 17시 30분에 시작된 지 한 시간 후, 다이어는 50명의 병력과 함께 바그에 도착했다. 50명 모두 .303 리-엔필드 볼트 액션 소총으로 무장했다. 그는 영국에 대한 충성이 입증된 구르카와 시크족 출신 병사들을 특별히 선택했을 수 있다.[50] 그는 또한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 2대를 가져왔지만, 차량은 좁은 입구를 통과할 수 없어 바깥에 세워둬야 했다.[47] 잘리안왈라 바그는 모든 면이 집과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고, 좁은 출구가 5개밖에 없었고, 대부분 영구적으로 잠겨 있었다. 주요 입구는 비교적 넓었지만,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병력에 의해 겹겹이 경계되어 아무도 나갈 수 없게 했다.
군중에게 해산을 경고하지 않고, 다이어는 병력에게 주요 출구를 막고, 공황 상태에 빠진 군중이 바그를 떠나려 했던, 이용 가능한 좁은 출구 앞의 군중 밀집 지역을 향해 사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50][47] 사격은 약 10분 동안 계속되었다. 남녀노소, 어린이 등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암리차르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병력이 탄약의 약 3분의 1을 발사한 후 휴전이 명령되었다.[50][47] 그는 나중에 이 조치의 목적이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복종에 대한 인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진술했다.[48]
다음 날, 다이어는 보고서에서 "군중 200명에서 300명이 살해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제 부대는 1,650발을 발사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49][50]
사격으로 직접 사망한 많은 사람들 외에도, 좁은 문에서의 압사나, 사격을 피하기 위해 구내의 외로운 우물에 뛰어들어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독립 후 현장에 설치된 현판에는 우물에서 120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고 적혀 있다. 다이어는 평소보다 더 이른 통행금지 시간을 부과했고, 그 결과 부상자들은 쓰러진 곳에서 옮겨질 수 없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밤중에 부상으로 사망했다.[51]
4. 3. 사상자 수
총 사상자 수는 논쟁의 대상이다. 다음 날 신문은 연합 통신에서 제공한 200명의 사상자라는 잘못된 초기 수치를 인용했다.[52] 펀자브 정부는 헌터 위원회로부터 정확한 수치를 수집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200명이라는 동일한 대략적인 수치만 제시했다. 펀자브의 한 고위 공무원은 실제 수치가 더 높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53] 세와 사미티(Sewa Samiti)는 독립적인 조사를 통해 379명의 사망자와 192명의 중상자를 보고했다. 헌터 위원회는 379명의 사망자와 그 수의 약 3배에 해당하는 부상자를 근거로 1,500명의 사상자를 제시했다.[53] 제국 입법 위원회 회의에서 판디트 마단 모한 말비야가 주도한 조사 결과 사망자 중 42명의 소년이 있었으며, 그중 막내는 불과 7개월이었다.[54] 헌터 위원회는 남성 337명, 소년 41명, 6주 된 아기의 사망을 확인했다.[53]1919년 7월, 학살 3개월 후, 관리들은 사망자를 찾기 위해 도시 주민들에게 사망한 사람에 대한 자발적인 정보를 요청했다.[53] 그러나 이 정보는 참여자들이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식별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사망자 중 일부는 해당 지역에 가까운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불완전했다.[53][55]
윈스턴 처칠은 1920년 7월 8일 웨스트민스터 의회에 거의 400명이 학살당하고 그 수의 3, 4배가 부상당했다고 보고했다.[56]
공식 수치는 군중 규모, 발사된 탄약 수, 사격 기간에 대해 명백히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인도 국민 회의는 자체 조사를 실시했으며 그 결과는 영국 정부의 조사와 상당히 달랐다. 회의가 인용한 사상자 수는 1,500명 이상이었으며 약 1,000명이 사망했다.[57] 인도 민족주의자 스와미 슈라다난다는 간디에게 이 사건으로 1,500명이 사망했다고 편지를 썼다.[58]
영국 정부는 학살에 대한 정보 공개를 억제하려 했지만,[59] 소식은 인도에 퍼져 광범위한 분노를 일으켰고, 학살의 세부 사항은 1919년 12월이 되어서야 영국에 알려졌다.[60][61][62]
5. 학살 이후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온건파 인도인들이 영국 통치를 불신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었다.[63] 윌리엄 베이논 소장은 다이어의 조치가 옳았다고 승인했으며,[64] 암리차르와 다른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65][66] 며칠 동안 수천 명이 구금되었고, 일부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보안군에 의해 최소 115명이 사망했다.[67]
윈스턴 처칠과 H. H. 애스퀴스는 이 공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68] 1920년 7월 8일 하원 토론에서 처칠은 군중이 몽둥이 외에는 무장하지 않았고, 좁은 장소에 갇혀 도망치려 했으나 총알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다.[69] 하원 투표 결과, 의원들은 다이어에 반대하는 247 대 37로 정부를 지지했다.[70] 그러나 많은 영국인들은 다이어를 영웅으로 생각했다.[71]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919년 5월 22일 학살 소식을 접하고, 항의의 표시로 영국 기사 작위를 포기했다.[72] 그는 첼름스포드 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인간에게 적합하지 않은 굴욕을 겪을 수 있는, 소위 중요하지 않은 동포들의 곁에서 모든 특별한 칭호를 벗고 싶다"고 밝혔다.[73]
1919년 4월 6일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시작된 비폭력 저항 운동(사티아그라하)은 암리차르 학살을 계기로 크게 진전되었다. 사티아그라하 운동 이념은 간디가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할 때도 이어졌다.
사건은 8개월 동안 세계의 이목에서 숨겨져 있었으며, 1920년 5월 26일, 인도 군무 대신이 총독 앞으로 보낸 공문에는 이 기간 동안의 사정이 기록되어 있었다.[124]
잘리안왈라 바그의 군중에 대해 해산 경고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고 다이어 준장은 즉시 발포 명령을 내려 약 10분 동안 저격을 계속하게 했다. 발사된 총탄은 1,650발이었으며, 사망자는 3,079명으로 계획되었다. 부상자의 수는 정확하게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헌터 위원회는 아마 사망자의 3배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24]
아흐메다바드에서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28명의 인도인이 살해당하고 125명이 부상을 입었다. 라호르에서는 6,000명의 군중에게 사격이 가해졌고, 장갑 열차가 마을 안이나 군중 사이에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폭탄과 기관총은 비행기에서도 사용되었고, 한 비행사는 쿠할사 고등학교를 폭파했다.[124] 다이어 준장은 대령으로 강등된 후 파면되었으나, 상원의 보수파 비호와 건강 상태 악화로 기소되지는 않았다.[126]
5. 1.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격화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온건파 인도인들이 영국 통치를 불신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었다.[63] 윌리엄 베이논 소장은 다이어의 조치가 옳았다고 승인했으며,[64] 암리차르와 다른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65][66] 며칠 동안 수천 명이 구금되었고, 일부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보안군에 의해 최소 115명이 사망했다.[67]윈스턴 처칠과 H. H. 애스퀴스는 이 공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68] 1920년 7월 8일 하원 토론에서 처칠은 군중이 몽둥이 외에는 무장하지 않았고, 좁은 장소에 갇혀 도망치려 했으나 총알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다.[69] 하원 투표 결과, 의원들은 다이어에 반대하는 247 대 37로 정부를 지지했다.[70] 그러나 많은 영국인들은 다이어를 영웅으로 생각했다.[71]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919년 5월 22일 학살 소식을 접하고, 항의의 표시로 영국 기사 작위를 포기했다.[72] 그는 첼름스포드 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인간에게 적합하지 않은 굴욕을 겪을 수 있는, 소위 중요하지 않은 동포들의 곁에서 모든 특별한 칭호를 벗고 싶다"고 밝혔다.[73]
1919년 4월 6일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시작된 비폭력 저항 운동(사티아그라하)은 암리차르 학살을 계기로 크게 진전되었다. 사티아그라하 운동 이념은 간디가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할 때도 이어졌다.
사건은 8개월 동안 세계의 이목에서 숨겨져 있었으며, 1920년 5월 26일, 인도 군무 대신이 총독 앞으로 보낸 공문에는 이 기간 동안의 사정이 기록되어 있었다.[124]
잘리안왈라 바그의 군중에 대해 해산 경고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고 다이어 준장은 즉시 발포 명령을 내려 약 10분 동안 저격을 계속하게 했다. 발사된 총탄은 1,650발이었으며, 사망자는 3,079명으로 계획되었다. 부상자의 수는 정확하게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헌터 위원회는 아마 사망자의 3배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24]
아흐메다바드에서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28명의 인도인이 살해당하고 125명이 부상을 입었다. 라호르에서는 6,000명의 군중에게 사격이 가해졌고, 장갑 열차가 마을 안이나 군중 사이에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폭탄과 기관총은 비행기에서도 사용되었고, 한 비행사는 쿠할사 고등학교를 폭파했다.[124] 다이어 준장은 대령으로 강등된 후 파면되었으나, 상원의 보수파 비호와 건강 상태 악화로 기소되지는 않았다.[126]
5. 2. 영국 내 반응
5. 3.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기사 작위 포기
사건은 8개월 동안 세계의 이목에서 숨겨져 있었다. 1920년 5월 26일, 인도 군무 대신이 총독 앞으로 보낸 공문에는 이 기간 동안의 사정이 다음과 같이 채록되어 있었다.[124]"잘리안왈라 바그의 군중에 대해 해산 경고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이어 준장은 그 부대를 전개하여 즉시 발포 명령을 내리고 광장 안의 밀집한 군중 - 그들은 약 5천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 을 향해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약 10분 동안 저격을 계속하게 했다. 발사된 총탄은 1,650발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는 3,079명으로 계획되었다. 부상자의 수는 정확하게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헌터 위원회는 아마 사망자의 3배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서부의 아흐메다바드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124]
"아흐메다바드에서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28명의 인도인이 살해당하고 125명이 부상을 입었다. 라호르에서는 6,000명의 군중에게 사격이 가해졌지만, 테러는 더욱 농촌까지 미쳤다. 장갑 열차가 도착하여 '별일 아니다, 단지 인상을 주기 위해' 마을 안이나 군중 사이에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폭탄과 기관총은 비행기에서도 사용되었고, 사실 한 비행사는 쿠할사 고등학교를 폭파했다. 다이어 준장의 뻔뻔한 '포복 명령'(특정 거리를 통행하는 인도인은 모두 손과 발로 기어가야 한다는 명령) 만은, 변명을 일삼은 다수파 보고서의 지지를 꺼렸고, 그는 그 지위를 빼앗겼지만, 그러나 인도인에 의해 테러 정책의 책임자로 여겨진 마이클 오드와이어/Michael O'Dwyer영어 (펀자브 부총독) 및 총독 체름스포드 경은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칭찬받을 정도였다."
1919년 4월 6일에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시작된 비폭력 저항 운동 (사티아그라하)은 이 사건을 계기로 크게 진전하게 되었다. 사티아그라하의 운동 이념은 나중에 간디가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할 때에도 이어졌다.
다이어 준장의 행동은 영국 정부로부터도 엄하게 비난받아 대령으로 강등된 후 파면되었다. 그러나 상원의 보수파가 비호한 것과 본인의 건강 상태 악화로 인해 기소되지는 않았다 (다이어는 1927년에 사망했지만,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악역을 떠맡았다고도 한다). 1940년 3월 13일, 마이클 오드와이어/Michael O'Dwyer영어는 사건의 생존자에 의해 런던에서 사살되었다.[126]
5. 4. 헌터 위원회 조사
1919년 10월 14일, 에드윈 몬터규 영국령 인도 제국 국무장관의 명령에 따라 인도 정부는 펀자브 지역의 사건에 대한 조사 위원회 구성을 발표했다.[76][77] '혼란 조사 위원회'로 불렸지만, 위원회는 의장 윌리엄 헌터 경의 이름을 따서 헌터 위원회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76][77] 위원회의 공식적인 목적은 "봄베이, 델리 및 펀자브 지역의 최근 소요 사태의 원인과 이에 대처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었다.[76][77]위원회 위원은 다음과 같다.
- 헌터 경, 위원회 의장
- 조지 C. 랭킨 캘커타 판사
- 시르 치만랄 하릴랄 세탈바드, 봄베이 대학교 부총장 겸 봄베이 고등 법원 변호사
- W.F. 라이스, 내무부 위원
- 조지 배로우 소장, KCB, KCMG, 페샤와르 사단 지휘관
- 판디트 자갓 나라얀, 변호사 겸 연합 주 입법 위원회 위원
- 토마스 스미스, 연합 주 입법 위원회 위원
- 사르다르 사히브자다 술탄 아흐마드 칸, 괄리오르 주 출신 변호사
- H.C. 스토크스, 위원회 서기 겸 내무부 위원[77]
10월 29일 뉴델리에서 회의를 가진 후, 위원회는 다음 몇 주 동안 증인들의 진술을 받았다.[78] 델리, 아흐메다바드, 봄베이, 라호르에서 증인들이 소환되었다. 위원회는 아나르칼리 바자르 근처의 라호르 타운 홀에서 공식 회의를 열었다.[77]
레지날드 다이어는 11월 19일에 위원회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았다. 다이어는 그날 12시 40분에 잘리안왈라 바그에서 회의가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막으려 시도하지 않았고,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면 의도적으로 발포할 의도로 바그에 갔다고 진술했다.[77] 그는 바그의 군중이 "제 병력을 고립시키고 저를 다른 보급품으로부터 차단하려는 반란군" 중 하나였다고 믿었다고 말했다.[77]
시르 치만랄 세탈바드는 다이어에게 장갑차가 들어갈 수 있었다면 기관총으로 발포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상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질문했다.[77] 다이어는 이에 동의했다.[77] 그는 또한 자신의 의도는 펀자브 전체에 공포를 조성하여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고 진술했다.[80] 그는 사격 후 부상자를 돌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81]
1920년 3월 8일에 발표된 6권의 증거로 구성된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는 다이어의 행동을 만장일치로 비난했다.[77] 보고서는 다이어가 오랫동안 사격을 계속한 것은 심각한 실수라고 지적했다.[82] 반대하는 위원들은 계엄령의 무력 사용이 전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다이어 장군은 반란을 진압했다고 생각했고, 마이클 오드와이어 경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진압해야 할 반란은 없었다"고 썼다.
위원회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 처음에 바그에서 해산하라는 통보가 없었던 것은 실수였다.
- 사격의 길이는 심각한 실수를 보여주었다.
- 다이어의 충분한 도덕적 효과를 낳으려는 동기는 비난받아야 한다.
- 다이어는 자신의 권한의 범위를 넘어섰다.
- 펀자브에서 영국 통치를 전복하려는 음모는 없었다.
인도인 위원들의 소수 의견 보고서는 공공 집회를 금지하는 포고가 충분히 배포되지 않았고, 무고한 사람들이 군중 속에 있었으며, 바그에서 그 전에 폭력 행위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다이어가 부상자를 돕도록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그의 행동은 "비인간적이고 비영국적"이었고 인도에서 영국 통치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고 비판했다.
헌터 위원회는 다이어에게 어떠한 형사 또는 징계 조치도 부과하지 않았다.[83] 그러나 그는 결국 잘못된 의무감을 가진 것으로 판명되어 지휘에서 해임되었고, 승진에서 제외되었으며, 인도에서의 고용이 금지되었다.[84] 1940년 3월 13일, 서 마이클 오드와이어는 사건의 생존자에 의해 런던에서 사살되었다.[126]
5. 5. 구지란왈라 폭동
암리차르 학살 이틀 후인 1919년 4월 15일, 구지란왈라에서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다.[85] 시위대에 대항하여 경찰과 항공기가 투입되었고, 이로 인해 12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했다.[85] 당시 인도 주둔 왕립 공군 사령관인 N. D. K. 맥이웬 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85]> 나는 최근의 폭동, 특히 구지란왈라에서 우리(공군)가 매우 유용했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가장 험악한 모습을 보이던 군중은 폭탄과 루이스 기관총을 사용한 기계(항공기)에 의해 완전히 흩어졌다.[85]
5. 6. 마이클 오드와이어 암살 (1940)
1940년 3월 13일, 런던의 Caxton Hall에서, 암리차르 학살을 목격하고 부상당했던 인도 독립 운동가 우담 싱이 당시 펀자브 부총독이었던 마이클 오드와이어를 총으로 쏴 살해했다.[88] 오드와이어는 학살의 주요 계획자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암리타 바자르 파트리카와 같은 민족주의 신문들은 살해를 지지했고, 일반 대중과 혁명가들은 우담 싱의 행동을 칭송했다.[91] 전 세계 언론은 자알리안왈라 바그 사건을 상기시키며 오드와이어를 학살의 책임자로 지목했다. 싱은 "자유를 위한 투사"로 불렸고, 《더 타임스》는 그의 행동을 "억압받는 인도인들의 끓어오르는 분노의 표현"이라고 언급했다.[88]
파시스트 국가들은 이 사건을 반영국 선전에 활용했다. 이탈리아의 《Bergeret》는 우담 싱의 행동을 용감하다고 칭찬했고,[90] 독일 라디오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외침이 총성으로 말해졌다"고 보도했다.
칸푸르에서 열린 공개 회의에서 한 대변인은 "마침내 국가의 모욕과 굴욕이 복수되었다"고 말했고, 《암리타 바자르 파트리카》는 "오드와이어의 이름은 인도가 결코 잊지 못할 펀자브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썼다.[91] 《뉴 스테이츠먼》은 영국 보수주의의 인도 통치 방식을 비판했다.
싱은 재판에서 "나는 그에게 원한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 그는 진짜 범인이었다. 그는 내 국민의 정신을 짓밟고 싶어 했고, 그래서 내가 그를 짓밟았다"라고 말했다.[92] 싱은 1940년 7월 3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자와할랄 네루와 마하트마 간디는 살인을 비난했으나, 1952년 네루는 우담 싱을 샤히드로 칭송하며 경의를 표했다.

6. 유산
인도 국민 회의에서 결의안이 통과된 후, 1920년에 이 부지에 기념관을 건설하기 위한 재단이 설립되었다. 1923년, 이 재단은 해당 사업을 위한 부지를 매입했다. 미국 건축가 벤자민 폴크가 설계한 기념관이 부지에 건설되었으며, 자와할랄 네루와 다른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1961년 4월 13일, 인도의 대통령 라젠드라 프라사드에 의해 개관되었다. 이후 불꽃이 이 부지에 추가되었다.
총탄 자국은 오늘날까지 벽과 인접한 건물에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총알을 피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익사한 우물 또한 공원 내에 있는 보호 기념물이다.
2013년 2월 20일, 데이비드 캐머런은 영국 총리로서 처음으로 사건 현장을 방문하여 방문자 명부에 "이것은 영국 역사상 매우 부끄러운 사건이다"라고 적고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명확하게 사과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125][127]。
학살 직후 암리차르의 하르만디르 사히브(황금 사원)의 공식 시크교 성직자들이 다이어에게 사로파(시크교 또는 일반적으로 인류에 대한 뛰어난 봉사의 표식)를 수여했고, 이는 시크교 공동체에 충격파를 보냈다.[93] 1920년 10월 12일, 암리차르 칼사 칼리지의 학생과 교직원들은 민족주의 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93] 학생들은 반(反) 영국 운동을 추진했고, 그 결과 1920년 11월 15일 시크교 사원을 관리하고 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시로마니 구루드와라 프라반다크 위원회가 결성되었다.[94]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61년과 1983년 국빈 방문 동안 암리차르 학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나, 1997년 인도 국빈 만찬에서 "우리의 과거에는 어려운 시기들이 있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제가 내일 방문할 잘리안왈라 바그는 고통스러운 예입니다."라고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유감을 표했다.[95] 그러나 이는 공식적인 사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부 인도인들은 사과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95] 인데르 쿠마르 구자랄 당시 인도 총리는 여왕이 사건 당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옹호했다.[95]
1997년 10월 14일, 엘리자베스 2세는 잘리안왈라 바그를 방문하여 30초간 묵념하고 기념물에 헌화했다.[95] 그녀가 힌두교와 시크교에서 종교적 의미를 갖는 사프란색 드레스를 입고 신발을 벗은 채 기념물을 방문한 것은 존경의 표시로 해석되었다.[95] 그러나 암리차르 시에서는 "여왕, 돌아가라"는 구호와 함께 검은 깃발 시위가 벌어졌고,[96]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이 방문자 명부에 서명만 하고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을 남기지 않은 점은 비판을 받았다.[97][98] 특히 필립 공은 학살 희생자 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다이어 장군의 아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언급하여 인도에서 광범위한 비난을 받았다.[99] 인도 언론인 프라빈 스와미는 필립 공의 발언이 "엄청난 오만함"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99]
영국 정부의 공식 사과 요구는 계속되었으며, 1920년 윈스턴 처칠은 하원에서 다이어의 처벌을 촉구하며 학살을 "끔찍한" 사건이라고 묘사했다.[69][70][103] 당시 인도 정부는 과도한 무력 사용을 비판하고 유감을 표명했으며, 이후 장교들에게 무력 사용 지침을 강화했다.[104]
2013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암리차르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영국 역사에서 매우 부끄러운 사건"이라고 언급했지만,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105] 이는 비판을 받았으며, 2016년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의 인도 방문 때 기념관 방문이 제외되면서 사과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106] 2017년 샤시 타루르 인도 작가 겸 정치인은 2019년 학살 100주년이 사과의 적기라고 제안했고,[107][102] 사디크 칸 런던 시장도 영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했다.[108]
2019년 영국 상원은 학살에 대해 논의했고,[109] 2019년 4월 12일, 테레사 메이 총리는 학살을 "부끄러운 상처"라고 언급했지만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110]
암리차르 학살은 문학과 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이다.
- 1932년: 힌두 시인 수바드라 쿠마리 차우한은 시집 ''Bikhre Moti''(흩어진 진주)에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시 "Jallianwalla Bagh Mein Basant"(잘리안왈라 바그의 봄)을 썼다.[115]
- 1977년: 비노드 칸나, 파릭시트 사흐니, 샤바나 아즈미, 삼푸란 싱 굴자르, 딥티 나발이 출연한 힌두 영화 ''잘리안 왈라 바그''에 학살 사건이 묘사되었다. 이 영화는 발라지 타가 각본,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며, 굴자르가 각본을 썼다. 이 영화는 1940년 마이클 오드와이어를 암살한 우담 싱(파리크시트 사흐니 분)의 전기적 요소를 담고 있다. 영화의 일부는 영국 코번트와 그 주변 지역에서 촬영되었다.[116]
- 1981년: 살만 루슈디의 소설 ''한밤의 아이들''은 군중 속의 의사가 때마침 재채기를 하여 총격에서 살아남는 장면을 통해 학살을 묘사했다.
- 1982년: 리처드 애튼버러의 영화 ''간디''에서 에드워드 폭스가 다이어 장군 역할을 맡아 학살 사건을 묘사했다. 이 영화는 학살의 세부 사항과 이후 헌터 위원회의 조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 1984년: 그라나다 TV의 1984년 시리즈 ''더 주얼 인 더 크라운''의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서 한 영국 장교의 가상 미망인이 그 잔혹함에 시달리며 다이어에게 헌사를 바치는 것을 무시하고 대신 인도 희생자들에게 돈을 기부했기 때문에 멸시받게 된 이야기를 한다.
- 2000년: 힌두 영화 ''샤히드 우담 싱''은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과 우담 싱의 마이클 오드와이어 암살을 다루고 있다.
- 2002년: 라지쿠마르 산토시가 감독한 힌두 영화 ''바가트 싱의 전설''에서, 학살 사건은 어린 바가트 싱이 목격자로 등장하여 인도 독립 운동의 혁명가가 되도록 영감을 주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다.
- 2006년: 힌두 영화 ''랑 데 바산티''의 일부는 비선형적 서사를 통해 학살 사건과 그것이 자유 투사들에게 미친 영향을 묘사한다.
- 2007년: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은 영화 위대한 토론자들에 묘사된 시민 불복종에 대한 마지막 토론 장면에서 언급된다.
- 2009년: 발리 라이의 소설 ''City of Ghosts''는 학살을 배경으로 하며, 팩트와 허구, 마술적 리얼리즘을 혼합했다. 다이어, 우담 싱 및 다른 실제 역사적 인물들이 이 이야기에 등장한다.
- 2012년: 학살의 몇몇 장면은 살만 루슈디의 1981년 소설 한밤의 아이들을 각색한 캐나다-영국 영화 ''한밤의 아이들''에서 포착되었으며, 딥파 메타가 감독했다.
- 2014년: 영국 시대극 ''다운튼 애비''는 시즌 5의 여덟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 끔찍한 암리차르 사건"으로 학살을 언급한다. 그랜섬 경, 이사벨 크롤리, 쉬림피는 신더비 경이 학살을 지지할 때 이에 대한 반감을 표한다.
- 2017년: 힌두 영화 ''필라우리''는 아누슈카 샤르마가 연기한 주요 등장인물의 영혼이 암리차르에서 연인을 잃고 결혼식을 위해 마을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로 학살을 언급한다. 이 영화는 학살과 뒤이은 압사 사고를 묘사하며, 클라이맥스는 현대의 잘리안왈라 바그 기념관에서 촬영되었다.
- 2019년: 영국 BBC는 역사가 자레어 마사니의 ''암리차르 1919: 영국 학살을 기억하며''를 방영했다.[117]
- 2019년: 영국의 채널 4는 4월 13일 토요일 오후 9시에 작가 사트남 상게라가 1919년 학살과 그 유산을 조사한 "제국을 뒤흔든 학살"을 방영했다.
- 2019년: 영국의 BBC는 기념일을 맞아 자스비르 싱이 진행하는 특별 "오늘의 생각"을 4월 12일 금요일에 방영했다.[118]
- 2021년: 힌두 영화 ''사르다르 우담''은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과 우담 싱의 마이클 오드와이어 암살을 다루고 있다.
6. 1. 잘리안왈라 바그 기념관
인도 국민 회의에서 결의안이 통과된 후, 1920년에 이 부지에 기념관을 건설하기 위한 재단이 설립되었다. 1923년, 이 재단은 해당 사업을 위한 부지를 매입했다. 미국 건축가 벤자민 폴크가 설계한 기념관이 부지에 건설되었으며, 자와할랄 네루와 다른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1961년 4월 13일, 인도의 대통령 라젠드라 프라사드에 의해 개관되었다. 이후 불꽃이 이 부지에 추가되었다.
총탄 자국은 오늘날까지 벽과 인접한 건물에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총알을 피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익사한 우물 또한 공원 내에 있는 보호 기념물이다.
6. 2. 시로마니 구루드와라 프라반다크 위원회 (SGPC) 결성
학살 직후 암리차르의 하르만디르 사히브(황금 사원)의 공식 시크교 성직자들이 다이어에게 사로파(시크교 또는 일반적으로 인류에 대한 뛰어난 봉사의 표식)를 수여했고, 이는 시크교 공동체에 충격파를 보냈다.[93] 1920년 10월 12일, 암리차르 칼사 칼리지의 학생과 교직원들은 민족주의 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93] 학생들은 반(反) 영국 운동을 추진했고, 그 결과 1920년 11월 15일 시크교 사원을 관리하고 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시로마니 구루드와라 프라반다크 위원회가 결성되었다.[94]6. 3. 영국 왕실의 방문과 사과 요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61년과 1983년 국빈 방문 동안 암리차르 학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나, 1997년 인도 국빈 만찬에서 "우리의 과거에는 어려운 시기들이 있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제가 내일 방문할 잘리안왈라 바그는 고통스러운 예입니다."라고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유감을 표했다.[95] 그러나 이는 공식적인 사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부 인도인들은 사과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95] 인데르 쿠마르 구자랄 당시 인도 총리는 여왕이 사건 당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옹호했다.[95]1997년 10월 14일, 엘리자베스 2세는 잘리안왈라 바그를 방문하여 30초간 묵념하고 기념물에 헌화했다.[95] 그녀가 힌두교와 시크교에서 종교적 의미를 갖는 사프란색 드레스를 입고 신발을 벗은 채 기념물을 방문한 것은 존경의 표시로 해석되었다.[95] 그러나 암리차르 시에서는 "여왕, 돌아가라"는 구호와 함께 검은 깃발 시위가 벌어졌고,[96]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이 방문자 명부에 서명만 하고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을 남기지 않은 점은 비판을 받았다.[97][98] 특히 필립 공은 학살 희생자 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다이어 장군의 아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언급하여 인도에서 광범위한 비난을 받았다.[99] 인도 언론인 프라빈 스와미는 필립 공의 발언이 "엄청난 오만함"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99]
영국 정부의 공식 사과 요구는 계속되었으며, 1920년 윈스턴 처칠은 하원에서 다이어의 처벌을 촉구하며 학살을 "끔찍한" 사건이라고 묘사했다.[69][70][103] 당시 인도 정부는 과도한 무력 사용을 비판하고 유감을 표명했으며, 이후 장교들에게 무력 사용 지침을 강화했다.[104]
2013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암리차르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영국 역사에서 매우 부끄러운 사건"이라고 언급했지만,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105] 이는 비판을 받았으며, 2016년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의 인도 방문 때 기념관 방문이 제외되면서 사과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106] 2017년 샤시 타루르 인도 작가 겸 정치인은 2019년 학살 100주년이 사과의 적기라고 제안했고,[107][102] 사디크 칸 런던 시장도 영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했다.[108]
2019년 영국 상원은 학살에 대해 논의했고,[109] 2019년 4월 12일, 테레사 메이 총리는 학살을 "부끄러운 상처"라고 언급했지만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110]
6. 4. 예술 작품에서의 묘사
암리차르 학살은 문학과 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이다.- 1932년: 힌두 시인 수바드라 쿠마리 차우한은 시집 ''Bikhre Moti''(흩어진 진주)에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시 "Jallianwalla Bagh Mein Basant"(잘리안왈라 바그의 봄)을 썼다.[115]
- 1977년: 비노드 칸나, 파릭시트 사흐니, 샤바나 아즈미, 삼푸란 싱 굴자르, 딥티 나발이 출연한 힌두 영화 ''잘리안 왈라 바그''에 학살 사건이 묘사되었다. 이 영화는 발라지 타가 각본,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며, 굴자르가 각본을 썼다. 이 영화는 1940년 마이클 오드와이어를 암살한 우담 싱(파리크시트 사흐니 분)의 전기적 요소를 담고 있다. 영화의 일부는 영국 코번트와 그 주변 지역에서 촬영되었다.[116]
- 1981년: 살만 루슈디의 소설 ''한밤의 아이들''은 군중 속의 의사가 때마침 재채기를 하여 총격에서 살아남는 장면을 통해 학살을 묘사했다.
- 1982년: 리처드 애튼버러의 영화 ''간디''에서 에드워드 폭스가 다이어 장군 역할을 맡아 학살 사건을 묘사했다. 이 영화는 학살의 세부 사항과 이후 헌터 위원회의 조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 1984년: 그라나다 TV의 1984년 시리즈 ''더 주얼 인 더 크라운''의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서 한 영국 장교의 가상 미망인이 그 잔혹함에 시달리며 다이어에게 헌사를 바치는 것을 무시하고 대신 인도 희생자들에게 돈을 기부했기 때문에 멸시받게 된 이야기를 한다.
- 2000년: 힌두 영화 ''샤히드 우담 싱''은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과 우담 싱의 마이클 오드와이어 암살을 다루고 있다.
- 2002년: 라지쿠마르 산토시가 감독한 힌두 영화 ''바가트 싱의 전설''에서, 학살 사건은 어린 바가트 싱이 목격자로 등장하여 인도 독립 운동의 혁명가가 되도록 영감을 주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다.
- 2006년: 힌두 영화 ''랑 데 바산티''의 일부는 비선형적 서사를 통해 학살 사건과 그것이 자유 투사들에게 미친 영향을 묘사한다.
- 2007년: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은 영화 위대한 토론자들에 묘사된 시민 불복종에 대한 마지막 토론 장면에서 언급된다.
- 2009년: 발리 라이의 소설 ''City of Ghosts''는 학살을 배경으로 하며, 팩트와 허구, 마술적 리얼리즘을 혼합했다. 다이어, 우담 싱 및 다른 실제 역사적 인물들이 이 이야기에 등장한다.
- 2012년: 학살의 몇몇 장면은 살만 루슈디의 1981년 소설 한밤의 아이들을 각색한 캐나다-영국 영화 ''한밤의 아이들''에서 포착되었으며, 딥파 메타가 감독했다.
- 2014년: 영국 시대극 ''다운튼 애비''는 시즌 5의 여덟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 끔찍한 암리차르 사건"으로 학살을 언급한다. 그랜섬 경, 이사벨 크롤리, 쉬림피는 신더비 경이 학살을 지지할 때 이에 대한 반감을 표한다.
- 2017년: 힌두 영화 ''필라우리''는 아누슈카 샤르마가 연기한 주요 등장인물의 영혼이 암리차르에서 연인을 잃고 결혼식을 위해 마을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로 학살을 언급한다. 이 영화는 학살과 뒤이은 압사 사고를 묘사하며, 클라이맥스는 현대의 잘리안왈라 바그 기념관에서 촬영되었다.
- 2019년: 영국 BBC는 역사가 자레어 마사니의 ''암리차르 1919: 영국 학살을 기억하며''를 방영했다.[117]
- 2019년: 영국의 채널 4는 4월 13일 토요일 오후 9시에 작가 사트남 상게라가 1919년 학살과 그 유산을 조사한 "제국을 뒤흔든 학살"을 방영했다.
- 2019년: 영국의 BBC는 기념일을 맞아 자스비르 싱이 진행하는 특별 "오늘의 생각"을 4월 12일 금요일에 방영했다.[118]
- 2021년: 힌두 영화 ''사르다르 우담''은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과 우담 싱의 마이클 오드와이어 암살을 다루고 있다.
6. 4. 1. 주요 작품
- 1932년: 유명한 힌두 시인 수바드라 쿠마리 차우한은 자신의 시집 ''Bikhre Moti''(흩어진 진주)에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시 "Jallianwalla Bagh Mein Basant"(잘리안왈라 바그의 봄)을 썼다.[115]
- 1977년: 학살 사건은 비노드 칸나, 파릭시트 사흐니, 샤바나 아즈미, 삼푸란 싱 굴자르, 딥티 나발이 출연한 힌두 영화 ''잘리안 왈라 바그''에 묘사되었다. 이 영화는 발라지 타가 각본,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며, 굴자르가 각본을 썼다. 이 영화는 1940년 마이클 오드와이어를 암살한 우담 싱(파리크시트 사흐니 분)의 전기적 요소를 담고 있다. 영화의 일부는 영국 코번트와 그 주변 지역에서 촬영되었다.[116]
- 1981년: 살만 루슈디의 소설 ''한밤의 아이들''은 군중 속의 의사가 때마침 재채기를 하여 총격에서 살아남는 장면을 통해 학살을 묘사했다.
- 1982년: 학살 사건은 리처드 애튼버러의 영화 ''간디''에서 에드워드 폭스가 다이어 장군 역할을 맡아 묘사되었다. 이 영화는 학살의 세부 사항과 이후 헌터 위원회의 조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 1984년: 학살 사건은 그라나다 TV의 1984년 시리즈 ''더 주얼 인 더 크라운''의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서 한 영국 장교의 가상 미망인이 말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녀는 그 잔혹함에 시달리며 다이어에게 헌사를 바치는 것을 무시하고 대신 인도 희생자들에게 돈을 기부했기 때문에 멸시받게 된 이야기를 한다.
- 2000년: 힌두 영화 ''샤히드 우담 싱''은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과 우담 싱의 마이클 오드와이어 암살을 다루고 있다.
- 2002년: 라지쿠마르 산토시가 감독한 힌두 영화 ''바가트 싱의 전설''에서, 학살 사건은 어린 바가트 싱이 목격자로 등장하여 인도 독립 운동의 혁명가가 되도록 영감을 주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다.
- 2006년: 힌두 영화 ''랑 데 바산티''의 일부는 비선형적 서사를 통해 학살 사건과 그것이 자유 투사들에게 미친 영향을 묘사한다.
- 2007년: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은 영화 위대한 토론자들에 묘사된 시민 불복종에 대한 마지막 토론 장면에서 언급된다.
- 2009년: 발리 라이의 소설 ''City of Ghosts''는 학살을 배경으로 하며, 팩트와 허구, 마술적 리얼리즘을 혼합했다. 다이어, 우담 싱 및 다른 실제 역사적 인물들이 이 이야기에 등장한다.
- 2012년: 학살의 몇몇 장면은 살만 루슈디의 1981년 한밤의 아이들 소설을 각색한 캐나다-영국 영화 ''한밤의 아이들''에서 포착되었으며, 딥파 메타가 감독했다.
- 2014년: 영국 시대극 ''다운튼 애비''는 시즌 5의 여덟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 끔찍한 암리차르 사건"으로 학살을 언급한다. 그랜섬 경, 이사벨 크롤리, 쉬림피는 신더비 경이 학살을 지지할 때 이에 대한 반감을 표한다.
- 2017년: 힌두 영화 ''필라우리''는 아누슈카 샤르마가 연기한 주요 등장인물의 영혼이 암리차르에서 연인을 잃고 결혼식을 위해 마을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로 학살을 언급한다. 이 영화는 학살과 뒤이은 압사 사고를 묘사하며, 클라이맥스는 현대의 잘리안왈라 바그 기념관에서 촬영되었다.
- 2019년: 영국 BBC는 역사가 자레어 마사니의 ''암리차르 1919: 영국 학살을 기억하며''를 방영했다.[117]
- 2019년: 영국의 채널 4는 4월 13일 토요일 오후 9시에 작가 사트남 상게라가 1919년 학살과 그 유산을 조사한 "제국을 뒤흔든 학살"을 방영했다.
- 2019년: 영국의 BBC는 기념일을 맞아 자스비르 싱이 진행하는 특별 "오늘의 생각"을 4월 12일 금요일에 방영했다.[118]
- 2021년: 힌두 영화 ''사르다르 우담''은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과 우담 싱의 마이클 오드와이어 암살을 다루고 있다.
7. 한국에 미친 영향
7. 1. 더불어민주당 관점
7. 2. 인물 평가 (더불어민주당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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