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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금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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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금 연구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설립된 연구 기관으로, 핵분열 연구를 통해 원자 폭탄 개발을 목표로 했다. 1942년 시카고 대학교에 설립되어, 엔리코 페르미, 레오 실라르드 등 저명한 과학자들이 참여하여 플루토늄 생산 및 분리, 원자로 개발 등의 연구를 수행했다. 세계 최초의 제어된 핵 연쇄 반응을 성공시키고, 시카고 파일-1과 같은 원자로를 개발했으며, 플루토늄의 야금학적 특성 연구와 방사선 안전 관리에도 힘썼다. 1946년 아르곤 국립 연구소로 개편되어, 미국의 원자력 연구를 이끌었으며, 이후 연구소 부지의 제염 작업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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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금 연구소 - [연구소]에 관한 문서
개요
시카고 대학교 에크하트 홀은 야금 프로젝트의 행정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시카고 대학교 에크하트 홀은 야금 프로젝트의 행정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명칭야금 연구소 (Metallurgical Laboratory), 멧 랩 (Met Lab)
위치시카고, 일리노이주
좌표41°47′25″N 87°35′56″W
기본 정보
설립일1942년 2월 – 1946년 7월
유형비밀 연구소
연구 분야플루토늄 화학 및 야금
원자로 설계
운영 기관시카고 대학교
예산3069만 달러 (1943–1946년)
직원 수1944년 7월 1일 기준 2,008명
노벨상 수상자아서 콤프턴
엔리코 페르미
제임스 프랑크
글렌 시보그
유진 위그너
지도자리처드 L. 도안
새뮤얼 K. 앨리슨
조이스 C. 스턴스
파링턴 다니엘스

2. 설립 배경 및 목적

1938년 12월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프리츠 슈트라스만우라늄에서 핵분열을 발견했고, 이후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프리쉬가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명명하면서 핵분열 과정에서 생성된 중성자가 통제된 핵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교엔리코 페르미와 레오 실라르드는 이러한 연쇄 반응을 실제로 구현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39년 8월, 실라르드는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아인슈타인-실라르드 서한을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전달했다. 실라드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설득하여 이 서한에 공동 서명하게 했다.[1] 이 서한은 미국 정부가 핵분열 연구를 본격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2]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구를 지휘하기 위해 S-1 우라늄 위원회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연구 자금이 부족했지만, 1940년 컬럼비아 대학교캘리포니아 대학교 소속 과학자들은 우라늄-235 동위원소와 새로 발견된 원소인 플루토늄이 핵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1941년 4월, 국가 방위 연구 위원회(NDRC)는 시카고 대학교의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인 아서 콤프턴에게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요청했다. 한편, 닐스 보어존 아치볼드 휠러플루토늄-239와 같이 홀수 원자 번호를 가진 무거운 동위원소가 핵분열성 물질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에밀리오 세그레와 글렌 시보그는 1941년 5월,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 소량의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고, 플루토늄-239가 우라늄-235보다 중성자 포획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하지만 사이클로트론으로는 대량의 플루토늄 생산이 불가능했다. 콤프턴은 프린스턴 대학교유진 위그너와 핵 반응로를 이용한 플루토늄 생산 방법을 논의했고, 일리노이 대학교의 로버트 서버와는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을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원자폭탄 개발은 더욱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12월 20일, 콤프턴은 플루토늄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명확했다: 우라늄을 플루토늄으로 변환시키는 핵 반응로를 개발하고,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을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방법을 찾아내며, 최종적으로 원자 폭탄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것이었다. 콤프턴은 1943년 1월까지 통제된 핵 연쇄 반응을 성공시키고, 1945년 1월까지 실제 투하 가능한 원자 폭탄을 완성한다는 야심 찬 일정을 제시했다.

콤프턴은 당시 컬럼비아, 프린스턴, 시카고, 캘리포니아 등 여러 대학에 분산되어 있던 연구팀들이 비효율적이며 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연구 역량을 한 곳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여러 후보지 중 자신이 속한 시카고 대학교를 최종 연구 거점으로 선택했다. 시카고는 미국의 중앙에 위치하여 지리적 이점이 있었고, 중서부 지역에는 전쟁 관련 프로젝트에 아직 동원되지 않은 과학자, 기술자, 시설들이 풍부했으며, 대학 행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내륙 도시로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1942년 1월, 시카고 대학교에 연구 시설을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야금 연구소"(Metallurgical Laboratory|메탈러지컬 래버러토리eng, 약칭 Met Lab)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야금 연구소"라는 명칭은 프로젝트의 실제 목표인 핵 연구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금속 연구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연구소의 실제 임무는 핵 반응로 제작, 플루토늄 분리 및 정제, 그리고 원자 폭탄 설계였다.

3. 주요 인물

야금 연구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플루토늄 연구 및 생산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여 연구를 수행했다. 주요 인물들은 핵물리학, 화학, 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아서 콤프턴(왼쪽), 야금 프로젝트 책임자와 마틴 D. 휘태커, 클린턴 연구소 소장 (1946년)


스태그 필드에서 노먼 힐베리(왼쪽)와 레오 실라르드


다음은 야금 연구소 및 관련 프로젝트의 주요 인물들이다.

이름주요 역할 및 기여비고
아서 콤프턴 (Arthur Compton)야금 프로젝트 총괄 책임자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플루토늄 프로젝트 총괄 및 연구 방향 설정.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물리학 그룹 리더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시카고 파일 1호(최초의 원자로) 설계 및 건설을 주도하여 최초의 제어된 핵 연쇄 반응 성공.
레오 실라르드 (Leo Szilard)연구원핵 연쇄 반응 개념 초기 제안. 아인슈타인-실라르드 서한 작성을 주도하여 미국 정부의 핵 연구 착수 유도.[1]
유진 위그너 (Eugene Wigner)연구원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원자로 내 플루토늄 생산 이론 연구에 기여. 아인슈타인 서한 추진 동참.
글렌 T. 시보그 (Glenn T. Seaborg)화학 그룹 연구원노벨 화학상 수상자. 플루토늄 화학적 분리 및 정제 방법 개발. 최초 측정 가능량 분리 성공 (1942년 8월).
노먼 힐베리 (Norman Hilberry)야금 프로젝트 부소장프로젝트 행정 및 운영 지원.
새뮤얼 K. 앨리슨 (Samuel K. Allison)야금 연구소 소장 (1943년 5월 이후)리처드 L. 도안 후임 연구소장.
로버트 오펜하이머 (J. Robert Oppenheimer)폭탄 설계 책임자 (초기)초기 폭탄 설계 담당. 이후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이동하여 원자폭탄 개발 총괄.
레슬리 그로브스 (Leslie Groves)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미 육군 준장. 프로젝트 전체를 지휘하고 연구소 관리 감독.



이 외에도 야금 연구소에는 여러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다.


  • 리처드 L. 도안 (Richard L. Doan): 야금 연구소 초대 소장 (1943년 5월까지).
  • 헨리 D. 스미스 (Henry D. Smyth): 야금 연구소 부소장 (1943년 5월부터).
  • 마틴 D. 휘태커 (Martin D. Whitaker): 초기 물리학 그룹 리더 중 한 명.
  • 프랭크 스페딩 (Frank Spedding): 초대 화학부 책임자. 이후 허버트 맥코이(Herbert McCoy)와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가 뒤를 이음.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직접 연구소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아인슈타인-실라르드 서한 서명을 통해 프로젝트 착수에 기여.[1]


이들 과학자, 행정가, 군 관계자들의 협력은 야금 연구소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인 플루토늄 생산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 연구 개발 활동



야금 연구소의 핵심 임무는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설정되었다. 주요 목표는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핵 반응로(원자로)를 개발하고, 생산된 플루토늄을 우라늄에서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하며, 궁극적으로 원자 폭탄 설계 및 제작에 필요한 과학적, 기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2][1] 아서 컴턴의 지휘 아래 연구소는 1943년 1월까지 제어된 핵연쇄 반응을 달성하고, 1945년 1월까지 실제 사용 가능한 폭탄을 완성한다는 야심 찬 목표를 가지고 연구 개발 활동을 수행했다.[2][1]

연구소의 활동은 크게 몇 가지 핵심 분야로 나눌 수 있다.


  • 원자로 개발: 엔리코 페르미가 이끈 팀은 시카고 파일 1호(CP-1)를 건설하여 1942년 12월 2일, 인류 최초로 제어된 핵 연쇄 반응을 성공시켰다.[4] 이는 핵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아르곤 부지에 건설된 시카고 파일 2호(CP-2)와 세계 최초의 중수 감속로인 시카고 파일 3호(CP-3)를 통해 중성자 물리학, 재료 과학, 동위원소 생산 등 다양한 기초 연구와 실험이 수행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원자로 개발, #시카고 파일 1호 (CP-1), #시카고 파일 2호 (CP-2), #시카고 파일 3호 (CP-3) 참조)

  • 플루토늄 화학 및 야금: 글렌 시보그가 이끄는 화학 그룹은 극미량의 플루토늄을 성공적으로 분리하고[12][1] 그 화학적 성질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는 대량 생산된 플루토늄을 우라늄 연료로부터 효율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인산 비스무스 공정 개발의 기초가 되었으며, 듀폰(DuPont)과의 협력을 통해 실제 생산 공정 설계로 이어졌다. 플루토늄 자체의 야금학적 특성 연구도 중요한 과제였다. (자세한 내용은 #플루토늄 생산 및 분리 참조)

  • 재료 과학 및 공학: 원자로 건설과 운영, 핵연료 처리에는 다양한 재료 문제가 수반되었다. 연구소는 우라늄의 야금학적 특성 연구, 고순도 우라늄 정제 기술 확보(말린크로트(Mallinckrodt)사 협력)[11], 연료봉 부식을 막기 위한 알루미늄 피복(캐닝) 기술 개발, 흑연 감속재에서 발생하는 위그너 효과[10] 연구, 원자로 냉각 방식(헬륨 대 수냉) 결정[9] 등 재료 과학 및 공학적 난제 해결에 집중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타 연구 참조)


이러한 연구 개발 활동을 통해 야금 연구소는 맨해튼 계획의 성공에 필수적인 과학적, 기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핵물리학, 핵화학, 원자력공학 분야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4. 1. 원자로 개발

1938년 12월 독일 화학자 오토 한프리츠 슈트라스만우라늄에서 핵분열을 발견하고, 이어서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프리쉬가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면서 핵분열로 생성된 중성자를 이용한 통제된 핵연쇄 반응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교엔리코 페르미와 레오 실라르드는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1939년 8월, 실라르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아인슈타인-실라르드 서한을 보내 독일의 핵무기 개발 계획의 위험성을 알리고 미국의 대비를 촉구했으며, 이는 미국 정부가 핵분열 연구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1][2]

1941년 4월, 국가 방위 연구 위원회(NDRC)는 시카고 대학교의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인 아서 컴턴에게 우라늄 프로그램 진행 상황 보고를 요청했다. 당시 닐스 보어존 아치볼드 휠러플루토늄-239와 같이 홀수 원자 번호를 가진 무거운 동위원소가 핵분열성 물질이라는 이론을 제시한 상태였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에밀리오 세그레와 글렌 시보그는 1941년 5월,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 28 μ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이것이 우라늄-235보다 열 중성자 포획 중성자 단면적이 1.7배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사이클로트론으로는 플루토늄을 대량 생산할 수 없었다. 컴턴은 프린스턴 대학교유진 위그너와 원자로를 이용한 플루토늄 생산 방법을, 일리노이 대학교의 로버트 서버와는 생산된 플루토늄을 우라늄과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방법을 논의했다.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촉발한 진주만 공격 직후인 1941년 12월 20일, 컴턴은 플루토늄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우라늄을 플루토늄으로 변환하는 원자로 건설, 플루토늄 분리 방법 개발, 그리고 원자 폭탄 설계 및 제작이었다. 컴턴은 1943년 1월까지 제어된 핵연쇄 반응을 달성하고 1945년 1월까지 실제 사용 가능한 원자 폭탄을 완성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연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컬럼비아, 프린스턴, 시카고, 캘리포니아 등 여러 대학에 흩어져 있던 연구팀을 한 곳으로 모으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소속 대학인 시카고 대학교를 연구 중심지로 선택했다. 시카고는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하고, 전쟁 관련 연구에 아직 동원되지 않은 과학자, 기술자, 시설 확보가 용이했으며, 대학 행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 시카고 파일 1호 (CP-1) ===

시카고 대학교의 스태그 필드. 이곳 관람석 아래에서 CP-1이 건설되었다. 이 경기장은 1957년에 철거되었다.


1942년 9월부터 11월까지 허버트 L. 앤더슨과 월터 진이 이끄는 연구팀은 시카고 대학교의 스태그 필드 관람석 아래 공간에 16개의 실험용 원자로(당시에는 "파일(pile)"이라 불림)를 건설하며 예비 실험을 진행했다. 엔리코 페르미는 이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제어된 핵연쇄 반응을 통해 임계에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우라늄-흑연 파일 설계를 완성했다. 본래 이 파일은 시카고 외곽의 아르곤 국립 연구소 부지에 건설될 예정이었으나, 건설 노동자 확보의 어려움과 노조 분규 등으로 공사가 지연되었다. 이에 컴턴은 페르미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태그 필드 관람석 아래에 실험용 원자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시카고 파일 1호(CP-1)로 명명된 이 원자로 건설은 1942년 11월 16일에 시작되었다. 작업은 12시간 교대 근무로 진행되었으며, 진이 주간 조를, 앤더슨이 야간 조를 이끌었다. 완성된 CP-1은 나무 프레임으로 지지되는 타원형 구조물로, 높이는 약 6.10m였고 양쪽 끝 너비는 약 1.83m, 중앙부 너비는 약 7.62m였다. 내부에는 약 5443.11kg의 우라늄 금속, 약 45359.25kg의 우라늄 산화물, 그리고 약 362874.00kg의 흑연이 사용되었으며, 예상 비용은 270만달러였다. 1942년 12월 2일, CP-1은 마침내 세계 최초로 제어된 상태의 자립 핵연쇄 반응을 성공적으로 일으켰다.[4] 12월 12일에는 출력을 200 W까지 높여 작은 전구를 켤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방사선 차폐 시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변 인원들의 안전을 위해 이후 실험은 0.5 W의 매우 낮은 출력으로만 진행되었다.

=== 시카고 파일 2호 (CP-2) ===

CP-1은 1943년 2월 28일 운전을 멈추고 해체되어 아르곤 부지로 옮겨졌다.[5][6] 이곳에서 CP-1에 사용되었던 자재들을 재활용하여 시카고 파일 2호(CP-2)가 건설되었다. CP-2는 이전의 타원형 구조 대신 높이 약 약 7.62m, 밑면 약 약 9.14m의 정육면체 형태로 만들어졌다. 또한 안전을 위해 두께 약 1.52m의 콘크리트 벽으로 방사선 차폐를 했고, 상부는 약 15.24cm 두께의 납과 약 127.00cm 두께의 나무로 덮었다. 사용된 우라늄의 양도 늘어나 약 47173.62kg의 우라늄과 약 428191.32kg의 흑연이 투입되었다. CP-2는 몇 킬로와트(kW) 수준의 낮은 출력으로만 운전되었기 때문에 별도의 냉각 시스템은 설치되지 않았다. CP-2는 1943년 3월에 가동을 시작했다.[7]

=== 시카고 파일 3호 (CP-3) ===

시카고 파일 3호(CP-3)


1944년 초, 아르곤 부지에는 또 다른 실험용 원자로인 시카고 파일 3호(CP-3)가 건설되었다. 이 원자로는 중수(Heavy water)를 중성자 감속재로 사용한 세계 최초의 원자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CP-1 건설 당시에는 중수를 대량으로 구하기 어려웠지만, 맨해튼 계획의 P-9 프로젝트 덕분에 중수 확보가 가능해졌다. CP-3는 직경 약 1.83m의 커다란 알루미늄 탱크 안에 약 약 5896.70kg의 중수를 채운 형태였다. 탱크 덮개에는 구멍들이 규칙적으로 뚫려 있어, 이 구멍들을 통해 알루미늄으로 감싼 121개의 우라늄 막대가 중수 속에 잠기도록 설계되었다. 탱크 주변은 흑연 중성자 반사체로 둘러쌌고, 그 바깥을 다시 납 차폐재와 콘크리트로 감쌌다. 원자로 상부의 차폐는 철과 마소나이트 층으로 이루어진 약 0.30m 두께의 정사각형 탈착식 벽돌들을 이용했다. 냉각 방식으로는 수냉식 열교환기가 사용되었고, 비상시에는 제어봉 작동 외에도 중수를 아래쪽 저장 탱크로 신속하게 빼낼 수 있는 안전 장치가 마련되었다. CP-3 건설은 1944년 1월 1일에 시작되어 같은 해 5월에 임계에 도달했으며, 7월에는 처음으로 최대 설계 출력인 300 kW 운전에 성공했다.

전쟁 기간 동안 진(Zinn)은 CP-3를 24시간 연속 가동하도록 했고, 이 원자로는 설계상의 유연성 덕분에 다양한 실험을 수행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8] 주요 실험 내용으로는 삼중수소와 같은 희귀 동위원소의 특성 연구, 미래 원자로 설계나 불순물 생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원소 및 화합물의 중성자 포획 단면적 측정, 계측기 성능 시험, 재료의 열적 안정성 평가, 그리고 원자로 운전원 훈련 등이 포함되었다.

4. 2. 플루토늄 생산 및 분리

닐스 보어존 아치볼드 휠러는 홀수 원자 번호를 가진 무거운 동위 원소, 예를 들어 플루토늄-239가 핵분열성 물질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1]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에밀리오 세그레와 글렌 시보그는 1941년 5월, 대학의 60인치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하여 28 μ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실험을 통해 플루토늄-239가 우라늄-235보다 1.7배 높은 열 중성자 포획 중성자 단면적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사이클로트론으로는 소량의 플루토늄만 생산할 수 있어 대량 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다.[1]

아서 컴턴은 프린스턴 대학교유진 위그너와 핵 반응로에서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고, 일리노이 대학교의 로버트 서버와는 반응로에서 생성된 플루토늄을 우라늄과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방법에 대해 협의했다.[1] 컴턴이 이끌게 된 플루토늄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우라늄을 플루토늄으로 변환하는 반응로를 만들고, 생성된 플루토늄을 우라늄에서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2][1]

플루토늄은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원소였기 때문에 그 야금학적 특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1942년 8월, 시보그가 이끄는 팀은 존스 연구소에서 중성자 조사를 거친 우라늄으로부터 처음으로 측정 가능한 양의 플루토늄을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12][1] 이는 중요한 성과였으며, 이후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의 사이클로트론에서도 소량의 플루토늄이 생산되었다.[1] 야금 연구소의 화학 부서는 DuPont사와 협력하여 플루토늄을 우라늄에서 효과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인산 비스무스 공정을 개발했다.[1]

4. 3. 기타 연구

야금 연구소는 우라늄플루토늄의 야금학적 특성 연구에 집중했다. 우라늄은 발견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우라늄의 녹는점에 대한 많은 참고 자료는 실제 값과 280°C 가까이 차이가 났다. 에드워드 크루츠는 우라늄 연구를 통해 적절한 온도 범위에서 우라늄을 두드리고 압연하여 생산 원자로 설계에 필요한 막대 형태로 만들 수 있음을 발견했으며, 우라늄을 자를 때 불꽃이 튀는 현상도 확인했다. 야금 연구소는 알코아(Alcoa) 및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 협력하여 알루미늄 재킷을 우라늄 슬러그에 납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한편, 가공된 우라늄 공급원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는데, 1942년 4월 아서 콤프턴, 프랭크 스페딩, 노먼 힐베리는 세인트루이스의 말린크로트(Mallinckrodt) 화학 회사와 접촉했다. 말린크로트는 에테르를 이용한 새로운 우라늄 정제 기술을 개발하여 5월 중순까지 성공적인 테스트 재료를 제공했고, 시카고 파일 1호에 필요한 우라늄을 공급했으며, 계약 체결 전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 초기 주문량 60톤을 모두 충족시켰다.[11]

플루토늄의 야금학은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1942년 8월, 글렌 시보그가 이끄는 팀은 존스 연구소에서 조사된 우라늄으로부터 처음으로 계량 가능한 양의 플루토늄을 화학적으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12] 원자로가 가동되기 전까지는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의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하여 극소량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화학 부서는 듀폰(DuPont)과 협력하여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을 분리하기 위한 인산 비스무스 공정(bismuth phosphate process)을 개발했다.

시카고 대학교의 신 화학 건물 실험실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중요한 연구 분야 중 하나는 방사선이 재료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특히 위그너 효과[10]가 주목받았다. 중성자 폭격을 받으면 흑연 감속재 내의 탄소 원자가 결정 구조에서 이탈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흑연이 가열되고 팽창하는 현상이다. 이 문제에 대한 조사는 1946년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해결책을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 설계는 핵물리학뿐만 아니라 공학 및 건설 분야에서도 여러 과제를 안고 있었다. 냉각제로 어떤 물질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야금 연구소는 처음에는 헬륨을 선호했으나, 고순도 헬륨 확보의 어려움, 특수 송풍기 필요성, 방사성 가스 누출 문제 등이 제기되었다. 1943년 초, 유진 위그너와 그의 이론 그룹(알빈 와인버그, 캐서린 웨이, 레오 올링거, 게일 영, 에드워드 크루츠 포함)은 수냉식 생산 원자로 설계를 제안했다. 물이 중성자를 흡수하여 효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위그너 그룹은 계산 결과 더 순수한 흑연과 우라늄을 사용하면 물 냉각이 가능하며, 헬륨 사용에 따른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한 지연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설계는 냉각수에 의한 우라늄 부식을 막기 위해 얇은 알루미늄 층으로 우라늄 슬러그를 감싸는 방식을 채택했다. 슬러그는 원자로 채널을 통해 밀어 넣고 반대편 냉각 연못으로 떨어뜨려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방식이었다. 두 설계를 검토한 듀폰 엔지니어들은 최종적으로 수냉식 설계를 선택했다. 이 원자로 설계는 1959년 크루츠, 올링거, 와인버그, 위그너, 영의 이름으로 특허가 발급되었다.[9]

물을 냉각제로 사용하면서 알루미늄 튜브의 부식과 산화 문제가 발생했다. 야금 연구소는 물에 다양한 첨가제를 넣어 효과를 시험했고, 물이 약산성일 때 부식이 최소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희석된 황산을 첨가해 pH 6.5를 유지했다. 또한 규산나트륨, 중크롬산나트륨, 옥살산 등을 첨가하여 냉각수 순환을 방해할 수 있는 막 형성을 방지하고자 했다. 연료 슬러그는 우라늄 금속이 물과 직접 접촉하여 부식되는 것을 막고, 조사 과정에서 생성될 수 있는 기체 상태의 방사성 핵분열 생성물 방출을 막기 위해 알루미늄 재킷으로 감쌌다. 알루미늄은 열을 잘 전달하면서도 중성자를 너무 많이 흡수하지 않아야 했기에 선택되었다. 재킷에 작은 구멍이라도 생기면 방사성 가스가 누출되거나 파손된 슬러그가 원자로 채널을 막을 수 있었으므로, 알루미늄 캐닝(canning) 공정의 개발과 테스트는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5. 안전 및 보건

방사능 중독의 위험성은 라듐 시계 문자반 작업자의 경험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핵 반응로가 거대한 규모의 방사성 물질을 사용할 것이 확실해지면서, 건강 및 안전 측면에 대한 상당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어니스트 로렌스와 함께 일했던 로버트 S. 스톤은 야금 연구소의 건강 및 안전 프로그램을 이끌도록 영입되었다. 방사선 전문의 시미언 커틀러는 시카고에서 방사선 안전을 담당했으며, 이후 핸퍼드 부지의 프로그램을 이끌게 되었다. 그로브스로체스터 대학교의 스태포드 L. 워렌을 맨해튼 계획의 의학 부서장으로 임명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방사선의 생물학적 영향에 대한 연구는 더욱 중요해졌다. 플루토늄은 라듐과 마찬가지로 뼈 친화성 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이는 플루토늄을 특히 위험하게 만들었다.

야금 연구소의 건강 부서는 방사선 노출에 대한 기준을 설정했다. 작업자들은 시카고 대학교 진료소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았지만, 이는 너무 늦을 수도 있었다. 개인용 석영 섬유 선량계와 누적 투여량을 기록하는 필름 배지 선량계가 확보되었다. 스톤의 건강 부서는 물리 부서의 윌리엄 P. 제시의 계측 그룹과 긴밀히 협력하여 휴대용 가이거 계수기를 포함한 탐지기를 개발했다. 허버트 파커 (과학자)는 방사선 노출에 대한 척도를 만들었는데, 이를 렘 (단위)이라고 불렀다. 전쟁 후, 이는 방사선 노출의 표준 측정 단위로서 뢴트겐 (단위)을 대체했다. 플루토늄의 독성을 평가하는 작업은 클린턴 엔지니어링 웍스의 플루토늄 반제품 공장에서 1943년에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체내 5 마이크로그램 (μg)의 제한을 설정했으며, 시카고와 클린턴의 작업 관행과 작업장을 수정하여 이 기준을 충족하도록 했다.

6. 이후 활동 및 해체

1943년과 1944년 동안 야금 연구소는 주로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있는 클린턴 엔지니어링 웍스의 X-10 흑연 원자로와 워싱턴주 핸포드 부지의 B 원자로 가동에 집중했다. 1944년 말부터는 원자로 운영자 훈련으로 초점이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연구 인력이 오크리지, 핸포드 부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등 다른 맨해튼 계획 관련 시설로 이동했다. 화학 부서의 상당수는 1943년 10월 오크리지로 이전했으며, 1944년에는 핸포드와 로스앨러모스로 다수의 인원이 전출되었다. 엔리코 페르미는 1944년 9월 로스앨러모스로 떠났고, 월터 진(Walter Zinn)이 아르곤 연구소 소장직을 이어받았다. 당시 연구소 소장이었던 새뮤얼 K. 앨리슨 역시 1944년 11월 로스앨러모스로 자리를 옮기면서 계측 부서 인력 상당수를 동반했다. 앨리슨의 후임으로는 조이스 C. 스턴스(Joyce C. Stearns)가 임명되었다. 패링턴 다니엘스(Farrington Daniels)는 1944년 9월 1일 부소장이 되었으며, 1945년 7월 1일 스턴스의 뒤를 이어 소장직을 맡았다.

2006년의 제124 야전 포병 무기고 부지. 이곳은 야금 연구소에서 사용되었으며, 이후 정화 작업을 거쳤다.


이러한 인력 유출은 연구소 규모의 축소로 이어졌다. 1944년 7월 1일 2,008명이었던 연구소 인력은 1945년 7월 1일 1,444명으로 감소했다.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레슬리 R. 그로브스 장군이 직원 채용 동결을 명령했기 때문에 인력 충원은 거의 불가능했다.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 사이에는 보건 부서를 제외한 모든 부서의 인력이 20% 이상 감소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인력 유출은 계속되었다. 1946년 5월 17일에는 글렌 시보그가 남은 화학 부서 인력 대부분과 함께 연구소를 떠났다. 1946년 2월 11일, 미 육군은 로버트 메이너드 허친스 시카고 대학교 총장과 야금 프로젝트의 인력 및 장비를 아르곤에 설립될 지역 연구소로 이전하는 데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1946년 7월 1일, 야금 연구소는 공식적으로 아르곤 국립 연구소로 개편되었으며, 이는 미국 최초의 국립 연구소가 되었다.[13] 초대 소장은 월터 진이 맡았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종료되면서 국립 연구소에 대한 책임은 1947년 1월 1일부로 미국 원자력 위원회로 이관되었다. 야금 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시카고 대학교 내 엔리코 페르미 연구소와 제임스 프랑크 연구소 설립의 토대가 되었다.[13]

한편, 1943년에는 CP-1 원자로가 해체되어 시카고 외곽 쿡 카운티 삼림 보호구역 내 레드 게이트 우즈 부지에 CP-2로 재건되었다. 이 부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이 참전했던 프랑스의 아르곤 숲 이름을 따 '아르곤'이라는 암호명이 붙었다.

시카고 대학교와의 원래 계약(1943년 5월 1일~1946년 6월 30일)에 따라 지급된 총액은 약 2790만달러였으며, 이 중 약 64.8만달러는 건설 및 개조 비용이었다. 1946년 12월 31일까지 연장된 계약으로 약 280만달러가 추가 지급되었고(건설/개조 비용 약 16.2만달러 포함), 대학 시설 복원 비용으로 약 4.95만달러가 지급되었다.

1974년, 미국 정부는 과거 활용 부지 복구 프로그램(FUSRAP)을 통해 야금 연구소가 사용했던 부지들에 대한 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스태그 필드는 1957년에 철거되었으며, 이후 켄트 연구소(1977년), 엑하트, 라이어슨, 존스 연구소(1984년) 등에서 제염 작업이 진행되어 약 약 16990.11L3의 고체 폐기물과 액체 폐기물이 수거 및 처리되었다.[14] 제124 야전 포병 무기고 부지는 1951년 일리노이주에 반환되었지만, 1977년 이후 실시된 조사에서 잔류 방사능 수치가 기준치를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나 1988년과 1989년에 제염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후 부지는 제한 없는 사용에 적합한 것으로 판정되었다.[15]

7. 유산

야금 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엔리코 페르미가 이끄는 팀이 시카고 파일 1호 (CP-1)를 건설하여 1942년 12월 2일 세계 최초로 제어된 핵 연쇄 반응을 성공시킨 것이다.[16][17] 이는 시카고 대학교의 스태그 필드 아래 폐쇄된 스쿼시 코트에서 이루어졌으며, 인류가 핵 시대로 진입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 성공은 맨해튼 계획의 핵심 목표 중 하나인 플루토늄 생산용 핵 반응로 개발 가능성을 입증했다.

연구소는 플루토늄 생산 연구에서도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글렌 시보그가 이끄는 화학자 팀은 1942년 8월, 사이클로트론으로 조사된 우라늄에서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양의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이후 핸퍼드 부지에서 대규모 플루토늄 생산 공정을 개발하는 기초가 되었다.

핵물질과 방사선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은 연구 초기부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로버트 S. 스톤이 이끄는 보건 부서는 방사선 노출 기준을 설정하고, 가이거 계수기와 같은 탐지 장비 개발, 필름 배지 선량계 도입 등을 통해 작업자 안전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특히 플루토늄라듐처럼 뼈에 축적되는 위험한 물질임을 밝혀내고, 이에 대한 엄격한 관리 기준(체내 허용량 5 마이크로그램)을 설정했다. 허버트 파커는 방사선 노출 측정 단위인 렘(rem)을 고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 원자력 산업과 연구 분야에서 방사선 안전 관리의 기초를 마련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연구소의 역할은 변화했다. X-10 흑연 원자로(클린턴 엔지니어링 웍스)와 B 원자로(핸포드 부지) 가동 지원 및 운영자 훈련에 집중하게 되었고, 많은 핵심 인력들이 로스앨러모스 등 다른 맨해튼 계획 시설로 이동했다. 엔리코 페르미, 월터 진, 새뮤얼 앨리슨 등이 대표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야금 연구소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46년 7월 1일, 연구소의 인력과 장비는 새로 설립된 아르곤 국립 연구소로 이관되었으며, 이는 미국 에너지부 산하 최초의 국립 연구소가 되었다.[13] 월터 진이 초대 소장을 맡았다. 야금 연구소의 과학적 유산은 아르곤 국립 연구소뿐만 아니라, 시카고 대학교 내에 설립된 엔리코 페르미 연구소와 제임스 프랑크 연구소를 통해서도 이어지고 있다.[13]

과거 연구 활동으로 인한 방사능 오염 문제도 처리되었다. 미국 정부는 과거 활용 부지 복구 프로그램 (FUSRAP)을 통해 야금 연구소가 사용했던 시카고 대학교 내 여러 건물과 부지(켄트 연구소, 엑하트 홀, 라이어슨 홀, 존스 연구소 등)에 대한 제염 작업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약 600 세제곱피트의 고체 폐기물과 3개의 55갤런 드럼 분량의 액체 폐기물이 수거되어 처리되었다.[14] 스태그 필드 부지는 1957년에 철거되었으며, 최초의 핵 반응이 있었던 장소는 '''최초의 자기 지속적인 핵 반응 장소'''로서 미국 국립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 일리노이주 방위군 무기고 부지 역시 잔류 방사능 조사를 거쳐 1988년과 1989년에 제염 작업 후 일반 사용이 가능하도록 복원되었다.[15]

야금 연구소의 성공은 핵무기 개발 경쟁을 촉발하고 전 세계적인 군비 경쟁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제 정치와 안보 지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막대한 힘과 그에 따르는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유산을 남겼다.

참조

[1] 웹사이트 Einstein's Letter to Franklin D. Roosevelt http://www.mphpa.org[...] 2007-05-26
[2] 웹사이트 Pa, this requires action! http://www.mphpa.org[...] 2007-05-26
[3] 간행물 Leo Szilard: His Version of the Facts https://books.google[...] Educational Foundation For Nuclear Science 2015-12-18
[4] 웹사이트 CP-1 Goes Critical http://www.cfo.doe.g[...] Department of Energy
[5] 웹사이트 Reactors Designed by Argonne National Laboratory: Chicago Pile 1 http://www.ne.anl.go[...] Argonne National Laboratory 2013-05-21
[6] 웹사이트 Atoms Forge a Scientific Revolution http://www.ne.anl.go[...] Argonne National Laboratory 2012-07-10
[7] 간행물 The Development of the first chain reaction pile
[8] 뉴스 The Way Things Work: Nuclear waste http://chicagomaroon[...] 2009-03-05
[9] 서적 Edward Chester Creutz 1913–2009 http://www.nasonlin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 간행물 Theoretical Physics in the Metallurgical Laboratory of Chicago
[11] 웹사이트 The Mallinckrodt Chemical Works Story https://www.atomiche[...] Mallincrkodt Chemical (1962) 2020-03-08
[12] 보고서 History of MET Lab Section C-I, April 1942 – April 1943 https://digital.libr[...]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Lawrence Berkeley Laboratory
[13] 웹사이트 How the First Chain Reaction Changed Science https://www.u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2015-12-19
[14] 뉴스 The Way Things Work: Nuclear waste http://chicagomaroon[...] 2016-01-13
[15] 웹사이트 FUSRAP Stakeholder Report http://energy.gov/si[...] United States Department of Energy 2016-01-13
[16] 서적 How the Secret of the Atomic Bomb was Stolen During World War II https://books.google[...] Sunstone Press
[17] 문서 http://www.anl.g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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