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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 주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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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기 주키치는 일본의 기독교 시인으로, 1898년 도쿄도 마치다시에서 태어나 1927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가나가와현 사범학교와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효고현 미카게사범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며 시 창작을 시작했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존 키츠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 신념과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썼으며, 대표작으로 시집 『가을의 눈동자』, 『가난한 신도』 등이 있다. 사후에 유고가 출판되어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시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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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 주키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야기 주키치
본명야기 주키치
출생1898년 2월 9일
출생지도쿄도미나미타마군사카이무라(현재의 도쿄도마치다시아이하라정)
사망1927년 10월 26일(29세)
사망지가나가와현고자군 치가사키정 (현재의 치가사키시)
묘소도쿄도 마치다시 야기 가문 묘지
직업시인, 영어교사
국적일본
교육가나가와현 사범학교 예과 (현재의 요코하마 국립대학교)
모교도쿄 고등사범학교
장르단가,
주제신앙, 가족
작가 정보
참고 사항
종교기독교

2. 생애

현재의 도쿄도(東京都) 마치다시(町田市) 아이하라 정(相原町)에서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 고향을 떠나 가마쿠라가나가와현 사범학교 예과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진학한다. 이곳에서의 4년간은 그의 인격 형성에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재학 중 기독교 세례를 받지만, 우치무라 간조의 저서를 읽고 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도 이때였다. 23세에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효고현 미카게(御影)사범학교의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그다음 해에 영어를 가르치면서 알게 된 도미와 결혼해 미카게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열중한 주키치는 자신이 쓴 시를 모아 아내와 같이 직접 손으로 많은 소시집을 만들었다. 결혼한 다음 해에 딸 모모코가, 2년 후에 아들 요지가 태어난다. 그 후 27세 때 지바현 가시와(柏)에 있는 히가시카사이(東葛飾)중학교로 옮기게 되는데 그는 그때까지 쓴 시를 골라 첫 시집 ≪가을의 눈동자≫를 출판하고 이후 시 잡지 등에 시를 발표한다. 그러나 가시와로 옮긴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폐결핵이 발병해 입원하게 된다. 병상 생활을 하면서 둘째 시집 ≪가난한 신도≫에 실을 시를 고르지만 간행을 보지 못하고 1년이 넘는 투병 생활 끝에 아내와 어린 두 아이를 남기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병상 노트에는 모모코와 요지를 보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정과 자신이 두 아이의 아버지인 것이 다른 누구의 아버지인 것보다 훨씬 기뻤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모모코와 요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반드시 한집에서 키워 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하는 내용도 있다.

둘째 시집 ≪가난한 신도≫는 그가 세상을 떠난 4개월 후 간행되었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그의 아내는 도쿄로 옮겨 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된 일을 하면서 두 아이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지만 주키치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에 딸 모모코가, 그리고 13년 후에는 아들 요지가 같은 병명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주키치가 남긴 시들이 유실되지 않고 사후에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고통 속에서도 시들을 소중히 간직해서 시집을 출판하겠다는 도미의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기 주키치의 대표작으로는 ≪가을의 눈동자≫, ≪가난한 신도≫, ≪신을 부르다≫, ≪꽃과 하늘과 기도≫, ≪야기 주키치 전집≫ 등이 있다.

도쿄도 마치다시의 일부가 된 곳에서 태어난 야기는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 있던 가나가와현 사범학교에 다녔다. 거기서 그는 감리교로 개종했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에 매료되었다. 1919년, 야기는 도쿄의 고마고메 기독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남았지만, 나중에는 우치무라 간조가 옹호한 무교회주의(''무교회'')로 옮겨갔다.

졸업 후 야기는 효고현의 미카게 사범학교에서 가르쳤고,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존 키츠의 시에 매우 영감을 받았으며, 여러 시를 그에게 헌정했다. 야기는 1925년에 첫 시집인 『아키노 히토메』(가을의 눈)를 출판했다. 그는 여러 작품을 시 잡지에 기고했지만, 문학계와는 거리를 두었다.

1926년 가나가와현 지고사키시에서 결핵으로 입원하여 1927년 10월 26일에 사망했다. 그가 널리 알려진 것은 사후에 『마즈시키 신토』(가난한 신자), 『야기 주키치 시집』(야기 주키치 선집), 『가미 오 요부』(신에게 말하다)가 출판된 이후였다.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야기 주키치는 1898년 도쿄도 마치다시 아이하라 정에서 농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4][3] 1904년 오토 즘죠 초등학교에 입학,[5] 1908년에는 이웃 마을인 가나가와현 쓰쿠이군 가와지리 즘죠 초등학교(현 사가미하라시립 가와지리 초등학교)에 다녔다.[5] 1912년 가와지리 즘죠 초등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3] 같은 해 4월 가마쿠라시에 있던 가나가와현 사범학교 예과(현 요코하마 국립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했다.[3]

영어에 능통했으며, 1915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에 심취하여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범학교 내 시 모임에도 참여했다.[5] 고학년 때는 일본 감리교 가마쿠라 교회의 주일 성경 수업에 참석했다.[5]

1917년 3월 가나가와현 사범학교 본과 제1부를 졸업하고,[3] 4월부터 도쿄 고등 사범학교 문과 제3부 영어과 예과에 진학하여 도쿄 오츠카의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3][5] 1918년 기타무라 도코쿠에 경도되어 『도코쿠 전집』을 읽었고,[8] 6월에는 미망인 기타무라 미나를 방문하기도 했다. 동급생 요시다 후지오와 친분을 쌓고,[9] 고이시카와 복음교회의 성경 수업에 참석하여 신약 성경을 그리스어 원어로 읽었다.

1919년 3월 2일, 고마고메 교회에서 토미나가 토쿠마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했다.[10]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를 따랐으며, 특정 교회에 소속되지 않았다.[10] 존 키츠의 시를 즐겨 읽었다.[3] 1919년 12월, 스페인 독감에 감염되어 폐렴으로 도쿄 간다의 하시모토 병원에 입원했다가,[5] 1920년 사카이 촌 자택에서 요양했다.[5] 완쾌 후 본과 3학년에 진학하여 기숙사를 나와 이케부쿠로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5] 가을에는 고등사범학교 영어 극회에서 무대 배경 작화를 담당했다.[5]

2. 2. 결혼과 미카게 시대

1921년 3월, 야기 주키치는 하숙집에서 니가타현다카다시 출신의 시마다 도미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12] 도미는 도쿄 여자성학원 3학년 편입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12] 같은 해,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야기 주키치는 효고현 미카게사범학교(고베 대학 국제인간과학부 전신[13])에 영어 교사로 부임하여 무코군스미요시촌(현 고베시히가시나다구)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5]

1921년 7월, 육군 현역 제도에 따라 히메지시의 보병 제39연대에 입영했다.[5][14] 입영 기간 동안 시마다 도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고백했고,[5] 1922년 2월 요코하마시혼모쿠의 혼모쿠 신사에서 약혼식을 올렸다.[5] 1922년 3월, 야기 주키치는 늑막염에 걸렸고,[5] 시마다 도미도 같은 병을 앓게 되자 그녀를 데려와 간호하며 7월 19일에 결혼했다. 이후 무코 군 미카게정(현 고베 시 히가시나다구)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야기 주키치는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몰두하여[5] 존 키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5] 1923년에는 자작시를 묶은 수제 소시집을 만들기 시작했고, 같은 해 3월 미카게 정 야나기로 이사했다.[3] 1923년 5월 26일에는 장녀 모모코가 태어났고, 1924년 12월 29일에는 장남 요지가 태어났다. 1924년 가을, 자필 시집을 재편집하여 『가을의 눈동자』라는 자선집을 만들었다.[5]

2. 3. 가시와 시대와 죽음

1925년 4월, 야기 주키치는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 지요다 마을(현 가시와시)의 히가시카쓰시카 중학교(현 지바 현립 히가시카쓰시카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전임한다.[15][24] 지요다 마을 가시와로 이사하여 학교 근처 교직원 주택에서 살았다.[3][17] 같은 해 여름, 첫 시집 『가을의 눈동자』가 간행되어[7] 『시신』, 『일본 시인』 등 시단 잡지에서 호평을 받았다.[3] 요미우리 신문에 시 4편이 게재되어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았으며, 사토 소노스케가 주최하는 『시의 집』에 참가했다.[18][19] 이후 『일본 시인』, 『생활자』, 『생탄』, 『문장 클럽』, 『와카쿠사』, 『동라』 등 여러 시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 연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2월에 병상에 눕게 되었고,[5] 3월에는 결핵 2기 진단을 받았다.[20][3] 요양 생활을 시작하면서 시 창작은 중단되고 병상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5] 5월에 휴직하고 지가사키의 난코인 요양소에서 투병 생활을 했다.[3] 이후 지가사키의 자택에서 요양하며[5] 병상에서 두 번째 시집 『가난한 신도』를 편집했다.[3] 1927년 10월 26일, 지가사키 자택에서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2. 4. 사후

야기 주키치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둘째 시집 『가난한 신도』는 4개월 뒤 노기쿠샤에서 간행되었다. 가토 다케오의 자비로 출판되었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아내 시마다 도미는 도쿄로 이주하여 양재 부업, 시라키야 오쓰카 분점 등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며 두 아이를 키웠다.[24][25] 그러나 1937년 딸 모모코, 1940년 아들 요지가 아버지와 같은 결핵으로 사망했다.[24][25][26]

시마다 도미는 야기 주키치의 유고를 소중히 보관하여 시집 출판에 힘썼다.[22] 다카무라 코타로, 미츠무라 시게조, 구사노 신페이 등의 도움으로 1942년 야마가 방에서 『야기 주키치 시집』이 한정 500부로 간행되었다. 소겐샤 이사였던 고바야시 히데오가 야기 주키치의 시를 접한 것을 계기로 1948년 소겐샤에서 시집이 간행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3] 1958년에는 요시노 히데오의 가족 전원이 협력하여 『정본 야기 주키치 시집』이 야요이 서방에서 간행되었다.

1984년, 고향 마치다시 아이하라 정에 야기 주키치 기념관이 개설되었다.[28] 1999년 아내 시마다 도미가 사망하여 야기 주키치의 묘소에 합장되었다.[22][30]

3. 작품 세계와 특징

야기 주키치는 짧은 시를 주로 썼으며, 간결하고 소박한 언어로 깊은 신앙심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1행시를 포함하여 다양한 형식의 시를 실험했다. 우치무라 간조가 옹호한 무교회주의(''무교회'')의 영향을 받아 종교시가 많다. 존 키츠의 시에 매우 영감을 받아, 여러 시를 그에게 헌정했다.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도 많이 남겼으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그린 작품도 간혹 보인다. 특히, 장녀 모모코가 여러 번 등장하며, 만년의 작품에는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늘어나는등, 모모코, 아내, 어머니라는 "세 명의 여성"을 읊은 작품이 눈에 띈다.

4. 평가

다카무라 고타로는 1943년에 "야기 주키치 시집 서문"에서 "시인 야기 주키치의 시는 불후하다. 이 맑고, 마음에서 스며 나오는 듯한 시는 어떤 세대 안에서도 죽지 않는다"라고 썼다.[33] 다카무라 고타로, 구사노 심페이 등 당대 일본 문인들은 야기 주키치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구사노 심페이는 "일본의 기독에 관한 시는 야기 주키치의 시로 최고로 하고 싶다"라고 평하며, "기독의 생리화, 감각화된 것이 그의 시이다"라고 했다. 사이토 쇼지는 야기 주키치를 "일본 최초이자 최고의 기독교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야마네 미치히로는 야기 주키치를 기독교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을 노래한 시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며, 고하라는 주키치를 "종교 시인 이전에 뛰어난 자연 시인이다"라고 평했다. 기독교 신자여도 신앙과 시가 가진 가치는 별개로 생각했다는 지적도 있다. 연구자이자 시인인 다나카 기요미쓰는 만년에 발표한 작품에 대해 "주목할 점은, 신앙의 직접적인 표백이 되는 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키치는 역시 시로서의 자립을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적었고, 사와무라 슈지는 초고에서 발표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관련된 것을 주의 깊게 멀리했다"고 했다.[32]

그의 시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5. 대표작

야기 주키치는 생전에 『아키노 히토메』(가을의 눈)를 출판했다. 사후에는 『마즈시키 신토』(가난한 신자), 『야기 주키치 시집』(야기 주키치 선집), 『가미 오 요부』(신에게 말하다) 등이 출판되어 널리 알려졌다.

참조

[1] Kotobank 2023-01-27
[2] Kotobank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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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八木重吉の詩の生命 八木重吉について 集英社 1979
[5] 서적 八木重吉年譜 ちくま文庫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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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八木重吉の詩の生命 八木重吉について 集英社 1979
[9] 서적 鑑賞 中公文庫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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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뉴스 吉野登美子さん死去 199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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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서
[33] 뉴스 房総の作家 八木重吉(15) 死後、名声を得る https://www.chibanip[...] 2011-05-19
[34] 서적 八木重吉全詩集 第一巻 筑摩書房 1988-08
[35] 뉴스 素朴なこころ 八木重吉(3)信仰と生活のはざまで苦悩 https://www.nikkei.c[...] 2015-05-24
[36] 서적 なつかしきかな 兵庫県御影師範学校同窓会甲陽会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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