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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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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디트 슈타인은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이자 가톨릭 수녀로, 현상학 연구에 기여했으며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 무신론자로 성장했지만, 에드문트 후설에게 철학을 배우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교직에서 해고된 후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했으며,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유럽의 수호 성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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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슈타인
기본 정보
테레사 베네딕타 수녀 1938-39년경 사진
존칭 접두사성녀
이름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
출생일1891년 10월 12일
출생지독일 제국 브레슬라우 (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
사망일1942년 8월 9일
사망지나치 독일 점령 하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사망 원인가스실에서 독가스 처형
국적독일
종교가톨릭교회
수녀회맨발의 가르멜회 OCD
학력
교육 기관슐레지아 프리드리히-빌헬름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박사, 1916)
재직 기관프라이부르크 대학교 (1916–1918)
박사 학위 논문 제목역사적 발전과 현상학적 고찰에서 본 감정이입 문제
박사 학위 논문 년도1916
지도 교수에드문트 후설
철학
철학 분야서양 철학
철학 시대20세기 철학
학파 및 전통대륙 철학
현상학
토마스주의
가르멜회 영성
주요 관심사형이상학
현상학
심리 철학
인식론
주요 저서《감정이입의 문제에 관하여》
《유한과 영원한 존재》
《심리학과 인문학 철학》
《십자가의 과학》
주요 영향에드문트 후설
아돌프 라이나흐
막스 레만
마르틴 하이데거
로만 잉가르덴
장 헤링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
오스발트 퀼페
막스 셸러
신약성경
토마스 아퀴나스
존 헨리 뉴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에리히 프치바라
주요 영향 대상에드문트 후설
헤트비히 콘라트-마르티우스
마르틴 하이데거
에메리타 S. 퀴토
로만 잉가르덴
게르다 발터
에리히 프치바라
카롤 보이티와
아돌프 라이나흐
앨러스데어 매킨타이어
안젤름 민
더못 모란
주요 사상그리스도교 여성의 영성
현상학적 감정이입
종교
세례명테레사
세례일1922년 1월 1일
성인 정보
시복일1987년 5월 1일
시복 장소독일 쾰른
시복 집전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성일1998년 10월 11일
시성 장소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광장
시성 집전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기념일8월 9일
수호유럽
개종한 유대인
순교자

2. 생애

에디트 슈타인은 1891년 폴란드 브로츠와프(당시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유대인 가정의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후, 어머니의 헌신적인 교육열 덕분에 성장했다. 10대 시절에는 불가지론자가 되었으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1913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을 만나 현상학을 공부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적십자 간호사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1916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후설의 지도로 공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최우등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후설의 조교로 활동하며 학문적 경력을 쌓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사 논문이 거부되는 차별을 겪기도 했다.

1921년, 테레사 아빌라의 자서전을 읽고 감명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 1922년 세례를 받았다. 이후 슈파이어의 도미니카 수녀회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가톨릭 철학 연구에 매진했다. 1932년 뮌스터의 교육학 연구소 강사가 되었으나, 나치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인해 1933년 사임해야 했다.

1934년, 쾰른의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십자가의 테레지아 베네딕타'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피신했지만, 1942년 SS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해 8월 9일 언니 로사와 함께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1987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8년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의 시성은 파라세타몰(아세트아미노펜) 중독으로 간 괴사를 앓던 베네딕타 맥카시라는 어린 소녀가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건을 근거로 이루어졌다. 테레지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는 베네딕토, 키릴과 메토디오, 스웨덴의 브리기드,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유럽의 수호 성인 중 한 명으로 추대되었다.

바트베르크자베른(Bad Bergzabern)의 상징. 두루마리에는 그녀의 저서에서 인용한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자기 헌신이다. 모든 것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십자가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891-1916)

에디트 슈타인은 폴란드 브로츠와프(옛 브레슬라우)의 하부 실레시아에서 유대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11명의 자녀 중 막내였던 그녀는 유대력의 중요한 명절인 속죄일에 태어났는데, 이 때문에 어머니의 총애를 받았다.[8] 그녀는 학습을 좋아하는 매우 재능 있는 아이였으며, 비판적 사고를 장려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하지만 십 대 시절에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철저한 교육을 시키고자 에디트를 브레슬라우의 실레지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 보냈다. 19세에 슈타인은 가족과 함께 브레슬라우의 집으로 이사했는데, 이곳은 나중에 에디트 슈타인 하우스로 불리며 슈타인 가족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브로츠와프 노보비에이스카 거리(구 미하엘리스 거리) 38번지에 있는 슈타인의 생가


1904년, 13세 때 “자립적인 인간”을 목표로 잠시 학교를 그만두었다. 유대교를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1913년, 여름 학기에 괴팅겐 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에게 배웠다.[46] 1916년, 후설 밑에서 “감정 이입의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2. 학문적 활동과 가톨릭으로의 개종 (1916-1933)

1913년 4월, 슈타인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왔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그녀는 후설 지도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로 결정하고 논문 주제로 공감을 선택했다. 그녀의 학업은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되었다. 그 후 그녀는 1915년 4월 7일부터 9월 1일까지 마이리슈 바이스키르헨의 비전염병 병원에서 자원봉사 전시 적십자 간호사로 일했다.[9] 1916년, 슈타인은 공감에 관한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이주했다.[10][11] 프라이부르크에서 학위를 받기 직전, 그녀는 그곳에서 후설의 조교가 되는 데 동의했다. 이 역할에서 그녀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후설과 의견을 달리했고 현상학 전체에 독립적인 기여를 했다.[12] 그녀의 논문 제목은 ''Das Einfühlungsproblem in seiner historischen Entwicklung und in phänomenologischer Betrachtung''[13] (''역사적 발전과 현상학적 고찰에서의 공감 문제'')[14]였고, ''최우등''의 영예와 함께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슈타인은 프라이부르크 학부 교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1918년까지 후설(후설 또한 그 기관으로 옮겼다)[14]조교로 일했다. 괴팅겐 대학교는 1919년 그녀의 사사 논문을 거부했다.[14] 슈타인은 박사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사에 실패했다.[14]

그녀의 거부당한 사사 논문인 ''Beiträge zur philosophischen Begründung der Psycholog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17] (''심리학과 인문과학의 철학적 토대에 대한 기여'')는 1922년 ''Jahrbuch für Philosophie und phänomenologische Forschung''에 발표되었다.[14] 그녀는 현실주의적 현상학자로 분류된다.[18]

슈타인은 이전에 가톨릭과 접촉한 적이 있었지만, 1921년 바트 베르크자베른에서 여름 휴가 중 신비주의자 테레사 아빌라의 자서전을 읽은 것이 그녀의 개종을 촉구했고 결국 가르멜 수녀회의 삶을 추구하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1922년 1월 1일에 세례를 받고, 영적 조언자들로부터 가르멜 수녀의 은둔하고 숨겨진 삶에 바로 들어가는 것을 만류당한 슈타인은 1923년부터 1931년까지 슈파이어의 도미니카 수녀 학교에서 교사직을 얻었다. 그곳에서 슈타인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De Veritate'' (''진리에 관하여'')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일반적으로 가톨릭 철학에 정통해졌으며, 전 교수인 후설의 현상학을 토마스주의와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1929년 4월, 하이데거가 후설의 70번째 생일에 연설을 한 달에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를 방문했다. 1932년 그녀는 뮌스터의 가톨릭 교회 산하 과학 교육학 연구소 강사가 되었지만, 나치 독일 정부가 통과시킨 반유대주의 법률 때문에 1933년 그 직책에서 사임해야 했다. 그녀는 비오 1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치 정권을 규탄하고 교황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정권을 공개적으로 규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의 편지는 답장을 받지 못했고, 교황이 그것을 보았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19] 그러나 1937년 교황은 독일어로 쓰여진 회칙인 ''깊은 근심으로(Mit brennender Sorge)''(그 독일어 첫 단어에 따라, 즉 "깊은 근심으로"[20])를 발표했는데, 그 안에서 그는 나치즘을 비판하고, 1933년 독일과 교회 사이의 콘코르다트 위반 사례를 열거하고, 반유대주의를 규탄했다.

2. 3. 가르멜 수녀회 입회와 나치의 박해 (1933-1942)

슈타인은 1933년 10월 쾰른-린덴탈(린덴탈)에 있는 성 마리아 폰 프리덴(평화의 성모) 수녀원(맨발 가르멜 수녀회)에 들어가 "테레지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Teresa Benedicta of the Cross)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쾰른에서 그녀는 형이상학적 저서인 『유한과 영원의 존재』(Endliches und ewiges Sein, Finite and Eternal Being)를 집필했는데, 이 책은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그리고 후설의 철학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다.[46]

점차 커지는 나치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수녀회는 에디트와 그녀의 언니이자 개종자였으며 가르멜 수도원의 외부 수녀였던 로사를 네덜란드 에흐트에 있는 맨발 가르멜 수녀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녀는 『요한네스 아 크루체 연구: 십자가의 과학』(Studie über Joannes a Cruce: Kreuzeswissenschaft, Studies on 십자가의 요한: The Science of the Cross)을 저술했다. 1939년 6월 9일 유언장[21]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에흐트로 이주한 것은 슈타인이 더욱 경건해지고 가르멜 수도회 규칙을 더욱 철저히 준수하도록 이끌었다. 직업 공무원직 복구법 시행으로 교직이 박탈된 후에도 슈타인은 에흐트 수녀원에서 수녀들과 수녀원 공동체 학생들에게 라틴어와 철학을 가르치는 강사 역할을 쉽게 다시 맡았다.[22]

네덜란드가 나치에 점령되기 전에도 슈타인은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고, 심지어 원장에게 편지를 써서 "진정한 평화를 위한 속죄의 희생으로 예수의 마음에 자신을 바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고 유언장을 작성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동료 수녀들은 나치가 1940년 5월 네덜란드를 침공한 후 슈타인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면서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을 조용히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22]

결국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네덜란드 주교회의는 1942년 7월 20일 전국 교회에서 나치 인종차별주의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2년 7월 26일 네덜란드 총독 아르투어 자이스-잉쿠아르트는 보복으로 이전까지 살아남았던 모든 유대교 개종자들의 체포를 명령했다.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243명의 세례받은 유대인들과 함께 테레지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는 1942년 8월 2일 SS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언니 로사는 아메르스포르트와 베스터보르크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베스터보르크의 네덜란드 관리 한 명은 그녀의 신앙심과 침착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23] 그는 그녀에게 탈출 계획을 제안했다. 슈타인은 그의 도움을 단호히 거절하며 "만약 누군가 이 시점에 개입하여 나의 형제자매들의 운명을 함께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그것은 완전한 파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22]

1942년 8월 7일 새벽, 987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테레지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 그녀의 언니 로사,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은 아마도 8월 9일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에서 살해되었을 것이다.[8][24]

2. 4. 시복과 시성

테레지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는 1987년 5월 1일 독일 쾰른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1년 후인 1998년 10월 11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8] 그녀의 시성의 근거가 된 기적은 다량의 파라세타몰(아세트아미노펜)을 삼킨 베네딕타 맥카시라는 어린 소녀의 치유였다. 파라세타몰은 괴사를 일으킨다. 소녀의 아버지인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교회 사제 에마뉘엘 샤를 맥카시는 즉시 친척들을 불러 모아 테레지아의 전구를 위해 기도했다.[26]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그녀가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보스턴매사추세츠 종합병원 소아과 전문의 로널드 클라인만은 교회 재판에서 그녀의 회복에 대해 증언하며 "기적이라고 말할 의향이 있었다"고 진술했다.[26] 맥카시는 나중에 테레지아 베네딕타 수녀의 시성식에 참석했다.

테레지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는 베네딕토, 키릴과 메토디오, 스웨덴의 브리기드,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유럽의 여섯 수호 성인 중 한 명이다.

에디트의 시성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무명의 유대인 여성으로 생을 마감했고, 가톨릭 측에서는 그 죽음이 순교에 해당하는지 고심했다. 그러나 테레사 베네딕타 맥카시라는 미국 소녀가 에디트 슈타인을 위해 기도하자 기적적으로 병이 회복되어 의사들을 놀라게 했다. 가톨릭교회는 이를 인정하여 1987년 5월 1일 쾰른 교외 경기장에서 그녀의 시복식을 거행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유대인 단체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에디트에게 "유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자격이 없다고 항의했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란 민족명이라기보다는 유대교 신자를 의미하며,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자동적으로 "유대인"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개종 후에도 그녀는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고, 아우슈비츠의 성녀로서 다시 평가받는 시대적 분위기까지 더해져 순교자로 시성될 수 있었다.

3. 철학

1913년 4월, 슈타인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괴팅겐으로 갔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후설의 지도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로 결정하고 공감을 논문 주제로 선택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학업이 중단되었고, 1915년 4월 7일부터 9월 1일까지 마이리슈 바이스키르헨의 비전염병 병원에서 적십자 간호사로 자원봉사했다.[9]

1916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옮겨 공감에 관한 논문을 완성했다.[10][11] 프라이부르크에서 학위를 받기 직전, 후설의 조교가 되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며 현상학에 독립적인 기여를 했다.[12] ''역사적 발전과 현상학적 고찰에서의 공감 문제''(Das Einfühlungsproblem in seiner historischen Entwicklung und in phänomenologischer Betrachtung|역사적 발전과 현상학적 고찰에서의 공감 문제de)[13][14]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최우등''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까지 후설의 조교로 일한 후, 1919년 괴팅겐 대학교에 제출한 사사 논문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14]

거부된 사사 논문 ''심리학과 인문과학의 철학적 토대에 대한 기여''(Beiträge zur philosophischen Begründung der Psycholog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심리학과 인문과학의 철학적 토대에 대한 기여de)[17]는 1922년 ''Jahrbuch für Philosophie und phänomenologische Forschung''에 발표되었다.[14] 그녀는 현실주의적 현상학자로 분류된다.[18]

1921년 여름 휴가 중 테레사 아빌라의 자서전을 읽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1922년 1월 1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후 가르멜 수녀회의 삶을 추구했으나, 영적 조언자들의 만류로 1923년부터 1931년까지 슈파이어의 도미니카 수녀 학교에서 교사직을 맡았다. 그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De Veritate'' (''진리에 관하여'')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가톨릭 철학에 정통해졌으며, 후설의 현상학을 토마스주의와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1929년 4월,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를 방문했다.

1932년 뮌스터의 가톨릭 교회 산하 과학 교육학 연구소 강사가 되었지만, 나치 독일 정부의 반유대주의 법률 때문에 1933년 사임해야 했다. 비오 1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치 정권을 규탄하고 교황에게 공개적으로 규탄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19]

슈타인의 철학적 발전은 초기 현상학 시기(1916~1925년), 중기 비교 시기(1925~1933년), 후기 기독교적 시기(1935~1942년)로 나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요소들이 그녀의 전 작업에 걸쳐 작용하며 발전을 이끌었다.

3. 1. 초기 현상학 시기 (1916-1925)

1913년 4월, 슈타인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괴팅겐으로 갔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후설의 지도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로 결정하고 공감을 논문 주제로 선택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학업이 중단되자, 1915년 4월 7일부터 9월 1일까지 마이리슈 바이스키르헨의 비전염병 병원에서 적십자 간호사로 자원봉사했다.[9] 1916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옮겨 공감에 관한 논문을 완성하고,[10][11] ''역사적 발전과 현상학적 고찰에서의 공감 문제''(Das Einfühlungsproblem in seiner historischen Entwicklung und in phänomenologischer Betrachtung|역사적 발전과 현상학적 고찰에서의 공감 문제de)[13][14]라는 제목으로 제출하여 ''최우등''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 직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조교가 되어 후설과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며 현상학에 독립적인 기여를 했다.[12] 1918년까지 후설의 조교로 일한 후,[14] 1919년 괴팅겐 대학교에 제출한 사사 논문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14]

거부된 사사 논문 ''Beiträge zur philosophischen Begründung der Psycholog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Beiträge zur philosophischen Begründung der Psycholog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심리학과 인문과학의 철학적 토대에 대한 기여de)[17]는 1922년 ''Jahrbuch für Philosophie und phänomenologische Forschung''에 발표되었다.[14] 그녀는 현실주의적 현상학자로 분류된다.[18]

1921년 여름 휴가 중 테레사 아빌라의 자서전을 읽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1922년 1월 1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후 가르멜 수녀회의 삶을 추구했으나, 영적 조언자들의 만류로 1923년부터 1931년까지 슈파이어의 도미니카 수녀 학교에서 교사직을 맡았다. 그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De Veritate'' (''진리에 관하여'')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가톨릭 철학에 정통해졌으며, 후설의 현상학을 토마스주의와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1929년 4월,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를 방문했다.

1932년 뮌스터의 가톨릭 교회 산하 과학 교육학 연구소 강사가 되었지만, 나치 독일 정부의 반유대주의 법률 때문에 1933년 사임해야 했다. 비오 1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치 정권을 규탄하고 교황에게 공개적으로 규탄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다.[19]

슈타인의 공감에 관한 박사 논문은 후설의 연구에서 빠진 부분을 채우려는 시도였다. 그녀는 자서전 『유대인 가정에서의 삶』(Life in a Jewish Family)에서 후설이 공감을 주관간성이 확립되는 결정적인 행위로 여겼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이 과제를 수행하여 현상학 운동에서 이 중요한 개념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후설의 조교(1916~1918년)로 일하면서, 나중에 『이데아 II』(Ideas II)와 『이데아 III』(Ideas III)로 출판될 후설의 원고를 편집했고, 이 행위가 우리의 주관간적 세계 구성, 특히 심리학과 인문학이 연구하는 대상에 대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게 되었다. 후설의 조교직을 사임한 후, 처음으로 착수한 작업은 심리와 정신의 현상학적 구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22년 후설의 『연감』(Jahrbuch)에 발표된 『심리학 및 인문학 철학』(Philosophy of Psychology and the Humanities)의 두 논문, 즉 『정신적 인과성』(Psychic Causality)과 『개인과 공동체』(Individual and Community)가 나왔다. 이 시기에 『철학 서론』(Introduction to Philosophy), 『국가에 관한 연구』(An Investigation Concerning the State), 그리고 『자유와 은총』(Freedom and Grace)도 쓰였다.

3. 2. 중기 비교 시기 (1925-1933)

1922년 1월 1일, 에디트 슈타인은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19] 1923년부터 1931년까지 슈파이어에 있는 도미니카 수녀회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19] 슈타인은 그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 ''De Veritate'' (''진리에 관하여'')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가톨릭 철학을 공부하며,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토마스주의와 연결하려는 시도를 했다.[19] 1929년 4월, 슈타인은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를 방문했는데, 같은 달 하이데거는 후설의 70세 생일을 기념하는 헌정 연설을 했다.[19]

1932년, 슈타인은 뮌스터에 있는 가톨릭 교회 산하 과학 교육학 연구소의 강사가 되었으나, 나치 독일 정부가 제정한 반유대주의 법률로 인해 1933년 강사직을 사임해야 했다.[19] 슈타인은 비오 11세에게 편지를 보내 나치 정권을 규탄하고, 교황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개적으로 나치 정권을 규탄할 것을 요청했다.[19] 그러나 슈타인의 편지에 대한 답장은 없었으며, 교황이 이 편지를 받았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19]

슈타인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현상학을 연구하고 비교하도록 격려받았으며, 1932년 아퀴나스의 『진리에 관하여』(De Veritate) 번역본을 두 권으로 출판했다.[19] 이 시기 슈타인의 주요 저술은 다음과 같다.

  • 후설과 아퀴나스의 방법론 차이를 논하는 '후설과 아퀴나스: 비교'
  • '힘(Potency)'과 '실재(Act)'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시도한 『힘과 실재(Potency and Act)』
  • 인류학에 관한 두 권의 저술: 『인간의 구조(The Structure of the Human Person)』, 『철학적 인류학(Philosophical Anthropology)』, 『인간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Human Being?)』, 『신학적 인류학(Theological Anthropology)』 (두 번째 책은 1933년 슈타인의 강의가 취소되어 미완성)


이 기간 동안 슈타인은 여성 교육, 직업, 일반 교육에 대해 많은 청중에게 강의를 하며 큰 찬사를 받았다.[19]

3. 3. 후기 기독교적 시기 (1934-1942)

카르멜에서 그녀의 첫 번째 직접적인 과제는 『능동과 수동(Potency and Act)』을 출판 준비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유한한 것과 영원한 것 - 존재의 의미로의 상승(Finite and Eternal Being – An Ascent to the Meaning of Being)』이라는 새로운 책을 써서 이를 완수했다. 이 저술은 기독교적 계시가 존재의 의미를 찾고 발견하는 세계관에 기여한다는 관점에서, 스스로 기독교적임을 아는 존재론(Seinslehre)을 제안했다. 슈타인은 또한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Dionysius the Areopagite)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상징 신학에 관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분실된 것으로 여겨지는 그의 저술을 집필했다. 슈타인의 마지막 저술인 『십자가의 과학(Science of the Cross)』은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에 대한 주석으로, 그녀의 초기 작품에서 이미 관심을 가졌던 영혼의 심연에 대한 특히 카르멜 수도회적인 이해를 발전시켰다.

4. 유산과 기념

테레지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는 1987년 5월 1일 독일 쾰른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의 근거가 된 기적은 파라세타몰(아세트아미노펜)을 다량 복용한 베네딕타 맥카시라는 어린 소녀의 치유였다. 파라세타몰은 괴사를 일으키는데, 소녀의 아버지인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교회 사제 에마뉘엘 샤를 맥카시는 친척들을 모아 테레지아에게 전구를 청했다.[26] 얼마 후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소녀가 건강한 상태로 깨어나는 것을 보았고, 보스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소아과 전문의 로널드 클라인만은 교회 재판에서 "기적이라고 말할 의향이 있었다"고 증언했다.[26] 맥카시는 이후 테레지아 베네딕타 수녀의 시성식에 참석했다.

테레지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는 베네딕토, 키릴과 메토디오, 스웨덴의 브리기드,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유럽의 여섯 수호 성인 중 한 명이다.

그녀를 기리는 학교로는 폴란드 루블리니에츠[27], 독일 다름슈타트[28], 네덜란드 헹엘로[29], 캐나다 미시소거(온타리오주)[30] 등이 있다. 튀빙겐 대학교[31] 여성 기숙사와 매사추세츠주 워스터 홀리 크로스 대학 강의실 건물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폴란드 루블리니에츠에는 쿠란트 가족 집 1층에 에디트 슈타인 박물관이, 브로츠와프에는 1919년 에디트의 어머니가 구입한 집에 에디트 슈타인 하우스라는 박물관이 있다. 빈 에벤도르퍼슈트라세 8번지에 있는 에디트-슈타인-하우스는 가톨릭 대학교 사목과 빈 대교구 대학 사목의 주요 장소로, 에디트 슈타인에게 봉헌된 예배당과 약 90명 학생용 기숙사가 있다.[32]

철학자 앨리스테어 맥인타이어는 2006년 ''에디트 슈타인: 철학적 서문, 1913-1922''를 출판, 자신의 철학을 실천한 그녀를 마르틴 하이데거와 대조했다.[33] 극작가 아서 지론은 슈타인에게서 영감을 받은 연극 ''에디트 슈타인''을 썼고, 1988년 피츠버그 공립극장에서 공연되었다.[34] 1988년 에디트 슈타인은 시복을 기념, 루퍼트 마이어와 함께 독일 우표에 등장했다. 1991년 이탈리아 음악가는 에디트 슈타인에게서 영감을 받은 노래를 발표했다. 1995년 헝가리 영화 감독은 에디트 슈타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영화를 제작했다.

1999년 독일 조각가의 기념 동상이 쾰른에 헌정되었다. 동상은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을 반영하는 슈타인의 세 가지 모습과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나타내는 빈 신발 더미로 구성된다. 2007년 슈타인의 삶과 업적은 제임스 호프킨의 소설에서 극화되었다.[35] 2008년 브로츠와프 에디트 슈타인 유년기 집 근처에 ''돌퍼슈타인''이 설치되었고, 쾰른과 프라이부르크에도 설치되었다.

2009년 그녀의 흉상이 독일 레겐스부르크 근처 발할라 기념관에 설치되었다. 같은 해 6월 에디트 슈타인 철학 연구 국제 협회가 설립, 아일랜드 메이누스 대학교에서 첫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36] 2014년 6월 6일 D-데이 70주년을 맞아 찰스 왕세자가 바이외 대성당에서 그녀에게 헌정된 종을 명명했다. 같은 해 에밀리 리아 실버먼의 저서가 출판되었다. 2018년 미국 영화 감독은 에디트 슈타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2024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맨발의 카르멜 수녀회 수도원장에게서 슈타인을 교회 박사로 선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맨발의 카르멜 수녀회는 2022년 슈타인 가톨릭 개종 100주년과 순교 80주년을 기념, 선언에 필요한 서류 수집을 위한 국제 위원회를 발족했다.[37]

4. 1. 논란

테레지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의 시복식은 순교자로서의 시복이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비판론자들은 그녀가 기독교 신앙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38] 다니엘 폴리시의 말을 빌리면, 시복식은 "개종 활동을 조장하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시복식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는 슈타인의 가톨릭 신앙과 아우슈비츠에서 '동료 유대인들'과 함께한 죽음을 연결하려는 의도를 보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39][40]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테레지아 베네딕타가 1942년 네덜란드 주교회의가 나치의 인종차별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 때문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 때문에 죽었고, 따라서 진정한 순교자라는 것이다.[8][41]

에디트가 시성될 때까지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그녀는 아우슈비츠에서 무명의 유대인 여성으로 생을 마감했고, 가톨릭 측에서는 과연 그 죽음이 순교에 해당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테레사 베네딕타 맥카시(Teresa Benedicta McCarthy)라는 미국 소녀가 에디트 슈타인을 위해 기도하자 기적적으로 병이 회복되어 의사들을 놀라게 했다. 가톨릭 교회는 이를 인정하여 1987년 5월 1일 쾰른 교외 경기장에서 그녀의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유대인 단체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에디트에게 "유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자격이 없다고 항의했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란 민족명이라기보다는 유대교 신자를 의미하며,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자동적으로 "유대인"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개종해도 그녀는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고, 아우슈비츠의 성녀로서 다시 평가받는 시대적 분위기까지 더해져 순교자로서 시성될 수 있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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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The Science of the Cross (CWES, vol. 6) https://www.icspub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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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서적 Person and Dignity in Edith Stein's Writings. Investigated in Comparison to the Writings of the Doctors of the Church and the Magisterial Documents of the Catholic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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