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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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대공습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 공군(Luftwaffe)이 영국 본토를 전략적으로 폭격한 사건이다. 독일은 공군력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이론에 따라, 산업 시설, 정부 청사, 민간인을 공격하여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초기에는 영국 공군(RAF)의 저항과 정보 부족으로 인해 목표 달성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야간 폭격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런던을 비롯한 여러 도시가 집중적인 폭격을 받았으며, 민간인 사상자와 막대한 인프라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영국의 방공 능력 향상과 독일의 전략적 실패로 인해 독일의 침공 위협은 제거되었고, 결국 독일은 동부 전선으로 주 공격 목표를 전환했다. 영국 대공습은 영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시 선전과 문학,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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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대공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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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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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940년 9월 7일 ~ 1941년 5월 11일 |
장소 | 영국 |
결과 | 독일의 전략적 실패 |
교전 세력 | |
연합군 | 영국 |
추축군 |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
지휘관 | |
연합군 | 조지 6세 윈스턴 처칠 휴 다우딩 프레더릭 앨프레드 파일 오웬 튜더 보이드 레슬리 고시지 |
추축군 |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후고 슈페를레 알베르트 케셀링 한스 예쇼네크 리노 코르소 푸글러 |
병력 규모 | |
연합군 | 알 수 없음 |
추축군 | 알 수 없음 |
피해 규모 | |
연합군 | 민간인 사망: 약 40,000 ~ 43,000명 부상: 약 46,000 ~ 139,000명 주택 피해: 2백만 채 (런던 60%) |
추축군 | 인원 피해: 알 수 없음 항공기 승무원: 3,363명 항공기 손실: 2,265대 (1940년 여름 ~ 1941년 5월) |
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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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2. 1. 루프트바페와 전략폭격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줄리오 두에와 빌리 미첼 등의 공군력 이론가들은 공군력만으로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19] 당시에는 폭격기만으로도 무조건 이길 수 있으며,[220] 특히 야간에는 저항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들은 산업, 정부 청사, 통신 시설을 파괴하여 적의 전쟁 수행 능력을 박탈하고, 민간인 폭격을 통해 사기를 저하시켜 생산 감소를 유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단은 이러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영국 공군 폭격사령부는 민간인의 의지와 통신 및 산업 시설을 파괴하여 승리하고자 했다.[221]
독일 국방군 공군(OKL)은 전략폭격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했지만, 산업 및 도시의 전략적 폭격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폭격이 생산을 방해하고 민간인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장의 힘의 균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공군력만으로 결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으며, 1942년까지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폭격하는 공식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222] 1930년대 독일 법학자들은 국제법상 허용되는 폭격 유형에 대한 지침을 마련했는데, 민간인에 대한 직접 공격은 "테러 폭격"으로 간주되어 제외되었지만, 핵심 전쟁 산업 시설 공격은 허용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223]
나치당 집권 초기부터 1939년까지 독일 군사 저널에서는 전략 폭격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일부는 영국 및 미국과 같은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224] 발터 베버 장군은 전략 폭격을 옹호하며 공군 전략의 다섯 가지 요점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적 공군력 파괴, 병력 이동 및 보급에 필수적인 철도와 도로망 파괴, 지상 작전 지원, 해군 작전 지원, 군수 공장 생산 중단 등이 포함되었다.[225] 베버는 OKL이 대전략, 전쟁 경제, 무장 생산 및 잠재적 적의 심리(정보 분석)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비전은 실현되지 못했고, 항공 아카데미는 독립적인 전략 공중 공세보다는 전술, 기술, 작전 계획에 집중했다.[226]
1936년 베버가 사망한 후, 그의 후임자들인 알베르트 케셀링과 한스위르겐 슈툼프는 근접항공지원을 위해 전략 계획을 포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27] 후고 슈페를레와 한스 예쇼네크는 지상 지원 작전의 지지자였으며, 독일 공군은 독립적인 전략 공중 작전보다는 공동 군사 작전을 선호했다.[227]
2. 2. 히틀러와 괴링의 오판
아돌프 히틀러는 1930년대 폭격기 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전략적 목적으로 폭격기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했으나, 상대에 대한 폭격보다는 방공에 더 신경을 썼다.[228] 1939년 히틀러는 공군최고사령부에 적절한 시기가 된다면 영국의 저항 의지에 대응하여 무자비한 공군력 활용을 수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습 결과로 확인된 전략폭격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공습으로 군수산업의 효과적인 타격은 불가능하다. 정해진 목표가 타격되지 않는 것이 일상이다"라며 공군이 적국 산업에 충분한 피해를 주지 못하는 것에 불평할 때가 많았다.[228]전쟁 계획이 수립될 당시 히틀러는 공군에 전략폭격 작전을 계획해보라는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고, 영국이나 러시아와 전쟁할 가능성이 있다고 공군 참모들에게 충분히 경고하지 않았다. 폭격에 나서기 위한 확실한 작전이나 전술준비도 미미하였는데 이는 최고사령관인 히틀러가 그런 계획에 매달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228]
히틀러는 1930년대 주변 약소국을 공습으로 굴복시키지 않고 위협만으로 독일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면서, 폭격 자체를 공포심 형성의 수단으로 보는 자신의 시각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229] 연합군의 공습전략에 대한 히틀러의 견해는 단순 사기 저하를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사기 저하는 부수적인 이득일 뿐, 경제전의 차원에서 자국의 경제력 차단을 위한 것이었음을 간과했다.[229]
히틀러는 폭격에 대해 정치적인 면에서 훨씬 더 큰 매력을 느꼈다. 오스트리아나 체코슬로바키아 등 주변국에 단순한 위협만으로도 외교적 성과를 거뒀던 만큼, 독일이 보복을 위협하는 것만으로 연합국에서 무제한 폭격에 나서지 않고 온건정책을 채택하도록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였다. 또한 자국 내 정치적 위신을 생각하여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자 히틀러는 민심이 정권에 등을 돌릴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였으며, 양측 모두 폭격 작전을 주저하는 교착상태를 만들기 위해, 영국에도 '테러 공세'를 똑같이 가하려는 노력을 강화하였다.[229]

공군 활용에 가장 큰 문제점은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이었다. 히틀러는 공군을 "가장 효과적인 전략 병기"라 보았으며, 해군의 거듭된 요청에도 "분열되지 않은 공군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세웠다.[230] 이러한 원칙으로 전반적인 전략의 공군력 개입을 훨씬 어렵게 만드는가 하면, 괴링에게도 본인의 '제국'에 집착하고 질투심을 낳는 계기가 되었으며, 히틀러 본인으로서도 전략, 작전 단계에서 공군의 체계적 지휘로부터 자발적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230]
전쟁 말기에 이르러 공군 활용에 한층 더 개입하고자 했던 히틀러는 괴링과의 정치적 갈등에 직면하였으며 이는 전쟁이 거의 끝날 때까지 전혀 해결되지 못했다.[230] 1940년과 1941년에는 괴링이 해군과의 협력을 거부하는 바람에 독일군 병력이 영국의 해상 교역을 차단하여, 영국과의 전쟁에서 전략적,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게 되었다.[231]
공군을 다른 군조직과 의도적으로 분리함으로서 히틀러와 공군 사이에는 지휘계통 상의 중대한 공백이 발생하였으며 다른 요인들도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우선 괴링은 히틀러에 대한 두려움으로 공군력에 대해 비판적 접근 없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판단하도록 정보를 조작하거나 잘못 전달하였다. 1937년 발터 베버의 자체 중폭격기 계획을 중단하기로 결정할 당시, 괴링은 히틀러가 폭격기의 수만 알고 싶어할 뿐, 엔진이 얼마나 있는가는 알지 못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1939년 7월 괴링은 공군이 공중전에 현실보다 더욱 전략적으로 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레흘린에서 공군의 최첨단 장비 전시에 나서기도 했다.[232]
2. 3. 영국 본토 항공전

Luftwaffede(독일 공군)는 영국 상공에서 독자적인 전략 작전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그 준비는 미흡했다. 1940년 7월부터 9월까지 독일 공군은 영국 본토 침공의 서막으로 제공권 확보를 위해 영국 해협 호송선, 항구, 영국 공군 비행장 및 지원 산업 시설을 폭격하며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를 공격했다.[27] 독일은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를 파괴하면 침공 지역 제공권을 장악하고, 영국 공군 폭격 사령부, 해안 사령부, 영국 해군은 독일의 제공권 아래에서 작전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27]
하지만 독일 공군의 정보력 부족으로 항공기가 목표물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공장과 비행장 공격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영국 전투기 생산량은 독일보다 2대 1의 비율로 계속 증가했으며,[28] 1940년 당시 영국은 10,000대의 항공기를 생산하여 독일의 8,000대보다 많았다.[29] 조종사와 승무원 교체도 영국 공군과 독일 공군 모두 어려움을 겪었지만, 독일은 더 많은 훈련된 승무원을 보유하고 있었다.[30]
영국 영토에서 작전하는 영국 승무원은 격추되어도 다시 비행할 수 있었지만, 독일 승무원은 포로가 될 위험이 있었다. 폭격기는 4~5명의 승무원이 탑승하여 인명 손실이 더 컸다.[30] 1940년 9월 7일, 독일군은 영국 공군 지원 시설 파괴에서 벗어나 런던 공격을 통해 영국 정부를 항복시키려 했다.[31]
이러한 전략 변경은 독일 공군 최고사령부(OKL)의 주요 실수로 여겨지기도 한다. 영국 공군 비행장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면 제공권을 확보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32] 반면, 독일 공군이 8월 마지막 주와 9월 첫 주에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전략 변경이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33] 10월에 기상 조건이 악화되기 전에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34]
일부 역사가들은 영국 해군의 막대한 수적 우위와 독일 해군(Kriegsmarinede)의 약점으로 인해 독일의 제공권 확보 여부와 관계없이 독일의 침공 작전(Unternehmen Seelöwe]]/
독일 공군은 우선 영국의 산업 도시들을 주간에 폭격하기로 결정하고, 런던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1940년 9월 7일에 첫 번째 주요 공습이 발생했고, 9월 15일(영국 본토 항공전의 날)에는 대규모 주간 공습이 있었으나 큰 손실을 입었다. 9월 말과 10월에도 주간 공중전이 있었지만, 독일 공군은 10월 7일부터 야간 공격을 주력으로 삼는 정책을 채택했다.
독일 공군은 Dornier Do 17, Junkers Ju 88, Heinkel He 111s 등의 항공기로 전략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지만,[37] 폭탄 탑재량이 적어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38] 독일 공군이 중폭격기에 집중한 이유는 히틀러가 1939년에 영국과의 전쟁을 예견하지 않았고, OKL은 중폭격기로도 전략적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독일이 4발 엔진 폭격기를 생산할 능력 부족 등이 거론된다.[39]
독일 공군은 불분명한 전략과 부족한 정보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OKL은 1938년 초에야 영국을 잠재적 적대국으로 간주했고, 영국 산업에 대한 정보 수집 시간이 부족했다. OKL은 영국 산업의 특정 부문, 상호 관련된 산업 시스템, 영국 국민의 사기 중 어느 것을 공격할지 결정하지 못했다.[40] 독일 공군의 전략은 1940년~1941년 겨울 동안 목표를 잃어갔고,[41] OKL 참모들 사이에서는 전략보다 전술에 대한 논쟁이 더 격렬했다.[42] 이러한 접근 방식은 영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를 불렀다.[43]
작전 능력 측면에서 무기 기술의 한계와 영국의 빠른 대응은 전략적 효과 달성을 어렵게 했다. 항구, 해운, 수입, 석탄 유통을 공격하는 것은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지만, 지연 기폭탄은 폭발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영국은 전략 변화를 예상하고 생산 시설을 분산시켜 집중 공격에 덜 취약하게 만들었으며, 지역 위원회에 통신 복구 및 물자 분배 권한을 부여하여 전시 경제를 유지했다.
3. 영국의 민방위 계획
3. 1. 전쟁 대비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략폭격을 경험했다.[252] 이를 바탕으로 런던에 폭탄 1톤이 투하될 시 사상자는 50명, 사망자는 그 3분의 1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였다. 적군이 하루에 투하할 수 있는 폭탄의 양은 항공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1922년 75톤에서 1934년 150톤, 1937년 644톤으로 증가했다.[252] 1937년 제국방위위원회는 60일 동안 공습이 지속될 시 사망자 60만 명, 부상자 120만 명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했다. 스페인 내전 시기 바르셀로나 공습을 비롯한 폭격 사례의 보도는 톤당 50명의 사상자를 낳을 것이라는 추정치를 뒷받침했다.[252]
독일군은 고폭탄과 소이탄은 물론 독가스, 심지어 세균폭탄까지 높은 정중률을 보이며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252] 1939년 군사이론가 베이질 리델하트는 전쟁 첫 주에 영국에서 2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253] 런던의 각 병원에서는 전쟁 첫주간 30만 명의 사상자 수용에 대비하고 있었다.
영국의 공습 사이렌은 1939년 말 체임벌린 총리의 대독 선전포고가 벌어진 지 22분 만에 처음으로 울렸다.[254] 가짜 전쟁 시기에는 예상 외로 즉각적인 폭격에 나서지 않았으나,[254] 영국 국민들은 바르셀로나 폭격, 게르니카 폭격, 상하이 폭격 등을 뉴스로 접하면서 공습의 위력을 인지하고 있었다. H. G. 웰스의 소설 《다가올 세상》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훗날 영국 수상이 되는 해럴드 맥밀런도 1956년에 쓴 글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핵전쟁을 생각하듯 1938년의 내 자신과 주변 사람들도 공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회상한 데에서 당대 인식을 엿볼 수 있다.[255]
영국 정계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을 겪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공중으로부터의 공격으로 인한 대규모 심리적 피해와 시민사회의 붕괴를 우려하였다. 1938년 영국 정신과의 위원회는 공중폭격으로 인한 정신적 사상자가 신체적 사상자보다 3배나 많을 것으로 예측하면서, 정신과 환자 규모만 3백만에서 4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였다.[256] 윈스턴 처칠도 1934년 영국 의회에서 "런던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이 가해지면 최소 300만~400만 명이 교외로 쫓겨날 것"이라 발언했다.
1938년 독일의 주데텐란트 영토 요구로 촉발된 뮌헨 위기 당시에는 영국 사회가 혼란에 빠져 15만 명이 웨일스로 이주하는 등, 사회적 혼란에 대한 두려움에 한층 기여하게 되었다.[257] 영국 정부는 여성과 아동을 중심으로 런던에서만 140만 명,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국민 총 400만 명의 소개령 계획에 나섰다. 피난민의 약 90%는 개인주택에 머물 것이라 예상하고,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하여 가용공간을 파악하고 피난민 수송을 위한 세부절차 준비를 마쳤다. 1939년 8월 10일에는 시범 정전을 실시한 데 이어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일에는 일몰 후 정전을 실시하게 되었다.[258]소개령은 육로 뿐만 아니라 해운으로도 이루어졌으며, 영국 정부는 '아동해외수용위원회'를 창설하여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영국의 4개 자치령으로 부모들이 자녀를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50]
대피소 확충을 통한 민방위 준비는 대부분 지역당국의 손에 맡겨졌으며, 버밍엄, 코번트리, 벨파스트, 이스트엔드오브런던 등 대도시 일부 지역에서는 대피소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였다.[52] 당시 이 계획에는 '앤더슨 쉘터'라 하여 가정집 뒷뜰에 간이 철제 방공호를 세워두거나 벽돌로 자그마하게 방공호를 만드는 쪽에 주안점을 두었다. 벽돌 방공호는 1940년에 이르러 안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대부분 버려지게 되었으며, 가짜 전쟁 시기를 거치며 민간폭격이 예상 외로 지연되자 1940년 6월 대피소 확충 계획에 중단 명령이 내려졌다.[260]
3. 2. 공동 대피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정부는 대규모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를 건설하지 않았다. 건설 비용과 시간 소요, 그리고 안전 문제로 인해 피난민들이 일터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거나, 대규모 민간인 집단 내에서 반전 정서가 형성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이후, 영국 정부는 영국 공산당이 민간인의 사기 저하를 목적으로 방공호 건설 여론을 조장한다고 의심했다.[262][263]
런던 지하철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많은 민간인이 폭격을 피해 대피소로 이용하였던 시설이다. 그러나 1939년 영국 정부는 통근자와 군병력의 이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와, 피난민이 퇴거를 거부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지하철역의 대피소 활용을 허가하지 않았다. 공습 시 지하철 관리인력들은 역 출입구를 잠그도록 지시받았으나, 영국 대공습 2주차에 접어들면서 폭격이 집중되자 영국 정부는 지하철역을 개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64]
대공습 기간 동안 매일 오후 4시 지하철역 입장이 시작될 때까지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며 기다렸다. 1940년 9월 중순에는 지하철역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시민이 약 15만 명에 달했으나 겨울과 봄을 지나면서 1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깊숙히 지어진 역은 폭격으로 인한 소음을 차단하여 취침에 용이했지만, 얕게 지어진 역의 경우 폭탄 직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40년 10월에는 스토크뉴잉턴에 직격탄 한 발이 떨어지면서 시민 160명이 사망했고,[265] 1943년 3월에는 베스널그린역에서 한 여성이 역내로 들어서다 넘어지는 바람에 인파가 밀려 173명의 피난민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266]

공동대피소가 수용하지 못한 주민은 그레이터런던 전체 인구의 15%를 넘겼다.[267] 1940년 11월 런던 지역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습 상황 시 지하철이나 다른 대형 방공호를 사용한 시민은 4%에 불과했으며, 지상의 공공대피소를 이용한 시민은 9%, 자택에 마련된 대피소를 이용한 시민은 27%이었다. 나머지 60%는 그냥 자택에서 그대로 머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268][269] 이에 영국 정부는 방공호 확충을 재개하여 앤더슨 쉘터 보급에 나섰으며, 1941년부터는 주택 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모리슨 쉘터를 개발해 보급하였다.[270]
1940년 10월, 영국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런던 지하철 내에 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대피소를 새로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나, 완공 전에 폭격의 강도가 사그라들면서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271] 그러나 이후로도 영국 정부는 1940년 말까지 지하철이나 대형 대피소의 개선 노력을 지속했다. 지역당국은 난로와 욕실을 제공하고 식당열차를 배치해 식량보급에도 힘썼다. 대형 대피소에 설치된 침대는 대기시간 단축을 위해 전용 티켓이 발행되었다. 대피소 내에서도 현장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조직이 신속히 이루어졌으며, 영국 적십자사나 구세군을 비롯한 민간단체도 상황개선의 노력에 힘을 보탰다. 방공호 내부에서 시름을 잊기 위해 공연과 영화 상영, 지역 도서관의 서적 대출도 이루어졌다.[272]
공동대피소를 이용한 런던 시민이 소수에 불과했음에도, 언론인, 유명인, 외국계 인사들이 방공시설을 방문하면서 영국의 사회분열과 계급격차에 관한 범국민적 논란이 부상하였으며, 이는 1942년 사회복지의 단초를 제공한 베버리지 보고서의 작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다수 피난민들은 대피소 내에서 사회분열이 계속되었으며 소음, 공간부족, 기타 문제로 많은 다툼과 싸움이 벌어지는 현실을 목격하였다. 특히 런던의 이스트엔드 지역에서는 반유대주의적 견해가 담긴 낙서가 발견되거나, 유대인들이 방공호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퍼져나가는 등 반유대주의 정서가 보고되었다.[273] 반대로 이스트엔드라는 동네 자체가 전쟁 전에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 사태가 우려되었음에도, 전시 상황에서는 "코크니 (노동계급)와 유대인이 인도인에 맞서 힘을 합쳤다"는 증언도 전해지고 있다.[274]
3. 3. "블리츠 정신"
영국인들은 대공습 기간 동안 공습을 마치 날씨처럼 언급하며, 어떤 날은 "매우 블리치적"이라고 표현했다.[67] 안나 프로이트와 에드워드 글로버에 따르면, 런던 시민들은 덩케르크 철수에서 군인들과 달리 광범위한 정신 충격을 겪지 않았다.[68]전쟁의 스트레스는 많은 불안 발작, 섭식 장애, 피로, 울음, 유산 및 기타 신체적, 정신적 질환을 초래했지만, 사회는 붕괴되지 않았다. 자살 및 음주량은 감소했으며, 런던은 폭격 첫 3개월 동안 주당 약 2건의 "폭탄 신경증" 사례만 기록했다.[69][70] 폭탄이 떨어진 지역을 방문하는 즐거운 인파는 너무 많아서 구조 작업에 지장을 주기도 했다.[72]

노르웨이 전투와 프랑스 전투에서의 패배, 그리고 침략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사기는 높게 유지되었다. 갤럽 여론 조사에 따르면 1940년 5월에 영국인의 3%만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으로 예상했다.[72] 1940년 파업으로 인한 노동 손실 일수는 역사상 가장 낮았다.[72]
3. 4. 민간인 동원
런던 시민들은 도시를 보호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했다. 군대에 입대하기를 원치 않거나 할 수 없었던 많은 시민들은 국토방위군, 공습 경보 서비스(ARP), 보조 소방대 및 기타 많은 시민 단체에 참여했다. 보조 소방대는 1939년 7월까지 138,000명의 인원을 확보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전국에는 정규직 소방관 6,600명과 비정규직 소방관 13,800명만이 있었다.[73] 전쟁 전, 시민들에게는 대피 전에 가스 공격이 시작될 경우를 대비하여 5천만 개의 방독면이 지급되었다.[74]블리츠 기간 동안 걸스카우트는 소방차를 가장 필요한 곳으로 안내했고 "블리츠 스카우트"로 알려지게 되었다. 많은 실업자들이 영국 육군 급여 부대에 징집되었고, 개척 부대와 함께 잔해 수거 및 청소 임무를 맡았다.[75] 시민 방위 여성 자원 봉사단(WVS)은 1938년 내무부 장관 새뮤얼 호어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그는 이를 ARP의 여성 부서로 간주했다.[76] WVS는 어린이 대피를 조직하고, 폭격으로 이재민이 된 사람들을 위한 센터를 설립하고, 매점, 잔해 수거 및 재활용 계획을 운영했다. 1941년 말까지 WVS는 백만명의 회원을 보유했다.
전쟁 전 대규모 공습 신경증에 대한 암울한 예측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예측은 시민들의 적응력과 기지를 과소평가했다. 또한 절망보다는 반격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많은 새로운 시민 방위 역할이 있었다. 공식 역사에서는 국가의 정신 건강이 실제로 향상되었을 수 있으며, 공황은 드물었다고 결론지었다.[77]
4. 기술
4. 1. 독일의 야간 항법 장치
빔 전투야간 항법과 빠르게 움직이는 항공기에서 표적을 찾는 데 있어 천문 항법의 부정확성 때문에, 독일 공군de은 무선 항법 장치를 개발했고 세 가지 시스템에 의존했다. 크니케바인de(Knickebein, 구부러진 다리), X-게레트de(X-Gerät, X-장치), 그리고 Y-게레트de(Y-Gerät, Y-장치)가 그것이다. 이는 영국이 대응책을 개발하게 했고, 이는 빔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84] 폭격기 승무원들은 이미 야간 또는 악천후 착륙을 위한 상업용 맹목 착륙 보조 장치인 로렌츠 빔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독일군은 단거리 로렌츠 시스템을 개조하여 크니케바인de을 만들었는데, 이는 30–33 MHz 시스템으로, 훨씬 강력한 신호를 가진 두 개의 로렌츠 빔을 사용했다. 지상 기지의 두 개의 안테나가 회전하여 빔이 표적 위에서 수렴하도록 했다. 독일 폭격기들은 다른 빔으로부터 신호를 받을 때까지 어느 빔을 따라 비행했다. 두 번째 빔에서 연속적인 소리가 들리면 승무원들은 표적 위에 있고 폭탄을 투하할 때임을 알았다.[85][86]
크니케바인de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지만, X-게레트de는 특별히 훈련된 경로 탐색기 승무원을 위해 예약되었다. X-게레트de 수신기는 He 111에 장착되었으며, 동체에 무선 마스트가 있었다. 이 시스템은 크니케바인보다 높은 주파수인 66–77 MHz에서 작동했다. 지상 송신기는 분당 180개의 펄스를 보냈다. X-게레트de는 펄스를 수신하고 분석하여 조종사에게 시각적 및 청각적 지시를 제공했다. 세 개의 교차 빔이 He 111이 비행하는 빔과 교차했다. 이 교차 빔들을 이용하여 폭탄을 투하하는 시점을 결정하였다.[86][87]
Y-게레트de는 자동 빔 추적 시스템이었으며 세 장치 중 가장 복잡했으며 자동 조종 장치를 통해 작동했다. 조종사는 지상 관제사가 모니터링하는 접근 빔을 따라 비행했다. 기지에서 보낸 신호는 폭격기 장비에 의해 재전송되었고, 이를 통해 폭격기가 빔을 따라 이동한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방향 탐지 검사도 관제사가 조종사가 항로를 유지하도록 했다. 승무원은 지상 관제사의 암호화된 단어를 통해 또는 신호 전송이 종료될 때 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Y-게레트de의 최대 범위는 다른 시스템과 유사했으며 특정 건물을 타격할 정도로 정확했다.[86]
4. 2. 영국의 대응책
1940년 6월, 영국 공군 참모 기술 고문인 R. V. 존스 박사는 독일 공군(Luftwaffe) 포로의 대화를 통해 독일군의 로렌츠 수신기가 맹목 착륙 장치 이상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존스는 독일 빔을 찾기 시작했고, 빔 접근 훈련 개발 부대(BATDU)의 아브로 앤슨기가 30MHz 수신기를 장착하고 영국 상공을 비행하여 더비에서 빔을 추적했다.[88] 최초의 재밍 작전은 징발된 병원 전기 소작술 기계를 사용하여 수행되었다.[88]에드워드 애디슨 윙커맨더의 지휘 하에 영국 전자전 (ECM) 부대인 제80비행대는 이러한 대응 작전을 수행했다. 원본 신호를 재전송하여 가짜 무선 항법 신호를 생성하는 것은 미콘이라 불렀으며, 마스킹 비콘(meacons)을 사용했다.[88] 최대 9개의 특수 송신기가 빔에 신호를 보내 빔의 경로를 미묘하게 넓혀 폭격기 승무원이 표적을 찾기 어렵게 만들었다.[88]
독일 비콘은 중파 대역에서 작동했으며, 신호는 두 글자의 모스 부호 식별자와 긴 시간 간격으로 구성되어 독일 공군(Luftwaffe) 승무원이 신호의 방위를 결정할 수 있었다. 미콘 시스템은 지향성 안테나가 있는 수신기와 송신기를 별도의 위치에 두었다. 수신기가 독일 신호를 수신하면 송신기로 전달되어 신호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작전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독일 폭격기가 미콘보다 자체 빔에 더 가까이 비행하면, 방향 탐지기에서 전자의 신호가 더 강하게 나타났을 것이다.[89]
효과적인 야간 전투기 부대가 준비되기까지 몇 달이 걸릴 것이었고, 대공 방어는 블리츠가 끝난 후에야 적절해졌기 때문에, 독일 폭격기를 표적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한 책략이 만들어졌다. 1940년 내내 숙련된 관찰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정교한 가짜 비행장을 준비했다.
산업 지역의 경우, 화재와 조명이 모방되었다. 일반적인 주거 거리 조명을 재현하고,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중공업 표적을 재현하기 위한 조명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한 장소에서는 탄소 아크 램프를 사용하여 전차 전선에서 섬광을 모의했다. 빨간색 램프는 고로와 기관차의 화실을 모방하는 데 사용되었다. 공장 채광창에서 반사되는 빛은 경사진 나무 패널 아래에 조명을 설치하여 만들어졌다.
화재와 같은 유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가짜 화재는 인접한 표적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고 그 효과가 통제될 때만 시작될 수 있었다. 너무 일찍 시작하면 성공 확률이 줄어들고, 너무 늦으면 표적에서의 실제 화재가 유인 화재를 초과하게 된다. 또 다른 혁신은 보일러 화재였다. 이러한 장치는 오일과 물을 담은 두 개의 인접한 탱크에서 공급되었다. 그런 다음 오일로 공급되는 화재에 때때로 물을 주입했다. 이렇게 생성된 섬광은 독일의 C-250 및 C-500 Flammbombende(화염 폭탄)과 유사했다. 독일 폭격기를 속일 수 있다면 실제 표적에서 더 많은 폭격기를 유인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5. 공습의 전개
공습은 런던에 대한 57일 연속 야간 공습으로 시작되었고, 영국 전역의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진행되었다.[201]。1941년 5월 말까지 4만 3천 명 이상의 민간인 (절반이 런던 시민)이 폭격으로 사망하고, 100만 채 이상의 가옥이 피해를 입었다.[202][203] 런던 시민들은 공습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고, 지하철역 구내가 사람들의 대피소가 되었다.
독일 공군의 대규모 공습을 받은 도시는 런던뿐만이 아니었고, 그 외에도 버밍엄, 브리스톨, 맨체스터, 벨파스트, 셰필드, 리버풀, 포츠머스, 플리머스, 사우샘프턴, 카디프, 코번트리, 엑서터, 스완지, 노팅엄, 브라이턴, 이스트본, 클라이드 만 연안의 도시 등, 다수의 도시가 잿더미가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목표는 영국 국민의 불만을 높여 정부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항복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1년 5월까지 영국 공군의 방어로, 잠재적인 영국 침공의 위협을 제거하고 독일은 영국을 포기하고, 독일의 다음 목표는 동부 전선으로 옮겨갔다.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독일 공군은 대규모 공습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소규모 습격을 지속했고, 5만 1509명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 1944년에 개발된 V1 비행 폭탄과 V2 로켓의 등장은, 다시 유럽 대륙에서 런던을 습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들 보복 무기의 공격으로 8,938명의 민간인이 사상했다[204]。
5. 1. 1단계: Loge와 Seeschlange
1940년 9월 7일 오후 늦게, 독일군은 런던에 대한 공세인 런던 작전(Unternehmen Logede)과 다른 산업 도시들에 대한 공습인 바다 뱀 작전(Unternehmen Seeschlangede)을 시작했다.[90] Logede는 57일 밤 동안 계속되었다.[90] 총 348대의 폭격기와 617대의 전투기가 공격에 참여했다.[91][92] 런던에 대한 최초의 의도적인 공습은 주로 런던 항구를 목표로 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약 107,400톤의 선박이 템스강 하구에서 피해를 입었고, 1,600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 중 약 400명이 사망했다.[93][94]
초기 전략 변화는 영국 공군을 당황하게 했고, 광범위한 피해와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공중전은 낮에 더 치열했다. Logede로 인해 Luftwaffede는 41대의 항공기를 잃었다.[95] 전투 사령부는 23대의 전투기를 잃었고, 조종사 6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96] 9월 8일, Luftwaffede가 다시 공격하여 412명이 사망하고 747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9월 9일, OKL은 런던에 대한 24시간 폭격과 영국의 해상 통신 공격이라는 두 가지 전략을 지원했다. 날씨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 런던 교외와 파른보로 비행장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 발생했다. 케셀링과 cat=no (제2 항공대)는 24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전투 사령부는 17대의 전투기와 6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이후 며칠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 9월 15일까지 다음 주요 공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9월 15일, Luftwaffede는 런던의 부두와 철도 통신을 목표로 템스 강 하구를 따라 런던에 대한 2차례의 대규모 주간 공습을 감행, 제공권 확보를 노렸다.[2]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지만, 첫 번째 공격은 철도망을 3일 동안 손상시켰을 뿐이었고,[98] 두 번째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다.[99] 이 공중전은 영국 본토 항공전 기념일로 기념되었다. Luftwaffede는 폭격기 18%를 잃고 제공권 확보에 실패했다.[100]
괴링은 낙관했지만, 히틀러는 9월 17일 바다 사자 작전을 연기했다. 악화되는 날씨와 지속 불가능한 소모는 OKL에게 10월 7일에 야간 공격으로 전환할 구실을 제공했다.[101][102]
10월 14일, 가장 심한 야간 공격에서 Luftflottede 3에서 온 380대의 독일 폭격기가 런던을 공격, 약 200명이 사망하고 2,000명이 부상당했다. 영국 대공 방어는 폭격기 2대만 격추했다. 10월 15일, 376톤의 고성능 폭약과 10톤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약 900건의 화재가 발생, 5개의 주요 철도 노선이 런던에서 끊어졌다.[103]
Logede는 10월에도 계속, 8,200톤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야간에는 런던에 5,400톤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버밍엄과 코번트리는 10월 마지막 10일 동안 450톤, 리버풀은 180톤의 폭탄 공격을 받았다. 헐과 글래스고도 공격을 받았고, 메트로폴리탄-비커스의 맨체스터 공장은 12톤의 폭탄 공격을 받았다. 전투 사령부 비행장에는 소량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대신 폭격 사령부 비행장이 공격을 받았다.[104]

Luftwaffede의 정책은 런던에 대한 점진적인 공격 지속, 웨스트 미들랜즈의 산업 무기 공장 생산 방해, 전투 폭격기를 이용한 공장 파괴였다.[105]
Luftflottede 2의 케셀링은 런던에 매일 밤 50회, 동부 항구에 주간 공격을, Luftflottede 3의 슈페를레는 웨스트 미들랜즈에 매일 밤 250회 출격을 명령받았다. Seeschlangede는 플리거코어 X가 수행, 해상 수송에 대한 기뢰 작전에 집중, 영국 폭격에도 참여했다. 1941년 4월 19/20일까지 총 3,984개의 기뢰를 투하했다. 기뢰가 거리 전체를 파괴하는 능력은 영국에서 존경을 받았지만, 여러 기뢰가 폭발하지 않은 채 떨어져 대책을 개발할 수 있게 했다.
1940년 11월 중순, 11,600톤 이상의 고성능 폭탄과 거의 100만 개의 소이탄이 런던에 떨어졌다. 버밍엄, 코번트리, 리버풀에 대한 기만 공격이 있었지만, 주요 공습은 없었다. 런던 부두와 철도 통신은 심한 타격을 받았고, 9월에는 영국 철도에 667건의 충돌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통은 계속되었고, 런던 사람들은 출근했다. 9월과 10월에만 13,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거의 20,000명이 부상당했지만,[106] 사망자 수는 예상보다 적었다. 1940년 말, 처칠은 대피소를 높이 평가했다.[107]
전쟁 당시 관찰자들은 폭격이 무차별적이라고 인식했다. 랄프 잉거솔은 폭격이 정확하지 않아 군사적 가치가 있는 목표물을 타격하지 못하고 주변 지역을 파괴했다고 보고했다.[108] 배터시 발전소는 경미한 타격만 받았다.[108] 1940년 9월 8일 배터시와 웨스트햄 발전소는 9월 7일 런던 주간 공격 이후 모두 폐쇄되었다.[109] 배터시 발전소는 11월에 타격을 받아 파괴되었지만, 야간 공격 중에는 가동이 중단되지 않았다.[110] Luftwaffede가 야간 작전 중에 특정 목표물을 정확하게 폭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전소 또는 특정 구조물을 목표로 삼았는지 여부는 불명확하다.[111] 초기 작전에서는 철도 목표물과 템스강 다리가 선택되었다. 빅토리아 역은 폭탄 4발을 맞았고 광범위한 피해를 입었다. 폭격은 런던을 통과하는 철도 교통을 방해했지만 어떤 교차로도 파괴하지 못했다.[112] 11월 7일, 세인트 판크라스, 켄살 및 브릭레이어스 암스 역이 타격을 받았고 11월 10일에는 사우던 철도 노선이 여러 개 끊어졌다. 영국 정부는 그 달 동안의 지연과 공급 중단에 대해 불안해졌다. 공격으로 인해 석탄이 그레이터 런던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차단되었고 긴급 수리가 필요했다.[113] 이스트 엔드 부두에 대한 공격은 효과적이었고 많은 템스 강 바지선이 파괴되었다. 런던 지하철 시스템도 영향을 받았다. 고성능 폭탄으로 터널이 손상되어 일부가 위험해졌다.[114] 런던 독랜드, 로열 빅토리아 독은 많은 타격을 받았고 런던 항구의 무역이 중단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1,000 °C의 화재 폭풍이 발생했다.[115] 내무부는 피해가 "심각"했지만 "마비될 정도"는 아니었으며 부두, 분지, 철도 및 장비는 계속 작동했다고 보고했다.[116]


영국의 야간 방공은 형편없는 상태였다.[117] 몇 안 되는 대공포에는 사격 통제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고, 성능이 부족한 탐조등은 이상의 고도에서 항공기에 대해 효과가 없었다.[118][119] 1940년 7월, 영국 전체에 배치된 중(重)포는 1,200문, 경(輕)포는 549문밖에 되지 않았다. "중포" 중 약 200문은 구식, 나머지는 효과적인 및 포였지만, 실제 한계는 였다. 경포는 절반이 Bofors 40 mm였으며, 까지만 항공기를 공격할 수 있었다.[120] 대공포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낙하하는 포탄 파편이 지상에서 더 많은 영국 사상자를 발생시켰다.[121]
야간에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투기는 거의 없었다. 지상 기반 레이더는 제한적이었고, 공중 레이더와 RAF 야간 전투기는 일반적으로 효과가 없었다.[122] RAF 주간 전투기는 야간 작전으로 전환되었고, 브리스톨 블레넘 야간 전투기는 브리스톨 보파이터로 대체되고 있었지만, 매우 적은 수로만 사용 가능했다. 블리츠의 두 번째 달까지 방어는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123] 런던의 방어는 대공 사령부 사령관인 파일 장군에 의해 재편성되었지만, 방공 효율성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영국은 1941년 5월에도 중 대공포 AAA의 설치 기준보다 3분의 1이나 부족, 2,631문의 무기만 사용 가능했다. 다우딩은 야간 전투기에 의존해야 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가장 성공적인 야간 전투기는 볼턴 폴 데피언트였다.[124] AA 방어는 레이더와 탐조등의 더 나은 사용으로 개선되었다. 1940년 9월에 레이더 한 대당 소비된 20,000발의 포탄은 1941년 1월에 4,087발로, 1941년 2월에는 2,963발로 줄어들었다.[125]
항공기 요격 레이더 (AI)는 신뢰할 수 없었다. 공중 탐조등을 켜고 비행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RAF 전투 통제실에서 GCI 시스템(지상 통제 요격)을 시작하기 위해 그룹 수준 통제(제10 그룹 RAF, 제11 그룹 RAF, 제12 그룹 RAF) 하에 전투기 유도를 받는 GL(사격) 레이더와 탐조등이었다.[126] 화이트홀은 RAF의 실패에 대해 불안해했고, 다우딩을 11월 25일 솔토 더글러스로 교체했다. 더글러스는 더 많은 비행대를 도입하고 몇 안 되는 GL 세트를 분산시켜 남부 지방에 카펫 효과를 만들려고 했다. 1941년 2월에는 87명의 조종사가 있는 7개 비행대만 있었는데, 필요한 전력의 절반에 불과했다. GL 카펫은 레이더 장비를 갖춘 야간 전투기를 통제하는 6개의 GCI 세트로 지원되었다. 블리츠가 절정에 달하면서 그들은 점점 더 성공, 1941년에는 접촉 및 전투 횟수가 증가, 1941년 1월 48회 출격에서 44회 접촉 및 2회 전투에서 5월에는 643회 출격에서 204회 접촉 및 74회 전투로 증가했다. 그러나 5월에도 출격의 67%는 육안으로 확인하는 작전이었다. 1941년 5월 접촉의 43%가 육안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전투의 61%를 차지했다. Luftwaffede 주간 작전과 비교했을 때 독일군의 손실은 1%로 급격히 감소했다. 경계심이 강한 폭격기 승무원이 먼저 전투기를 발견할 수 있다면, 전투기를 피할 수 있는 상당한 기회를 얻었다.
이 시점부터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야간 전투에서 결정적인 무기가 된 것은 레이더였다. 다우딩은 항공기 요격 레이더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 사용을 장려했다. 1940년 7월 22/23일 밤, 비행 장교 시릴 애쉬필드, 조종 장교 제프리 모리스, 항공 중사 레지널드 레이랜드는 자체 레이더를 사용하여 시각적 요격을 유도하여 적 항공기를 요격하고 격추한 최초의 조종사와 승무원이 되었으며, 그들의 AI 야간 전투기는 서섹스에서 Do 17을 격추했다.[127] 1940년 11월 19일 RAF 야간 전투 에이스 존 커닝햄은 항공기 요격 레이더를 사용하여 Ju 88 폭격기를 격추했다.[128] 11월 중순까지 9개 비행대가 사용 가능했지만, RAF 켄리의 제219 비행대 RAF와 같이 보파이터를 장비한 것은 1개 비행대뿐이었다. 1941년 2월 16일까지 이 수는 12개로 증가, 5개 그룹에 걸쳐 보파이터를 장비하거나 부분적으로 장비한 5개 비행대가 있었다.[129]
5. 2. 이탈리아 공군 군단
이탈리아 공군 군단(이탈리아어: Corpo Aereo Italiano, CAI)은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과 독일 공습에 참가한 이탈리아 왕립 공군(Regia Aeronautica)의 원정군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이 부대를 창설했다. 1940년 9월 10일, 공군 소장 리노 코르소-푸지에의 지휘 하에 CAI가 창설되었다.이 군단은 50대의 피아트 CR.42 복엽 전투기, 45대의 피아트 G.50 프레차 단엽 전투기, 그리고 한 편대의 피아트 BR.20 쌍발 폭격기로 구성되었다.
10월 24일/25일, 18대의 BR.20이 하리치와 펠릭스토우를 야간 폭격했다. 10월 29일에는 중(重) 전투기 호위를 받은 15대의 폭격기가 낮에 램스게이트를 공격했다. 하리치와 입스위치에 대한 8차례의 야간 폭격과 40대의 전투기 호위를 받은 하리치에 대한 주간 폭격이 한 차례 있었다. 마지막 공습은 1941년 1월 2일 밤, 5대의 폭격기가 입스위치를 폭격한 것이었다.
총 102회 출격에서 54.3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5. 3. 2단계: 야간 공격
히틀러는 공군의 제공권 확보 노력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진전이 없자 좌절감을 느꼈다. 영국 공군이 약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독일군의 손실이 커지자, 독일 공군최고사령부는 전략을 수정했다. 병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야간 공습을 선호하게 되었고, 이는 폭격기들이 어둠 속에서 더 안전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243]1940년 9월 7일 런던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공습이 이루어졌다. 9월 15일에는 '영국 전투의 날'이라 불리는 대규모 주간 공습이 있었지만, 큰 피해를 입고 지속적인 이득을 얻지 못했다. 9월 말부터 10월까지 주간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지만, 독일 공군은 야간 공습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10월 7일에는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곧 런던과 다른 영국 산업 도시들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다.[244]
그러나 독일 공군은 한계에 직면했다. 도르니에 Do 17, 융커스 Ju 88, 하인켈 He 111과 같은 항공기는 전략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지만, 폭탄 탑재량이 적어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245] 독일 공군이 중형 폭격기를 집중 운용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히틀러가 1939년에 영국과의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 공군사령부가 중형 폭격기로도 전략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 전 독일이 4발 엔진 폭격기를 생산할 자원이나 기술이 부족했다는 점 등이 거론된다.[246]
독일 공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힐 장비는 있었지만, 전략과 정보력이 부족했다. 공군최고사령부는 1938년 초에야 영국이 잠재적 적국이 될 것이라는 정보를 받았고, 영국의 군수 산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시간이 없었다. 또한, 사령부는 적절한 전략을 결정하지 못했고, 영국 내 특정 산업 시설, 상호 유통성 산업 시설, 또는 영국 국민의 사기를 꺾기 위한 공격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했다.[247] 1940년 말에서 1941년 초, 전략 부재는 더욱 심해졌고, 사령부 내에서는 전략보다 전술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었다.[248][249] 이러한 접근 방식은 영국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기도 전에 실패로 끝났다.[250]
작전 수행 능력 면에서도 전투기의 기술적 한계와 영국의 신속한 대응으로 전략적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항구, 선박, 수입품, 철도 시설을 공격하면 전시 산업 경제의 주요 연료인 석탄 유통을 방해할 수 있었지만, 독일군이 사용한 지연 작용 폭탄은 일부가 폭발하지 않아 효과가 감소했다. 영국은 전략 변화를 예상하고 생산 시설을 분산시켜 집중 공격에 덜 취약하게 만들었다. 각 지역 위원회는 통신 및 물류 시설을 복구하고 전시 경제 유지를 위한 배급제를 운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0년 11월부터 1941년 2월까지 독일 공군은 전략을 변경하여 런던 외 다른 산업 도시들을 공격했다.[130] 특히 웨스트 미들랜즈가 표적이 되었다. 11월 13일/14일 밤, 77대의 He 111기가 런던을, 63대의 He 111기가 버밍엄을 폭격했다. 다음날 밤, 코번트리에 대규모 공격이 가해졌다. 12대의 cat=no(KGr 100) 소속 "길잡이"들이 437대의 폭격기를 이끌고 350톤의 고성능 폭탄, 50톤의 소이탄, 127개의 낙하산 기뢰를 투하했다.[131] 다른 자료에 따르면 449대의 폭격기가 총 47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132] 코번트리 공격은 특히 파괴적이었고, "코번트레이트하다"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게 했다. 10,000개 이상의 소이탄이 투하되었다.[133] 코번트리에서는 약 21개의 공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공공 시설의 손실로 인해 다른 9곳에서 작업이 중단되어 수개월 동안 산업 생산이 중단되었다. 역사적인 대성당은 도시 중심가 대부분과 함께 거대한 화재 폭풍으로 거의 파괴되었다. 영국 공군이 125번의 야간 출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포 화재로 단 한 대의 폭격기만 손실되었다. 독일군은 공격의 성공에 놀랐으며,[134] 공격의 전략적 효과는 항공기 생산량의 20%의 단기적인 감소였다.
11월 말까지 야간 공격에 1,100대의 폭격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매일 밤 평균 200대가 공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공격은 두 달 동안 지속되었고, Luftwaffede는 12,4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1940년 11월에는 6,000번의 출격과 23번의 주요 공격(100톤 이상의 폭탄 투하)이 있었다. 두 차례의 대규모 공격(50톤의 폭탄)도 있었다. 12월에는 11번의 주요 공격과 5번의 대규모 공격만 있었다.[135]
12월 29일 저녁, 독일 항공기는 런던 시에 소이탄과 고성능 폭탄을 투하하여 런던 대화재라 불리는 화재 폭풍을 일으켰다.[6] 이러한 소이탄을 사용한 첫 번째 그룹은 Kampfgruppede 100 소속의 10대의 He 111 "길잡이"였다. 18시 17분, 이들은 처음 10,000개의 소이탄을 투하했고, 결국 분당 300개가 투하되었다.[136] 총 130대의 독일 폭격기가 런던의 역사적 중심지를 파괴했다.[137] 블리츠 기간 동안 런던의 민간인 사상자는 사망 28,556명, 부상 25,578명이었다. Luftwaffede는 16,331톤의 폭탄을 투하했다.[138]

독일 공군은 항구 도시들도 공격하여 무역과 해상 교통을 방해하려 했다. 1941년 1월, 스완지는 4번 폭격받았고, 1월 17일에는 매우 심하게 폭격받아 약 100대의 폭격기가 32,000개의 소이탄을 투하했다. 주요 피해는 상업 및 주거 지역에 발생했다. 2월 19일부터 21일까지의 '3일 밤' 블리츠에서 2월에 지속적인 폭격이 있었다. 총 230명이 사망하고 397명이 부상을 입었다.[139] 150대의 폭격기들이 사우스시 (포츠머스)와 고스포트를 40,000개의 소이탄으로 파괴했다. 창고, 철도 선로, 가옥이 파괴되고 손상되었지만 부두는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140] 1941년 1월과 2월에 Luftwaffede의 가동률이 감소하여 1,214대의 폭격기 중 551대만 전투에 적합했다. 7번의 주요 공격과 8번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지만, 날씨 때문에 압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사우스햄튼에서는 공격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민간 당국이 사람들을 도시 밖으로 "대거" 이끌면서 사기가 잠시 무너졌다.
독일 공군의 공식 교리는 민간인의 사기를 목표로 삼았지만, 민간인을 직접 공격하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독일 공군은 적의 공장, 공공 시설, 식량 재고 파괴를 통해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1940년 11월과 12월, 대규모 공습이 실시되면서 민간인 공격에 대한 반대는 무의미해졌다. 전술적 편의를 위해 지뢰와 소이탄을 사용하는 것은 무차별 폭격에 가까웠다. 산업 매연으로 하늘이 가려진 상태에서, 목표 지역을 조명하고 "민간인에 대한 고려 없이" 타격해야 했다.[141] KGr 100과 같은 특수 부대는 Beleuchtergruppede(조명 그룹)이 되어 소이탄과 고성능 폭탄을 사용하여 목표 지역을 표시했다. 이 전술은 Feuerleitungde(화재 통제)으로 확장되었다. 이들은 낙하산 조명탄으로 표시되었다. SC 1000(1000kg), SC 1400(1400kg), SC 1800(1800kg) "사탄" 폭탄을 탑재한 폭격기가 거리와 주거 지역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었다. 12월까지는 SC 2500(2500kg) "맥스" 폭탄이 사용되었다.
Luftflottede 또는 Fliegerkorpsde 수준에서 내려진 결정은 개별 목표물에 대한 공격이 무제한 지역 공격 또는 Terrorangriffde(테러 공격)으로 대체되었음을 의미했다.[142] 이러한 현상은 항법의 부정확성 때문이었다. 영국군의 Knickebeinde에 대한 대응 효과로 Luftwaffede는 목표물 표시 및 항법을 위해 화재 조명을 선호하게 되었다. 정밀 폭격에서 지역 공격으로의 전환은 전술과 투하된 무기에서 나타난다. KGr 100은 소이탄 사용을 13%에서 28%로 늘렸다. 12월에는 92%까지 증가했다. 부정확한 소이탄의 사용은 산업 시설 근처의 민간인 재산을 피하려는 노력이 줄었음을 나타낸다. 다른 부대는 낙하산 조명탄 사용을 중단하고 폭발성 목표물 표시 장치를 선택했다. 포획된 독일 공군 승무원들은 산업 노동자들의 집을 의도적으로 목표로 삼았다고 진술했다.
5. 4. 마지막 공격
1941년, 독일 공군(Luftwaffede)은 전략을 변경하여 영국 항구 공격에 집중했다.[143] 독일 해군(Kriegsmarinede) 사령관 에리히 레더는 대서양 해전에서 독일 잠수함 부대(U-Bootwaffede)를 지원하기 위해 영국 항구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히틀러를 설득하여 영국 항만 시설 공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44][145] 히틀러는 영국 전시 경제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잠수함과 포케불프 Fw 200 해군 항공기의 공격으로 인한 상선 파괴라고 지적하며, 독일 공군에 영국 호송대 공격에 집중할 것을 명령했다.[145]히틀러의 관심으로 괴링과 예쇼넥은 1941년 1월 영국에 대한 공중전을 재검토, 1941년 2월 6일 '영국 전시 경제에 대한 작전 지침'(히틀러의 지령 23)에 동의했다. 이 지침은 해상으로의 영국 수입을 공중 차단하는 데 최우선 순위를 부여했다.[146] 독수리 공격 작전과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인해 이 전략은 전쟁 전에 인식되었지만, 영국 해상 통신 공격은 지연되었고,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RAF) 및 지원 시설에 대한 작전에 투입되었다.[147] 공군 최고 사령부(OKL)는 해상 통신 차단을 육상 항공기 산업 폭격보다 덜 중요하게 여겼다.[148]
지령 23은 괴링이 영국에 대한 독일 공군의 전략 폭격 전략에 대해 독일 해군에 양보한 유일한 사례였다.[149] 그는 해군이 더 많은 독일 공군 부대를 통제할까 봐 영국 조선소, 항구, 항만 시설, 부두, 해상 선박 파괴를 위한 공군 부대 할당을 거부했다.[149] 카를 되니츠는 히틀러의 개입으로 KG 40을 통제하게 되었지만, 괴링은 곧 이를 되찾았다.[150] 괴링은 Fliegerführer Atlantik(대서양 비행 사령부)의 항공기를 호송대 공격 대신 영국 본토 폭격에 낭비했다.[150] 그는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로 손상된 위신을 회복하고자 레더와의 협력을 꺼렸다.[151]
OKL이 지령 23을 지원하게 된 것은 전쟁 생산에 대한 폭격의 영향 추정의 어려움과 영국의 사기가 무너질 것 같지 않다는 결론 때문이었다. OKL은 핵심 전략적 관심사가 항구 공격임에도 불구, 항공기, 대공포, 폭발물 생산 산업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41년 영국 상륙 공격이 계획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공중전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기상 조건 악화로 공중 작전 확대는 어려웠다.
1941년 3월, 독일 공군은 4,000회 출격, 12번의 주요 공격, 3번의 강력한 공격을 감행했다. 전자전이 강화되었지만, 독일 공군은 달빛이 밝은 밤에만 주요 내륙 임무를 수행했다. 항구를 찾는 것이 더 쉬워졌고, 폭탄 투하 전 무선 침묵, 가짜 표적 위에 X- 및 Y-Gerätde(와이-게레트) 빔 배치, 마지막 순간 전환 등의 방법으로 영국군을 혼란시켰다. 영국군의 선택적 재밍으로 Y-Gerätde 효과가 떨어지자, X-Gerätde(엑스-게레트)는 더 넓은 주파수 대역과 빠른 주파수 변경으로 전술적 유연성을 높였다.
침공 위협이 사라지면서 공중 폭격은 산업 표적 파괴와 민간인 사기 저하를 목표로 했다. 3월에는 서부 항구 공격이 집중되었고, 이는 사기를 꺾었지만,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의 발칸 반도 전역 준비로 7개의 Kampfgruppen(캄프그루펜, 전투단)이 오스트리아로 이동하면서 공격이 완화되었다. 폭격기 부족으로 OKL은 융커스 Ju 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와 자보(전투 폭격기) 등 임시방편을 사용했다.[152] 방어가 광범위한 피해를 막지는 못했지만, 독일 폭탄의 3분의 1만이 목표에 명중했다.[152]

발칸 반도로 전환된 폭격기를 제외한 승무원과 부대는 밤에 두세 번 출격해야 했다. 폭격기는 시끄럽고 춥고 심하게 진동했으며, 임무의 긴장감은 승무원을 지치게 하고 소진시켰다.[153] 1941년 4월 28/29일, KG 30(제30전투폭격단)의 페터 슈탈은 50번째 임무 중 Ju 88 조종석에서 잠이 들었고, 깨어나보니 승무원 전체가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들을 깨우고, 산소와 덱스트로-에너겐 암페타민 정제를 복용하게 한 다음 임무를 완수했다.[153]
독일 공군은 서유럽 점령 후 영국 해상 교통에 대한 공중 및 잠수함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154] 서부 접근로를 통해 북아메리카에서 공급품과 자재를 운송하는 호송대의 중요한 목적지인 리버풀과 그 항구는 공습으로 톤의 선박이 침몰하고 톤의 선박이 손상되었다.[154] 허버트 모리슨 내무부 장관은 시민들의 패배주의와 사기 저하를 우려했다. 항구의 144개 부두 중 절반이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화물 하역 능력이 75% 감소했다. 도로와 철도가 막히고, 선박은 항구를 떠날 수 없었다. 1941년 5월 8일, 57척의 선박이 파괴되거나 침몰 또는 손상되어 총 톤에 달했다. 약 66,00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77,000명이 집을 잃었으며, 하룻밤에 1,900명이 사망하고 1,450명이 중상을 입었다.[155][156] 헐 항구 주민들은 공격 전, 도중, 후에 도시에서 대규모 탈출을 하는 "트레커"(떠돌이)가 되었다. 독일 공군의 공격은 런던 항구와 같이 많은 공격을 받은 표적에서도 철도나 항구 시설을 오랫동안 파괴하지 못했다. 런던 항구는 해외 무역의 3분의 1을 가져오는 중요한 표적이었다.[157]
3월 13일, 글래스고 인근 클라이드뱅크의 상부 클라이드 항구가 폭격을 받았다 (클라이드뱅크 블리츠). 12,000채의 가옥 중 7채를 제외한 모든 가옥이 피해를 입었다.[158] 플리머스는 그 달 말까지 5번 공격을 받았고, 벨파스트, 헐, 카디프가 공격을 받았다. 카디프는 3일 밤 동안 폭격을 받았고, 포츠머스 중심부는 5번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158] 1940년 9월에는 매주 평균 40,000명의 시민이 주택을 잃었고, 1941년 3월, 플리머스와 런던에 대한 두 번의 공습으로 148,000명이 집을 잃었다.[158] 영국 항구는 전쟁 산업을 계속 지원했고 북아메리카에서 온 물품이 계속 통과했으며, 영국 해군은 플리머스, 사우샘프턴, 포츠머스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했다.[159] 플리머스는 남부 해안의 취약한 위치와 독일 공군 기지와의 근접성 때문에 가장 심한 공격을 받았다. 3월 10/11일, 240대의 폭격기가 193톤 ()의 고성능 폭탄과 46,000개의 소이탄을 투하했고, 많은 주택과 상업 중심지가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전력 공급이 끊어졌고, 5개의 유조 탱크와 2개의 탄약고가 폭발했다.[160] 9일 후, 125대와 170대의 두 차례의 폭격기가 160톤 ()의 고성능 폭탄과 32,000개의 소이탄을 포함한 대형 폭탄을 투하, 도시 중심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160] 4월 17일에는 KG 26이 이끄는 250대의 폭격기에서 346톤 ()의 폭발물과 46,000개의 소이탄이 투하되었고, 2,000발이 넘는 대공포탄이 발사되어 두 대의 Ju 88을 파괴했다.[160] 영국에 대한 공중 작전이 끝날 무렵, 영국 항구에 대한 독일군의 노력의 8%만이 기뢰를 사용하여 이루어졌다.[161]

북쪽에서는 뉴캐슬어폰타인과 선덜랜드를 상대로 상당한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영국 동해안의 대형 항구였다.[162] 1941년 4월 9일, Luftflottede 2는 120대의 폭격기에서 150톤 ()의 고성능 폭탄과 50,000개의 소이탄을 5시간에 걸쳐 투하, 하수도, 철도, 부두, 전기 시설이 손상되었다.[162] 4월 25일 선덜랜드에서 Luftflottede 2는 60대의 폭격기를 보내 80톤 ()의 고성능 폭탄과 9,000개의 소이탄을 투하,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클라이드에 대한 또 다른 공격, 이번에는 그리녹에서 5월 6일과 7일에 발생했지만, 독일군은 해상 이동을 막거나 해당 지역의 산업을 마비시키지 못했다.[162]
1941년 5월 10/11일 런던에 대한 마지막 주요 공격에서, 독일 공군은 571회 출격하여 톤의 폭탄을 투하, 2,000건 이상의 화재가 발생했고, 1,436명이 사망하고 1,792명이 중상을 입어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1년 5월 11/12일에 또 다른 공습이 이루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법원은 손상되었고, 하원의 회의실은 파괴되었다. 런던 거리의 3분의 1은 통행이 불가능했고, 하나의 철도 노선을 제외한 모든 노선이 몇 주 동안 막혔다. 이 공습은 63대의 독일 전투기가 폭격기와 함께 투입되어 RAF 야간 전투기 방어의 효과가 증가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6. 영국 공군의 야간 전투기
영국 야간 전투기의 작전은 채널에서 성공적인 것으로 나타났다.[163] 하지만, 이것이 즉시 명확했던 것은 아니다.[164] 브리스톨 블렌하임 F.1은 7.7mm 구경 기관총 4정을 장착했지만, Do 17, Ju 88 또는 하인켈 He 111을 쉽게 격추할 수 있는 화력을 갖추지 못했다.[165] 블렌하임은 독일 폭격기를 꼬리 추격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 우위가 약간 있었다. 그러나 요격이 시각적인 식별에 의존했기 때문에 달빛이 비치는 하늘에서도 격추는 매우 어려웠다. 볼턴 폴 데피언트는 주간 교전에서 형편없는 성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나은 야간 전투기였다. 더 빨랐고, 폭격기를 따라잡을 수 있었으며, 포탑에 있는 4정의 기관총 구성은 아래에서 독일 폭격기를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아래에서 공격하는 것은 꼬리에서 공격하는 것보다 더 큰 표적을 제공했으며, 승무원에게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아 폭탄 탑재량을 폭발시킬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 후 몇 달 동안, 꾸준한 수의 독일 폭격기가 야간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었다.[166]
브리스톨 보파이터는 개발이 더뎠지만, 최대 속도가 515km/h였고, 작전 고도는 7,925m였으며, 분당 상승률은 762m였다. 또한 4문의 20mm Hispano 기관포와 6정의 7.7mm 브라우닝 기관총으로 구성된 강력한 화력을 갖추었다.[167] 1940년 11월 19일, 제604비행대대 RAF의 존 커닝햄은 AI가 장착된 보파이터를 조종하며 폭격기를 격추시켰고, 이는 공중 레이더의 첫 번째 공중 승리였다. 1940년 11월과 12월에 독일 공군(Luftwaffe)은 영국 목표물을 향해 9,000번의 출격을 했고, RAF 야간 전투기는 단 6대만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1941년 1월, 전투 사령부는 독일군이 1,965번 출격하는 동안 486번 출격했다. RAF와 대공 방어군은 각각 단 3대와 12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168] 1941년 2월의 악천후 속에서, 전투 사령부는 독일 공군이 1,644번 출격하는 동안 568번 출격했다. 야간 전투기는 4대의 손실을 내고 폭격기 4대만 격추할 수 있었다.[169]
1941년 4월과 5월까지 독일 공군은 여전히 목표물에 도달하여 임무당 1~2% 이하의 손실을 냈다.[170] 1941년 4월 19일/20일, 히틀러의 52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712대의 폭격기가 플리머스를 공격하여 기록적인 1,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손실은 최소화되었다. 그 다음 달에 22대의 독일 폭격기가 손실되었으며, 야간 전투기에 의해 13대가 격추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5월 3일/4일, 9대가 하룻밤에 격추되었다. 5월 10일/11일, 런던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10대의 독일 폭격기가 격추되었다. 1941년 5월, RAF 야간 전투기는 38대의 독일 폭격기를 격추했다.[171] 5월 말까지, 케셀링의 Luftflottede 2는 철수했고, 휴고 슈페를레의 Luftflottede 3는 전략 폭격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상징적인 부대로 남았다. 히틀러는 이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공격하는 데 시선을 고정했고, 블리츠는 종말을 맞이했다.[172]
7. 결과
공습은 런던에 대한 57일 연속 야간 공습으로 시작되었고, 영국 전역의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진행되었다.[201] 1941년 5월 말까지 4만 3천 명 이상의 민간인 (절반이 런던 시민)이 폭격으로 사망하고, 100만 채 이상의 가옥이 피해를 입었다.[202][203] 런던 시민들은 공습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고, 런던 지하철역 구내가 사람들의 대피소가 되었다.
독일 공군의 대규모 공습을 받은 도시는 런던뿐만이 아니었고, 버밍엄, 브리스톨, 맨체스터, 벨파스트, 셰필드, 리버풀, 포츠머스, 플리머스, 사우샘프턴, 카디프, 코번트리, 엑서터, 스완지, 노팅엄, 브라이턴, 이스트본, 클라이드 만 연안의 도시 등, 다수의 도시가 잿더미가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목표는 영국 국민의 불만을 높여 정부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항복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1년 5월까지 영국 공군의 방어로, 잠재적인 영국 침공의 위협을 제거하고 독일은 영국을 포기하고, 독일의 다음 목표는 동부 전선으로 옮겨갔다.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독일 공군은 대규모 공습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소규모 습격을 지속했고, 5만 1509명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 1944년에 개발된 V1 비행 폭탄과 V2 로켓의 등장은, 다시 유럽 대륙에서 런던을 습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들 보복 무기의 공격으로 8,938명의 민간인이 사상했다.[204]
영국 대공습은 영국의 생산과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174][175] 독일 공군은 약 4만 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생산 및 운송을 방해하고, 식량 공급을 줄이며, 영국 국민의 사기를 저하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약 5만 8천 톤의 선박을 침몰시키고 45만 톤 이상의 선박에 피해를 입혔다.
폭격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생산량은 전반적으로 꾸준히 증가했다.[174] 다만, 1941년 4월에는 노동자들의 부활절 휴가로 인해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기도 했다.[174][175] 군수품 생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완제품 생산보다는 부품 공급과 생산 분산이었다.[174][175] 특히 항공기 생산의 경우, 폭격으로 인한 피해와 예방적 분산 정책으로 인해 목표 달성에 차질을 빚었다. 1941년 4월, 영국 항구가 주요 목표였을 때 소총 생산량은 25% 감소했고, 탄피 생산량은 4.6%, 소형 무기 생산량은 4.5% 감소했다.
산업 도시들에 대한 전략적 영향은 도시마다 달랐다. 대부분의 도시는 10~15일 만에 회복했지만, 벨파스트와 리버풀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버밍엄의 경우 전쟁 산업이 완전히 회복하는 데 약 3개월이 소요되었고, 지친 인구는 공격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 3주가 걸렸다.
영국 공군 참모부는 독일 공습의 영향을 평가하여, 폭격기가 매일 밤 하나의 목표를 타격하고 소이탄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이탄이 고성능 폭탄보다 생산에 더 큰 영향을 미쳤고, 도시 중심부가 파괴되면 행정, 유틸리티, 운송 시설의 손실로 지역 생산이 심각하게 중단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독일 공군이 정밀 공격에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소이탄을 사용한 독일의 지역 공격 방식을 참고하여 독일 상공 작전을 개선하려 했다.
일부 저자들은 영국 공군 참모부가 중요한 교훈을 무시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영국 국민의 사기가 꺾이지 않았고, 독일의 사기를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항복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작성된 16개의 서부 항공 계획 중 어느 곳에서도 사기를 목표로 명시하지 않았고, 1940년의 처음 세 가지 지침에서도 민간인이나 사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사기는 1940년 9월 21일의 아홉 번째 전쟁 지침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177] 1940년 10월의 열 번째 지침에서는 기상 조건으로 인해 유류 목표물을 공습할 수 없을 경우에만 산업 도시를 목표로 삼도록 명시했다.[178]
영국 대공습은 군사적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약 41,000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39,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영국의 인프라와 주택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173] 그러나 함부르크 폭격과 같이 연합군의 독일 폭격에 비하면 사상자 수는 비교적 적었다.[180]
1940년 6월 20일 영국 대공습 당시 영국 상공에서 독일의 첫 공습이 시작된 때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독일 공군(OKL)은 영국 제도 상공에서 2,265대의 항공기 손실을 기록했으며, 이 중 4분의 1은 전투기였고 3분의 1은 폭격기였다. 최소 3,363명의 독일 공군 조종사가 사망했고, 2,641명이 실종되었으며, 2,117명이 부상을 입었다. 총 손실은 출격 횟수의 1.5%에 불과한 600대의 폭격기에 달했을 수 있다. 야간 폭격으로 전환된 후 격추되지 않은 상당수의 항공기는 착륙 중 파손되거나 악천후로 인해 추락했다.
7. 1. 독일 공군의 손실
1940년 6월 20일 영국 대공습 당시 영국 상공에서 독일의 첫 공습이 시작된 때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독일 공군(OKL)은 영국 제도 상공에서 2,265대의 항공기 손실을 기록했으며, 이 중 4분의 1은 전투기였고 3분의 1은 폭격기였다. 최소 3,363명의 독일 공군 조종사가 사망했고, 2,641명이 실종되었으며, 2,117명이 부상을 입었다. 총 손실은 출격 횟수의 1.5%에 불과한 600대의 폭격기에 달했을 수 있다. 야간 폭격으로 전환된 후 격추되지 않은 상당수의 항공기는 착륙 중 파손되거나 악천후로 인해 추락했다.7. 2. 폭격의 효과
영국 대공습은 영국의 생산과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174][175] 1940년 9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독일 공군은 약 4만 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생산 및 운송을 방해하고, 식량 공급을 줄이며, 영국 국민의 사기를 저하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약 5만 8천 톤의 선박을 침몰시키고 45만 톤 이상의 선박에 피해를 입혀 유보트 봉쇄를 지원했다.폭격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생산량은 전반적으로 꾸준히 증가했다.[174] 다만, 1941년 4월에는 노동자들의 부활절 휴가로 인해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기도 했다.[174][175] 영국 공식 역사서 ''영국 전쟁 생산''에 따르면, 군수품 생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완제품 생산보다는 부품 공급과 생산 분산이었다.[174][175] 특히 항공기 생산의 경우, 폭격으로 인한 피해와 예방적 분산 정책으로 인해 목표 달성에 차질을 빚었다. 1941년 4월, 영국 항구가 주요 목표였을 때 소총 생산량은 25% 감소했고, 탄피 생산량은 4.6%, 소형 무기 생산량은 4.5% 감소했다.
산업 도시들에 대한 전략적 영향은 도시마다 달랐다. 대부분의 도시는 10~15일 만에 회복했지만, 벨파스트와 리버풀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버밍엄의 경우 전쟁 산업이 완전히 회복하는 데 약 3개월이 소요되었고, 지친 인구는 공격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 3주가 걸렸다.
영국 공군 참모부는 독일 공습의 영향을 평가하여, 폭격기가 매일 밤 하나의 목표를 타격하고 소이탄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이탄이 고성능 폭탄보다 생산에 더 큰 영향을 미쳤고, 도시 중심부가 파괴되면 행정, 유틸리티, 운송 시설의 손실로 지역 생산이 심각하게 중단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독일 공군이 정밀 공격에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소이탄을 사용한 독일의 지역 공격 방식을 참고하여 독일 상공 작전을 개선하려 했다.
일부 저자들은 영국 공군 참모부가 중요한 교훈을 무시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영국 국민의 사기가 꺾이지 않았고, 독일의 사기를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항복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작성된 16개의 서부 항공 계획 중 어느 곳에서도 사기를 목표로 명시하지 않았고, 1940년의 처음 세 가지 지침에서도 민간인이나 사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사기는 1940년 9월 21일의 아홉 번째 전쟁 지침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177] 1940년 10월의 열 번째 지침에서는 기상 조건으로 인해 유류 목표물을 공습할 수 없을 경우에만 산업 도시를 목표로 삼도록 명시했다.[178]
영국 대공습은 군사적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약 41,000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39,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영국의 인프라와 주택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173] 그러나 함부르크 폭격과 같이 연합군의 독일 폭격에 비하면 사상자 수는 비교적 적었다.[180]
8. 유산, 선전, 기억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인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는 국가적 연대 속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이었다.[181] 이 이미지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 서술에 등장했으며, 특히 앵거스 캘더의 저서 ''블리츠 신화''(1991)가 출판된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동안 영국 내 우파와 좌파 정치 세력 모두 이 이미지를 소환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애국심을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민주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는 향수를 자극하는 서사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182][183][184] 블리츠 시기 사람들의 이러한 이미지는 영화, 라디오, 신문, 잡지를 통해 널리 퍼졌다.[185] 당시 이는 국내외적으로 유용한 선전 도구로 여겨졌다.[186]
역사가들은 이러한 구성에 대한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며 애국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적 단결에 대한 과장된 주장에 초점을 맞췄다. 캘더는 ''블리츠 신화''에서 반사회적이고 분열적인 행동에 대한 반증을 제시했다. 그가 신화라고 여겼던 것—평온한 국가적 단결—은 "역사적 진실"이 되었다. 특히 계급주의적 분열은 블리츠 기간 동안 가장 두드러졌다.[182]
블리츠 기간의 공습은 노동 계급 지역에서 가장 큰 분열과 사기 저하를 초래했으며, 수면 부족, 열악한 대피소, 비효율적인 경보 시스템이 주요 원인이었다. 수면 부족은 특히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대피소에 가는 것을 꺼렸다. 공산당은 이러한 어려움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187] 코번트리 블리츠 이후, 공산당은 방공호의 필요성에 대해 광범위하게 선동했다. 특히 많은 런던 시민들은 권한 없이 지하철 시스템을 사용하여 밤새 대피하고 잠을 잤다. 정부는 코번트리와 런던에서 공산당이 배포한 팜플렛과 포스터의 갑작스러운 캠페인에 대해 매우 우려하여 경찰을 보내 그들의 생산 시설을 압수했다. 정부는 1940년 11월까지 대피소의 중앙 집중식 조직에 반대했다. 내무 장관 존 앤더슨 경은 네빌 체임벌린이 사임하면서 내각 개편 이후 머리슨으로 교체되었다. 머리슨은 대피소 제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의 불안을 진압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대중이 지하철역을 점거할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상태를 개선하고 터널을 통해 확장할 계획을 승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영국 노동당의 많은 구성원들이 공산당으로 돌아섰다. 공산주의자들은 코번트리 공습의 피해와 사상자를 부유한 공장 소유주, 대기업, 토지 소유주에게 돌리고 협상된 평화를 요구했다. 그들이 큰 영향력을 얻는 데 실패했지만, 당의 구성원은 1941년 6월까지 두 배로 증가했다.[188] "공산주의 위협"은 허버트 머리슨이 내각의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신문인 ''데일리 워커''의 활동을 중단하도록 명령할 만큼 중요하다고 여겨졌다.[189]
공산주의자들의 짧은 성공은 또한 영국 파시스트 연합(BUF)의 손에 넘어갔다. 반유대주의적 태도가 특히 런던에서 널리 퍼졌다. 유대인의 지원이 공산주의의 급증을 뒷받침한다는 소문이 자주 돌았다. 유대인이 물가를 올리고, 암시장의 책임자이며, 공격에 가장 먼저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심지어 공황의 원인이 되고, 부정한 방법으로 최고의 대피소를 확보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다. 소규모 흑인 영국인, 영국 인도인,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사소한 민족적 대립도 있었지만, 이러한 긴장은 조용하고 빠르게 가라앉았다.[190] 다른 도시에서는 계급 분열이 더욱 두드러졌다. 1940년 11월까지 런던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도시를 떠났다. 민간인들은 국가의 더 외딴 지역으로 떠났다. 남웨일스와 글로스터의 인구 증가가 이러한 이재민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암시했다. 산업 분산과 같은 다른 요인들도 중요했을 수 있다. 그러나 부유한 자가 대피자에 대한 불만과 가난한 자에 대한 적대적인 대우는 계급적 불만의 지속적인 징후였지만, 이러한 요인들이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191] 전체 대피자 수는 140만 명에 달했으며, 가장 가난한 도심 가족 출신이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수용 위원회는 일부 어린이의 상태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전쟁 시기의 국가적 단결을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이 계획은 역효과를 낳아 종종 계급 갈등을 악화시키고 도시 빈곤층에 대한 편견을 강화했다. 4개월 만에 대피한 어머니의 88%, 어린 자녀의 86%, 학령기 아동의 43%가 집으로 돌아왔다. 가짜 전쟁 기간의 폭격 부재는 사람들이 도시로 돌아가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1년 후 대피 작전을 다시 시행해야 했을 때 계급 갈등은 완화되지 않았다.
반면에, 일부 역사가들은 최근 "블리츠 정신" 서사에 대한 이러한 역사 수정주의가 과도한 교정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심각한 예외를 인정하면서도 블리츠 기간 동안 인구가 대체로 잘 행동했다고 주장하는 피터 헤네시, 앤드루 소프, 필립 지글러가 포함된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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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런던 사람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회상할 만한 것이 많고,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author=필립 지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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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
엘리자베스 보웬의 소설 ''낮의 열기''(1948)는 "런던 공습의 처음 흥분했던 가을"에 일어난다. 주인공 스텔라 로드니는 그녀의 연인 로버트를 만나고, 그들의 관계는 그 관계가 발생하는 역사적 맥락에 의해 형성된다. 이 소설은 영국 대공습 기간 동안 생겨난 동지애와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대를 강력하게 묘사하며, 배신이라는 주제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킨다. 보웬의 글은 밤을 살아남아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며 길모퉁이에서 서로 작별 인사를 하는 낯선 사람들의 가슴 아픈 순간을 포착한다.
==== 시 ====
딜런 토머스는 런던에서 스트랜드 필름에서 정보부를 위한 사기 진작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국 대공습을 직접 경험했다. 폭격과 화재 폭풍에 대한 그의 경험은 ''새벽 습격으로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백세 된 남자가 있었다''(1941), ''화재 습격 후 의식''(1944) 및 ''런던에서 불로 죽은 아이의 죽음을 애도 거부''(1945)에서 강력하게 표현되었다. 이 시들은 1946년에 출판된 그의 시집인 죽음과 입장에 수록되었다. 월포드 데이비스 교수에 따르면, 그의 전쟁 시에 표현된 감정은 "당시 영국 국민의 진정한 기질, 즉 회복력과 용기"를 대표했다.
==== 영화 ====
스티브 매퀸이 제작 및 감독한 2024년 영화인 ''블리츠''는 1940년 9월 런던 대공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195] 이 영화는 성별, 인종, 계급을 아울러 애국심, 공동체 연대, 회복력, 정신적 공포의 순간들을 탐구하여, 지배적인 역사적 상상 속 ""블리츠 정신""의 "애국적 신화"에 의문을 제기한다.[195]
==== 오디오 기록 ====
최근 몇 년 동안, 영국 대공습과 관련된 수많은 전쟁 시기 녹음 자료들이 오디오북 형태로 공개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 대공습』, 『본토 방위』, 『영국 전쟁 방송』 등이 있다.[196] 이 컬렉션에는 민간인, 군인, 항공 승무원, 정치인, 그리고 시민 방위대 요원들과의 당시 인터뷰, 영국 대공습 당시의 현장 녹음, 뉴스 속보 및 대국민 정보 방송 등이 포함되어 있다.[196] 주목할 만한 인터뷰로는 조지 십자 훈장 최초 수훈자인 토머스 앨더슨, 스코틀랜드 클라이드사이드에서 잔해에 갇혀 8일 만에 생존한 존 코맥, 그리고 1940년 12월 허버트 모리슨의 "영국은 불타지 않을 것이다"라는 화재 방지대 증원 호소 등이 있다.[196]
==== 폭격 잔해 ====
런던에서는 6개월 동안 75만 톤의 폭격 잔해가 화물 열차 1,700대에 실려 이스트 앵글리아의 폭격기 사령부 비행장 활주로 건설에 사용되었다. 버밍엄의 폭격 잔해는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와 에식스에 있는 미국 공군 기지 활주로 건설에 사용되었다.[197]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 부지에서 잔해를 치운 후에는 전시 식량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채소를 재배했는데, 이를 승리의 정원이라고 불렀다.[198]
8. 1. 문학
엘리자베스 보웬의 소설 ''낮의 열기''(1948)는 "런던 공습의 처음 흥분했던 가을"에 일어난다. 주인공 스텔라 로드니는 그녀의 연인 로버트를 만나고, 그들의 관계는 그 관계가 발생하는 역사적 맥락에 의해 형성된다. 이 소설은 영국 대공습 기간 동안 생겨난 동지애와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대를 강력하게 묘사하며, 배신이라는 주제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킨다. 보웬의 글은 밤을 살아남아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며 길모퉁이에서 서로 작별 인사를 하는 낯선 사람들의 가슴 아픈 순간을 포착한다.8. 2. 시
딜런 토머스는 런던에서 스트랜드 필름에서 정보부를 위한 사기 진작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국 대공습을 직접 경험했다. 폭격과 화재 폭풍에 대한 그의 경험은 ''새벽 습격으로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백세 된 남자가 있었다''(1941), ''화재 습격 후 의식''(1944) 및 ''런던에서 불로 죽은 아이의 죽음을 애도 거부''(1945)에서 강력하게 표현되었다. 이 시들은 1946년에 출판된 그의 시집인 죽음과 입장에 수록되었다. 월포드 데이비스 교수에 따르면, 그의 전쟁 시에 표현된 감정은 "당시 영국 국민의 진정한 기질, 즉 회복력과 용기"를 대표했다.8. 3. 영화
스티브 매퀸이 제작 및 감독한 2024년 영화인 ''블리츠''는 1940년 9월 런던 대공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195] 이 영화는 성별, 인종, 계급을 아울러 애국심, 공동체 연대, 회복력, 정신적 공포의 순간들을 탐구하여, 지배적인 역사적 상상 속 ""블리츠 정신""의 "애국적 신화"에 의문을 제기한다.[195]8. 4. 오디오 기록
최근 몇 년 동안, 영국 대공습과 관련된 수많은 전쟁 시기 녹음 자료들이 오디오북 형태로 공개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 대공습』, 『본토 방위』, 『영국 전쟁 방송』 등이 있다.[196] 이 컬렉션에는 민간인, 군인, 항공 승무원, 정치인, 그리고 시민 방위대 요원들과의 당시 인터뷰, 영국 대공습 당시의 현장 녹음, 뉴스 속보 및 대국민 정보 방송 등이 포함되어 있다.[196] 주목할 만한 인터뷰로는 조지 십자 훈장 최초 수훈자인 토머스 앨더슨, 스코틀랜드 클라이드사이드에서 잔해에 갇혀 8일 만에 생존한 존 코맥, 그리고 1940년 12월 허버트 모리슨의 "영국은 불타지 않을 것이다"라는 화재 방지대 증원 호소 등이 있다.[196]8. 5. 폭격 잔해
런던에서는 6개월 동안 75만 톤의 폭격 잔해가 화물 열차 1,700대에 실려 이스트 앵글리아의 폭격기 사령부 비행장 활주로 건설에 사용되었다. 버밍엄의 폭격 잔해는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와 에식스에 있는 미국 공군 기지 활주로 건설에 사용되었다.[197]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 부지에서 잔해를 치운 후에는 전시 식량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채소를 재배했는데, 이를 승리의 정원이라고 불렀다.[198]9. 표
9. 1. 폭격 통계
도시 | 톤 | 공습 횟수 |
---|---|---|
런던 | 18,291 | 71 |
리버풀/머지사이드 | 1,957 | 8 |
버밍엄 | 1,852 | 8 |
글래스고/클라이드사이드 | 1,329 | 5 |
플리머스 | 1,228 | 8 |
브리스톨 | 919 | 6 |
엑시터 | 75 | 19 |
코번트리 | 818 | 2 |
포츠머스 | 687 | 3 |
사우샘프턴 | 647 | 4 |
헐 | 593 | 3 |
맨체스터 | 578 | 3 |
벨파스트 | 440 | 2 |
스완지 | 89 | 3 |
셰필드 | 355 | 2 |
선더랜드 | 155 | 1 |
노팅엄 | 137 | 1 |
카디프 | 115 | 1 |
주요 공습(최소 100톤의 폭탄 투하) 횟수와 이 주요 공습 동안 투하된 폭탄 톤수를 도시별로 정리한 표이다. 더 작은 규모의 공습은 톤수에 포함되지 않았다.[199]
9. 2. 출격 횟수
독일 공군(Luftwaffede)은 1940년 10월부터 1941년 5월까지 영국 본토를 폭격했다.[118] 1940년 10월에는 주간 2,300회(79기 손실), 야간 5,900회(23기 손실) 출격했으며, 제2 항공함대는 2,400회, 제3 항공함대는 3,500회 출격했다. 이 기간 동안 25회의 주요 공격과 4회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118] 1940년 11월에는 주간 925회(65기 손실), 야간 6,125회(48기 손실) 출격했으며, 제2 항공함대는 1,600회, 제3 항공함대는 4,525회 출격했다. 이 기간 동안 23회의 주요 공격과 2회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118]1940년 12월에는 주간 650회(24기 손실), 야간 3,450회(44기 손실) 출격했으며, 제2 항공함대는 700회, 제3 항공함대는 2,750회 출격했다. 이 기간 동안 11회의 주요 공격과 5회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118] 1941년 1월에는 주간 675회(7기 손실), 야간 2,050회(22기 손실) 출격했으며, 제2 항공함대는 450회, 제3 항공함대는 1,600회 출격했다. 이 기간 동안 7회의 주요 공격과 6회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118]
1941년 2월에는 주간 500회(9기 손실), 야간 1,450회(18기 손실) 출격했으며, 제2 항공함대는 475회, 제3 항공함대는 975회 출격했다. 이 기간 동안 2회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118] 1941년 3월에는 주간 800회(8기 손실), 야간 4,275회(46기 손실) 출격했으며, 제2 항공함대는 1,625회, 제3 항공함대는 2,650회 출격했다. 이 기간 동안 12회의 주요 공격과 3회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118]
1941년 4월에는 주간 800회(9기 손실), 야간 5,250회(58기 손실) 출격했으며, 제2 항공함대는 1,500회, 제3 항공함대는 3,750회 출격했다. 이 기간 동안 16회의 주요 공격과 5회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118] 1941년 5월에는 주간 200회(3기 손실), 야간 3,800회(55기 손실) 출격했으며, 제2 항공함대는 1,300회, 제3 항공함대는 2,500회 출격했다. 이 기간 동안 11회의 주요 공격과 3회의 대규모 공격이 있었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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