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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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생교는 조희성을 메시아로 숭배하며 육신 영생을 주장하는 신흥 종교이다. 조희성은 스스로를 미륵불, 구세주 등으로 칭하며, 신도들의 금품을 갈취하고 탈퇴자를 처단하려 했다. 1980년 창립 이후, 감금, 폭행, 살인 및 암매장 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며, 교주 조희성은 사기, 횡령, 감금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1990년대에는 신도 실종 사건이 발생하여 유골이 발굴되었고, 2004년 조희성은 살인 혐의는 무죄, 횡령 혐의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영생교
기본 정보
이름승리제단
다른 이름영생교
창시자조희성
설립 연도1980년대
종교신흥 종교
국가대한민국
창시자 사망 연도2004년
특징조희성을 재림주로 숭배
이단 논란
논란
주요 논란이단성
헌금 강요
신도 세뇌
집단생활
폭력 사건
사기 혐의
관련 단체
관련 단체영생교 낙원
참고
관련 항목조희성
영생교회 집단소사 사건
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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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리

영생교는 교주 조희성을 신격화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독특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영생교는 조희성을 초자연적인 메시아(또는 부처)로 믿으며, 그를 따르면 질병 치유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생교는 하느님이 인류의 조상이며, 사람들이 타락하여 피부색이 변했다고 믿는 등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공산주의를 세상에서 몰아내고, 몬순(여름 몬순) 계절을 끝내며, 태풍을 예방하고, 풍년을 보장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는다는 5가지 목표를 맹세했다.

--
조희성(1931년 8월 21일 - 2004년 6월 19일)은 스스로를 "생미륵불", "[구세주]", "정도령", "승리자"라고 칭하며, 자신을 믿으면 불로불사하고 지구가 종말을 맞이할 때 10배로 돌려준다고 하여 신도들의 금품을 갈취했다. 또한 "자신의 사진을 찍으면 영이 '이슬'로 사진에 나타나, 집회 의식이나 일상생활에서도 이슬이 내리게 한다"고 했다. "공산주의를 없애고, 장마를 없애고 태풍을 막고, 한국이 1980년대부터 풍작이 되도록 했다."라고도 했다.

이러한 영생교의 교리는 대한민국 주류 개신교 교단들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2.1. 연구

승리제단은 신흥 종교 특성상 기존 사회와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비도덕적인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영생교 승리제단과 조희성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거의 없는데, 이는 교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에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영생교 연구자로는 김종석 박사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종석 박사는 선문대학교에서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한국의 육신영생신앙》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승리제단에 대한 연구가 비판적 연구가들이 쓴 비난성 기사를 제외하고는 전무하며, 영생교에 대한 연구가 적은 이유는 사회적 인지도가 낮아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종석 박사는 자신의 논문이 영생교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이나 사회학, 철학, 사상적 종교이론의 전개를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두 신흥 종교의 핵심 정체성인 '피의 원리'를 중심으로 한 '육신영생신앙'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참여관찰과 역사학적 방법으로 연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2.2. 교리적 특성

조희성은 한국 사회의 주류인 기독교의 세계관, 성경, 예수를 부정하고, 예수를 '마귀 새끼'로, 자신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영생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창설자 조용기 목사가 매독에 걸렸다고 주장하며, 관련 유인물을 배포하여 순복음교회와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영생교는 한민족의 조상을 단군으로 보며, 단군을 신화적 존재가 아닌 역사적 인물로,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12아들 중 하나인 단(DAN)이라고 주장한다. 단지파는 성경상 사라진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 알려져 있는데, 영생교에서는 단지파가 이스라엘을 떠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알타이 산맥에 머물다가 한반도에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이며, 이스라엘 민족과 풍습이 수십 가지 동일하며, 와당에 적힌 글자가 고대 히브리어라고 주장한다.

영생교는 기독교 등 다른 종교가 '사후(死後) 영생'을 주장하는 것과 달리 '살아 영생'이라는 교리를 내세운다.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영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오늘날의 과학적 결론이지만, 영생교에서는 사람의 실체가 원래 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사람이 원래의 실체로 돌아가면, 즉 신이 되면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영생체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 불경, 격암유록 등 여러 경전에 언급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요한 복음서 3장 5절의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를 '사람이 하느님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해석한다. 즉, '사람이 하느님이 되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경 또한 '사람이 부처님이 되어야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해석한다.

영생교의 창교자 조희성은 자신이 성경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언급된 이긴자, 열반경에 언급된 미륵불, 격암유록에 예언된 정도령이라고 주장한다. 조희성은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후 종교에 헌신했고, 대한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며 7개의 중고등학교와 여러 교회를 설립했다고 한다. 조희성은 올리브 나무 종교 운동의 창시자인 박태선을 만난 후 폐와 귀 질환을 치유받았다고 주장하며, 1980년 10월 15일 자신 안의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 인류 구원 운동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영생교는 조희성을 초자연적인 메시아(또는 부처)라고 믿으며, 그를 따르면 질병을 치유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영생교는 하느님이 인류의 조상이며, 사람들이 타락하여 피부색이 변했다고 믿는다. 또한, 공산주의를 세상에서 몰아내고, 몬순(여름 몬순) 계절을 끝내며, 태풍을 예방하고, 풍년을 보장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는다는 5가지 목표를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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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인 조희성(1931년 8월 21일 - 2004년 6월 19일)은 스스로를 "생미륵불", "[구세주]", "정도령", "승리자"라고 칭했다.

조희성은 자신을 믿으면 불로불사하고 지구가 종말을 맞이할 때 10배로 돌려준다고 하여 신도들의 금품을 갈취했다. 또한 "자신의 사진을 찍으면 영이 '이슬'로 사진에 나타나, 집회 의식이나 일상생활에서도 이슬이 내리게 한다"고 했다. "공산주의를 없애고, 장마를 없애고 태풍을 막고, 한국이 1980년대부터 풍작이 되도록 했다."라고도 했다.

3. 승리제단 초기 상황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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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교 교주 조희성은 자신을 "생미륵불", "[구세주]", "정도령", "승리자" 등으로 칭하며 신격화했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찍으면 영이 '이슬'로 나타나고, 공산주의를 없애고 장마태풍을 막는 등 한국에 풍년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도들에게 영생을 약속하며 금품을 갈취했고, 탈퇴자는 끝까지 쫓아가 처단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탈퇴자 처단 실행 부대는 지성룡파와 나경옥파로 나뉘었지만, 지성룡을 1990년에 나경옥파가 살해하면서 이후에는 나경옥파가 주도하게 되었다.

승리제단은 초기부터 여러 사건 사고를 겪으며 사회와 갈등을 빚었다.

*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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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사건 내용
1989년 5월 9일전 신도이자 '승리신문' 기고자인 신진규 경북대 교수가 탈퇴하자 20일간 감금, 폭행.
1992년 9월 28일경찰관 3명이 영생교를 수사하려 했으나, 신자들이 경찰관들을 폭행.
1994년 1월 12일조희성을 사기, 횡령, 감금 등의 혐의로 체포.
1994년 3월 9일서울지검은 업무상 횡령 혐의로 근화실업 총무 윤태수를 체포하고, 조희성을 재체포했으며, 사장 양지춘을 수배.
1995년 3월 7일경기도 용인시(당시 용인군)에서 1984년에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발굴.
1996년 12월 11일경기도 부천시의 영생교 시설에서 1987년 6월에 납치된 비신자의 유골 발견.
2003년 8월경기도 안성시 금광산 저수지 근처 산에서 1990년에 살해된 지성룡 추정 유골 발견.
2003년 8월 17일전라북도 정읍시에서 1990년에 행방불명된 인물 추정 유골 발굴.
2003년 8월 18일전라북도 완주군에서 1990년에 행방불명된 인물 추정 유골 발굴.


* 경제적 착취: 조희성은 '근화실업'이라는 회사를 통해 신도 200명을 고용했지만, 1991년 8월부터 1994년 2월까지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총 1500을 교단 자금으로 횡령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결국 1994년 조희성의 사기 혐의 체포와 1998년 징역형 선고로 이어졌다. 2003년에는 신도 15명 실종 사건으로 다시 수사를 받았고, 조희성은 추가 혐의로 2004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형 집행 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1. 초기 상황

1980년 10월 15일 공식 출범한 영생교 승리제단은 창교 후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믿고 전도활동에 매진했다. 이들은 인간의 몸이 영원히 죽지 않는 것에서 지상천국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형제를 내 몸처럼 여기라”는 조희성의 종교적 신조를 따르며, 어려움 속에서도 전도에 힘썼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갈등이 발생했다. 전도관 관장 출신들이 조희성의 가르침에 반발하기 시작했고, 1982년에는 이현석이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현석은 조희성의 절대성을 부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이현석, 양해금, 김정완, 현광종 등 전도관 관장 출신들과 전도관 출신 경북대 법과 교수 신진규 등이 주요 직책을 맡았으나, 이들 중 상당수가 초기에 이탈하면서 신앙적 만족도가 오래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양해금과 같은 전도관 출신들이 배교의 기미를 보였다. 이탈자들은 배교자로 의심되는 신도들이 납치, 감금당하고, 신도들이 물품 판매나 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강요받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러한 상황은 공권력과의 충돌, 언론 보도로 이어져 사회와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승리제단은 밀실과 전도관을 모태로 시작했기 때문에, 신도 흡수 과정에서 이들과의 긴장 관계가 불가피했다. 조희성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실과 경호원을 운영했다. 경호원들은 조희성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었고, 조희성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초기에는 밀실과 전도관 등 외부 충돌로부터 조희성을 보호하기 위해 경호원을 운영했지만, 지성룡과 라경옥 등 극렬 맹신자들의 과도한 충성심은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다. 1982년 이후 극렬 맹신자들이 이탈자들을 감금, 폭행, 살인, 암매장한 혐의는 법원에서 모두 유죄로 판결되었다. 이 사건은 사회와의 본격적인 갈등을 불러왔고, 2003년 8월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3.2. 납치 및 폭행

1989년 5월 9일, 1988년 10월 30일 승리신문에 기고할 정도로 열성 신도였던 신진규 경북대 공법학과 교수가 영생교를 탈퇴하자 20일 동안 감금, 폭행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 교수의 아내 김순자의 선의에 의한 행동으로 발생한 것이므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 교수의 의사에 따라 취하되었다.

3.3. 경관 감금 및 폭행

1992년 9월 28일, 경찰관 3명이 영생교의 종말론 유포와 헌금 부정 사건을 수사하려 했다. 그러나 영생교 신도들은 교주를 연행하려던 경찰관 3명을 폭행하고 그 중 1명은 3시간여 만에 풀어주었다.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검찰의 공소장, 목격자들의 증언, 객관적 자료들은 사건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 1989년 5월 9일, 전 신자이자 '승리신문(교단의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던 신진규 경북대 교수가 탈퇴하자 20일간 감금, 폭행했다.
* 1992년 9월 28일, 경찰관 3명이 영생교를 수사하려 했으나, 신자들이 교주를 연행하려던 경찰관 3명을 폭행했고, 그 중 1명은 3시간 후에 석방되었다.

3.3.1. 검찰의 공소장이 말하는 사건 개요

검찰은 상해 혐의로 지명수배되어 있던 라경옥을 찾고 있던 중, 영생교 창시자 조희성이 타고 있던 차량에 라경옥이 있을 것으로 보고 경찰관 신분을 밝히며 정차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조희성이 김정웅 등 승리제단 청년 신도들을 카폰으로 불러 경찰관을 사건 발생 장소 인근의 승리제단 건물로 끌고 가 감금하고 폭행했다는 것이다.

3.3.2. 객관적 자료와 재판 진술이 말하는 사건 개요

검찰은 1992년 9월 28일 사건 발생 이틀 전인 9월 26일에 이미 이 사건의 개요를 예견하고 있었는데, 이는 검찰이 라경옥이 아닌 교주 연행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복 경찰관들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조희성을 강제로 연행하려 했고, 영생교인들은 이들을 교주 납치범으로 오인하여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영생교인 최순희는 납치범으로 오인한 사복 경찰관 2명을 그들의 동의하에 현장에 출동한 정복 경찰관과 함께 차량에 동승시켜 승리제단으로 데려가던 중, 사복 경찰관 1명이 탈출하려 하자 최순희와 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사복 경찰관들은 전치 2주의 안면 찰과상을, 최순희는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었다.

승리제단 청년들을 부른 것은 영생교 창시자 조희성이 아니라 사건을 목격한 영생교인 김신배였다.

납치범으로 오인받아 끌려온 사복 경찰관 오광일은 부천남부경찰서장과 경찰들 입회 하에 사건 경위에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혔고, 영생교인들은 오해를 풀고 사복경찰관을 풀어주었다.

형사들을 괴한으로 오인해 일어난 이 사건은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김홍일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김 검사는 최순희 등 승리제단 신도들을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하지 않았으며 그가 강력부를 떠날 때까지 영생교 사건은 수면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1993년경 이경재 검사가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로 부임하자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이경재 검사는 영생교를 종교가 아니라 폭력 살인집단으로 보았다. 영생교의 교주를 폭력살인집단의 괴수로 본 이경재검사는 영생교를 척결하기로 결심하였고(승리제단의 인사에 따르면 청와대의 지시도 있었다고 한다), 영생교 신도들 앞에서 “영생교를 반드시 없애버리겠다”고 공언까지도 하였다.

3.4. 살인 및 유골 발굴

1994년, 조희성은 사기 혐의로 체포되어 1998년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03년, 영생교는 신도 15명의 실종 사건으로 경찰 수사를 받으면서 악명을 얻었다. 경찰은 교회 정원에서 유해를 발견했고, 당시 6년 형을 복역 중이던 조희성은 사기, 노동력 착취, 불법 감금 혐의로 다시 기소되었다. 2004년, 조희성은 다른 신도 2명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형 집행 전인 2004년 8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영생교는 이탈 신도들을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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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사건 내용
1989년 5월 9일전 신도이자 '승리신문' 기고자인 신진규 경북대 교수가 탈퇴하자 20일간 감금, 폭행.
1992년 9월 28일경찰관 3명이 영생교를 수사하려 했으나, 신자들이 경찰관들을 폭행.
1995년 3월 7일경기도 용인시(당시 용인군)에서 1984년에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발굴.
1996년 12월 11일경기도 부천시의 영생교 시설에서 1987년 6월에 납치된 비신자의 유골 발견.
2003년 8월경기도 안성시 금광산 저수지 근처 산에서 1990년에 살해된 지성룡 추정 유골 발견.
2003년 8월 17일전라북도 정읍시에서 1990년에 행방불명된 인물 추정 유골 발굴.
2003년 8월 18일전라북도 완주군에서 1990년에 행방불명된 인물 추정 유골 발굴.

3.4.1. 사건이 알려진 경위

1994년 1월 12일, 교주 조희성이 사기, 횡령, 경관 감금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되었다. 같은 달 13일, 국제종교문제연구소와 피해자 가족들은 영생교에 의해 납치 또는 실종된 사람이 15명에 달한다며 수사를 요구하였다. 검찰은 이에 따라 수사를 진행하였고, 2월 20일에는 영생교의 행동대 3명을 구속하고 조희성과 이들을 추궁하였다.

3.4.2. 유골 발굴

검찰은 1995년 3월 7일 피의자의 진술대로 경기도 용인시(당시 용인군)에서 1984년에 암매장되었던 소문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굴하였다. 영생교의 암매장 사실이 확인되자 검찰은 수사를 확대하여 또 다른 실종 신도들에 대한 수사를 확대하였다. 수사 대상이 된 실종자들의 가족들도 언론 인터뷰에 응하였다.

3.4.3. 이탈신도들에 대한 보복

영생교의 배교자 처단조는 지성룡파와 나경옥파로 나뉘었다. 지성룡파가 소문종 납치살해를 주도한 뒤, 나경옥파가 1990년에 지성룡을 살해하고 배교자 처단을 주도해왔다.

* 1989년 5월 9일, 전 신자이자 '승리신문(교단의 신문)'에 기고했던 신진규 경북대 교수가 탈퇴하자 20일간 감금, 폭행했다.
* 1992년 9월 28일, 경찰관 3명이 영생교를 수사하려 했으나, 교주를 연행하려던 경찰관 3명을 신자들이 폭행했고, 그 중 1명의 석방은 3시간 후였다.
* 1995년 3월 7일, 경기도 용인군 (현: 용인시)에서 1984년에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굴되었다.
* 1996년 12월 11일, 경기도 부천시의 영생교 시설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 정보 제공자는 유골이 1987년 6월에 납치된, 우연히 납치 현장을 목격한 비신자의 것이라고 했다.
* 2003년 8월, 경기도 안성시의 금광산 저수지 근처 산에서 1990년에 살해된 지성룡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같은 달 17일,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1990년에 행방불명된 인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굴되었다. 18일에는 역시 전라북도 완주군에서도 1990년에 행방불명된 인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굴되었다.

3.4.4. 검찰의 수사

검찰은 1994년 5월 9일에 잠적했던 나경옥 등 배교자 처단조를 공개 수사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5월 16일 용인에서 발굴된 유골에 대한 부검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유골이 소문종의 것임을 확인하였다.

3.4.5. 중형 언도

2003년 8월, 경기도 안성시의 금광저수지 근처 야산에서 1990년에 나경옥에게 살해된 지성룡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면서 영생교의 범죄행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검찰은 2003년 8월 17일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1990년에 실종된 박차선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굴하였고, 2003년 8월 18일에는 전라북도 완주군에서도 1990년에 실종된 양해금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굴하는 데 성공하였다.

3.5. 착취

영생교는 '근화실업'이라는 기업을 세우고 신도 200명을 고용했으나, 근화실업은 사원들에게 지급해야 할 임금을 영생교 활동 자금으로 빼돌렸다. 1991년 8월부터 1994년 2월까지 원래 30~70만 원씩 지급하기로 한 임금을 2~10만 원만 지급하는 수법으로 총 1500을 교단 자금으로 횡령했다. 1994년 3월 9일, 서울지방검찰 특수부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업무상 횡령) 혐의로 당시 총무였던 윤태수를 구속하고 교주 조희성에게도 같은 혐의를 적용했다.

4. 보도

MBC의 PD수첩은 1994년 2월 15일 방송에서 영생교 문제를 다루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PD수첩은 1995년 2월 21일에 프레스센터에서 제5회 한국언론학회 언론상 중 방송 부문을 수상했다. 그러자 교주 조희성은 MBC에 1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1999년 7월 23일, 법원은 공익 차원의 보도이고 조희성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판단되지 않으므로 손해배상은 물론 반론보도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하였다.

KBS의 추적 60분은 영생교 관련 프로그램을 3차례 방송했다. 1994년 3월 27일에 처음으로 영생교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두 번째 보도는 소문종의 유골이 발견되어 영생교의 배교자 살해가 드러난 1995년 3월 12일에 영생교의 내막을 폭로하였다.

2003년, 영생교의 살인 행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자 추적 60분은 2주에 걸쳐 2부작으로 영생교의 정체를 보도했다. 8월 16일 첫 보도를 했으며, 방송 당일 영생교 신자들이 KBS 본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같은 달 23일에는 교주 조희성의 교리를 빙자한 범죄행각을 폭로하였다.

5. 조희성의 사후

2004년 조희성이 사망한 후, 그의 시신은 김포시 대곶면에 묻혔다. 그의 부인 이영자가 총재로서 승리제단을 이끌고 있다. 승리제단에는 삼천년성과 군화엄마(君火唵嘛)와 같은 분파가 존재한다. 이 중 군화엄마는 2004년과 2011년에 세계적인 괴질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