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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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동진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대성학교 졸업 후 일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 운동을 펼쳤다.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광제청년단, 대한청년단연합회, 광복군총영 등을 조직하고, 대한통의부, 정의부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1927년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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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기는 동학농민운동 참여와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활동, 만주 망명 후 항일 운동, 해방 후 삼일동지회 고문 활동 등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이다. - 정의부 - 김동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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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188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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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오동진 |
한자 이름 | 吳東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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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89년 8월 14일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의주부 |
사망일 | 1944년 12월 1일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조선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형무소 옥중 |
사망 원인 | 옥사 |
본관 | 해주 |
학력 | 대성학교 |
활동 정보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광복군총영 총영장) |
상훈 |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2. 생애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본관은 동복이다. 도산 안창호가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민족주의 사학 일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 운동을 벌였다. 1919년 3·1 운동 때 일신학교 설립자인 유여대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하면서 의주 지역에서 경성부와 동시에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이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령을 피해 만주로 망명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활동 ( ~ 191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복이다. 도산 안창호가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민족주의 사학인 일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19년 3·1 운동 때 일신학교 설립자인 유여대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하면서, 의주 지역에서는 경기도 경성부와 동시에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오동진은 이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령을 피해 만주로 망명했다.2. 2. 만주에서의 항일 투쟁 (1919년 ~ 1927년)
1919년 6월 만주에서 윤하진, 장덕진, 박태열 등과 함께 광제청년단을 결성하고, 11월에는 안병찬, 김찬성, 김승만 등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했다. 1920년 3월에는 광복단을 조직하고, 이후 광복군총영(1920.7)으로 개편하여 총영장을 맡았다. 그 해 미국 의원단이 시찰단으로 국내에 입국할 때, 이들에게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안경신, 정인복, 임용일 등을 국내 각지에 파견하여 기관 파괴 테러를 기도했다. 이 사건으로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7월 26일 「대한광복군참리부규정」, 「대한광복군사령부규정」, 「대한광복군영규정」을 제정하고 8월 1일을 시행일로 삼아 광복군사령부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산하 무장독립군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 조직개편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경부터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움직임이 있었다. 오동진은 양기탁의 통합 제안에 찬성하여 연합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를 조직, 교통부장·재무부장을 맡았다. 1924년 임시정부의 특명으로 통의부 5중대 소속 3인조 암살단으로 알려진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에게 첩자이며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 서기인 친일파 정갑주(鄭甲周)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1924년 6월 일진회(一進會)원으로 국권침탈에 앞장섰던 친일파 최정규(崔晶奎)와 이등박문의 수양녀이자 매국녀인 배정자(裵貞子) 암살 지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1924년 7월 22일경 임시정부와 공모하여 일본영사관 파괴 명령을 내렸으나, 박희광이 투척한 폭탄이 불발되어 실패했다.[2] 1925년에는 통의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 결성한 정의부에서 군사부위원장 겸 사령장으로 활동했다.
1926년에는 양기탁과 천도교 혁신파, 소련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규합하여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27년까지 오동진은 일제 경찰 통계에 따르면 연인원 1만 명이 넘는 부하를 이끌었고, 일제 관공서를 백여 차례 습격하여 살상한 사람이 900여 명에 달한다. 이러한 전과로 인해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3대 맹장으로 불리기도 했다.[3]
2. 3. 체포와 최후 (1927년 ~ )
1927년 12월 옛 동지 김종원의 밀고로 일제 밀정이자 신의주 조선인 고등계 형사 김덕기에게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경성감옥(現 서대문형무소) 수감 후 정신병 진단과 함께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정신병자 수용 공주 형무소에서 복역했다.[4]법정 투쟁과 단식 투쟁 중 고문으로 정신병 진단을 받고 공주 형무소에서 옥사했다고 알려졌으나, 사망 시기는 1927년 12월[4], 1930년[5], 1936년[6], 1944년 5월 20일 경[7][1]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3. 사후
참조
[1]
논문
〈吳東振 硏究〉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1989
[2]
웹인용
매일신문 2011년2월28일자 애국지사 박희광 항일 암살단 활약상, 독립신문서 보도
http://www.imaeil.co[...]
2013-04-07
[3]
뉴스
2월에 기릴 인물, 독립운동가 오동진-문태수 선생
http://www.newsmissi[...]
2008-02-01
[4]
웹사이트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오동진
http://e-gonghun.mpv[...]
[5]
웹사이트
두산 엔싸이버 백과사전 - 오동진
http://www1.encyber.[...]
[6]
독립유공자
오동진
[7]
웹사이트
이 달의 독립 운동가 상세자료 - 오동진
http://www.mpva.go.k[...]
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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