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학교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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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사카 학교 학살은 2001년 6월 8일,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37세의 다쿠마 마모루가 흉기를 휘둘러 8명의 아동(1학년 1명, 2학년 7명)을 살해하고 13명의 아동과 2명의 교사에게 상해를 입혔다. 다쿠마는 체포되어 살인죄 등으로 기소되었으며, 정신 감정 결과 형사 책임 능력이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2004년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학교 안전 대책 강화, 정신 질환자 범죄에 대한 사회적 논의, 피해자 지원 등 다양한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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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학교 학살 | |
---|---|
사건 개요 | |
명칭 |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 |
공식 명칭 | 오사카 교육대학교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아동 살상 사건 |
위치 | 일본 오사카부 이케다시 미도리가오카 1초메 (오사카 교육대학교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
좌표 | 34°49′12.8″N 135°26′21.8″E |
표적 | 민간인 (초등학생 및 교사) |
날짜 | 2001년 6월 8일 |
시간 | 10시경 (초등학교 침입) ~ 10시 20분경 |
공격 측 인원 | 1명 |
흉기 | 출인칼 (칼날 길이 약 15.8 센티미터) |
사망 | 8명 (1학년 1명 + 2학년 7명) |
부상 | 15명 (아동 13명 + 교사 2명) |
범인 | 다쿠마 마모루 |
혐의 | 살인죄 등 |
동기 | 사회에 대한 증오 |
처벌 | 사형 (집행 완료) |
영향 | 교육 관련 시설의 경비 강화 |
수사 및 사법 처리 | |
관할 | 오사카부 경찰수사 1과・소년과・이케다 경찰서 오사카 지방 검찰청 |
형사 소송 | 사형 (집행 완료)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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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웹사이트 | |
경찰청 |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아동 살상 사건으로부터의 교훈」~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
경찰청 | 오사카 교육대학교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에 관한 유족과의 합의서 |
2. 사건의 경위
2001년 6월 8일,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에 흉기를 든 다쿠마 마모루(당시 37세)가 침입하여, 학교 안에 있는 어린이들을 향해 흉기를 휘둘러 아동 8명[62](1학년 1명, 2학년 7명)이 살해되고, 아동 13명과 교사 2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다쿠마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살인죄 등으로 기소되었다.[15]
2. 1. 사건 전날
2001년(헤이세이 13년) 6월 7일 밤, 다쿠마는 자택 아파트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무슨 짓을 해도 헛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 번의 이혼 경험이 있었고, 세 번째 부인과의 재결합을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다쿠마가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어떤 약물 혼입 사건을 일으켜 면직되었는데, 이 사건도 그녀와 헤어져 초조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원망을 키웠다.[9] 소비자 금융으로부터 300만엔 이상의 빚이 있는데다 집세도 청구되어, 자신의 장래에 대한 전망이 전혀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재결합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그녀에 대한 증오심으로 바뀌었고, 위와 같은 원인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전 부인을 살해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근무지를 알고 있었을 때 죽였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동시에[10] 생활에 막혀 자살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고 짜증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츰 "자살해봤자 전 부인 등이 기뻐할 뿐이다. 어리석다", "대량으로 사람을 살해하면, 전 부인은 자신과 알게 된 것을 후회할 것이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절망적인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변화해 갔다. 오사카시내의 번화가로 덤프트럭으로 돌진하는 것도 생각했지만, 초등학생을 습격하는 것이 간단하다고 생각하여, 어릴 적에 동경했고 동시에 질투심도 느꼈던, 엘리트 학교인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를 습격하기로 결심했다.[9]오후 9시 45분경, 다쿠마는 104번 전화번호 안내로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의 전화번호를 묻고 메모했다. 그러나 다쿠마는 이전부터 생각했던 전 부인의 살해를 포기하지 못하고, 날짜가 바뀐 오전 2시경, 만남 파티에서 알게 된 여성에게 흥신소 조사 비용 50만엔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고,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의 어린이를 무차별 살해할 결심을 다시 굳혔다.[10]
2. 2. 사건 당일
2001년 6월 8일 오전 8시경, 다쿠마 마모루는 아파트 임대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불이 붙은 담배를 이불 위에 놓고 집을 나섰으나, 담배불은 곧 꺼져 화재로 이어지지 않았다.[10] 오전 9시 40분경, 다쿠마로 추정되는 남자가 은색 승용차를 몰고 빠른 속도로 주차장을 나서는 모습이 목격되었다.[11][12]다쿠마는 오전 10시 전에 칼 가게에서 식칼 1개를 7480엔에 구입하고,[9][10] 차 안에서 식칼을 비닐 봉투에 넣은 후, 내비게이션에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를 검색하여 이동했다.[10]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동문 앞에 차를 세운 다쿠마는 약 100미터 떨어진 남쪽 교사로 향해,[13] 오전 10시 10분쯤, 1층에 있는 2학년 교실 3곳에 잇따라 침입하여 범행을 저질렀다. 먼저 2학년 남반에 침입하여 아동 5명을 찔렀고, 이어서 서반에서 2명, 동반에서 2명을 찔렀다.[14] 2학년 남반 담임 교사가 테라스에 있던 아동들에게 운동장으로 도망가라고 지시하자, 다쿠마는 방향을 바꿔 1학년 남반 교실로 뛰어들었다.[13]
오전 10시 20분, 1학년 남반 아동들은 음악 수업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먼저 돌아온 남아 1명이 찔려 희생되었다. 다쿠마는 다른 아동들도 잇따라 찌르고, 교실 뒤에 있던 여아들은 울면서 복도로 도망쳤다. 부교장과 2학년 남반 담임이 다쿠마와 격투를 벌였고, 2학년 남반 담임은 칼을 잡은 손을 누르려다 얼굴을 베였다. 그러나 손을 누르자 다쿠마는 얌전해졌고, 두 사람에 의해 제압되었다. 15분에 걸친 범행 동안, 다쿠마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13]
최종적으로 아동 8명(1학년 1명, 2학년 7명)이 살해되었고, 아동 13명과 교사 2명이 부상을 입었다.[15] 다쿠마는 이케다 경찰서에 의해 현행범체포되었으나, 왼쪽 손가락 부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16] 오사카부 경찰은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다쿠마를 살인 혐의로 조사했다.[3]
다쿠마는 7월 8일부터 형사 책임 능력을 조사하기 위해 오사카 구치소에 감정 유치되어 정신 감정을 받았다.[19] 초기에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으나, 9월 6일 감정인은 "완전 책임 능력이 있었다"는 결과를 보고했다.[20]
2. 3. 사건 이후
다쿠마는 취조에서 "엘리트이고 지적인 아이들을 많이 죽이면 확실하게 사형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24]체포 당시 다쿠마는 정신 장애인인 척하는 언행을 보였다. 그러나 정신 감정 결과, "정서 결함자로 망상성 등의 성격 장애는 인정되지만, 정신 분열증은 아니며, 책임 능력을 감면할 만한 정신 장애는 없다"는 결과가 나와 사건에 대한 책임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범행 당시 제어 능력은 2, 3세 정도의 수준까지 퇴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25]
다쿠마는 체포 직후 "약을 10번 분량 먹었다. 힘들다"고 진술하여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하지만 복용한 약은 항정신병 약 세로켈, 항우울제 파킬, 수면제 에바미르 세 종류로, 10번 분량 복용해도 졸릴 뿐, 괴상한 행동을 할 일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택 수색 결과, 약 200정의 약물이 압수되었는데, 이는 다쿠마가 여러 병원에 통원하며 수면 장애·불면증을 거짓으로 호소하며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지 않고 모아두었던 것이다. 체포 후 혈액과 소변 감정 결과, 정신 안정제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수사관이 이 사실을 들이대자, "죄송합니다. 약은 복용하지 않았어요. 지어낸 이야기였습니다"라며 위증했음을 인정했다.
변호단에 따르면, 첫 공판이 다가오면서 다쿠마는 "이런 말을 하면 매스컴이 시끄러워지려나" 등과 같이 말했다. 유족들의 조서 150점을 건넸지만, "유족들에게는 도저히 들려줄 수 없는 말"을 했다고 하며, 변호단은 "공표는 삼가고 싶다"며 입을 다물었다.[26]
여름에는 변호사에게 반성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세 통 보냈지만, 변호사는 "이렇게 훌륭하게 사죄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책으로 쓰지 않겠냐는 말에는 "비싸게 팔 수 있다면 쓰겠습니다"라며 그럴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26]
또한 "이런 곳에서 헛되이 살아가는 것은 싫다", "사형당해도 쉽게 집행되지 않으면 빨리 집행하도록 소송을 제기할까" 등과 같이 말하며, 변호사도 "정상적인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26]
3. 범죄자
다쿠마 마모루는 "지금까지 산 것이 불쾌했고, 모든 게 싫어졌다. 자살해서는 성에 안 찬다. 차라리 살인을 하고 사형을 받고 싶다"라고 범행 동기를 밝혔다.[9] 그 배경에는 사채와 중고차 미지급금, 아파트 임대료 미납 등 경제적인 어려움과 중학생 시절부터 25년간 앓고 있는 우울증 등이 있었다.[9]
3. 1. 다쿠마 마모루
다쿠마 마모루는 1963년 11월 23일에 태어나 2004년 9월 14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33] 사채와 중고차 미지급금, 아파트 임대료 미납 등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세 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다.[9] 중학생 시절부터 25년간 우울증을 앓았으며,[9] 과거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약물 혼입 사건으로 면직되기도 했다.[9]그는 "지금까지 산 것이 불쾌했고, 모든 게 싫어졌다. 자살해서는 성에 안 찬다. 차라리 살인을 하고 사형을 받고 싶다"며 범행 동기를 밝혔다.[9]
체포 당시에는 정신 장애인인 척했지만,[25] 두 번의 정신 감정 결과 조현병은 아니며 책임 능력이 있다는 판단을 받았다.[25]
변호단에 따르면, 첫 공판이 다가오면서 "이런 말을 하면 매스컴이 시끄러워지려나", "(나에 대한) 방청인의 불규칙 발언은 퇴정당하는 건가요" 등의 말을 했다고 한다. 유족들의 조서 150점을 건네받았지만, "유족들에게는 도저히 들려줄 수 없는 말"을 해 변호단이 공표를 삼갔다고 한다.[26]
2003년 8월 28일, 오사카 지방 법원은 다쿠마에게 사형을 선고했다.[33] 판결 당시 다쿠마는 재판장의 말을 막고 "마지막으로 잠깐 말하게 해줘"라고 외치며 소란을 피워 퇴정당했다.[34]
4. 형사 재판과 사형 집행
2001년 12월 27일, 오사카 지방 재판소에서 가와이 마사유키 재판장 주재로 다쿠마 마모루의 첫 공판이 열렸다. 다쿠마는 기소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검찰은 다쿠마가 전처와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불특정 다수를 살해하려 했다고 지적했고, 변호인 측은 범행 당시 다쿠마의 책임 능력에 대한 판단을 재판부에 요구했다.[9] 다쿠마는 "자신의 목숨으로 갚고 싶다"고 말했지만,[26][27] 재판 과정에서 휘파람을 불거나[28] 엉뚱한 발언을 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26]
2003년 5월 22일, 검찰은 다쿠마에게 완전한 책임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사형을 구형했다.[29] 같은 해 6월 26일, 변호인은 다쿠마가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하며 무죄 또는 형량 감경을 요구했다.[30] 변호인은 다쿠마에게 반성을 촉구했지만,[32] 다쿠마는 "죽는 것에 전혀 겁먹지 않는다", "유치원이었다면 더 죽일 수 있었다" 등의 발언을 하며 사과하지 않았다.[31][32]
4. 1. 공판
요약에 따르면, 오사카 지방 재판소에서 2001년 12월 27일에 첫 공판이 열렸다. 다쿠마는 기소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검찰은 다쿠마가 전처와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인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변호인 측은 범행 당시 다쿠마의 책임 능력에 대한 판단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다쿠마는 "자신의 목숨으로 죄를 갚고 싶다"고 진술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엉뚱한 발언이나 휘파람을 부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41] 2003년 5월 22일, 검찰은 다쿠마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같은 해 6월 26일, 변호인은 다쿠마가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하며 무죄 또는 형량 감경을 요구했다. 다쿠마는 최종 의견 진술에서 사과 대신 "유치원이었다면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등의 발언을 했다.[42]4. 2. 사형 판결
다쿠마는 취조 과정에서 "엘리트이고 지적인 아이들을 많이 죽이면 확실하게 사형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24]체포 당시 다쿠마는 정신 장애인인 척하는 행동을 보였지만,[24] 두 번에 걸친 정신 감정 결과, "정서 결함자로 망상성 등의 성격 장애는 인정되지만, 정신 분열증은 아니며, 책임 능력을 감면할 만한 정신 장애는 없다"는 결과가 나와 사건에 대한 책임 능력이 인정되었다.[25]
변호인단에 따르면, 첫 공판이 다가오면서 다쿠마는 "이런 말을 하면 매스컴이 시끄러워지려나"라는 등의 말을 했다. 변호인단은 유족의 마음을 전달하여 반성하게 하려고 다쿠마에게 유족 등 피해자들의 조서 150점을 건넸지만, "유족들에게는 도저히 들려줄 수 없는 말"이었다고 하며, 변호인단도 "공표는 삼가고 싶다"며 입을 다물었다.[26]
여름에는 변호사에게 반성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세 통 보냈지만, 변호사는 "이렇게 훌륭하게 사죄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또한 이 무렵 "이런 곳에서 헛되이 살아가는 것은 싫다", "사형당해도 쉽게 집행되지 않으면 빨리 집행하도록 소송을 제기할까" 등과 같이 말하며, 변호사도 "정상적인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26]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다쿠마는 항소하지 않겠다는 의향을 보였지만, 변호인단이 오사카 고등재판소에 항소했다.[41] 그러나 다쿠마는 항소를 스스로 취하하여, 제1심 단계에서 스스로 사형을 확정시켰다.[42]
4. 3. 사형 확정부터 집행까지
다쿠마 마모루는 사형 판결을 받은 후 항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변호인단이 9월 10일 오사카 고등재판소에 항소했다.[41] 그러나 다쿠마는 같은 달 26일 항소를 스스로 취하하여 1심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42]사형 확정 약 1년 후인 2004년 9월 14일, 노자와 다이조 법무상의 사형 집행 명령에 따라 오사카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다쿠마(당시 성명은 요시오카 마모루)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다.[8]
5. 사건의 영향 및 반응
이 사건은 학교, 사회, 그리고 정신 질환자 범죄에 대한 인식 등 다양한 측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학교 측의 대응과 변화사건 당시 학교 측의 미흡한 대응은 피해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구급차에 교사가 동승하지 않아 아동의 이송 병원을 보호자에게 제때 알리지 못했고, 사망 아동의 보호자는 학교에서 자녀를 만나지 못하고 직접 찾아 헤매야 했다.[43] 또한, 학교 측의 사후 대처와 교사들의 부주의한 언행도 유족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후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는 사건을 교훈 삼아 학교 안전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여 2014년 일본 초등학교 최초로 국제적인 학교 안전 인증인 '인터내셔널 세이프 스쿨(ISS)'을 취득했다.[44] 또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대책으로 교사를 임시 이전하고, 교복을 폐지하는 등 학생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현재는 불심자 대응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이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학교 안전 대책 강화사건 이후, 초등학교, 유치원, 보육원 등 교육 시설에 경찰관 입회소 설치, 외부인 출입 규제, 경비 강화 등 안전 대책 강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45] 방범 부저를 휴대하는 아동이 증가하고, 보육사나 교직원은 방범 및 심폐 소생술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게 되었다.[45]
이 사건은 일본의 교육 시설이 '지역에 개방된 시설'에서 안전을 중시하는 '폐쇄된 시설'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지역 커뮤니티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운동장 등이 아이들의 놀이터로 활용되었지만, 사건 이후 감시 카메라 설치, 외부인 출입 금지 등 보안을 강화하는 경향이 강해졌다.[46] 일부 학교에서는 경비원을 상시 배치하거나, 학부모와 지역 자원봉사자가 등하굣길을 지키는 활동을 하기도 한다.[46]
하지만 사건 발생 20주년이 되는 2021년 조사 결과, 등하굣길 등 교문 개방 시 교직원 등의 감시 여부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치단체가 많아 사건의 퇴색이 지적되고 있다.[47] 또한, 2023년 발생한 아이치 현립 니시오히가시 고등학교 사건에서는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의 교훈이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48]
정신 질환자 범죄에 대한 사회적 논의이 사건은 심신 상실로 무죄 또는 불기소 처분된 사람들에 대한 처우 방식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이전에는 정신 장애인에 대한 사법 기관의 개입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사건 이후 『심신 상실 상태 등에서 중대한 타해 행위를 한 자의 의료 및 관찰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49][50] 이를 통해 보호관찰소에 사회복귀조정관(정신건강사회복지사)이 배치되어 의료 관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49][50]
정신 장애인 가족회는 사건 이후 정신 장애인에 대한 보도 피해 실태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사 항목 | 비율 |
---|---|
자신의 병이나 장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 환자가 있었다. | 73.9% |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거나 외출을 꺼리게 된 환자가 있었다. | 63.0% |
재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증상이 불안정해진 환자가 있었다. | 57.6% |
잠을 못 자는 등 생활 리듬이 깨진 환자가 있었다. | 50.0% |
일부 환자들은 자살, 입원, 재발 등의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전국 정신 장애인 가족회 연합회(전가련)는 언론에 정신 질환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보도를 자제하고, 사건의 배경과 정신과 치료의 현실을 제대로 보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51][52]
피해자 지원사건 이후 어린이, 교직원, 보호자 중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그때 그렇게 했다면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또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존자 죄책감에 시달리는 교원도 있었다.[49][50]
한국에 미친 영향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학교 안전 및 정신 질환자 범죄 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정부와 교육 당국은 이 사건을 참고하여 학교 안전 강화 대책을 수립하고, 정신 질환자 범죄 예방을 위한 법률 및 제도 개선을 추진했다.[62]
5. 1. 학교 측의 대응
혼란 속에서 교사가 구급차에 동승하지 않고 아동을 따라가지 않아, 보호자에게 아동의 이송 병원 연락이 늦어졌다.[43] 사건 직후, 한 사망 아동의 보호자는 이른 시기에 학교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안에서 부상당한 아동을 만나는 것도 동행하는 것도 할 수 없었고, 결국 자력으로 찾아다닌 병원에서 사망한 자녀와 대면하게 되었다. 또한 사건 후, 학교로부터의 설명이나 조문이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교사의 부주의한 표현, 발언 및 행동이 유족의 마음을 크게 상처 입혔다.그 후,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에서는 사건을 교훈 삼아 학교 안전 노력을 거듭해 온 것이 평가되어, 2014년 (헤이세이 26년)에 일본 초등학교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적인 학교 안전 인증 '인터내셔널 세이프 스쿨(ISS)'을 취득했다.[44]
또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대책으로, 교사를 임시 장소로 이전하고(2004년까지), 교복도 "사건을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즉시 폐지되어, 잠정적으로 사복으로 통학하게 한 후, 완전히 다른 디자인의 것을 제정하였다.
현재는 전임해 온 교직원이나 교육 실습생도 참가하는 불심자 대응 훈련이 정기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일반에도 공개되고 있다. 그 영상은 인터넷상에서도 열람할 수 있다.
5. 2. 학교 안전 대책 강화
이 사건을 계기로 초등학교, 유치원, 보육원 등 아동·학생·유아가 빈번하게 이용하는 교육 관련 시설에 경찰관 입회소 간판(플레이트) 또는 스티커가 부착되거나, 학교 시설 내 외부인 출입을 엄격히 규제하고, 경비 체제를 강화하는 등의 방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한, 방범 부저를 휴대하는 아동도 증가했으며, 보육사나 교직원이 방범 및 심폐 소생술을 반드시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45].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유치원, 보육원 및 학교가 이전까지의 "지역에 개방된 시설"에서 안전 대책을 중시하는 "폐쇄된 시설"로 방침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지역 커뮤니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운동장 등은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거나, 원칙적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등 보안 중시 경향이 강해졌다. 일부에서는 항상 경비원을 배치하거나, 집단 등교 시에 학부모나 지역 자원봉사자에 의한 지켜보기도 이루어지게 되었다[46].하지만 마이니치 신문이 사건 발생 2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일본 전국의 현청 소재지 및 정령 지정 도시, 도쿄 23구에 앙케이트 조사를 실시한 결과, 등하굣길 등 교문이 열려 있을 때 각 학교의 교직원 등이 교문에 서서 감시를 하고 있는지 여부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치단체가 전체의 6할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져, 사건의 퇴색이 지적되고 있다[47].
또한, 2023년 4월 11일 아이치 현립 니시오히가시 고등학교에서 교내에 침입한 인물이 여학생 앞에서 하반신을 노출하여 여학생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해당 학교는 사건 이후에도 2023년 12월 현재까지도 교문을 개방한 채로 유지하고 있어,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의 교훈이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48].
5. 3. 정신질환자 범죄에 대한 사회적 논의
이 사건으로 인해 심신 상실로 무죄 또는 불기소 처분된 사람들에 대한 처우 방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이전까지는 정신 장애인에 대한 사법 기관의 개입에 대해 일부 단체가 보안처분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심신 상실 상태 등에서 중대한 타해 행위를 한 자의 의료 및 관찰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보호관찰소에 사회복귀조정관(정신건강사회복지사)이 배치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의료 관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49][50]정신 장애인 중 조현병이나 기분 장애 등을 앓는 환자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정신 장애인 가족회의 전국 연합 조직인 재단법인전국정신장애인 가족회 연합회(전가련)는 정신과 의사를 통해 사건 이후 정신 장애인에 대한 보도 피해 실태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사 항목 | 비율 |
---|---|
자신의 병이나 장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 환자가 있었다. | 73.9% |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거나 외출을 꺼리게 된 환자가 있었다. | 63.0% |
재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증상이 불안정해진 환자가 있었다. | 57.6% |
잠을 못 자는 등 생활 리듬이 깨진 환자가 있었다. | 50.0% |
정신과 의사들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사례를 보고했다.
- 자살한 환자가 있었다 (1.1%, 2명)
- 입원·재입원한 환자가 있었다 (16.3%, 24명)
- 재발한 환자가 있었다 (13.0%, 21명)
전국 정신 장애인 가족회 연합회(전가련)는 보도 기관에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아동 살상 사건의 보도에 대해"(2001년 6월 8일자)[51]와 "초등학교 아동 살상 사건 보도에 대해"(2001년 6월 18일자)[52]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송했다.
전가련은 첫 번째 문서에서 "이 사건으로 체포된 남자에게는 정신 병원 통원 이력이 있었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만, ... '정신 질환'이 본 사건의 원인이며, 동기라고 이해되어 버립니다. 그 결과, '정신 병자 (정신 장애인)는 모두 위험'이라는 획일적인 이미지(=편견)를 조장해 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라며, 쉽게 병력을 보도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망상이나 환청 등의 증상은 약물 치료로 컨트롤하기 쉽다고 합니다."라고 정신과 치료의 현실을 설명하며,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복약은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 등, 사건의 배경을 제대로 취재하여, 향후의 교훈이 될 만한 보도를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두 번째 문서에서는 "안이한 보도에 의해, '정신 장애인은 위험하다'라는 사회의 편견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 이것은 '보도 피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라며 보도 피해를 호소했다. 전가련은 언론에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요청했다.
# 사건 보도 시, 경찰 발표라 하더라도 사건 배경, 병의 상태 등이 밝혀지지 않은 단계에서 특정 병명이나 통원·입원 이력을 보도하지 말 것.
# 법적 책임 능력 문제를 정신 장애로 바꿔 보도하지 말 것.
# 이 사건과 촉법 정신 장애자의 처우 문제를 쉽게 연결시키지 말 것.
5. 4. 피해자 지원
어린이, 교직원, 보호자 중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그때 그렇게 했다면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또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존자 죄책감에 시달리는 교원도 있었다.[49][50]정신 장애인 중 조현병이나 기분 장애 등을 앓는 환자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정신 장애인 가족회의 과거 전국 연합 조직인 재단법인전국정신장애인 가족회 연합회(전가련)는 정신과 의사를 통해 사건 후 정신 장애인에 대한 보도 피해의 양상 변화를 조사했다.
조사 내용 | 비율 |
---|---|
자신의 병이나 장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 환자가 있었다. | 73.9% |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거나 외출을 꺼리게 된 환자가 있었다. | 63.0% |
재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증상이 불안정해진 환자가 있었다. | 57.6% |
잠을 못 자는 등 생활 리듬이 깨진 환자가 있었다. | 50.0% |
심각한 사례로 정신과 의사로부터 제기된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 자살한 환자가 있었다 (1.1%, 2명).
- 입원·재입원한 환자가 있었다 (16.3%, 24명).
- 재발한 환자가 있었다 (13.0%, 21명).
전국 정신 장애인 가족회 연합회(전가련)는 보도 기관에 대해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아동 살상 사건의 보도에 대해"(2001년 6월 8일자)[51]와 "초등학교 아동 살상 사건 보도에 대해"(2001년 6월 18일자)를 발송했다.[52]
전가련은 안이한 병력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망상이나 환청 등의 증상은 약물 치료로 컨트롤하기 쉽다고 합니다."라고 정신과 치료의 실정을 설명하고,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복약은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 등, 사건의 배경을 제대로 취재하여, 향후의 교훈이 될 만한 보도를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또한 "안이한 보도에 의해, '정신 장애인은 위험하다'라는 사회의 편견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중략) 이것은 '보도 피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라고 보도에 의해 받은 보도 피해를 호소하며, 다음 세 가지를 요청했다.
# 사건의 보도를 할 경우, 경찰 발표라고 하더라도, 사건의 배경, 병의 상태 등이 밝혀지지 않은 단계에서, 특정 병명이나 통원 이력·입원 이력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점.
# 법적 책임 능력의 문제를 정신 장애로 바꿔 보도하지 말 것.
# 이 사건과 촉법 정신 장애자의 처우 문제를 안이하게 연결시키지 말 것.
5. 5. 한국에 미친 영향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학교 안전 및 정신 질환자 범죄 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정부와 교육 당국은 이 사건을 참고하여 학교 안전 강화 대책을 수립하고, 정신 질환자 범죄 예방을 위한 법률 및 제도 개선을 추진했다.[62]6. 기타
- 사건 발생 2일 후인 2001년 6월 10일, 요코하마 국제 종합 경기장(현: 닛산 스타디움)에서 열린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 일본 - 프랑스전의 킥오프 직전에 양팀 선수가 사건 희생자를 위해 1분간 묵념을 했다. 이때 "Pray for eight victims (8명의 고귀한 생명에 묵념을 바칩니다)"라는 자막이 전 세계에 방송되었다.[54] 또한, 축구 선수인 리오 퍼디난드도 2001년에 방일했을 때 사건을 알고, 해당 학교에 헌화를 했다. (Rio Ferdinand|리오 퍼디난드영어 항목 참조).
- 희생된 소녀 중 한 명이 우타다 히카루의 팬이었기 때문에, 우타다가 사건의 희생자·피해자에게 바치는 싱글곡으로 『FINAL DISTANCE』를 발매했다.
-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교내에는 2008년 가을에 철완 아톰의 동상이 세워졌다.
- 당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스에 소속되어 있던 프로 야구 선수 나카무라 노리히로는 이케다 초등학교가 자신의 모교인 시부야 고등학교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같은 해 9월에 이케다 초등학교를 위문한 외에, 어린이 500명을 긴테쓰의 홈 구장인 오사카 돔에서 개최된 경기 (대 니혼햄 파이터즈전)에 초대했다. 이러한 활동이 평가되어 나카무라는 같은 해 12월에 제3회 골든 스피릿 상을 수상했다.[55]
- 2004년에 희생된 8명의 어린이 추도를 위해, 대표로 마츠모토 레이지의 팬으로 『은하철도 999』에서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꿈이었던 여아의 이름이, 마츠모토 원작의 OVA 작품 『대YAMATO0호』의 히로인 이름으로 채택되었다.[56]
- 『산케이 신문』이 운동장에 앉아 우는 어린이들의 사진을 게재했고, 이 사진은 2001년도 신문 협회상을 수상했다.
- 하시모토 토루는 정계 입문 이전의 변호사였던 2004년에 "(타쿠마를) 신속하게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이례적인 기고를 주간지에 발표했다. 그 후, 타쿠마로부터 변호인을 통해 조기 사형 실현에 대한 원조를 의뢰하는 편지가 도착했지만, 하시모토는 타쿠마가 유족에게 사죄한다는 조건을 걸고 승낙하겠다는 뜻을 회신했다. 그러나 회신에는 인생에 대한 원망과 고뇌는 쓰여 있었지만, 유족에 대한 사죄나 반성의 코멘트는 쓰여 있지 않았다. 이 편지는 TV 프로그램 『타카진의 거기까지 말해 위원회』에서 낭독했지만, 결국 협력하지 않았다.
- 이 사건은 해외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이를 계기로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 유족과 본 사건의 유족과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후 양자는 "학교의 안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정기적으로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57]
- 2012년 5월 공개 영화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사카이타 슌감독)는, 타쿠마와 기타큐슈 감금 살인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범인의 남자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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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年(平成16年)、犠牲になった8人の児童追悼のために、代表して[[松本零士]]作品ファンで『[[銀河鉄道999]]』で宇宙を旅をすることが夢だった女児の名前が松本原作の[[オリジナルビデオアニメーション|OVA]]作品『[[大YAMATO零号]]』の[[ヒロイン]]名に採用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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