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성
1. 개요
오치성은 일제강점기 황해도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 후 5·16 군사 정변에 참여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 후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을 4선 역임했으며, 내무부 장관과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1971년 내무장관 재직 중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했고, 같은 해 해임안이 가결되어 사퇴했다. 이후 1980년 신군부 등장으로 정계를 떠나 연구 활동을 했으며, 2017년 사망했다.
| 이름 | 오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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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어 표기 | 吳致成 |
| 별명 | 호(號)는 산은(汕隱), 호담(岵潭) |
| 출생 | 1926년 2월 7일 |
| 사망 | 2017년 12월 9일 (92세) |
| 출생지 | 황해도 신천군 |
| 사망지 | 인천광역시 |
| 본관 | 해주(海州) |
| 종교 | 유교(성리학) |
| 근무 |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국가재건최고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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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무 기간 | 1949년 ~ 1963년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
| 지휘 |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 과장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분과위원장 |
| 정당 |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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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이력 | 제33대 내무부 장관 前 국회의원 신민주공화당 부총재 겸 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 겸 최고위원 |
| 웹사이트 | 대한민국헌정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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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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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8기 출신으로,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이 주동한 5·16 쿠테타에 참여했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한 8인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1971년 8월 내무장관 재직 중에는 각 경찰에 공문을 보내 보건 당국과 협조하여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강구하고 교양을 강화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위안부의 인권을 침해하는 조치로, 진보 진영에서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다.
1971년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돼 사퇴했다.
일제강점기 황해도 신천군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신천군) 출신으로, 5·16 군사 정변 이후 육군 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하였다. 정계 입문 후 제6대, 제7대, 제8대, 제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무임소 장관(1970년), 제33대 내무부 장관 (1971년 6월 3일 ~ 10월 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위원장·운영위원장·당무위원, 국회 내무위원장,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1969년)·경기도 당 위원장, 신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역임했다.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정계를 떠나,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2017년 12월 9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2.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오치성한국어은 일제강점기 황해도 신천군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신천군) 출신이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했다. 육군보병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오리건 주립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5·16 군사정변에 핵심 인물로 참여했으며,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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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정치 경력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한 후, 육군 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제7대, 제8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 4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70년 정무담당 무임소 장관에 임명되었고, 1971년 6월 3일에는 제33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내무부 장관 재직 중에는 각 경찰에 공문을 보내 보건 당국과 협조하여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강구하고 교양을 강화하도록 명령했다.
1971년 6월, 대통령 박정희는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오치성을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하여 3선 개헌 이후 과도한 권력을 가진 공화당 4인방 (金成坤한국어, 白南檍한국어, 吉在号한국어, 김진만)을 견제하려 했다. 김종필에 따르면, 오치성의 내무부 장관 임명 직후, 당시 경찰국장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활동비를 대주는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에게 먼저 보고했기 때문에, 오치성은 강력하게 개입하여 4인방의 수하 경찰을 대폭 교체했다.
같은 해 9월 30일, 야당인 신민당은 오치성 내무부 장관,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申稙秀한국어 법무부 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제출했다. 원래라면 국회의원 204명 중, 공화당의 113명이 일제히 부결표를 던지면 통과될 수 없었지만, 4인방은 오치성을 눈엣가시처럼 적대했기 때문에, 결국 10월 2일 찬반 투표에서 오치성의 해임안만 찬성 107표, 반대 90표로 가결되었다. 이른바 10·2 항명 파동 이후 박정희가 격노하여 중앙정보부에 주동자 수사를 지시했다. 그 결과,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고,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계 은퇴를 강요받았다. 이 사건으로 1971년 10월 7일 내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1969년), 경기도 당 위원장, 신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역임했다.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정계를 떠났다.
2.3. 정계 은퇴 이후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정계를 떠나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 헌정회 회원, 헌정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71년 내무장관 재직 시절, 각 경찰에 공문을 보내 보건 당국과 협조하여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강구하고 교양을 강화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위안부의 인권을 침해하는 조치로, 진보 진영에서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다.)
2017년 12월 9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3. 학력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8기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 단국대학교 법학과 학사
* 대한민국 육군대학 졸업
* 미국 오리건 주립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
3.1. 명예 박사 학위
단국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4. 경력
5. 수상 경력
* 중화민국 1등 수교훈장
* 금성화랑무공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