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이 도시히로
1. 개요
니카이 도시히로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와카야마현 출신이다. 1975년 와카야마현 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983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자유민주당, 신생당, 자유당, 보수당 등을 거치며 여러 차례 당적을 변경했다. 그는 운수대신, 경제산업대신, 자민당 간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친중파로 알려져 일중우호의원연맹 회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김충선 기념비를 세우는 등 우호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으나,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2024년 정치자금 스캔들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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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니카이 도시히로 |
|---|---|
| 원어 이름 | 二階 俊博 |
| 로마자 표기 | Nikai Toshihiro |
| 출생일 | 1939년 2월 17일 |
| 출생지 | 일본 와카야마현 고보시 |
| 국적 | 일본 |
| 정당 | 자유민주당 (시스이카이) |
| 학력 | 주오 대학 법학부 졸업 |
| 웹사이트 | 니카이 도시히로 공식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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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당 간사장 |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
|---|---|
| 임기 시작 | 2016년 8월 4일 |
| 임기 종료 | 2021년 10월 1일 |
| 이전 | 다니가키 사다카즈 |
| 이후 | 아마리 아키라 |
| 경제산업대신 |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
| 임기 시작 | 2008년 8월 2일 |
| 임기 종료 | 2009년 9월 16일 |
| 이전 | 아마리 아키라 |
| 이후 | 나오시마 마사유키 |
| 경제산업대신 | 고이즈미 준이치로 |
| 임기 시작 | 2005년 10월 31일 |
| 임기 종료 | 2006년 9월 26일 |
| 이전 | 나카가와 쇼이치 |
| 이후 | 아마리 아키라 |
| 운수대신 | 오부치 게이조 |
| 임기 시작 | 1999년 10월 5일 |
| 임기 종료 | 2000년 7월 4일 |
| 이전 | 가와사키 지로 |
| 이후 | 모리타 하지메 |
| 중의원 의원 | 와카야마현 |
| 선거구 | 2구 (1983–1996) 3구 (1996–2024) |
| 임기 시작 | 1983년 12월 18일 |
| 임기 종료 | 2024년 10월 9일 |
| 이전 직업 | 엔도 사부로 중의원 의원 비서 |
|---|---|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다나카파 → 다케시타파 → 하타파) 신생당 신진당 자유당 보수당 보수신당 자유민주당 (니카이G → 니카이파 → 무파벌) |
| 칭호 및 훈장 | 법학사 (주오대학교, 1961년) |
| 배우자 | 니카이 레이코 (2018년 사별) |
| 친족 (정치인) | 아버지 니카이 슌타로 (전 와카야마현의회 의원) |
| 자유민주당 간사장 |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
|---|---|
| 임기 시작 | 2016년 8월 3일 |
| 임기 종료 | 2021년 10월 1일 |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
| 임기 시작 | 2007년 8월 27일 |
| 임기 종료 | 2008년 8월 1일 |
| 임기 시작 | 2014년 9월 3일 |
| 임기 종료 | 2016년 8월 3일 |
|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 아베 신조 |
| 임기 시작 | 2006년 9월 25일 |
| 임기 종료 | 2007년 8월 27일 |
| 보수신당 간사장 | 구마가이 히로시 |
| 임기 시작 | 2002년 12월 |
| 임기 종료 | 2003년 11월 |
| 보수당 간사장 | 노다 다케시 |
| 임기 시작 | 2001년 9월 |
| 임기 종료 | 2002년 12월 |
| 보수당 국회대책위원장 | 오기 치카게 노다 다케시 |
| 임기 시작 | 2000년 7월 |
| 임기 종료 | 2002년 12월 |
| 자유당 국회대책위원장 | 오자와 이치로 |
| 임기 시작 | 1998년 1월 |
| 임기 종료 | 1999년 10월 |
| 신진당 선거대책국장 | 가이후 도시키 오자와 이치로 |
| 임기 시작 | 1995년 9월 |
| 임기 종료 | 1997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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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산업대신 -
오부치 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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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산업대신 -
나카가와 쇼이치
나카가와 쇼이치는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으로, 농림수산대신과 경제산업대신 등 여러 장관직을 역임하고 아소 다로 내각에서 재무대신을 지냈으나 2009년 총선에서 낙선 후 사망했으며, 정치적 견해와 여성관 및 역사 인식, 음주 의혹 등으로 논란이 있었다. -
자유민주당 간사장 -
오히라 마사요시
오히라 마사요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6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외무대신 시절 한일 및 중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총리 재임 중 환태평양 연대 구상을 제시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총선 직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
자유민주당 간사장 -
미키 다케오
미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록히드 사건 조사와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정치적 이상과 현실 간 괴리, 강직한 성격 등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
일본의 운수대신 -
미키 다케오
미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록히드 사건 조사와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정치적 이상과 현실 간 괴리, 강직한 성격 등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
일본의 운수대신 -
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18년 군마현 출생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행정 개혁, 국철 민영화 등을 추진하다가 2019년 사망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39년 2월 17일 와카야마현 고보시에서 와카야마 현의회 의원 니카이 슌타로(二階俊太郎)와 의사 니카이 기쿠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일이 바빴기 때문에, 니카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놀았던 기억이 없다. 어머니 기쿠에는 의사 후루쿠보 료스케(古久保良輔)의 딸로,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여성 의사였다.
이나하라(稲原) 소학교에 입학하여, 종전 후 고보 소학교로 전학했다. 고보 중학교, 와카야마현립 히다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7년, 중앙대학교 법학부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신문부 고문 교사의 조언과 아버지의 영향으로 도쿄의 중앙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 시절 카바 미치코(樺美智子)가 안보투쟁 데모에서 압사당한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
2.2. 정치 입문과 초기 활동
1904년생 엔도 사부로(遠藤三郎, 1958~1959 건설대신 역임)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1975년 와카야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두 차례 현의회 의원을 지냈다.
1983년 제37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구(舊) 와카야마현 제2구에 자유민주당(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다케시타 노보루의 파벌에 속했지만, 1993년에 탈당하여 신생당에 합류했다.
1990년 제39회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직후, 제2차 가이후 내각의 운수정무차관에 취임했다. 1992년 다케시타파 분열 당시에는 오자와 이치로에 동조하여 개혁포럼 21(하타파)에 참가했다. 1993년 미야자와 내각(개조)의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찬성하여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오자와 등과 함께 신생당 결성에 참여했다.
2.3. 자민당 탈당 이후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신생당(新生党) 창당에 참여했으며, 총선 이후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에서 다시 운수정무차관이 되었다. 호소카와 내각에서 정무차관 시절 "그림자 운수대신"이라고 불렸다.
하타 내각이 퇴진한 뒤 신진당(新進党) 창당에 참여했으며, 1996년 10월 20일,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새로 생긴 와카야마현 제3구에 출마하여 자유민주당 현역 의원 노다 미노루를 꺾고 5선에 성공했다.
1998년 신진당 분당 이후 오자와 이치로의 측근으로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자유당 국회대책위원장으로서 자유민주당과의 연립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오자와 이치로 등 연립 이탈파와 결별하고, 2000년 4월 노다 다케시와 오기 지카게 등 연립 잔류파와 함께 보수당을 창당했다. 자민당-공명당-보수당 연립정권에 참여, 제1차 모리 내각에서 운수대신에 유임됐다.
2000년 7월 운수대신에서 물러난 뒤, 보수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고, 2001년 보수당 간사장이 되었다.
2002년 보수당을 계승한 보수신당에서도 간사장을 맡았으나, 보수신당은 2003년 11월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 대표 구마가이 히로시가 낙선하는 등 참패하고 자민당에 흡수되었다.
총리 관저
2.3.1. 오자와 이치로의 측근
1993년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에 찬성하고 자유민주당을 탈당했다.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신생당(新生党) 창당에 참여했으며, 총선 이후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에서 다시 운수정무차관이 되었다. 호소카와 내각에서 정무차관 시절 "그림자 운수대신"이라고 불렸다.
하타 내각이 퇴진한 뒤 신진당(新進党) 창당에 참여했으며, 1996년 10월 20일,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새로 생긴 와카야마현 제3구에 출마하여 자유민주당 현역 의원 노다 미노루를 꺾고 5선에 성공했다.
1998년 신진당 분당 이후 오자와 이치로의 측근으로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자유당 국회대책위원장으로서 자유민주당과의 연립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2.3.2. 보수당 활동
오자와 이치로 등 연립 이탈파와 결별하고, 2000년 4월 노다 다케시와 오기 지카게 등 연립 잔류파와 함께 보수당을 창당했다. 자민당-공명당-보수당 연립정권에 참여, 제1차 모리 내각에서 운수대신에 유임됐다.
2000년 7월 운수대신에서 물러난 뒤, 보수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고, 2001년 보수당 간사장이 되었다.
2002년 보수당을 계승한 보수신당에서도 간사장을 맡았으나, 보수신당은 2003년 11월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 대표 구마가이 히로시가 낙선하는 등 참패하고 자민당에 흡수되었다.
총리 관저
2.4. 자유민주당 복당 이후
2007년 8월 자민당 집행부의 요직인 총무회장에 올랐다. 2007년 9월 자민당 간사장 아소 다로가 총재 선거에 출마하면서 선거기간 동안 간사장 업무를 대행했다. 같은 해 9월 24일 후쿠다 야스오가 총재에 취임한 이후에도 총무회장에 유임되었다.
2008년 8월 총무회장을 사퇴하고 후쿠다 야스오 개조 내각에 경제산업대신으로 입각했다. 같은 해 9월 24일 출범한 아소 내각에서도 경제산업대신으로 재임명되었다. 니카이는 중국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8년 6월 쓰촨성(四川省) 지진 이후 구호 물품을 전달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다.
2016년 8월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에 의해 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 LDP)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2020년 9월 아베의 사임 이후, 새로운 당 대표인 스가 요시히데는 니카이를 이 직책에 유임시켰다.
2024년 3월 25일, 니카이는 2023~2024년 일본 정치자금 스캔들 여파로 그의 시스이카이 파벌이 해체됨에 따라 차기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니카이는 또한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시스이카이가 모금 파티 티켓 판매 수익 3,526만 엔(약 23만 3,000달러)을 신고하지 않은 데 대해 정치적 책임을 졌다. 따라서 그는 2024년 10월 중의원 해산 시 의원직에서 은퇴했다.
2.4.1. 자민당 총무국장
2004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자민당 총무국장에 임명되었다. 2005년 5월에는 내각총리대신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의향에 따라 자민당 총무국장을 겸임하면서 중의원우정민영화법안을 심의하는 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우정국회에서는 우정민영화법안의 중의원 통과에 기여했고, 그 후 우정해산에 따른 제44회 중의원의원총선거에서는 선거 책임자인 총무국장으로서 후보자 옹립 등에 분주히 활동하여 자민당 압승의 공로자가 되었다. 이 대승리를 계기로 총무국장의 지위가 재검토되어 지위 향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로 인해 비례대표 의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물결(니카이 그룹) 의원 수가 증가하여 니카이가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2.4.2. 경제산업대신
2005년 9월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8선에 성공하고, 2005년 10월 출범한 제3차 고이즈미 개조내각에 경제산업대신으로 입각했다. 2006년 4월 7일, “니카이 이니셔티브”(동아시아 EPA, 동아시아판 OECD, 아시아 인재 기금)를 제창하였다. 같은 해 8월 아시아 경제장관 회의에서 동아시아 포괄적 경제 파트너십 등 아시아 지역의 경제협력협정(EPA)를 제안하는 "니카이 이니셔티브"를 주창했다.
2006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자민당 총재 임기 만료에 따라 아베 신조가 총재에 취임하였고, 민주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에 대한 대책으로 자민당 국회 대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4.3. 자민당 선거대책국장
2009년 8월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9선에 성공했지만, 자신의 파벌 내 중의원들이 모두 재선에 실패하면서 파벌을 해체하고, 지수회(당시 이부키 분메이의 파벌)에 합류했다. 같은 해 10월 자민당의 초대 선거대책국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니시마쓰 건설 사건에 연루되어 정책 비서가 정치자금규제법 위반으로 약식 기소되자 선거대책국장에서 물러났다.
2.4.4. 지수회 회장
2012년 12월, 이부키 분메이가 중의원 의장에 취임하며 지수회 회장직을 내놓았고, 니카이가 후임 회장이 되면서 지수회는 니카이의 파벌이 되었다.
2013년 중의원 예산 위원장에 취임,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의 예산안을 사상 최단 기간에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4년 9월 제2차 아베 신조 개조 내각 출범한 뒤, 다시 자민당 총무회장이 되었다. 당3역은 파벌을 탈퇴하는 관행에 따라 지수회 회장직을 내놓았지만, 회장은 공석으로 두고 가와무라 다케오가 회장직을 대행했다.
2.4.5. 자민당 간사장
2016년 8월 3일 제3차 아베 신조 제2차 개조내각이 출범하면서 다니가키 사다카즈의 후임으로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니카이의 나이는 77세 5개월로, 역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중 최고령 취임이었다. 2017년 8월 3일 제3차 아베 제3차 개조내각 발족과 동시에 이루어진 당직 인사에서도 간사장에 유임되었다.
2019년 8월 3일, 간사장으로서 연속 재직 일수가 1096일에 달하여 마에오 시게사부로를 제치고 역대 최장이 되었다.
2020년 9월 8일, 간사장으로서 통산 재직 일수가 1,498일이 되면서 다나카 가쿠에이(1,497일)를 넘어 자민당 역사상 최장수 간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아베 신조가 건강상의 이유로 총리대신과 자민당 총재직 사퇴 의사를 밝힌 뒤, 가장 먼저 스가 요시히데 지지를 표명했고, 같은 해 9월 16일 스가 내각이 들어선 이후에도 간사장으로 유임되었다.
2021년 8월 30일 스가와 회담하여 자신의 간사장 교체를 용인하는 의사를 전달했고, 스가는 간사장 교체를 검토할 의향을 보였다. 그러나 스가가 총재직 사퇴를 표명함에 따라, 2021년 10월 1일 키시다 후미오의 총재 취임에 따른 새로운 당직 인사에 따라, 통산 재직 일수 1885일로 자민당 간사장을 사퇴했다.
3. 정책 및 정치 활동
3.1. 한국 관련 활동
2000년 6월 국가정보원 원장 박지원이 북한에 불법 송금을 하고 수감되었을 때, 편지와 속옷을 보내 위로했다. 2003년 2월 11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박지원과 회담하여, 재일 외국인에 대한 참정권에 대해 “실현을 향해 계속 노력한다”고 말했다.
과거 한국에 대한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한국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1등급)을 수여받았다. 한일의원연맹 상임간사도 역임했다.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구금 문제(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명예훼손 기소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일본)가 신문사의 판단이나 한국 사법부가 어떻다는 등의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고노담화 재검토에 대해서는 “가볍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전 중의원 의장 고노 요헤이의 국회 소환에도 반대했다.
2015년 2월, 1400명의 방문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하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적극적인 노력"을 약속했다.
한편, “세계 쓰나미(津波) 재해 예방의 날” 제정에 반대한 한국을 향해 “일본이 제안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대하는 특수한 국민성이 있다”며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2017년 6월 10일 목포에서 열린 한국 국회의원들과의 회합에서 인사말을 통해 한일 관계 개선을 방해하는 움직임이 양국에 존재한다는 인식을 보인 뒤, “소수의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척결해야 한다. 한국에도 소수일지 모르지만, 발견하면 척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7년 한국관광공사가 평창 관광 홍보를 위해 개최한 행사에서는 약 250명의 일본인 초청 손님 중 최고위급으로 자리했다. 자민당 간사장이자 전국여행업협회 회장으로서 인사말에서 “(한국인) 여러분은 일본인들이 평창올림픽을 위해 한국에 많이 와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일본인에게) ‘사죄하라’는 말을 그만둔다면 갑니다. 일본인들은 최근 한국 여행을 두려워합니다. 돈을 들여 시간을 내서 (한국에) 가는데 ‘사죄하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사죄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준다면, 저도 평창 방문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2019년 7월 한일 무역 분쟁으로 한일 관계가 역사상 최악이라고 평가받는 와중에 한일 의원 연맹 회장인 강창일이 방일했을 때 니카이 도시히로는 면담을 취소하고 "구걸 외교를 온 것이 아니다"라며 강창일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며, A급 전범의 위패를 분사하거나 별도의 국립추도시설을 설립하는 등의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4년 10월 22일 도쿄에서 강연을 하며, 정부 각료의 야스쿠니 참배로 인한 한일, 중일 갈등에 대해 "해결책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 한국과 손을 잡고 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2003년 2월 11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박지원과 회담하고 자신이 대한민국의 국립묘지인 현충원을 참배한 것을 소개한 뒤,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새로운 추모 시설에 대해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했다.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4월 22일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2010년 자신의 지역구인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의 기슈 동조궁(紀州東照宮) 신사에 임진왜란 항왜 장수 김충선(金忠善, 일본명 사야카)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는 사업에 참여하고 비문도 직접 작성했다. 이 사업에 참여한 동기에 대해 니카이는 "증오를 우호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일본이 반성하고 속죄할 수 있고 진정한 일한(한일) 양국의 신뢰를 위해서 노력할 수 있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설명했다. 와카야마현와카야마시의 기슈 도쇼궁에 사야카 현창비를 건립하였다. 사야카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였으나, 문록·경장의 역 당시 조선 측에 투항하여 일본군과 싸웠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3.1.1. 야스쿠니 신사 문제
야스쿠니 신사 문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며, A급 전범의 위패를 분사하거나 별도의 국립추도시설을 설립하는 등의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4년 10월 22일 도쿄에서 강연을 하며, 정부 각료의 야스쿠니 참배로 인한 한일, 중일 갈등에 대해 "해결책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 한국과 손을 잡고 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2003년 2월 11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박지원과 회담하고 자신이 대한민국의 국립묘지인 현충원을 참배한 것을 소개한 뒤,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새로운 추모 시설에 대해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했다.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4월 22일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3.1.2. 김충선 기념비 건립
2010년 자신의 지역구인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의 기슈 동조궁(紀州東照宮) 신사에 임진왜란 항왜 장수 김충선(金忠善, 일본명 사야카)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는 사업에 참여하고 비문도 직접 작성했다. 이 사업에 참여한 동기에 대해 니카이는 "증오를 우호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일본이 반성하고 속죄할 수 있고 진정한 일한(한일) 양국의 신뢰를 위해서 노력할 수 있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설명했다. 와카야마현와카야마시의 기슈 도쇼궁에 사야카 현창비를 건립하였다. 사야카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였으나, 문록·경장의 역 당시 조선 측에 투항하여 일본군과 싸웠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3.2. 기타 정책
니카이 도시히로는 친중파(親中派) 의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2023년부터 일중우호의원연맹(日中友好議員連盟) 회장을 맡고 있다. 자민당 내에서 중국 관련 이권(利権)을 담당하며, 과거 베이징 올림픽을 지원하는 의원 모임에 소속되는 등 오랫동안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문화 교류를 통한 여객 왕래 및 기업 활동 활성화를 추구하며,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외교를 전개해 왔다. 2002년에는 약 1만 3천 명, 2015년에는 약 3천 명의 방문단을 이끌고 베이징 인민대회당을 방문했다. 이러한 대규모 방문단에 대해 니카이는 "국민 상호 간의 교류를 전개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온라인상에서 매중(媚中)파, 조공 외교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중국과 이야기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며 일축했다.
2020년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보고서에서 니카이 도시히로를 오랜 친중파로 지목하고, 아베 신조 당시 총리에게 중국에 대한 온건한 태도를 설득해 왔다고 지적했다. 2000년에는 중국에 고속철도 기술 제공 의사를 밝혔으며, 2014년에는 최첨단 항공기 및 고속철도 기술 제공 의사를 표명했다. 동중국해 가스전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 정부의 강경 대응을 비판하고, 경제산업대신 재임 시절 시추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일중우호의원연맹 결성을 계획하고, 중화인민공화국 대사와 일중 우호 협력을 논의했다. 중국인민해방군 교향악단의 일본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일본 보아오회(日本ボアオ会)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2017년에는 시진핑이 제창한 일대일로 정상포럼에 참석하여 일본의 협력 의사를 밝혔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2019년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서는 재정 건전성과 투명성을 조건으로 일본의 협력을 언급하며, 국토강인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2017년 칭화대학교로부터 명예교수 칭호를 받았다.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과 관련하여 시진핑 국빈 방일 중지 요구를 수정하도록 했다. 2021년에는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에 축전을 보냈다.
대한민국과는 2003년 대통령 비서실장 박지원과 회담하여 재일 외국인 참정권 실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베트남과도 친선 관계를 맺고 있으며, 러시아 방문 시에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에게 참다랑어를 제공하여 회담 분위기를 전환시키기도 했다.
자민당 내 대표적인 적극적 재정론자로, 재정 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을 주장한다. 소비세 인상 연기 및 담배세 인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기초적 재정수지 흑자화에 반대하며, 공공사업비 증대를 옹호한다.
운수족·도로족 의원으로, 지역구 고속도로 건설 등 인프라 정비에 주력한다. 국토강인화기본법 제정을 주도했으며, 지역구인 와카야마 3구에 고속도로("니카이 도로")를 건설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 발생 시 자위대 출동 지연에 대해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에게 질문하고, 이토이가와시 대규모 화재에는 피해자 생활 재건 지원법 적용을 주도했다.
핵대피소 설치 필요성을 주장하며, 2017년에는 지하 핵대피소 건설 검토를 지시했다.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부락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관련 법률 제정에 기여했다. 상업 포경 추진파로, 국제포경위원회(IWC) 탈퇴 및 상업 포경 재개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른 중의원 의석수 조정에 대해 "정부 방침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자전거도로 정비에도 힘쓰고 있다.
4. 논란
4.1. 니시마츠 건설 사건
2008년 12월 말, 중견 건설회사인 서일본건설(西松建設)로부터 해당 회사 OB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단체("신정치문제연구회", "미래산업연구회")를 통해 다액의 정치자금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의혹과 관련하여 서일본건설 관계자와 민주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의 공설 제1 비서가 정치자금규제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니카이 도시히로에게도 유사한 행위를 한 혐의가 드러나자, 도쿄 지검 특수부가 니카이 도시히로 관련 정치단체를 수사할 방침을 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대해 니카이 도시히로는 "조사받을 이유가 없다", "위법성이 없다"며 반발했다. 그러나 2009년 6월 검찰심사회에서 전 서일본건설 사장이 기소 적격, 니카이 도시히로의 정책 비서가 불기소 부당으로 판단됨에 따라, 전 서일본건설 사장이 니카이 도시히로 루트에서도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정책 비서의 경우 다시 불기소되었지만, 서일본건설의 다른 경로의 자금 제공 문제와 관련하여 2009년 12월 허위 기재로 약식기소되어 벌금 100만 엔의 약식 명령이 내려졌다.
4.2. 정치자금 스캔들
2024년, 니카이 도시히로는 정치자금 파티 수입과 관련된 문제로 비서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도쿄 간이 재판소는 비서에게 벌금 100만 엔과 공민권 정지 3년의 약식 명령을 내렸다. 니카이 도시히로 본인은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 사건으로 니카이가 이끌던 자유민주당 내 파벌인 니카이파는 해산되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니카이 도시히로가 간사장 시절 당으로부터 받은 약 50억 엔의 정책활동비 사용처에 대한 설명을 거부하여 논란이 되었다. 입헌민주당의 이사카 노부히코 의원은 이를 '탈세 천국'이라고 비판하며, 정책활동비 사용처 확인 및 조사를 요구했다.
또한, 니카이 도시히로가 대표를 맡고 있는 정치단체가 3년간 3,472만 엔 상당의 도서를 구입한 사실이 제헌민주당 후지오카 타카오 의원에 의해 제기되었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이에 대한 설명을 거부했다. 니카이 도시히로 사무소는 도서 구입 목적에 대해 "선거구 외 행정, 의회 관계자들에게 배포하여 정책 홍보에 힘썼다"고 설명했다.
니카이 도시히로는 도로 특정 재원을 지지하는 도로운송경영연구회로부터 헌금을 받고 있으며, 일본도로건설업협회 회원사로부터도 헌금을 받은 사실이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또한, 담합 사건 등으로 문제를 일으킨 기업들로부터 기부를 받은 사실도 밝혀졌다. 2020년에는 Go To 캠페인 수용 단체로부터 정치 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5. 발언
令和元年 동일본 태풍(태풍 19호)에 대한 자민당 피해 대책 간부회의에서 “여러 말들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체로 잘 수습되었다”고 발언하여 비판을 받았다. 치쿠마가와, 나츠이가와, 다마가와 제방 붕괴 및 범람으로 많은 사상자, 실종자, 이재민, 단수·정전 피해자가 발생한 상황에서의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발언을 취소할 의향이 없었으나 여야를 막론하고 비판이 거세져 사실상 발언을 취소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 확산으로 긴급사태 선언이 발령되고,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 8할 줄일 것을 요청했을 때, 니카이 도시히로는 "(접촉 8할 감소는) 할 수 없다", "부탁하는 수준이다. 국민들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입헌민주당 부대표 렌호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본심일까요. 정부 여당의 요직, 자민당 간사장", "국민들은 집에서 자숙하고 있는데. '할 수 없다'고 하기 전에 보상을"이라고 지적했다.
도쿄 올림픽 자원봉사자들의 잇따른 사퇴에 대해 “관계자들은 순간적으로 협력할 수 없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되면 생각도 바뀔 것이다”, “꼭 그만두고 싶다면, 새로운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겠다”라고 발언하여 올림픽 자원봉사자들을 경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시모토 세이코 올림픽 담당 국무대신(五輪相)과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財務相)은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야마시타 야스히로 일본올림픽위원회(日本オリンピック委員会) 회장은 “순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라며 강한 위기감과 불쾌감을 표명했다.
河井夫妻(카와이 부부)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카와이 가쓰유키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것에 대해, "이것은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당으로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아 확실히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발언했다. "타산지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트위터에서는 "남의 일처럼 말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했음에도, “반대 의견이 있다고 해서 국장을 취소하는 것은 아니다. 국장은 당연하다. 하지 않았다면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발언했다. 또한, 국장에 불참한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는 “불참한 사람은 후에 오랫동안 후회하게 될 것이다.”, “불참으로 존재감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세상에 그다지 현명하지 않다는 인상만 줄 것이다. 선거에서 만회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와카야마현 지사 선거 공고 직전에 퍼진 사망설에 대해 "그런 것을 흘린 자가 있다면 죽여 버리지 않으면 참을 수 없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TBS NEWS (CS방송)의 「국회 토크·프런트라인」 녹화에서 그대로 방송되었다.
6. 역대 선거 결과
| 선거 | 나이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선거 결과 |
|---|---|---|---|---|---|
| 1975년 통일지방선거 | 와카야마현 | 자유민주당 | 당선 | ||
| 1979년 통일지방선거 | 와카야마현 | 자유민주당 | 당선 | ||
| 1983년 총선 | 44 | 와카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53,611 | 당선 |
| 1986년 총선 | 47 | 와카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58,722 | 당선 |
| 1990년 총선 | 51 | 와카야마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57,663 | 당선 |
| 1993년 총선 | 54 | 와카야마현 제2구 | 신생당 | 104,600 | 당선 |
| 1996년 총선 | 57 | 와카야마현 제3구 | 신진당 | 115,681 | 당선 |
| 2000년 총선 | 61 | 와카야마현 제3구 | 보수당 | 138,527 | 당선 |
| 2003년 총선 | 64 | 와카야마현 제3구 | 보수신당 | 148,274 | 당선 |
| 2005년 총선 | 66 | 와카야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145,735 | 당선 |
| 2009년 총선 | 70 | 와카야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117,237 | 당선 |
| 2012년 총선 | 73 | 와카야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112,916 | 당선 |
| 2014년 총선 | 75 | 와카야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108,257 | 당선 |
| 2017년 총선 | 78 | 와카야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109,488 | 당선 |
| 2021년 총선 | 82 | 와카야마현 제3구 | 자유민주당 | 102,834 | 당선 |
니카이 도시히로는 1975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와카야마현 의회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으며, 1979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재선되었다. 이후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와카야마현 제2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중앙 정치에 입문했다.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와카야마현 제2구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신생당 후보로 와카야마현 제2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신진당 후보로 와카야마현 제3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보수당 후보로,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보수신당 후보로 와카야마현 제3구에 출마하여 각각 당선되었다.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부터는 다시 자유민주당 후보로 와카야마현 제3구에 출마하여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21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까지 연이어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