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준 (낙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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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준은 고구려 미천왕의 낙랑 공격 당시, 요동의 모용외에게 귀순할 것을 장통에게 종용하여 낙랑군을 교치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전한 시대에 한반도에 설치된 낙랑군이 서진 말 영가의 난으로 중원과 연락이 끊어지자, 장통 등과 함께 모용외에게 귀순했다. 모용외는 낙랑군을 교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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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준 (낙랑) | |
|---|---|
| 왕준 (王遵) | |
| 시대 | 전연 |
| 작위 | 낭야내사(琅邪內史) |
| 봉호 | 향후(鄕侯) |
| 관직 | 삭방태수(朔方太守) 낙랑태수(樂浪太守) |
| 생애 | |
| 활동 시기 | 모용외 시대 |
2. 역사
전한 시대 한반도에 설치된 낙랑군은 후한 말 공손도 세력의 지배를 거쳐 조위 시대를 지나 서진 시대까지 존속하였다.[2] 서진 말 영가의 난으로 중원과의 관계가 단절된 후, 고구려의 압박 속에서 요동군의 장통과 낙랑의 왕준 등은 주민들을 이끌고 선비족 모용부의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 이후 모용외는 이들을 받아들여 교치 방식으로 낙랑군을 새로 설치하였고[1], 한반도에 남아있던 기존의 낙랑군은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었다.[2]
2. 1. 전한 시대
전한 시대에 한반도에 설치된 식민지인 낙랑군이 있었다.2. 2. 후한 ~ 서진 시대
전한 시대에 한반도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은 후한 말, 공손도가 요동에서 자립하여 평주목을 자칭하면서 그의 세력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조위 시대에는 평주가 유주에 잠시 병합되기도 했으나, 서진의 무제 함녕 2년(276년)에 요동을 중심으로 평주가 다시 설치되면서, 낙랑군은 창려군, 요동국, 현도군, 대방군과 함께 평주 관할로 편입되었다.[2]서진 말기에 영가의 난이 발생하여 중원과의 교통이 두절되자, 한반도 북부의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은 혼란에 빠졌다. 당시 고구려의 미천왕(재위 300년~331년)이 낙랑 지역을 공격해오자, 왕준은 요동군 출신으로 낙랑군과 대방군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장통에게 낙랑 주민 1천여 가구를 이끌고 선비족 모용부의 모용외에게 귀순할 것을 권유했다.
장통은 왕준의 제안을 받아들여 무리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모용외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평주 관할 지역 내에 새로이 낙랑군을 설치하여 이주민들을 안치시키는 교치(僑置)를 시행하였다(본거지를 떠난 사람들을 새로운 토지에 정착시키고, 과거에 거주하던 지역 명칭을 계승하여 사용하는 것을 "교치", 설치한 행정 구역을 "교주", "교군", "교현"이라고 한다[1]). 모용외는 장통을 새로 설치된 낙랑군의 태수로 삼고, 왕준은 참군사(參軍事)로 임명하여 막료로 삼았다. 이후 한반도에 남아있던 기존의 낙랑군은 결국 고구려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완전히 소멸하였다.[2]
2. 3. 모용외 시대
고구려 미천왕(300년~331년)이 낙랑을 공격하자[2], 왕준은 당시 낙랑과 대방군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장통에게 낙랑 주민 1,000여 가구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할 것을 권유했다. 장통이 이를 받아들이자, 모용외는 이들을 수용하여 새로이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임명했으며, 왕준은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이러한 귀순의 배경에는 서진 말 영가의 난으로 인한 혼란이 있었다. 중원과의 교통이 두절되면서 한반도 북부의 낙랑군과 대방군에 잔존하던 한인 세력은 고립되었다. 이들은 요동군 출신의 장통과 낙랑 출신 왕준 등의 주도로 선비족 모용부의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 모용외는 이들 귀순 세력을 받아들여 평주(平州) 관할 지역 내에 정착시키고, 옛 지명을 따라 "낙랑군"이라는 행정 구역을 새로 설치하는 교치(僑置)를 시행했다[1]. 교치란 본래 거주지를 떠난 유민들을 새로운 곳에 정착시키면서 기존의 행정 구역 명칭을 계승하여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1].
한편, 한반도에 있던 본래의 낙랑군은 이후 고구려 미천왕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결국 붕괴되었다[2].
3. 인물
서진 말기 낙랑군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낙랑군이 위기에 처하자, 장통 등 낙랑 유민들과 함께 요동 지역의 모용외에게 귀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 1. 장통
고구려의 미천왕(300년~331년)이 낙랑군을 공격해오자, 왕준은 당시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장통에게 모용외에게 귀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왕준은 장통에게 낙랑의 1,000여 가구를 이끌고 함께 투항하자고 제안했다.장통은 왕준의 제안을 받아들여 휘하의 낙랑 유민들과 함께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2] 서진 말기의 혼란, 특히 영가의 난으로 인해 중원과의 교통이 두절된 상황에서,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이 거세지자 요동 지역의 신흥 강자였던 선비족 모용부에게 의탁한 것으로 보인다.[2] 모용외는 이들을 받아들여 새로이 낙랑군을 설치(교치)하고,[1]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았다. 동시에 왕준은 참군사(參軍事)로 임명되었다.[2] 이후 한반도에 남아있던 기존의 낙랑군은 결국 고구려의 공격으로 소멸하였다.[2]
3. 2. 왕준
고구려 미천왕(300년~331년)이 낙랑군을 공격하자, 당시 낙랑과 대방군 지역에서 활동하던 장통에게 낙랑 주민 1,000여 가구를 이끌고 선비 모용부의 모용외에게 귀순할 것을 권유하였다. 장통은 왕준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귀순하였고, 모용외는 이들을 받아들여 새로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통은 낙랑태수로 임명되었고, 왕준은 참군사(參軍事) 직책을 받았다.[2]서진 말기에 발생한 영가의 난으로 중원과의 교통이 끊기자, 한반도 북부 낙랑군에 남아있던 한인(漢人) 세력은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이들은 장통과 왕준의 주도로 당시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던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 모용외는 이들 유민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원래 살던 곳의 행정 구역 명칭을 따와 새로운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하는 이른바 교치(僑置) 정책을 시행하였다.[1](본거지를 떠난 사람들을 새로운 토지에 정착시키고, 과거에 거주하던 지역 명칭을 계승하여 사용하는 것을 "교치", 설치한 행정 구역을 "교주", "교군", "교현"이라고 한다[1]). 한편, 한반도에 남아있던 본래의 낙랑군은 이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하였다.[2]
4. 출전
참조
[1]
뉴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https://h21.hani.co.[...]
2017-08-08
[2]
간행물
近世朝鮮時代の古朝鮮認識 (特集 東アジア史の中での韓國・朝鮮史)
https://doi.org/10.1[...]
東洋史研究会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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