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요한 밥티스트 메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1928년 독일에서 태어나 2019년 사망한 독일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포로 경험을 겪었으며, 뮌스터 대학교에서 기초 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카를 라너의 제자였으나 실천 신학으로 전환하며 정치 신학 학파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해방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메츠는 "위험한 기억" 개념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으며, 기억, 연대, 서사를 신학의 핵심 주제로 다루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0세기 로마 가톨릭 신학자 -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제265대 교황으로 재임하며, 가톨릭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보수적인 신념과 스캔들 대처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 20세기 로마 가톨릭 신학자 - 에디트 슈타인
    에디트 슈타인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이자 가톨릭 성녀로, 현상학 및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 연구에 기여했으며, 나치의 박해로 아우슈비츠에서 순교, 가톨릭 개종 후 가르멜 수녀회 수녀로 활동하며 기독교적 존재론을 연구했고, 유럽의 수호성인 중 한 명이다.
  • 정치신학자 - 카를 슈미트
    카를 슈미트는 20세기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독일 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로, 나치 정권에 협력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주권, 독재, 전쟁 등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을 담은 저서를 통해 현대 정치 이론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정치신학자 - 위르겐 몰트만
    위르겐 몰트만은 1926년 독일에서 태어나 2024년 사망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후 희망, 십자가, 삼위일체 등에 관한 저술을 통해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 2019년 사망 - 김만제
    김만제는 1934년생으로 미주리대학교 경제학 박사 출신이며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재무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 주요 직책을 거쳐 한국 경제 정책 수립에 기여한 경제학자이자 관료, 기업인, 정치인으로, 삼성생명과 포항제철 회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하며 은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청조근정훈장 등을 수훈했다.
  • 2019년 사망 - 이기백 (1931년)
    대한민국의 육군 대장 출신 군인이자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정치인인 이기백은 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 당시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생존, 평화의 댐 건설을 주도했으나, 금강산댐 과장 보도 논란과 5·18 민주화운동 관련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활동으로 비판받았으며, 군 주요 직책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거쳐 예편 후 보수 정당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한 밥티스트 메츠
요한 밥티스트 메츠
존칭존경하는
직업가톨릭 사제
신학자
출생일1928년 8월 5일
출생지아우어바흐인더오버팔츠, 바이에른, 독일
사망일2019년 12월 2일
사망지뮌스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독일
소속뮌스터 대학교

2. 생애와 경력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1928년 8월 5일 아우어바흐 인 데어 오버팔츠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5] 십 대 시절인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독일군으로 징집되었다.[5] 전쟁이 끝나기 6개월 전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 미국 메릴랜드버지니아의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전쟁 후 독일로 돌아왔다.

1948년부터 밤베르크 대학교, 뮌헨,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2] 1951년에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에 관한 논문을 완성했다. 1954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9]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사목 활동을 했다.[8] 이후 카를 라너의 지도로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에 대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았다.[2] 전쟁에서의 경험은 나치즘에 대한 직접적인 대면을 바탕으로 정치 신학을 함께 연구하게 될 독일 칼뱅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경험과 유사점을 가진다.[1][3] 1962년부터 1963년까지 독일 연구 협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8]

1963년부터 1993년까지 뮌스터 대학교에서 기초 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홀로코스트 신학)을 발전시켰다.[5] 그는 에른스트 블로흐, 그리고 막스 호르크하이머테오도어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 및 정치 사상을 신학에 도입하려 했으나, 이는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의 신학적 개념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9]

메츠는 빌레펠트 대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며, 기독교마르크스주의 간의 대화를 위한 국제 파울루스-게젤샤프트(Paulus-Gesellschaft)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인 1968년부터 1973년까지 교황청 비서실의 '비신자(non-believers)' 관련 자문 위원을 맡았다.[8] 또한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독일 교구의 뷔르츠부르크 시노드 자문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 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 문서 "우리의 희망(Unsere Hoffnung|운제레 호프눙deu)"의 주요 저자였다.[5][2]

메츠는 2019년 12월 2일 사망할 때까지 뮌스터에서 거주했다.[5][2][6]

3. 신학 사상

카를 라너의 제자였던[5] 메츠는 스승의 초월 신학에서 벗어나 실천에 중점을 둔 신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5] 그의 사상은 특히 정치 신학 분야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4][9]

메츠 신학의 핵심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관심과 민감성이다.[5][9]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경험 앞에서 신학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재고찰하며,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홀로코스트 신학)을 발전시켰다.[5]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기억(특히 "위험한 기억"), 연대, 서사를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5] 메츠는 발터 벤야민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같은 진보적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으며,[5] 현실에 안주하는 부르주아 기독교를 비판하고 복음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강조했다.[5]

그의 주요 저서로는 영어로 번역된 《떠오르는 교회》(The Emergent Church영어), 《역사와 사회 속의 신앙》(Faith in History and Society영어), 《영의 가난》(Poverty of Spirit영어), 《희망에 맞선 희망》(Hope Against Hope영어) 등이 있다.[3] 그의 논문들은 《하느님을 향한 열정: 기독교의 신비-정치적 차원》(A Passion for God: The Mystical-Political Dimension of Christianity영어)과 《사랑의 전략: 요한 밥티스트 메츠의 정치 신학》(Love's Strategy: The Political Theology of Johann Baptist Metz영어)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3]

3. 1. 정치 신학

카를 라너의 제자였던[5] 메츠는 스승의 초월 신학에서 벗어나 실천에 중점을 둔 신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해방 신학에 큰 영향을 준 정치 신학 학파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5]

메츠의 신학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출발하며, 그의 신학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기억, 연대, 그리고 서사였다.[5] 특히 메츠의 작업에서 근본이 되는 개념은 "위험한 기억"이다. 이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기억'' (ἀνάμνησις과 관련이 있다. 메츠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험한 기억", "자유의 위험한 기억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의 위험한 기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 개념을 설명했다.

메츠(오른쪽)와 그의 스승 카를 라너. 메츠는 라너의 영향을 받았으나,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신학으로 나아갔다.


"위험한 기억" 개념은 독일 출신 기독교 신학자로서 홀로코스트라는 파괴적인 경험 앞에서 기독교 신학 전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려는 메츠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스승 라너와의 결별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주는데, 메츠는 라너의 초월적 방법론이 역사성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실제 역사와는 충분히 마주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메츠는 발터 벤야민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같은 진보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했다. 그는 부르주아 기독교를 강하게 비판하며, 기독교 복음이 부르주아적 가치와 뒤섞이면서 본래의 신뢰성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 《역사와 사회 속의 신앙》은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설명하는 변증학, 즉 근본 신학을 제시한다.[5]

메츠 신학의 또 다른 핵심 동기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 하느님의 연민,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서의 연민("Leidempfindlichkeit für andere, die Mitleidenschaft Gottes, auch die Leidenschaft für Gottde")이다.[9] 그는 뮌스터 대학교 교수 시절(1963-1993)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홀로코스트 신학)을 발전시켰으며,[5] 에른스트 블로흐,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적, 정치적 사상을 신학에 도입했다. 이는 당시 일부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그의 개념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9] 영어로 번역된 그의 주요 저서로는 《떠오르는 교회》(The Emergent Church영어), 《역사와 사회 속의 신앙》(Faith in History and Society영어), 《영의 가난》(Poverty of Spirit영어), 《희망에 맞선 희망》(Hope Against Hope영어) 등이 있다.[3] 수집된 논문들은 매튜 애슐리(Matthew Ashley)가 번역한 《하느님을 향한 열정: 기독교의 신비-정치적 차원》(A Passion for God: The Mystical-Political Dimension of Christianity영어)과 존 K. 다우니(John K. Downey)가 편집한 《사랑의 전략: 요한 밥티스트 메츠의 정치 신학》(Love's Strategy: The Political Theology of Johann Baptist Metz영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3]

3. 2. 위험한 기억

메츠의 작업에서 근본적인 개념은 위험한 기억이다. 이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기억 (anamnesis), 즉 성찬 신학의 핵심 용어와 관련이 있다. 메츠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험한 기억", "자유의 위험한 기억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의 위험한 기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 개념을 언급했다.[5]

이 개념이 형성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독일 출신 기독교 신학자로서 홀로코스트라는 파괴적인 경험 앞에서 기독교 신학 전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메츠의 결심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의 스승 카를 라너와의 결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라너의 초월적 방법론은 역사성을 중요하게 다루지만, 실제 역사적 사건과는 충분히 연결되지 않는다는 비판적 성찰이 있었다. 메츠는 진보적인 마르크스주의, 특히 발터 벤야민프랑크푸르트 학파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는 부르주아 기독교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기독교 복음이 부르주아적 가치와 뒤섞이면서 본래의 의미와 신뢰성을 잃었다고 보았다. 그의 저서 《역사와 사회 속의 신앙》은 이러한 관점에서 변증학, 즉 근본 신학을 새롭게 전개하려는 시도이다.[5]

메츠 신학의 핵심 동기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 하느님의 연민,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열정(Leidempfindlichkeit für andere, die Mitleidenschaft Gottes, auch die Leidenschaft für Gottde)으로서의 연민이다.[9]

3. 3. 연대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1928년 8월 5일 아우어바흐 인 데어 오버팔츠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4년, 십 대의 나이로 독일군에 징집되었다.[5] 전쟁이 끝나기 6개월 전에는 미군에 포로로 잡혀 미국 메릴랜드버지니아의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전쟁 후 독일로 돌아왔다.

1948년부터 밤베르크 대학교, 뮌헨,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2] 1951년에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논문을 완성했다. 1954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9]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사목했다.[8] 이후 카를 라너의 지도를 받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 1962년부터 1963년까지는 독일 연구 협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8]

1963년부터 1993년까지 뮌스터 대학교의 기초 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홀로코스트 신학)을 발전시켰다.[5] 이 시기 그의 전쟁 경험은 나치즘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정치 신학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칼뱅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과의 교류로 이어졌다.[1][3] 1968년에는 에른스트 블로흐프랑크푸르트 학파(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철학적, 정치적 사상을 신학에 도입하려 시도했는데, 이는 일부 신학계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신학적 개념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9] 또한 빌레펠트 대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며, 기독교마르크스주의 간의 대화를 모색하는 국제 Paulus-Gesellschaft|파울루스-게젤샤프트de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8년부터 1973년까지 교황청 비서실 산하 'Secretariat for Non-Believers|비신자 사무국영어'의 자문 위원을 역임했다.[8]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독일 교구들의 공동 시노드인 뷔르츠부르크 시노드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독일 가톨릭 교회에 적용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문서 "Unsere Hoffnung|우리의 희망de"의 주요 저자로 참여했다.[5][2]

메츠는 2019년 12월 2일 뮌스터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거주했다.[5][2][6]

4. 비판과 평가

카를 라너의 제자였던[5] 메츠는 실천에 뿌리를 둔 신학으로 전환하면서 라너의 초월 신학과 결별했다. 메츠는 해방 신학에 강한 영향을 미친 정치 신학 학파의 중심 인물로 평가받는다.[4]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5] 그의 사상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신학의 핵심 주제는 기억, 연대, 서사였다.[5]

메츠 작업의 근본적인 개념은 "위험한 기억"인데, 이는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기억'' (anamnesis), 곧 성찬 신학의 핵심 용어과 관련이 있다. 메츠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험한 기억", "자유의 위험한 기억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의 위험한 기억" 등을 다양하게 언급했다. 이 개념은 독일 출신 기독교 신학자로서 홀로코스트의 파괴적인 경험에 비추어 기독교 신학 전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그의 결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의 스승 라너와의 결별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데, 라너의 초월적 방법론이 역사성을 언급하지만 실제 역사와는 충분히 마주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메츠는 발터 벤야민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자들과 같은 진보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대화했다. 그는 부르주아 기독교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제기했으며, 기독교 복음이 부르주아 종교와 얽히면서 신뢰성을 잃었다고 믿었다. 그의 저서 《역사와 사회 속의 신앙》은 이러한 관점에서 변증학, 즉 근본 신학을 전개한다.[5]

그의 신학의 핵심 동기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 하느님의 연민,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열정(Leidempfindlichkeit für andere, die Mitleidenschaft Gottes, auch die Leidenschaft für Gottde)으로서의 연민이었다.[9]

5. 저서


  • ''Theology of the World'' (1969, 한국어 번역: 《세계의 신학》). 뉴욕: Seabury. ISBN 978-0-8164-2568-6
  • ''Faith in History and Society: Toward a Practical Fundamental Theology'' (1980, 한국어 번역: 《역사와 사회 속의 신앙: 실천적 근본 신학을 향하여》). 뉴욕: Seabury. ISBN 978-0-8164-0426-1. 이 책에서 메츠는 부르주아적 기독교를 비판하고 변증학, 즉 근본 신학을 전개한다.[5]
  • ''Poverty in Spirit'' (1998, 한국어 번역: 《영의 빈곤》). 뉴욕: Paulist Press. ISBN 978-0-8091-3799-2


이 외에도 영어로 번역된 저서로는 《떠오르는 교회》(The Emergent Church), 《희망에 맞선 희망》(Hope Against Hope) 등이 있다.[3] 그의 수집된 논문들은 매튜 애슐리(Matthew Ashley)가 번역한 《하느님을 향한 열정: 기독교의 신비-정치적 차원》(A Passion for God: The Mystical-Political Dimension of Christianity)과 존 K. 다우니(John K. Downey)가 편집한 《사랑의 전략: 요한 밥티스트 메츠의 정치 신학》(Love's Strategy: The Political Theology of Johann Baptist Metz)에서 찾아볼 수 있다.[3]

참조

[1] 서적 Modern Christian thought: the twentieth century Fortress Press
[2] 웹사이트 Gottespassion und Compassion. Zum Tod von Johann Baptist Metz https://www.feinschw[...] 2019-12-03
[3] 서적 A passion for God: the mystical-political dimension of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Paulist Press
[4] 뉴스 Jesus war Jude / Die Erneuerung des Christentums aus dem Geist Jerusalems. Zum 80. Geburtstag des faszinierenden Theologen Johann Baptist Metz. https://www.zeit.de/[...] 2008-08-05
[5] 서적 Nachruf auf Johann Baptist Metz / Der Mitleidende https://www.deutschl[...] Deutschlandfunk 2019-12-03
[6] 웹사이트 Begründer der "Neuen Politischen Theologie" wurde 91 / Theologe Johann Baptist Metz gestorben https://www.katholis[...] 2019-12-03
[7] 웹사이트 Prof. DDr. Dr. h.c. mult. Johann Baptist Metz https://www.uni-muen[...]
[8] 웹사이트 Johann Baptist Metz https://www.munzinge[...]
[9] 뉴스 Neue Politische TheologieTheologe Johann Baptist Metz gestorben https://www.stern.de[...] 2019-12-03
[10] 서적 A passion for God: the mystical-political dimension of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Paulist Press 2011-03-01
[11] 서적 Modern Christian thought: the twentieth century Fortress Pres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