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프랑크푸르트 학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2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 설립된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사상가들을 지칭하며,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수행했다. 나치 집권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비판 이론을 발전시켰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으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부정하는 '부정의 변증법'을 핵심으로, 이데올로기 비판, 도구적 이성 비판, 문화 산업 비판 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했다. 1세대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등을 비롯하여 2, 3세대에 걸쳐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했으며, 68혁명과 신좌파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비판 이론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패배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 Ilf
    ILF(Institute for Law and Finance)는 괴테 대학교 부속 기관으로, 국제 금융법 석사 과정을 운영하며, 국제적인 학생 구성과 실무 중심의 커리큘럼을 특징으로 한다.
  • 신마르크스주의 - 세계체제론
    세계체제론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대표적인 이론으로, 국가가 아닌 세계를 분석 단위로 삼아 국가의 흥망성쇠 등을 설명하려 하며 핵심, 반주변, 주변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 경제 체제를 분석하는 접근 방식이지만, 경제에 치중하고 문화를 간과한다는 비판도 있다.
  • 신마르크스주의 - 이항 대립
    이항 대립은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에서 기본적인 사고 요소로 간주되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개념이나 범주로 이루어진 체계이며, 사회 권력 구조 정당화에 기여한다는 비판과 함께 해체주의적 분석 대상이 되고, 문학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 바이마르 문화 - 바우하우스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한 바우하우스는 건축을 중심으로 예술 분야를 통합하고 기능주의와 기하학적 형태를 강조하는 디자인 양식을 추구한 예술 학교로, 나치 정권의 탄압으로 폐교되었으나 그 이념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 바이마르 문화 - 독일 표현주의
    독일 표현주의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영화를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왜곡된 시각과 과장된 연기를 통해 인간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고 독일 사회의 불안을 반영했으나 나치 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후 할리우드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설립 시기1923년
창립 장소독일 프랑크푸르트
영향 받은 학문 분야마르크스주의, 헤겔주의, 정신분석학, 사회학, 철학, 비판이론
주요 관심사사회 이론
비판 철학
사회적 불평등
문화 산업
권위주의
이성 비판
사회적 변화
주요 인물
창립자카를 그륀베르크
핵심 인물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발터 벤야민
위르겐 하버마스
프리드리히 폴로크
오스카어 네게트
관련 기관
주요 기관사회연구소
철학적 배경
주요 사상비판 이론
부정 변증법
문화 산업 비판
도구적 이성 비판
주요 영향
영향 받은 학자페터 슬로터다이크
악셀 호네트
낸시 프레이저
라디카 데사이
기타
관련 주제사회학
철학
정치 이론
문화 연구
미디어 연구

2. 역사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초기 마르크스주의 학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일부 추종자들이 마르크스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자본주의가 예상 밖으로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마르크스 이론으로는 이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51] 이에 이들은 자본주의와 소련 사회주의 모두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며, 새로운 사회 발전 가능성을 모색했다.[51]

마르크스의 접근법과 유사하게,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사회 변화의 요건을 탐구했다.[52] 칸트의 비판 철학과 독일 관념론(특히 헤겔 철학)을 통해 변증법적 모순이 현실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보았으며, 실증주의, 유물론, 결정론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판 이론적 특징이 발전했다.

1960년대부터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53][54]과 언어적 상호주관성, 그리고 그가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라 칭한 연구를 통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발전했다.[55]

이 학파의 사상은 1968년 68 혁명으로 알려진, 서방 세계와 일본 대학가를 강타한 학생 운동의 지적 배경이 되었다. 허버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카를 비트포겔, 레오 뢰벤탈, 프리드리히 폴로크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용어는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와 관련된 사상가들을 지칭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사상적 입장이나 기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들 중 자신을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카를 그륀베르크가 1923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와 연계하여 설립한 이 연구소는, 독일 주요 대학교와 연계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성향 연구소였다.[50]

1930년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연구소 소장을 맡으면서,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허버트 마르쿠제 등 뛰어난 이론가들을 영입했다.[50]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긴밀하게 연관된 것은 아니었기에 "학파"라는 명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뢰벤탈, 폴로크로 한정하기도 한다.[52]

1918년1919년 사이 독일 등 서유럽에서 나타난 노동자 계급 혁명의 실패와 나치즘의 등장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마르크스 사상의 어떤 부분이 이러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지 찾고자 했다.

나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회 연구소 설립자들은 연구소를 국외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56] 1933년 아돌프 히틀러 집권 이후, 연구소는 제네바를 거쳐 1935년 뉴욕컬럼비아 대학교와 연계하여 이전했다. 이 시기부터 중요한 연구 결과들이 나오며 미국과 영국 학계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1950년대 초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폴로크는 서독에 정착했고, 마르쿠제 등은 미국에 남았다. 연구소는 1953년에야 프랑크푸르트에 다시 설립되었다.[57]

소련식 사회주의, 스탈린주의와 거리를 두고 새로운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를 모색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신마르크스주의의 원류가 되었고, 1960년대 신좌파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가 정권을 잡자 많은 회원들이 망명했고, 활동 중심은 미국으로 옮겨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미국 정부 기관에서 활동하며 독일과 일본의 전시 정보 분석, 전후 처리와 점령 정책 수립, 헌법 제정에 관여했다.

전후에는 연구소 관계자 대다수가 서독으로 귀국했고, 막스 호르크하이머테오도어 아도르노가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사회연구소를 재건하여 다시 독일이 활동 중심지가 되었지만, 일부는 미국에 남아 저술 및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사회연구소 설립 90년이 넘은 현재에도 이 학파는 활동하고 있으며, 독일을 중심으로 3세대~4세대 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2. 1. 사회연구소 설립과 초기 활동 (1923-1933)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용어는 1923년 카를 그륀베르크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와 연계하여 설립한 사회 연구소에서 일했거나 관련이 있었던 사상가를 가리킨다.[50] 이는 최초로 주요 독일 대학교와 연계된 마르크스주의 편향적 연구소였다.[50]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위치한 사회연구소


1922년 여름, 독일 튀링겐주(1920년-1952년) 일메나우에서 제1회 마르크스주의 연구 집회가 개최되었다. 주최자는 요한 볼프강 괴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대학교의 펠릭스 바일이었으며, 이 회의의 주요 목적은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흐름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일주일간 진행된 회의에서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주제들이 논의되었다.[46]

이 연구회에는 루카치 죄르지, 카를 코르슈, 후쿠모토 카즈오, 리하르트 졸게, 클라라 체트킨, 프리드리히 폴락, 카를 비트포겔 등이 참가했다.

펠릭스 바일은 제2회 마르크스주의 연구 집회를 계획했지만, 곧 독립적인 연구 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껴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설립한다. 펠릭스 바일의 박사 학위 논문은 사회주의 실현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펠릭스 바일은 교육부와 협상하여 사회연구소 소장으로 대학교수를 임명함으로써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대학 기관으로 공식적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7]

1930년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소장이 되면서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허버트 마르쿠제와 같은 지식인들을 영입했다.[6]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정치적 혼란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 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학자들은 특히 실패한 1918-19년 독일 혁명과 나치즘의 부상에 영향을 받았다.

반지성적인 나치즘의 위협이 정치적 폭력으로 증가함에 따라, 설립자들은 사회연구소를 나치 독일 밖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8]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직후, 연구소는 먼저 프랑크푸르트에서 제네바로, 그리고 1935년에는 뉴욕시로 이전하여 컬럼비아 대학교에 합류했다. 1953년 사회연구소는 서독 프랑크푸르트에 공식적으로 재설립되었다.[9]

2. 2. 나치 집권과 망명 시기 (1933-1945)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흥하고 1918년1919년 사이에 독일 등의 서유럽에서 나타난 노동자 계급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마르크스의 사상 중 어떤 부분이 이런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50]

나치의 영향이 점차 커져감에 따라 사회 연구소의 설립자들은 연구소를 나라 밖으로 옮길 것을 준비했다.[56]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이후, 이 연구소는 제네바로 옮겼고, 1935년에는 뉴욕으로 옮겨가 컬럼비아 대학교와 연계했다. 이 시기부터 중요한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해 미국과 영국 학계에서 점점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갔다.[57]

193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가 정권을 잡자 많은 회원들이 망명했고, 곧 활동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미국 정부 기관에서 활동하며 독일과 일본의 전시 정보 분석, 전후 처리와 점령 정책 수립, 헌법 제정에 관여했다.

연도사건
1931년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나치의 대두로 인해 사회연구소의 해외 분산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제네바에 설립했다. 사회연구소 기금은 네덜란드로 이전되었다.
1932년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사회연구소 연구원이 되었다.
1933년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는 나치스 돌격대의 습격을 받았다. 6만 권에 달하는 장서가 압수되었고, 3월까지 연구소는 폐쇄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제네바로 이주했다. 유럽 각지에 분소와 연구자들이 분산되어 "국제사회연구협회"라는 명칭이 되었고, 호르크하이머와 폴락이 공동으로 회장이 되었다. 프란츠 레오폴트 노이만이 사회민주당 좌파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지만 석방되어 한 달 후 런던으로 망명했다.
1934년스위스에서도 나치의 손길이 미치는 것을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런던과 파리에 사회연구소 분소를 설치했다. 호르크하이머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을 방문했다.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이었던 니콜라스 머레이 버틀러로부터 컬럼비아 대학교로 사회연구소를 이전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사회연구소 이전 및 연구원들의 미국 망명이 시작되었다. 호르크하이머가 뉴욕으로 이주했다.
1935년펠릭스 바일이 뉴욕에서 다시 사회연구소에 참여했고, 100000USD를 다시 기증함으로써 연구소는 재정적으로 회복되었다.
1936년「권위와 가족」이 출판되었다. 프란츠 레오폴트 노이만이 미국으로 건너가 사회연구소에 참여했다. 후에 미국의 전시 기관인 "경제전쟁위원회"의 컨설턴트에 취임했다.
1937년사회연구소 런던 분소가 폐쇄되었다. 파리에 거주하던 발터 벤야민이 사회연구소에 참여했다.
1938년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첫 망명지인 영국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주하여 사회연구소에 참여했다.
1940년막스 호르크하이머가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한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고, 이 시기에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계몽의 변증법」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공저로 집필이 시작된다. 발터 벤야민이 피레네 산맥에서 독극물 자살한다. 사회연구소는 재정난에 빠진다. 많은 연구소 연구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여러 가지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곧 전시에 우수한 두뇌를 필요로 하는 많은 정부 기관들이 그들의 학문적 기술과 지식, 정보를 요구하며 스카우트하기 시작했다.
1942년프란츠 레오폴트 노이만이 전략사무국(OSS, CIA의 전신) 중앙유럽과 담당 부서에 들어가 독일 정보 분석에 종사하는 한편, 「비히모스(Behemoth)」(1944년 증보판 간행)를 출판한다.
1945년프란츠 레오폴트 노이만이 미국 국무부의 독일 조사 부서 책임자에 취임한다.


2. 3. 전후 독일 귀환과 활동 재개 (1945-1960년대)

나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회 연구소 설립자들은 연구소를 국외로 이전할 준비를 했다.[56]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연구소는 제네바로 옮겨졌고, 1935년에는 미국 뉴욕컬럼비아 대학교와 연계하여 이전했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폴로크는 1950년대 초 서독에 정착했으며, 마르쿠제, 뢰벤탈, 키르히하이머는 미국에 남았다. 연구소는 1953년이 되어서야 형식적으로 프랑크푸르트에 다시 설립되었다.[5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구소 관계자 대다수는 서독으로 귀국했고, 막스 호르크하이머테오도어 아도르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사회연구소를 재건하여 다시 독일이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미국에 남아 저술 및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1960년대, 전 세계적으로 대학 분쟁(大学紛争)이 일어나던 시대에 신좌파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찾던 사람들은 이 그룹에 주목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대학 분쟁에서는 아도르노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사회연구소는 학생들에게 점거당했다. 아도르노는 기동대를 투입하여 학생들을 제압했고,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47]

반면, 독일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은 마르쿠제는 당시 미국 각지 대학에서 일어난 대학 분쟁 운동 등의 운동가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신좌익의 교조(新左翼の教組)"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2. 4. 68혁명과 신좌파 운동에 미친 영향 (1960년대-1970년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구성원들은 대체로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치 실천을 피했다.[36]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서독 정부의 자금 지원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연구소 간행물에서 혁명적인 표현을 반대했다.[37]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베노 오네조르그 살해 사건 이후 학생 운동에 동정심을 보였지만, 거리 폭력이 변화를 가져올 잠재력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38][41] 앤절라 데이비스는 아도르노가 "미디어 연구 학자가 라디오 기술자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다"고 조언했다고 전했다.[37][39]

죄르지 루카치는 《소설 이론》(1971)에서 아도르노를 포함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일부 구성원들이 "그랜드 호텔 심연"에 거주한다고 비판했다. "그랜드 호텔 심연"은 이론가들이 편안하게 세상을 분석하는 은유적인 장소였다. 루카치는 이들을 "무(無), 부조리의 심연 가장자리에 있는, 모든 편의 시설을 갖춘 아름다운 호텔"에 거주하며, "좋은 식사나 예술적 오락 사이에서 매일 심연을 바라보는 것은 제공되는 미묘한 편안함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을 뿐"이라고 묘사했다.[40][38]

1960년대와 1970년대 신좌파에 참여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36][38]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은 물질적 소비와 대중 매체가 노동 계급의 혁명 가능성을 억압한다고 설명했다. 1964년 출판 당시 마르쿠제는 비관적이었지만, 민권 운동 강화와 베트남 전쟁 반대가 시작되자 놀라움과 기쁨을 느꼈다.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회와 같은 학생 운동가들은 마르쿠제와 그의 저서에 관심을 가졌다. 무명의 학자였던 마르쿠제는 빠르게 "신좌파의 구루"로 알려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공인 지식인이 되었다. 그는 좁고 점진적인 개혁이 아닌, 기존 문화 전체의 "대거부"와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 혁명"을 목표로 했다. 마르쿠제는 침묵하는 노동 계급을 보완하고 제3세계 공산주의 혁명가들과 연합할 수 있는 변화의 주체를 민주적 시위 운동에서 보았다. 그는 미국과 서독 학생 운동의 학생들과 함께 행사를 조직하는 등 신좌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36]

마르쿠제와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의 관계는 학생 운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긴장되었다.[36][41] 사회주의 독일 학생 연맹은 아도르노의 정치적 무관심을 비판하며 그의 강의를 방해하기도 했다.[41] 아도르노는 학생들의 시위 참여 거부 후 방이 엉망이 된 것을 보고 "실천은 도덕적 제약을 행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구실로 사용된다"고 썼으며, 권위주의적 성격의 발현이라고 덧붙였다.[38] 아도르노의 제자 한스-위르겐 크랄도 그의 무대응을 비판했다.[41] 1969년 1월, 크랄이 학생 그룹을 이끌고 방을 점거했을 때 아도르노는 경찰을 불러 학생들을 더욱 화나게 했다.[41] 마르쿠제는 아도르노의 경찰 호출 결정을 비판하며 "이론을 실천으로 직접 번역하는 것을 당신과 마찬가지로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이론이 실천에 의해 더욱 추진되는 상황, 이론이 실천과 분리된 상태로 스스로에게 부정직해지는 순간이 있다고 믿는다"고 썼다.[41]

1970년대에 신좌파의 한계를 인식한 마르쿠제는 제3세계와 혁명적 폭력을 덜 강조하고 미국의 사회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36] 그는 환경 운동과 여성 운동과 같은 정치적 변방의 다른 운동들을 사회주의를 위한 인민 전선에 참여시키려고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여성 해방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며, 자신의 초기 저서인 《에로스와 문명》에서 그 반향을 보았다. 1960년대 혁명의 순간이 끝났음을 알게 된 마르쿠제는 학생들에게 폭력을 암시하는 것조차 피하라고 조언했다. 대신 그는 "제도를 통한 장기 행진"을 옹호했고 미국의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피난처로 교육 기관을 추천했다.[36]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20세기 전반 주류였던 소련식 사회주의, 스탈린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새로운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를 모색했으며, 이는 신마르크스주의 흐름의 원류가 되었고, 1960년대 신좌파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전 세계적으로 대학 분쟁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던 시대에 신좌익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찾던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주목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대학 분쟁에서는 아도르노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사회연구소는 학생들에게 점거당했다. 아도르노는 기동대를 투입하여 학생들을 제압했고,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47]

반면, 독일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당시 미국 각지 대학에서 일어난 대학 분쟁 운동 등의 운동가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신좌익의 교조"라는 위치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3. 주요 이론 및 개념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초기 마르크스주의 학자들로 구성되었으나, 20세기 자본주의의 발전과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 발전 가능성을 모색했다.[51] 이들은 마르크스의 접근법을 따라 사회 변화의 요건을 고민하며, 칸트의 비판 철학과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실증주의, 유물론, 결정론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52] 이러한 과정에서 비판 이론적 특징이 발달하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53][54] 언어적 상호주관성 연구를 통해 비판이론은 더욱 발전했다.[55] 이 학파의 사상은 1968년 68 혁명의 지적 배경이 되었으며,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부정하는 '부정의 변증법'을 핵심 개념으로 제시했다. 이들은 현실 속 불균형적인 힘의 관계를 왜곡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객관과 주관을 매개하는 의식을 통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하지 못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3. 1. 비판 이론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초기에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분만 반복한다고 비판받던 정통 마르크스주의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전통적인 마르크스 이론으로는 20세기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51] 자본주의소련 사회주의에 모두 비판적이던 이들은, 또 다른 사회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는 글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51]

마르크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사회 변화를 위한 조건들을 고민했다.[52] 이들은 칸트의 비판 철학과 독일 관념론(특히 헤겔 철학)을 통해 변증법적 모순이 현실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주장하며, 실증주의, 유물론, 결정론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의 이론은 비판 이론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53][54] 언어적 상호주관성, 그리고 하버마스가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라 칭한 것들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55]

이 학파의 사상은 1968년 68 혁명으로 불리는, 서방 세계와 일본 대학가를 강타한 학생 운동의 지적 배경이 되었다. 허버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카를 비트포겔, 레오 뢰벤탈, 프리드리히 폴로크 등이 이 학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의 핵심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유산인 변증법을 부정하는 '부정(否定)의 변증법'이라는 개념 체계였다. 이들의 시대적 문제의식은 '혁명을 해야 하는가?'였다. 초기 마르크스의 낙관적 견해에서는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노동자 해방의 전망이 높아진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 가능성이 쇠퇴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서구 문명이 비이성적인 파시즘으로 전락했는가? 왜 비인간화가 진행되었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출발하여, 현실 속 불균형한 힘의 관계를 왜곡, 은폐,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왜곡을 드러내려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의 이론은 비판이론으로 불린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객관과 주관의 매개물로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헤겔 전통과 마르크스와의 연계성을 확장시켜, 객관적 현실과 사회적 실천을 매개하는 것이 의식(넓게는 이데올로기)이며, 이 둘을 분리해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맑스의 이상과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하지 못하고, 결국 대안 제시에는 이르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순서내용
첫 번째초기의 경쟁적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 조직 자본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기보다는 상호 침투하며, 국가의 경제 개입 증대로 인해 과거와 같은 정치경제 분리, 상부구조/하부구조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상부구조, 특히 국가의 중요성이 증대된다고 보았다.
두 번째조직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관료적 지배가 확장되고, 시장경제가 더 계획적인 측면을 보인다. 국가는 시장 조정에 개입하여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축소시키며, 이는 관료적 지배와 연결된다. 근대화는 경제적으로는 산업화, 조직적으로는 관료화, 의식적으로는 합리화로 볼 수 있는데,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조직화된 자본주의의 발전을 관료적 지배의 확대로 해석한다.
세 번째관료제와 조직화의 확대는 합리화의 증대이며, 합리화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경제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는 도구적 이성의 확산을 의미한다. 도구적 이성은 목적의 타당성이나 가치보다는 주어진 목표를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방법을 찾는 능력이다. 즉, 목적의 가치보다 수단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지배적이 된다는 것이다.
네 번째노동 과정이 점차 분업화/기계화된다. 이는 노동 과정의 분절화를 심화시켜, 노동 전체 과정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고, 노동의 단순하고 기계적인 부분에만 참여하게 만든다. 이는 개개인을 원자화, 고립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작업과 지식의 분절화로 인해 계급적 경험을 갖기 어려워지고, 총체성에 입각한 계급의식에 도달할 가능성이 감소한다. 인간 사회에서 지배는 더욱 비인격화되며, 사람들은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기보다는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는 경향이 심화된다.
다섯 번째문화의 상품화. 자본주의의 지배는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통해 나타나는데, 이는 문화의 상품화를 통해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규범화된 개인을 만들어 자본주의 지배를 영속화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문화의 부정성을 강조하며, 특히 대중매체를 비판했다. 대중매체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여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대중매체를 통해 사회에 진보적인 사상을 펼치거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이데올로기 지배의 은폐된 힘의 관계를 파악하고 극복하여, 인간이 다시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활동하게 되는 것을 추구했다.

아도르노는 [부정의 변증법]을 주장했고, 마르쿠제는 이를 확대하여 부정의 철학을 성립시켰다. 실증주의적 과학주의와 자본주의의 바탕이 된 합리주의 기능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해, 이성적 비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이성은 헤겔적인 것으로, 현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본질적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오성이 가진 한계성을 극복하고 본질적 세계로 가야 하며, 이성의 가장 특징적인 능력은 부정이라고 보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연구는 비판 이론의 지적, 실천적 목표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전통적 이론과 비판적 이론"(1937)에서 비판 이론을 사회 변혁과 지적 해방을 위한 사회 비판으로 정의하고, 그 방법으로 가정에 있어 독단적이지 않은 계몽을 제시했다.[10][11] 비판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생성된 "지배적인 이해"(즉, 지배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의미를 분석하여, 지배 이데올로기가 실제 세계에서 인간 관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리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지를 잘못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적 헤게모니 이론에 따르면, 지배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현재 권력 구조에 대한 설명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지배 계급의 서사다. 그러나 "지배적인 이해"를 통해 이야기되는 것은 사회에 대해 드러내는 만큼이나 감추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과제는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논의하지 않았던 사회 관계 영역,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기반과 상부구조 측면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해석이었다.[12]

호르크하이머는 비판 이론을 "전통적 이론"과 대조했는데, 여기서 "이론"은 순전히 관찰적 방식, 즉 실제 세계에 대한 과학 법칙(일반화)을 찾고 확립하는 과학주의의 의미로 사용된다. 사회 과학은 자연 과학과 다르다. 왜냐하면 사회 과학의 과학적 일반화는 경험으로부터 쉽게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자의 사회적 경험에 대한 이해는 항상 연구자 마음속 편견을 통해 걸러진다. 연구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역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 맥락 속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검증 대상인 이론의 결과는 경험 자체의 사실보다는 연구자의 생각에 맞춰질 것이다. 호르크하이머는 "전통적 이론과 비판적 이론"(193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감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실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수행된다. 즉, 지각 대상의 역사적 성격과 지각 기관의 역사적 성격을 통해서이다. 둘 다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 활동에 의해 형성되지만, 개인은 지각 행위에서 수용적이고 수동적인 자신을 인식한다.[13]

호르크하이머에게 사회 과학에 적용 가능한 조사 방법은 자연 과학에 적용 가능한 과학적 방법을 모방할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실증주의와 프래그머티즘, 신칸트주의와 현상학의 이론적 접근 방식은 이론을 실제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고유한 논리 수학적 편견 때문에 사회 과학에 대한 적용을 제한하는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극복하지 못했다. 즉, 이러한 조사 방법은 항상 참이고, 연구 대상 분야에서 지속적인 인간 활동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인 논리를 추구한다. 그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4]

호르크하이머는 그 문제가 인식론적이라고 믿으며 "우리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아는 개인을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15] 비판과 행동에 틀을 적용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비판 이론은 자기 비판적이며, 절대 진리의 보편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물질(유물론)이나 의식(관념론)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 인식론은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연구 대상의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판 이론은 전통적 이론의 철학적 제약 밖에 있지만, 인류의 자기 지식을 회복하는 사고방식으로서 비판 이론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조사 자원과 방법을 끌어온다.[11]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칼 마르크스의 관점(변증법 철학)을 가지고, 과학과 철학의 통합에 의한 사회철학("비판 이론")을 통해 비합리적인 사회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실천적인 자세로 특징지어진다. 1세대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근거를 두고, 자본주의 사회가 멸망한 후 "이성"의 실현을 예견하며, 기존의 제도를 엄격하게 비판했다.[48]

2대 소장 호르크하이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식했다(연구소 소장 취임 연설 등). 그 결과 많은 연구소 구성원이 프로이트파의 심리학과 마르크스 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에리히 프롬, 허버트 마르쿠제 등).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근대의 계몽 사상, 합리주의에 의문을 품고, 기계화가 관료주의나 파시즘과 같은 비인간적인 체제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49]

3. 2. 부정 변증법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의 핵심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유산인 변증법을 부정하는 '부정(否定)의 변증법'이라는 개념 체계였다.[51] 초기 마르크스의 낙관주의적 견해에서는 자본주의 발달 속에서 노동자의 해방 전망이 높아져 간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그 가능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문제 의식을 가졌다. 왜 합리적, 이성적 서구 문명이 비이성적 파시즘으로 전락했는가, 왜 비인간화가 추진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이데올로기 비판에서부터 출발한다. 현실 속에서 불균형적인 힘의 관계를 왜곡, 은폐, 정당화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왜곡을 드러내려 했고, 이들의 이론을 비판이론이라 규정하게 되었다.[51]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객관과 주관의 매개물로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헤겔 전통과 마르크스와의 연계성을 확장시켜, 객관적 현실과 사회적 실천을 매개하는 것이 의식(넓게는 이데올로기)이며 이 둘을 떼어놓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헤겔의 "변증법적" 혁신은 현실을 시간에 따른 움직임과 변화, 그리고 다양한 구성 요소들의 상호 관계와 상호 작용에 따라 고려하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더 구체적인 조사 방법으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16]

헤겔에 따르면, 인간 역사는 현실에서 합리적인 것이 과거의 모순을 극복한 결과임을 보여주도록 재구성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 활동의 지적인 과정, 즉 특정한 인간의 조건, 즉 인간 자유의 실현을 향한 진보의 개념인 정신(철학)|정신de(Geist), 세계정신|세계정신de(Weltgeist)이다.[17] 그러나 미래의 가능태 문제는 헤겔에게는 흥미롭지 않았다. 철학은 사후적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규범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18][19] 역사 연구는 과거와 현재의 인간 현실에 대한 묘사로 제한된다.[17]

카를 마르크스와 좌파 헤겔리안들은 그 관점을 비판했다. 그들에 따르면, 헤겔은 "절대 이성"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에서 과도하게 나아갔고, 바람직하지 않고 비합리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삶의 조건을 간과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 이론에서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뒤집으려고 주장하며,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20] 마르크스의 이론은 유물론적 역사관과 지리적 공간을 따르는데, 생산력의 발전이 역사적 변화의 주요 원동력이다.[21]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분석을 사용하여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과 그것이 연결된 사회 관계의 모순을 밝혀내고, 대립적인 세력 사이의 근본적인 투쟁을 드러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변증법적 방법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경우에만 채택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즉, 변증법적 조사에 대한 이전의 잘못된 해석을 수정할 수 있는 자기 수정 방법, 변증법적 방법을 채택한 경우이다. 따라서 비판 이론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주의와 유물론을 거부했다.[24]

그러나 이들은 맑스의 이상과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하지 못하고 결국 대안 제시에는 이르지 못한다.

3. 3. 도구적 이성 비판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도구적 이성이 어떻게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분석했다. 도구적 이성이란 주어진 목표를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방법을 찾는 능력이다. 이들은 목적의 가치보다 수단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고 보았다.[51]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순서내용
첫 번째초기의 경쟁적 자본주의에서 독점 자본주의로 변화하면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정도가 커졌다. 이로 인해 과거와 같은 정치와 경제,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51]
두 번째조직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관료적 지배가 확장되면서, 시장 경제는 더욱 계획적인 측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국가는 시장 조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축소시켰고, 이는 관료적 지배와 연결된다. 이들은 근대화를 경제적으로는 산업화, 조직적으로는 관료화, 의식적으로는 합리화로 보았으며, 조직화된 자본주의의 발전을 관료적 지배의 확대로 해석했다.[51]
세 번째관료제와 조직화의 확대는 합리화의 증대를 의미하며, 이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경제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즉, 도구적 이성이 확산되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은 목적의 타당성이나 가치보다는 주어진 목표를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방법을 찾는 능력을 의미한다.[51]
네 번째노동 과정이 점차 분업화되고 기계화되면서,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 과정에 대한 인식을 잃고 단순하고 기계적인 부분에만 참여하게 되었다. 이는 개개인을 원자화하고 고립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작업과 지식의 분절화로 인해 계급적 경험을 갖기 어려워졌고, 총체성에 입각한 계급의식에 도달할 가능성이 감소했다. 사람들은 주체로서 자신을 인식하기보다는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51]
다섯 번째문화의 상품화는 자본주의 지배가 이데올로기 지배를 통해 나타나는 핵심적인 현상이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규범화된 개인을 만들어 자본주의 지배를 영속화한다. 특히 대중매체는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여 자본주의에 아무도 대항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대중매체를 통해 사회에 진보적인 사상을 펼치거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의사를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51]



이들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현실 속 불균형적인 힘의 관계를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51] 이를 통해 객관과 주관의 매개물로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51]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부정의 변증법'을 주장했고, 허버트 마르쿠제는 이를 확대하여 부정의 철학을 성립시켰다.[51] 이들은 실증주의적 과학주의와 자본주의의 밑바탕이 된 합리주의 기능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해 이성적 비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이성은 헤겔적인 것으로, 현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본질적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들은 오성이 가진 한계성을 극복하고 본질적 세계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성의 가장 특징적인 능력이 부정이라고 보았다.[51]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마르크스의 이상과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하지 못하고, 결국 대안 제시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51]

3. 4. 문화산업 비판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문화산업이 사고의 동질성을 조장하고 기존 권력을 강화한다고 보았다.[33] 아도르노는 대중음악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산업과 사회 지배에 기여하는 허위 의식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비판했다. 그는 급진적인 예술과 음악이 인간 고통의 현실을 포착함으로써 진실을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급진적인 음악이 인지하는 것은 변형되지 않은 인간의 고통이다…. 외상성 충격의 지진파 기록은 동시에 음악의 기술적 구조 법칙이 된다".[34]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합리성이 기계 시대의 새로운 문화 재생산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모든 외부 및 내부 자연을 인간 주체의 힘 아래 두는 지배와 기술적 합리성의 융합이다. 이 과정에서 주체는 흡수되고, 주체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게 하는 프롤레타리아와 유사한 사회적 힘은 확인될 수 없다.

마틴 제이는 아도르노의 재즈에 대한 공격을 그의 미국 작품에서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측면이라고 불렀다.[35]

3. 5. 권위주의적 성격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라쉬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정신과적" 근거를 바탕으로 반대되는 정치적 비판을 "자동적으로" 배척하는 초기 경향을 비판했다.[42]

권위주의적 성격(1950)은 리처드 호프슈타터를 비롯한 다른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그들에게 정신과적 범주에서 정치적 비판을 수행하고, 그 범주에 정치적 비판의 무게를 지우는 방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차는 그들에게 판단과 논증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면하게 해주었다. 상대방과 논쟁하는 대신, 그들은 단순히 정신과적 근거로 그들을 일축했다.[42]

4. 주요 학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요 학자는 다음과 같다.


  • 펠릭스 바일(Felix Weil):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출자자이다.
  • 루카치 게르기
  • 칼 코르시
  • 후쿠모토 카즈오
  • 리히하르트 졸게
  • 클라라 체트킨
  • 프리드리히 폴락
  • 칼 빗포겔


이후 세대별 주요 학자는 다음과 같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세대별 주요 인물
세대주요 학자
1세대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에리히 프롬, 허버트 마르쿠제, 프란츠 레오폴트 노이만, 프리드리히 폴락, 카를 빗포겔, 레오 레벤탈, 프란츠 볼케나우
2세대유르겐 하버마스, 알프레트 슈미트, 오스카르 네크트
3세대악셀 호넷, 알렉스 데미로비치, 군첸 슈미트, 요헨 헤어리히, 게르하르트 슈베폰하이저
4세대노르베르트 볼츠 (초기에는 4세대로 여겨졌으나, 후에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판하였다)


4. 1.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용어는 사회 연구소에서 일했거나 관련이 있었던 사상가를 가리키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1923년 카를 그륀베르크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와 연계해 설립했으며, 이는 최초로 주요 독일 대학교와 연계된 마르크스주의 편향적 연구소였다.[50]

1930년대 이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사회 심리학자인 막스 호르크하이머테오도어 아도르노(철학자, 사회학자, 음악학자), 에리히 프롬 (정신분석학자), 허버트 마르쿠제 (철학자)와 같은 이 학파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들을 끌어모았다.[50] 하지만 이 연구소의 모든 사상가들이 항상 밀접하게 연관되거나 보완적인 연구들을 한 것은 아니기에 "학파"라는 이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뢰벤탈, 폴로크로 한정하기도 한다.[52]

나치의 영향이 점차 커져감에 따라 사회 연구소의 설립자들은 연구소를 나라 밖으로 옮길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56]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이 연구소는 제네바로 옮겼고, 1935년에는 콜럼비아 대학교와 연계해 뉴욕으로 옮겨갔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폴로크는 1950년대 초 서독에 정착했으며, 마르쿠제와 레벤탈, 키르히하이머를 비롯한 나머지는 미국에 남았다. 이 연구소는 1953년이 되어서야 형식적으로 프랑크푸르트에 다시 설립되었다.[57]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용어는 1923년 비엔나 대학교의 마르크스주의 법학 교수였던 칼 그륀베르크(Carl Grünberg)가 설립한 괴테 대학교 프랑크푸르트(Goethe University Frankfurt)의 부속 기관인 사회연구소의 학문적 업적과 지식인들을 일컫는다.[5] 독일 대학교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센터였으며, 부유한 학생이었던 펠릭스 바일(Felix Weil) (1898–1975)의 후원으로 운영되었다.[6]

바일은 서로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향들을 일관되고 실용적인 철학으로 통합하기 위해 제1차 마르크스주의 워크숍을 조직했는데, 이 첫 심포지엄에는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 칼 코르슈(Karl Korsch), 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 그리고 프리드리히 폴록(Friedrich Pollock)이 참여했다. 제1차 마르크스주의 워크숍의 성공은 사회연구소의 정식 설립으로 이어졌다.[7]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 주요 인물
이름주요 활동 분야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철학, 사회학, 사회심리학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철학, 사회학, 음악학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철학, 문학 비평
에리히 프롬(Erich Fromm)정신분석학, 사회심리학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철학, 사회학
프란츠 레오폴트 노이만(Franz Leopold Neumann)정치학, 법학
프리드리히 폴락(Friedrich Pollock)경제학, 사회학
카를 빗포겔(Karl Wittfogel)역사학, 사회학
레오 레벤탈(Leo Löwenthal)사회학, 문학 비평
프란츠 볼케나우(Franz Borkenau)역사학, 정치학


4. 2. 2세대


  • 유르겐 하버마스
  • 알프레트 슈미트
  • 오스카르 네크트

4. 3. 3세대


  •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 알렉스 데미로비치(Alex Demirović)
  • 군첸 슈미트(Günther Schmidt)
  • 요헨 헤어리히(Jochen Hörisch)
  • 게르하르트 슈베폰하이저(Gerhard Schweppenhäuser)

5. 비판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초기에 마르크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만 반복한다고 비판하던 정통 마르크스주의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전통적인 마르크스 이론으로는 20세기에 자본주의가 예상 밖으로 급격하게 발전한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본주의소련 사회주의에 모두 비판적이던 이들은 또 다른 사회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는 글들을 발표했다.[51]

마르크스의 접근 방식과 유사하게,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사회 변화를 위한 조건들을 고민했다.[52] 이들은 칸트의 비판 철학과 독일 관념론(특히 헤겔 철학)을 통해 변증법적 모순이 현실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주장하며, 실증주의, 유물론, 결정론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판 이론적 특징이 발전했다.

1960년대부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53][54], 언어적 상호주관성, 그리고 하버마스가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라 칭한 것들[55]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학파의 사상은 1968년 68 혁명으로 불리는 서구와 일본 대학가를 강타한 학생 운동의 지적 배경이 되었다. 허버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카를 비트포겔, 레오 뢰벤탈, 프리드리히 폴로크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포함한 서구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부유한 부르주아나 관료 등 상층계 출신이었다. 안토니오 그람시를 제외하면 대부분 혁명 경험이 없고, 이론적 차원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혁명 운동은 대학 강단이나 학자들의 논의 속에만 존재했고, 노동 운동이나 정당 운동과는 연결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정치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닌 예술, 철학, 문학 비평가였다. 68년 학생운동의 지적 배경이 되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했다면,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인식론, 미학, 철학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전개했다. 정치경제학에서 철학, 미학 등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확대했다는 점에서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특성이 약화되고 패배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는 비판도 있다. 형식과 주제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이들에게는 계급 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고전적 마르스크주의가 정치경제학에 집중한 반면,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영역을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끌어들여 사회심리학이나 문화비평 등에까지 확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주장하지만, 맑스주의적 관점에서는 패배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기존 질서를 안정시키는 매커니즘 분석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인간이 얼마나 함몰되어 가는지를 설명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서구 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기대를 이미 상실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의 소명을 실천할 계급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과정이 분절화되어 노동 계급이 총체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 해방을 기대할 대상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여겼다. 계급적 운동보다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비판 운동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왜곡되고 권력욕에 빠진 정치인들과 독재자들에게 훌륭한 이론적 구실을 제공했다는 점은 간과했다. 이는 정통 맑스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라쉬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정신과적" 근거를 바탕으로 반대되는 정치적 비판을 "자동적으로" 배척하는 초기 경향을 비판했다.

6. 의의와 평가

처음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마르크스의 일부 추종자들이 마르크스 사상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일부분만을 반복해 말한다고 비판하던 정통 마르크스주의 학자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전통적 마르크스 이론으로는 20세기에 자본주의가 예상 밖으로 급격하게 발전한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51] 자본주의소련 사회주의에 모두 비판적이던 학자들은 또 다른 사회 발전 과정의 가능성을 지적하는 글들을 펴내기 시작했다.[51]

마르크스의 접근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들은 사회 변화를 일으킬 요건들이 무엇인지 고민했다.[52] 이들은 칸트의 비판 철학과 이를 계승한 독일 관념론 (특히 헤겔 철학)을 이용해 변증법적 모순이 현실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말하며 실증주의유물론, 결정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면에서 이들의 이론에서 비판 이론적 특징이 발달하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53][54]과 언어적 상호주관성, 하버마스가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라 칭한 것들[55]에 대한 연구를 지표로 삼아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학파의 사상은 1968년 이른바 68 혁명이라 일컫는 서방 세계와 일본의 대학가를 강타한 학생 운동의 지적 배경이 됐다. 이 학파의 중심 인물은 허버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카를 비트포겔, 레오 뢰벤탈, 프리드리히 폴로크 등이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정치경제학에 집중되어 있음에 비해 마르크스주의의 영역이 그들에게서 더욱 확대되었다.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끌어들여 사회심리학이나 문화비평 등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궁극적으로 인간해방을 주장하고 있으나, 그 속에는 맑스주의 입장에서는 패배주의 또한 자리 잡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즉 기존 질서를 안정화시키는 매커니즘 분석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물론이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인간이 얼마나 함몰되어가고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얘기하긴 하지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서구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했으며, 더군다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기대한 것 같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기대를 이미 상실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의 소명을 실천할 역사적 계급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정이 분절화되어 노동계급이 총체적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인간해방을 기대할 이는 프롤레타리아라기보다는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계급적 운동이라기보다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비판운동에 희망을 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왜곡되고 권력욕에 빠진 정치인들과 독재자들에게 훌륭한 이론적 구실을 줬음 역시 보지 못했다. 이건 정통 맑스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참조

[1] 서적 Critical Theory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24-01-07
[2] 웹사이트 The Frankfurt School and Critical Theory https://iep.utm.edu/[...]
[3] 서적 A Dictionary of Marxist Thought Blackwell 1983
[4] 서적 Introduction to Critical Theory: Horkheimer to Haberma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5] 웹사이트 The Frankfurt School and Critical Theory 2011-10-21
[6] 웹사이트 Frankfurt School https://www.britanni[...] 2009-12-19
[7] 웹사이트 The Frankfurt School and Critical Theory http://www.marxists.[...] 2009-09-12
[8] 간행물 The Origins of Critical Theory: An interview with Leo Löwenthal
[9] 서적 1980
[10] 서적 The Idea of a Critical Theory: Habermas and the Frankfurt schoo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11] 간행물 Critical theory and the Management of Change in Organizations 2000
[12] 서적 The Dialectical Imagination: A History of the Frankfurt School and the Institute of Social Research 1923–1950 Heinemann 1973
[13] 서적 Traditional and critical theory Penguin 1976
[14] 서적 Critical Theory and Philosophy Blackwell 1996
[15] 서적 1976
[16] 웹사이트 dialectic https://www.britanni[...] 2009-12-19
[17] 웹사이트 Philosophy of History http://plato.stanfor[...] 2007-02-18
[18] 서적 Elements of the Philosophy of Right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1
[19] 서적 Hegel's political philosophy – Problems and Perspectives: A Collection of New Essays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1971
[20] 서적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859
[21] 서적 Postmodern Geographies Verso 1989
[22] 백과사전 Karl Marx http://plato.stanfor[...] Stanford 2009-09-17
[23] 웹사이트 Human Communication in the Critical Theory Tradition http://people.ucalga[...]
[24] 서적 The Frankfurt School: Critical Assessments Taylor & Francis 1994
[25] 서적 Minima Moralia: Reflections from Damaged Life https://books.google[...] Verso 2005
[26] 서적 Dialectic of Enlightenment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2
[27] 서적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Twelve Lectures MIT Press 1987
[28] 서적 Dialectic of Enlightenment 2002
[29] 서적 2006
[30] 저널 The Culture of Narcissism and the Critical Tradition http://www.jstor.org[...]
[31] 간행물 History as Social Criticism: Conversations with Christopher Lasch 1994
[32] 잡지 The Philosopher Stoned https://www.newyorke[...] 2006-08-21
[33] 잡지 The Naysayers http://www.newyorker[...] 2014-09-15
[34] 서적 The Philosophy of Modern Music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03
[35] 저널 Adorno In America Duke University Press 1984
[36] 서적 Herbert Marcuse: The New Left and the 1960s Routledge
[37] 서적 Grand Hotel Abyss: The Lives of the Frankfurt School Verso 2017-09-26
[38] 서적 Grand Hotel Abyss: The Lives of the Frankfurt School Verso 2017-09-26
[39] 서적 Herbert Marcuse: The New Left and the 1960s Routledge
[40] 서적 The Theory of the Novel MIT Press
[41] 서적 Grand Hotel Abyss: The Lives of the Frankfurt School Verso 2017-09-26
[42] 간행물 History as Social Criticism: Conversations with Christopher Lasch
[43] 서적 A Haunt of Fears: The Strange History of the British Horror Comics Campaign Pluto Press
[44] 서적 Youth, Media and Moral Panic: From Hooligans to Video Nasties Massey University Department of Education
[45] 웹사이트 Is Our Culture in Decline? http://www.cato.org/[...] Cato Institute
[46] 서적 마르크스주의와 철학
[47] 간행물 フランクフルト学派
[48] 참고문헌
[49] 참고문헌
[50] 백과사전 Frankfurt School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09-12-19
[51] 서적 Introduction to critical theory: Horkheimer to Haberma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52] 서적 Introduction to critical theory: Horkheimer to Haberma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53] 서적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Beacon Press
[54] 서적 Moral Consciousness and Communicative Action MIT Press
[55] 서적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MIT Press
[56] 간행물 The Origins of Critical Theory: An interview with Leo Lowenthal
[57] 서적 Introduction to critical theory: Horkheimer to Haberma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