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전
1. 개요
우성전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이황의 문하생으로, 허엽의 사위이자 허균의 매형이다. 15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쳤으며, 동인으로 활동하며 붕당 정치에 참여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활약했으며, 강화, 행주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나 과로로 사망했으며, 사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퇴계선생언행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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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542년 (조선 중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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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1609년 (조선 선조) |
| 본관 | 단양(丹陽) |
| 자 | 계옹(繼翁) |
| 호 | 충강(忠剛) |
| 벼슬 | 좌찬성 겸 지경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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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임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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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문천회맹
문천회맹은 임진왜란 초기 영남 지역 의병장들이 경주부윤 윤인함과 판관 박의장을 중심으로 경주 문천에 모여 왜군에 대한 결사항전을 다짐한 회합으로, 영남 의병들의 조직적인 항쟁에 영향을 미쳤다. -
1542년 출생 -
메리 1세 (스코틀랜드)
메리 1세는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즉위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지만, 남편 사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종교 갈등과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녀의 아들은 훗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었다. -
1542년 출생 -
핫토리 마사나리 (1542년)
핫토리 마사나리는 핫토리 한조로 더 잘 알려진 일본 무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 이에야스 탈출을 돕고 검사 역할을 거부한 일화, 그리고 "오니노 한조"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며 그의 이름은 현재 지명과 대중문화에 남아 전해진다. -
조선의 무신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조선의 무신 -
김응우
김응우는 김일성의 고조부로 평안도 대동 출신이며, 북한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격침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이 있고, 김일성 가문으로 이어진 전주 김씨이다.
2. 생애
명종 16년(1561년) 진사가 되었다. 1564년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요승 보우의 처단을 청원했다. 선조 원년(1568년) 증광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봉교, 수찬을 거쳐 1576년 수원 현감을 지냈다. 잠시 파직되었지만, 다시 장령, 사옹원 정을 거쳐 1583년에 응교가 되었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사인을 지냈다.
동서 분당 때 동인이 되었지만, 이발과의 불화로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우성전은 남인의 거물로 활동했으나, 1591년 서인 정철 등의 처벌 문제로 북인에게 패하여 관직을 잃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추의군이라 칭하고, 소금과 양식을 조달하여 난민을 구제했다. 또한, 강화도에서 의병장 김천일의 휘하에 들어가 섬을 장악하고 병선을 이끌고 적의 진격로를 차단했다. 그 후에는 경기도 독성산성, 행주산성에서 의병을 이끌고 권율을 지원했다. 의병장으로 활약한 공으로 봉상시 정·대사성을 지냈으며, 용산구의 적을 토벌하여 양곡을 확보하고 관군과 의병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후퇴하던 왜군을 경상도 의령군까지 몰아냈지만, 과로로 병에 걸려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했다. 사후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계갑록』, 『역설』, 『이기설』 등이 있다.
2.1. 초기 활동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허엽의 사위이며 허균의 매형이자 허난설헌의 형부이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봉교, 수찬 등을 거쳤다. 1572년 정공도감(正供都監) 혁파를 건의하여 관철시켰으며, 경연에서 <서경(書經)>을 강의하고,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주장하였다. 1576년 수원 현감을 지냈다.
2.2. 붕당 활동
1575년(선조 8) 동서 분당 때 김효원, 유성룡 등과 함께 동인에 가담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로 동인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우성전은 남인을 이끌며 동인의 명맥을 유지했다.
1591년(선조 24) 건저의 문제 이후 서인에 대한 처결 문제를 둘러싸고 북인과 대립했다. 강경파인 북인은 우성전의 축첩 문제를 제기하며 공격했고, 이로 인해 남인과 북인 간의 불신이 깊어졌다. 당시 우성전은 학문적 소양과 지략이 뛰어나 동인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동인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2.3. 임진왜란과 죽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해 추의군(秋義君)이라 칭하고 강화에서 의병장 김천일의 휘하로 들어가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강화도에서 병선을 이끌고 적의 진격로를 차단했다.
경기도 행주산성에서는 도원수 권율의 후방을 지원하기도 했다. 독성산성과 행주산성에서 의병을 이끌고 권율을 지원했다. 의병장으로 활약한 공으로 봉상시 정·대사성을 지냈으며, 용산구의 적을 토벌하여 량곡을 확보하고 관군과 의병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겸 지제교로 특전되었으나 계속 의병장으로 활약해 후퇴하던 왜군을 의령까지 쫓았으나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으로 후송된 뒤 죽었다. 당시 그의 향년 51세였다. 경상도 의령군까지 몰아냈지만, 과로로 병에 걸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