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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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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계영은 1576년 문과에 급제하여 진보 현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발발 후 의병을 일으켜 전라좌도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장수, 거창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관군을 지원했으며,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객사했다. 사후 병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로 추증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임계영은 호남 지역 방어를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격문을 통해 의병을 규합하여 군량 조달 및 부하들의 공을 조정에 천거하는 등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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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영
기본 정보
임계영
임계영
송계(松溪)
본관풍천(豐川)
생애
출생1546년
사망1616년
묘소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엄미리
가족
아버지임희(任熺)
어머니정부인(貞夫人) 양천 허씨(陽川許氏)
부인정부인(貞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
자녀임유인(任兪仁)
관력
과거 급제문과 병과(丙科)
관직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대사간
형조참판
호조참판
병조참판
대사성
황해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형조판서
호조판서
지중추부사

2. 생애

임계영은 157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진보 현감을 지냈으며 임기 후에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사제, 김익복 등과 함께 10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남원에서 최경회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고 전라좌도의병장이 되었다.

장수, 거창, 합천, 성주, 개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했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장윤에게 의병 300명을 나누어 관군을 지원하게 했다. 고성과 거제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해 큰 전과를 거두었다.

화의가 성립된 후 양주 목사 등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갑작스럽게 객사했다.

사후 병조참판의금부동지사가 추증되었다.

2. 1. 임진왜란 이전

2. 2.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계영은 고향에서 숙형, 박광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대장이 되고, 장윤을 부장으로 삼았다. 남원에서 최경회의 전라우도 의병과 합류하여 전라좌도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장수, 거창, 합천, 성주, 개령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삼남 요충지에서 조헌, 고경명 등의 의병장들이 순국하자, 임계영은 최경회와 연합하여 장수로 나아가 왜적을 무찔렀다. 경상감사 김성일의 원병 요청에 "흰머리의 늙은 선비로서 구구히 거병한 것은... 성패와 사생은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의병 활동의 의지를 밝혔다.

1592년 10월, 최경회는 개령에 진을 치고, 임계영은 성주로 나아가 왜적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1593년 2월에도 전투에서 2백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4백여 명의 포로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거창, 합천 등지에서도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체찰사 정철이 서울 탈환을 위해 근왕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영호남 인사들이 임계영을 "나를 살린 사람"이라며 만류하고, 김성일도 상주하여 부득이 회군하였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진주성을 포위하자, 부장 장윤에게 정예병 300명을 주어 관군을 지원하게 하고, 자신도 군량, 병기, 전사에 대한 3가지 방책을 올린 뒤 진주로 향했으나, 이미 성이 함락되고 장윤도 전사한 뒤였다. 임계영은 잔병을 수습하여 최억남을 부장으로 삼고, 고성, 거제 등지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0월, 조정에서 전공을 논할 때 통정대부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다. 1594년 1월, 동궁(세자, 훗날의 광해군)이 전주에 행차했을 때 박광전의 요청으로 호남 의병은 계속 유지되어 임계영에게 소속되었고, 임계영은 하동에서 방어하며 많은 적을 베었다. 4월에 조정의 명으로 의병을 해산하고, 병사를 김덕령의 충용군에 귀속시켰다.

2. 3. 임진왜란 이후

3. 전라좌도의병장 활동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가가 서쪽으로 피난가자, 공은 숙형 화동공 및 죽천 박광전과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중인들의 추대로 대장이 되었고, 장윤을 부장으로, 문위세를 양향관으로, 정사제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범을 그린 깃발을 세우고 남원으로 향하며 수천 명의 병사를 모았다. 남원에서 최경회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했는데, 최경회는 전라우도에서, 공은 전라좌도에서 기병했으므로 좌우의병이라 불렸다.

왜적이 삼남 요충지를 공략하여 의병장 중봉 조헌제봉 고경명이 순국하자, 공은 "호남이 지켜지지 않으면 나라의 땅을 잃고, 백성도 없게 된다"며 최경회와 연합하여 장수로 나아가 적을 무찔렀다. 이후 적은 호남을 넘보지 못했다. 영남의 감사 김성일이 원병을 청하자, 공은 "흰머리의 늙은 선비로서 거병한 것은 호걸한 선비들로 하여금 의분을 일으켜 욕일의 공을 세우게 하고자 함"이라며, 자신의 목숨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답했다.

1592년 10월, 최경회는 개령에 진을 치게 하고, 공은 성주로 나아가 적을 무찔러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1593년 2월, 다시 싸워 적 2백여 명을 죽이고 포로 4백여 명을 탈환했다. 3일 후 또 싸워 적 2백여 명을 죽이자 적장 모리휘원이 밤을 틈타 도주했다. 거창, 합천, 성주, 개령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했다.

체찰사 정철이 격문을 내어 근왕병을 서쪽으로 불러 서울 탈환을 꾀하려 할 때, 공도 명을 받고 떠나려 했으나 영호 인사들이 길을 막고 머물기를 청하고, 김성일도 상주하여 부득이 회군하였다.

청정진주성을 포위하자, 부장 장윤에게 정예병 3백을 주어 관군을 후원하게 하고, 군량, 병기, 전사에 관한 3책을 올린 뒤 군대와 군량을 준비하여 진주로 향했으나, 이미 성이 함락되고 장윤도 전사한 뒤였다. 공은 같이 순사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잔병을 수습하여 봉사 최억남을 부장으로 삼고, 고성, 거제 등지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0월, 어가가 서울로 돌아와 전공을 논할 때 통정이 내려졌으나 사양했다. 1594년 1월, 동궁이 전주에 행차했을 때 박광전의 청으로 호남 의병을 계속 두게 하여 공에게 익속시켰고, 공은 하동에서 방어하며 많은 적을 베었다. 4월, 조정에서 의병을 파하라는 명이 있어 김덕령의 충용군에 병사를 귀속시켰다.

3. 1. 주요 전투 및 활약

3. 2. 전략과 전술

임계영은 경상도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여 호남 평야를 보전하고 군량 보급로를 확보하는 전략을 세웠다.[2] 경상도 지방이 함락된 후, 호남의 의병을 규합하여 산간 지역인 경상도에서 현지 의병과 합류하여 왜적을 방어하는 작전을 펼쳤다. 산간 지역 방어에 실패하면 평야 지역은 더욱 방어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러한 전략 덕분에 임진왜란 기간 동안 호남 평야를 온전히 보전하고, 전국에 군량을 보급하며, 왜적을 경상도 지역에서 섬멸할 수 있었다. 임계영의 전라좌의병은 성주 개령 전투에서 적병 650명의 목을 베고 포로 400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문관이었던 임계영은 무장을 부장으로 삼아 전투를 맡기고, 본인은 후방에서 전략과 보급에 집중했다. 격문을 통해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을 조달했으며, 부하들의 공을 임금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3. 3.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임계영의 의병 활동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민중들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그는 뛰어난 전략과 리더십으로 백성들을 이끌고 왜군에 맞서 싸워,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하였다.[2]

임계영은 고경명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10일 뒤인 7월 20일, 전라도 보성 관아에서 전라좌의병을 결성하였다. 당시 55세의 나이로 향리에 물러나 있던 임계영은 고경명이 금산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내가 죽을 곳을 얻었도다" 하고 통곡하며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왕자사부 박광전, 진사 문위세, 능성현령 김익복과 함께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계영은 경상도의 산간지방에서 근왕의병으로 활동하고, 호남 평야로 진입하는 길목인 남원, 장수 부근을 방어하는 전략적 뛰어남을 보였다. 이는 왜적에 의해 경상도 지방이 함락된 상황에서, 평야지대인 호남으로 왜적이 닥치기 전에 호남의 의병을 규합하여 산간지역인 경상도 지역에서 현지의 향보의병과 합류하여 왜적을 방어하려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작전으로 임진왜란 시에 호남 평야를 온전하게 보전하고, 군량을 전국에 보급하며, 왜적을 경상도 지역에서 섬멸할 수 있었다.

임계영은 문관 출신으로, 무장을 부장으로 삼아 전투를 맡기고 본인은 후방에서 전략과 보급에 치중하였다. 그는 격문을 통해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을 조달하였으며, 임금에게 부하들의 공을 천거하였다. 임계영을 비롯한 장흥 임씨 문중에서는 호성공신 3등에 오른 임발영(任發英)과 삼군사(三君祠)에 모셔진 해남의 임광세(任光世), 임희성(任希聖) 등이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의병 또는 관군으로 활약하였다.

임계영은 단순한 군사 지도자를 넘어,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정치가였다. 그의 애민 정신과 헌신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큰 귀감이 된다.

4. 격문

4. 1. 거의(擧義)할 때 여러 고을에 보낸 격문(檄文)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각 고을에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이다. 국가의 위기 상황을 강조하고, 백성들의 참여를 호소하며, 의병 활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임진년(1592) 7월 3일에 좌의병대장 고경명이 금산에서 패하여 죽자, 박광전, 임계영, 전 정자 정사제, 장흥의 진사 김여중, 문위세 등은 능성현령 김익복과 함께 여러 고을의 사우들에게 이 격문을 보냈다.

당시 조선은 경상도와 충청도가 이미 무너져 적의 소굴이 되었고,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하고 있었다. 국가가 부흥할 기틀이 호남에 달려있었으나, 순찰사는 정병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따라 올라갈 계획이고, 병사는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미 금강을 넘었으며, 양도의 의병장도 각기 근왕을 위해 이미 본도를 떠난 상황이었다. 여러 고을의 장사들도 곧 나기로 결정되어 남은 군사가 얼마 되지 않아, 적이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에 방비가 극히 허술하였다. 호서의 적이 이미 본도의 경계선을 범했으니, 석권의 형세는 곧 이루어질 터였다.

이에 격문에서는 "국가의 일이 이토록 위급하니 진실로 통곡할 일이며, 이야말로 의사(義士)가 분발할 때"라며, 의병 봉기의 시급함을 강조하였다.

격문은 "이왕 죽으려면 어찌 나라를 위하여 죽지 않으렵니까?"라며, 백성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만에 하나라도 살아나는 것도 이 기회요, 치욕을 설분하고 나라를 부흥시키는 것도 이때"라며 의병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격문에서는 "우리 도내에는 반드시 누락된 장정과 흩어져 도망친 군사가 있을 것이니, 만약 식견이 있는 선비들이 함께 불러들여 권면하고 격려해서 협력하여 일어나서 스스로 한 군단을 편성하고 적이 향하는 곳을 감시하여 요충지대를 굳게 지킨다면 위로는 관군의 성원이 될 것이요 아래로는 한 지방의 생명을 안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영남 사람들이 처음 적을 만났을 때 머리를 붙들고 도망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던 것을 후회하며, 제군들은 다 이와 같은 일을 징계 삼아 게을리 노는 사람들을 달래고 앞장서서 떨쳐 일어서 후일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마지막으로, 격문은 "우리들은 본래 무예도 없고 병법도 알지 못하여 적을 제압하여 물리치는데 있어서는 생소하다 하겠으나 구구하게 앞장서서 창의한 것은, 한편으로는 의사의 뜻을 격려하고 한편으로는 용사의 사기를 분발시키자는 것"이라며,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에 곧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온 고을을 효유하여 군인들을 기록해 가지고 이 달 이십 일에 보성 관문으로 나와 모이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4. 2. 본도의 모든 의병들에게 보낸 격문(檄文)

의거로 군사를 일으킴은 오로지 국가를 위하여 적을 토벌하려 함이다.

흉측하고 추한 놈들이 침범한 지 지금 벌써 달을 넘겼는데도 관군이 누차 붕괴되어 적을 소탕할 기약이 없다. 칠도의 백성은 이미 어육이 되었고, 호남 일 도만이 겨우 보전되어 있으니 지금 만약 기회를 잃으면 어떻게 회복의 공을 성취하여 남아있는 백성을 구하겠는가. 이때가 바로 의기 분발한 선비가 몸을 잊고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

우리들은 용성(龍城)으로부터 거창에 와서 주둔하여 지금 영남의 제현(諸賢)들과 협력하여 개령, 성주 등지의 적을 치려하나 흉한 칼날을 치기가 어려워서 백 각지로 생각하여도 상책(上策)을 얻지 못했으며, 공사(公私)가 모두 군색하여 그대로 앉아서 응원병 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선성(先聲)치는 장수가 이곳에 온단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까닭이야 있겠지만 또한 그리 더딘지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개령의 험한 곳이 지켜지지 못하면 운봉을 지키기 어렵고, 운봉을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군사를 쓸 땅이 없어져 흉한 오랑캐로 하여금 마구 쳐들어오게 하리니 그렇게 된 후에는 제군(諸君)이 아무리 성의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가득찬 적을 막으려한들 피곤한 군사를 거느리고 강한 적을 항거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엎드려 바라건대, 제군은 각기 정예한 군사를 통솔하고 시기에 맞춰 와서 응원하여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여 고기비늘처럼 잇달아 나온다면 위험이 미치는 곳에 적이 반드시 간담이 꺾어질 것이니, 합세하여 일제히 친다면 어느 견고한 것인들 꺾지 못하겠는가?

비린내와 누런 내를 깨끗이 소탕하여 멀리 개령의 지경까지 막으면 호남은 저절로 완고해져서 국가를 중흥(重興)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事機)가 이와 같으니 어찌 소홀히 여겨서야 되겠는가?

다시 바라건대 제군은 힘써 좋은 계책을 세워 후회가 없게 하기 바란다.

임기응변(臨機應變)은 병가(兵家)에서 귀히 여기는 바이며 급한 데로 달려가 형세를 타는 것은 지사(志士)가 승상 하는 바이다. 만약 머뭇거리고 핑계하여 늦어서 기회를 놓친다면 모든 벗들에게 실망을 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조정의 법이 있을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5. 저서

의병장 임계영과 관련해서는 삼도실기가 편찬되어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수장되어있다.[3]

6. 평가

6. 1. 긍정적 평가

6. 2. 부정적 평가

참조

[1] 웹인용 임계영(任啓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1-06-05
[2] 웹인용 임란 초기 전라좌의병과 임계영의 의병활동 :전라도 근왕의병의 활동 사례 https://www.dbpia.co[...] 2011-06-01
[3] 웹인용 삼도실기(三島實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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