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브로드
1. 개요
윌리브로드는 7세기 앵글로색슨족 출신의 기독교 선교사로, 프리지아 지역 선교와 위트레흐트 대교구 설립에 기여했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수도사, 사제 생활을 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지원과 교황의 승인을 받아 프리지아 선교를 시작했다. 윌리브로드는 두 차례 로마를 방문하여 프리지아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에히터나흐 수도원을 설립했다. 프리지아의 저항으로 선교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샤를 마르텔의 지원으로 재개되어 739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그는 사후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에히터나흐 춤 행렬과 같은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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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로마 가톨릭 성인 -
베드로 가니시오
베드로 가니시오는 종교 개혁 시기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독일 가톨릭 재건에 헌신하여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불리는 예수회 사제이자 신학자로서, 가톨릭 교리서 집필과 헌신으로 복자 선포 후 성인이자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
네덜란드의 로마 가톨릭 성인 -
크산텐의 노르베르토
크산텐의 노르베르토는 독일 크산텐 출신으로 낙마 후 금욕적인 삶을 살며 사회 개혁을 주창하고 프레몽트레회를 창설하여 수도원 개혁 운동을 이끌었으며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를 역임한 후 시성되어 프레몽트레회와 세인트 노르베르트 칼리지에 영향을 주었다. -
룩셈부르크의 상징 -
룩셈부르크어
룩셈부르크어는 고지 독일어의 서중부 독일어군에 속하며 룩셈부르크의 국어이자 행정 언어 중 하나이고, 독일어의 방언에서 독자적인 언어로 인정받았으나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멸종 위기 언어로 지정되었으며, 로마자를 사용하고 프랑스어 어휘를 차용하는 특징을 가진 약 285,000명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
룩셈부르크의 상징 -
룩셈부르크의 국가
룩셈부르크의 국가는 미셸 렌츠 작사, 장 앙투안 지넨 작곡의 "Ons Heemecht"이며, 아름다운 자연, 조국에 대한 사랑, 외세의 억압으로부터의 보호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아 1993년 공식 국가 상징으로 채택되었고 룩셈부르크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가사로 감상할 수 있다. -
베네딕도회 성인 -
교황 그레고리오 7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73년 교황이 되어 교황권 강화, 교회 개혁, 하인리히 4세와의 서임권 투쟁, 성직 매매 금지, 성직자 독신 강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업적은 교황 수위권 발전에 기여했으나 로마 침공으로 망명 중 사망 후 시성되었다. -
베네딕도회 성인 -
교황 그레고리오 1세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6세기 후반 로마 교황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교황권의 봉사 강조, 교회 개혁, 앵글로색슨족 기독교 전파, 전례 개정 및 그레고리오 성가 발전, 그리고 중세 영성에 큰 영향을 미친 저술 활동을 했다.
2. 어린 시절
윌리브로드는 색슨족 출신의 노섬브리아 사람인 윌길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길스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아들 윌리브로드를 리폰 수도원에 봉헌자로 맡겼다. 윌길스는 이후 험버강 어귀 근처에 작은 기도소를 지어 성 안드레아에게 봉헌했다.
윌리브로드는 요크 주교인 윌프리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이후 베네딕토회에 들어갔다. 그는 20세에서 32세 사이(678년경)를 아일랜드 카운티 카를로에 있는 라스 멜시지 수도원에서 보냈는데, 이곳은 7세기 유럽 학문의 중심지였다. 그는 그곳에서 12년간 수도사·사제로서의 생활을 했다.
3. 프리지아 선교
윌리브로드는 리폰의 에그버트에게서 공부했으며, 690년경 동료 11명과 함께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헤르스탈의 피핀의 요청으로 프리지아 선교를 시작했다. 이들은 북해 연안의 이교도 프리지아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정치적 지원과 교황 세르지우스 1세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었다.
695년 11월 21일 교황세르지우스 1세는 윌리브로드를 프리지아족의 대주교로 임명하고 "클레멘스"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후 윌리브로드는 위트레흐트에 대성당을 건립하는 등 프리지아에서 포교 활동을 펼쳤다.
716년 이교도였던 프리지아의 왕 라드보드가 프리지아를 다시 점령하면서 윌리브로드와 그의 수도승들은 도망쳐야 했다. 라드보드는 교회를 불태우고 많은 선교사들을 살해했다. 719년 라드보드가 죽은 후, 윌리브로드는 샤를 마르텔의 보호 아래 프리지아로 돌아와 성 보니파시오의 도움을 받아 선교를 재개했다.
3.1. 로마 방문
비드에 따르면 윌리브로드는 로마를 방문한 유일한 앵글로색슨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윌리브로드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 순교자들의 무덤을 순례하러 간 것이 아니라, 교황의 허락과 축복을 받아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소망을 수행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이처럼 그는 순례자가 아니라 특별히 선교사로서 교황에게 갔다.
695년 11월 21일, 두 번째 로마 방문에서 교황 세르기우스 1세는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서 그에게 팔리움을 주고 프리지아의 주교로 임명했다. 그는 설교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프리지아로 돌아갔으며, 위트레흐트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 대성당을 지었다. 윌리브로드는 초대 위트레흐트 주교로 꼽힌다.
3.2. 위트레흐트 대교구 설립
헤르스탈의 피핀의 요청으로 프리지아인들을 기독교화하기 위해 파견된 윌리브로드는 위트레흐트를 선교 중심지로 삼았다. 교황 세르기우스 1세에게서 팔리움을 받고 프리지아의 주교로 임명된 후, 위트레흐트에 대성당을 건립했다. 윌리브로드는 초대 위트레흐트 주교이다.
3.3. 에히터나흐 수도원 설립
698년 윌리브로드는 포교 거점으로 룩셈부르크 에히테르나흐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때 다고베르트 2세의 딸 이르미나(Irmina)의 지원을 받았다. 윌리브로드는 사망 후 이 수도원 예배당에 매장되었고, 거의 동시에 성인으로 추대되어 에히테르나흐는 순례지가 되었다. 신학자 알퀸에 따르면, 이곳에서 여러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성유물 일부는 다른 교회로 옮겨졌지만, 대부분은 수도원에 보관되었고, 1031년 10월 19일 새로 건립된 성당 주 제단 아래 안치되었다. 이후 이 성당도 철거되고 1868년 새로운 성당이 헌당되었다.
4. 프리지아의 저항과 재건
714년 헤르스탈의 피핀이 사망한 후, 이교도 프리지아의 왕 라드보드가 프리지아를 다시 점령하면서 윌리브로드의 선교 활동은 큰 위기를 맞았다. 라드보드는 교회를 불태우고 많은 선교사들을 살해했으며, 윌리브로드와 그의 수도승들은 도망쳐야 했다.
719년 라드보드가 사망한 후, 윌리브로드는 샤를 마르텔의 보호 아래 프리지아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재개했다. 성 보니파시오의 도움을 받아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프리지아 지역의 기독교화를 다시 추진했다.
5. 사망과 유산
윌리브로드는 739년 11월 7일, 81세의 나이로 에히터나흐 수도원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에히터나흐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윌리브로드는 곧바로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에히터나흐는 그의 무덤을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의 선교 경로를 따라 세워진 윌리브로드 우물은 다양한 신경 질환, 특히 어린이들의 치유를 위해 사람들이 방문했다.
윌리브로드가 프리슬란트 선교를 위해 영국 해협을 건너 도착했다고 전해지는 프랑스 북부의 그라블린에는 구시가지에 그의 이름을 딴 교회가 있다. 그라블린은 800년경 이후 윌리브로드의 선교를 기념하는 예배당 주변에 형성되었다. 알자스의 바이센부르크 수도원에는 13세기에 윌리브로드를 기리는 예배당이 있으며, 윌리브로드의 은인이었던 오렌의 이르미나 역시 이곳에서 존경을 받았다.
성 윌리브로드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파리 국립도서관에는 그의 복음서(에히터나흐 복음서)로 추정되는 것이 남아 있다. 포교 당시 아일랜드에서 가져온 것으로 생각된다.
5.1. 기적과 공경
윌리브로드는 생전에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헌팅턴병(무도병)이나 경련성 질환 환자를 많이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해당 질병들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사망 후 에히터나흐는 순례의 땅이 되었고, 신학자알퀸에 따르면, 그의 무덤에서 여러 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의 유해 이송을 기념하여 "5명의 주교, 2명의 스위스 근위병, 16명의 기수, 3,045명의 성가대, 136명의 사제, 426명의 음악가, 15,085명의 무용수, 2,032명의 연주자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에히터나흐 춤 행렬은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화요일에 에히터나흐에서 열리며, 수천 명의 참가자와 관람객이 모여 베네룩스 국가(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사도로 불리는 성인을 기린다.
그의 선교 경로를 따라 세워진 윌리브로드 우물은 다양한 신경 질환, 특히 어린이들의 치유를 위해 사람들이 방문했다.
가톨릭 교회에서 그의 축일은 잉글랜드를 제외하고 11월 7일에 기념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교황 레오 13세의 명령에 따라 11월 29일에 기념된다. 잉글랜드 성공회 성인 달력과 미국 성공회 성인 달력에서는 11월 7일에 그를 존경한다.
5.2. 에히터나흐 춤 행렬
윌리브로드의 유해 이송을 기념하여 5명의 주교, 2명의 스위스 근위병, 16명의 기수, 3,045명의 성가대, 136명의 사제, 426명의 음악가, 15,085명의 무용수, 2,032명의 연주자가 춤을 추며 행진했다. 에히터나흐 춤 행렬은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 화요일에 에히터나흐에서 열리며, 수천 명의 참가자와 관람객이 모여 윌리브로드를 기린다. 그는 종종 베네룩스 국가(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사도로 불린다.
1906년 6월 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유물 이전 의식이 거행되었을 때도 5명의 주교와 2명의 스위스 근위병을 비롯하여 1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춤을 추며 행진했다. 이 춤 행렬은 8세기에 시작되었다는 설과 14세기 흑사병, 재해, 전쟁과 같은 사회 불안 속에서 신에게 기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5.3. 잉글랜드와의 관계
윌리브로드는 앵글로색슨족 출신으로, 잉글랜드와 관계가 깊다. 잉글랜드에서는 윌리브로드의 축일을 교황 레오 13세의 명에 따라 11월 29일에 기념한다. 잉글랜드를 제외한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1월 7일에 기념한다. 윌리브로드는 잉글랜드 성공회 성인 달력과 미국 성공회 성인 달력에서는 11월 7일에 존경받고 있다.
윌리브로드는 요크 근처 리폰의 수도원에서 성 윌프리드(Wilfrid, Wilfrith)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6. 평가
윌리브로드는 중세 초기 유럽, 특히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 지역의 기독교 확산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선교 활동은 이 지역의 종교, 문화, 정치적 지형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윌리브로드는 리폰의 에그버트에게서 공부했으며, 에그버트는 윌리브로드와 11명의 동료들을 헤르스탈의 피핀의 요청으로 북해 연안의 이교도 프리지아인들을 기독교화하도록 파견했다. 윌리브로드는 두 번 로마를 방문했는데, 첫 번째 방문에서는 교황 세르기우스 1세에게 선교 허락과 축복을 받았고, 두 번째 방문에서는 팔리움을 받고 프리지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위트레흐트에 대성당을 건립하고 초대 위트레흐트 주교가 되었다.
698년에는 오렌의 이르미나의 기증을 받아 에히터나흐 수도원을 설립했다. 716년 이교도 프리지아의 왕 라드보드가 프리지아를 점령하면서 윌리브로드와 수도승들은 피신해야 했으나, 719년 라드보드 사후 샤를 마르텔의 보호 아래 선교 활동을 재개했다.
윌리브로드는 요크 근처 리폰의 수도원에서 성 윌프리드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678년경 아일랜드의 라스멜시히 수도원으로 옮겨 에그베르트의 지도를 받았다. 690년경 프리슬란트에서의 기독교 전도는 피핀 2세의 의뢰와 프랑크 왕국의 보호, 그리고 교황 세르지우스 1세의 전권 위임을 통해 이루어졌다. 위트레흐트를 거점으로 50년 가까이 선교 활동을 펼쳐 네덜란드 북부 대부분 지역을 "개척"했다.
695년 교황 세르지우스 1세로부터 프리지아족의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클레멘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라드보드 사후인 719년에는 위트레흐트로 돌아와 카를 마르텔의 지원과 성 보니파시오의 도움을 받아 포교 활동을 재개했다.
윌리브로드는 많은 기적을 행하고 병자들을 치료했다고 전해지며, 특히 헌팅턴병이나 경련성 질환 환자를 많이 치료하여 이 질병들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그의 축일은 11월 7일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11월 29일에 거행된다.
파리 국립도서관에는 그의 복음서(Willibrord-Evangeliar)로 추정되는 자료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