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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밀러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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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밀러는 1782년 미국에서 태어나, 침례교 신앙을 버리고 이신론자가 되었다가 군 복무 후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설교자이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를 예언했고, 1830년대부터 재림을 설교하며 밀러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다니엘서 8장 14절의 "2300일" 예언을 근거로 1843년 재림을 주장했으나 실패하여 대실망을 겪었다. 이후에도 재림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의 사상은 재림 기독 교회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등 여러 종교 단체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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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밀러 (설교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윌리엄 밀러
윌리엄 밀러
본명윌리엄 밀러
출생1782년 2월 15일
출생지매사추세츠주피츠필드
사망1849년 12월 20일
사망지뉴욕주로우햄프턴
직업농부
군인
목사
작가
밀러라이트 운동 지도자
배우자루시 스미스
자녀5명
종교 활동
소속 교단침례교 (초기)
재림교 (말년, 밀러라이트 운동)
주요 신학 사상재림 신앙
성서 예언 해석
천년왕국설
주요 활동
밀러라이트 운동1830년대 ~ 1840년대
저서증거로부터의 관점 (Views of the Prophecies and Prophetic Chronology, Selected from Manuscripts of William Miller)
기타 정보
영향재림교 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침

2. 초기 생애 및 배경

윌리엄 밀러는 1782년 매사추세츠주 피츠필드에서 미국 독립 전쟁 참전 용사인 아버지와 폴리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살 때 가족과 함께 뉴욕주 로우 햄프턴으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고, 이후 지역 학교에 다녔으나 18세 이후 정규 교육은 받지 않고 독서를 통해 스스로 지식을 쌓았다.

1803년 루시 스미스와 결혼하여 버몬트주 폴트니로 이주해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다. 그곳에서 치안 판사, 부 보안관 등 여러 공직을 역임했으며, 버몬트 민병대 중위로 복무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폴트니로 이주한 후, 밀러는 지역의 이신론자들과 교류하며 볼테르, , 토마스 페인 등의 저작을 접하고 기존의 침례교 신앙을 버리고 이신론을 받아들였다.

2. 1. 출생 및 성장

윌리엄 밀러는 1782년 2월 15일, 매사추세츠주 피츠필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던 윌리엄 밀러 대위였고, 어머니는 엘나단 펠프스의 딸인 폴리나였다. 밀러가 4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뉴욕주 로우 햄프턴의 시골 지역으로 이사했다.

밀러는 9살까지 어머니에게 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 후 새로 생긴 이스트 폴트니 지역 학교에 다녔다. 18세 이후에는 공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독서를 매우 좋아하여 혼자서 많은 책을 읽었다. 젊은 시절 그는 버몬트주 페어 헤이븐 근처에 살던 제임스 위더렐 판사와 매튜 라이언 국회의원, 그리고 뉴욕주 화이트홀에 사는 알렉산더 크루이크생크의 개인 서재를 이용할 기회가 있었다.

1803년, 밀러는 루시 스미스와 결혼하고 아내의 고향인 인근 버몬트주 폴트니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폴트니에 머무는 동안 그는 여러 공직에 선출되었는데, 처음에는 치안 판사로 활동했다. 1809년에는 부 보안관으로 선출되었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치안 판사로도 활동했다. 또한, 밀러는 버몬트 민병대에 소속되어 복무했으며, 1810년 7월 21일에는 중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집과 땅, 그리고 최소 두 마리의 말을 소유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편이었다.

폴트니로 이사한 직후, 밀러는 어린 시절의 침례교 신앙을 버리고 이신론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그 마을[버몬트주 폴트니]의 주요 인사들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공개적으로 이신론을 믿었지만 훌륭한 시민이었고 도덕적이며 진지한 태도를 지녔다. 그들은 나에게 볼테르, , 토마스 페인, 에단 앨런 등 이신론 작가들의 책을 소개해 주었다."

3. 군 복무

1812년 전쟁이 일어나자 밀러는 지역 청년들을 모아 부대를 조직하고 버몬트주 벌링턴으로 향했다. 그는 미국 정규군인 제30 보병 연대에 소위 계급으로 배속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주로 모병관으로 활동했으며, 1814년 2월 1일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밀러는 플래츠버그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전을 경험했다. 이 전투에서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미군은 영국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내가 있던 요새는 모든 포탄에 노출되었습니다. 폭탄, 로켓, 파편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고 회상했다. 수많은 포탄 중 하나가 그로부터 불과 약 0.61m 거리에서 폭발하여 부하 3명이 다치고 1명이 사망했지만, 밀러 자신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밀러는 이 전투의 결과를 기적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는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초월적인 신을 믿었던 그의 기존 이신론적 관점과 충돌했다. 그는 훗날 "지극히 높으신 분이 특별한 방식으로 이 나라의 이익을 지켜보셨고, 우리를 적의 손에서 구해주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결과는 인간보다 더 강력한 힘의 작용처럼 보였습니다."라고 기록했다.

4. 종교적 회심과 재림 예언

전쟁 후, 1815년 군 복무를 마친 윌리엄 밀러는 고향 푸트니로 돌아왔다가 곧 로우 햄튼으로 이사하여 농장을 구입했다.[1] 이 시기 그는 전쟁 중 겪었던 경험과 가족의 죽음 등으로 인해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죽음 이후 완전한 소멸 또는 신 앞에서의 책임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로우 햄튼에서 밀러는 점차 침례교 신앙을 되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신론적 입장을 유지하면서 교회에 출석했으나, 지역 목사를 대신해 설교를 읽는 역할을 맡으면서 점차 신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설교를 읽던 중 강한 감정적 경험을 통해 완전한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 회심 이후, 그의 이신론 친구들은 밀러에게 새로운 신앙을 변호하라고 요구했고, 이는 그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한 결과, 밀러는 후천년설이 비성경적이며, 그리스도재림 시기가 성경 예언에 나타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특히 다니엘서의 예언과 '하루-일년의 원칙' 해석을 통해 1843년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1818년에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고 기록했다.[11][12]

1818년부터 자신의 계산을 확신했지만, 밀러는 1823년까지 개인적인 연구를 계속하며 해석의 정확성을 확인했다. 1822년 9월에는 자신의 결론을 20개 조항으로 정리했으며, 제15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21년 안에, 즉 1843년까지 일어날 것"이라고 명시했다. 마침내 1831년 8월, 밀러는 드레스덴 마을에서 첫 대중 강연을 시작으로 자신의 예언을 공개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1832년에는 침례교 신문 ''버몬트 텔레그래프''에 16편의 글을 연재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주장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자, 1834년에는 자신의 가르침을 요약한 64페이지 분량의 소책자 ''1844년경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성경과 역사의 증거: 일련의 강연에서 제시됨''을 출판하여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견해를 알렸다.

4. 1. 회심

전쟁 후, 1815년 6월 18일 군대에서 제대한 밀러는 푸트니로 돌아갔다. 돌아온 직후 그는 가족과 함께 로우 햄튼으로 이사하여 농장을 구입했다[1] (현재는 어드벤티스트 헤리티지 미니스트리가 운영하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 기간 동안 밀러는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질문에 깊이 몰두했다. 이러한 성찰은 전쟁 중 병사로서 겪은 경험과 최근 아버지와 누이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밀러는 죽음 이후에는 완전한 소멸 또는 신 앞에서의 책임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가능하다고 느꼈으며, 두 가지 모두 그에게 불편함을 주었다.

로우 햄튼으로 돌아온 직후, 밀러는 자신의 침례교 신앙을 되찾기 위한 조심스러운 노력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이신론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지역 침례교회에 출석하는 방식으로 두 입장을 조화시키려 했다. 그의 단순한 교회 출석은 지역 목사가 자리를 비울 때 대신 설교를 읽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서 점차 참여로 바뀌었다. 어느 일요일, 부모의 의무에 관한 설교를 읽던 중 감정에 북받치면서 그의 참여는 완전한 헌신으로 이어졌다. 밀러는 당시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갑자기 구세주의 모습이 내 마음에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우리의 죄를 스스로 속죄하고 죄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할 만큼 선하고 자비로운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즉시 그런 존재가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느꼈고, 그런 분의 품에 안겨 그분의 자비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밀러가 개종하자, 그의 이신론 친구들은 곧 그의 새로운 신앙을 변호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성경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으며, 한 친구에게 "시간을 준다면 이 명백한 모순들을 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도록 조화시키겠고, 그렇지 못하면 나는 여전히 이신론자로 남겠다"고 선언했다. 밀러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하여 각 구절을 깊이 연구했고, 그 의미가 명확해질 때까지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연구 방식을 통해 그는 첫째, 후천년설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확신을 얻었고, 둘째, 그리스도재림 시기가 성경 예언에 나타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4. 2. 성경 연구와 예언 해석

로우 햄튼으로 돌아온 직후, 밀러는 침례교 신앙을 되찾기 위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에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하려 하여 공개적으로 이신론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지역 침례교회에 출석했다. 지역 목사의 잦은 부재 시 설교를 읽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서 그의 출석은 참여로 바뀌었다. 어느 일요일, 부모의 의무에 관한 설교를 읽다가 감정에 북받쳐 참여는 헌신으로 바뀌었다. 밀러는 그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다.

> 갑자기 구세주의 모습이 내 마음에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우리의 범죄를 스스로 속죄하고 죄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할 만큼 선하고 자비로운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즉시 그런 존재가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느꼈고, 그런 분의 품에 안겨 그분의 자비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의 개종 후, 밀러의 이신론 친구들은 곧 그의 새로운 신앙을 정당화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성경을 면밀히 검토하여 "시간을 준다면 이 명백한 모순들을 내 만족에 맞게 조화시키겠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이신론자로 남겠다"고 한 친구에게 선언했다. 밀러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하여 각 구절을 연구하고 그 의미가 명확해질 때까지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첫째, 후천년설이 비성경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둘째,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가 성경 예언에 나타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밀러는 그의 계산의 근본으로 다니엘서 8장 14절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를 근거로 삼아, '성소의 정결함'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 불로 정화되는 지구를 의미한다고 추정했다. 그 후, "하루-일년의 원칙"의 해석 원리를 사용하여 밀러(와 다른 사람들)는 '예언의 날'을 24시간이 아닌 달력의 1년으로 해석했다. 또한 밀러는 2,300일 기간이 기원전 457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칙령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간단한 계산을 통해 이 기간이 1843년에 끝날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밀러는 "나는 이렇게... 그 시점인 1818년으로부터 약 25년 안에 현재의 모든 세상 일이 끝날 것이라는 엄숙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기록했다.

밀러는 1818년까지 자신의 계산에 대한 확신을 가졌지만, 자신의 해석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1823년까지 개인적으로 계속 연구했다. 1822년 9월, 밀러는 20개 조항의 문서에 자신의 결론을 공식적으로 명시했으며, 그중 제15조는 다음과 같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고, 문 앞에 이르렀으며, 21년 안에, 즉 1843년까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밀러는 1831년 8월 첫 번째 일요일에 드레스덴 마을에서 대중 강연을 시작했다.

1832년 밀러는 침례교 신문인 ''버몬트 텔레그래프''에 16편의 기사를 연재했다. ''텔레그래프''는 5월 15일에 이 기사들 중 첫 번째 기사를 게재했고, 밀러는 대중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 견해에 대한 문의 편지로 쇄도하기 시작했고, 방문객들이 이 주제에 관해 나와 대화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1834년, 밀러는 자신이 받은 정보 요청과 여행 및 설교 초대에 개인적으로 응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가르침을 64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로 요약하여 출판했는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이 길었다. ''1844년경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성경과 역사의 증거: 일련의 강연에서 제시됨.''

4. 3. 재림 시기 계산

밀러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가 성경 예언에 나타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계산 근거로 다니엘서 8장 14절 "이천삼백 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를 삼아, '성소의 정결함'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 불로 정화되는 지구를 의미한다고 추정했다. 그 후, "하루-일년의 원칙"의 해석 원리를 사용하여 밀러(와 다른 사람들)는 '예언의 날'을 24시간이 아닌 달력의 1년으로 해석했다. 또한 밀러는 2,300일 기간이 기원전 457년 페르시아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라는 칙령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간단한 계산을 통해 이 기간이 1843년에 끝날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밀러는 "나는 이렇게... 그 시점인 1818년으로부터 약 25년 안에 현재의 모든 세상 일이 끝날 것이라는 엄숙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기록했다.[11][12]

밀러는 1818년까지 자신의 계산에 대한 확신을 가졌지만, 자신의 해석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1823년까지 개인적으로 계속 연구했다. 1822년 9월, 밀러는 20개 조항의 문서에 자신의 결론을 공식적으로 명시했으며, 그중 제15조는 다음과 같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고, 문 앞에 이르렀으며, 21년 안에, 즉 1843년까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밀러는 1831년 8월 첫 번째 일요일에 드레스덴 마을에서 대중 강연을 시작했다.

1832년 밀러는 침례교 신문인 ''버몬트 텔레그래프''에 16편의 기사를 연재했다. ''텔레그래프''는 5월 15일에 이 기사들 중 첫 번째 기사를 게재했고, 밀러는 대중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 견해에 대한 문의 편지로 쇄도하기 시작했고, 방문객들이 이 주제에 관해 나와 대화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1834년, 밀러는 자신이 받은 정보 요청과 여행 및 설교 초대에 개인적으로 응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가르침을 64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로 요약하여 출판했는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이 길었다. ''1844년경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성경과 역사의 증거: 일련의 강연에서 제시됨.''

5. 밀러주의 운동

밀러의 계산에 따라 재림이 1843년에 있을 것으로 표시한 차트


1840년대에 들어 밀러주의는 단순한 지역 운동을 넘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의 목사이자 출판인이었던 조슈아 본 힘스의 역할이 컸다. 힘스는 ''시대의 징조''와 같은 간행물을 통해 밀러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를 예측하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1843년과 1844년 사이의 특정 기간을 제시했으나[6], 예측이 빗나가자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1844년 4월 18일, 그리고 최종적으로 새뮤얼 S. 스노우의 주장에 따라 1844년 10월 22일을 재림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들은 모두 실현되지 않았으며, 특히 1844년 10월 22일의 불발은 추종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밀러주의 운동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 주요 인물들의 활동, 그리고 재림 예측 실패 이후의 상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5. 1. 초기 활동



1840년부터 밀러주의는 지역적인 운동을 넘어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차돈 스트리트 예배당의 목사이자 출판 경험이 풍부했던 조슈아 본 힘스의 역할이 컸다. 힘스는 1842년에 이르러서야 밀러의 사상을 완전히 받아들였지만, 그의 주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미 1840년 2월 28일에 격주 간행물인 ''시대의 징조''를 창간했다.

밀러는 지지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기대하는 재림의 정확한 날짜를 특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재림 시기를 1843년 그레고리력으로 시작하는 히브리력 기간, 즉 "1843년 3월 21일과 1844년 3월 21일 사이 언젠가"로 좁혀 설명했다.[6] 하지만 1844년 3월 21일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자, 추가적인 논의와 연구를 통해 카라이파 달력(랍비 유대교 달력과는 다름)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날짜인 1844년 4월 18일이 잠시 채택되었다.

이전 예측과 마찬가지로 1844년 4월 18일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밀러는 공개적으로 "나는 내 실수를 인정하고, 내 실망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주의 날이 문 앞에 다가왔다고 믿는다."라고 밝혔다.

1844년 8월, 뉴햄프셔 주 엑서터에서 열린 야외 집회에서 새뮤얼 S. 스노우는 "일곱째 달" 메시지 또는 "진정한 한밤중의 외침"으로 알려진 새로운 주장을 발표했다. 그는 성경적 유형론과 다니엘 8장 14절의 2300일 예언 해석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가 "현 시대, 1844년의 일곱째 달 열흘"에 재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라이파 유대인의 달력을 기준으로 이 날짜는 1844년 10월 22일로 정해졌다.

5. 2. 조슈아 V. 하임스와의 협력



1840년부터 밀러주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 운동에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보스턴의 차돈 스트리트 예배당 목사이자 능숙한 출판 경험을 가진 조슈아 본 힘스가 있었다. 힘스는 밀러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으며, 이를 위해 1840년 2월 28일 격주 간행물인 ''시대의 징조''를 창간했다. 힘스 본인이 밀러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1842년이었지만, 그의 출판 활동은 밀러주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3. 재림 시기 수정과 대실망



지지자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밀러는 개인적으로 재림의 정확한 날짜를 특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재림 시기를 히브리력 기준으로 1843년 그레고리력으로 시작하는 해의 어느 시점으로 좁혔다. 그는 "내 원칙은 간단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1843년 3월 21일과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언젠가 모든 성도와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이를 정화하고, 깨끗하게 하며 소유하신다는 것이다."라고 밝혔다.[6]

하지만 1844년 3월 21일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이후 추가적인 논의와 연구를 거쳐 카라이파 유대교 달력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날짜인 1844년 4월 18일이 잠시 채택되었다. 그러나 4월 18일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밀러는 공개적으로 "나는 내 실수를 인정하고, 내 실망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주의 날이 문 앞에 다가왔다고 믿는다."라고 글을 남겼다.

1844년 8월, 뉴햄프셔 주 엑서터에서 열린 야외 집회에서 새뮤얼 S. 스노우는 "일곱째 달" 메시지, 또는 "진정한 한밤중의 외침"으로 알려진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성경적 유형론과 다니엘 8장 14절의 2300일 예언을 근거로, 그리스도가 "현 시대, 1844년의 일곱째 달 열흘"에 재림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카라이파 유대교 달력에 따라 이 날짜는 1844년 10월 22일로 결정되었다.

1844년 10월 22일에도 밀러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고, 이 사건은 밀러주의자들 사이에서 대실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히람 엣슨은 당시의 심정을 "우리의 가장 큰 희망과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고,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슬픔의 영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우리는 울고 울었고, 날이 밝을 때까지 울었습니다."라고 기록했다.[7]

대실망에 대한 밀러주의자들의 반응[8]
1844년 10월 22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예언에 대한 태도반응밀러주의자들의 수현재의 종교 단체
재림 없음1844년 날짜 무효
예언 무효
그들의 믿음을 포기함수만 명대부분 기독교를 떠남
소수는 이전 교회에 재가입
재림 없음1844년 날짜 무효
예언 유효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다
일부는 다른 날짜를 정함
수백 명재림 기독 교회,
여호와의 증인
재림이 일어났음 – 영적으로1844년 날짜 유효
예언 유효
단명한 “거룩한 육신” 운동수백 명셰이커 교도에 합류
날짜는 재림에 관한 것이 아님1844년 날짜 유효
예언 유효
성소의 정화는
예비 심판을 의미함
재림은 여전히 올 것이다
수십 명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대실망 이후, 대부분의 밀러주의자들은 믿음을 버렸다. 그러나 일부는 믿음을 유지하며 다양한 관점과 설명을 제시했다. 밀러 자신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여전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상했던 해는 예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성경 연대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의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며 날짜를 다소 벗어나게 하고 그 불일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9] 밀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10]

6. 대실망 이후

1844년 10월 22일, 윌리엄 밀러가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자, 이 날은 밀러주의자들에게 대실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밀러주의 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추종자들이 믿음을 버리거나 다른 해석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7][8]

일부 추종자들은 예언 해석이나 날짜 계산에 오류가 있었다고 보며 신앙을 유지했고, 이는 이후 밀러주의 운동이 여러 그룹으로 나뉘는 배경이 되었다.[8] 윌리엄 밀러 자신은 예언했던 날짜에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성경 연대기 계산상의 오류 가능성을 언급하며[9] 그리스도의 재림 자체에 대한 믿음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10] 그는 재림이 임박했다는 확신을 간직한 채 1849년 12월 20일에 사망했다.[11] 밀러의 신앙 운동은 예언 실패라는 큰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후 여러 재림주의 교파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6. 1. 밀러주의의 분열

1844년 10월 22일에 밀러의 기대가 실패한 후, 그 날짜는 밀러주의자들의 대실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히람 엣슨은 "우리의 가장 큰 희망과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고,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슬픔의 영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우리는 울고 울었고, 날이 밝을 때까지 울었습니다."라고 기록했다.[7]

대실망에 대한 밀러주의자들의 반응[8]
1844년 10월 22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예언에 대한 태도반응밀러주의자들의 수현재의 종교 단체
재림 없음1844년 날짜 무효
예언 무효
그들의 믿음을 포기함수만 명대부분 기독교를 떠남
소수는 이전 교회에 재가입
재림 없음1844년 날짜 무효
예언 유효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다
일부는 다른 날짜를 정함
수백 명재림 기독 교회,
여호와의 증인
재림이 일어났음 – 영적으로1844년 날짜 유효
예언 유효
단명한 “거룩한 육신” 운동수백 명셰이커 교도에 합류
날짜는 재림에 관한 것이 아님1844년 날짜 유효
예언 유효
성소의 정화는
예비 심판을 의미함
재림은 여전히 올 것이다
수십 명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대실망 이후 대부분의 밀러주의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포기했다. 일부는 그렇지 않았고 관점과 설명이 확산되었다. 밀러는 처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여전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예상했던 해는 예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성경 연대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의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며 날짜를 다소 벗어나게 하고 그 불일치를 설명할 수 있다."[9] 밀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10]

밀러의 추종자들인 밀러주의자들의 추정치는 5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이다. 밀러의 유산에는 61,000명의 회원을 가진 재림 기독 교회와 1,900만 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가 포함된다. 이 두 종파 모두 밀러주의자들과 1844년의 대실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밀러주의자들과 연관된 다른 많은 개인들이 다양한 단명한 단체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훗날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일곱 명의 그룹을 팔레스타인으로 이끈 클로린다 S. 마이너가 포함된다.

윌리엄 밀러의 집은 등록된 국립 역사 랜드마크이며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부지는 뉴욕-버몬트 경계에서 멀지 않다.


밀러는 1849년 12월 20일에 재림이 임박했다고 확신한 채 사망했다. 그는 뉴욕주 로우 햄프턴에 있는 그의 집 근처에 묻혔으며 그의 집은 등록된 국립 역사 랜드마크이며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윌리엄 밀러의 집.[11]

밀러의 집에서 짧은 거리에 있는 윌리엄 밀러 채플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와 재림 기독 교회 회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관리한다.

6. 2. 밀러의 말년과 유산

1844년 10월 22일, 윌리엄 밀러가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자, 이 날은 밀러주의자들에게 대실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히람 엣슨은 당시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희망과 기대는 산산조각 났고,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깊은 슬픔이 우리를 덮쳤습니다... 우리는 울고 또 울었으며, 날이 밝을 때까지 슬픔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7]

대실망 이후 밀러주의자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대실망에 대한 밀러주의자들의 반응[8]
1844년 10월 22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예언에 대한 태도반응밀러주의자들의 수현재의 종교 단체
재림 없음1844년 날짜 무효
예언 무효
그들의 믿음을 포기함수만 명대부분 기독교를 떠남
소수는 이전 교회에 재가입
재림 없음1844년 날짜 무효
예언 유효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다
일부는 다른 날짜를 정함
수백 명재림 기독 교회,
여호와의 증인
재림이 일어났음 – 영적으로1844년 날짜 유효
예언 유효
단명한 “거룩한 육신” 운동수백 명셰이커 교도에 합류
날짜는 재림에 관한 것이 아님1844년 날짜 유효
예언 유효
성소의 정화는
예비 심판을 의미함
재림은 여전히 올 것이다
수십 명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대실망 이후 많은 밀러주의자들이 신앙을 버렸지만, 일부는 믿음을 유지하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밀러 자신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여전히 임박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언에 따른 해는 맞았지만... 성경 연대기 계산에 인간적인 오류가 있어 날짜가 다소 어긋났을 수 있다"고 설명하며[9],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10]

밀러를 따랐던 밀러주의자들의 수는 약 5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의 신앙 운동은 오늘날 약 6만 1천 명의 신도를 가진 재림 기독 교회와 1,900만 명이 넘는 신도를 가진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 두 교단은 모두 밀러주의자들과 1844년의 대실망 사건에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외에도 밀러주의자들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단체를 설립했는데, 그중에는 훗날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소그룹을 이끌고 팔레스타인으로 간 클로린다 S. 마이너와 같은 인물도 있었다.

밀러는 재림이 임박했다는 확신을 간직한 채 1849년 12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뉴욕주 로우 햄프턴에 있는 자택 근처에 묻혔으며, 그의 집은 등록된 국립 역사 랜드마크이며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11]

7. 프리메이슨과의 관계

밀러는 1831년까지 활동적인 프리메이슨이었다.[2][3] 그는 1831년에 "메이슨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떤 행위와의 교류를 피하기 위해" 프리메이슨 회원 자격을 사임했다.[4] 이후 1833년에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리메이슨을 "다른 모든 악과 마찬가지로" 취급해야 한다고 언급했다.[5]

8. 평가 및 영향

윌리엄 밀러는 19세기 미국 종교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주장한 재림 예언은 당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지만, 예언이 실현되지 않은 사건, 이른바 '대실망'으로 인해 많은 추종자들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밀러의 사상과 운동은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여러 재림주의 교단이 형성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특히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설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가르침은 한국개신교, 그중에서도 재림 신앙을 가진 교단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성경 예언 해석과 종말론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8. 1. 주요 저서

참조

[1] 웹사이트 Adventist Heritage: Miller Farm http://www.adventist[...] 2006-06-08
[2] 문서 Miller (listed as Capt. Miller) is later given as one of the early masters of Morning Star Lodge, No. 27. This lodge is said to have been "organized in Poultney prior to 1800, though the exact date is not known." David L. Rowe's recent Miller biography God's Strange Work: William Miller and the End of the World.
[3] 서적 God's Strange Work: William Miller and the End of the World Eerdmans
[4] 서적 God's Strange Work: William Miller and the End of the World Eerdmans
[5] 서적 God's Strange Work: William Miller and the End of the World https://books.google[...] Eerdmans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서적 William Miller and the Advent Crisis Andrews University Press
[10] 웹사이트 Miller Farm http://www.adventist[...] 2017-12-29
[11] 웹사이트 Miller Farm http://www.adventist[...] 2017-12-29
[12] 서적 Memoirs of William Miller http://www.andrews.e[...] Andrews University Press
[13] 웹사이트 The Midnight Cry http://www.giveshare[...]
[14] 간행물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2008-Autumn
[15] 서적 창조론자들 새물결플러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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