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정률은 평안남도 출신의 한국 천주교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변화된 삶을 살았다. 1866년 체포되어 평양 감영에서 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켰고, 3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968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66년 사망 - 김정호
김정호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조선 시대 지리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 95016 김정호가 명명되었다. - 1866년 사망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37년 출생 - 그로버 클리블랜드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미국의 22대, 24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소속이며 연속되지 않은 두 번의 임기를 수행한 유일한 인물로서, 정직성과 청렴성을 강조하며 부패에 맞서 싸웠고 관세 인하와 재정 개혁을 추진했으며, 대통령 재임 중 백악관에서 결혼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 1837년 출생 - 와일드 빌 히콕
제임스 버틀러 "와일드 빌" 히콕은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명사수 총잡이이자 법 집행관, 정찰병으로, 여러 총격전과 살인 사건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포커 게임 중 살해당해 "죽은 자의 손"과 함께 서부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았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유정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유정률 베드로 |
출생일 | 1837년 |
사망일 | 1866년 2월 17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평양 논재 |
사망지 | 평양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68년 10월 6일 |
시복인 | 교황 바오로 6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유정률은 평양 인근의 논재(현재의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에서 태어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1] 젊은 시절에는 급한 성격과 도박을 즐기는 등 다소 거친 삶을 살았으나, 1864년 28세의 나이로 천주교에 입교하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그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1] 그는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신앙에 귀의하여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파했다.[1]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유정률은 고둔리 공소에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기도하던 중 체포되었다.[1] 평양 감영으로 압송된 그는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결국 1866년 2월 17일 3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1] 그의 순교는 훗날 1876년 평양 감사 이재청이 세운 척사기념비를 통해 역설적으로 기록되기도 했다.[1]
2. 1. 출생과 유년 시절
유정률은 평양의 논재(현재의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짚신을 엮어 팔아야 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젊은 시절 그는 성미가 매우 급했으며, 아내를 함부로 대하고 도박을 즐기는 등 다소 거친 면모를 보였다.2. 2. 천주교 입교와 신앙 생활
1863년~1864년 경, 유정률은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1864년 28세의 나이로 한양으로 올라가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 그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 아내를 모질게 대했던 것과 달리, 아내에게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했다. 그는 지난날 아내에게 잘못했던 행동과 방탕했던 삶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신꼬리를 고편 삼아 스스로에게 매질을 하기도 했다. 또한 좋아했던 도박을 완전히 끊고, 극기와 인내로 신앙생활에 힘썼다. 그의 변화된 모습과 충실한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어 많은 이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이끌었다.2. 3. 체포와 순교
1866년 병인박해가 임박했다는 소문에도 유정률은 동요하지 않았다. 같은 해 음력 설날, 친척들에게 세배를 마친 뒤 "안녕히들 계십시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순교를 암시하기도 했다.설날 저녁, 고둔리 공소에서 집주인이자 교리교사인 정 빈첸시오를 비롯한 여러 교우들과 함께 기도하던 중 포졸들에게 급습당했다. 많은 교우들이 피신했지만, 유정률과 정 빈첸시오, 그의 조카 우세영 알렉시오 등 5명이 체포되었다. 유정률은 순교자가 될 기회를 얻었다며 오히려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평양 감영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평양 감영에는 이미 100여 명의 교우들이 잡혀와 있었는데, 이들은 혹독한 형벌과 고문에 시달렸다. 대부분의 교우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지만, 유정률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당시 평양 감사였던 정지용은 배교한 100여 명의 신자들에게 유정률을 곤장으로 세 대씩 치게 하는 형벌을 가했다. 이를 거부하는 배교자는 형리에게 대신 곤장을 맞아야 했다.
다음 날인 1866년 2월 17일, 유정률은 300여 대의 곤장을 맞고 3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감사 정지용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시신을 불태우게 한 뒤, 배교자 다섯 명을 시켜 대동강에 던져 버리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그날 밤, 유정률의 아내가 몰래 강에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훗날 1876년, 평양 감사 이재청은 대동강 변 영명사 터에 척사기념비(斥邪紀蹟碑)를 세웠다. 이는 전임 감사 정지용의 천주교 탄압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역설적으로 유정률의 숭고한 순교를 증언하는 기념물이 되었다. 이 비석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2. 4. 순교 이후
유정률이 순교한 지 10년 뒤인 1876년, 당시 평양 감사였던 이재청은 대동강 변의 영명사에 척사기념비(斥邪紀蹟碑)를 세우도록 명령했다. 이 비석은 본래 전임 감사 정지용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고 처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유정률의 성인적 순교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이 기념비는 여전히 그곳에 세워져 있다.3. 시복 · 시성
유정률 베드로는 1968년 복자품에 올랐고,[1][2]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3. 1. 시복
유정률 베드로는 1968년 10월 6일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1]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2]3. 2. 시성
유정률 베드로는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1]을 통해 복자가 되었다.[2]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참조
[1]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1-04
[2]
뉴스
"[교황 방한] 1925년·1968년·2014년…로마에서 서울까지 3번의 시복식"
http://news1.kr/arti[...]
뉴스1
2014-08-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