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구 (18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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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병구는 1880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배재학당과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하와이 이민 후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1905년 이승만과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1907년 헤이그 특사 통역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 대한인국민회 회장을 역임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했고,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1949년 사망했으며,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윤병구는 배재학당과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호머 헐버트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1년부터 인천에서 통역관 및 교사로 활동했고, 1902년에는 개성에서 호수돈 여학교 교사로 일했다.[3]
이승만과는 배재학당 동기로서[1], 그 시절부터 서로 의형제를 맺고 동생이자 평생 동지적 관계로 그의 독립운동을 뒤에서 지원하였다. 1934년 10월 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서주었다.
[1]
웹인용
Pyeng Koo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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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9
2. 생애 및 활동
1903년 8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홍승하, 안정수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여 한인 사회의 단결과 발전을 위해 힘썼다.[4] 같은 해 10월 5일 하와이로 이민하여, 1904년 4월 에와 농장에서 에와친목회를 조직하고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4]
1905년 러일 강화회의를 계기로 에와친목회는 로스앤젤레스의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윤병구를 한국 대표로 파견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국방장관과 앨리스 루즈벨트 일행의 방문을 맞아 대규모 민중대회를 열었고, 윤병구는 이승만과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조미수호조약에 따른 한국 독립을 청원하는 대표로 선출되었다.[5]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특사 이상설과 이위종이 뉴욕에 도착하자, 윤병구는 통역을 위해 특사 일행에 합류했다.[7] 이준 특사의 죽음과 일제의 방해로 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특사 일행은 구미 열강을 상대로 구국 외교를 펼쳤다.[7]
1908년 2월 3일, 뉴욕에서 한인 정치 활동에 참여했고,[3] 박용만, 송헌주 등과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여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한국 독립 지지 여론을 조성하고자 했다. 같은 해 7월, 덴버에서 한인 국제회의를 주최하여 해외 한인 단체 통합과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했다.[9]
1910년 2월 1일, 대한인국민회가 발족되자, 윤병구는 대도(大道)의 주필을 맡았고,[1] 1910년 7월 4일 샌프란시스코 ‘합방 반대’ 특별회에서 임시 의장으로 애국동맹단을 결성하고 ‘합방 반대’ 「취지서」와 「청원서」를 발송하였다.[4]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4]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캘리포니아 리들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리들리 한인 감리교회를 설립하고, 1927년부터 1936년까지 뉴욕 한인감리교회(KMCI) 제3대 담임목사로 재직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4]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결혼식 주례를 보기도 했다.[4]
1946년 4월, 리들리 한인장로교회 목사로 청빙받아 나성과 리들리를 왕래하며 교회를 섬겼다.[4] 1949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귀국하던 중 호놀룰루를 경유했고,[3] 1949년 3월 14일 46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4] 귀국 후 외무부와 공보부 고문으로 임명되어 한미협약서 초안 작성에 몰두하다 1949년 6월 20일 사망했고, 6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4]
2. 1. 초기 생애 (1880~1903)
윤병구는 어릴 적 부모가 사망하여 고모에게 입양되어 우병길(禹炳吉)로 개명했다가, 1904년 말경 하와이 이민 후 다시 윤병구로 고쳤다.[2] 1897년까지 배재학당에 다녔고, 그 해 한성사범학교에 들어가[2] 1899년 졸업하였다.[1] 같은 해 호머 헐버트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조지 H. 존스(George H. Jones)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1] 얼마 후 오아영(Agnes Oh)과 결혼하였고,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였다. 1901년부터 인천지방 감리교선교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안정수와 함께 인천 영화학교(永化學校)에서 4, 5개월간 교사로 활동했다.[3]
1902년, 콜리어(Charles T. Collyer, 高永福) 목사의 요청으로 개성 남감리교 교회에서 사무를 도우면서, 그 해 개교한 호수돈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3]
2. 2. 하와이 이민과 초기 목회 활동 (1903~1904)
1903년 8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홍승하, 박윤섭, 문홍섭, 임치성, 임형주, 김정극, 안정수, 이교담 등 감리교 신자들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 홍승하가 신민회 회장에 추대되어 일제의 침략에 맞서고 하와이 한인 사회의 단결과 민지 계발을 위해 활동했다.[4]
1903년 10월 5일, 하와이 한인들의 요청으로 부인과 2개월 된 아들을 두고 홀로 하와이에 갔다. 이후 1904년 3월 30일 부인과 아들 조슈아 윤(Joshua Yoon)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3] 하와이 제일감리교회 피어슨(G. L. Pearson) 목사의 통역을 담당하며 한인들을 전도했고,[1] 이후 존 와드먼(John W. Wadman) 감리사를 도와 목회 활동을 했다.[1]
1904년 4월, 하와이 이주 한인들에게 불법적인 인민세를 징수하려는 주 당국에 맞서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투쟁했다. 오아후 섬의 에와 농장에서 정원명, 김성구, 이만춘, 김규섭, 강영소 등과 함께 기존 신민회를 해체하고 에와친목회를 조직,[4] 정원명을 회장으로 추대하여 신민회의 정신을 이어 활동했다.
2. 3. 대한제국 독립 청원 외교 (1905, 1907)
1905년 러일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에와친목회는 로스앤젤레스의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한국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윤병구를 본토로 파송하였다. 하와이 동포들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국방장관과 앨리스 루즈벨트 일행의 하와이 방문을 계기로 대규모 민중대회를 열어, 윤병구의 지휘 아래 하와이 한인 4,000여 명의 이름으로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따른 한국 독립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청원하기로 결의하였다.[5] 이 대회에서 윤병구와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할 대표로 선출되었다.[1][6][5]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특사 이상설과 이위종이 뉴욕에 도착한 뒤, 윤병구는 통역을 위해 특사 일행에 합류했다.[7] 이준 특사의 갑작스런 죽음과 일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특사 일행은 구미 열강을 상대로 하는 구국 외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2. 3. 1.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립 청원서 제출 (1905)
1905년 7월, 러일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에와친목회는 로스앤젤레스의 공립협회와 연합하여 한국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윤병구를 본토로 파송하였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앨리스 루즈벨트와 그녀의 남편인 하원의원 롱워스와 함께 극동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5] 하와이 동포들은 이들을 환영하는 대규모 민중대회를 열었고, 윤병구의 지휘 아래 하와이 군도에 있는 4,000여 명의 한인들의 이름으로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따른 한국 독립의 보호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청원하기로 결의하였다.[5]
이 대회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할 대표로 윤병구와 이승만이 선출되었고,[1][6][5] 여비로 500USD이 모금되었다.[3] 하와이 감리교 소속 와드먼 박사는 두 대표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소개하는 서한을 태프트 국방장관에게 쓰도록 권유하였다.[5]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가지고 두 사람은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찾아갔다.[5] 이들은 서재필의 도움으로 청원서의 최종 문구를 수정하고 뉴욕으로 향했다.[5] 7월 5일 아침, 이들은 롱아일랜드 새거모어 힐 오이스터 베이에 도착하여 대통령 별장 앞 옥타곤 호텔에 투숙하였다.[5]
신문들은 별장으로 찾아온 이 두 젊은 동양인에게 관심을 보이며 여러 질문을 던졌지만, 이승만과 윤병구는 외교 의례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대통령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5] 기자들은 "대통령은 당신들을 만날 시간이 없기에 몇 달 머물러 있더라도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다"라고 비관했다.[5]
그러나 그날 저녁 레브 비서로부터 다음날 아침 9시에 루즈벨트 대통령 사저를 방문하라는 전화가 오자, 기자들은 몰려와서 그들이 취할 대책에 관해 질문하며 대통령과의 면담을 축하해주었다.[5]
다음날 아침, 돈을 주고 빌린 정식 외교 프록코트와 실크 해트를 차려입고 마차를 타고 응접실로 안내되었다.[5] 이들이 청원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하자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여러분께서 이토록 나를 찾아 주신데 대하여 기뻐 마지 않습니다. 나도 귀국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원합니다만, 이 탄원서가 공식적 경로를 밟지 않은 이상 나로선 처리하기가 곤란합니다. 중국 정부가 대사관을 통하여 이와 유사한 진정서를 제출하여 왔는데 당신들도 공사관을 통하여 이를 제출한다면 중국 정부에서 온 탄원서와 함께 내가 강화회의에 제출하려 합니다.
>
>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나의 입장은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두 나라 대표를 한 자리에 초대한데 불과한 것 뿐이고, 이 회의에 간섭할 아무 권한도 없습니다. 그러나 귀국 공사관을 통해서 이것을 보내주시면 나는 즉시 두 개의 탄원서를 제출하겠습니다. 귀국의 공사가 이것을 제출하러 가서 만약 국무장관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 이것은 본인에게 제출되는 것이라고 이르고 아무에게나 맡겨 놓고 가십시요. 이것만이 필요한 절차입니다.[5]
이날 이승만이 루즈벨트에게 전달한 밀서(密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러일 전쟁에 승리를 거둔 후 일본국은 우리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적 안전을 존중하고 보장키로한 그 조약을 무시하고 사실상 대한제국 침략을 합리화하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양국의 강화조약을 조정하는 귀 대통령께서 1882년 조미수호 통상조약 정신에 입각하여 이와같은 일본의 계책을 중지하고 한국이 일본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선해 줄 것을 앙청하나이다.[5]
이후 이 둘은 곧바로 역으로 달려가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하였다. 「워싱턴 포스트」 지(紙)를 비롯한 주요 매체들은 이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한 경위와 이것을 공사관을 통하여 공식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워싱턴으로 향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다.[5] 그러나 당시 주미 공사였던 김윤정은 이미 일본에 매수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의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2. 3. 2. 헤이그 특사 통역 (1907)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특사 이상설과 이위종이 1907년 8월 1일 뉴욕에 도착한 뒤 로아노크 대학에서 공부하던 송헌주, 윤병구 목사와 통역을 위해 합류했다. 이 두 사람이 통역을 담당하는 한국 특사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덴버에서 활동중인 박용만의 적극적인 주선과 재정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7] 이준 특사의 갑작스런 죽음과 일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구미 열강을 상대로 하는 구국 외교로 방향을 바꾸기로 하고 미국에 다시 돌아왔다.
1907년 9월 3일, 헤이그의 국제기자협회를 상대로 일본의 국권 강탈을 규탄하고 한국 독립을 호소하여 『해조신문』에 소개되었다.[7]
2. 4. 미주 한인 사회 활동과 대한인국민회 (1908~1921)
1908년 2월 3일, 뉴욕으로 돌아와 한인들의 정치활동에 활발히 참석하였다.[3]
1908년 3월, 박용만, 송헌주 등과 함께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여 그해 7월 개최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데 노력하였다. 또 이 대회에서 해외 한인들의 결속 방안과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하며 출판사업 및 한인 통신소 설치, 군사학교 설립 등을 결의하였다.
1908년 7월 10일부터 15일까지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한인 국제회의를 주최하였다. 윤병구는 이를 위해 영국에 건너가 거기 살고있는 소수의 한인들에게 적극적인 애국 운동 참여와 지원을 권고하였다.[9] 이후 미국에 돌아와 이승만과 함께 덴버의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모든 해외 한국 대표자들을 초대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러시아, 중국, 영국, 하와이 및 미국 각지로부터 여러 대표들이 참석했다.[9]
1908년 7월 11일, 최초의 회합이 소집되었을 때에 참가한 대표자 수는 총 36명이었다.[9] 이승만은 의장으로서 개회사를 했고 윤병구는 영문 서기를 맡았으며 개회식에서 ‘동양에 대한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4] 회의에서는 한인들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을 신문에 발표하도록 하기 위해서 영문으로 작성하였다.[9] 7월 12일자 「덴버 리퍼블리칸」 지(紙)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9]
본 회의에서는 스탠포드 대학 총장 데이비드 스타 요르단 씨가 또한 개회사를 하였으며 덴버 주민도 다수 참석하였다.[9] 최고 절정에 달한 그들의 포부는 7월 14일자 「덴버 리퍼블리칸」 지에 추가로 보도되었다.[9] 신문은 그 전날 채택된 결의문을 열거했는데 그 내용은 각종의 수많은 한국인 단체를 하나의 중앙 단체로 통합하고, 양서(洋書)의 한문 번역을 목적으로 하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세계 정세를 알리기 위해서 한국 내에 번역서를 배포하는 것 등이었다.[9]
윤병구 목사는 1910년대와 1920년대 초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한인 사회의 지도자이자 이민 목회자였다.
1910년 2월 1일, 군소 단체로는 큰 힘을 낼 수 없고 또 대외적인 위신을 세울 필요가 있는 현실을 깨닫게 됨에 따라 각 단체의 지도자들은 군소 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결국 재미 한인단체의 통합을 보게 되어 재미 한인교포 자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를 발족했다. 이 단체는 중앙총회 사무소를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각지에 지방총회와 지방회를 두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지방분권제인 대의원제를 택하여 각 지방에서 선출한 대표의 회의인 중앙총회에서 국민회 전체를 운영케 하였으며, 부속기관으로 경찰도 두었다.
1910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기독교 월간잡지 《대도(大道)》 주필 겸하며[1]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중심으로 합방반대 임시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하며 결의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1910년 7월 4일, 샌프란시스코 ‘합방 반대’ 특별회 때 윤병구는 임시 의장으로서 애국동맹단을 결성하고 ‘합방 반대’ 「취지서」와 「청원서」를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 천황, 그리고 대한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9개국 정부에 발송하였다.[4]
1910년 11월,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안에 대한소학교를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한국 역사를 가르쳐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1912년 11월, 미주지역 한인단체의 통합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된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중앙대의회를 개최할 때 박상하(朴相夏)·정원명(鄭元明)과 함께 하와이 지방총회 대표로 참가해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선발된 12인의 대표와 함께 대한인국민회 헌장(憲章)을 제정하고 세금과 의무금 수납제를 규정하였다.
1914년 1월, 워싱턴 주 위니치로 이주하여 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한인 청년들에게 농공 분야의 실용 학문을 장려하는 활동을 추진하였다.
2. 5. 목회 활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1922~1945)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캘리포니아 리들리에서 250에이커 규모의 수박 농사를 지으며, 1922년 미국 남감리교 순행 목사 임정구 등과 함께 감리사 윌리암 A. 데이비스 목사의 지도로 리들리 한인 감리교회를 설립하고 파트타임 교역자로 재임했다.[4] 1925년 이 교회를 사임했다.[4]
1927년부터 1936년까지 뉴욕 한인감리교회(KMCI) 제3대 담임으로 목회하면서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1] 1931년 12월 13일 뉴욕 한인교회에서 대학생들이 재미조선문화회를 설립할 때 이사로서 이를 후원하였고,[4]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는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승만과는 배재학교 동기로,[1] 의형제를 맺고 평생 동지적 관계로 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34년 10월 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섰다.
1936년 은퇴 후에도 1939년까지 뉴욕에 머물다가, 서부의 한 조선소에 취직하여 가족과 함께 LA로 이주하였다.[1][4] 1943년 LA에서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조직하여 2차 대전에 참전하는 한인 가족을 지원하였고, 영문 월간지 『The Star Exponent』를 발간하였다. 1945년 UN 창립 총회에 임시정부 대표(교제부장, 재정 검사원)로 활동하였다.
2. 6. 광복 이후 활동과 사망 (1946~1949)
1946년 4월, 리들리 한인장로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아 한국에 갈 때까지 나성과 리들리를 왕래하면서 교회를 섬겼다.[4] 동지회 북미총회 선전부장으로서 동지회 발전과 이승만의 정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1][4]
1949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귀국하는 중에 호놀룰루를 경유하여 아들 제임스 윤(James Yoon) 집에 머물렀다.[3] 그는 하와이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사였기 때문에 그해 2월 21일부터 26일까지 하와이 주요 매체인 「스타 불레틴」과 「애드버타이저」는 계속하여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3]
1949년 3월 14일, 46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윤병구는 군목으로 지내기를 원했으나, 이승만은 그를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으로 임명하였다.[4] 그는 해외 한인들을 격려하고 48개 우방국과 친선 외교를 펼쳤다.[4]
윤병구는 한미 간의 새 협약이 필요함을 인지하고 한미협약서 초안 작성에 몰두하다가 1949년 6월 20일 아침,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4] 장례식은 6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장으로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https://blog.naver.com/romancy0917/223155714883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6월 28일, 호놀룰루의 한인기독교회에서 김태묵 목사 집례로 장례 예배가 있었다.[3]
3. 이승만과의 관계
1919년 4월 14일, 한인연합대회에 참석하여 서재필, 이승만과 함께 미국과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 요청서 작성자 3인으로 선정되었다.[1][4]
1921년, 다뉴바 한인교회에서 42명의 한인들과 함께 시사연구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임시정부를 개조하려는 국민대표회를 반대하고 이승만과 임정을 지지했다.
1945년 4월, 이승만 등과 함께 국제연합 결성에 참가할 임시정부 대표로 선발되어 교제부장과 재정 검사원으로 활약하였다.[4]
1946년, 동지회 북미총회의 선전부장으로서 동지회의 발전과 이승만의 정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1][4]
1949년 2월, 대통령 이승만의 초청으로 귀국하였다.[3] 1949년 3월 14일, 46년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윤병구는 군목으로 지내기 원했으나 이승만은 그를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으로 임명하였다.[4]
1949년 6월 24일 그의 장례식은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장으로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대통령 이승만이 직접 참석하여 [https://blog.naver.com/romancy0917/223155714883 추도사]를 직접 낭독하였다.
4. 상훈
참조
[2]
문서
1895년에 서울에 설립된 관립 교원양성학교
[3]
웹인용
하와이 그리스도교회 (Christ United Methodist Church)
http://www.hawaiicum[...]
[4]
뉴스
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7. 윤병구
http://www.chpress.n[...]
미주크리스천신문 (The Korean Christian Press)
[5]
서적
人間 李承晩
新太陽社
[6]
서적
Phillip Jaisohn : The First Korean-American, A Foreign Hero
[7]
문서
1908. 3. 19~20
[8]
뉴스
해당 사진은 《Daily Rocky Mountain News》 1908년 7월 13일자 7면에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9]
서적
人間 李承晩
新太陽社
[10]
문서
한인 군인친족회 (Korean Society of Soldiers' & Sailors' Relatives & Friends, Inc.)
[11]
문서
조슈아 윤(Joshua Yoon)과 3살된 딸 사라 윤(Sarah Yoon)
[12]
뉴스
북미통신 제1 :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한인학생 윤병구씨
http://waks.aks.ac.k[...]
뎨국신문
1907-04-25
[13]
뉴스
“From Corea to Harvard: P. K. Yoon Has a Unique Distinction Amongst the University Students.”
New York Tribune
1907-03-31
[14]
문서
이승만은 1907년, 가을 학기부터 하버드에 다녔으므로 윤병구가 한국인 최초 하버드 입학생, 이승만이 두번째 입학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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