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준 (18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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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태준은 1839년에 태어나 갑신정변 당시 살해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통훈대부 윤후성의 아들로 태어나 윤교성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자는 치명, 호는 석정이다. 1870년 사부학당 유생으로 고종 앞에서 제술하여 차석을, 187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세자익위사 세마, 통리기무아문 주사, 수신사 종사관, 영선사 종사관 등을 역임하며 청나라 텐진에서 기계 도입을 목격하고 기기창 건립에 기여했다. 188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명성황후를 보호하고, 농상사협판, 친군영 감독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수구파를 보호하다가 독립당에게 살해되었으며, 사후 증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충정의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형향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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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준 (183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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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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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정보 | |
이름 | 윤태준 |
한자 이름 | 尹泰駿 |
자 | 군평(君平) |
호 | 운양(雲養) |
본관 | 파평 윤씨 |
출생 | 1839년 |
사망 | 1897년 |
묘소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윤정현(尹定鉉) |
어머니 | 남양 홍씨 |
부인 | 정부인 남양 홍씨 |
아들 | 5남 |
딸 | 2녀 |
관력 | |
과거 급제 | 1869년(고종 6년) 식년시 병과 |
주요 관직 | 홍문관수찬 사간원정언 성균관사성 이조참의 공조참판 형조참판 한성부우윤 동지의금부사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지경연사 비변사당상 도총부도총관 의정부찬성 |
2. 생애
1870년(고종 7년) 사부학당 유생으로 공부하던 중, 고종이 사부학당에 나가 친히 강경을 제술할 때 그는 제술 경 분야에서 차석을 받았다. 1873년(고종 10년) 식년과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어 음보로 벼슬길에 올라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1875년 익위사 좌세마, 1881년 1월 통리기무아문 주사에 임명되었다. 1881년 2월 수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같은 해 69명의 영선사가 청나라에 파견될 때 김윤식 등과 함께 영선사 종사관으로 청나라 텐진에 다녀왔다. 이때 텐진과 베이징에서 기계가 도입된 것을 목격하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1882년(고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어(司禦), 직각(直閣) 등을 지냈다. 그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세자익위사사어로 재직 중 명성황후를 자신의 집으로 은신시켰다. 임오군란 당시 난군 군사들이 민비(閔妃)를 찾아내 죽이려 할 때 홍계훈이 가마에 태워서 데리고 나온 민비를 한성부의 은신처로 피신시켰다가 밤에 자신의 집으로 이동하여 보호한 뒤 경기도 여주를 거쳐 충청북도 충주로 피신하게 했다. 임오군란 당시 왕비의 도피와 피신에 측근에서 활약하였으며, 민비의 밀사로 비밀리에 입궁하여 고종에게 흥선대원군 제거를 위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해 9월 금구현령으로 부임했다가 11월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2월 특별히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었다.
청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임오군란이 진압된 뒤 명성황후를 보호한 공로로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민씨 척신 세력과 온건 개화파들이 결합하여 관제개혁이 진행되어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편될 때 농상사협판(農商司協辦)으로 임명되었다. 친군영(親軍營) 감독이 되었다가, 고종이 군제를 개혁할 때 친군영을 개편하여 좌영과 우영으로 나누자 친군영 우영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883년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을 역임하였다.
1883년 이조 참의를 거쳐 종2품으로 가자되고 참판이 되었으며, 친군영 우영 감독을 겸임하였다. 그해 군국사무아문 협판이 되었다. 1884년 기존 친군영 2영에 전영(前營)·후영이 증설되어 4군영제로 확대되면서 후영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1월 훈련 중 대오가 어수선해지자 파면당하였다. 3월 협판교섭통상사무로 복직하였다. 9월 15일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으나 하루 만에 협판교섭통상사무, 협판군국사무로 개차되었다. 후영사로서 사대당과 온건파를 보호하다가,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낙성식을 기하여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 장사 윤경순 등에게 살해되었다.
개화파가 수구파를 초청하여 살해할 때 부빈(部賓)으로 초청되었으나, 그날 밤 숙직인 관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12월 5일 고종 내외가 경우궁으로 이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경우궁에 도착, 입구에서 개화파 군사를 이끌던 윤경순의 군사와 교전하였다. 윤경순의 칼에 맞고 이어 이규완의 부하가 윤태준의 머리를 철퇴로 내리쳐 머리가 깨져 죽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1884년 가을 이종질인 서재필을 초청하여 탕면을 대접하면서 박영효 일파가 작당한다는 소문을 들었느냐고 묻자, 거사가 탄로난 것으로 여긴 서재필이 달려가 거사 날짜를 당겨 서두르게 했다 한다.
2. 1. 초기 활동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통훈대부 행평택현감을 지낸 윤후성(尹厚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자헌대부 예조판서를 지낸 윤교성(尹敎成)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자는 치명(稚命)이고 호는 석정(石渟)이다. 또한 서재필의 양 이종숙이 된다.1870년(고종 7년) 사부학당의 유생으로 공부하던 중, 고종이 사부학당에 나가 친히 강경을 제술할 때 그는 제술의 경 분야에서 차석을 받았다. 1873년(고종 10년) 식년과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어 음보로 벼슬길에 올라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1875년 익위사 좌세마, 1881년 1월 통리기무아문의 주사에 임명되었다. 1881년 2월 수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같은 해에 69명의 영선사가 청나라에 파견될 때 김윤식 등과 함께 영선사의 종사관으로 청나라 텐진에 다녀왔다. 그가 톈진에 갈 때 그의 절친한 친구 한장석(韓章錫)은 특별 증별시를 써서 그에게 주었다.
이때 텐진과 베이징에서 기계가 도입된 것을 목격하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2. 2.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1882년(고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어(司禦), 직각(直閣) 등을 지냈다. 그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세자익위사사어로 재직 중 명성황후를 자신의 집으로 은신시켰다. 명성황후는 경기도 여주(驪州)의 친정 손자뻘 되는 친척의 집에 숨었다가 역시 손항의 먼 친척 민응식의 집이 있는 충청북도 충주에 피란하였다.임오군란 당시 난군 군사들이 민비(閔妃)를 찾아내 죽이려 할 때 홍계훈이 가마에 태워서 데리고 나온 민비를 한성부의 은신처로 피신시켰다가 밤에 자신의 집으로 이동하여 보호한 뒤 여주를 거쳐 충주로 피신하게 했다. 임오군란 당시 왕비의 도피, 피신 중 측근에서 활약하였으며, 민비의 밀사로 비밀리에 입궁하여 고종에게 흥선대원군의 제거를 위해서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해 9월 금구현령으로 부임했다가 11월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이후 특별 천거로 규장각 직각에 천거되었으나 7등으로 낙점되었지만 그해 12월 특별히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었다.
청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임오군란이 진압된 뒤 명성황후를 보호한 공로로 왕실의 신임을 얻었으며, 민씨를 중심으로 한 척신 세력과 온건 개화파들이 결합, 관제개혁이 진행되어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편될 때 농상사협판(農商司協辦)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친군영(親軍營)의 감독이 되었다가, 고종이 군제를 개혁할 때 친군영을 개편하여, 친군영 좌영과 우영으로 나뉘어 편제되자 그는 친군영 우영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883년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을 역임하였다.
2. 3. 갑신정변과 최후
1883년 이조 참의를 거쳐 종2품으로 가자되고 참판이 되었으며, 친군영 우영 감독을 겸임하였다. 그해 군국사무아문 협판이 되었다.1884년 기존 친군영 2영에 전영(前營)·후영이 증설되어 4군영제로 확대되면서 후영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1월 훈련 중 대오가 어수선해지자 파면당하였다. 그해 3월 협판교섭통상사무로 복직하였다. 9월 15일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으나 하루 만에 협판교섭통상사무, 협판군국사무로 개차되었다. 후영사로서 사대당과 온건파를 보호하다가,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낙성식을 기하여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 장사 윤경순 등에게 살해되었다.
개화파가 수구파를 초청하여 살해할 때 부빈(部賓)으로 초청되었으나, 그날 밤 숙직인 관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12월 5일 고종 내외가 경우궁으로 이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경우궁에 도착하였다. 경우궁 입구에서 개화파 군사를 이끌던 윤경순의 군사와 교전하였다. 윤경순의 칼에 맞고 이어 이규완의 부하가 윤태준의 머리를 철퇴로 내리쳐 머리가 깨져 죽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1884년 가을 이종질인 서재필을 초청하여 탕면을 대접하면서 박영효 일파가 작당한다는 소문을 들었느냐고 묻자, 거사가 탄로난 것으로 여긴 서재필이 달려가 거사 날짜를 당겨 서두르게 했다 한다.
3. 사후
4. 저서
- 형향록
5. 가족 관계
구분 | 이름 |
---|---|
친아버지 | 윤후성 |
양아버지 | 윤교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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