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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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세호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군인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육군 제1보병연대 소대장, 육군 제8보병사단 참모장, 육군 제28보병사단장,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차장, 육군보병학교장, 육군사관학교장, 육군 제6군단장을 거쳐 주월한국군사령관, 육군 제3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79년 대장으로 예편했으며,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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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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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세호 |
한자 표기 | 李世鎬 |
로마자 표기 | I Se-ho |
출생일 | 1925년 7월 26일 |
사망일 | 2013년 4월 28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특급시) |
사망지 | 대한민국 경기도 용인시 |
본관 | 나주 (羅州) |
종교 | 개신교 |
별명 | 호(號)는 산남(山南) |
정당 |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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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경력 | |
소속 조직 | |
복무 기간 | 1944-1945 (일본 육군), 1946-1979 (한국 육군) |
최종 계급 | 伍長 (일본 육군), 대장 (한국 육군) |
근무 | 육군본부 |
지휘 | 육군참모총장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
기타 이력 | |
기타 이력 | 국방부 촉탁위원 자민련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243호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1925년 7월 경기도 개성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특별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 김기연은 목사였으며, 자주 일본 관헌의 조사를 받았고, 이에 싫증을 느껴 군인을 志望했다.[1]
귀향 후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주선해 준 목사의 아들 윔즈 중령을 소개받았다. 중앙청 방문 시 윔즈 중령의 권유와 원용덕 참령의 보증으로 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1946년 9월 24일)[1]
1947년 6월 1일 중위로 진급하여 중대장이 되었다.[1] 1948년 1월 10일에는 대위로 진급, 제주도 제9연대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연대장은 김익렬 중령, 부중대장은 중위였으며, 초기 2개 중대 규모에서 모병을 통해 1개 대대 규모로 성장했다. 제주4·3사건에서는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서 모슬포에서 토벌 작전에 종사했다. 이후 연대장 직무대행을 겸임했지만, 병사 41명의 탈영과 연대장 암살 사건이 발생했고, 친분이 있던 문 중위가 양쪽에 모두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
반복되는 사건에 지쳐 10일간 휴가를 얻어 서울을 방문, 경비대 사령부에서 인사국장 최영희의 보임과장 제안을 받았다. 대대장 승진이 결정된 상태였으나 섬을 떠나고 싶었던 이세호는 전직을 희망,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에 의해 특별조사과(SIS) 요원으로 발탁되었다. 1948년 8월부터 보문사에서 3개월간 특수정보 교육을 받았으나, 여순사건 발생으로 남부지역 전투사령부 제5여단의 전라남도 지역 SIS 대장으로 임명되어 제14연대 장병 조사를 실시했다.[1]
숙군 후 정보참모 전속을 요청, 1950년 4월 7일 시흥보병학교 고등군사반 5기생으로 입교했다. 한국 전쟁 발발로 졸업을 일주일 앞두고 제7사단 정보참모로 긴급 배속되었으나, 부대 궤멸로 제8사단 정보참모(소령)로 전속되었다.[2][1]
1953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1966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1967년 제6군단장, 1969년 베트남 파병군 사령관, 1973년 제3군 사령관을 거쳐 1975년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2. 1. 일본군 복무 시절
특별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1944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시즈오카현 하마마쓰 제7교육항공대에서 중폭격기 정비요원으로 훈련을 받았다. 본토 공습이 심해짐에 따라 시마네현 마쓰에, 이어 히로시마시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시모기온의 항공기 부품 정비 공장으로 피난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시내로 외출 허가를 받고 나갔다가 비누를 가지러 돌아왔을 때 원폭 투하를 목격했다.[1]2. 2. 대한민국 육군 장교 임관
1946년 12월 14일 육군사관학교 2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1] 육군 제1보병연대 소속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1]3. 대한민국 국군 주요 경력
이세호는 대한민국 국군의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1944년 일본 제국 육군 특별간부후보생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여, 1946년 육군사관학교 2기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정보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진압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제8보병사단 정보참모, 참모장, 연대장 등을 역임하며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휴전 후에는 육군 제22보병사단 제67보병연대장, 육군 제5군단 참모장, 육군본부 기획참모부 기획통제관, 육군 제1군단 및 제2군 참모장, 육군 제37, 33, 28보병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1년 소장 진급 후에는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차장, 육군보병학교장, 합동참모본부 전략정보국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육군사관학교장 등을 역임했다. 1967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제6군단장을 맡았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역임하며 베트남 전쟁 철수를 지휘했다. 귀국 후 제3야전군 창설을 주도하여 초대 사령관을 지냈고, 1975년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1979년 대장으로 예편했다.[1]
3. 1. 한국전쟁 이전
1946년 12월 14일 육군사관학교 2기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1] 같은 해 12월 15일 육군 제1보병연대 소속 소대장을 맡았다. 1947년 6월 1일 중위로 진급하여 중대장이 되었다.[1] 1948년 1월 10일 대위로 진급, 육군 제9보병연대 소속 부대대장이 되었다.[1] 심흥선 대위의 권유로 제주도에 부임하였다.[1]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모슬포에서 토벌 작전에 참여했다.[1] 연대장 직무대행을 겸임하기도 했으나, 병사 탈영 및 연대장 암살 사건 등이 발생했다.[1]
이후 10일간 휴가를 얻어 서울을 방문했다가 최영희 인사국장의 초빙으로 보임과장으로 발탁될 뻔 했으나,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에 의해 특별조사과(SIS) 요원으로 발탁되었다.[1] 1948년 8월 20일 국군총사령부 정보국 호남지구 S.I.S. 대장이 되었다.[1] 3개월간 특수정보 교육을 받던 중 여순사건이 발생하여 제5여단의 전라남도 지역 SIS 대장으로 임명되어 제14연대 장병 조사를 실시했다.[1]
1949년 1월 15일 소령으로 진급하여 육군 제7보병사단 정보참모를 역임했다.[1] 1950년 4월 7일 육군보병학교 고군반(5기)을 졸업했다.[1]
3. 2. 한국전쟁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제7보병사단 정보참모로 복귀했으나, 부대가 궤멸되어 제8보병사단 정보참모(소령)로 전속되었다.[2][1] 1951년 4월 27일 대령으로 진급하여 육군 제8보병사단 참모장 및 연대장을 역임했다. 1953년 5월 12일 육군대학 전반기 4기를 졸업하고 국방장관상을 수상했다.3. 3. 한국전쟁 이후
1953년 9월 20일 육군 제22보병사단 제67보병연대장을 역임했다.[3] 1954년 6월 18일 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제5군단 참모장을 맡았다.[1] 1956년 3월 12일 육군본부 기획참모부 기획통제관, 1956년 9월 30일 육군 제1군단 참모장, 1957년 4월 1일 육군 제2군 참모장을 역임했다. 1957년 9월 1일 육군 제37보병사단장, 1958년 8월 13일 육군 제33보병사단장, 1959년 2월 19일 육군 제28보병사단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1961년 7월 31일 소장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차장을 맡았다. 1962년 7월 15일 육군보병학교장을 역임했다. 1964년 8월 4일 합동참모본부 전략정보국장을 역임했다. 1965년 8월 17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역임했다. 1966년 12월 28일 육군사관학교장에 임명되었다. 1967년 8월 28일 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제6군단장을 맡았다.[1]3. 4. 베트남 전쟁
1969년 5월 1일 채명신 중장으로부터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1973년 3월 23일 후발대가 철수할 때까지 3년 10개월 동안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근무하며, 미국의 베트남 전쟁 정책 변화에 따라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작전을 축소하면서 전쟁을 마무리하고 철수하는 과정을 지휘하였다.[1] 이후 주월한국군사령부는 대구광역시에서 제3야전군으로 개편되었고, 이세호는 초대 제3야전군 사령관이 되었다.3. 5. 베트남 전쟁 이후
1969년 5월 1일, 채명신 중장으로부터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지휘권을 인수한 후, 1973년 3월 23일 후발대가 철수할 때까지 3년 10개월 동안 지휘하였다. 이세호는 재임 기간에 미국의 베트남 정책 변화에 따라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작전을 축소하면서 전쟁을 원만히 마무리하고 철수하는 과정을 지휘하였다. 이후 대구광역시에서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제3야전군으로 개편되면서 초대 제3야전군 사령관이 되었다. 1973년 7월 2일 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제3군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75년 3월 1일 제21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1979년 2월 1일 대장으로 예편했다.[1]4. 사망
5. 상훈
이세호는 복무 기간 동안 다수의 훈장을 받았다. 주요 훈장은 다음과 같다.
훈장 종류 | 내용 |
---|---|
태극무공훈장 | |
을지무공훈장 | |
충무무공훈장 | |
화랑무공훈장 | |
보국훈장 | 보국훈장 통일장, 보국훈장 국선장, 보국훈장 천수장 |
브론즈스타 | |
기타 | 대수운휘훈장, 베트남 1등 보국훈장, 독일 십자훈장, 스페인 1등 근로무공훈장 |
참조
[1]
웹사이트
打ち明ける話- 李世鎬 元陸軍参謀総長 "全斗煥、正規陸士出身に昇進・補職の恩恵を求める"
http://m.monthly.cho[...]
月刊朝鮮
2024-11-01
[2]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3]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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