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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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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은 1977년 10월 13일,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 소속 테러리스트들이 루프트한자 181편(란츠후트)을 납치한 사건이다. 이들은 서독 교도소에 수감된 적군파 테러리스트 석방을 요구하며, 로마, 라르나카, 바레인 등을 거쳐 소말리아 모가디슈까지 비행기를 몰았다. 납치범들은 기장 위르겐 슈만을 살해하고, 5일간 승객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0월 17일, GSG-9은 소말리아군과 영국 SAS의 지원을 받아 모가디슈에서 인질 구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납치범 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체포했다. 이 사건은 GSG-9의 국제적 명성을 높였으며, 각국의 대테러 부대 창설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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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
사고 개요
발생 유형납치
이름루프트한자 181편
날짜1977년 10월 13일 – 1977년 10월 18일 (4일)
1975년 맨체스터 공항에서 촬영된 루프트한자의 "란츠후트" 항공기 (D-ABCE)
위치초기: 지중해 상공, 프랑스 리비에라 남쪽
최종: 모가디슈 국제공항,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
세부 정보
항공기 종류보잉 737-230C
항공사루프트한자
기체 등록 번호D-ABCE
항공기 이름란츠후트 (Landshut)
IATALH181
ICAODLH181
콜사인LUFTHANSA 181
출발지팔마 데 마요르카 공항, 팔마, 마요르카, 스페인
목적지프랑크푸르트 공항,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서독
인명 피해
승객87명 (납치범 4명 포함 총 91명)
승무원5명
부상자5명 (승무원 1명, 승객 3명, 납치범 1명)
사망자4명 (승무원 1명, 납치범 3명)
생존자92명 (승객 전원, 승무원 4명, 납치범 1명)
관련 인물
사망한 기장위르겐 슈만
생존한 부기장위르겐 비토어

2. 배경

납치 사건은 1977년 서독에서 일련의 테러 활동이 극심했던 시기인 이른바 독일의 가을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1][2][3] 이 사건은 1977년 9월 5일 독일 적군(RAF)의 "지크프리트 하우스너 특공대"가 쾰른에서 서독의 저명한 산업가인 한스 마틴 슐라이어를 납치한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1][2][3]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 소속 무장 괴한 4명(남성 2명, 여성 2명)은 RAF와 협력하여, 서독 슈탐하임 교도소에 수감된 RAF 지도자들과 동료들, 그리고 터키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 2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루프트한자 181편 ''란츠후트''(보잉 737-200) 항공기를 납치했다.[1][2][3] 이는 서독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2][3]

1977년 10월 13일, 스페인 팔마데마요르카에서 서독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루프트한자 181편은 이륙 직후 납치되어 중동 각지를 전전했다. 이 과정에서 남예멘 아덴에서 기장이 살해되는 비극이 발생했으며, 비행기는 최종적으로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착륙했다. 사건은 모가디슈에서 서독 국경 경비대 소속 대테러 특수부대인 GSG-9이 "Feuerzauber"(독일어로 "마법의 불") 작전을 통해 비행기에 돌입하면서 해결되었다.[1][2][3] 이 작전으로 납치범 3명이 사살되고 1명이 체포되었으며, 인질 전원이 구출되었다.[1][2][3] 이 사건은 독일의 가을이라 불리는 RAF 연쇄 테러의 일부였으며, 한스 마틴 슐라이어 납치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1. 납치범

납치범은 총 4명으로, 남성 2명과 여성 2명으로 구성되었다.

  • '''조히르 유시프 아카체'''(23세): 가명 ''마흐무드 대위''[9]

:: 납치범들의 리더였다. 베이루트 근처의 난민촌에서 성장했으며, 이후 런던의 첼시 항공 및 자동차 공학 대학에서 공부해 1975년 항공 학위를 취득했다.[9][10] 그는 테러리스트로서 경험이 있었으며, 1977년 4월 10일 런던에서 예멘 아랍 공화국 외교관 두 명과 그중 한 명의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스코틀랜드 야드의 수배를 받고 있었다.[10][11]암살 사건은 로열 랭커스터 호텔 밖에서 발생했으며, 예멘 전 총리 카디 압둘라 알-하지리(65세), 그의 아내 파티마(40세), 대사관 전권대사 압둘라 알리 알 함마미가 소음기가 장착된 .32 자동 권총에 의해 메르세데스 차량 안에서 살해되었다.[10][12] 아카체는 사건 당일 오후, 아흐메드 바디르 알-마지드라는 이름의 쿠웨이트 국적 여권을 사용하여 히드로 공항을 통해 출국했다.[13] 그는 1년여 전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 중 경찰관 폭행 혐의로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추방된 전력도 있었다.[10] 체포 당시 영국 경찰은 그의 호텔 방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포스터와 PLO 지도자들의 사진을 발견했다.[10]

  • '''와빌 하르브'''(23세)

:: 베이루트 출신의 부유한 기독교인 가정의 아들이었으며, 때때로 인질들과 친근하게 대화하기도 했다. 승객들은 그를 "소년"이라고 불렀다.[9]

  • '''수하일라 안드라웨스'''(22세)

::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인으로, 바그다드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네 명의 납치범 중 유일하게 생존했다. 승객들은 그녀를 "뚱보"라고 불렀다.[9]

  • '''힌드 알라메'''(22세)

:: 레바논의 기독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생존자들은 그녀를 유난히 예쁘고 아담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때때로 비행기 안에서 유일하게 미소를 보이는 사람이었으며, 승객들은 그녀를 "꼬마"라고 불렀다.[9]

납치 당시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마흐무드 대위라는 가명을 제외하고는 납치범들의 실제 이름을 알지 못했으며, 그들을 별명으로 불렀다. 오늘날까지도 생존자들은 그들을 "꼬마", "뚱보", "소년", 그리고 "마흐무드 대위"라고 지칭한다.[9]

2. 2. 납치 과정

당시 납치범들의 이름은 리더인 조히르 유시프 아카체의 가명 '마흐무드 대위'를 제외하고는 승객들과 승무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 승객과 승무원들은 납치범들에게 별명을 붙여 불렀으며, 생존자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을 "꼬마", "뚱보", "소년", "마흐무드 대위"라고 부른다.[9]

5일간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납치범들은 승객과 승무원들을 극심한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들은 언어폭력과 신체적 폭행을 일삼았고, 승객들을 결박했으며, 심리적 고문과 함께 죽음의 위협을 가했다.[14][15] 또한, 납치범들은 승객들의 여권, 짐, 개인 소지품을 뒤지며 유대인을 색출하려 했다.[14] 한 예로, 마흐무드는 한 여성 승객의 짐에서 몽블랑 펜을 발견하고 펜 뚜껑의 로고를 다윗의 별로 오인하여 그 승객을 유대인으로 몰아세웠다. 승객이 필사적으로 부인했음에도 마흐무드는 "내일 아침 8시 30분에 총살당할 준비를 하라"고 협박했다.[14] 리더인 마흐무드 외에도 수하일라 안드라웨스 사예 역시 인질들에게 큰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일부 승객들은 그녀가 마흐무드만큼이나 잔혹했다고 증언했다.[14]

모가디슈에서 루프트한자 ''란츠후트''기를 급습하여 인질을 구출한 서독 GSG 9 특공대원 중 한 명인 아리베르트 마틴은 "가장 먼저 나를 강타한 것은 믿을 수 없는 악취였다. 테러리스트들은 인질들이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승객들은 좌석에서 용변을 봐야 했다. 이것이 5일 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그 악취를 몇 년 동안 기억했다."라고 회상했다. 이 회상은 비행기를 급습한 그의 동료 페터 호름뮐러와 다른 GSG 9 특공대원들도 공감했다.

3. 납치

이 사건은 1977년 서독에서 발생한 일련의 테러 활동 시기인 이른바 독일의 가을이 극적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특히 같은 해 9월 5일, 적군파(RAF)의 "지크프리트 하우스너 특공대"가 서독의 저명한 산업가 한스 마틴 슐라이어를 쾰른에서 납치한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의 무장 세력은 RAF와 협력하여, 슈탐하임 교도소에 수감된 RAF 지도자들과 동료들, 그리고 터키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 두 명의 석방을 목표로 루프트한자 소속 '란츠후트' 여객기를 납치했다. 이는 서독 정부가 이들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7년 10월 13일 목요일, 중앙 유럽 시각(CET) 13시 55분, 루프트한자 LH 181편 '란츠후트'( 보잉 737-200 기종)는 승객 86명과 승무원 5명을 태우고 스페인 팔마 데 마요르카 공항을 출발하여 서독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향했다. 이륙 약 30분 후, 프랑스 마르세유 상공을 비행하던 중,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PFLP) 소속 무장 괴한 4명에게 납치되었다. 이들은 동료 독일 무장 단원이었던 브리깃테 쿨만을 기리기 위해 스스로를 "순교자 할리마 특공대"라고 칭했다. 쿨만은 전년도 엔테베 작전 중 사망했다.

납치범들은 스페인 팔마 공항의 보안 검색을 통과하여 권총 2정, 수류탄 4개, 500g의 플라스틱 폭탄을 기내에 반입했다. 비행기는 기장 위르겐 슈만과 부조종사 위르겐 비에토어가 조종하고 있었다. 납치범 그룹의 리더는 자신을 '마흐무드 대위'라고 밝히며 조종석에 침입하여 부조종사 비에토어를 승객칸으로 내쫓고 슈만 기장에게 비행기 조종을 강요했다. 다른 납치범들은 승객들에게 손을 머리 위로 올리라고 지시했다. 마흐무드는 슈만 기장에게 동쪽으로 비행하여 키프로스라르나카로 갈 것을 명령했으나, 연료 부족으로 인해 우선 이탈리아 로마에 착륙해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18]

납치범들은 서독 정부에 슈투트가르트의 슈탐하임 교도소에 수감된 RAF 간부 11명과 터키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 2명의 석방, 그리고 현금 1500만달러를 요구했다.

납치범 4명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름 (가명)나이특징 및 배경
조히르 유시프 아카체 (마흐무드 대위)[9]23세납치 그룹 리더. 베이루트 인근 난민촌 출신. 런던에서 항공학 전공.[9][10] 1977년 4월 런던에서 예멘 아랍 공화국 외교관 2명과 외교관 부인 살해 혐의로 스코틀랜드 야드 수배 중.[10][11] 이전 영국에서 폭행 혐의로 추방된 전력 있음.[10]
와빌 하르브23세베이루트 출신, 부유한 기독교 가정. 승객들은 그를 "소년"이라 불렀음.[9]
수하일라 안드라웨스 사예22세이스라엘 출신 팔레스타인인. 바그다드에서 영문학 전공. 승객들은 그녀를 "뚱보"라 불렀음.[9] 유일한 생존 납치범.
힌드 알라메22세레바논 기독교 가정 출신. 승객들은 그녀를 "꼬마"라 불렀음.[9]



당시 승객과 승무원들은 납치범들의 본명을 몰랐으며, 리더의 가명 '마흐무드 대위'와 함께 "꼬마", "뚱보", "소년" 등의 별명으로 불렀다.[9]

3. 1. 경유지

181편은 연료 보급을 위해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에 먼저 착륙했다. 납치범들은 서독 정부에 독일 적군(RAF) 수감자 11명의 석방과 현금 1500만달러를 요구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서독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항공기의 이륙을 막지 않았다.[18]

이후 항공기는 키프로스라르나카로 향하여 중앙 유럽 시각(CET) 20시 28분에 착륙했다. 현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대표가 무선 통신으로 납치범 리더 '마흐무드'에게 인질 석방을 설득하려 했으나, 마흐무드는 격분하며 거부했다. 항공기는 재급유 후 CET 22시 50분에 이륙하여 베이루트로 향했으나 착륙을 거부당했다. 이후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쿠웨이트에서도 연이어 착륙 허가를 받지 못하고 바레인으로 기수를 돌렸다.[18]

바레인 국제공항 역시 폐쇄되었다는 정보를 받았지만, 연료 부족을 알린 후 관제사로부터 자동 착륙 주파수를 받아 10월 14일 01시 52분(CET)에 착륙했다. 착륙 직후 항공기는 무장 병력에 의해 포위되었으나, 마흐무드가 부조종사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하자 병력은 철수했다. 항공기는 재급유를 받고 03시 24분(CET)에 두바이로 이륙했다.[18]

두바이 국제공항에서도 처음에는 착륙을 거부당했고, 활주로가 차량으로 막혀 있었다. 그러나 연료 부족으로 기장 위르겐 슈만이 착륙을 강행하겠다고 통보하자 차량들이 치워졌고, 05시 51분(CET)경 착륙했다.[18] 두바이에서 슈만 기장은 담배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기내 납치범이 남성 2명, 여성 2명임을 외부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21] 이 정보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22] 분노한 마흐무드는 슈만에게 살해 위협을 가했다. 항공기는 기술적 문제로 10월 15일까지 두바이에 머물렀다. 한편, 서독 정부 특사 한스-위르겐 비슈네프스키와 GSG 9 지휘관 울리히 베게너 등이 두바이에 도착하여 아랍에미리트 정부와 구출 작전 허가를 협상했다. 영국 특수공군(SAS) 요원 2명도 합류하여 기절 수류탄 사용 등을 검토하며 구출 작전을 준비했으나,[23] 최종적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10월 16일, 납치범들은 재급유를 요구하며 인질 살해 위협을 했고, 결국 두바이 당국은 연료 공급에 동의했다.[18]

10월 16일 12시 19분(CET), 란츠후트호는 두바이를 이륙하여 오만살랄라와 마시라 섬으로 향했으나 착륙을 거부당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도 착륙이 거부되자, 연료 한계에 다다른 항공기는 남예멘아덴으로 향했다.[18]

아덴 국제공항 역시 착륙을 거부하며 활주로를 차량으로 봉쇄했다. 연료가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슈만 기장은 CET 15시 55분경 활주로 옆 비포장 모래밭에 항공기를 강제 착륙시켰다. 거친 착륙 후 기체 손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슈만 기장은 납치범의 허가를 받아 잠시 기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착륙 장치와 엔진 상태를 점검하는 한편, 현지 예멘 공항 당국 책임자인 셰이크 아흐메드 만수르 장군과 대화하며 상황 해결을 시도했다.[24][25] 그러나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자 마흐무드는 슈만을 호출하며 비행기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했다. 슈만은 만수르 장군에게 "이제 돌아가야겠어. 그들이 나를 죽일 거라고 확신해."라는 말을 남기고 기내로 돌아왔다.[24][25] 돌아온 슈만에게 마흐무드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격분하여 승객들 앞에서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아 살해했다.[15][24][25]

10월 17일 CET 01시에 항공기는 재급유를 받았다. CET 02시 02분, 부조종사 위르겐 비에토르가 조종간을 잡고 아덴을 이륙하여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로 향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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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출 작전

서독 정부는 한스 마틴 슐라이어 납치 사건과 연계된 이번 사건에 대해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고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서독 총리였던 헬무트 슈미트(사민당)는 뮌헨 올림픽 참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17] 한스-위르겐 비슈네프스키 국무장관을 특사로 파견했다. 비슈네프스키는 소말리아시아드 바레 대통령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모가디슈에서의 GSG-9 투입을 승인받았다.[27][28] 이는 소련과의 관계 악화로 서방과의 협력을 모색하던 바레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했다.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창설된 연방 국경 수비대 소속 대테러 특수부대 GSG-9의 창설자이자 사령관인 울리히 베게너 중령이 작전을 지휘했다.[2] Operation Feuerzauber|오퍼라치온 포이어차우버de(마법의 불꽃 작전)으로 명명된 이 구출 작전에는[1][2][3] 영국 특수공수부대(SAS) 요원 2명이 자문 및 섬광탄 등 특수 장비 지원 역할로 참여했으며,[39][40] 소말리아군도 지상 지원을 제공했다. 실제 돌입 작전은 전적으로 GSG-9 대원들에 의해 수행되었고,[3][23] 성공적인 인질 구출로 마무리되었다. 이 작전의 성공은 테러에 굴복하지 않은 서독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GSG-9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4. 1. 작전 개요

1977년 10월 17일, 납치된 란츠후트 181편은 오전 3시 30분(UTC) 소말리아 모가디슈모가디슈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납치범들은 아덴에서 살해한 기장 위르겐 슈만의 시신을 활주로에 버렸고, RAF 수감자 석방 최종 시한을 14시 30분(UTC)으로 설정했다. 그들은 기내에서 폭발물을 설치하고 승객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등 최후의 상황에 대비했다. 그러나 서독 정부로부터 "수감자 중 일부를 석방하여 모가디슈로 보내고 있으니 몇 시간 더 기다려 달라"는 연락을 받자, 최종 시한을 다음 날인 10월 18일 0시 30분(UTC)으로 연장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이끄는 서독 정부는 과거와 달리 테러범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창설된 경찰 특수부대 GSG-9가 키프로스 단계부터 한스 위르겐 비슈네프스키 특사와 함께 란츠후트 181편을 따라 이동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슈미트 총리는 소말리아시아드 바레 대통령과 정치적 협상을 벌여 GSG-9 투입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다.[28] 당시 바레 대통령은 소련동구권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었다.

GSG-9은 소말리아군과 영국 특수공수부대(SAS)의 협력을 받아 'Feuerzauber|페어자우버de'(마법의 불꽃) 작전을 개시했다.[1][2][3] 작전 계획 수립과 특수 장비(섬광탄 등) 제공에는 SAS 요원 2명(알래스터 모리슨 소령, 배리 데이비스 상사)이 관여했으나[39][40], 실제 돌입 작전은 전적으로 GSG-9 대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울리히 베게너 GSG-9 창설자 겸 사령관은 SAS가 제안한 단일 진입로 확보 방식 대신, 여러 개의 출입구를 동시에 급습하는 독자적인 작전 계획을 채택했다.[3][23]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소말리아 대통령


최종 시한 만료 직전인 10월 17일 23시 5분(UTC, 현지 시간 10월 18일 2시 5분), 작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소말리아군 레인저 부대가 항공기 전방 약 300m 지점에서 큰 폭발을 일으켜 납치범들의 주의를 분산시켰다.[32] 이 소란에 납치범 리더 '마무드'(조하이르 아카체)와 다른 납치범 1명이 조종석으로 이동했다.[32]

10월 18일 0시 5분(CET), 베게너 사령관의 "페어자우버! 개시!" 명령과 함께[3] SAS 요원 2명이 조종석 외부에서 신형 섬광탄을 터뜨렸다.[3] 동시에 울리히 베게너 대령이 이끄는 GSG-9 공격팀 약 30명[75]이 H&K MP5 기관단총 등으로 무장하고 항공기 앞문, 뒷문, 날개 위 비상 탈출구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동시에 기내로 돌입했다.[3][29]

GSG-9 대원들은 독일어와 영어로 승객들에게 엎드리라고 외치며 납치범들과 교전을 벌였다. 약 5분[75]에서 7분[18]간의 격렬한 총격전 끝에 납치범 리더 조하이르 아카체를 포함한 남성 2명과 여성 1명(힌드 알라메) 등 총 3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여성 납치범 1명(수하일라 안드라웨스)은 중상을 입힌 채 생포했다.[29] 이 과정에서 GSG-9 대원 1명이 목에 부상을 입었고, 납치범이 던진 수류탄 파편으로 승무원 가브리엘레 딜만과 승객 3명이 경상을 입었다.[29]

작전 개시 7분 만에 베게너 사령관은 작전 성공을 알리는 암호 "Frühlingszeit|프륄링스차이트de"(봄!)를 으로 타전했다. 승객 87명과 승무원 4명 등 인질 전원이 무사히 구출되었다.[37] 구출된 인질들은 몇 시간 후 특별기 편으로 프랑크푸르트로 이송되었고, 쾰른 본 공항에 도착한 GSG-9 대원들은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38]

1977년 10월 18일 쾰른 본 공항에 착륙한 루프트한자 보잉 707, ''슈투트가르트''에는 한스 위르겐 비슈네프스키 국무장관과 GSG-9 대테러 공격 팀(사진)이 탑승했다. 구조된 인질들은 ''쾰른''이라는 이름의 별도의 루프트한자 보잉 707 항공기로 돌아왔다. 사진: 루드비히 베그만.


작전 성공 이후 에는 전 세계에서 찬사가 쏟아졌으며, 여러 국가에서 GSG-9에 경찰 훈련 지원을 요청했다. 10월 20일, 울리히 베게너 사령관과 작전에 참여한 GSG-9 대원들은 연방 공로 훈장을 받았다.[5] 작전을 지원한 SAS 요원 2명 역시 영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39][40]

4. 2. 작전 경과

10월 17일 오전 3시 30분(UTC), 란츠후트 181편은 소말리아 모가디슈모가디슈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앞서 아덴에서 살해된 기장 위르겐 슈만의 시신은 활주로에 버려졌으며, 납치범들은 RAF 조직원 석방 최종 시한을 14시 30분(UTC)으로 정했다. 서독 당국이 협상을 시도하며 시간을 벌자, 납치범들은 최종 시한을 다음 날인 10월 18일 0시 30분(UTC)으로 연장했다.

그러나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이끄는 서독 정부는 뮌헨 올림픽 참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테러범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슈미트 총리는 소말리아 대통령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와의 협상을 통해 GSG-9 투입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다.[27][28] 바레 대통령은 당시 소련동구권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었다.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창설된 서독의 대테러 특수부대 GSG-9는 울리히 베게너 사령관의 지휘 아래 이미 란츠후트 181편을 추적하고 있었다. 약 60명의 GSG-9 대원들은[27] 10월 17일 저녁, 모든 불을 끈 루프트한자 보잉 707 항공기를 타고 납치범들의 눈을 피해 모가디슈 국제공항에 비밀리에 착륙했다. 착륙 사실을 숨기기 위해 소말리아 공군은 공항 상공에서 미그기를 계속 이착륙시키는 기만 작전을 펼쳤다.[23] GSG-9은 항공기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작전 준비에 들어갔다.[23] 이 과정에는 영국 SAS 대원 2명이 자문 및 지원 역할로 참여하여 작전 계획 수립과 신형 섬광탄 제공 및 시험을 도왔다.[23][27]

베게너와 그의 부관들은 10월 18일 0시 01분(CET) 개시를 목표로 '포이어차우버 작전'(Operation Feuerzauber, 마법의 불꽃 작전) 계획을 최종 확정했다.[1][2][3] 작전 계획은 항공기 꼬리 쪽 사각지대에서 접근하여, 6개의 공격팀이 알루미늄 사다리를 이용해 모든 출입문과 날개 위 비상구를 통해 동시에 기내로 진입하는 것이었다.[3][29]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G3 SG1 저격소총으로 무장한 GSG-9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엄호 및 상황 보고를 맡았다.

현지 시간 10월 18일 0시 05분(CET), 작전 개시 직전 소말리아군이 항공기 전방 약 300m 지점에서 큰 폭발을 일으켜 납치범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때 납치범 리더 '마흐무드'(조하이르 아카체)와 다른 한 명이 조종석으로 이동해 인질들과 분리되었다.[32] 동시에 SAS 대원 2명이 조종석 외부 창문에 섬광탄을 터뜨려 혼란을 가중시켰다.[3][23] 베게너 사령관의 "포이어차우버 작전! 개시!" 명령과 함께 GSG-9 공격팀들은 사다리를 타고 신속하게 기체로 접근하여 문과 비상 탈출구를 열고 내부로 돌입했다.[3][29] 대원들은 H&K MP5 기관단총과 H&K P9S 반자동 권총, S&W 모델 19 리볼버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29][33][34] 독일어와 영어로 승객들에게 엎드리라고 외치며 납치범들과 교전을 벌였다.[35]

약 7분간의 작전 끝에 납치범 4명 중 리더 아카체를 포함한 3명이 사살되었고, 수하일라 안드라웨스 1명은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GSG-9 대원 1명이 목에 부상을 입었고, 납치범이 던진 수류탄 파편으로 승무원 1명과 승객 3명이 경상을 입었다.[29] 작전 성공 신호인 "Frühlingszeit!"(봄!)이 무전으로 타전되었고, 납치되었던 승객 86명과 승무원 전원이 무사히 구출되었다.[18][37]

4. 3. 작전 결과

GSG-9 대원들은 독일어영어로 승객과 승무원에게 머리를 숙이라고 외치며 테러리스트 4명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납치범 리더 조하이르 아카체(마무드), 와빌 하르브, 힌드 알라메 3명이 사살되었고, 수하일라 안드라웨스는 중상을 입었다.[29] 교전 중 GSG-9 대원 1명은 납치범의 반격으로 목에 부상을 입었다.[29] 납치범이 죽어가며 터뜨린 수류탄으로 인해 승무원 가브리엘레 딜만과 승객 3명이 경상을 입었다.[29]

작전 결과 사상자 요약
구분사상자 수비고
GSG-9 대원1명 부상목 부상[29]
납치범3명 사살조하이르 아카체 (리더), 와빌 하르브, 힌드 알라메[29]
납치범1명 부상 및 체포수하일라 안드라웨스[29]
인질 (승무원)1명 경상가브리엘레 딜만 (수류탄 파편)[29]
인질 (승객)3명 경상수류탄 파편[29]



공격이 시작된 지 약 7분 만인 UTC 기준 10월 17일 23시 12분 (현지 시각 10월 18일 0시 12분), GSG-9 사령관 울리히 베게너는 작전 성공을 알리는 암호 코드 Frühlingszeit!|프륄링스차이트!de (봄!)을 외쳤다. 잠시 후 서독 총리 헬무트 슈미트에게 "4명의 적 제거 – 인질 석방 – 4명의 인질 경상 – 국경 경비대 특공대 1명 경상"이라는 중요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18]

구출된 승객 중 미국인 크리스틴 산티아고는 당시 상황을 "문이 열리고 얼굴을 검게 칠한 한 남자가 나타나 독일어로 Wir sind hier, um euch zu retten, runter!|비어 진트 히어, 움 오이히 추 레텐, 룬터!de (우리가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엎드리세요!)라고 외치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35] 유일하게 생존한 납치범 수하일라 안드라웨스는 다리와 폐에 총상을 입고 피로 뒤덮인 채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승리의 V 표시를 하며 "나를 죽여라, 우리가 이길 것이다!"라고 외쳤다.[36]

구조대는 ''란츠후트'' 항공기에서 87명의 승객과 4명의 승무원 전원을 안전하게 구출했다.[37] 구출된 인질들은 몇 시간 후 프랑크푸르트행 특별기에 탑승하여 10월 18일 화요일 오후 쾰른 본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는 영웅적인 환영이 있었고, 별도의 비행기로 도착한 GSG-9 대원들과 함께 인질들은 감격적인 안도감을 느꼈다.[38]Defence-Net 기사

5. 사건의 영향

모가디슈 국제공항에서 GSG-9의 성공적인 인질 구출 작전('마법의 불', Feuerzauberde)은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1][2][3] 이 작전으로 GSG-9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많은 국가에서 GSG-9에 경찰 훈련 지원을 요청했다. 작전을 성공시킨 GSG-9 대원들과 지휘관 울리히 베게너는 10월 20일 에서 연방 공로 훈장을 받았다.[5] 작전을 지원한 영국 특수공군(SAS) 요원 2명도 헬무트 슈미트 총리로부터 감사를 표 받았고 영국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39][40]

GSG-9의 성공, 특히 작전 중 사용된 H&K MP5 기관단총과 섬광탄 등은 전 세계 특수부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육군델타 포스, 일본 경찰의 특수급습부대(SAT) 등 여러 국가에서 이 사건을 교훈 삼아 대테러 부대를 창설하거나 강화했다.

인질 구출 작전 성공 소식이 전해진 직후, 슈투트가르트의 슈탐하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독일 적군파(RAF) 핵심 조직원 안드레아스 바더, 구드룬 엔슬린, 얀 카를 라스페 3명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태로 발견되었다.[11][76] 또 다른 조직원 이르가르트 묄러 역시 자살을 시도했으나 살아남았다.[11][41]

이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납치되어 인질로 잡혀 있던 독일 경영자 연맹 회장 한스 마틴 슐라이어는 RAF 조직원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10월 19일 프랑스 뮐루즈의 한 차량 트렁크에서 발견되었다. RAF는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을 통해 그의 '처형'을 알렸다. 이후 부검 결과 그는 전날 살해된 것으로 나타났다.[18]

이 사건을 계기로 서독 정부는 1972년 루프트한자 649편 및 루프트한자 615편 납치, 1975년 페터 로렌츠 납치 사건 때와 달리 테러리스트와 절대 협상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급습 결정은 서방 국가들로부터 널리 지지를 받았으나, 일각에서는 위험한 결정이었다는 비판도 있었다.[18]

사건 해결 과정에서 협조한 소말리아와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루프트한자는 소말리아 항공 항공기의 서독 내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고, 프랑크푸르트는 소말리아 항공의 유럽 허브 공항이 되었다. 서독 정부는 소말리아에 어업, 농업 발전을 위한 수백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두 차례 제공하며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42]

6. 사건 이후

루프트한자 181편 인질 구출 작전 이후, 독일 적군파(RAF) 조직원 안드레아스 바더, 구드룬 엔슬린, 얀 카를 라스페는 같은 날 밤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슈탐하임 형무소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자살로 추정).[11] RAF 조직원 이르가르트 묄러 역시 자살을 시도했으나 부상에서 살아남았다.[11][41]

10월 19일, 납치 5주 전 RAF에 납치되어 43일간 인질로 잡혀 있던 독일 산업 협회 회장 한스 마틴 슐라이어의 시신이 프랑스 뮐루즈의 한 차량 트렁크에서 발견되었다. RAF는 슈탐하임 형무소 동료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슐라이어를 살해했으며,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에 연락하여 그의 '처형'을 알렸다. 사후 부검 결과 그는 전날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18] 슐라이어 납치 사건 관련자 20명 중 17명이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고, 2명은 체포 과정에서 사살되었다. 2007년 전 RAF 조직원 페터-위르겐 북은 Rolf Heißler와 슈테판 비스니에프스키가 슐라이어 살해범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란츠후트'' 사태 이후, 서독 정부는 이전의 납치 사건들과 달리 테러리스트와 절대 협상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인질 구출 작전 결정은 서방 국가들로부터 널리 지지를 받았으나, 일각에서는 위험한 결정이었다는 비판도 있었다.[18]

성공적인 구출 작전 이후 서독소말리아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루프트한자는 서독 내 모든 소말리아 항공 항공기의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고, 프랑크푸르트는 소말리아 항공의 새로운 유럽 관문이 되었다. 서독 정부는 소말리아 정부에 어업, 농업 등 분야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두 차례 제공했다.[42]

브라질 TAF Linhas Aéreas 소속 당시 화물기로 운용되던 ''란츠후트'' (PT-MTB)


납치되었던 ''란츠후트''호(보잉 737-230C, 등록 번호 D-ABCE)는 1970년 1월 제작되어 바이에른주 란츠후트 시의 이름을 딴 항공기였다. 납치 과정에서 약 10000km를 비행했다.[37] 사건 이후 독일로 옮겨져 수리된 뒤 1977년 11월 말 운항을 재개했다. 1985년 9월까지 루프트한자에서 운항하다가 미국의 프레지덴셜 에어웨이에 매각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43]

결국 브라질 항공사 TAF Linhas Aéreas 소유가 되었으나, TAF는 2008년 1월 심각한 기체 손상으로 운항을 중단하고 등록 번호 PT-MTB로 포르탈레자 공항에 보관했다.[45] 2017년, 전직 조종사 그룹의 제안과 독일 외무부의 지원으로 ''란츠후트''를 독일로 다시 가져오는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TAF로부터 세금 납부 합의를 통해 75936BRL(20519EUR)에 인수되었다.[46] 2017년 9월, 루프트한자 테크닉 정비공들이 항공기를 해체했고, 볼가-드네프르 항공 소속 An-124와 Il-76 수송기가 동체, 날개, 엔진 등을 독일 프리드리히스하펜으로 운송했다. 운송 및 복원 비용은 총 1000만유로에 달했다.[49] 도착 후 부품들은 약 4,000명에게 공개되었으며, 2019년 10월까지 복원하여 전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와 부처 간 책임 소재 불분명, 연간 300k의 유지 비용 문제 등으로 복원 및 전시 계획은 지연되었다.[50][51][52][53][54][55] 2020년 9월 프로젝트는 사실상 보류되었고,[56] 베를린-가토 공군 박물관 전시 제안은 항공기와 독일군 간의 연관성 부족 및 외진 위치 때문에 거부되었다.[57] 뮌헨으로의 이전 및 전시 제안도 있었으나[58] 실현되지 못했다.[59]

2024년 10월, 연방 시민 교육청(bpb)은 "란츠후트" 전시물을 프리드리히샤펜 공항 인근의 Q홀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개조된 Q홀(면적 2700m2, 야외 공간 1700m2)의 월 임대료는 47000EUR이며, 임대 기간은 15년이다. 항공기는 1977년 당시 모습으로 복원되지 않고, 다양한 역사를 가진 역사적 물체로서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결정되었다.[60][61] 대중 공개를 위한 "란츠후트 학습 장소" 프로젝트는 2027년 인질 구출 50주년에 맞춰 개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62]

독일 연방 정부는 총 1500만유로의 예산을 할당했다. 이 중 750만유로는 항공기 유지 보수 및 복원(미실행), 격납고 재건/임대/개조, 기술 장비 제공, 교육 개념 구현에 사용되고, 나머지 750만유로는 10년간의 운영 보조금으로 지원되며, 입장료를 1인당 5EUR로 제한하는 조건이 붙었다.[63][64][65] 2024년 10월 22일, ''란츠후트'' 동체는 프리드리히샤펜 공항 부지 내 전시 홀로 이전되었다.[66][67]

7. 주요 관련 인물

프랑크푸르트에서 팔마데마요르카까지 왕복 비행에는 두 명의 비행 승무원과 세 명의 객실 승무원이 투입되었다:[4]

; 위르겐 슈만 (37)

: ''기장''. 1940년 콜디츠 출생. 전 독일 공군의 록히드 F-104 스타파이터 조종사였다. 10월 16일 아덴 공항에서 비상 착륙 후 항공기 상태 점검 및 예멘 당국과의 교섭을 위해 잠시 내렸다가 돌아왔으나, 그의 부재에 의심을 품은 납치범 리더 조히르 유시프 아카체(가명 '마흐무드 기장')에게 살해당했다. 이 행위는 납치범의 요구에 무게를 더하기 위한 의도로도 여겨졌다. 사건 중 보여준 용기로 사후 독일 연방 공로 훈장 1등급을 받았으며,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겼다. 브레멘의 루프트한자 조종사 학교 건물과 바이에른 주 란츠후트의 거리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헤센 주 바벤하우젠에 묻혔다.

; 위르겐 비에토르 (35)

: ''부기장''. 1942년 카셀 출생. 전 독일 해군 조종사였다. 아덴에서 모가디슈까지 ''란츠후트''를 조종했다. 모가디슈 도착 후 납치범 리더 마흐무드는 그의 비행 실력에 감탄하여 비행기에서 내릴 것을 허락했으나, 비에토르는 승객 및 남은 승무원과 함께 기내에 남기로 결정했다. 사건 후 6주 만에 업무에 복귀했으며, 첫 비행은 수리된 ''란츠후트''였다. 사건 중 용기로 독일 연방 공로 훈장 1등급을 받았다.[5] 1999년에 은퇴했다. 2008년 12월, 한스 마틴 슐라이어 납치 및 살해에 연루된 전 적군파 테러리스트 크리스티안 클라르의 가석방에 항의하며 훈장을 반납했다.[6]

; 한넬로레 피글러 (33)

: ''수석 승무원''. 오스트리아인. 객실 승무원을 총괄하며 일등석 승객을 담당했다. 사건 중 보여준 용기와 헌신으로 독일 연방 공로 훈장을 받았다.[5] 이후 사건 경험을 담은 책 Entführung, Hundert Stunden zwischen Angst und Hoffnung|납치, 공포와 희망 사이의 백 시간deu을 저술했다.[7]

; 안나마리아 슈타링거 (28)

: ''승무원''. 노르웨이인.[7] 피글러, 딜만과 함께 공포에 질린 승객들을 돌봤다. 용기를 인정받아 독일 연방 공로 훈장을 받았다. 비행 중 28번째 생일을 맞았는데, 납치범 리더 아카체는 두바이 라디오를 통해 생일 케이크와 샴페인을 주문했고, 공항 케이터링에서 "생일 축하해 안나마리아" 문구가 적힌 28개의 촛불이 꽂힌 케이크를 전달했다.[8]

; 가브리엘 딜만 (23)

: ''승무원''. 어린 나이에도 인질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용감한 행동으로 독일 언론으로부터 "모가디슈의 천사"(Engel von Mogadischudeu)라는 별명을 얻었다.[18]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독일 연방 공로 훈장을 받았다.[5] 이후 모가디슈에 GSG 9 대원들을 태우고 온 루프트한자 조종사 뤼디거 폰 루차우와 결혼했다. 가브리엘 폰 루차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주로 너도밤나무를 이용한 인물 조각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7. 1. 서독 측


  • 헬무트 슈미트: 당시 서독 총리(58세)였던 헬무트 슈미트는 1977년 한스 마틴 슐라이어 납치 사건과 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에 대해 테러범과 타협하지 않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인질 구출을 위해 GSG 9의 투입("Feuerzauber" 작전)을 최종 승인했으며, 그의 단호한 대테러 정책은 오랫동안 서독 사회를 위협했던 적군파(RAF)의 활동을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슈미트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총리를 지냈으며, 2015년에 사망했다.
  • 한스-위르겐 비슈네프스키: 연방 총리실 국무장관이었던 한스-위르겐 비슈네프스키(55세)는 슈미트 총리의 특사로 임명되어, 납치된 ''란츠후트''호의 인질 석방 및 구출 작전을 위해 여러 외국 정부와의 복잡한 정치적 협상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특히 아랍 국가 지도자들과의 폭넓은 인맥과 친분으로 독일 언론으로부터 "벤 비쉬(Ben Wisch)"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2005년에 사망했다.
  • 울리히 베게너: 중령 울리히 베게너(48세)[16]서독의 연방 국경 수비대(''Bundesgrenzschutz'') 소속 특수 대테러 부대인 GSG 9(국경 수비대 제9부대)의 창설자이자 당시 사령관이었다.[2] GSG 9은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창설된 조직으로, 베게너는 모가디슈에서 실행된 ''란츠후트''호 인질 구출 작전("Feuerzauber")을 직접 계획하고 현장에서 지휘했다.[17]
  • 클라우스 블레테: 소령 클라우스 블레테(38세)는 당시 GSG 9의 부사령관으로, 베게너와 함께 모가디슈에서의 ''란츠후트''호 구출 작전에 참여했다. 이후 1979년 베게너의 뒤를 이어 GSG 9의 사령관이 되었다.
  • 초기 대응: 서독 정부는 사건 초기, NATO유럽 공동체(EC) 회원국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했다. 내무부 장관 베르너 마이호퍼는 비행기가 로마에 착륙했을 때 이탈리아의 내무장관 프란체스코 코시가에게 활주로 봉쇄나 타이어 사격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륙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코시가 장관은 자국이 테러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비행기는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7. 2. 영국 측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는 제임스 캘러한 영국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 영국 보호령이었던 두바이에 영국이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슈미트 총리는 GSG 9의 인질 구출 작전을 위해 두바이 당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당시 중동 지역에서 작전에 적합한 유일한 장소로 두바이를 고려하고 있었다.[2]

이에 따라 런던에서는 영국 외무부와 국방부, MI6 비밀 정보국, 기타 아랍 전문가 및 아랍에미리트 대사 등이 참여하는 임시 지원팀이 구성되었다. 위르겐 루푸스가 이끄는 서독 연방 총리실 외교부도 이 과정에 참여했다. 영국 정부는 지도 외에도 SAS(Special Air Service) 소속의 보안 전문가 두 명, 즉 알래스터 모리슨 소령과 배리 데이비스 상사를 파견했다. 또한, 이후 모가디슈 작전에서 사용될 신형 섬광탄 수류탄과 특수 방탄 조끼 등 장비 지원도 이루어졌다.[2][39][40]

오랫동안 두 명의 SAS 요원이 작전 계획 수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GSG 9 부대 창설자이자 당시 작전 지휘관이었던 울리히 베게너는 이를 부인했다. 그는 SAS 요원들이 제안한 전술(단일 진입로 사용)이 GSG 9의 작전 개념(모든 출입구를 통한 동시 침투)과 달랐다고 설명했다.[3][23]

섬광탄 사용과 관련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베게너는 인터뷰에서 영국 SAS가 두바이에서 효능을 시험한 섬광탄을 제공했지만, 높은 함량 때문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실제 비행기 내부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밝혔다.[23] 그러나 그는 두 명의 영국 SAS 요원이 GSG 9의 공격 작전에 참여했으며, 특히 GSG 9 공격팀이 항공기를 습격하는 순간 루프트한자 ''란츠후트'' 항공기 외부 정면에 영국 특수 섬광탄을 터뜨리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덧붙였다.[3][39][40]

작전 성공 후, 영국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서독 측을 지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알래스터 모리슨 소령에게 대영 제국 훈장(OBE)을, 배리 데이비스 상사에게 대영 제국 훈장(BEM)을 수여했다. 이들 SAS 요원들은 과거 영국 보호령에서 복무하며 얻은 페르시아만 국가와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영국 정부의 지시 하에 서독 관리들을 위한 현지 당국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영국의 실질적인 지원은 서독 정부의 인질 구출 노력과 아라비아 반도 남부 해안에서의 작전을 위한 비상 계획 수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39][40]

7. 3. 소말리아 측

10월 17일 새벽 4시 34분경(CET, 중앙유럽 시간 기준), 납치된 루프트한자 181편 ''란츠후트''는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 있는 모가디슈 국제공항 주 활주로에 예고 없이 착륙했다. 소말리아 정부는 처음에 착륙 허가를 거부했으나, 비행기가 소말리아 영공에 진입하자 승객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결국 착륙을 허가했다.

비행기가 공항 터미널 앞에 멈춘 후, 무장한 소말리아 군인들이 멀리서 비행기를 포위했다. 납치범들은 음식과 약품을 요구했고, 소말리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전달되었다. 그러나 소말리아 측은 보급품 제공의 대가로 여성과 어린이 인질을 석방하라는 요구는 거부했다.[26]

납치범들은 서독 정부에 수감된 적군파(RAF) 동료들의 석방 시한을 10월 17일 16시(CET)로 정하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비행기를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서독 정부는 적군파(RAF) 수감자들을 석방하기로 합의했으며 이송에 시간이 더 걸린다고 납치범들을 속여 시간을 벌었다. 이에 납치범들은 최종 시한을 다음 날인 10월 18일 새벽 2시 30분(CET)까지 연장하는 데 동의했다.[18] 이 시간 동안 서독의 특수부대 GSG 9는 모가디슈 현지에서 인질 구출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15]

참조

[1] 간행물 Executive Summary "Operation Magic Fire" https://www.academia[...] GW Aviation Institute 2007
[2] 서적 Special Operations Forces: A National Capability https://publications[...] Canadian Defence Academy Press 2011
[3] 서적 Force of Choice: Perspectives on Special Operations https://books.google[...] McGill-Queens Press 2004
[4] Youtube Die Geiseln von Mogadischu Reportage Dokumentation https://www.youtube.[...] 2017-12-12
[5] 뉴스 Bundesverdienstkreuz für GSG 9-Männer und Lufthansa-Crew https://www.alamy.co[...] Associated Press 1977-10-20
[6] 뉴스 WELT: "Landshut"-Pilot gibt Bundesverdienstkreuz zurück https://www.welt.de/[...] Axel Springer Deutschland 2008-11-24
[7] 뉴스 13. Oktober 1977: "Hier spricht Captain Martyr Mahmud!" https://www.welt.de/[...] Axel Springer Deutschland GmbH 2017-10-13
[8] 뉴스 "So, jetzt stirbst Du" https://www.stern.de[...] "[[Gruner + Jahr]] ([[Bertelsmann]])" 2007-04-16
[9] 웹사이트 Landshut 77 https://www.landshut[...] Stiftung Haus der Geschicht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2021-09
[10] 뉴스 Palestinian named over triple shooting https://archive.org/[...] 197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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