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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레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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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레는 벨러 3세와 안티오케이아의 아그네스의 아들로, 1196년부터 1204년까지 헝가리의 국왕이었다. 1184년 왕세자로 공인받았으며, 1195년에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1196년 국왕으로 즉위한 후 동생 언드라시와 왕위 계승을 두고 갈등을 겪었으며, 발칸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1202년에는 아르파드 왕조의 줄무늬 문장을 헝가리 왕실 직인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헝가리 국장의 원형이 되었다. 1204년 아들 라슬로 3세가 즉위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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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레 (헝가리)
기본 정보
임레의 왕실 인장
칭호헝가리 왕, 크로아티아 왕
재위 기간1196년 4월 23일 – 1204년 11월 30일
대관식1182년 5월 16일, 에스테르곰
이전 통치자벨라 3세
다음 통치자러슬로 3세
배우자콘스탄사 데 아라곤
자녀러슬로 3세
왕가아르파드 왕조
아버지벨라 3세
어머니안티오크의 아녜스
출생1174년
사망1204년 11월 30일
매장지에겔
종교로마 가톨릭
헝가리어Imre 임레
크로아티아어Emerik 에메리크
슬로바키아어Imrich 임리흐

2. 생애

벨러 3세와 그의 첫째 아내인 안티오케이아의 아그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1] 1182년 5월 16일 에스테르곰 대주교 미클로시(Miklós)로부터 왕관을 받으며 대관식을 치렀고, 1184년 벨러 3세로부터 왕세자로 공인받았다.[3][4]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딸과 약혼했지만, 1184년에 약혼자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1195년 크로아티아달마티아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1]

1196년 4월 23일 아버지 벨러 3세가 사망하자 헝가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1] 벨러 3세는 동생 언드라시에게 십자군 성지 원정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재산과 영지를 남겼다. 1197년 언드라시는 독립 공국 상속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2][3]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임레는 마치키(Mački) 전투에서 언드라시-레오폴트 6세 연합군을 격파했다.[4] 1198년 임레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언드라시의 속지로 만들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언드라시에게 십자군 참여를 독려했지만, 언드라시는 임레에 대한 음모를 계속했다. 1199년 3월 10일 임레는 언드라시를 지지했던 볼레슬로(Boleszló) 바치 주교로부터 음모를 증명하는 문서를 입수했고, 같은 해 여름 벌러톤호 부근에서 언드라시의 군대를 격파하여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로 도망쳤다. 교황 특사 그레고리오가 형제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헝가리를 방문한 후, 1200년 여름 임레는 언드라시의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통치를 승인했다.

1201년 세르비아에서 스테판 네마니치와 부칸 네마니치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서 부칸 네마니치를 지원했고, 1202년 부칸 네마니치를 세르비아 국왕으로 즉위시키며 헝가리의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의 지원을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가 1202년 자다르를 점령하고, 헝가리 왕국 남쪽 국경의 불가리아 제2제국 군대가 북쪽으로 진격하는 등 이웃 나라들의 견제를 받았다.

1202년 임레는 헝가리 국왕으로는 처음으로 아르파드 왕조가 사용하던 줄무늬 문장을 헝가리 왕실 직인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헝가리의 국장의 원형이 된다. 그의 왕위는 라슬로 3세가 승계받았다.

2. 1. 초기 생애 (1174년 ~ 1196년)

임레헝가리 국왕 벨러 3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아녜스의 아들로 태어났다.[1] 이탈리아 출신의 주교 베르나르도에게 교육을 받았으며,[2] 1182년 5월 16일, 8세의 나이로 헝가리 왕위 계승권을 확인하기 위해 에스테르곰 대주교 미클로시로부터 대관식을 치렀다.[3][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딸과 약혼했지만, 1184년에 프리드리히 1세의 딸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1195년경, 벨러 3세는 임레를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통치자로 임명했다.[1]

2. 2. 즉위와 동생과의 갈등 (1196년 ~ 1200년)

1196년 아버지 벨러 3세가 사망하자 임레는 헝가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벨러 3세는 동생 언드라시에게 십자군 성지 원정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재산과 영지를 남겼다.[1] 그러나 언드라시는 1197년 독립 공국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2][3]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가 언드라시를 지원했지만, 임레는 슬라보니아 마치키에서 언드라시와 레오폴트 6세 연합군을 격파했다.[4] 하지만 1198년 초, 임레는 언드라시에게 크로아티아달마티아를 공국으로 수여해야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언드라시에게 십자군 참가를 계속 촉구했지만, 언드라시는 임레에 대한 음모를 멈추지 않았다. 1199년 3월 10일, 임레는 언드라시를 지지하는 바치 주교 볼레슬로에게서 음모를 증명하는 문서를 압수했다. 같은 해 여름, 임레는 벌러톤호 근처에서 언드라시 군대를 격파했고,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망쳤다. 교황 특사 그레고리오가 형제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헝가리를 방문했고, 1200년 여름, 임레는 언드라시의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통치를 승인했다.

2. 3. 발칸 지역에서의 전쟁 (1200년 ~ 1203년)

1200년경부터 임레는 발칸 반도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1200년 10월 11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임레에게 보스니아의 "이단자"를 제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임레의 요청에 따라 교황은 세르비아의 대공 스테판에게 왕관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임레는 1201년 또는 1202년에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스테판의 형제인 부칸이 왕위를 차지하도록 도왔다. 세르비아에 대한 종주권을 표시하고자 임레는 1202년에 최초로 세르비아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헝가리 군주가 되었다.

1202년 여름,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제4차 십자군 지도자들과 조약을 맺고, 베네치아인들이 1186년부터 헝가리 군주의 종주권을 받아들인 달마티아의 도시 자다르를 탈환하는 것을 돕기로 합의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에게 자다르를 포위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그들은 11월 24일에 그 도시를 점령하여 베네치아인들에게 넘겨주었다. 교황은 임레의 요구에 따라 베네치아인과 십자군을 파문했지만, 자다르는 베네치아의 지배하에 남았다.

임레의 십자군을 두려워한 보스니아의 반 쿨린은 1203년 4월 6일제니차에서 보스니아 교회의 시노드를 개최했다. 시노드는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고 의식 개혁을 명령했다. 쿨린은 또한 임레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1203년에 쓰여진 편지에서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은 임레가 불가리아의 5개 지역을 점령했으며, 칼로얀은 교황 인노첸시오에게 개입을 요구했다고 알렸다.

2. 4. 말년 (1203년 ~ 1204년)

1203년 가을, 언드라시 공작은 다시 임레에게 반란을 일으켰다.[1] 두 군대는 10월에 드라바강바라주딘에서 만났다.[1] 임레는 무장하지 않은 채 동생의 진영으로 들어가 "이제 누가 감히 왕족의 피를 흘리도록 손을 들지 지켜보겠다!"라고 말했다.[1] 이는 스플리트의 토마스 대주교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1] 아무도 감히 왕을 막지 못했고, 그는 저항 없이 언드라시에게 다가가 그를 체포했다.[1] 언드라시 공작은 몇 달 동안 억류되었지만, 1204년 초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풀려났다.[1]

헝가리 내전을 틈타 칼로얀은 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및 기타 요새를 침략하여 점령했다.[1] 임레는 불가리아 원정을 준비했지만,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요구에 따라 군대를 해산했다.[1] 칼로얀과 교회 연합을 협상 중이던 교황은 그에게 왕관을 보냈지만, 임레는 교황 사절이 헝가리를 통과하여 불가리아로 왕관을 전달하려 할 때 그를 투옥했다.[1]

심각한 병에 걸린 임레는 1204년 8월 26일에 네 살 된 아들 라슬로를 왕으로 즉위시켰다.[1] 그는 또한 교황 사절을 풀어주었다. 그는 동생과 화해하여 "후견인이 성년에 이를 때까지 아들의 후견과 왕국의 전반적인 행정을 그에게 위임"했다.[1] 임레는 11월 30일에 사망했다.[1] 임레는 에게르 대성당에 묻혔다.[2]

3. 가족

임레는 1196년에서 1200년 사이에 아라곤의 왕 알폰소 2세의 딸 콘스탄스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의 외아들 라슬로는 1200년경에 태어났지만, 1205년 5월 7일에 요절했다.[1]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은 콘스탄스는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재혼했다.[2]

참조

[1] 서적 Archdeacon Thomas of Split: History of the Bishops of Salona and Split
[2]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3] 서적 Archdeacon Thomas of Split: History of the Bishops of Salona and Split
[4]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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