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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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율주의는 1960년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젊은 노동자 운동에서 기원한 사상으로, 노동자 자율을 강조하며 기존의 노동조합 노선을 거부하고 자생적인 투쟁을 강조한다. 이탈리아를 넘어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하위문화와 결합하여 펑크 운동 등에 영향을 미쳤다. 자율주의는 자기 조직화, 직접 행동, 삼중 억압 이론 등을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하며, 다양한 사상가들의 이론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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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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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개요 | |
정의 | 반권위주의 좌파 정치 및 사회 운동과 이론 |
로마자 표기 | Autonomism |
다른 표기 | 오페라이스모 (Operaism) 포테레 오페라이오 (Potere Operaio) 자율주의 운동 자치주의 자율주의 (Autonomen) (독일어) 자율주의 (Autonomen) (네덜란드어) |
특징 | 반권위주의 좌파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비판 국가사회주의 비판 노동조합주의 비판 의회주의 비판 사회적 투쟁 강조 노동자 자율성 강조 자율적 사회 센터 지향 |
이론적 배경 | |
기원 | 이탈리아의 오페라이스모 운동 |
주요 사상가 | 마리오 트론티 안토니오 네그리 파올로 비르노 프랑코 베라르디 |
비판 대상 | 마르크스주의의 일부 요소 정치적 정당 국가 자본주의 |
영향 | |
관련 운동 | 서구 마르크스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리버테리언 마르크스주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극좌 |
글로벌 운동 | 전 세계 사회 운동의 일부 |
관련 용어 | 자율주의적 지리학 |
참고 자료 | |
온라인 자료 |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림 |
학술지 | 자율주의를 전지구적 사회운동으로 자율적인 지리학에서 자율주의적 지리학으로 |
2. 기원과 명칭
이탈리아에서 1968년 68 운동은 대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프랑스나 미국, 독일 등지의 운동과는 달리 처음부터 젊은 노동자들의 운동이었다. 1968/69년 당시의 노동자 대투쟁에서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노동자의 자율)라고 스스로를 지칭한 노동자주의적 사회운동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 그룹은 투쟁적 운동으로써, 데모에서 경찰에 폭력적으로 맞섰으며, 공장에서의 사보타주를 주도했다. 노동자와 학생 뿐 아니라 노숙자와 실업자들도 이 운동에 함께 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공산당과 주류 노동조합의 노선을 강하게 거부하였으며 “노동자주의 (오페라이스모)”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의 핵심적 요소가 “자율”이었다.
이탈리아에서 68 운동은 대학생 중심이었던 프랑스, 미국, 독일 등과 달리, 처음부터 젊은 노동자들의 운동이었다. 68/69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노동자의 자율)라고 불린 노동자주의적 사회운동은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경찰에 폭력적으로 맞서고, 공장 사보타주를 주도했으며, 노숙자와 실업자들도 함께 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공산당과 주류 노동조합 노선을 거부하고 "노동자주의(오페라이스모)"라는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이 이론의 핵심 요소가 "자율"이었다.
당시 안토니오 네그리, 마리오 뜨론띠 등의 지식인 그룹은 자신들이 속한 대학 뿐 아니라 노동현장에 열정적으로 참가했으며, 이들의 참여는 단지 지식인의 계몽적 역할에 머물지 않고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의 모습에 상응하는 그런 것이었다. 공장에서의 (전통적인 노동조합까지도 포함하는) 지배관계와 맞서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주의와 자율주의의 이론이 태동하였고, 이후 1970년대에 이 운동과 이론은 공장을 넘어서서 사회 곳곳의 여러 분야를 공격하게 된다. 이들은 도심에서의 건물 점거, 대안미디어(자유 라디오 등), 대중교통 집단 무임승차 등의 운동방법들을 개발하였으며, 여성운동, 생태운동, 반전평화운동과 결합했다.
1970년대 후반 일각의 테러주의와 이에 대응하는 경찰국가의 강경한 탄압으로 인해 노동자주의는 약화되었지만 자율에 대한 이들의 이해, 즉 노동조합과 당과의 연결로부터 자주적인 정치적 투쟁, (고정된) 조직과 지도 없는 자생적인 운동에 대한 강조는 이후로 이탈리아 바깥의 “자율주의자”들이 자신들을 규정하는 내용이 된다.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운동과는 달리 독일어권에서는 노동운동에서 노동자주의의 영향을 받은 실천이나 이론이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했다.
''autonomia''/''Autonome''라는 단어는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 αὐτο- ''auto-''(자기 자신)와 νόμος ''nomos''(법)의 합성어이며,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법을 부여하는 자"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여기서 "자율성"은 "독립"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독립"이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폐쇄경제적인 생활 방식을 함축하는 데 반해, 자율성은 사회 속에서 각자가 각자의 규율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자율주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이었지만, "폴리스(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살 수 있는 것은 짐승이나 신뿐이다"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개념을 간접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마누엘 칸트는 계몽을 사고의 자율성과 Sapere audela(라틴어 속담 "감히 지혜로워져라")로 정의했다.
3. 이탈리아에서의 자율주의 운동
안토니오 네그리, 마리오 트론티 등 지식인들은 대학뿐 아니라 노동현장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다. 공장에서의 지배관계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주의와 자율주의 이론이 태동했고, 70년대에 이 운동과 이론은 사회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건물 점거, 대안미디어(자유 라디오 등), 대중교통 집단 무임승차 등의 운동방법을 개발하고, 여성운동, 생태운동, 반전평화운동과 결합했다.
70년대 후반 일부의 테러주의와 경찰국가의 탄압으로 노동자주의는 약화되었지만, 자율에 대한 이해, 즉 노동조합과 당과의 연결로부터 자주적인 정치적 투쟁, (고정된) 조직과 지도 없는 자생적인 운동 강조는 이후 이탈리아 바깥의 "자율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운동은 노동계급이 국가, 노동조합, 정당과 독립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에 변혁을 강요할 능력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조직 구조 외부에서의 자기조직화된 행동에 중점을 두며, 노동계급의 자본주의에 대한 일상적인 저항으로서 absenteeism영어(결근주의), 느린 작업, 작업장의 자기조직화, 파업 등의 활동에 주목한다.
다른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을 중요시하지만, "노동계급"을 더 폭넓게 정의하여, 사무직과 육체노동직을 모두 포함하는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 실업자, 가사노동자 등도 포함한다.
Mario Trontiit, 안토니오 네그리, Sergio Bolognait, Paolo Virnoit 등 초기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노동 개념을 넘어선 "비물질적"(immaterial) "사회적 노동"(social labour)에 주목했다. 마리아 로자 달라 코스타와 Silvia Federiciit 등의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무임금 여성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969년, 오페라이즈모 접근 방식은 아드리아노 소프리가 이끄는 롯타 콘티누아(계속되는 투쟁)와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이끄는 포테레 오페라이오(노동자 권력) 두 집단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마리오 카판나는 밀라노 학생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이아는 미국의 존슨-포레스트 경향과 프랑스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서 활동했던 과거 활동가들의 연구에 발맞출 수 있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콰데르니 로시」와 그 후속지인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클라세 오페라이아」지가 발행되었는데, 이들은 초기 아우토노미아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주요 필진으로는 라니에로 판치에리, 마리오 트론티,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있다.
해적방송 또한 아우토노미아의 확장 요인 중 하나였으며, 볼로냐의 라디오 알리체가 그러한 예 중 하나이다.
1966년 로마 대학교에서 네오파시스트 학생들에 의해 학생 파올로 로시가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Indiani metropolitaniit (대도시의 인디언들)을 포함한 이탈리아의 학생 운동은 다양한 직접 행동을 전개했다. 1967년과 68년 겨울의 대학 점거, 피아트 공장 점거, 1968년 3월의 Battaglia di Valle Giuliait 등에서는 학생들과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인디아니 메트로폴리타니는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이어진, 납의 시대라고 불리는 극좌 항의 운동 속의 소규모 정파였다. 그 지지자들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투 화장처럼 얼굴에 그림을 그렸고, 히피와 같은 옷을 입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stare insieme"("함께"), 자발성, 그리고 음악 등의 예술이었다. 이 그룹은 1977년 라 사피엔차 대학교 점거 당시 로마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3. 1. 1977년 운동과 붉은 여단
1977년 운동의 맥락에서, 1977년 3월 11일 경찰에 의해 학생 프란체스코 로루소(Francesco Lorusso)가 살해된 후 볼로냐(Bologna)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1979년부터 국가는 알도 모로(Aldo Moro)를 납치하고 암살한 적군파(Red Brigades)를 보호했다는 혐의로 자치주의 운동(autonomist movement)을 효과적으로 기소했다. 좌익 활동가 1만 2천 명이 구금되었고, 600명이 해외로 도피했는데, 그중 300명은 프랑스로, 200명은 남아메리카로 갔다.[11]
3. 2. 투테 비앙케 (Tute Bianche)
Tute Biancheit (흰 작업복)는 1994년부터 2001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과격 사회주의 운동이다. 활동가들은 시위 도중 경찰의 공격을 막고, 경찰의 통제선을 돌파하며, 대규모 시위대 안에서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면으로 몸을 감쌌다. 투테 비앙케 운동은 2001년 7월 제노바 정상회의 반대 투쟁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약 1만 명의 시위대가 하나의 시위대열에 모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흰 작업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된 이후의 일이었다. 제노바 투쟁 이후, Ya Basta Association영어 (이제 그만 연합)은 해산되었고, 몇몇 그룹은 디소베디엔티(Disobbedienti; 불복종자)에 합류했다. 이들의 철학에는 점거와 스쿼터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사회 센터 창출, 성차별 반대, 이민자의 권리 및 정치적 망명을 원하는 난민 옹호, 거리 시위에서 대규모 시위대열을 형성하여 필요하다면 경찰과 충돌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투테 비앙케의 중심은 1994년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의 치아파스 반란의 영향을 받은 집단의 전 이탈리아적인 네트워크인 Ya Basta Association영어이었다. 야 바스타는 주로 밀라노의 사회 센터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사회 센터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아우토노미아 운동에서 성장한 것이었다. 투테 비앙케에는 다양한 국제적인 파생 단체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영국의 WOMBLES영어는 그 전략은 채택했지만, 정치적 신념은 달랐다. 스페인의 "Mono Blanco"는 투테 비앙케의 상징을 선호해서 사용했다. 북미 최초의 투테 비앙케 파생 조직인 NYC Ya Basta Collective영어는 흰색이 아닌 노란색 작업복을 입었다.
4. 독일에서의 자율주의 운동
독일에서의 자율주의 운동은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과 의회 밖 좌파 운동(APO)의 전통에서 등장했다. 서베를린의 코뮨1 운동을 비롯한 "Spaß 게릴라" 행동이나 "자발성 운동" 등 신좌파들은 독일 자율주의의 내용과 행동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에는 적군파(RAF)나 7월 2일 운동 및 혁명세포(RZ) 그룹 등 좌파 테러리즘 그룹을 후원하거나 그들에게 동조했다. RZ 네트워크 안에는 (특히 서베를린에 기반을 둔) 사회혁명적, 자율주의적 성향의 분파가 존재했다.
1980년대 들어서 북서부 대도시와 서베를린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자율주의(Autonomen)" 또는 "탈교조주의적 좌파" 그룹들이 등장했다. 1980년 여름 베를린에서 자율주의자들의 총회가 처음 열렸고, 1980년 5월 6일 브레멘에서는 연방군 신병 선서식에 대항하는 격렬한 대중시위가 있었다. 수천 명의 반군사주의자들은 경찰 투입에 폭력적으로 맞섰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자율주의 그룹들은 반전 평화 운동이나 핵발전소 반대 운동 등 "신사회운동"의 데모나 직접 행동에 빈번히 참여하고 있다. 자율주의 일각의 폭력 투쟁은 "블랙 블록(black bloc)"으로 불리며, 이는 프랑크푸르트 검찰청이 붙인 이름이다. 1989년 독일의 시위 규제 관련 법률이 개정되어 헬멧이나 패딩과 같은 보호구 및 얼굴을 가리는 것을 착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1990년대 이후 자율주의자들은 건물점거를 통한 자율주의 공간 운동, 반파시즘 및 반인종주의 운동, 난민과 이민자들에 연대하는 운동("불법 인간은 없다")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2000년대 후반에는 여러 대도시에서 느슨한 네트워크 형태의 자율주의자 총회들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서독에서는 Autonomede이라는 용어가 급진 좌파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10][27]
4. 1. 분열과 반유대주의 논쟁
독일에서의 자율주의 운동은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과 의회 밖 좌파 운동(APO)의 전통에서 등장했다. 서베를린의 코뮨1 운동을 비롯한 "Spaß 게릴라" 행동이나 "자발성 운동" 등 신좌파들은 독일 자율주의의 내용과 행동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쳤다.1970년대 좌파 테러리즘 그룹인 적군파(RAF)나 7월 2일 운동 및 혁명세포(RZ) 그룹을 후원하거나 그들에게 동조했다. RZ 네트워크 안에는 (특히 서베를린에 기반을 둔) 사회혁명적, 자율주의적 성향의 분파가 존재했다.
1980년대 들어서 북서부 대도시와 서베를린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자율주의(Autonomen)" 또는 "탈교조주의적 좌파" 그룹들이 등장했다. 1980년 여름 베를린에서 자율주의자들의 총회가 처음 열렸고, 1980년 5월 6일 브레멘에서는 연방군 신병 선서식에 대항하는 격렬한 대중시위가 있었다. 수천 명의 반군사주의자들은 경찰 투입에 폭력적으로 맞섰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자율주의 그룹들은 반전 평화 운동, 핵발전소 반대 운동 등 "신사회운동"의 데모나 직접 행동에 빈번히 참여하고 있다. 자율주의 일각의 폭력 투쟁은 "블랙 블록"(black bloc)으로 불리며, 이는 프랑크푸르트 검찰청이 붙인 이름이다.
1990년대 이후 자율주의자들은 건물점거를 통한 자율주의 공간 운동, 반파시즘 및 반인종주의 운동, 난민과 이민자들에 연대하는 운동("불법 인간은 없다")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2000년대 후반에는 여러 대도시에서 느슨한 네트워크 형태의 자율주의자 총회들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자율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여러 상이한 급진적인 의회 밖 좌파들이 뒤섞여 있는 혼합체였다.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상이한 노선이 주도했다. 아나코생디칼리즘을 추종하는 그룹, 적군파와 친화적인 반제국주의 그룹 등 매우 다종적인 그룹이었다.
자율주의 운동과 관련된 두 개의 극단은 "반독일(Antideutsche)" 노선과 "반제국주의(Amtiimps)" 노선이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좌파 내부의 반유대주의, 중동 문제에 대한 입장, 3차 걸프 전쟁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불붙었다. 이 논쟁은 매우 격렬했으며, 심한 경우 양 그룹 간 직접적인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반독일" 노선은 이스라엘과의 연대를 표명하고, 미국의 중동 정책을 종종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들의 입장은 극단적 이슬람주의와 자살폭탄 공격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잘 드러났다.
"반제국주의" 노선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며 범죄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 운동'에 연대했다.
다수의 반제국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율주의자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이들은 선진국의 부가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착취에 기반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지정학적 차원을 갖고 있다고 본다. 선진국에 더 이상 사회 혁명에 대해 물질적인 이해를 가진 객관적인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혁명주의자들의 과제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정권을 후원하고, 선진국의 군산복합체에 대항해 사보타주와 평화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계급 투쟁은 군사 행동으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이며, 적군파에 동조했고, 많은 적군파 활동가들이 반제국주의 운동으로부터 활동가를 수급했다.
선진국에서의 혁명적 변화 가능성을 믿는 자율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사회혁명주의자"로 표방했다. 반독일주의자들은 모든 종류의 국민적 정체성을 강하게 거부하고, 독일의 반시오니즘에 대한 판단을 미국의 정책에 대한 긍정적 혹은 유보적인 판단과 연결하지 않는 반국가주의적 입장이다. 이 두 흐름은 자율주의 흐름 안팎에 모두 존재한다. 'konkret'나 'Jungle World' 등의 잡지는 반독일주의나 반국가주의 담론 과정으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아나코생디칼리즘이나 아나키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자율주의 그룹들은 국기 사용이나, 국가나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연대를 기본적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런 운동은 지배와 억압을 민족 국가의 내적인 구성 요소로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의 자율주의자들이 수적으로 가장 많으며, 반제국주의자들이나 반독일주의자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각각 여러 행동 그룹들의 가장 극단적인 경향에 대한 것이고, 최근 들어서는 좀 더 넓은 범위의 연대를 구축하는 흐름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4. 2. 하위문화에서의 영향
1980년대 초반부터 하위문화로서 음악 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포괄하는 펑크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상업화된 록과 팝음악 및 관습적인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에 반기를 들었고, 당시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의 자율주의자들에게 많은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27]좌파 이론은 “멋진 전복적” 유머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집단들 중에는 자율주의적인 학생-여성운동, 남성운동, 동성애 운동의 여러 근원들이 있었다.
80년대 말에는 많은 여성들이 자율주의 씬을 떠나게 된다. 당시 많은 여성활동가들이 그들에게 저질러진 성역할 부여와 성폭력을 문제제기 하고, 해결을 요구하게 되면서 성별화된 “섹시즘”의 문제의식이 운동사회 안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보쿰에서는 여성활동가들이 자율센터에서의 섹시즘에 대한 논쟁 이후 남성 활동가들의 퇴거를 요구하였고, 공간을 “자율주의 여성 센터”로 이름붙인 일도 있었다. 이 외에도 각 지역의 섹시즘 논쟁 이후 조직이 분열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자율주의 여성/레즈비언” 씬의 비판자들에게 이들은 도덕적 엄숙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실상 자율주의 집단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이질적인 채로 남게 되었다.
90년대 초에는 자율주의자 게이들이 “Tunten (여성적으로 여겨지는 동성애자들을 지칭)-테러-투어”의 일환으로 Fulda시의 카톨릭 성당 앞에서 소위 “Sex-In”을 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채식주의나 비건 운동이 자율주의 씬에서 주요 주제로 떠올랐다. 폭력투쟁과 관련해서는 매우 강한 분파가 생기기도 했다. 한편에선 헬멧과 유니폼으로 신분을 숨긴 블랙 블록의 투쟁을 원천적인 자율주의의 데모 형태라고 굳게 주장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런 방식을 “의례적 폭력투쟁 페티시”라고 비판하고, “Pink and Silver”와 같은 새로운 행동양식이나 “저항의 리듬”과 같은 정치적 타악기 그룹들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5. 프랑스에서의 자율주의 운동
코르넬리우스 카스트리아디스가 이끄는 마르크스주의자 그룹 Socialisme ou Barbarie|사회주의냐 야만이냐프랑스어는 프랑스 최초의 아우토노미아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랭크 앤드 파일 노동자들의 투쟁, 즉 노조나 당의 지도에서 자율적인 투쟁에 관한 독자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Socialisme ou Barbarie|사회주의냐 야만이냐프랑스어는 소련의 공산당 정권을 Bureaucratic collectivism|관료적 집산주의영어이며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비판했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이 운동의 일원이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이즘 운동의 영향은 안토니오 네그리에 가까운 경제학자 Yann Moulier-Boutang|얀 무리에 부탕프랑스어에 의한 비평지 Materiaux pour l'intervention (1972년~73년) 창간으로 그 조짐을 보였다. 이는 카마라드파(1974년~78년) 창립으로 이어졌다. 부탕은 펠릭스 가타리가 설립한 Centre International pour des Nouveaux Espaces de Liberte (CINEL)에 참가하여, 테러리스트로 기소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300명 이상의 이탈리아 활동가들을 지원했다.
프랑스의 자치 운동은 파리 자치 그룹 회의(Assemblé Parisienne des Groupes Autonomes; AGPA, 1977년~78년)를 결성했다. 여기에는 부탕이 이끄는 카마라드파, 리버테리언 공산주의 조직, 밥 나두렉의 "욕구의 자치"를 자칭하는 사람들, 도시의 토지 불법 점유자 등이 포함되었다. 프랑스의 자치 조직은 적군파(바더 마이호프 그룹) 전 구성원을 지원했고, 장-폴 사르트르도 적군파 수감자들의 구금 조건에 개입했다.
1979년에는 급진파 직접 행동(액시옹 디렉트)파가 등장하여 몇몇 폭력적인 직접 행동을 실행했다. 이들은 르노의 CEO인 조르주 베스와 오드랑 장군 살해에 대한 책임을 주장했고, 1987년에 해산했다.
1980년대에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아우토노미아 운동이 활발해졌다. 파리의 점거 운동이나 폭동(Campus de Jussieu|1980년 쥐시오 캠퍼스프랑스어 주변, 1982년 아르덴느의 반핵 시위 등)으로 나타났다. 1986년부터 1999년에는 Comité des mal-logés|빈민 위원회프랑스어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숙소 부족을 비난하기 위해 프랑스 국립 사회 주택국의 몇몇 건물을 점거했다.
1990년대, 프랑스의 자치주의자들은 Travailleurs, Chomeurs, et Precaires en colere|분노한 노동자·실업자·불안정 고용자프랑스어와 l'Assemblee generale des chomeurs de Jussieu|쥐시오 실업자 대중 집회프랑스어와 함께 실업자 투쟁 속에서 나타났다. 또한 반세계화 운동에 참여하여, 불법 체류 외국인 운동과 반추방 집단에 연대했다. 2002년 7월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No Border network|국경 없는 세상영어에 의한, 특히 솅겐 지역의 반이민 정책에 대한 항의 캠프가 개최되었다.
2003년, 프랑스 사회당이 Forum social européen|유럽 사회 포럼프랑스어에 참가했다. 그해 12월, 수백 명의 실업자들이 봉 마르셰 백화점에서 상품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경비 기동대는 매장 내 실업자들에게 물리적 공격을 가했다. 자치주의자들은 2006년 청년고용계약에 반대하는 Mouvement contre le contrat première embauche|2006년 프랑스 청년 저항 운동프랑스어과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니콜라 사르코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폭동을 일으켰다.
6. 이론과 내용
자율주의 이론은 1960년대 이탈리아의 노동자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32] 이탈리아의 68 운동은 젊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노동자의 자율) 그룹은 투쟁적 운동을 주도했다.[32] 이들은 경찰에 맞서 싸우고, 공장에서 사보타주를 벌였으며, 노숙자와 실업자도 운동에 참여했다. 노동조합과 정당과는 독립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변혁을 강요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이스라엘 공산당과 주류 노동조합 노선을 거부하고 "노동자주의(오페라이스모)" 이론을 발전시켰다.[32] 이 이론의 핵심은 "자율"이었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리오 뜨론띠 등 지식인들은 노동 현장에 참여하며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공장 내 지배 관계에 맞서는 투쟁을 통해 노동자주의와 자율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1970년대에는 이 운동과 이론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건물 점거, 대안 미디어, 대중교통 무임승차, 여성운동, 생태운동, 반전평화운동 등과 결합했다.[32]
1970년대 후반, 일부의 테러와 경찰 국가의 탄압으로 노동자주의는 약화되었지만, 자율에 대한 이해는 이탈리아를 넘어 다른 지역 "자율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독일에서는 노동운동에서 큰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자율주의 그룹은 자기조직화, 자율적 결정, 직접행동 이론 등을 토론했다.[32]
자율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관계망 속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타율 없이 자기 결정에 따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폭력투쟁을 "투쟁적" 의미로 이해하며, 국가의 폭력 독점을 비판한다. 이들의 투쟁 대상은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네오나치, 착취 기업, G8 등이다.[32]
자율주의 이론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계급 문제의 복합인 "삼중의 억압"을 강조한다.[32] 이는 상품의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를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으로 보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는 다른 관점이다. 자율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이 이 세 가지 권력 형식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본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관계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창출하는 "가치비판이론"에 주목하기도 했다.
자율주의자들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계급투쟁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노동 계급의 범위를 더 넓게 정의한다.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 실업자, 주부 등 무임금 노동자도 포함시킨다. 초기 이론가들은 비물질적 및 사회적 노동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노동 개념을 사회 전체로 확장했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부가 집단적 노동으로 생산되지만, 그중 일부만이 임금 형태로 노동자에게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6. 1. 자율적 결정과 자기 조직화
자율주의 그룹에서는 자기조직화와 자율적 결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들은 직접행동과 행동적 선전(Propaganda of the deed)을 통해 권한을 부여(Empowerment)하고,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자 한다.[32] 자율주의자들은 사람들이 관계망 속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도, 외부의 결정이 아닌 자기 결정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폭력투쟁을 "군사적"이 아닌 "투쟁적" 의미로 이해하며, 국가의 폭력 독점을 비판한다. 이들의 투쟁 대상은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네오나치, 착취 기업, G8 등이다.[32]자율주의 이론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계급 문제의 복합인 "삼중의 억압"을 강조한다.[32] 이는 상품의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를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으로 보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는 다른 관점이다. 자율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이 이 세 가지 권력 형식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본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관계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창출하는 "가치비판이론"에 주목하기도 했다.
자율주의자들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계급투쟁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노동 계급의 범위를 더 넓게 정의한다. 이들은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 실업자, 주부 등 무임금 노동자도 포함시킨다. 초기 이론가들은 비물질적 및 사회적 노동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노동 개념을 사회 전체로 확장했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부가 집단적 노동으로 생산되지만, 그중 일부만이 임금 형태로 노동자에게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이탈리아의 자치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오페라이즈모(Operaismo, 노동자주의)라고 불리며, 1960년대 초에 등장했다. 피아트(Fiat) 노동자들의 노조 불만과 1962년 토리노 피아트 노동자 폭동("fatti di Piazza Statuto")은 노동조합을 벗어난 자율적 노동자 대표 이론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69년, 오페라이즈모는 아드리아노 소프리(Adriano Sofri)가 이끄는 롯타 콘티누아(Lotta Continua)(계속되는 투쟁)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등이 이끄는 포테레 오페라이오(Potere Operaio)(노동자 권력)로 나뉘었다. 마리오 카판나(Mario Capanna)는 밀라노 학생 운동의 지도자로, 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접근을 취했다.
1966년 로마 대학교에서 학생 파올로 로시가 살해된 사건 이후, 인디아니 메트로폴리타니(Indiani metropolitani, 대도시의 인디언들)를 포함한 이탈리아 학생 운동은 폭동, 점거, "자율적 감축" 등 다양한 직접 행동을 전개했다. 1967년과 68년 겨울의 대학 점거, 피아트 공장 점거, 1968년 3월의 발레 줄리아 전투(Battaglia di Valle Giulia) 등에서는 학생들과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인디아니 메트로폴리타니는 1976년부터 1977년까지 납의 시대라고 불리는 극좌 항의 운동의 소규모 정파였다. 이들은 "stare insieme"("함께"), 자발성, 예술을 강조했다. 1977년 라 사피엔차 대학교 점거 당시 로마에서 활동했다.
1977년 3월 11일, 경찰이 학생 프란체스코 로루소(Francesco Lorusso)를 살해한 것을 계기로 볼로냐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1979년 초, 이탈리아 정부는 아우토노미아를 기소하고, 알도 모로를 납치・살해한 붉은 여단을 보호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만 2천 명의 극좌 활동가들이 구금되었고, 600명이 해외로 망명했다.[26]
투테 비앙케(Tute Bianche, 흰 작업복)는 1994년부터 2001년까지 활동한 이탈리아의 과격 사회주의 운동이다. 활동가들은 데모 도중 경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면으로 몸을 감쌌다. 투테 비앙케 운동은 2001년 7월 반제노바 정상회의 투쟁에서 정점을 찍었다. 제노바 투쟁 이후, 야 바스타 연합(Ya Basta Association, 이제 그만 연합)이 해산되었고, 몇몇 그룹은 디소베디엔티(Disobbedienti; 불복종자)에 합류했다. 이들은 점거, 스쿼터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사회 센터 창출, 성차별 반대, 이민자 권리 옹호 등을 추구했다.
투테 비앙케의 중심은 야 바스타 연합으로, 1994년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의 치아파스 반란의 영향을 받았다. 야 바스타는 밀라노의 사회 센터에서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아우토노미아 운동에서 성장했다. 투테 비앙케에는 다양한 국제적인 파생 단체가 나타났다.
6. 2. 폭력 투쟁에 대한 이해
독일에서 자율주의 운동은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과 의회 밖 좌파 운동(APO) 전통에서 등장했다.[32] 서베를린의 코뮨1 운동을 비롯한 “Spaß 게릴라” 행동이나 소위 “자발성 운동” 등 신좌파는 독일 자율주의의 내용과 행동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좌파 테러리즘 그룹인 적군파(RAF)나 7월 2일 운동 및 혁명세포(RZ)그룹을 후원하거나 그들에게 동조하기도 했다.[32]1980년대 들어서 북서부 대도시와 서베를린에서 "자율주의(Autonomen)"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6일, 브레멘에서 연방군의 신병 선서식에 대항하는 격렬한 대중시위가 있었고, 수천 명의 반군사주의자들이 경찰에 폭력적으로 맞섰다.[32]
1970년대부터 1990년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자율주의 그룹들은 반전 평화 운동, 핵발전소 반대 운동 등 "신사회운동"의 데모나 직접행동에 참여하고 있다. 자율주의자들은 이런 직접행동의 목표나 내용에 따라 환영받기도 했지만, 주로 자율주의 일각의 폭력투쟁 때문에 거부되기도 했다. 이들 폭력 투쟁 그룹은 소위 “블랙 블록”(black bloc)으로 불린다.[32]
자율주의 그룹에서 빈번히 토론되는 내용 중에는 폭력 투쟁에 대한 질문이 있다. 자율주의자들은 폭력투쟁을 “군사적”이 아니라 “투쟁적”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이들은 폭력이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하며, 국가의 폭력 독점을 문제시한다. 폭력투쟁적 행동의 공격 대상은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네오나치 근거지, 착취로 이름난 사업장, G8 등 국제회의 등이다.[32]
6. 3. 삼중 억압 이론
자율주의자들의 이론적 토대에서는 “삼중의 억압”이 종종 이야기된다. 이것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계급 문제의 복합을 말한다.[32] 이러한 이론은 상품의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를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으로 보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고전과는 다른 관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이 세 가지 권력 형식으로 구성된 관계망 속에서 각각의 삶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억압받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자율주의 경향들 속에서는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 속에서는 노동의 해방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적 관계를 거부하는 실천(평의회 등)을 통해서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창출할 수 있다는 “가치비판이론”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6. 4. 비물질 노동과 사회적 노동
안토니오 네그리, 마리오 뜨론띠 등 초기 이론가들은 '비물질적 노동', '사회적 노동' 개념을 제시하며, 노동 개념을 사회 전체로 확장했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부가 설명할 수 없는 집단적 노동으로 생산되며, 그중 일부만이 임금 형태로 노동자에게 주어진다고 보았다.[7]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계급투쟁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자율주의자들은 노동 계급의 범위를 더 폭넓게 정의했다.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 실업자, 주부 등 무임금 노동자도 포함시켰다. 초기 이론가들은 비물질적 및 사회적 노동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노동 개념을 사회 전체로 확장했다.
7. 자율주의 사상가
- 프랑코 베라르디(Franco Berardi)
- 조지 카펜트지스(George Caffentzis)
-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9]
-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 마이클 하르트(Michael Hardt)
- 존 홀로웨이(John Holloway)
- 마우리치오 라자라토(Maurizio Lazzarato)
-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 가스파르 미클로시 타마시(Gáspár Miklós Tamás)
- 마리오 트론티(Mario Tronti)
- 파올로 비르노(Paolo Virno)
- 닉 다이어-위더포드(Nick Dyer-Withe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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