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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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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공은 종속국이 상위 국가에 바치는 공물이나 예물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국가와 제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아즈텍 제국에서는 정복 지역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중국에서는 주변 국가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조공 체제를 운영했다. 중국은 조공을 통해 주변국의 복종을 얻고, 자국의 권위를 과시했으며,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은 조공을 통해 중국과의 교역 및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이슬람 칼리파국은 지즈야라는 새로운 형태의 공물을 도입했으며, 조공 체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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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
조공
정의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바치는 예물
역사적 의미
목적복종, 존경, 충성의 표시
정치적 함의종속 관계의 상징
경제적 함의무역 관계의 촉진
경제적 이익 확보
조공 관계
대표적인 예시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조공 체계
조공국의 의무정기적인 예물 헌상
종주국의 혜택정치적 보호
경제적 지원
문화 전파
조공의 종류
공물지역 특산물, 진귀한 물품
인적 자원외교 사절
학자
기술자
조공의 변화
근대 이후국제 관계 변화로 조공 체제 쇠퇴
현대적 의미외교적 선물 교환
경제 협력의 상징
참고
관련 용어책봉, 공물, 조공 무역

2. 역사적 배경

조공은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관습이다. 주나라는 친척이나 공을 세운 신하들을 각 영토에 보내 다스리게 하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공은 중국 내부뿐만 아니라, 중국 밖의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과의 무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 왕조는 서양 국가들과 교역할 때도 조공 제도를 요구했다.

조공을 하는 나라는 형식적으로 중국에 공물을 바쳤고, 중국은 그 대가로 몇 배나 되는 답례품을 주었다. 경제적으로 보면 조공은 받는 쪽이 손해를 보는 무역이었다. 일본견당사가 대표적인 예인데, 중국은 "먼 나라에서 매년 조공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공은 경제적 이익 외에도 책을 구입하거나 정보를 얻는 등 문화적인 이점도 있었다.

중국 문화가 주변에 퍼지면서, 많은 나라들이 중국과 무역하기 위해 조공과 책봉 제도를 따랐다. 하지만 때로는 자존심이나 국력 때문에 이 제도를 거부하고, 스스로 나라를 세워 중국을 정복하기도 했다. 송나라 때는 거란족이 세운 가 송나라와 대등하게 교역하려 했고, 여진족의 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기도 했다. 몽골족의 은 송나라를 정복하여 조공 무역을 없앴다. 명나라청나라 때는 잠시 조공 무역이 부활했지만, 이 유럽 국가에 조공을 강요하면서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결국 청나라는 반식민지가 되었다. 아즈텍 제국 역시 정복한 도시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5]

국가마다 조공에 대한 기록이 다르고, 때로는 사실이 아닌 내용을 기록하기도 했다. 돌궐이나 오이라트 같은 나라들은 중국을 공격하여 오히려 조공을 받기도 했다.

2. 1. 중국

주나라는 친척이나 공을 세운 신하들을 각 영토에 보내 신하로 삼고 조공을 하게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공은 중국 영토 안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밖의 독립적인 이민족이나 외국 국가들과 교역할 때도 중국 왕조가 요구하는 무역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서양 열강들이 중국 왕조와 교역을 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공을 하는 나라는 중국 왕조에 형식적으로 공물을 보내고, 중국 왕조는 외국의 왕들에게 형식적으로 제후국 책봉을 주면서 받은 공물의 몇 배에서 몇십 배에 달하는 답례품을 하사하였다. 경제적으로 보면 조공은 하는 쪽보다 받는 쪽이 더 불리한 무역 형태였다.

일본의 경우, 견당사(遣唐使)는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 조공을 했고, 이에 대해 중국 측은 "먼 나라에서까지 해마다 조공할 의무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교역 시스템으로서의 조공은 경제적 이득뿐 아니라 서적 구입, 정보 수집 등 사회·문화적 이익도 함께 가져왔다.[27]

다른 이민족이나 국가들에 중국식 문화가 전파되면서, 중국이 주나라 때부터 시행한 조공, 책봉 형태의 교역 제도는 외국 국가들이 중국 왕조와 무역하기 위해 채택되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는 자존심 문제나 국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이러한 제도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국가를 세우고 중국 한족 왕조를 정복하는 정복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송나라 시대에는 이러한 양상이 반대로 나타났다. 거란족은 중국 송나라와 교역하기 위해 조공 제도를 이용했으나, 세력이 커지자 (遼)를 세우고 송나라에 대등한 위치에서 교역을 원했다. 여진족이 세운 정복 왕조인 (金)나라는 송나라와 계속 전쟁을 하여 송나라가 조공을 바치는 형태가 되었다.

몽골족이 세운 (元) 왕조는 결국 송나라를 정복했고, 중국인들은 몽골족에 완전히 복속되어 조공 무역이 사라졌다. 명나라청나라 때는 잠시 외국과 조공 무역이 행해졌지만, 시행되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다.

(清) 왕조는 유럽 국가와의 교역에도 기존의 조공 책봉이라는 중화 사상 제도를 적용하려 했지만, 이는 유럽 국가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아편전쟁의 불씨를 제공했고,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조공과 관련된 기록은 국가마다 다르며, 자존심을 위해 실제 없었던 외국의 조공 기록을 꾸며내기도 한다. 돌궐, 오이라트 같은 외국들은 중국 왕조를 군사적으로 공격하거나 정복하여 중국이 조공을 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고대 중국일본,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보르네오,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네팔, 미얀마, 중앙아시아 등 다양한 국가로부터 조공을 받았다.[2][3] 중국은 유교 문명의 영향을 받는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그 대가로 중국의 물품과 그들의 권위 및 주권에 대한 인정을 제공했다. 이러한 조공 체제와 관계는 지미(羁縻중국어), 책봉(冊封중국어), 조공(朝貢중국어)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한서에 따르면, 일본의 여러 부족()은 이미 1세기경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었다.[12] 그러나 일본은 헤이안 시대에 경제적 관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고 조공 체제를 떠났다.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 아시카가 요시미쓰 통치하에 조공 체제로 돌아갔지만, 요시미쓰 사후에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한국어)에 따르면, 고구려는 서기 32년에 한나라에 외교 사절을 파견했고, 한 광무제는 고구려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15] 중국과 한국의 조공 관계는 삼국 시대에 확립되었지만,[16][17] 실제로는 정당성을 강화하고 중국의 문화적 상품에 접근하기 위한 외교적 형식에 불과했다.[18] 이는 청일 전쟁 (1894~1895)에서 중국이 패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6][19][20]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계층적 조공 체제"였다.[21] 중국은 청불 전쟁 이후 톈진 조약 (1885년)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종료했다. 태국수나라 이후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까지 중국의 속국 또는 조공국이었다.[22]

20세기 이전에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이 중국 조공 체제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주권을 보장했고, 중국이 특정 자산을 획득하도록 보장했다. 이러한 교환의 "이론적 정당성"은 중국 황제가 하늘의 권한(천명)을 받아 통치하며, 이 통치로 인해 모든 인류가 선행의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자발적으로 이 체제에 참여했다.

조공은 주로 전근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무역 형태였다. 중국 황제에게 주변국 군주가 공물을 바치고, 황제는 군주를 인정하고 답례품을 내리는 형식이었다. 주변국이 공물을 바치는 것을 '''진공'''(進貢), 황제가 공물을 받는 것을 '''입공'''(入貢)이라 한다.

왕화사상을 바탕으로 주변 여러 나라의 이적들이 "중국의 덕을 사모하여" 조공을 바치고, 이에 대해 답례품을 내리는 형식이었다. 사(四夷)로부터 조공을 받는 것은 황제의 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안팎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따라서 조공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역대 중국 정권은 조공을 환영했다.

이는 주변 이민족과 적대하여 막대한 방위비나 군사비를 부담하는 것보다 조공을 받아 답례품을 주는 편이 저렴하다는 현실도 작용했다. 주변 이민족을 토벌하여 지배하더라도 생산성이 낮은 지역을 넓히는 것에 불과하며, 세수보다 군사 지배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 즉, 조공은 중국 정권에게 경제적으로 뛰어난 안보 시스템이었다. 조공국에게도 자신만이 정식 왕임을 인정받을 수 있고, 통상 공물보다 몇 배의 가치를 지닌 답례품을 받았기 때문에 큰 이익이었다. 조공 사절단의 인원에게도 많은 포상금이 주어졌기 때문에, 경제 불황에 빠진 중국 왕조에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조공 횟수를 제한하기도 했다.

책봉으로 중국 왕조의 신하가 된 책봉국은 원칙적으로 매년 조공의 의무가 있었지만, 책봉을 받지 않은 나라에서도 조공 자체는 할 수 있었다.

한자 문화권에 포함된 책봉국으로부터의 조공은 경제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서적 구입, 정보 입수 등 사회·문화적인 이익도 가져왔다.

그러나 송대에는 이 시스템이 붕괴되었다. 요에 대해서는 간신히 상위에 서서 중화 왕조로서의 체면을 유지했지만, 금에 대해서는 송 왕조가 하위에서 공물을 바치는 입장이 되었다.

원대에는 조공이라는 형식은 없었지만, 명대에 들어서 다시 조공 형식이 채택되었다. 정화의 대원정으로 많은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게 되었으나, 답례품 비용이 막대하여 명나라는 조공 제한 정책으로 전환했다. 성화 10년(1474년)에는 2년에 한 번 조공을 하고, 조공 일행도 100명 이하로 제한했다.

청나라와 조공국은 "속방 자주"의 원칙에 따라 조공국의 내정·외교를 청나라가 직접 지배하지 않았지만, 속국과 상국이라는 상하 질서가 있었다. 조선, 류큐, 베트남(응우옌 왕조), 타이 왕국, 버마(꼰바웅 왕조), 네팔, 이슬람 국가의 조공국 군주가 청나라와 주종 관계를 맺었다.[29] 유럽에 대해서도 조공의 감각으로 무역을 지속하려 했지만, 유럽 국가에게 오만한 태도로 미움을 받아 아편 전쟁 등이 발발하여 중국이 반식민지화되는 요인이 되었다. 류큐 처분, 청불 전쟁,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조선, 응우옌 왕조, 류큐 왕국으로부터의 조공도 종료되었다. 이후 조공이라는 형식의 대외 관계는 소멸했다. 황문웅은 "오랫동안 동아시아 세계의 천조 조공 질서를 주재해 온 대청 제국조차 아편 전쟁 이후에는 노대국의 취약성이 표면화되어 쇠망의 길로 굴러떨어졌다. 종주국인 청나라조차 이런 형편이니, 그 속국·조선도 '양요'를 면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30]

2. 2. 한국

한국 왕조들은 중국 영토 밖의 독립적인 왕조였지만,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조공 시스템을 활용했고, 중국 왕조와의 분쟁을 피하는 실리적인 목적으로 조공 무역을 이용했다.

고려는 중국 왕조와 교역하기 위해 조공 제도를 채택했지만, 국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해동천자"라는 황제국 체제를 표방하고 왕을 종(宗)이라 칭하는 황실 예법을 사용했다. 이를 '외왕내제'라고도 한다. 또한 고려 사신들은 중국 왕조와 이민족 왕조들의 사신들과 대등하게 서쪽에 자리잡았다.

고구려는 북조를 세운 다른 이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천자를 자칭하고 다른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이민족들이 건국한 북조도 천왕(天王)이라는 천자를 내세우고 중국인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조공은 무역에서 사례의 형식을 띈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말 3천 필이 요동에 도착하자 15,000필의 견포(비단과 포목)를 조선 측에 주어 말값을 치르도록 했다.[43] 1393년 명사의 기록에는 말 9,800필을 조선 측에서 보내자 명나라 측에서 19,700필의 모시와 면포를 조선 측에 주도록 했다는 내용도 있다. 조선청나라와 조공 무역 시스템을 거부하기도 했다.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왕조들은 주변 민족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경우도 많다. 삼국 시대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말갈, 거란, 중국 왕조인 북연 등이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고, 발해 또한 복속된 말갈 제부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고려여진, 탐라에게 조공을 받았고, 조선여진이나 류큐국, 시암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대 중국


기원전 3세기전한 초기에 위만조선이 조공을 시작한 이래,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청나라를 격파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 중국의 조공국이었다.

고구려 고국원왕 12년에 전연의 대군이 압록강 유역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수도점령하고 왕릉을 파헤쳐 많은 재물과 남녀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큰 타격을 입었고, 서진이 중단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선비족모용씨가 세운 연을 비롯한 오랑캐 국가에 조공하게 되었다.[37]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 강남 정권에 조공했으며, 건강에 도읍을 둔 국가에 조공 사절을 보내 책봉을 받았다.[38]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는 강남 정권의 의 마지막 군주였던 손호진숙보 옆에 만들어졌다. 손호와 진숙보가 항복한 후, 중국은 서진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지만, 강남 정권과 관계가 깊었던 백제의 마지막 왕을 강남 정권의 마지막 군주(중국 통일 후에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 옆에 묻음으로써, 당나라는 서진과 수나라에 이은 천하 통일을 과시하려 했다.[38]

요시다 미쓰오는 "청과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처음에는 조선은 굴욕적인 관계를 강요받았다. 그동안 명나라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남쪽으로부터의 일본의 공격으로 인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북쪽에서 쳐들어왔다. 그리고 한성 함락. 국왕은 항복 의식을 치르고 복종을 맹세했다. 그 이상 굴욕적이었던 것은, 그동안 야만인이라고 야만시했던 만주족에게 편입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회에 걸쳐 사절을 파견하고, 게다가 조공하는 형태로. 마음속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형태로는 인정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선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라는 고충을 품으면서. 그런데 100년 정도 지나면, 인식이 상당히 변한다. 확실히 지배자는 바뀌었지만, 중국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중화 문명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라는 식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청나라로부터 책봉을 받는다는 것은 정통 왕조라는 것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39]

조선··지폐·예복·비단 외에도 사서오경·아악에 사용하는 악기까지 하사받았다.

중국에서 간행된 종합적인 중조 관계사(中朝関係史)인 중조 관계 통사 편사조 편저조(中朝关系通史编写组编)의 『중조 관계 통사(中朝关系通史)』(길림인민출판사, 1996년)는, 백제수나라에 10번, 에 2번, 신라가 수나라에 6번 등 총 18번의 조공 사절을 파견한 것에 대해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 민족의 나라이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라고 기술하고 있다.[40]

  • 대 일본


에도 시대, 에도 막부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취급했다.

2. 3. 일본

중국은 유교 문명의 영향을 받는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그 대가로 중국의 물품과 그들의 권위 및 주권에 대한 인정을 제공했다. 일본에서는 조공 체제와 관계를 신공(進貢), 책봉(冊封), 조공(朝貢)이라고 부른다.[2]

한서에 따르면, 일본의 여러 부족()은 이미 1세기경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었다.[12] 그러나 일본은 헤이안 시대에 경제적 관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고 조공 체제를 떠났다.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통치하에 조공 체제로 돌아갔지만, 요시미쓰 사후에는 조공을 다시 바치지 않았다.[13][14]

  • 대 중국


국은 후한 시대부터 중국에 조공을 했으며, 왜의 오왕은 일본 열도의 지배자로서 한반도 남부의 징발권, 군사 지휘권, 재판권을 가진 지도자로 인정받아 중국 남조에 조공을 계속했다. 왜왕 무는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칠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하며 남조의 서임을 구했지만, 남조는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 제군사"로 서임했다.

수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 이후, 왜는 견수사를 파견했지만, 두 번째 견수사에서 왜왕 아매다리사비고가 보낸 "천자의 국서"는 의 양제를 격노시켰다.

견당사 시대에 일본 군주는 "천황"을 칭하며 "당의 황제와 대등한 입장에서 무역을 행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735년 당 현종이 나카토미노 나다이에게 맡긴 칙서의 수신인은 "일본 국왕 주명락미어덕"으로 되어 있어, 일본이 당에 대한 국서에서는 "국왕"을 칭했다는 설이 있다.[31][32] 또한 753년 일본이 신라와 석차를 다투어 일본 측 주장을 관철시킨 사건이 있어, 당으로부터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공국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오대십국의 오월이나 북송, 남송과도 교류가 있었지만, 이는 일본의 유력자나 중국 민간 상인에 의한 것이었고, 정식적인 국가 교류는 아니었다.

에도 시대에 편찬된 『대일본사』는 중국 정사의 조공 기사를 부정했지만, 한왜노국왕인이 발견되면서 그 주장이 뒤집혔다.[33]

  • 중국 이외


7세기 중반, 탐라국이 당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일본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발해는 일본에 발해사를 파견하여 "조공"을 했다. 824년 일본은 발해에 사자 파견 간격을 12년에 1번으로 제한했다.[34]

왜구에 시달리던 명나라는 일본에 유리한 조공 관계를 설정하는 대가로 왜구를 단속하게 하려 했다. 가네요시 친왕이 "일본 국왕 료카이"로서 명나라에 조공했고,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명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어 일명 무역(감합 무역)을 시작했다. 아시카가 요시모치에 의해 일시 중단되었으나, 아시카가 요시노리에 의해 재개되어 무로마치 시대 동안 이루어졌다.

무로마치 막부 쇠퇴 후, 오오우치 씨 등 다이묘에 의해 감합 무역이 계속되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일본과 명나라 관계는 단절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 막부는 조선과는 국교를 맺었지만, 명나라와는 정식 국교를 맺지 않았다. 도쿠가와 쇼군은 조선에 대해 "일본국 대군"이라고 칭했으며, 도쿠가와 이에노부 시대에는 "일본 국왕"이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도쿠가와 요시무네 시대에는 "일본국 대군"으로 되돌아갔다.

  • 기타
  • 『예기정의』에는 제후가 천자에게 조공하는 주기가 기록되어 있다.
  • 나라 시대 일본은 에서 파견된 사자를 동반하여 귀국하는 것을 꺼렸다. 일본의 율령에서는 당도 외번으로 여겼기 때문이다.[35] 그러나 779년 논의 끝에 "천황의 강좌는 어쩔 수 없다"라는 견해가 승리했다.
  • 율령법의 관시령에는 무역으로 국외 반출이 금지된 상품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조공의 회사품으로서 조공국에 하사하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36]

2. 4. 베트남

베트남의 역대 왕조는 실리를 위해 중국 왕조에 조공을 하였다. 일방적으로 중국이 수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조공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981년 전 레 왕조참파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받았고, 리 왕조도 활발히 영토를 넓혀 여러 부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1807년에는 진랍이 사이암에 복속해 있다가 불화가 생겨 응우옌 왕조에 조공하고 복속하였다.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계층적 조공 체제"였다.[21] 중국은 청불 전쟁 이후 1885년 톈진 조약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종료했다.

2. 5. 아즈텍 제국

아즈텍 제국은 정복한 다양한 도시 국가와 지방에서 조공을 받았다.[5] 아즈텍은 정복 지역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조공을 활용했는데, 이는 아즈텍 통치자가 기존 정치인을 교체하거나 새롭게 정복한 지역을 식민지화하는 대신, 단순히 조공을 징수하는 것을 의미했다.[4] 조공이 지불되는 한, 정복된 사람들의 지역 문제에는 간섭하지 않았다.[5]

아즈텍 제국에는 두 종류의 조공 지방이 있었다. 첫째는 전략적 지방으로, 아즈텍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합의하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이었다.[6] 둘째는 조공 지방 또는 조공국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기적인 조공을 바쳐야 했다.[6]

아즈텍 제국의 조공 시스템 관리는 다양한 계층의 아즈텍 관료들이 담당했다.

계급역할
칼픽케(calpixque)각 지방에서 조공을 수집, 운송 및 받는 역할[8][9] (때로는 한 명이 전체 지방을, 때로는 여러 명이 각 지방의 마을에 배정[6])
위에칼픽케(huecalpixque)칼픽케의 관리자[8]
페틀라칼카틀(petlacalcatl)테노치티틀란에 기반을 두고 전체 조공 시스템을 감독[8]
콰우틀라토아니(cuahtlatoani)군사 훈련을 받은 관료로, 새로 정복된 지방이 조공 지불을 거부할 때만 관여[8]



천연 자원은 건설, 무기, 종교 의식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아즈텍 제국 전역에서 수요가 높았다. 천연 자원이 더 많은 멕시코 지역은 더 많은 공물을 지불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멕시코 분지는 흑요석과 소금 관련 상품의 대규모 자원을 가지고 있어, 제국 내 사회적 지위와 이동성에 영향을 미쳤다.[10]

공물을 통한 확장이 계속됨에 따라 인근 도시/국가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제국을 섬길 전사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 토지는 도시 국가 통치자에게 속해 있었고, 평민은 토지 접근에 대한 대가로 영주에게 상품과 교대 노동 서비스로 공물을 제공해야 했다. 또한 군 복무와 건설 프로젝트에 소집될 수 있었는데, 이는 아즈텍 제국의 확장에 필수적이었다.[10]

아즈텍 제국에 대한 공물은 금, 은, 및 기타 금속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으며, 이는 아즈텍 문화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겨졌다.[11]

3. 이슬람 칼리파국

이슬람 칼리파국은 이전 로마의 공물 형태와 상당히 다른 '지즈야'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공물을 도입했다. 역사적으로 지즈야를 로마의 공물 형태와 구별하는 것은 지즈야가 오로지 개인, 특히 성인 남성에 대한 세금이었다는 점이다.[24] 로마의 "공물"은 세금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차입이기도 했다. 토지, 토지 소유자, 노예 소유자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부과될 수 있었다. 개인에게 부과될 때에도 그 액수는 종종 집단의 자산 가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슬람 지즈야처럼 싸울 수 있는 연령의 남자의 실제 인구수에 의존하지 않았다. 기독교 이베리아 반도의 통치자들은 나중에 반도를 재정복하는 동안 유사한 세금을 채택할 것이다.[24]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인들은 '지즈야'라는 용어를 ''트리부토''로 번역했다. 이 형태의 공물은 나중에 스페인 제국신세계의 영토에도 적용했다.[25]

4. 조공 체제의 쇠퇴와 종말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조공 체제는 초기에는 친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삼아 조공을 받는 형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 영토 밖의 이민족이나 외국과의 교역에도 적용되었고, 서양 열강과의 교역에서도 중국은 이 제도를 요구했다. 조공국은 형식적으로 공물을 바치고, 중국 황제는 제후국으로 책봉하며 훨씬 많은 양의 답례품을 하사했다. 경제적으로는 조공을 받는 쪽이 불리한 무역 형태였다.

일본견당사는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 조공을 했고, 중국은 "먼 나라에서 해마다 조공할 필요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27] 이러한 조공은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서적 구입, 정보 수집 등 사회・문화적 이익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조공 체제는 때때로 자존심 문제나 국력 과시를 위한 거부로 이어지기도 했다. 송나라 시대에는 를 세운 거란족이 대등한 교역을 원했고, 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오히려 조공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은 송나라를 정복하여 조공 무역이 사라지게 되었다.

명나라청나라 때 잠시 조공 무역이 부활하기도 했지만, 청나라가 유럽 국가에 조공 체제를 강요하면서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가 되었다.

조공과 관련된 기록은 국가마다 다르며, 자존심을 위해 조공 기록을 꾸며내기도 했다. 돌궐, 오이라트 같은 외국은 중국을 공격하여 조공을 받기도 했다.

조선기원전 3세기 위만조선부터 1895년 청일 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까지 거의 일관되게 중국의 조공국이었다. 고구려전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조공하게 되었으며[37], 백제는 중국 강남 정권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다.[38] 요시다 미쓰오는 조선이 청나라에 굴욕적인 관계를 강요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화 문명에 지배받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평가했다.[39] 조선은 금, 은, 비단 외에도 사서오경, 아악기까지 하사받았다.

에도 시대에도 막부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취급했다.

5. 평가 및 의의

조공은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제도로, 친척이나 공신들을 영토에 보내 다스리게 하고 공물을 바치게 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 영토 안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밖의 이민족이나 외국 국가들과의 무역에서도 중국 왕조가 요구하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27] 이는 서양 열강들이 중국과 교역을 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공을 하는 나라는 형식적으로 공물을 바치고, 중국 왕조는 제후국으로 책봉하며 받은 공물의 몇 배에서 몇십 배에 달하는 답례품을 하사했다. 경제적으로 보면 조공은 받는 쪽이 더 불리한 무역 형태였다.[27]

일본의 경우, 견당사를 통해 중국과 무역하기 위해 조공을 했고, 이에 대해 중국은 "먼 나라에서까지 해마다 조공할 의무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27] 이러한 교역 시스템으로서의 조공은 경제적 이득뿐만 아니라 서적 구입, 정보 수집 등 사회·문화적 이익도 함께 가져다주었다.[27]

그러나 때로는 자존심 문제나 국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외국 국가들이 조공 제도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들은 스스로 국가를 세우고 중국 한족 왕조를 정복하는 정복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송나라 시대에는 거란족이 세운 가 송나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교역을 원했고, 여진족이 세운 은 송나라와 전쟁을 벌여 송나라가 조공을 바치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몽골족이 세운 은 송나라를 정복하여 중국인들이 몽골족에 완전히 복속되면서 조공 무역이 없어졌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는 잠시 외국들과 조공 무역이 행해졌지만, 시행되지 않았던 시기도 있다. 청나라는 유럽 국가와의 교역에도 조공 책봉 제도를 적용하려 했지만, 이는 아편전쟁의 불씨를 제공했고,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가 되고 말았다.[29]

조공과 관련된 기록은 국가마다 다르며, 자존심을 위해 실제 없었던 외국의 조공 기록을 꾸며내기도 한다. 돌궐, 오이라트 같은 외국들은 중국 왕조를 군사적으로 공격하거나 정복하여 중국이 조공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조공은 주변국 군주가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고, 황제가 군주임을 인정하고 은사를 내리는 형식으로, 전근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무역 형태였다.[27] 주변국이 공물을 바치는 것을 '''진공''', 황제가 공물을 받는 것을 '''입공'''이라 한다.[27]

왕화사상을 바탕으로 주변 이적들이 "중국의 덕을 사모하여" 조공을 바치고, 이에 대해 하사품을 내리는 형식이었다.[27] 조공은 중국 정권에게 경제적으로 뛰어난 안보 시스템이기도 했다. 조공국에게도 정식 왕으로 인정받고, 공물보다 훨씬 많은 하사품을 받을 수 있어 큰 이익이었다.[27]

책봉을 받은 나라는 매년 조공의 의무가 있었지만, 책봉을 받지 않은 나라도 조공을 할 수 있었다. 견당사를 보냈던 일본은 "중국과 대등한 무역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중국 측은 "먼 나라인 점을 감안하여 매년 조공의 의무를 면제했다"고 하였다.[27]

한자 문화권에 속한 책봉국으로부터의 조공은 경제적 이익 외에도 서적 구입, 정보 입수 등 사회·문화적 이익도 가져다주었다.[27]

송대에는 요에 대해서는 상위에 섰지만, 금에 대해서는 송 왕조가 공물을 바치는 입장이 되었다. 원대에는 조공 형식이 없었지만, 명대에 다시 채택되었다. 정화의 대원정으로 많은 나라들이 조공을 했지만, 하사 비용이 커서 조공 제한 정책으로 전환했다.

청과 조공국은 "속방 자주" 원칙에 따라 조공국의 내정·외교를 청이 직접 지배하지 않았지만, 조선, 류큐, 베트남(응우옌 왕조), 타이 왕국, 버마(꼰바웅 왕조), 네팔 등 조공국 군주가 청과 주종 관계를 맺었다.[29] 유럽에 대해서도 조공 무역을 지속하려 했지만, 아편 전쟁 등이 발발하여 중국이 반식민지화되는 요인이 되었다. 류큐 처분 및 청불 전쟁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조선, 응우옌 왕조, 류큐 왕국으로부터의 조공도 종료되었고, 조공 형식의 대외 관계는 소멸했다.[29] 황문웅은 "오랫동안 동아시아 세계의 천조 조공 질서를 주재해 온 대청 제국조차 아편 전쟁 이후에는 노대국의 취약성이 표면화되어 쇠망의 길로 굴러떨어졌다. 종주국인 청국조차 이런 형편이니, 그 속국·조선도 '양요'를 면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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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문서 ≪삼국사기≫에 의하면 32년(고구려 대무신왕 15)에 후한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니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왕호를 회복시켜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Tang» 32 years, according to (Goguryeo Daemusin 15) sent ambassadors to the generous tribute to the Emperor Guangwu of Han Emperor in abundance (光武帝) gave evidence that can restore wanghoreul -- Google trans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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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적 7世紀以前の中国・朝鮮関係史 法政大学経済学部学会 2020-03-20
[41] 서적 イラン005ペルセポリス〜麗なる「王都」 まちごとパブリッシング 2016-08
[42] 서적 イラン005ペルセポリス〜麗なる「王都」 まちごとパブリッシング 2016-08
[43] 웹사이트 심지어 해당 기록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말값 15,000필의 비단과 포목은 언급이 없다고 하지만 명실록에는 나와있다고 주석까지 달려있다. http://db.history.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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