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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외국인 거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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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베 외국인 거류지는 1868년 고베 항 개항과 함께 설치되어,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에 따라 외국인의 거주 및 경제 활동을 위해 조성되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여러 국가의 상인들이 거류지에 거주하며 무역 활동을 펼쳤으며, 자치 기구인 거류지 회의를 통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1899년 조약 개정으로 거류지가 반환될 때까지 서구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을 했으며, 주변 지역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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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외국인 거류지
지도 정보
개요
명칭고베 외국인 거류지
일본어 명칭神戸外国人居留地 (고베 가이코쿠진 교류치)
영어 명칭Kobe foreign settlement, Kobe foreign concession
다른 일본어 명칭神戸居留地 (고베 교류치)
위치
위치일본 효고현 고베시 주오구
하천이쿠타 강
고이 강
역사
배경미일수호통상조약에 따른 개항
설치1868년
폐지1899년
주요 도로사이고쿠 가도
특징
특징서양식 건축물이 많이 지어짐
기타
관련 문화재중요전통건조물군 보존지구
오픈스트리트맵오픈스트리트맵 보기

2. 역사적 배경

1858년 7월 29일, 에도 막부미국과 미일 친선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일본 내 미국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1863년 1월 1일부터 효고 항을 조약항으로 개항하여 외국인 거류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유사한 조약(안세이 조약)을 체결했으나,[1] 조정의 칙허를 받지 못해 개항이 1868년 1월 1일로 연기되었다.[2] 교토 황궁과 가까운 항구 개항에 대한 조정의 반대가 있었고,[3] 1865년 12월 22일 안세이 조약이 칙허를 받은 후에도 항구 개항은 승인되지 않다가,[4] 1867년 6월 26일에야 칙허가 내려졌다.[5][6]

1867년 5월 16일, 막부는 영국, 미국, 프랑스와 효고 및 오사카에 외국인 거류지를 설치하는 협정을 체결했다.[8] 이 협정 제1조에 따라 외국인 거류지는 효고 항에서 약 3.5km 동쪽의 고베무라에 설치되었고,[9][10] 고베무라 해안에 건설된 새 항구는 1892년 고베 항으로 명명되었다.[11]

효고 항 대신 고베 항이 개항된 이유는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지만,[9] 여러 추측이 있다. 구스모토 도시오는 저서 ''국제도시 고베의 계보''에서 막부가 외국인을 멀리하려는 민심을 의식하여 번화한 효고 항 대신 고베무라를 선택했다고 추측한다.[13][14] ''신슈 고베 시사: 역사편 3''과 ''국제도시 고베의 계보''는 고베무라 주변 지역의 낮은 인구 밀도와 1865년 폐쇄된 고베 해군훈련소 재활용 가능성을 이유로 든다.[9] 1865년 11월 영국 공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 수행원의 조사 결과, 고베무라는 천혜의 정박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외국 열강도 고베무라를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측된다.[17]

외국인 거류지는 동쪽으로 이쿠타 강, 서쪽으로 고이 강, 남쪽으로 태평양, 북쪽으로 사이고쿠 가도에 둘러싸인 고베무라 내에 위치했으며,[23][24] 면적은 78,000평(약 0.26km2)였다.[25]

2. 1. 효고 개항과 고베 외국인 거류지 설치

1858년 7월 29일, 에도 막부미국과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에도 막부는 이 조약 제6조에서 일본 내 미국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제3조에서 1863년 1월 1일에 효고(옛 다이와다 항)를 조약항으로 개항하고, 외국인의 거주 및 경제 활동을 위한 외국인 거류지를 설치하기로 약속했다. 에도 막부는 곧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유사한 내용의 조약(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했지만[351], 이 조약들에 대한 조정의 칙허가 얻어지지 않아 여러 외국과의 협상 결과 효고 개항 시기를 5년 늦춰 1868년 1월 1일로 했다.[352] 조정은 궁궐이 있는 교토에 가까운 효고 개항에 난색을 표했고[353], 1865년 12월 22일에 안세이 5개국 조약에 대한 칙허를 준 후에도 허락하지 않았고[354], 연기된 개항 예정일을 약 반년 앞둔 1867년 6월 26일이 되어서야 칙허가 내려졌다.[355][356]

에도 막부는 칙허를 얻기 전부터 효고 개항을 위한 협상을 여러 외국과 진행했고, 1867년 5월 16일에 영국, 미국, 프랑스와 "효고 항 및 오사카에 있어서 외국인 거류지를 정하는 협정"(효고 오사카 규정서)을 체결했다.[358] 이 협정 제1조에는 "일본 정부에서 조약한 각국인 효고에 거류지를 고베마치(고베무라)와 이쿠타가와 사이에 협정…"이라고 규정되었고[359][360], 효고에서 약 3.5km 동쪽에 위치한 고베무라에 거류지가 설치되게 되었다.[359] 이에 따라 고베무라 해안에 건설되는 새로운 항구가 외국에 개방되게 되었다(새로운 항구는 1892년에 칙령에 의해 고베 항이라고 명명되었다).[361][359]

'효고 개항'에서 효고가 아닌 고베 항이 개방된 이유나 경위를 보여주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지만[359], 여러 추측이 나오고 있다. 구스모토 도시 오(楠本利夫)의 『증보 국제도시 고베의 계보』는 에도 막부 측이 외국인을 멀리하는 주민 감정을 고려하여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이미 항구로 번영하고(효고는 당시 오사카의 외항으로 기능하며 거래가 활발한 항구였다) 왕래가 잦은 효고의 개방을 피했다고 추측하고 있다.[363] 또한 『신수고베시사 역사편 3』 및 『증보 국제도시 고베의 계보』는 인구가 많은 효고 주변보다 고베무라 쪽이 용지 확보가 용이했고, 1865년에 폐쇄된 고베 해군 조련소의 시설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359] 더욱이 『증보 국제도시 고베의 계보』는 1865년 11월에 효고 부근 해역을 측량한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의 수행원이 "효고의 구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거류지 예정지에 대해 "충분한 수심도 있고, 천연의 뛰어난 투묘지가 되는 작은 만에 면하고 있다"고 평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을 소개하며, "효고의 구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예정지"란 고베무라를 가리키고 있으며, 외국 측도 효고보다 고베무라 쪽이 개항지로 더 적합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366] 참고로 고베 항의 항구역은 1892년에 확장되어 효고를 포함하게 되었다.[367][368]

거류지의 구체적인 설치 장소는 고베무라 내부의, 동쪽은 (구) 이쿠타가와(후의 플라워로드), 서쪽은 고이가와(후의 고이가와스지), 남쪽은 바다와 삼면을 강과 바다로 둘러싸였고, 북쪽은 사이쿠쿠 가도(후의 하나토케이센)에 접하고 있었다.[372][373] 넓이는 약 7만 8000[374](약 258000m2)의 토지로 결정되었다. 『신수고베시사』는 이 선정에 대해 "외국인과 일본인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던 막부의 배려가 엿보인다"고 하고 있다.[375]

에도 막부는 시바타 고우츄우를 효고 부교에 임명하여 거류지와 항만 조성에 착수시켰다. 시바타는 고베무라에 부임하자 곧바로 조성을 지휘했지만, 개항일인 1868년 1월 1일까지 완성된 것은 운상소(세관) 시설과 3곳의 부두, 3동의 창고뿐이었다.[376][377] 이 시기는 에도 막부에서 메이지 정부로의 정권 이양기에 해당하며, 1867년 11월 9일에는 대정봉환이 이루어졌다.

초기, 효고 개항 관련 업무는 계속해서 에도 막부가 담당하는 것으로 되었다.[378] 그러나 개항 이틀 후인 1월 3일에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령되었고, 같은 달 27일에 발생한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에도 막부군이 패배하고 도쿠가와 케이키가 오사카성에서 에도로 후퇴하자 시바타 고우츄우도 에도로 철수하여 공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379][380] 남은 공사는 메이지 정부 아래에서 진행되었다.[381][382]

2. 2. 거류지 조성 및 운영

도쿠가와 막부는 시바타 다케나카를 효고 부교에 임명하여 거류지 및 항만 조성을 담당하게 했으나, 정권 교체로 인해 메이지 정부 주도로 공사가 진행되었다.[27][28][29][30][31][32][33] 메이지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고 영구 임대 방식으로 토지를 대여했으며, 경매를 통해 임차인을 결정했다.[35][44][45]

경매는 1868년 9월 10일부터 1873년 2월 2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44][45] 거류지 내 토지 1평(tsubo)의 최저 입찰가는 2(2엔)이었고, 거류지 주변 지역의 토지 가격은 1평당 12센 5린(1/8엔)이었다.[36] 교마치 본거리에 인접한 11번지는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글로버 상사가 8엔 2센에 낙찰받았다.[36]

낙찰자를 국가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37][38][36][39]

국가낙찰 필지 수
영국64
독일23
네덜란드15
미국11
프랑스11
이탈리아1
기타1



거류지 내에는 자치 기구인 거류지 회의가 설치되어 행정 및 재정을 담당했으며,[72] 외국인과 일본인 간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다.[41] 하지만 일본인은 외국인 거류지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83] 출입도 제한되었다.[84]

거류지 조성 지연으로 인해, 메이지 정부는 동쪽의 이쿠타 강, 서쪽의 우지 강, 남쪽의 외국인 거류지 남쪽 해안, 북쪽의 산 사이 지역에 '잡거지'라는 구역을 설정하여 외국인의 거주를 허용했다.[42][129]

2. 3. 거류지 발전과 주변 지역 변화

고베 항은 원래 자연 해안에 가까웠던 고베 촌 해안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392][393] 1868년 4월부터 7월(메이지 원년 4월부터 5월)에 걸쳐 (구) 이쿠타 강·우지가와 사이 해안에 4개의 부두가 건설되었고,[483] 1871년(메이지 4년)에는 방파제·부두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392] 1871년 4월 29일(메이지 4년 3월 10일)부터 같은 해 7월 26일(메이지 4년 6월 9일)에 걸쳐 진행된 (구) 이쿠타 강 변경 공사는 거류지 주변의 수해를 막고, 항만 중심부로 토사가 유입되는 것을 막는 효과를 가져왔다. 훗날 “천혜의 양항”이라 불리는 고베항(神戸港)의 기반은 이렇게 정비되어 갔다.[394]

개항 후, 거류지는 합리적인 도시 계획 아래 정비되었다.[443] 1872년(메이지 4년/5년) 무렵 도로와 배수로 공사가 끝나고 남북 8개, 동서 5개의 가로로 이루어진 격자 모양의 구획이 완성되었으며,[395] 1873년 2월 7일까지 토지 경매도 끝났다.[396][397] 거류지의 도시 계획은 "고베는 동양에서 가장 잘 설계된 거류지이다"라고 평가받았다(1871년 4월 17일자 영자 신문 "The Far East").[443]

한편, 거류지 주변 지역은 계획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거류지 동북쪽에는 외국인 경영 공장이, 서쪽에는 회사와 은행이 설립되었고, 북서쪽에는 청국인 거리가 형성되는 등 어느 정도 경향을 띠면서도, 거류지의 발전과 함께 주변 지역 인구가 증가하고 무질서하게 시가지가 형성되어 갔다.[483]

개항 당시 고베 촌의 인구는 약 3600명이었지만, 주변 마을과의 합병을 거쳐 1889년(메이지 22년) 고베시(神戸市)가 탄생했을 때는 약 13만 4700명으로 증가했다.[398] 1890년대 초에는 시가지가 효고쓰(兵庫津) 주변과 이어졌다.[677] 참고로 1871년(메이지 3년/4년) 당시 거류 외국인 수는 400명 남짓(영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청 5개국)이었지만, 1890년에는 2000명을 넘었다.[398]

2. 4. 거류지 반환과 이후

메이지 정부는 안세이 조약의 불평등 조항 개정을 위해 근대화를 추진했다. 1894년, 영국과 영일 통상항해 조약을 체결하여 영사재판권 폐지와 외국인 거류지 반환을 달성했고, 이후 미국, 프랑스 등 14개국과도 유사한 조약을 체결했다.[53][54]

1899년 7월 17일, 이 조약들이 발효되면서 고베 외국인 거류지는 일본에 반환되었고, 고베시에 편입되었다. 행정 및 재정 자치권은 없어졌고, 일본인들은 자유롭게 출입 및 거주가 가능해졌다. 거류지 내 경찰은 폐지되었고, 소방대는 고베시 소방대로 이관되었다.[55] 일본 정부는 외국인과의 분쟁 방지를 위해 '고베 국제 위원회' 설립을 허용하는 등 외국인에 대한 배려를 보였다.[57]

메이지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류지 내 토지는 영구임대차 방식으로 외국인에게 임대되었다.[35] 이 계약은 거류지 반환 후에도 존속되었지만, 일본은 건물에 대한 과세 정책을 시작했다.[58] 외국인들은 이중과세라며 반발했고, 1902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제소했다. 1905년 일본의 청구는 기각되어, 영구 임대된 토지 위 건물에 대한 과세는 불가능해졌다.[59][60][61]

이에 고베시는 1933년부터 영구 임대 계약 해지를 추진했다. 1936년 요코하마, 나가사키와 함께 협의회를 시작했고, 1937년 외국과의 협상을 통해 1942년 4월 1일에 임대 계약을 토지 소유권으로 교환하고, 5년간 세금을 면제하는 데 합의했다.[62][63][64]

조약상 거류지 반환은 1899년 7월 17일이지만, 완전한 소멸은 영구임대차권이 해소된 1942년 4월 1일로 간주된다.[65][66]

3. 자치 및 치외법권

1899년 7월 17일 조약에 의해 고베 외국인 거류지가 공식적으로 일본에 반환되었지만, 1942년 4월 1일 완전 폐지될 때까지 그 역사는 계속된 것으로 간주된다.[65][66]

메이지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고 영구 임대 방식으로 토지를 빌려주었다.[35] 이후 일본은 건물에 대한 과세 정책을 시작했지만,[58] 외국인들은 이중과세를 이유로 반대했다. 1902년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제소했으나 1905년 패소하여, 영구 임대된 토지 위 건물에 대한 세금 부과는 허용되지 않았다.[59][60][61]

이에 고베시 정부는 1933년부터 영구 임대 계약 해지를 시작했다. 1936년 9월, 요코하마, 나가사키와 함께 외국과의 협상을 진행하여, 1937년 3월, 1942년 4월 1일에 임대 계약을 토지 소유권으로 교환하고 5년간 세금을 면제하는 데 합의했다.[62][63][64]

구 고베 외국인 거류지의 아카시마치(2011)


일본과 구미 열강 간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영사 재판권이 인정되어, 조약 적용 대상인 거류 외국인이 당사자인 법적 분쟁은 외국 영사가 재판했다.

3. 1. 자치 기구

1868년 8월 7일, 메이지 정부는 를 체결하여 거류지 내 외국인의 특정 행정 및 재정적 권리를 인정했다. 는 거류지 내 기반 시설 개선과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최고 입법 기관으로 설립되었다.[72] 시의회는 영구 임대차 경매 수익의 일부로 재정을 지원받았으며, 토지세와 경찰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나가사키와 요코하마와 달리, 거류민의 자치는 거류지 폐지 때까지 계속되었다.[40]

시의회 의원은 각국의 영사와 효고현 지사, 그리고 거류지 주민이 선출한 3명의 대표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시의회의 를 구성했다. 시의회 의장은 일반적으로 영사관 대표였다.[76] 시의회 회의는 영어로 진행되었고, 회의록은 신문에 인쇄되었다.[77] 행정위원회는 시의회의 주요 행정 기관이었다.[78] 행정위원회는 위원장을 포함한 3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72] 초대 행정위원회 위원장은 찰스 헨리 코브덴이었으며, 1872년부터 거류지가 일본에 반환될 때까지는 ヘルマン・トロチク|헤르만 트로치히일본어가 그 뒤를 이었다.[78][79] 1874년 4월 거류지 경찰서가 설립되자, 트로치히는 경찰서장직도 맡았다.[79] 중요한 사안은 시의회 산하 위원회에서 분석되었고, 그 보고서는 시의회 결정의 근거가 되었다.[77]

38번지의 행정위원회 건물


외국인의 자치를 존중하기 위해, 일본인의 거류지 출입과 일본의 경찰권 행사에는 제한이 있었다. 불평등 조약에 의해 시행된 치외법권으로 인해 서구인이 관련된 법적 분쟁은 그들의 영사관에서 재판을 받았다. 자치권은 거류지 토지에 묶여 있었으므로 경계 밖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영사재판권은 적용 대상인 사람에게 묶여 있었으므로 거류지 밖에서 발생한 분쟁에도 확대되었다.[81]

3. 2. 경찰권 문제

1868년 8월 7일(경응 4년 6월 19일)에 체결된 「오사카 효고 외국인 거류지 약정서」에 따라 외국인에게 거류지 내 행정권과 재정권이 인정되면서,[421] 거류지 내 경찰권 행사 등 일본 측의 권한은 제한되었다.

거류지 회의는 경찰권 귀속 문제를 두고 효고현과 갈등을 빚었다. 1871년 '여왕 대 워터스 사건' 판결을 통해 거류지 내에서는 거류지 경찰만이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3. 3. 노르만톤 호 사건

1886년 노르만톤 호 사건의 초기 조사와 예비 심리는 고베 외국인 거류지의 영사 재판권 하에서 진행되었다.[88] 10월 24일, 요코하마 거류지의 한 증기선 회사 소속 화물선 '노르만톤'호가 와카야마현 연안 해상에서 침몰했다. 화물과 함께 승선했던 일본인 승객 25명 전원이 사망했고, 영국인 선원 11명은 구명정에 올라타 생존했지만, 일본인 승객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해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 구조에 태만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89] 안세이 조약에 의해 보장된 영사재판권에 따라, 11월 1일부터 5일간 고베 외국인 거류지에서 이 사건에 대한 심리가 진행되었지만, 영국 영사 제임스 트룹(James Troup)은 선원들을 무죄로 판결했다.[89] 효고현 지사 우쓰미 다다카쓰는 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선장을 살인 혐의로 고발했다. 11월 20일 외국인 거류지에서 이 혐의에 대한 예비 심리가 열렸고, 12월 8일에는 요코하마에서 공개 심리가 열렸는데, 두 심리 모두 선장을 유죄로 판결했다.[90] 이 사건의 초기 조사에서 선원들이 무죄로 판명됨에 따라, 일본 국내에서는 영사재판권에 대한 의구심과 비판이 제기되었고,[91] 반영국 감정이 확산되었다.[92] 이 초기 조사는 고베 외국인 거류지의 외국과 일본 관계사에서 긍정적인 역사에 드리운 오점으로 남아있다.[93]

4. 도시 경관

고베 외국인 거류지는 요코하마항과 나가사키항 개항 후 약 9년 만에 개항한 효고항 덕분에, 이전 거류지의 건설 및 설계 경험을 활용한 합리적인 도시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다.[94] 1871년 4월 17일, 영자 신문 ''The Far East''는 고베를 "동양에서 가장 잘 계획된 외국인 거류지"라고 묘사했다.[94]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지역의 서구적 영향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철학자 라파엘 폰 코에버는 "유럽과 미국의 악덕과 무지를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어디에나 보인다"라고 언급했고,[95]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이곳을 "미개한 미국 도시", "외관상 끔찍하게 미국적인 도시"라고 불렀다.[96]

완성된 거류지의 주요 도시 경관은 다음과 같았다.


  • 동쪽의 이쿠타 강, 서쪽의 우지 강, 남쪽의 바다로 삼면이 강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23][24] 1870년대에 동서쪽 강은 방향을 바꾸고 배수로로 전환되었다.
  • 남북으로 8개, 동서로 5개의 도로가 거류지를 22개 구획으로 나누었고, 이는 다시 총 126개의 구획으로 세분화되었다. 각 구획은 200~300츠보(약 660~990m²)였고, 1885년 기준 도로를 제외한 거류지의 총 건축 가능 면적은 49,645츠보(약 16.4헥타르)였다.[98]
  • 도로는 차도와 보도로 나뉘어 있었다.[124]
  • 도로를 따라 지하에 배수관이 남북으로 매설되어 바다로 연결되었다.[124] 이 배수관은 쐐기 모양의 벽돌로 만들어져 시멘트로 둥글게 쌓았다.[99]
  • 도로에는 나무와 가로등이 늘어서 있었다. 전선은 지하에 매설되어 전신주가 필요 없었다.[101]
  • 거류지 남쪽의 해변 도로인 카이간도리(海岸通)는 산책로로 조성되어 소나무와 잔디밭으로 꾸며졌다.[124]

4. 1. 특징

고베 외국인 거류지는 요코하마항과 나가사키항 개항 후 약 9년 만에 개항한 효고항 덕분에, 이전 거류지의 건설 및 설계 경험을 활용한 합리적인 도시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다.[94] 1871년 4월 17일, 영자 신문 ''The Far East''는 고베를 "동양에서 가장 잘 계획된 외국인 거류지"라고 묘사했다.[94]

완성된 거류지의 도시 경관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 동쪽에는 이쿠타 강(生田川), 서쪽에는 우지 강(宇治川), 남쪽에는 바다가 있어 거류지는 삼면이 강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23][24] 그러나 1870년대에 동서쪽 강은 방향을 바꾸고 배수로로 전환되었다.
  • 남북으로 8개, 동서로 5개의 도로가 거류지를 22개 구획으로 나누었고, 이는 다시 총 126개의 구획으로 세분화되었다. 각 구획은 200~300츠보(약 660~990m²)의 면적을 가지고 있었고, 1885년 기준으로 도로를 제외한 거류지의 총 건축 가능 면적은 49,645츠보(약 16.4헥타르)였다.[98]
  • 도로는 차도와 보도로 나뉘어져 있었다.[124]
  • 도로를 따라 지하에 배수관이 남북으로 매설되어 바다로 연결되었다.[124] 이 배수관은 쐐기 모양의 벽돌로 만들어져 시멘트로 둥글게 쌓았다.[99]
  • 도로에는 나무와 가로등이 늘어서 있었다. 전선은 지하에 매설되어 전신주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101]
  • 거류지 남쪽의 해변 도로인 카이간도리(海岸通)는 산책로로 조성되어 소나무와 잔디밭으로 꾸며졌다.[124]


4. 2. 가스등

옛 하쌈 주택(旧ハッサム住宅)의 가스등


1874년 11월, 오사카가스(大阪ガス)의 전신인 브라운 앤 코(Brown and Co.)는 효고현(兵庫県)에서 최초로 거류지에 가스 공급을 시작했다.[102][103] 이전의 기름등을 대체하기 위해 거류지 내에 가스등이 설치되었다.[103] 당시 설치된 가스등 94개 중 2개는 옛 하쌈 주택 앞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메이지무라(明治村) 박물관에 있다. 고베시립박물관(神戸市立博物館)과 다이마루(大丸) 백화점 고베점 주변에도 복원된 가스등이 설치되어 있다.[104]

1888년 11월 고베에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도시 곳곳에 전등이 설치되었지만, 외국인 거류지 내에서는 브라운 앤 코(Brown and Co.)의 반대와, 높이 설치된 전력 케이블이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외국인 거주자들의 주장으로 전기 공급과 전등 설치가 지연되었다. 거류지 내 전선은 지하에 매설되었고, 거류지가 일본에 반환된 후에도 이 전선은 지하에 남아 전신주가 설치되지 않았다.[104]

4. 3. 건축 양식

초기에 지어진 건물들은 고전주의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105] 구거주지십오번관(15번지에 위치)은 2층 건물과 2층 베란다에 기둥을 배치한 이 양식의 전형적인 예였다.[106] 19세기 중반까지 고전주의 양식은 동아시아 외국인 거류지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107]

1890년대에 영국 건축가 알렉산더 넬슨 핸셀(Alexander Nelson Hansell)의 활동은 당시 유행에 변화를 가져왔다.[108] 고딕 리바이벌 건축의 영향을 받은 핸셀은 벽돌을 노출시킨 디자인을 선호했다.[109] 핸셀은 고베 외국인 거류지에서 고베 클럽을 시작으로 홍콩상하이은행(香港上海銀行), 차터드 은행, 저딘 매서슨 상회, 독일 총영사관 등 수많은 건축물의 설계를 맡았다.[110]

모조 서양식 건축이 많이 지어진 요코하마 외국인 거류지와는 달리,[326] 고베 외국인 거류지의 모든 건물은 서양 건축가의 지휘 아래 건설되었으며,[111] 건설을 의뢰한 대부분의 고객은 외국계 기업이었다.[112]

4. 4. 숙박 시설

고베 외국인 거류지 최초의 숙박 시설은 1868년에 문을 연 글로벌 호텔(Global Hotel)이었지만, 그 위치와 폐업 시기는 알 수 없다.[116] 그 후 여러 시설이 생겼는데,[116]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1870년 8월 3일 이전에 79번지에서 영업을 시작한 오리엔탈 호텔(Oriental Hotel)이었다.[117]

오리엔탈 호텔은 1870년부터 1881년경까지 사교 연합 클럽(social Union Club)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 콘코르디아 클럽(Club Concordia)이 그 공간을 인수했다.[118] 1870년 9월 23일에는 KRAC(Kobe Regatta & Athletic Club) 창립 회의가 그곳에서 열렸다.[119] 1888년, 오리엔탈 호텔은 80번지를 매입하고 본관을 그곳으로 이전했으며, 이때 프랑스 요리사 루이 베조(Louis Begeux)의 요리가 호평을 받았다.[120] 거류지 반환 후에도 오리엔탈 호텔은 계속 운영되었고, 1995년 한신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2010년에 재개장했다.[121]

4. 5. 강 정비

초기 건설 당시 거류지를 둘러싼 두 강은 모두 문제가 되었다. 동쪽의 이쿠타 강은 제방이 낮아 거류지가 자주 침수되었고,[472] 서쪽의 고이 강은 교통의 장애물이 되어 혐오의 대상이었다.[473]

메이지 정부는 1871년 4월 9일부터 7월 26일까지 이쿠타 강의 흐름을 동쪽으로 돌리기 위한 공사를 실시하여, 상류의 누노비키 폭포에서 고베의 오노하마까지 남쪽으로 직선으로 흐르는 새로운 이쿠타 강을 만들었다.[472] 옛 강바닥은 매립되었고, 그 위에 꽃길이라는 이름의 거리가 조성되었으며,[474] 외국인과 일본인이 공유하는 공원이 조성되어 나중에 히가시 유엔치 공원이 되었다.[475] 일부 제방은 언덕으로 남겨졌고, 그 위에 나중에 고베시청이 건설되었다.[476] 매립지의 일부는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의 상인인 가노 소시치(加納宗七)를 기리는 의미에서 가노초라고 불렸다.[474] 거류지 건설에 참여했던 영국의 기술자이자 건축가인 존 윌리엄 하트(John William Hart)도 강 개조에 참여했다.[477]

고이 강의 경우, 거류지의 외국인 거주자들은 건설 비용의 절반을 부담하겠다고 제안하며 효고현과 중앙 정부에 강을 덮는 공사를 요청했다. 공사는 1874년 10월부터 1875년 1월까지 진행되었다. 1909년, 강은 콘크리트로 완전히 덮여 암거가 되었고, 나중에 고이카와스지라는 도로가 그 위에 놓였다.[473]

4. 6. 잡거지

메이지 정부는 거류지 건설 지연에 대응하여, 동쪽의 이쿠타 강, 서쪽의 우지 강, 남쪽의 외국인 거류지 남쪽 해안, 북쪽의 산 사이 지역에 외국인 거주를 허용했다.[42][129] 이 지역은 잡거지(雑居地, zakkyochi)로 불렸으며, 거류지 폐지 때까지 존재했다.[43]

초창기 이후로는 이 지역 내 토지에 대한 영구 임대를 외국인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임대 기간은 처음에는 5년 단위로 제한되었고, 나중에 25년으로 연장되었다.[130] 잡거지는 거류지 개항 지연을 보상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되었지만, 거류지 완공 후에도 외국인 거주자가 급증하여 내부 수용력을 초과했다. 잡거지를 없앨 경우 거류지 확장을 요구받을 것을 우려한 메이지 정부는 거류지 폐지 때까지 잡거지를 그대로 유지했다.[43] 1885년 말 기준으로 잡거지 면적은 26,756 tsubo(약 8.8ha)였다.[131]

당시 나라(清)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국민은 거류지에 거주할 수 없었고 잡거지로 제한되었다.[132] 이로 인해 외국인 거류지 서쪽에 차이나타운이 개발되었다.[133] 1871년 9월 13일 일청수호조규 체결 후에는 거류지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잡거지와 거류지 모두에 거주하는 중국인 수가 증가했다.[134] 이들은 거류지 외국 기업이 수행하는 무역에서 매변(買弁, baiben)이라 불리는 중립적인 당사자 역할을 했다.[135][136] 또한 중국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양국에 성냥 수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37]
이진칸이라 불리는 많은 옛 외국인 저택들이 옛 잡거지에 남아 있으며 인기 있는 관광 명소가 되어 있다.[138] 현재의 고베 차이나타운인 난킨마치는 청나라 차이나타운이 처음 발전했던 외국인 거류지 서쪽 지역에 있다.[139][140] 잡거지에서는 외국인과 일본인이 나란히 살면서 일상생활 수준에서 국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 고베가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로서 현재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이러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141]

4. 7. 유보 구역

안세이 5개국 조약에는 외국인 거주자의 활동 지역을 제한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베의 경우 효고현청을 중심으로 10리(약 40km) 반경의 지역이었다.[142] 1869년, 현청은 실제 이동 거리에 따라 이 10리 지역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규정을 발표했는데, 남쪽은 바다로 경계 지어졌고, 다른 쪽은 여러 마을들로 경계 지어졌다. 동쪽은 가와베군의 오베, 사카네, 히라이, 나카시마, 서쪽은 인나미군의 소네, 아미다, 북쪽은 가와베군의 오하라노무라, 가와하라, 야도, 야카미시모, 인나미군의 이누가이, 타키군의 타코, 묘라쿠지, 요코였다.

그러나 외국은 10리를 직선 거리 반경으로 해석하여 조약의 한계를 서쪽의 인나미군 전체와 북쪽의 가와베군, 타키군, 타카군 전체로 확장했다.[142][143] 이 지역 밖은 오락 및 학술 목적으로만 외국인이 출입할 수 있었고, 외국인이 이 지역에 들어갈 때는 현청의 여행 허가증을 소지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외국인들은 종종 허가 없이 조약 지역을 벗어나 여행을 하였고, 이는 현청에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144][145][146] 1899년 거류지가 반환되었을 때, 외국인들은 일본 내에서 자유롭게 거주하고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147]

5. 무역

일본 효고항(고베항)에서는 개항 직후부터 활발하게 무역이 이루어졌다. 초기 무역은 일본인 상인이 납입한 상품을 외국인 상인이 수출하고, 외국인 상인이 수입한 상품을 일본인 상인이 구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외국인은 거류지 외에서 수출품을 사거나 수입품을 팔 수 없었고, 일본인은 개항 당초 직접 해외 무역업자와 거래할 노하우가 없었기 때문이다.[498] 이러한 외국인 상인을 매개로 한 무역을 거류지 무역 또는 상관 무역이라고 한다.[499] 외국인 상인에게 상품을 납입하거나 외국인 상인으로부터 상품을 구매하기를 원하는 일본인 상인(전자를 매입상, 후자를 인수상이라고 불렀다)은 일본인 번두나 “매변(買弁)”이라고 불리는 청나라 사람 중개인을 거쳐 상담을 진행했다.[485][486] 외국인 상인 측 인물들은 대부분 고압적이고 횡포했으며, 다른 나라와의 무역에 익숙하지 않고 국제 정세에 어두운 일본인이 불리한 거래 관행을 강요당하거나, 헐값에 사거나 가격을 올리는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500][501][502]

하지만 점차 일본 상인과 상사가 직접 무역 업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외국인 상인의 힘은 약해졌다. 고베항 무역량에서 외국인 상인이 취급하는 무역량의 비율은 처음에는 100%였지만, 거류지 반환 직전인 1897년(메이지 30년)에는 65%로 감소했고, 반환 후인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50%, 1911년(메이지 44년)에는 40%로 감소했다. 거류지 반환 후에는 외국인 상인이 구 거류지에서 철수하고, 구 거류지 내에서 사무소 개설이 가능해진 일본 상사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503] 1931년(쇼와 6년) 시점에서 외국인이 영구 임대하는 구 거류지 내 구획은 126구획 중 47구획으로 감소했다.[504]

주요 수출품은 차, 곡물, 성냥이었다. 차는 초기에는 교토의 차가 수출되었고, 점차 서일본 일대에서 생산된 차가 모여 수출되는 체계가 완성되었다.[505][506] 곡물은 고베에서의 수출 쌀이 런던의 곡물 시장에서 표준 쌀이 될 정도로 수출량이 많았다.[507] 성냥은 1870년대 후반에 고베에서 본격적인 제조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해외 수출이 시작되었다. 고베항에서의 성냥 수출액은 메이지 10년대 후반 이후 급속히 증가하여 전국의 성냥 수출액의 9할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발전했다. 수출지는 처음에는 중국이 중심이었지만, 점차 오스트레일리아와 유럽, 아메리카 대륙으로 확대되었다.[487][508]

한편, 주요 수입품은 금견, 면비로드 등의 목면류와 모직물이었다.[509][510] 1896년(메이지 29년)에는 고베시에 사는 다카하시 신지가 14번지에 있던 리넬 상회를 통해 키네토스코프를 수입하여 일본 최초의 영화(활동사진) 상영을 했다.[511] 거류지 반환 직전인 1894년(메이지 27년) 이후 메이지 시대를 통틀어 고베항의 수입액은 일본 항구 중 가장 많았다.[512]

6. 문화

개항 직후 고베항을 그린 우키요에 (, 작품)


고베 외국인 거류지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다. 개항 초기에는 일본 상인들이 외국 상인과의 거래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149][150][151]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상인과 회사들이 직접 거래를 시작하며 외국 상인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했다.[152] 주요 수출품은 차, 쌀, 성냥 등이었으며, 특히 고베에서 수출된 쌀은 런던 곡물 시장에서 표준 쌀이 될 만큼 품질이 좋았다.[156] 주요 수입품은 칼리코와 면 벨벳과 같은 면직물과 모직물이었다.[158][159] 1896년에는 키네토스코프가 수입되어 일본 최초의 공개 영화 상영이 개최되기도 했다.[160]

이 외에도 기독교, 음악, 스포츠, 외국 신문, 사교 클럽, 간테이뵤 등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다.

  • '''기독교:''' 안세이 조약에 따라 외국인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거류지 내에서는 선교사들에 의해 활발하게 종교 활동이 이루어졌다.[177]
  • '''음악:''' 나가이진 공원, 고베 레가타 앤드 애슬레틱 클럽(KRAC) 체육관, 니시마치 공원 등에서 다양한 음악 활동이 이루어졌다.[191]
  • '''스포츠:''' 고베 레가타 앤드 애슬레틱 클럽(KRAC) 등 스포츠 클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스포츠가 행해졌으며, 나이가이진 공원은 일본 스포츠 보급에 영향을 주었다.
  • '''외국 신문:''' 고베 외국인 거류지에서는 여러 외국어 신문이 발행되었다.
  • '''사교 클럽:''' 고베 외국인 거류지에는 고베 외국 클럽을 비롯한 두 개의 사교 클럽이 있었다.
  • '''간테이뵤:''' 화교들의 정신적 의지처인 간테이뵤가 건립되었다.

6. 1. 음식 문화

라무네


고베 외국인 거류지는 인기 일본 음료 라무네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163] 기록에 따르면 라무네는 효고항 개항 이전에 나가사키에서 생산 및 판매되었지만, 당시에는 널리 유통되지는 않았다.[162]

1870년대 후반에는 사업가 스즈키 키요시가 간장과 설탕으로 맛을 낸 소고기 통조림을 개발하여 전국적인 히트 상품이 되었다.[172]

개항 이후 외국인 거주자와 여행객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서양식 과자점이 생겨났다.[173] 1882년, 혼합 주거 지역 내 모토마치 3초메에 고베 최초의 서양식 과자점인 니노미야 세이진도(二宮盛神堂)가 설립되었다.[174] 같은 해에 출판된 豪商神兵湊の魁|Gōshō shinpei minato no sakigake|호상신병주괴일본어에는 아이오이 다리 근처에 산고쿠도(三国堂)라는 서양식 과자점이 소개되어 있다.[174] 1897년, 요시카와 이치조(吉川市三)라는 사람이 도쿄의 과자점 風月堂의 고베 지점을 모토마치에 열었는데, 이는 고베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식 과자점이었다.[175] 이곳에서는 카스텔라, 와플, 프로피테롤, 캔디, 초콜릿 등을 판매했다.[176]

6. 1. 1. 라무네

알렉산더 캐머런 심이 경영하던 심 앤드 컴퍼니(Sim and Co.)는 외국인 거류지 18번지에 위치한 것을 바탕으로 18番|Jūhachi-ban일본어이라는 이름으로 라무네를 생산 및 유통하기 시작했다.[164] 심이 라무네를 판매하기 시작했을 때 일본에서는 콜레라가 유행했고, 1886년 요코하마 메이니치 신문이 "가스가 포함된 음료로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보도하면서 수요가 증가했다.[165] 오사카 니폰(大阪日報)의 당시 보도에 따르면 심의 라무네는 "완전히 매진되었다"고 한다.[165]

6. 1. 2. 소고기

개항 이전, 단바(丹波), 탄고(丹後), 타지마(但馬)산 소고기는 요코하마 외국인 거류지의 상인들이 구입하여 외국인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166] 개항 후, 거류민들은 이 소고기를 열렬히 찾았지만, 당시 일본에는 소고기를 먹는 습관이 없어 계획적으로 소고기를 공급하는 체계가 없었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스스로 도축장과 정육점을 개설했다.[167] 처음으로 이를 실행한 것은 에드워드 찰스 킬비였으며, 정확한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이쿠타 강 동쪽에 도축장을 빌려 카이간도리에 정육점을 개설하여 소고기를 판매했다.[168] 1868년에는 테볼이라는 영국인이 이쿠타 강 옆에 도축장을 개설했다는 기록도 있다.[168] 1871년에 일본인이 소고기 공급에 참여하게 되었고, 1875년 이후에는 거의 일본인에 의해 독점되었다. 1894년에는 외국인이 식육업에서 완전히 철수했다.[169]

거류지 주변에서는 개항 직후부터 일본인이 소고기를 업으로 취급하고 섭취하기 시작했다. 1869년에 모토마치에서 개업한 쇠고기 전골 전문점 관문월하정은 고베에서 가장 오래된 일본인 경영의 소고기 요리점으로 여겨진다.[168][170] 고베에서 가장 오래된 일본인 경영의 소고기 가게는 1871년에 문을 연 오이 니쿠텐과 모리타니 상점이다.[168] 오이 니쿠텐 창업주인 기시다 이노스케는 소고기 된장절임이나 졸임 등 서양에는 없는 독자적인 조리법을 고안했다.[168][171]

6. 1. 3. 서양 과자

개항 이후 외국인 거주자와 여행객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서양식 과자점이 생겨났다.[173] 1882년, 조계(혼합 주거 지역) 내 모토마치 3초메에 고베 최초의 서양식 과자점인 니노미야 세이진도(二宮盛神堂)가 설립되었다.[174] 같은 해에 출판된 豪商神兵湊の魁|Gōshō shinpei minato no sakigake|호상신병주괴일본어에는 아이오이 다리 근처에 산고쿠도(三国堂)라는 서양식 과자점이 소개되어 있다.[174] 1897년, 요시카와 이치조(吉川市三)라는 사람이 도쿄의 과자점 風月堂의 고베 지점을 모토마치에 열었는데, 이는 고베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식 과자점이었다.[175] 이곳에서는 카스텔라, 와플, 프로피테롤, 캔디, 초콜릿 등을 판매했다.[176]

6. 2. 기독교

메이지 정부는 1873년까지 쇼군 시대의 기독교 금지령을 유지했다. 그러나 안세이 조약은 외국인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고, 외국인 거류지 내 선교사들의 종교 활동은 초기부터 활발했다.[177]

1868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 피에르 무니쿠는 사이고쿠 가도의 임시 예배 장소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가톨릭 예배를 시작했다.[178] 이듬해에는 37번지에 사제관을 건립하고 예배 장소를 이전했다.[179] 그러나 외국인 거주자 대다수가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에 참석률은 높지 않았다.[180] 무니쿠는 37번지에 예배당을 건축했고, 1870년에 봉헌식을 거행했다.[181] 1923년에는 나카야마테도리 1초메로 이전했고,[182] 가톨릭 고베 중앙 교회의 뿌리가 되었다.[183]

1870년, 미국 선교부의 다니엘 크로스비 그린은 18번지에서 프로테스탄트 예배를 시작했다.[184][185] 그린은 48번지에 교회를 건축했는데, 1872년 완공되어 유니온 교회로 명명되었다.[186] 1928년에는 고베 후쿠아이구 이쿠타초 4초메로,[187] 그리고 1992년에는 고베 나다구 나가미네다이 2초메로 이전했다.[188]

거류지에서 최초의 성공회 예배는 1873년에 거행되었다. 1876년부터 1898년까지는 48번지 유니온 교회에서 성공회 예배가 열렸다.[189] 1898년에는 시모야마테도리 3초메에 올 세인츠 교회가 완공되어 그 이후로 성공회 예배가 거행되었다.[189] 올 세인츠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불타 없어졌고 재건되지 않았다.[190]

6. 3. 음악

나가이진 공원, 고베 레가타 앤드 애슬레틱 클럽(KRAC) 체육관, 니시마치 공원 등 바닷가 근처 거리에서는 다양한 음악 활동이 이루어졌다.[191] 각국의 군악대는 물론 사설 악단과 전문 또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콘서트, 무용, 스포츠 행사에서 공연했다. KRAC는 운영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연 1~3회 콘서트와 연극을 포함한 공연을 개최했다.[193]

6. 4. 스포츠

고베 레가타 앤드 애슬레틱 클럽(KRAC) 등 스포츠 클럽을 중심으로 거류 외국인들은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다. 1868년 크리스마스에는 거류지 북동쪽 승마장에서 경마가 열렸고, 크리켓, 육상 경기 등이 같은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거류 외국인들은 일본 정부에 공식적인 운동 시설 설치를 요구했고,[569] 1874년 외국인과 일본인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나이가이진 공원(内外人公園)이 설치되었다.[572] 1877년 완공된 이 공원은[460] 잔디밭 형태였으며,[574] 럭비, 테니스 등이 행해져 일본 스포츠 보급에 영향을 주었다.[575]

나이가이진 공원은 1899년 거류지 반환과 함께 고베시 관할 히가시 유원지(東遊園地)로 변경되었고,[575] 1962년까지 약 90년간 스포츠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576]

6. 4. 1. 스포츠 조직

거류 외국인들은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다. 대부분은 스포츠 조직(클럽) 산하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고베 레가타 앤드 애슬레틱 클럽(KRAC) 산하에서 행해진 스포츠는 매우 다양했다.[191]

6. 4. 2. 나이가이진 공원

1868년 크리스마스, 항구 개항 직후 거류지 북동쪽 승마장에서 경마가 열렸다. 이 경마는 전례가 되어 같은 장소에서 크리켓, 육상 경기 등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거류지 계획이 완료될 때까지 외국인 거주민들에게 일시적인 기회였으며, 공식적인 체육 시설을 할당해 달라는 요구가 높아졌다.[215] 거주민들은 일본 정부가 그러한 체육 시설을 설립할 것을 약속했다고 회상했다.[215] 1871년 이쿠타 강 재건축 중 거류지 동쪽에 넓은 토지가 나타나자, 외국인 거주민들 사이에서는 이곳에 체육 시설이 설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217]

1872년, 외국인 거주민들은 이 토지의 일부를 점유하여 소유권을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협상 끝에 1874년 거류지 외국인 거주민과 현지 일본인이 공유하는 공원 형태로 체육 시설 설립을 승인했다.[218] 건설 및 유지 관리 비용은 외국인 자신들이 부담하게 되었고,[219] 이러한 방식으로 항구 개항 후 약 10년 만에 체육 시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공원은 1877년 완공되어 나이가이진 공원(内外人公園)으로 명명되었다.[110]

공원 부지는 잔디밭 형태였다.[220] 외국인들이 럭비, 테니스와 같은 스포츠에 열중하는 모습은 이러한 스포츠가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221] 나이가이진 공원은 1899년 거류지가 폐지됨에 따라 일본 정부에 반환되었고, 시청 관리로 이관되었다. 가노초 유원지(加納町遊園地)로 개명되었고, 1922년에는 히가시 유원지(東遊園地)로 개명되었다.[221]

6. 5. 외국 신문

라프카디오 헌


고베 외국인 거류지에서 발행된 최초의 외국어 신문은 A. T. 워킨스가 창간한 Hiogo and Osaka Herald|히오고 오사카 헤럴드영어였으며, 1868년 1월 4일에 첫 호를 발행했다.[223] 그 해 4월 23일, Herald|헤럴드영어의 활자 조판공 필로메나 브라가(Filomena Braga)가 퇴사하여 자신의 신문인 Hiogo News|히오고 뉴스영어를 창간했다.[224] 몇 년 후, News|뉴스영어의 더 낮은 구독료에 밀린 Herald|헤럴드영어는 발행을 중단했다.[224]

1888년 A. W. 퀸턴(A. W. Quinton)은 Kobe Herald|고베 헤럴드영어를 창간했고,[225][226] 1891년 10월 2일에는 로버트 영(Robert Young)이 Kobe Chronicle|고베 크로니클영어을 창간했다.[227][228] Chronicle|크로니클영어은 가끔 라프카디오 헌의 사설을 게재했다.[229][230] 1899년 거류지 반환 이후, Kobe Chronicle|고베 크로니클영어은 Hiogo News|히오고 뉴스영어(Hiogo Evening News|히오고 이브닝 뉴스영어로 개명)를 인수하고, 회사 이름을 Japan Chronicle|재팬 크로니클영어로 변경하여 고베를 넘어 사업을 확장했다. 결국 일본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는 외국어 신문으로 성장했다.[231]

Kobe Herald|고베 헤럴드영어1926년에 Kobe Herald and Osaka Gazette|고베 헤럴드 앤 오사카 가제트영어로 이름을 변경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행을 중단했다.[226] Japan Chronicle|재팬 크로니클영어1942년 1월에 발행을 중단했다.[232]

6. 6. 사교 클럽

고베 외국인 거류지에는 두 개의 사교 클럽이 있었다. 하나는 1868년(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에 독일인 거류민이 설립한 클럽 콘코르디아(Club Concordia)이다. 클럽 콘코르디아는 처음에는 독일인만 가입할 수 있었지만, 거류지 동쪽 끝에 건설한 시설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 네덜란드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등 다른 국적의 사람들도 가입을 허용했다.[233][234]

또 다른 하나는 1869년 5월 5일(메이지 2년 3월 24일(음력))에 미국인과 영국인을 중심으로 설립된 유니온 클럽(International Club, 후의 고베 외국 클럽)이다. 유니온 클럽에는 미국인, 영국인 외에도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등이 가입했다. 유니온 클럽은 거류지 내 건물(처음에는 31번지, 다음으로 32번지, 1870년(메이지 3년)부터는 79번지 오리엔탈 호텔 지하[119])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했다.[233][235]

독일 제국 성립 후, 클럽 콘코르디아 내부에서 독일인 회원과 비독일인 회원 간의 대립이 발생하여 비독일인 회원이 대량으로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금난에 빠진 클럽 콘코르디아는 시설을 유니온 클럽에 매각하고,[236] 1881년(메이지 4년)경[237] 유니온 클럽과 교체하여 79번지 오리엔탈 호텔 지하로 본거지를 옮겼다.[236]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두 클럽의 관계는 원만했고, 1890년대에 오리엔탈 호텔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유니온 클럽은 클럽 콘코르디아 회원이 유니온 클럽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238] 유니온 클럽(고베 외국 클럽)은 거류지 반환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239][240]

6. 7. 간테이뵤

화교들에게 간테이뵤(간제묘)는 사업과 가정 모두에서 번영을 기원하는 장소였으며, 정신적인 의지처였다.[241] 혼합 거주 지역에 두 곳의 간테이뵤가 건립되었다.

위치건립 연도건립 주체비고
나카야마테도오리 7초메1888년란주오펑(藍卓峰), 정왕고(鄭王高), 매소팽(麥少朋) 등오사카부 후세무라 가와치군(河内郡)의 낡은 지간산 초락사(慈眼山長樂寺) 이전.[243] 천면관음 외 관제, 천후성모 등 추가.[244] 1945년 6월 폭격으로 파괴, 1947년 재건 후 대만에서 관제상 수입.[245]
가노초 2초메1888년1945년 6월 폭격으로 파괴 후 재건되지 않음.[246]



재건된 간테이뵤


재건된 간테이뵤에서는 매년 음력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중원절 기간 동안 수륙포도승회(水陸普度勝會) 행사를 개최한다. 1997년 10월 이 축제는 고베시 무형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249]

7. 의료

거류민들은 정착지의 열악한 위생 상태를 처음부터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250] 발진티푸스 감염이 흔했으며,[251] 천연두나 콜레라가 확산될 가능성도 우려되었다.[250] 1869년 5월, 효고현은 우지노무라에 외국인 환자와 일본인 환자 모두를 받는 고베 병원(神戸病院일본어)을 설립했다.[252][253] 이 병원은 훗날 고베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이 되었다.[254][255] 하지만 1년 조금 넘게 지난 후, 외국인들은 병원의 낮은 수준의 치료에 실망하여 자체 운영 병원 시설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256]

외국인 거주자들은 외국인과 일본인 모두를 수용하는 병원 설립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현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1871년 2월, 외국인들은 독립적으로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국제병원인 고베 만국 병원(神戸万国病院일본어)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 병원은 훗날 고베 해성병원이 되었다.[257][258] 1872년 7월, 고베 만국 병원의 의료 책임자가 된 존 커팅 베리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일본 환자도 진찰하는 정책을 채택했다.[259] 병원은 처음에는 이쿠타 신사 근처의 집에서 운영되었지만,[260] 시설이 부적절하다는 불만이 제기되어 1874년 야마모토도리 1초메에 새로운 병원 건물을 건설하게 되었다.[260][261]

8. 주요 외국인 거주자

고베 외국인 거류지에는 다양한 국적과 직업을 가진 외국인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거류지의 발전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류민들은 거류지의 열악한 위생 상태를 심각하게 여겼다.[250] 발진티푸스 감염이 흔했고,[251] 천연두콜레라 확산 가능성도 우려되었다.[250] 1869년 5월, 현은 외국인과 일본인 환자 모두를 받는 고베 병원(神戸病院)을 설립했다.[252][253] 하지만 1년 조금 넘게 지난 후, 외국인들은 병원의 낮은 수준의 치료에 실망하여 자체 운영 병원 시설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256] 1871년 2월 외국인들은 독립적으로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국제병원인 고베만국병원(神戸万国病院)을 설립했다.[258] 1872년 7월 고베만국병원의 의료 책임자가 된 존 커팅 베리(John Cutting Berry)는 일본 환자도 진찰하는 정책을 채택했다.[259] 병원은 처음에는 이쿠타 신사 근처의 집에서 운영되었지만,[260] 부적절한 시설에 대한 불만으로 1874년 야마모토도리 1초메에 새로운 병원 건물을 건설하게 되었다.[260][261]

안세이 5개국 조약에는 거류 외국인의 활동 범위를 규제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거류 외국인이 이동 가능한 구역(유보 구역)은 효고현청을 기점으로 하는 10 이내의 구역으로 제한되었다. 1899년의 거류지 반환과 동시에 외국인이 일본 국내에 자유롭게 거주·외출하는 것(내지잡거)이 인정되게 되었다.[497]

이 외에도 많은 주요 외국인 거주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상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

8. 1. 사업가

알렉산더 캐머런 심(Alexander Cameron Sim)은 1870년에 고베로 이주하여 약사로서 거류지 내 약국(레웨린 상회)에 근무한 후, 거류지 18번지에 심 상회를 설립했다.[514][615] 심은 일본 최초라고도 알려진 레몬소다를 제조·판매하였고, 고베 레가타 앤드 애슬레틱 클럽(KRAC) 설립을 제창했으며, 거류지 내에서 주민들이 자주적으로 결성한 소방대 대장을 역임하며 방재 활동에 힘썼다.[616] 그는 자택 근처 공원(니시마치 공원)에 설치된 망루에 올라 감시를 했다.[617] 취침 시에도 출동에 대비하여 소방복과 헬멧, 손도끼를 베개 옆에 두었고,[617] 소방대장을 역임하는 동안 심이 출동하지 않은 화재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618] 거류지 반환에 따라 소방대가 소방조로 고베시에 이관된 후, 심은 소방조 명예 고문에 취임하였고,[618] 특별히 소방조를 지휘할 권한이 주어졌다.[619] 심은 거류지 회의 부의장도 역임했고, 거류지 반환 시 거행된 반환식에 병든 거류지 회의 의장을 대신하여 참석하여 인계 목록과 인계서에 조인·서명을 했다.[620]

토마스 블레이크 글래버(Thomas Blake Glover)가 설립한 글래버 상회에 근무하던 아서 헤스케스 그룸(Arthur Hesketh Groom)은 1868년에 지점 개설을 위해 고베를 방문했다.[621] 그룸은 1871년에 글래버 상회 동료 하이먼과 공동으로 거류지 101번지에 모리얀·하이먼 상회를 설립하여 일본차 수출과 실론티 수입을 담당했다.[622][623] 그는 1895년에 아들의 명의로 롯코산 정상에 빌린 땅에 별장을 짓고, 더 나아가 록코산의 땅을 별장지로 외국인에게 분양하여 록코산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624][625] 그룸은 스포츠맨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고베 크리켓 클럽과 고베 레가타 앤드 애슬레틱 클럽 설립에 관여했다.[626] 그가 1901년에 록코산에 개설한 4홀의 프라이빗 골프 코스는 일본 최초의 골프 코스이며,[627] 거류지 반환 후인 1903년에 회원제 골프장(고베 골프 클럽)으로 발전했다.[628] 1897년부터 1916년까지 오리엔탈 호텔을 경영하는 회사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623][629]

에드워드 찰스 킬비(Edward Charles Kilby)는 개항 직후 킬비 상회를 설립하여 기계와 잡화의 수입업을 경영했다.[630][631][632][633] 1869년, 킬비는 영국인 2명과 공동 경영으로 오노하마 제철소를 설립하고, 더 나아가 단독으로 오노하마 조선소를 설립하여 조선업을 경영했다.[634] 오노하마 조선소는 1882년에 일본 최초의 철제 증기선인 「제일태호환」(비와호연락선)을 건조하는 등 고베 조선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이후 경영난에 휘말려 킬비는 1884년에 자살했다.[635][636][637][638]

킬비 상회에 근무하던 에드워드 헤즐릿 헌터(Edward Hazlett Hunter)는 상회에서 독립한 후 1874년에 거류지 29번 건물에 헌터 상회를 설립하여 무역업을 경영했다.[639][640] 또한 헌터는 1879년에 오사카의 목재상 문다 사부로베에의 협력을 얻어 오사카 안지가와 강어귀에 오사카 제철소(히타치 조선의 전신)를 설립하여 조선업에도 진출했다.[641] 그는 1883년에 당시 기술로는 어려웠다고 여겨졌던 목조 건식 독 건조에 성공하여 오사카 제철소를 간사이를 대표하는 조선소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642] 헌터는 다각 경영으로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았다.[643] 1882년에 일본 정부가 취한 디플레이션 정책의 영향으로 오사카 조선소의 경영이 어려워졌을 때는 현미 수출 사업으로 얻은 수익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는데, 이때 헌터가 외국에 수출한 현미는 연간 1만 톤을 넘었고, 런던의 곡물 시장에서는 고베산 수입쌀이 가격 형성의 표준 쌀이 되었다.[507][644] 말년의 헌터는 사업을 아들 한타 류타로에게 물려주고, 거류 외국인에 의한 불평등 조약 개정에 찬성하는 결의안 작성에 힘쓰는 등 일본인과 외국인의 교류 심화에 노력했다.[645]

토마스와 존 월시 형제는 개항 직후 고베로 이주하여 월시 상회(후에 월시·홀 상회로 개명)를 설립하여 무역업을 경영했다.[646] 월시·홀 상회는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제지 원료로 사용되던 목면을 일본에서 사들여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647] 당시 목면은 석회로 고정하여 수출되었지만, 운송 중 목면에 포함된 수분과 화학 반응을 일으켜 발열·발화 사고가 빈번했다. 그래서 월시·홀 상회는 목면을 펄프 상태로 운송하는 것을 고안하여 큰 수익을 얻었다.[648] 또한 월시 형제는 산노미야에 제지 공장(고베 제지소, 미쓰비시 제지의 전신)을 건설하여 제지업도 했다.[649]

8. 2. 작가

코이즈미 야쿠모(라프카디오 헌)는 1894년(메이지 27년)부터 1896년(메이지 29년)까지 고베 외국인 거류지에 머물렀다. 베질 홀 챔벌린의 소개로 거류지 내에 있던 신문사 코베 크로니클(후의 재팬 크로니클)에 취직하여[650] 4개월 동안 사설을 통해 평론 활동을 했다.[583] 코이즈미가 일본 귀화를 결심한 것은 고베에 거주하던 때였다.[651] 1896년에 도쿄 제국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고베를 떠나 도쿄로 이주했다.[652]

벤세스라우 드 모라에스는 1899년(메이지 32년) 고베 거류지 내에 설치된 포르투갈 부영사관에 초대 부영사로 부임했고(곧 영사관의 초대 영사로 승진), 1913년(다이쇼 2년)까지 고베에 거주했다.[652][653] 모라에스는 1901년(메이지 34년)부터 일본에 관한 수필을 포르투갈 신문 「코메르시오 도 포르토」에 연재했다.[654]

8. 3. 기독교 선교사

남감리교회 선교사 제임스 윌리엄 럼버스(James William Lambuth)와 월터 러셀 럼버스(Walter Russel Lambuth) 부자는 1886년 가을, 거류지 47번지 자택을 개방하여 영어와 성경 강의소를 설립하고 “팔모아 학원”이라 명명했다.[655] 팔모아 학원은 영어 회화 학원인 팔모아 학원 전문학교로 발전했고,[656] 이 학원 여자부는 계명학원의 전신이 되었다.[655][657] 제임스는 히로시마 여자학교 보모사범과(성화대학[662]의 전신 중 하나) 설립에 참여했고,[658] 월터는 1889년에 간사이가쿠인을 설립했다.[659] 제임스의 아내 메리 이자벨라 럼버스(Mary Isabella Lambuth)는 1888년에 고베 부인 전도학교(후의 럼버스 기념 전도 여학교, 성화대학[662]의 전신 중 하나)를 설립했다.[658]

아메리칸 보드 소속 여성 선교사 엘라이자 탈컷(Eliza Talcott)과 줄리아 더들리(Julia Duddley)는 여자 교육 향상에 힘써, 1875년 스와산 기슭에 효고현 최초의 여학교( “고베 홈”, 고베여자학원대학의 전신)를 설립했다.[660][661] 더들리는 1880년에 고베 여자 전도학교(후의 고베 여자 신학교, 성화대학[662]의 전신 중 하나)를 설립했다.[663]

아메리칸 보드의 선교사 존 커팅 베리(John Cutting Berry)는 효고 국제병원(고베 만국병원)[610]의 의사 감독을 역임한 외에도, 효고현 병원(고베 병원)[606][607]의 원장에 취임하여 고베, 히메지, 미타에서 활발하게 의료 활동을 펼쳤다.[664][665] 1873년 1월에는 고베 병원에서 효고현 최초의 인체 해부를 실시했다.[666][667] 베리는 1877년 고베 감옥에서 콜레라가 대유행했을 때 효고현의 요청으로 감옥에 들어가, 불결한 환경과 죄수에 대한 비인도적인 대우를 목격했다. 베리는 효고현 지사에 감옥 제도 개선을 호소했고, 여러 선교사들이 베리에 이어 감옥을 시찰하고 제도 개선안을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668]

어린 예수회의 수녀 필로메나 발렌틴 안토닌(Philomena Valentin Antonin)은 1890년경부터 거류지 41번지의 여자 교육원에서 고아들을 돌보았다. 안토닌의 활동은 태평양 전쟁 종전 후까지 이어졌고, 평생 돌본 고아는 수백 명에 달했다.[669]

8. 4. 외국인 묘지

고베시립 외국인묘지


거류 외국인을 위한 묘지는 처음에 에도 막부에 의해 오노하마 신덴(이후의 고베시 주오구 하마베도오리 6초메)에 마련되었다.[319][320][321] 땅을 깊이 파면 물이 나왔기 때문에 얕게 파서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홍수 등의 피해를 입기 쉬웠다.[320][322] 묘지 관리는 거류지 회의 행사국이 담당했고, 반환 후에는 고베시로 이관되었다.[323]

거류지 반환 후인 1899년, 고베시는 오노하마 외국인 묘지가 포화 상태가 된 것에 대한 대책으로 나다구 카스가노(이후의 나다구 카고이케도오리 4초메)에 묘지를 증설했다(카스가노 외국인 묘지).[323] 그러나 이 묘지도 머지않아 포화 상태가 되자, 고베시는 주오구에 있는 후타타비 산에 묘지 건설을 시작했다. 이 새로운 묘지(고베시립 외국인묘지)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중단을 거쳐 1952년에 완성되었고, 먼저 같은 해에 오노하마 신덴의 묘지가, 다음으로 1961년에 카스가노의 묘지가 이전되었다.[323]

9. 주변 지역에 미친 영향

고베 외국인 거류지는 무역의 중심지이자 서양 문화의 관문으로 번영하며 주변 지역에 경제적,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324]

개항 전에는 효고 항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지역 무역의 중심지였다.[325] 그러나 개항 후 외국인 거류지 주변 지역이 경제적 중심지가 되면서 그 주변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외국 상인이 운영하는 공장은 거류지 북동쪽 지역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은행과 상점은 서쪽 해안에 설립되었고, 이들 주변에는 주거 지역이 형성되었다.[326] 1890년부터 외국인 거류지 주변 마을과 구 항구 주변 마을이 합쳐져 하나의 도시 지역을 이루게 되었다.[326]

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영향 중 하나는 식생활 변화였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1869년부터 소고기를 제공하기 시작했고,[168]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육점이 생겨났으며, 그 이후로 일본인들은 소고기를 취급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같은 시기에 우유를 마시고 빵을 먹는 것도 퍼져나갔다.[327]

1873년부터 효고현은 거류지 인근 지역에 서양식 건축물 건설을 장려했고, 거류지 반환 이후 서양식 건축물 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328] 거류 외국인들이 테니스와 럭비 같은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은 현지인들에게 영감을 주어 이러한 스포츠를 시작하게 했다.[221] 현지 기독교인 수도 증가했다.[329]

거류지 건설에 참여했던 시바타 타케나카(柴田竹仲)는 "개항으로 군함과 상선이 드나들고 선원 등이 출입하므로 매춘부가 없으면 통제 불능이 될 것이다."라는 이유로 외국인을 위한 유곽 건설을 주장했다.[330] 1868년 우지 강 어귀, 혼거 지역 외곽에 후쿠하라 유곽이 건설되었고,[331] 1870년에는 미나토 강 동쪽, 사이고쿠 가이도(西国街道) 북쪽으로 이전하여 신후쿠하라라고 불리게 되었다.[332] 후쿠하라의 매춘 업소들은 외국인 손님을 받아들였고, 일부 건물은 동서양 양식이 혼합된 형태였다.[333]

외국인 거류지의 존재는 고베에 현대적이고 세련되고 이국적인 분위기,[334] 모험 정신,[334]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를 가져다주었다.[335] 한편, 혼거 지역에서는 일본인과 외국인이 함께 생활하며 일상생활에서 교류하면서 고베가 다민족 다문화 도시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141]

10. 다른 외국인 거류지와의 비교

면적 측면에서 고베 외국인 거류지는 나가사키와 요코하마에 이어 전국 3위였으며, 요코하마 거류지의 약 1/7, 나가사키 거류지의 약 1/2 규모였다. 하지만 요코하마는 두 개의 별개 거류지(요코하마(관내)·야마테)가 합쳐진 것이었고, 나가사키는 여덟 개의 구역(오우라·시모마쓰·우메가사키·데지마·신치·히로마바·히가시야마테·미나미야마테)으로 나뉘어 있었다. 요코하마의 각 구역은 고베 거류지 전체보다 컸지만, 나가사키에서 가장 큰 구역(미나미야마테)조차도 고베보다 작았다. 고베의 혼거 지역 면적은 요코하마와 츠키지에 이어 전국 3위였다.[131]

고베 거류지는 혼거 지역보다 컸지만, 츠키지와 하코다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츠키지의 경우 인근 요코하마 거류지의 영향을 받았는데, 외국 상인들은 요코하마 거류지를 선호했고, 일부 외국 관리와 정부 고문들의 직장과도 더 가까웠다.[337] 하코다테에서는 거류지 자체의 토지 상태가 매우 열악하여 외국인들은 혼거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338]

외국인 인구 측면에서, 더 큰 요코하마 거류지는 1893년에 4,946명의 거주자를 보유하고 있었다.[339] 나가사키는 1868년경 약 938명[340], 1899년 일본으로 반환되었을 때 1,711명이었다.[341] 면적 기준으로 고베 다음으로 큰 츠키지 거류지는 더 큰 혼거 지역을 가지고 있었지만, 허용 구역 외부의 불법 거주가 만연하여 1871년 9월에는 72명, 1877년에는 97명의 공식 거주자만 있었다.[342]

1885년 말 츠보(坪) 단위 거류지 면적
위치요코하마나가사키하코다테츠키지고베가와구치
거류지 면적[481][131]348197[694]105787[695]173026162496457747
잡거지 면적[481][131]3621629731321633323267563578



고베와 요코하마는 모두 메이지 시대에 개항하여 세계와의 창구 역할을 했다.[696] 하지만 고베는 일본인과 외국인 간의 관계가 일반적으로 더 원만했던 반면,[389] 요코하마는 불공정한 사업 관행으로 인해 외국인과의 거래를 거부하는 소동(내외상 분쟁)이 거의 매년 발생하는 등 관계가 매우 불안정했다.[442] 이러한 차이의 한 가지 이유는 고베가 개항이 늦었다는 점에서 얻은 경험의 이점일 수 있다. 고베 항은 요코하마보다 8년 늦게 개항했는데, 그 기간 동안 가장 악덕 외국 상인들이 도태되고 양측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697][698]

두 항구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에도 막부는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カ国条約)에서 제안된 효고(兵庫)가 아닌 고베 항을 개항했다.[359] 마찬가지로 요코하마 항도 번화한 가나가와 숙소(神奈川宿)가 아닌 당시 빈곤한 요코하마무라(横浜村)에 개항했다.[699] 효고의 경우 이러한 변경으로 인한 사건은 거의 없었지만, 가나가와의 경우 막부는 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코하마에 항구를 개항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결국 외국 열강은 요코하마의 수심이 가나가와보다 지리적으로 항구로서 우수하다는 것이 증명되자 요코하마 개항을 승인했다.[700]

참조

[1] 서적 Kusumoto 2007
[2] 서적 Kusumoto 2007
[3] 서적 Kusumoto 2007
[4] 서적 Shinshū Kōbe Shishi: Rekishi-hen 3
[5] 서적 Kōbe Gaikokujin Kyoryūchi Kenkyūkai 2005
[6] 서적 Doi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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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Doi 2007
[9] 서적 Shinshū Kōbe Shishi: Rekishi-hen 3
[10] 서적 Doi 2007
[11] 웹사이트 神戸港の歴史 http://www.city.kobe[...] Kobe City 2009-04-28
[12] 서적 Kusumoto 2007
[13] 문서 The Port of Hyōgo was at the time operating as an outport of Osaka where many business dealings and transactions took place.
[14] 서적 Kusumoto 2007
[15] 서적 Doi 2007
[16] 서적 Kusumoto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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