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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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국보는 1799년 경기도 송도에서 태어난 한국 천주교 신자이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30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배교하였으나 뉘우치고 다시 신앙을 고백하려다 투옥되어 곤장과 장티푸스로 옥사했다. 그는 기해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국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정국보 프로타시오
출생일1799년
사망일1839년 5월 20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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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경기도 송도
사망지서울 서소문
직업순교자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인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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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799년 경기도 송도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울어 서울에서 평민으로 살았다. 성품이 온순하고 겸손했던 그는 30세가 넘어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실한 생활을 했으며, 중국인 사제 유방제의 신임을 얻어 신자들을 위한 쉼터를 관리하기도 했다. 여러 개인적인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노력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아내와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혹독한 고문과 관리의 회유 끝에 잠시 배교하였으나, 석방된 후 깊이 뉘우치고 형조에 자수하여 배교를 철회했다. 이로 인해 다시 투옥되어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았고, 결국 1839년 5월 20일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그는 기해박해의 첫 순교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으며, 회개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2.1. 출생과 성장

1799년 경기도 송도의 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집안은 부유하고 권세가 있었으나, 할아버지의 잘못과 부정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로 이주하여 양반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살기로 결정했으며, 정국보 역시 아버지와 함께 선공감에서 새끼줄을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정국보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품이 온순하고 겸손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2.2. 천주교 입교와 신앙 생활

정국보는 서른 살이 넘어서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늦게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고 이를 충실히 따랐으며, 몇 년 뒤 세례를 받았다.

중국인 사제였던 유방제 신부는 정국보의 신실함을 알아보고 새로 마련한 집의 관리를 맡겼다. 이 집은 성사를 받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천주교 신자들이 머무는 쉼터와 같은 곳이었다. 정국보는 이곳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을 정성껏 돌보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온 힘을 쏟았으며, 부부는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정국보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극심한 가난을 겪었으며 건강도 좋지 않았다. 또한, 그에게는 14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정국보는 이러한 모든 시련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생각하며 불평 없이 견뎌냈다. 그는 늘 종교 서적 읽기를 좋아했으며, 유방제 신부와 교리 교사의 설교와 가르침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며 신앙을 더욱 깊게 키워나갔다.

2.3. 기해박해와 배교

1839년 4월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국보와 그의 아내는 가장 먼저 체포되어 투옥된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극심한 고문심문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를 거부하며 신앙을 지켰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된 후 상황이 달라졌다. 형조의 관리는 온갖 달콤한 말로 그를 회유하려 했고, 이미 이전의 고문으로 쇠약해진 그의 몸은 계속되는 혹독한 형벌을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정국보는 관리의 유혹과 계속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배교를 선언한 그는 즉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2.4. 회개와 순교

1839년 4월 기해박해 때 체포된 정국보는 극심한 고문에도 배교를 거부했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 관리의 감언이설과 혹독한 형벌에 지쳐 결국 배교를 언명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배교한 것을 뼈저리게 뉘우치며 먹지도 자지도 않고 슬픔 속에서 통곡하며 참회의 기도로 날을 보냈다.

동료 교우들의 격려로 용기를 얻은 정국보는 자신의 배교를 철회하고 신앙을 다시 고백하기 위해 형조를 찾아가 자수했다. 그는 포졸들에게 판서를 만나 배교를 취소하겠다고 밝혔으나, 포졸들은 "한 번 뱉은 말은 물릴 수 없다"며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고 돌려보냈다. 정국보는 병든 몸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세 번이나 형조를 찾아갔고, 마침내 5월 12일 형조 문밖에서 기다리던 끝에 판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판서에게 "저는 죄인이지만, 배교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이며 저의 죄를 속죄하러 왔습니다. 한 명의 천주교인으로서 죽기를 원하니, 부디 저를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배교 철회를 간청했다. 그의 고집에 성가심을 느낀 판서는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감옥으로 돌아온 정국보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으며, 감옥 안의 교우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와 순교할 수 있게 된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그가 감옥에 돌아온 날은 김효임 콜룸바와 김효주 아네스 자매가 용감하게 고문을 견디며 신앙을 증언하던 때였다.

정국보는 다시 형조로 끌려가 곤장 25대를 맞았다. 배교를 철회했다는 이유로 형리들은 더욱 잔혹하게 매질했고, 이미 극도로 쇠약해진 그의 몸은 죽음에 가까워졌다. 고문 후 장티푸스까지 앓게 되자 포졸들은 그를 다시 감옥으로 보냈다. 감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반쯤 죽은 상태였고, 그날 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5월 20일이었으며,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3. 평가와 시성

정국보는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조정의 천주교 박해령 이후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진실한 신앙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극복하고 순교로 이어진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했다가 회개한 것처럼, 정국보 역시 고문 끝에 잠시 배교했으나 곧바로 깊이 뉘우치고 스스로 형조를 찾아가 신앙을 다시 고백하며 순교의 길을 택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회개의 중요한 본보기로 여겨지며, 그의 순교는 다른 신자들이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고 신앙을 지키도록 용기를 주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천주교인들에게 신앙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국보(프로타시오)는 1984년 5월 6일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