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 개요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32년에 실시되었으며, 만주 사변에 대한 반대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치러졌다. 선거는 중선거구제 하에 25세 이상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으며, 우익 세력의 암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선거 결과, 이누카이 쓰요시 총재의 입헌정우회가 301석을 얻어 압승했으며,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재의 입헌민정당은 146석을 얻었다. 선거 이후 여러 차례 보궐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입헌정우회는 전국적인 지지를 확보하며 일본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었다.
| 국가 | 일본 제국 |
|---|---|
| 선거 유형 |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이전 선거 | 1930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이전 선거 연도 | 1930년 |
| 다음 선거 | 1936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다음 선거 연도 | 1936년 |
| 선출 의석 수 | 466석 |
| 과반 의석 수 | 234석 |
| 선거일 | 1932년 2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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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 이누카이 쓰요시 |
|---|---|
| 정당 | 입헌정우회 |
| 이전 선거 결과 | 37.69%, 174석 |
| 의석 수 | 301석 |
| 의석 변동 | 증가 127 |
| 득표수 | 5,683,137 |
| 득표율 | 58.20% |
| 득표율 변동 | 증가 20.51%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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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 정당 | 입헌민정당 |
| 이전 선거 결과 | 52.48%, 273석 |
| 의석 수 | 146석 |
| 의석 변동 | 감소 127 |
| 득표수 | 3,442,326 |
| 득표율 | 35.25% |
| 득표율 변동 | 감소 17.23%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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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 아베 이소오 |
|---|---|
| 정당 | 사회민중당 |
| 이전 선거 결과 | 1.67%, 2석 |
| 의석 수 | 3석 |
| 의석 변동 | 증가 1 |
| 득표수 | 125,758 |
| 득표율 | 1.29% |
| 득표율 변동 | 감소 0.38%p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지도자 | 아소 히사시 |
|---|---|
| 정당 | 노농대중당 |
| 이전 선거 결과 | – |
| 의석 수 | 2석 |
| 의석 변동 | 신생 정당 |
| 득표수 | 127,459 |
| 득표율 | 1.31% |
| 득표율 변동 | 신생 정당 |
| 제5당 | {"caption":"KST"} |
| 정당 | 혁신당 |
| 이전 선거 결과 | 0.53%, 3석 |
| 의석 수 | 2석 |
| 의석 변동 | 감소 1 |
| 득표수 | 36,839 |
| 득표율 | 0.38% |
| 득표율 변동 | 감소 0.15%p |
| 선거 전 총리 | 이누카이 쓰요시 |
|---|---|
| 선거 전 정당 | 입헌정우회 |
| 선거 후 총리 | 이누카이 쓰요시 |
| 선거 후 정당 | 입헌정우회 |
-
1932년 2월 -
제1차 상하이 사변
제1차 상하이 사변은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과 중국 간에 발생한 무력 충돌로, 일본의 상하이 조계지 영향력 확대를 위한 움직임과 반일 감정 고조 속에서 일본인 승려 피습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중국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공세 강화로 상하이 정전 협정을 체결하고 중일 전쟁의 전초전으로 평가된다. -
1932년 2월 -
맨챌래 반란
맨챌래 반란은 아직 주요 내용이 정의되지 않아 미완성 상태의 문서이다. -
1932년 선거 -
1932년 프랑스 총선
1932년 프랑스 총선은 제3공화국 시기에 좌파 연합인 "카르텔 데 고슈"의 승리로 에두아르 에리오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내부 분열과 경제 위기로 불안정했으며, 공화급진사회당이 제1당, 프랑스 노동자 인터내셔널 지부가 그 뒤를 이었다. -
1932년 선거 -
1932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
대공황 시대에 치러진 1932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는 민주당이 압승하여 상원 다수당을 차지하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대한 기대감 속에 민주당은 장기 집권의 발판과 뉴딜 정책 추진 동력을 확보했다. -
1932년 일본 -
만주사변
만주사변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류탸오후 사건을 자작극으로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수립한 사건이며, 일본 군국주의 팽창을 가속화하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
1932년 일본 -
5·15 사건
5·15 사건은 1932년 일본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하고 주요 시설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정당 내각 붕괴와 군부 영향력 강화로 이어져 일본이 군국주의 시대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1931년 일본 군부가 조작한 만주 사변 발발 이후 일본 정계는 격변기를 맞았다. 당시 집권당 입헌민정당은 만주 사변에 반대 입장을 취했으나, 군부와의 갈등과 "심각한 부패" 혐의 등으로 비판받으며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후 야당인 입헌정우회가 중심이 되어 이누카이 쓰요시를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1931년 12월 13일 출범했다.
그러나 이누카이 내각 출범 당시 여당인 정우회 의석은 174석에 불과하여 소수 여당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에 이누카이 내각은 만주 사변 처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시점을 이용하여 정권 기반을 강화하고자, 제60회 중의원 개회 직후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 실시를 결정했다.
이번 선거는 여러 요인이 집권 여당인 정우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선거 직전 경쟁 상대인 입헌민정당 내에서 아다치 겐조 등 일부 세력이 탈당하며 당이 분열된 점, 이누카이 내각이 1931년 12월 단행한 금 수출 재금지 조치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조성된 점, 그리고 만주 사변과 상하이 사변에서의 군사적 성공 소식 등이 여당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정우회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레코드나 토키영화 같은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하는 전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만주 사변은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을 명백히 드러낸 사건으로, 이는 일제강점기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민족말살통치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선거를 전후하여 정치적 폭력이 잇따르면서 일본 정당 정치의 위기가 심화되었고, 군부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2.1. 정치적 혼란
1931년, 당시 집권당이었던 입헌민정당은 일본 군부가 일으킨 만주 사변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다.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과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는 군국주의 세력으로부터 군사 문제 개입과 "심각한 부패" 혐의 등으로 비판을 받았고, 결국 와카츠키 내각은 총사퇴했다. 이후, 민정당 내 일부 우익 성향 의원들이 야당인 입헌정우회와 손을 잡고 이누카이 쓰요시를 총리로 추대하며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
1931년 12월 13일 출범한 이누카이 내각은 당시 여당인 입헌정우회 의석수가 174석에 불과하여 소수 여당으로 정권을 운영해야 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에 이누카이 내각은 만주 사변 처리가 일단락된 후, 사변 처리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정권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제60회 중의원 개회 직후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일부 사업가와 후보자들이 우익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거전 중인 1932년 2월 9일, 혈맹단 사건의 일환으로 전 재무대신이자 민정당의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암살되었고, 총선거 직후인 3월 5일에는 미쓰이 재벌의 총수 단 다쿠마마저 암살되면서, 일본 정당 정치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웠다.
2.2. 경제 상황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누카이 내각은 금본위제 이탈을 의미하는 금 수출 재금지 조치를 통해 경제 회복을 시도했고, 이는 엔화 가치 하락과 수출 증대로 이어져 일시적인 호황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정책은 일본 경제의 군수산업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결국 만주사변 이후 본격화된 군비 확장과 맞물려, 일제강점기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더욱 심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3. 선거 제도
선거 제도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하였으며, 보통선거가 시행되었다. 다만, 선거권은 만 25세 이상의 남성에게만 부여되어 모든 성인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권자 수는 13,237,841명이었으며, 선출된 총 의원 정수는 466명이었다.
4. 선거 운동
(내용 없음)
5. 선거 결과
--
1931년 12월 13일 출범한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은 입헌정우회가 174석으로 소수 여당인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만주 사변 처리가 일단락된 후, 정부는 사변 처리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정권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제60회 중의원 개회 시 해산을 단행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
선거는 여당인 입헌정우회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선거 전 입헌민정당에서 아다치 겐조 일파가 탈당하여 분열된 점, 이누카이 내각이 1931년 12월 단행한 금 수출 금지 조치 이후 경기가 회복될 조짐을 보인 점, 그리고 만주 사변과 상하이 사변에서의 전승 분위기 등이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는 레코드나 유성 영화 등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한 선거 운동이 시도되기도 했다.
선거 결과, 입헌정우회는 예상을 뛰어넘는 301석을 획득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 경제 위기 대처 실패 등으로 지지를 잃은 입헌민정당은 기존 의석에서 100석 이상 감소한 146석을 얻는 데 그쳐 참패했으며, 당세 위축을 피하지 못했다. 사회민중당은 3석, 사회대중당은 2석, 혁신당은 2석을 각각 확보했고, 무소속은 12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2월 9일 전 재무대신이자 민정당 소속이었던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암살되고, 총선거 후인 3월 5일에는 미쓰이 재벌 총수 단 타쿠마가 암살되는 혈맹단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정당 정치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또한 입헌정우회는 압승에도 불구하고 선거 후 나카하시 도쿠고로 내무대신의 사임을 계기로 당내 갈등이 표출되었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누카이 총리의 정권 장악력은 오히려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5.1. 정당별 득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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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정당별 의석 분포
5.3. 지역별 결과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입헌민정당은 국민적 지지를 잃었다. 반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이끄는 집권 우익 성향의 입헌정우회는 이번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입헌민정당은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며 참패했고, 사회대중당과 노농대중당 등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도 일부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특히 입헌정우회는 후쿠오카, 야마구치 등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에서도 강세를 보였는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에 팽배했던 제국주의적 분위기와 만주사변 등 대륙 침략 정책에 대한 지지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래는 각 현별 정당 획득 의석수이다.
| 현(縣) | 총 의석수 | 획득 의석수 | |||
|---|---|---|---|---|---|
| 입헌정우회 | 입헌민정당 | 사회대중당 | 노농대중당 | 혁신당 | 무소속 |
| 아이치 || 17 || 11 || 5 || 0 || 0 || 0 || 1 | |||||
| 아키타 || 7 || 4 || 3 || 0 || 0 || 0 || 0 | |||||
| 아오모리 || 6 || 4 || 2 || 0 || 0 || 0 || 0 | |||||
| 지바 || 11 || 8 || 3 || 0 || 0 || 0 || 0 | |||||
| 에히메 || 9 || 7 || 2 || 0 || 0 || 0 || 0 | |||||
| 후쿠이 || 5 || 3 || 2 || 0 || 0 || 0 || 0 | |||||
| 후쿠오카 || 18 || 12 || 3 || 2 || 0 || 0 || 1 | |||||
| 후쿠시마 || 11 || 7 || 3 || 0 || 0 || 0 || 1 | |||||
| 기후 || 9 || 6 || 3 || 0 || 0 || 0 || 0 | |||||
| 군마 || 9 || 6 || 3 || 0 || 0 || 0 || 0 | |||||
| 히로시마 || 13 || 7 || 6 || 0 || 0 || 0 || 0 | |||||
| 홋카이도 || 20 || 13 || 6 || 0 || 0 || 0 || 1 | |||||
| 효고 || 19 || 11 || 7 || 0 || 0 || 1 || 0 | |||||
| 이바라키 || 11 || 8 || 2 || 0 || 0 || 0 || 1 | |||||
| 이시카와 || 6 || 4 || 2 || 0 || 0 || 0 || 0 | |||||
| 이와테 || 7 || 6 || 1 || 0 || 0 || 0 || 0 | |||||
| 가가와 || 6 || 4 || 2 || 0 || 0 || 0 || 0 | |||||
| 가고시마 || 12 || 12 || 0 || 0 || 0 || 0 || 0 | |||||
| 가나가와 || 11 || 6 || 5 || 0 || 0 || 0 || 0 | |||||
| 고치 || 6 || 4 || 1 || 0 || 0 || 0 || 1 | |||||
| 구마모토 || 10 || 6 || 3 || 0 || 0 || 0 || 1 | |||||
| 교토 || 11 || 7 || 3 || 0 || 0 || 0 || 1 | |||||
| 미에 || 9 || 5 || 3 || 0 || 0 || 0 || 1 | |||||
| 미야기 || 8 || 6 || 2 || 0 || 0 || 0 || 0 | |||||
| 미야자키 || 5 || 5 || 0 || 0 || 0 || 0 || 0 | |||||
| 나가노 || 13 || 7 || 6 || 0 || 0 || 0 || 0 | |||||
| 나가사키 || 9 || 5 || 4 || 0 || 0 || 0 || 0 | |||||
| 나라 || 5 || 2 || 2 || 0 || 0 || 0 || 1 | |||||
| 니가타 || 15 || 10 || 4 || 0 || 0 || 1 || 0 | |||||
| 오이타 || 7 || 5 || 2 || 0 || 0 || 0 || 0 | |||||
| 오카야마 || 10 || 9 || 1 || 0 || 0 || 0 || 0 | |||||
| 오키나와 || 5 || 4 || 1 || 0 || 0 || 0 || 0 | |||||
| 오사카 || 21 || 10 || 10 || 0 || 1 || 0 || 0 | |||||
| 사가 || 6 || 4 || 2 || 0 || 0 || 0 || 0 | |||||
| 사이타마 || 11 || 8 || 3 || 0 || 0 || 0 || 0 | |||||
| 시가 || 5 || 3 || 2 || 0 || 0 || 0 || 0 | |||||
| 시마네 || 6 || 2 || 4 || 0 || 0 || 0 || 0 | |||||
| 시즈오카 || 13 || 8 || 5 || 0 || 0 || 0 || 0 | |||||
| 도치기 || 9 || 6 || 3 || 0 || 0 || 0 || 0 | |||||
| 도쿠시마 || 6 || 4 || 2 || 0 || 0 || 0 || 0 | |||||
| 도쿄 || 31 || 15 || 13 || 1 || 1 || 0 || 1 | |||||
| 돗토리 || 4 || 2 || 1 || 0 || 0 || 0 || 1 | |||||
| 도야마 || 6 || 4 || 2 || 0 || 0 || 0 || 0 | |||||
| 와카야마 || 6 || 5 || 1 || 0 || 0 || 0 || 0 | |||||
| 야마가타 || 8 || 5 || 3 || 0 || 0 || 0 || 0 | |||||
| 야마구치 || 9 || 7 || 2 || 0 || 0 || 0 || 0 | |||||
| 야마나시 || 5 || 4 || 1 || 0 || 0 || 0 || 0 | |||||
| 총계 || 466 || 301 || 146 || 3 || 2 || 2 || 12 |
6. 선거 이후
선거 결과, 여당인 입헌정우회는 301석을 획득하며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를 통해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은 정권 기반을 강화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압승에도 불구하고 선거 직후 나카하시 도쿠고로 내무대신의 병으로 인한 사임을 계기로 당내 갈등이 불거졌고, 이누카이 총리는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리더십에 타격을 입으며 정권 장악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제1야당 입헌민정당은 기존보다 100석 이상 감소한 146석을 얻는 데 그치며 참패했다. 선거 전 아다치 겐조 일파의 탈당으로 이미 분열된 상태였던 민정당은 이번 선거 패배로 당세 저하에 제동을 걸지 못하고 정계에서 점차 소외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선거 전후로 전 재무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미쓰이 재벌 총수 단 타쿠마가 암살당하는 혈맹단 사건이 발생하는 등, 당시 일본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정당 정치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군부 세력의 발호를 부추기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선거가 끝난 지 약 3개월 후인 1932년 5월 15일, 5.15 사건이 발생하여 이누카이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이 사건은 일본 정당 정치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일본은 군부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군국주의 체제로 빠르게 나아가게 된다. 이는 만주 사변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확대와 한국을 포함한 식민지에 대한 더욱 가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6.1. 당선자 명단
(내용 없음)
6.2. 보궐선거
1932년부터 1935년 사이에 다음과 같은 보궐선거가 실시되어 의원이 선출되었다.
{| class="wikitable"
|-
! 선거구 !! 당선자 !! 소속 정당
|-
| 도쿄 1구 || 스즈키 우메시로 || 입헌정우회
|-
| 오사카 4구 || 모리모토 가즈오 || 입헌정우회
|-
| 홋카이도 1구 || 이치야나기 주지로 || 입헌민정당
|-
| 홋카이도 1구 || 사와다 토시키치 || 입헌민정당
|-
| 홋카이도 2구 || 아사카와 히로시 || 입헌민정당
|-
| 홋카이도 3구 || 와타나베 야스쿠니 || 입헌민정당
|-
| 홋카이도 3구 || 마에다 우노스케 || 입헌민정당
|-
| 홋카이도 4구 || 오카다 하루오 || 입헌민정당
|-
| 홋카이도 4구 || 칸베 타메조 || 입헌민정당
|-
| 아오모리 1구 || 야마우치 료 || 입헌민정당
|-
| 미야기 1구 || 하세가와 리쿠로 || 입헌민정당
|-
| 미야기 2구 || 고야마 구라노스케 || 입헌민정당
|-
| 아키타 1구 || 노다 기에몬 || 입헌민정당
|-
| 야마가타 1구 || 구로가네 야스요시 || 입헌민정당
|-
| 후쿠시마 1구 || 아와야마 히로시 || 입헌민정당
|-
| 후쿠시마 2구 || 스나무라 다이지 || 입헌민정당
|-
| 후쿠시마 3구 || 우지이에 키요시 || 입헌민정당
|-
| 이바라키 1구 || 나카자키 토시히데 || 입헌민정당
|-
| 이바라키 1구 || 이시바시 시게루 || 입헌민정당
|-
| 이바라키 2구 || 고미네 미쓰오 || 입헌민정당
|-
| 이바라키 3구 || 하라 슈지로 || 입헌민정당
|-
| 군마 1구 || 우부카타 다이키치 || 입헌민정당
|-
| 군마 1구 || 세키구치 시코 || 입헌민정당
|-
| 군마 2구 || 모가미 마사조 || 입헌민정당
|-
| 사이타마 1구 || 사다즈카 몬지로 || 입헌민정당
|-
| 사이타마 1구 || 가토 무쓰노스케 || 입헌민정당
|-
| 사이타마 3구 || 고지마 요시히데 || 입헌민정당
|-
| 지바 1구 || 시노하라 리쿠로 || 입헌민정당
|-
| 지바 3구 || 기타다 쇼헤이 || 입헌민정당
|-
| 지바 3구 || 야스다 마사오 || 입헌민정당
|-
| 가나가와 3구 || 오카자키 구지 || 입헌민정당
|-
| 야마나시 전현 || 호리우치 료헤이 || 입헌민정당
|-
| 도쿄 1구 || 사쿠라우치 다쓰로 || 입헌민정당
|-
| 도쿄 2구 || 아카즈카 고로 || 입헌민정당
|-
| 도쿄 2구 || 다카하시 히데오미 || 입헌민정당
|-
| 도쿄 3구 || 엔도 치겐 || 입헌민정당
|-
| 도쿄 4구 || 마나베 기주 || 입헌민정당
|-
| 도쿄 4구 || 오마타 마사카즈 || 입헌민정당
|-
| 도쿄 4구 || 고지마 미야지로 || 입헌민정당
|-
| 니가타 2구 || 나가오 한페이 || 입헌민정당
|-
| 니가타 3구 || 사토 겐노스케 || 입헌민정당
|-
| 도야마 1구 || 데라시마 곤조 || 입헌민정당
|-
| 도야마 2구 || 야마다 기이치 || 입헌민정당
|-
| 이시카와 1구 || 다케야 진타로 || 입헌민정당
|-
| 나가노 2구 || 야마베 쓰네시게 || 입헌민정당
|-
| 나가노 3구 || 미야자와 타네유 || 입헌민정당
|-
| 기후 1구 || 야마다 미치오 || 입헌민정당
|-
| 시즈오카 1구 || 고쿠이에 미요키치 || 입헌민정당
|-
| 시즈오카 2구 || 구시베 아라쿠마 || 입헌민정당
|-
| 아이치 1구 || 이마보리 신자부로 || 입헌민정당
|-
| 아이치 3구 || 핫토리 히데아키 || 입헌민정당
|-
| 아이치 4구 || 오카모토 지쓰타로 || 입헌민정당
|-
| 아이치 5구 || 가토 로쿠조 || 입헌민정당
|-
| 미에 1구 || 오노 고이치로 || 입헌민정당
|-
| 미에 2구 || 우시바 세이지로 || 입헌민정당
|-
| 교토 1구 || 니시무라 긴자부로 || 입헌민정당
|-
| 교토 3구 || 쓰하라 다케시 || 입헌민정당
|-
| 교토 3구 || 무라카미 구니요시 || 입헌민정당
|-
| 오사카 1구 || 이시하라 젠자부로 || 입헌민정당
|-
| [[오사카부 제2구 (전전 중
7. 평가 및 영향
--
입헌정우회는 이 선거에서 301석이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는 여당 프리미엄과 더불어, 경쟁 상대인 입헌민정당이 선거 전 아다치 겐조 일파의 탈당으로 분열된 점, 이누카이 내각이 단행한 금 수출 금지 조치 이후 경기 회복 조짐, 그리고 만주 사변과 상하이 사변에서의 군사적 성공 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는 레코드나 토키영화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가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압승에도 불구하고, 선거 직후 나카하시 도쿠고로 내무대신의 병으로 인한 사임을 계기로 정우회 내부에 갈등이 불거졌고,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는 이를 수습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정권 장악력이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입헌민정당은 기존 의석에서 100석 이상 감소한 146석을 얻는 데 그치며 참패를 기록했고, 당세 약화를 막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 선거를 전후하여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일본 정당 정치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2월 9일에는 전 재무대신이자 민정당 소속이었던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암살되었고, 선거 직후인 3월 5일에는 미쓰이 재벌 총수 단 타쿠마가 암살당하는 혈맹단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정치적 테러는 당시 일본 사회의 극단적인 분위기와 함께 정당 정치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 1932년 총선거는 정당 간의 경쟁보다는 만주 사변과 같은 군사적 이슈와 사회적 혼란 속에서 치러졌으며, 이후 일본에서 정당 정치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군부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흐름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