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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나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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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나 1세는 1328년경에 태어나 1382년 살해된 나폴리 여왕이다. 그녀는 칼라브리아 공작 샤를과 발루아의 마리의 장녀로, 나폴리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다. 로베르 1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헝가리의 앤드루와 결혼했지만, 앤드루는 암살당하고 조반나는 타란토의 루이와 재혼했다. 1347년 헝가리의 루이 1세가 나폴리를 침공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돌아왔지만, 결국 두라초의 샤를에게 폐위되어 살해당했다. 그녀는 네 번 결혼했으며, 서방 교회 분열 시기에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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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나 1세
기본 정보
니콜로 디 토마소의 프레스코화 여왕 조반나 1세 (c. 1360)
니콜로 디 토마소가 그린 프레스코화 여왕 조반나 1세 (c. 1360)
칭호나폴리 여왕
프로방스 백작 및 포르칼키에 백작
통치 기간1343년 1월 20일 – 1381년 8월 25일
대관식1344년 8월 28일 (단독)
1352년 5월 27일 (루이지 1세와 함께)
선임자로베르토
계승자카를로 3세
섭정루이지 1세 (1352–1362)
섭정 유형공동 통치자
출생일1325년 12월
출생지나폴리, 나폴리 왕국
사망일1382년 7월 27일 (56세)
사망지무로 루카노, 나폴리 왕국
매장지산타 키아라 성당
왕가앙주-나폴리 가문
배우자안드레아 (1333년 결혼, 1345년 사망)
루이지 1세 (1347년 결혼, 1362년 사망)
자우메 4세 (1363년 결혼, 1375년 사망)
오토 (1376년 결혼)
자녀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마르텔로
카테리나 디 타란토
프랑수아즈 디 타란토
아버지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어머니마리아 디 발루아
기타 정보
이탈리아어Giovanna I

2. 생애

1343년, 조반나는 할아버지 로베르 1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즉위 직후, 육촌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에게 왕위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러요시 1세의 나폴리 원정으로 인해, 조반나는 1347년 나폴리에서 추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1352년에 복귀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조반나는 초기에는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지만, 이후 대립하게 되었다. 1381년, 우르바노 6세는 조반나를 나폴리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카를로 3세에게 왕위를 주는 결정을 내렸다.[27][28] 한편, 자식이 없던 조반나는 1382년에 발루아-앙주 가문의 루이 1세 드 앙주를 후계자로 결정했다.[27][29]

같은 해, 조반나는 무로 루카노에서 러요시 1세의 명을 받은 육촌 카를로 디 두라초(훗날의 카를로 3세)에 의해 암살되었다.[27] 카를로 3세는 조반나의 여동생 마리아 디 칼라브리아의 딸 마르게리타 디 두라초의 남편이기도 했다.

조반나는 4번 결혼했다.[30] 첫 번째 남편은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의 동생이자 육촌인 언드라시였으나, 1345년에 암살되었다(조반나가 암살에 가담했다는 설도 있다).[29] 언드라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를로 마르텔로는 요절했다.

1346년, 조반나는 아버지 카를로의 사촌이자 자신의 외사촌인 타란토 공 루이지 디 타란토와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1362년에 사별했다. 루이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 역시 요절했다.

1363년, 조반나는 마요르카 국왕 자우메 4세와 세 번째 결혼을 했지만, 1375년에 사별했고, 자식은 없었다.

1376년, 조반나는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과 마지막 결혼을 했지만, 역시 자식은 없었다.

1348년, 조반나는 교황클레멘스 6세에게 아비뇽을 매각했다.[30] 이후 아비뇽은 교황 궁전을 중심으로 국제 고딕 양식이 유행했으며, 프랑스 혁명으로 몰수될 때까지 교황령의 일부가 되었다.

2. 1. 어린 시절

칼라브리아 공작 샤를(나폴리 국왕 로베르 1세의 유일한 생존 아들)과 발루아의 마리(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누이)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였다.[1]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가 도나토 아치아이올리는 그녀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지만, 학자 낸시 골드스톤에 따르면 그녀는 부모가 그 도시로 여행하는 동안 태어났을 수도 있다고 한다.[1] 조반나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녀는 1326년 또는 1327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3] 그녀의 어머니가 4년의 결혼 생활 동안 4~5명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조반나는 1325년 12월[1] 또는 1328년 초에 태어났을 것이다.[3] 그녀의 형제자매 두 명이 일찍 사망했는데, 엘로이사, 루이즈 또는 마리아 (1325년 1/2월 출생, 1325년 12월 27일 사망)와 샤를 마르텔 (1327년 4월 13일 출생, 8일 후 사망[1])이 그들로, 조반나는 자신의 아버지 다음으로 나폴리 왕위 계승 서열 2위가 되었다.

조반나 1세와 그녀의 할아버지 로베르 1세 국왕


1328년 11월 9일, 칼라브리아 공작 샤를이 사망하면서 그의 아버지 로베르 1세는 왕위 계승 문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샤를의 사후에 태어난 아이도 1329년 5월 6일에 태어난 마리아였다.[1] 나폴리 법은 여성이 왕위를 상속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여왕의 개념은 흔하지 않았다.[2] 교황청과 로베르 1세의 할아버지 앙주의 샤를 1세 사이의 합의는 샤를 1세의 여성 후손이 왕위를 상속할 권리를 명시적으로 인정했지만, 여성 군주는 결혼하여 남편이 통치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4] 또한 나폴리 왕가는 프랑스의 카페 왕조의 분파였고, 프랑스는 최근에 여성을 왕위 계승에서 제외했다.[2]

로베르는 자신의 후손에게 계승권을 확보하기로 결심하고 1330년 12월 4일 나폴리의 카스텔 누오보에서 열린 공개 행사에서 조반나와 마리아를 자신의 상속자로 지명했다. 1331년 3월 3일에는 교황이 필리포가 조반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대리인을 나폴리로 보내도록 설득하기도 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샤를 1세는 교황에게 로베르에게 그의 아버지 샤를 마르텔이 ''레그노''(살레르노 공국과 몬테 산트 안젤로의 명예에서 보유했던) 두 개의 봉토를 그와 그의 아들에게 돌려줄 것을 설득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또한 결혼 동맹을 제시하며 조반나의 손을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요구했다. 교황은 이 계획을 지지하고 로베르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계속 촉구했다. 교황은 1331년 6월 30일에 칙서를 발표하여 조반나와 그녀의 여동생이 샤를 1세의 아들들과 결혼하도록 명령했다. 처음에는 샤를 1세의 장남인 루이가 조반나의 남편으로 지명되었다. 그의 남동생 칼라브리아 공작 앤드루는 그의 조기 사망 시 루이의 대타였다. 협상 중 한 시점에서 샤를 1세는 결정을 변경하고 앤드루를 조반나와 결혼하도록 임명했다.

조반나와 마리아의 계모인 마요르카의 산시아 여왕이 그녀의 어머니 발루아의 마리로부터 받은 선물인 조반나와 마리아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그린 미니어처.


1332년 바리로의 순례 중에 마리 드 발루아가 사망한 후, 로베르의 두 번째 아내 (조반나의 계모)인 마요르카의 산시아는 딸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영적 프란체스코회의 열렬한 후원자인 산시아 여왕은 클라리스 수녀처럼 살았지만, 교황은 로베르 국왕과의 혼인 무효를 거부했다. 조반나와 마리아의 유모인 카타니아의 필리파는 그들의 교육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4] 고아가 된 공주들에게 일종의 두 번째 어머니가 되었다.[4]

할아버지의 세련된 궁정에서 자란 조반나는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앙주 문서에서 그녀의 교사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매우 정확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도 티투스 리비우스, 페루자의 파올로, 성 그레고리 및 마르코 폴로의 저작이 포함된 왕실 도서관에서 책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및 프로방스어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헝가리의 샤를 1세는 1333년 여름에 조반나와 앤드루의 결혼에 대해 그의 삼촌과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직접 나폴리에 왔다. 두 국왕은 추가 협상 끝에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에 따르면 앤드루와 조반나는 약혼했지만, 로베르와 샤를 1세는 또한 앤드루가 조반나보다 오래 살면 마리아와 결혼하고, 앤드루가 조반나보다 먼저 죽으면 샤를 1세의 생존 아들(루이 또는 스테판)이 조반나와 결혼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결혼 계약은 9월 26일에 성대하게 서명되었다. 다음 날, 로베르는 조반나와 앤드루에게 칼라브리아 공작령과 살레르노 공국을 수여했다. 교황은 1333년 11월에 결혼에 필요한 면제를 부여했다. 결혼은 수년 동안 완성되지 않았는데, 앤드루의 미성숙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앤드루는 나폴리에서 자랐지만, 그와 그의 헝가리인 측근들은 외국인으로 여겨졌다. 그의 사촌들 (타란토의 필리포와 두라초의 조반니의 아들들)과 심지어 조반나조차 종종 그를 놀렸다.

2. 2. 즉위와 통치

로베르 1세는 1343년 1월 20일, 34년간 나폴리 왕으로 재위한 후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이틀 후, 안드레아는 기사 작위를 받았고, 로베르 1세의 유언에 따라 조반나 1세와 결혼했다.[2] 이후, 이들은 중요한 국가 및 종교 행사에서만 만났다.[3] 평소에는 다른 교회를 다니고, 다른 장소를 방문했으며, 조반나 1세는 남편이 허락 없이는 침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3] 15세의 안드레아는 자신의 금고가 없었고, 조반나 1세의 측근들이 그의 지출을 관리했다.[3]

로베르 1세 사후, ''레그노''(Regno, 왕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페트라르카는 조반나 1세와 안드레아를 "수많은 늑대들의 보살핌을 받는 두 마리의 양, 그리고 나는 왕이 없는 왕국을 본다"고 묘사했다.[4] 대부분의 정치 세력은 섭정 위원회 설립에 반대했다.[5] 조반나 1세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남편에게 왕의 칭호를 부여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는 헝가리 앙주 가문의 지지를 확보하여 자신의 미성년 기간을 단축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5] 교황은 섭정 위원회 설립을 자신의 주권 침해로 간주했지만, 나폴리의 행정을 통제하고 싶어했다.[5] 그는 조반나 1세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위원회에 직접 편지를 보내는 경우는 드물었다.[5]

아그네스 드 페리고르는 조반나 1세의 여동생 마리아와 자신의 장남 두라초의 카를로의 결혼을 원했다.[6] 과부 왕비 산차와 조반나 1세는 이 계획을 지지했지만, 발루아의 카트린이 반대할 것을 알고 있었다.[7] 아그네스의 형제 엘리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아비뇽 교황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추기경이었다.[8] 그는 클레멘스 6세에게 1343년 2월 26일 교황 칙서를 발급하도록 설득하여 두라초의 카를로가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8] 이 칙서를 바탕으로, 마리아는 3월 26일 카스텔 누오보에서 조반나 1세, 산차 및 섭정 위원회 구성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두라초의 카를로와 약혼했다.[9] 이 약혼에 발루아의 카트린은 격분했고,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와 교황에게 결혼 무효화를 요구했다.[9] 약혼 이틀 후, 두라초의 카를로는 마리아를 자신의 성으로 납치하여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은 곧 성사되었다.[10]

발루아의 카트린의 둘째 아들 타란토의 루이는 두라초의 카를로의 영지를 침공했고, 두라초의 카를로는 영토 방어를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10] 여동생의 비밀 결혼에 조반나 1세는 격분하여 교황에게 결혼 무효화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10]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이를 거부하고, 탈레랑페리고르 추기경에게 나폴리로 사절을 보내 중재하도록 명령했다.[11] 추기경의 사절은 1343년 7월 14일 당사자들에게 합의서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12] 카를로와 마리아의 결혼은 합법으로 인정되었지만, 발루아의 카트린과 그녀의 아들들은 왕실 금고에서 보상을 받았다.[13] 조반나 1세는 여동생과 두라초 가문에 대한 신뢰를 잃고, 필리파 디 카타니아의 아들 로베르토 데 카반니와 사촌 아르투아의 샤를 등 가장 신뢰하는 측근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13]

1343년, 조반나 1세는 할아버지 로베르토의 뒤를 이어 나폴리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육촌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에게 왕위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고 (러요시 1세의 나폴리 원정), 1347년 나폴리에서 추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1352년 복귀했다.

2. 3. 헝가리의 침공과 망명

폴란드의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장남인 헝가리의 루이 1세는 아비뇽으로 사절을 보내 교황에게 앤드루의 대관식을 명령해 줄 것을 촉구했다.[1] 그녀는 또한 앤드루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레그노(Regno)"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1] 헝가리를 떠나기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헝가리 재무부에서 금 21,000마르크와 은 72,000마르크를 징수했는데, 이는 그녀가 교황청과 나폴리 귀족들의 지지를 사기 위해 많은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 그녀와 그녀의 수행원은 1343년 여름에 만프레도니아에 상륙했다.[2]

시어머니와 교황청 사이의 협상은 조반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1343년 12월 1일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헝가리 사절과 나폴리 문제에 대한 논의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3] 교황은 1344년 1월 19일 편지에서 앤드루를 "시칠리아의 저명한 왕"이라고 칭하며 그의 대관식을 촉구했지만, 곧 조반나의 통치에 대한 세습적 권리를 강조했다.[3] 5일 후, 조반나는 교황에게 그의 사절을 철회하고 그녀가 단독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촉구했다.[4] 교황은 곧 응답하여 조반나가 남편과 함께 공동으로 대관식을 치른 후에도 "마치 남자와 같다"라고 선언했다.[4]

1345년 9월, 앤드루는 귀족 음모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5] 조반나는 교황청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게도 살해 소식을 알렸고, 편지에서 혐오감을 표현했지만, 그녀의 측근들이 가장 의심을 받았다. 1345년 12월 25일, 그녀는 앤드루의 사후 자녀인 샤를 마르텔을 낳았다.

조반나가 타란토 사촌 중 한 명과 결혼하고, 앤드루의 동생 슬라보니아 공작 스테판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헝가리인들은 그녀가 앤드루를 살해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타란토의 루이는 숙련된 전사였으며, 조반나 1세의 고모 발루아의 카트린(1303–1346)의 궁정에서 자란 그는 평생의 경험을 통해 나폴리 정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조반나 1세가 그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그의 형제 타란토 공자 로베르는 그의 사촌(이자 이전의 경쟁자) 두라초의 샤를과 함께 그들을 대항했다. 조반나 1세의 측근과 하인 중 일부는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했는데, 여기에는 그녀의 시칠리아 출신 보모 카타니아의 필리파와 그녀의 가족이 포함되었다. 루이는 그의 형제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가 나폴리에 도착하자 헝가리인들이 침략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조반나 1세는 시칠리아 왕국과 조약을 맺어 그들이 동시에 침략하는 것을 막았다. 그녀는 1347년 8월 22일, 근친혼이라는 이유로 필요한 교황의 면제 없이 루이와 결혼했다.

헝가리의 루이 1세는 앤드루의 형으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나폴리 왕국을 합병하려 했다. 그는 군사 원정을 시작했고, 첫 번째 군대는 1347년 5월 10일 라퀼라에 진입했다.[6]

1348년 1월 11일, 헝가리군은 나폴리 왕국을 침략하기 위해 베네벤토에 있었다.[7] 이 위협에 직면하여, 누오보 성에 은퇴하고 마르세유의 충성을 믿었던 조반나 1세는 루이의 복수로부터 탈출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지 않고, 1348년 1월 15일 마르세유 시민 자크 드 고베르의 소유인 두 갤리선에 탑승하여 프로방스로 향했고[5], 앤리코 카라치올로를 데려갔다. 타란토의 루이는 다음 날 나폴리에 도착했고, 다른 갤리선으로 탈출했다.[8]

나폴리 시를 쉽게 점령한 후, 루이 1세는 조반나 1세의 사촌이자 매제인 두라초의 샤를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1348년 1월 23일 루이의 동생 앤드루가 살해된 같은 장소에서 참수되었다. 조반나 1세와 앤드루의 아들인 샤를 마르텔(두라초의 샤를의 장녀와 약혼)은 어머니에게 남겨졌고, 그의 삼촌에 의해 헝가리 왕국비셰그라드로 보내졌다.[9][10][11] 그는 1348년 5월 10일 이후 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브레간송 요새에 잠시 들른 후, 조반나 1세는 1348년 1월 20일 마르세유에 도착하여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12]

조반나 1세는 3월 15일 아비뇽에 도착하여 교황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 타란토의 루이는 에그모르트에서 그녀와 합류했고, 부부는 클레멘스 6세의 환영을 받았다. 조반나 1세의 방문은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타란토의 루이와의 결혼에 대한 면제를 얻고, 앤드루 살해 혐의에 대한 사면 또는 면제를 받고, 자신의 왕국을 재정복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교황은 부부에게 면제를 허가하고, 앤드루 살해 연루 혐의에 대한 조사를 위해 위원회를 임명했으며, 아비뇽 시를 8만 플로린에 매입하여 프로방스와 사실상 분리되었다.[13][14] 결국 조반나 1세는 교황에 의해 범죄 혐의에서 벗어났다.[13] 6월 말 아비뇽에서 머무는 동안, 조반나 1세는 타란토의 루이와의 결혼을 통해 두 번째 아이이자 첫 번째 아이인 딸 카테리나를 낳았다.

흑사병이 발생한 후 루이 1세가 나폴리를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조반나 1세는 남편과 갓 태어난 딸과 함께 7월 21일 아비뇽을 떠나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마르세유에 머물렀고, 7월 30일 사나리쉬르메르로 이동한 다음 7월 31일 브레간송 요새로 갔고, 마침내 1348년 8월 17일 나폴리에 도착했다.[15]

2. 4. 내치와 외교

폴란드의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장남인 헝가리의 러요시 1세는 아비뇽으로 사절을 보내 교황에게 앤드루의 대관식을 명령해 줄 것을 촉구했다.[1] 그녀는 또한 앤드루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레그노(Regno)"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2] 헝가리를 떠나기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헝가리 재무부에서 금 21,000마르크와 은 72,000마르크를 징수했는데, 이는 그녀가 교황청과 나폴리 귀족들의 지지를 사기 위해 많은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 그녀와 그녀의 수행원은 1343년 여름에 만프레도니아에 상륙했다.[1]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녀의 수행원은 1343년 7월 25일에 나폴리에 입성했다.[3] 조반나는 남편의 대관식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지만, 시어머니는 곧 그녀가 지연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4] 10월에 조반니 콜론나 추기경의 사절로 나폴리를 방문한 페트라르카는 로베르토 왕의 죽음 이후 왕국이 무정부 상태로 변했음을 경험했다.[5][6] 그는 밤에는 횡포한 귀족들의 무리가 백성을 공포에 떨게 하고, 조반나와 앤드루가 참석한 가운데 검투사 경기가 정기적으로 열렸다고 기록했다.[5]

페트라르카는 1341년에 여러 범죄로 투옥된 콜론나의 친척인 피피니 형제들의 석방을 원했다.[7] 로마에 머물고 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향력 있는 추기경과 나폴리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이 아들의 입지를 강화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8] 나폴리에서 온 페트라르카의 보고는 교황에게 섭정 회의가 왕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켰다.[6] 조반나가 아직 미성년자임을 강조하면서 교황은 아메리 드 샬뤼 추기경을 교황 사절로 임명하고 1343년 11월 28일 칙서에서 "레그노"의 통치를 그에게 맡겼다.[9][6]

시어머니와 교황청 사이의 협상은 조반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1343년 12월 1일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헝가리 사절과 나폴리 문제에 대한 논의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10] 교황은 1344년 1월 19일 편지에서 앤드루를 "시칠리아의 저명한 왕"이라고 칭하며 그의 대관식을 촉구했지만, 곧 조반나의 통치에 대한 세습적 권리를 강조했다.[11] 5일 후, 조반나는 교황에게 그의 사절을 철회하고 그녀가 단독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촉구했다.[12] 교황은 곧 응답하여 조반나가 남편과 함께 공동으로 대관식을 치른 후에도 "마치 남자와 같다"라고 선언했다.[13]

조반나는 왕실 영지를 그녀가 가장 신뢰하는 지지자들에게 대규모로 분배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그녀의 연인으로 소문난 로베르토 데' 카바니가 있었다.[14] 조반나의 기증은 교황을 격분시켰고, 교황은 앤드루의 국가 행정에서의 역할을 강화할 준비가 되었다는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14] 샬뤼는 1344년 5월 20일 나폴리에 도착했다.[15] 조반나는 개인적인 의식에서 교황에게만 충성을 맹세하고 싶어했지만, 교황 사절은 그녀의 요구에 저항했다.[16] 조반나는 공개적인 의식에서 남편과 함께 복종의 맹세를 해야 했다.[16] 1344년 8월 28일, 교황 사절은 조반나를 나폴리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그녀는 왕국을 통치할 교황 사절의 권리를 인정해야 했다.[17]

탈레랑-페리고르 추기경과 조반나의 사절인 두라초의 루이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그의 사절을 해임해 줄 것을 촉구했으며, 그는 또한 사임할 의사가 있었다.[18] 필리프 6세가 사절에게 개입한 후, 교황은 그를 소환하기로 결정하고 1344년 12월 18세의 조반나가 사절의 후원 아래 성숙했다고 선언했다.[18][19] 1345년 2월, 교황은 조반나가 가장 신뢰하는 고문들에게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했지만,[20] 그는 또한 샬뤼를 샤르트르 주교인 기욤 라미로 교체했다.[21] 교황을 달래기 위해 조반나는 앤드루를 달래기로 결정했고, 그들의 부부 관계는 회복되었다.[22]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임신했다.[22]

한편 조반나는 프로방스 원수인 아굴의 레포르스에게 피에몬테를 침공하라고 지시했다.[23] 키에리의 시민들과 사보이-아카이아의 자코모가 프로방스 군대에 합류했다.[23] 그들은 봄에 알바를 재점령했지만, 몬페라토의 조반니 2세와 비스콘티는 키에리 근처에 군대를 모아 1345년 4월 23일 가메나리오 전투에서 아굴의 군대를 격파했다.[23] 아굴은 전투에서 사망했고, 키에리는 승자들에게 항복했다.[23]

조반나와 교황의 관계는 그녀가 다시 왕실 영지를 소외시키고 교황의 제안을 무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긴장되었다.[19] 1345년 6월 10일, 클레멘스 6세는 그녀에게 앤드루의 대관식을 방해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촉구했지만, 그녀는 남편을 국가 행정에서 배제하기로 결심했다.[19]

교황의 입장이 바뀐 소식을 들은 귀족 음모자들은 앤드루의 대관식을 막기로 결심했다. 1345년 아베르사에서 사냥 여행을 하던 중 앤드루는 9월 18일부터 19일 밤중에 방을 나섰고, 음모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배신적인 하인이 뒤에서 문을 잠갔고, 조반나가 자신의 침실에 있는 가운데 끔찍한 싸움이 벌어졌고, 앤드루는 격렬하게 자신을 방어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결국 제압당해 밧줄로 목이 졸려 죽었고, 그의 성기에 묶인 밧줄로 창밖으로 던져졌다. 앤드루의 헝가리인 간호사인 이졸데는 그의 비명을 듣고, 자신의 비명을 지르며 살인자들을 쫓아냈다.

칼 브리울로프가 그린 칼라브리아 공작 앤드루의 살해.


여왕이 암살에 실제로 연루되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살인의 배후 조종자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를 들어 에밀-기욤 레오나르에게 조반나의 연루는 입증되지 않았다.[24]

1345년 12월 25일, 조반나는 앤드루의 사후 자녀인 샤를 마르텔을 낳았다. 이 아기는 1346년 12월 11일에 나폴리 왕국의 상속자로서 칼라브리아 공작이자 살레르노 공으로 선포되었다.

요안나 1세가 왕위에 오르자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영주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그녀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1344년, 몬페라토 후작 요한 2세는 알레산드리아, 아스티, 토르토나, 브라, 알바 등의 도시를 정복하는 공격을 이끌었다. 요안나 1세는 이를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원수 레포르세 다굴트를 보냈다. 그는 1345년 4월 23일 가메나리오 전투에서 침략자들과 교전했지만, 참패하여 사망했다.[23]

이후 몬페라토는 요안나 1세를 지지했던 피에몬테의 제임스의 영토 안에 있는 키에리를 점령했다. 제임스는 1347년 그의 사촌이자 영주인 사보이 백작 아메데오 6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은 함께 그해 7월까지 공격자들을 격퇴했다. 요한은 살루초 후작 토마스 2세와 비엔누아의 움베르 2세를 자신의 동맹에 추가하여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 그들은 함께 요안나 1세의 이 지역 영토 거의 전부를 점령했다.[25]

요안나 1세가 타란토 사촌 중 한 명과 결혼하고, 앤드루의 동생 슬라보니아 공작 스테판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헝가리인들은 그녀가 앤드루를 살해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타란토의 루이는 숙련된 전사였으며, 요안나 1세의 고모 발루아의 카트린(1303–1346)의 궁정에서 자란 그는 평생의 경험을 통해 나폴리 정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요안나 1세가 그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그의 형제 타란토 공자 로베르는 그의 사촌(이자 이전의 경쟁자) 두라초의 샤를과 함께 그들을 대항했다. 요안나 1세의 측근과 하인 중 일부는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했는데, 여기에는 그녀의 시칠리아 출신 보모 카타니아의 필리파와 그녀의 가족이 포함되었다. 루이는 그의 형제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가 나폴리에 도착하자 헝가리인들이 침략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요안나 1세는 시칠리아 왕국과 조약을 맺어 그들이 동시에 침략하는 것을 막았다. 그녀는 1347년 8월 22일, 근친혼이라는 이유로 필요한 교황의 면제 없이 루이와 결혼했다.

나폴리의 누오보 성.


헝가리의 루이 1세(대왕), 앤드루의 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나폴리 왕국을 합병하려 했다. 그는 군사 원정을 시작했고, 첫 번째 군대는 1347년 5월 10일 라퀼라에 진입했다.[26]

1348년 1월 11일, 헝가리군은 나폴리 왕국을 침략하기 위해 베네벤토에 있었다.[27] 이 위협에 직면하여, 누오보 성에 은퇴하고 마르세유의 충성을 믿었던 요안나 1세는 루이의 복수로부터 탈출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지 않고, 1348년 1월 15일 마르세유 시민 자크 드 고베르의 소유인 두 척의 갤리선에 탑승하여 프로방스로 향했고[28], 앤리코 카라치올로를 데려갔다. 타란토의 루이는 다음 날 나폴리에 도착했고, 다른 갤리선으로 탈출했다.[29]

나폴리 시를 쉽게 점령한 후, 루이 1세는 요안나 1세의 사촌이자 매제인 두라초의 샤를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1348년 1월 23일 루이의 동생 앤드루가 살해된 같은 장소에서 참수되었다. 요안나 1세와 앤드루의 아들인 샤를 마르텔(두라초의 샤를의 장녀와 약혼)은 어머니에게 남겨졌고, 그의 삼촌에 의해 헝가리 왕국비셰그라드로 보내졌다.[30][31] 그는 1348년 5월 10일 이후 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요안나 1세는 1348년 3월 15일 아비뇽에 도착하여 교황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 타란토의 루이는 에그모르트에서 그녀와 합류했고, 부부는 클레멘스 6세의 환영을 받았다. 요안나 1세의 방문은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타란토의 루이와의 결혼에 대한 면제를 얻고, 앤드루 살해 혐의에 대한 사면 또는 면제를 받고, 자신의 왕국을 재정복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교황은 부부에게 면제를 허가하고, 앤드루 살해 연루 혐의에 대한 조사를 위해 위원회를 임명했으며, 아비뇽 시를 8만 플로린에 매입하여 프로방스와 사실상 분리되었다. 결국 요안나 1세는 교황에 의해 범죄 혐의에서 벗어났다. 1348년 6월 말 아비뇽에서 머무는 동안, 요안나 1세는 타란토의 루이와의 결혼을 통해 두 번째 아이이자 첫 번째 아이인 딸 카테리나를 낳았다.

흑사병이 발생한 후 루이 1세가 나폴리를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요안나 1세는 남편과 갓 태어난 딸과 함께 1348년 7월 21일 아비뇽을 떠나 1348년 8월 17일 나폴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도착 한 달 후인 9월 20일, 이전 약속을 깨고 레이몽 다굴트를 원수직에서 해임하고 그 자리에 나폴리인 조반니 바릴리를 임명했다. 대중의 불만으로 요안나 1세는 다굴트를 그의 직책에 복귀시켜야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헝가리인들은 조반니 보카치오를 포함한 나폴리 사람들에게 야만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는 루이 1세를 "광견병"이고 "뱀보다 더 악하다"라고 묘사했다). 그래서 여왕과 그녀의 남편은 귀국 후 쉽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1349년과 1362년 사이에 주조된 "루이 왕과 조안나 여왕"의 프로방스 동전 (L· REX- E· I· REG).


1349년 초부터 왕국에 대한 모든 문서는 남편과 아내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으며, 루이는 군사 요새를 확실하게 통제했다. 그들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발행된 동전에서 루이의 이름은 항상 조안나의 이름보다 먼저 나왔다. 그는 1352년까지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왕이자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나폴리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행동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를 군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루이는 또 다른 헝가리 공격으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아내로부터 완전한 왕권을 빼앗았다. 그는 그녀의 지지자들을 궁정에서 숙청했고, 1349년 4월에 간통을 했다고 고발하고 처형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그녀가 가장 아끼던 엔리코 카라치올로를 처벌했다. 두 달 후인 1349년 6월 8일, 조안나와 루이의 딸인 카타리나가 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350년 또 다른 헝가리 공세로 인해 나폴리 성벽까지 이르자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생토메르 주교 레몽 사케를 휴고 드 보가 지휘하는 함대와 함께 사절로 파견했다. 이후 타란토의 루이는 조안나의 독립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 대왕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1351년 10월 조안나는 루이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이인 프랑수아즈를 낳았다. 1352년 3월 23일, 루이는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아내의 모든 영토에서 공동 통치자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1352년 5월 27일, 루이는 나폴리의 타란토 호텔에서 브라가 대주교에 의해 그녀와 함께 대관식을 올렸다. 며칠 후인 6월 2일, 그 당시 부부의 유일한 생존 자녀였던 프랑수아즈는 8개월의 나이로 사망했다.

1356년 루이와 조안나는 시칠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 조직했다. 그들은 니콜로 아치아이올리의 승리 후 1356년 12월 24일 공식적으로 메시나에 입성했지만, 아치레알레에서 카탈루냐인에 의해 심각한 해군 패배 (1357년 6월 29일)를 겪은 후 다시 떠나야 했다.

동시에 용병 아르노 드 세르볼레 (''수석 사제''라고 불림)의 군대는 1357년 7월 13일 뒤랑스를 건너 프로방스를 약탈했다. 타란토의 필리프 2세, 루이의 형제 (그리고 1355년 4월부터 조안나의 여동생 마리아의 세 번째 남편)는 프로방스를 황폐화시킨 세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총독으로 프로방스에 파견되었다. 그는 아르마냐크 백작의 군대의 지원을 샀는데, 이는 또한 지역 주민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마침내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지불을 통해 이 단체들의 해산을 얻었다.

수영을 하다가 감기에 걸린 타란토의 루이는 병에 걸렸다. 그의 상태는 한 달 동안 악화되었고, 그는 1362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마요르카의 자코보 4세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인 타란토의 루이의 죽음은 마침내 조반나에게 거부당했던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주었다. 그 후 3년 동안 여왕은 그녀를 인기 있게 만드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1363년 3월 20일에 레몽 데 보에게 사면을 허가하고, 프로방스의 원수로서 로제 데 산 세베리노를 푸케 다굴로 교체했으며, 내부 혼란을 막기 위한 다양한 칙령을 공포했다.

1362년 12월 14일, 조반나는 대리인을 통해 열 살 연하인 마요르카의 명목상 왕이자 아카이아 공작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결혼식은 5개월 후인 1363년 5월 카스텔 누오보에서 직접 거행되었다. 불행히도 이 결혼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녀의 새 남편은 삼촌인 아라곤의 페드로 4세에게 거의 14년 동안 쇠창살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 경험으로 인해 정신이 이상해졌다. 그의 좋지 않은 정신 상태 외에도, 자코보 4세가 정부에 관여하려는 노력은 부부 사이의 또 다른 갈등의 원인이었지만, 그는 결혼 계약에서 나폴리의 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도록 배제되었다. 결혼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365년 1월 조반나는 자코보 4세의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불행히도 6월에 유산을 겪었다. 이는 교황 우르바노 5세가 1365년 7월 19일에 그녀에게 보낸 조의 편지에 언급되어 있다. 그녀는 다시는 임신하지 않았다.

나폴리의 왕이 될 희망이 없었던 자코보 4세는 1366년 1월 말 스페인으로 나폴리를 떠나 마요르카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에게 붙잡혀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넘겨졌고, 그는 그를 몽펠리에에 억류했다. 그는 1370년에 조반나에 의해 몸값을 치르고 잠시 그녀에게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영원히 다시 떠났다. 그는 1375년에 루시용세르다냐를 탈환하려다 실패했고, 소리아에서 질병이나 독살로 사망했다.

아를 왕국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아비뇽을 건너 1365년 6월 4일 생 트로핌 교회에서 아를의 왕으로 대관했지만, 프로방스에 대한 조반나의 권리를 보장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 프랑스의 샤를 5세의 형제이자 랑그도크의 중위는 프로방스에 대한 주장을 펼쳤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군대의 도움으로 그는 공격을 감행했다. 아비뇽은 몸값을 치렀고, 아를과 타라스콩은 포위되었지만, 전자는 점령되었지만, 후자는 19일간의 실패한 포위 공격 이후 프로방스 군대에 의해 구원받았다. 원수 레몽 2세 다굴의 군대는 세레스트에서 패배했다. 교황 우르바노 5세와 샤를 5세의 개입, 그리고 1368년 9월 1일에 뒤 게클랭에 대한 파문으로 인해 후자는 후퇴했고, 1369년 4월 13일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어서 1370년 1월 2일에 휴전이 서명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 이후, 조반나는 교황 우르바노 5세와 그레고리오 11세 치하의 교황청과의 좋은 관계 덕분에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겪었다. 사브란의 엘제아르는 1371년에 시성되었다. 스웨덴의 브리짓은 1372년에 나폴리를 방문했다.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를 통해, 앙주 공작 루이 1세와의 최종 평화 조약이 1371년 4월 11일에 체결되었고, 그는 타라스콩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 또한, 여왕은 콘도티에로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의 성공 덕분에 피에몬트에서 자신의 영토를 회복했고, 나중에 그와 결혼했다.

빌뇌브 조약 (1372)에 의해, 조반나는 1282년에 90년 전에 겪었던 시칠리아의 상실을 공식적으로 영구적인 것으로 인정했다. 그 후 조반나는 자신의 왕국을 운영하는 데 전적으로 몰두했으며, 정부의 모든 측면을 즐겼다. 그녀는 공정하고 신중한 통치자였지만, 사소한 법이나 칙령이라도 그녀의 개인적인 승인과 봉인 없이는 결코 시행되지 않았다. 조반나의 통치는 또한 지역 사업에 대한 그녀의 지원과 보호, 새로운 산업의 창출, 그리고 통화를 평가절하하지 않은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범죄는 크게 줄었고 그녀는 광대한 왕국 내에서 평화를 열렬히 증진시켰다.

2. 5. 서방 교회 분열과 최후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 타란토의 루이가 사망하자, 조반나는 권력을 되찾았다. 여왕은 레몽 데 보를 사면하고, 로제 데 산 세베리노를 프로방스 원수로 임명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

1362년, 조반나는 마요르카의 명목상 왕과 세 번째 결혼을 했으나, 정신 이상 증세를 가진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365년 임신했으나 유산했고, 교황 우르바노 5세가 조의를 표했다. 자코보 4세는 나폴리를 떠났다가 1370년 돌아왔으나, 곧 다시 떠나 1375년 사망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아를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1365년 아를의 왕으로 즉위했으나, 조반나의 프로방스에 대한 권리는 보장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는 프로방스를 공격했으나, 교황과 프랑스 왕의 중재로 평화 조약과 휴전이 체결되었다. 이후 조반나는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브란의 엘제아르[15]가 시성되고 스웨덴의 브리짓이 나폴리를 방문하는 등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1371년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최종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콘도티에로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 덕분에 피에몬트 영토를 회복했다.

빌뇌브 조약 (1372)으로 조반나는 시칠리아 왕국 상실을 공식 인정하고, 내정에 전념하여 공정하고 신중한 통치를 펼쳤다. 범죄를 줄이고 평화를 증진했으며, 지역 사업과 새로운 산업을 지원하고 통화 가치를 유지했다.

조반나는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스웨덴의 브리짓과의 우정을 통해 깊은 영성을 가졌지만,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로도 유명했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조반나를 가문, 권력, 성격 면에서 뛰어난 여성으로 묘사했다.

조반나는 자녀가 없었기에, 조카딸 마르게리타 디 두라초와 사촌 두라초의 샤를의 결혼을 통해 계승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마르게리타의 계부 타란토 공 필리포 2세의 반대에 부딪혔고, 조반나는 필리포 2세의 재산을 몰수했다.

조반나는 두라초의 샤를의 지위를 훼손하고자 1375년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 공작 오토와 네 번째 결혼 계약을 맺고, 1376년 결혼식을 올렸다. 샤를은 이에 불만을 품고 헝가리의 루이 대왕에게 접근했다.

카스텔 델로보.


''토레 노르만노-스베바'', 노체라 인페리오레의 카스텔로 델 파르코.


서방 교회 분열 시기에, 조반나는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으나,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조반나의 적들을 지원했다. 조반나는 클레멘스 7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앙주의 루이 1세를 상속자로 입양하여 두라초의 샤를을 대체했다.

두라초의 샤를은 1380년 나폴리를 침공했고, 조반나는 남편 오토에게 병력을 맡겼으나 샤를의 군대를 막지 못했다. 1381년 샤를은 나폴리에 입성하여 조반나를 포위했고, 조반나는 항복 후 카스텔 델로보를 거쳐 노체라 인페리오레의 카스텔로 델 파르코로 이송되었다.

시에나의 카테리나는 조반나를 악마에게 잘못 인도된 통치자로 여겼고,[16] 조반나에게 아비뇽 교황 지지로 세속적 지위를 잃었다고 말했다.[17]

앙주의 루이 1세는 조반나를 구출하려 했으나, 조반나는 무로 루카노 성으로 옮겨진 후 1382년 7월 27일 56세의 나이로 살해당했다.[2]

카를로는 조반나의 자연사를 주장했지만, 다른 문헌들은 그녀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한다. 조반나의 살해 방식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존재하며, 헝가리 군인들에 의해 목 졸려 살해당했거나 깃털 매트리스 사이에서 질식사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반나의 시신은 나폴리로 옮겨져 공개되었으나, 파문당했기에 교회에 묻히지 못하고 우물에 던져졌다. 나폴리 왕국은 왕위 계승 전쟁에 휩싸였고, 앙주의 루이 1세는 프로방스와 포르칼퀴에 백작령을 유지했다.

3. 유산


  • 조반니 보카치오는 자신의 전기 시리즈인 ''유명한 여성들''(De mulieribus claris)에서 조반나 1세의 생애를 다뤘다. 보카치오는 조반나가 고귀한 혈통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그녀의 혈통이 "고대인들이 주피터라고 말한 트로이의 창시자인 다르다누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21] 그는 조반나가 할아버지로부터 왕국을 정당하게 상속받았다고 언급하며, 그녀가 나폴리의 합법적인 통치자임을 분명히 했다.[21] 또한 조반나가 통치했던 모든 지역과 지방을 요약하면서 나폴리가 훌륭한 귀족, 막대한 부를 가진 도시이지만, "조반나의 정신은 그것을 통치할 만하다"고 강조했다.[21] 보카치오는 조반나가 "나폴리를 점령했던 악인들을 용감하게 공격하고 몰아냈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옹호했다.[21]
  • 알렉상드르 뒤마 (아버지)는 8권짜리 시리즈 ''유명한 범죄'' (1839-40)의 일부인 로맨스 소설 ''나폴리의 조앤''을 썼다.[22]
  • 앨런 새비지의 소설 ''밤의 여왕''에서도 그녀의 삶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가 등장한다.[23]
  • 라슬로 파소트는 그녀의 삶에 대한 소설 ''나폴리의 조안나''(Napolyi Johanna, 1968)를 썼다.[24]
  • 마르셀 브리옹은 ''라 렌느 잔''(조반나 여왕)을 썼다.(1936년, 1944년 재출간)[25]
  • 노벨 문학상 수상자 프레데릭 미스트랄은 1890년에 그녀가 나폴리를 떠나 프로방스 영지로 가는 여정을 서술한 드라마 ''라 레이노 야노''를 썼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성들'' 사본에 실린 조반나 1세 여왕의 미니어처.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조

[1] 백과사전 Giovanna I d'Angiò, regina di Sicilia {{!}}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 volume 55 https://www.treccani[...] Treccani 2020-10-05
[2] 백과사전 La mort de Jeanne I, reine de Jérusalem et de Sicile, en 1382 http://www.persee.fr[...] 2023-03-20
[3] 웹사이트 GLI ANGIOINI — Dinastia di Angiò http://www.genmareno[...] www.genmarenostrum.com 2020-10-07
[4] 웹사이트 FILIPPA da Catania https://www.treccani[...] www.treccani.it 2022-02-06
[5] 간행물 L'ère des troubles : la reine Jeanne (1343–1382), établissement de la seconde maison d'Anjou : Louis Ier (1382–1384) Archives départementales des Bouches-du-Rhône 1924
[6] 서적 The Realm of St Stephen: A History of Medieval Hungary, 895–1526 I.B. Tauris Publishers 2001
[7] 서적 A középkori magyar állam virágzása és bukása, 1301–1526 [The Heyday and Fall of the Medieval Hungarian State, 1301–1526] Akadémiai Kiadó 1981
[8] 서적 The Lady Queen: The Notorious Reign of Joanna I, Queen of Naples, Jerusalem, and Sicily Walker&Company 2009
[9] 간행물 Marseille et la reine Jeanne Désiris 2009
[10] 서적 The Cronaca Di Partenope: An Introduction to and Critical Edition of the First Vernacular History of Naples (c. 1350) 2005
[11] 서적 Medieval European Coinage: Volume 14, South Italy, Sicily, Sardinia: With a Catalogue of the Coins in the Fitzwilliam Museum, Cambridge, Volume 14, Part 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12]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6, C.1300-c.14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13] 서적 The Knights of the Crown: The Monarchical Orders of Knighthood in Later Medieval Europe, 1325–1520 Boydell Press 2000
[14] 서적 Tarascon cité du Roi René Tarascon 1977
[15] 문서 He was a tutor and later castellan of Charles, Duke of Calabria, and ambassador to the King of France in 1323 to obtain the hand of Marie of Valois in marriage for Charles.
[16] 웹사이트 Letters of Catherine Benincasa http://www.gutenberg[...] 2014-10-31
[17] 웹사이트 Letters of Catherine Benincasa http://www.gutenberg[...] 2014-10-31
[18] 문서 'Chronicon Siculum incerti authoris ab anno m 340 ad annum 1396: in forma diarij ex inedito codice Ottoboniano Vaticano'
[19] 문서 Here [[Boccaccio]] mistakenly believes that Joanna died. De mulieribus claris, CVI. DE IOHANNA, IERUSALEM ET SYCILIE REGINA.
[20] 웹사이트 Joanna http://chestofbooks.[...] Chestofbooks.com 2013-05-31
[21] 서적 On famous women Italica Press 2011
[22] 서적 Joan of Naples 1343 - 1382 (Celebrated Crimes Series) White Press
[23] 서적 Queen of Night Time Warner Books UK
[24] 서적 Nápolyi Johanna https://www.goodread[...] Könyvmolyképző Kiadó Kft
[25] 서적 La reine Jeanne https://www.amazon.c[...] Robert Laffont (réédition numérique FeniXX)
[26] 간행물 Pearson's Magazine, Volume 5, Issue 1, Page 25
[27] 문서 タックマン、p. 581、注91
[28] 문서 マックスウェル=スチュアート、p. 180
[29] 문서 澤井、p. 86
[30] 문서 タックマン、p. 353、注102
[31] 문서 나폴리왕 [[로베르토 1세 당조|로베르토]]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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