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알바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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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알바니아 왕국은 13세기 후반 앙주 가문의 샤를 1세에 의해 건국되었다. 샤를은 알바니아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1272년 알바니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왕국은 두러스(Durrës)를 수도로 삼았으며, 군사 중심의 정치 구조와 독자적인 정부 기구를 갖추었다. 앙주 왕가는 알바니아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한편, 중앙 집권적인 통치를 시도했다. 그러나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인해 앙주 가문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비잔틴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침략으로 영토를 잃었다. 14세기에는 알바니아 귀족 가문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국은 쇠퇴했으며, 1332년에는 알바니아 왕국이 소멸되었다. 이후 두라초 공국이 건국되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중세 알바니아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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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알바니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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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알바니아 왕국 |
시대 | 중세 |
지위 | 앙주 가문의 시칠리아 왕국/나폴리와 개인 연합 |
정부 형태 | 군주제 |
존속 기간 시작 | 1271년 |
존속 기간 종료 | 1368년, 1376년–1383년 |
수도 | 두라초 (Dyrrhachium, 현대의 두러스) |
공용어 | 알바니아어 롬바르디아어 |
종교 | 가톨릭교 동방 정교회 |
통화 | 해당 사항 없음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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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주요 지도자 | 나폴리의 카를로 1세 (1272–1285) 나폴리의 카를로 2세 (1285–1294) 필리포 1세 (1294–1331) 로베르토 2세 (1331–1332) 조반니 (1332–1336) 카를로 (1336–1348) 조반나 (1348–1368, 1376-1383) 루이지 (1365–1368, 1376) 로베르토 4세 (1376-1383) |
직함 | 왕, 영주, 이후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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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 |
이전 국가 | 아르바논 공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비잔티움 제국 |
이후 국가 | 알바니아 공국 (중세) 베라트 영주국 마타랑가 가문 |
사건 | |
시작 사건 | 설립 |
시작 날짜 | 1272년 |
종료 사건 | 소멸 |
종료 날짜 | 1368년 |
2. 역사적 배경
13세기 중반, 에페이로스 전제공국과 니케아 제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골렘 오브 크루야를 비롯한 알바니아 영주들은 양측 사이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에페이로스 편이었던 골렘은 요한 바타체스의 설득으로 니케아 제국 편으로 돌아섰고, 바타체스는 골렘에게 자치를 보장했다.[1] 그러나 1256년, 니케아는 에페이로스로부터 두러스를 점령하고 아르바논 지역에 비잔틴 권위를 재확립하면서 자치를 폐지하고 새로운 행정부를 강요했다. 이는 이전의 약속과 대조적이었기에 지역 알바니아 지도자들은 반란을 일으켰다.[1]
이러한 혼란을 틈타 시칠리아의 만프레드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두러스, 베라트, 블로러 등 주요 도시와 남부 해안선을 점령했다.[2] 에페이로스 전제군주 미하일 2세는 만프레드와 동맹을 맺고, 딸 헬레나를 만프레드와 결혼시켜 점령 지역에 대한 만프레드의 권위를 인정했다.[2]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만프레드와 미하일 2세 연합군은 패배했지만, 만프레드는 1266년 사망할 때까지 알바니아 영토를 유지하며 지역 귀족의 자치와 특권을 존중했다.[3]
2. 1. 앙주 가문의 알바니아 진출
13세기 중반, 에페이로스 전제공국과 니케아 제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골렘 오브 크루야를 비롯한 알바니아 영주들은 양측 사이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에페이로스 편이었던 골렘은 요한 바타체스의 설득으로 니케아 제국 편으로 돌아섰고, 바타체스는 골렘의 자치를 보장했다.[1] 1256년, 니케아는 에페이로스로부터 두러스를 점령하고 아르바논 지역에 비잔틴 권위를 재확립하면서 자치를 폐지하고 새로운 행정부를 강요했다. 이는 이전의 약속과 대조적이었고, 지역 알바니아 지도자들은 반란을 일으켰다.[1]이러한 혼란을 틈타 시칠리아의 만프레드가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두러스, 베라트, 블로러 등 주요 도시와 남부 해안선을 점령했다.[2] 에페이로스 전제군주 미하일 2세는 만프레드와 동맹을 맺고, 딸 헬레나를 만프레드와 결혼시켜 점령 지역에 대한 만프레드의 권위를 인정했다.[2]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만프레드와 미하일 2세 연합군이 패배했지만, 만프레드는 1266년 사망할 때까지 알바니아 영토를 유지하며 지역 귀족의 자치와 특권을 존중했다.[3]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드가 사망하자, 1267년 비테르보 조약을 통해 앙주의 샤를이 알바니아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4] 그러나 지역 귀족들은 샤를에게 영토를 넘겨주기를 거부했다.[5] 제8차 십자군 실패 이후, 샤를은 알바니아에 다시 주목했고, 지역 가톨릭 사제들을 통해 알바니아 지도자들과 접촉했다. 1272년 2월 21일, 알바니아 귀족들과 두러스 시민 대표단은 샤를과 조약을 체결하고 그를 알바니아 왕으로 선포했으며, 샤를은 그들을 보호하고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받은 특권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이 조약으로 알바니아 왕국(''Regnum Albanie'')이 시칠리아 왕국과 연합되었다.
2. 2. 알바니아 왕국 성립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드의 군대를 격파한 후, 1267년 비테르보 조약이 체결되었고, 앙주의 샤를은 알바니아에 있는 만프레드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1] 이 권리는 에피루스 전제국과 모레아에 있는 라틴 영토에서 얻은 권리도 함께 포함되었다.[2] 만프레드가 베네벤토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미카엘 2세는 만프레드의 영토를 점령하려 했으나, 지역 귀족들과 지휘관들은 이를 거부했다.[3]
제8차 십자군이 실패한 후, 앙주의 샤를은 다시 알바니아에 주목했다. 그는 지역 가톨릭 성직자를 통해 지역 알바니아 지도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두러스 출신인 존과 아르바논 출신인 니콜라, 이 두 명의 지역 가톨릭 사제가 앙주의 샤를과 지역 귀족들 사이에서 협상가 역할을 했다. 1271년 동안 그들은 알바니아와 이탈리아를 여러 차례 오가며 결국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4] 1272년 2월 21일,[5] 알바니아 귀족들과 두러스 시민들의 대표단이 샤를의 궁정에 도착했다. 샤를은 그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주교, 백작, 남작, 군인, 시민들의 만장일치로" 알바니아의 왕으로 선포되었으며, 그들을 보호하고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받은 특권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이 조약은 알바니아 왕국(라틴어: ''Regnum Albanie'')과 시칠리아 왕국을 앙주의 샤를 왕(''Carolus I, dei gratia rex Siciliae et Albaniae'') 아래 연합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가조 시나르를 자신의 부총독으로 임명했다.
1272년과 1273년 내내 샤를은 두러스와 블로러 마을에 막대한 물품을 보냈다. 이는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를 불안하게 했고, 그는 지역 알바니아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샤를 1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반대편으로 돌아서도록 설득하려 했다. 알바니아 귀족들은 그 편지를 샤를에게 보냈고, 샤를은 그들의 충성에 대해 칭찬했다. 그 후, 미카엘 8세가 샤를의 진격을 막으려는 희망은 교황 그레고리 10세의 영향에 달려 있었다. 그레고리 10세는 유럽을 화해시키고,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를 통합하며, 새로운 십자군을 시작하려는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1274년에 열릴 리옹 공의회를 발표하고, 황제 선출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샤를에게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3. 알바니아 왕국의 발전과 쇠퇴
니케포로스 1세 에페이로스 전제공은 부트린트의 비잔틴 제국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아카이아 공국의 윌리엄 2세 드 빌라르두앵과 안주의 샤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니케포로스 1세는 아카이아 영토 일부를 대가로 샤를에게 충성 서약을 제안했고, 1278년 그의 군대는 부트린트 시를 점령했다. 1279년 3월, 니케포로스 1세는 샤를의 봉신임을 선언하고 소포트와 부트린트 요새를 넘겼으며, 아들을 인질로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1] 샤를은 코르푸의 대리인에게 부트린트와 만프레드의 옛 영토를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샤를은 테살로니키와 콘스탄티노플을 목표로 하는 공세를 위해 동맹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세르비아, 불가리아 왕들과 동맹을 맺고, 지역 알바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는 비잔틴 협력 혐의로 체포되었던 진 무자카 등 알바니아 귀족들을 석방하고, 그들의 아들들을 인질로 잡아 충성을 확보하려 했다.[2]
1279년 8월, 샤를은 위고 드 쉴리를 알바니아 지역 사령관 겸 총대리로 임명하고, 병력과 장비를 지원하여 비잔틴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쉴리는 스피나리차를 점령하고 본부로 삼아 베라트 재탈환을 목표로 했다.[3] 교황 니콜라오 3세는 샤를의 비잔틴 공격을 금지했다. 교황 사망 이후, 1280년 가을 샤를은 쉴리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고, 1280년 12월 앙주군은 베라트 주변을 점령하고 요새를 포위했다.[4]
3. 1. 앙주 가문의 통치와 비잔틴 제국의 반격
앙주의 샤를은 제8차 십자군 실패 이후 알바니아에 다시 주목했다. 그는 지역 가톨릭 성직자를 통해 알바니아 지도자들과 접촉했고, 두러스 출신 존과 아르바논 출신 니콜라가 협상가 역할을 했다. 1272년 2월 21일, 알바니아 귀족들과 두러스 시민 대표단은 샤를과 조약을 체결했고, 샤를은 그들을 보호하고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받은 특권을 존중할 것을 약속하며 알바니아 왕으로 선포되었다.[1] 이 조약으로 알바니아 왕국(라틴어: ''Regnum Albanie'')과 시칠리아 왕국은 앙주의 샤를 왕(''Carolus I, dei gratia rex Siciliae et Albaniae'') 아래 연합되었다.[2] 그는 가조 시나르를 부총독으로 임명했다.그러나 앙주의 샤를은 알바니아 왕국에 군사 통치를 부과했고, 조약에서 약속된 자치와 특권은 사실상 폐지되었으며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었다. 토지는 앙주 귀족에게 몰수되었고, 알바니아 귀족은 정부에서 배제되었다. 샤를 1세는 지역 귀족들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 불만을 야기했고, 여러 알바니아 귀족들이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와 접촉하기 시작했다.[3]
미하일 8세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1274년 말 알바니아에서 작전을 시작했고, 지역 알바니아 귀족들의 도움으로 베라트와 부트린트를 점령했다. 1274년 11월, 비잔틴군은 두러스를 포위했고, 항구 도시 스피나리차를 점령했다. 두러스는 크루예, 블로라 지역과 함께 샤를 1세의 통제하에 있는 유일한 영토였지만, 이들은 내륙에 고립되어 해상으로만 통신할 수 있었다.[4]
1279년 8월, 샤를은 위고 드 쉴리를 ''알바니아, 뒤라스, 발로레, 소포트, 부트린트, 코르푸의 사령관 겸 총대리''로 임명했다.[5] 1280년 가을, 위고 드 쉴리에게 진격 명령이 내려졌고, 1280년 12월 앙주군은 베라트 주변을 점령하고 요새를 포위했다.
베라트 공방전 (1280-81) 참조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는 지원군을 보냈고, 1281년 3월 베라트 근처에 도착한 비잔틴군은 매복과 기습으로 앙주군을 격파하고 사령관 위그 드 쉴리를 사로잡았다. 앙주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고, 소수만이 카니네 성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비잔틴군은 블로러, 카니네, 두러스의 앙주 기지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크루예 지역의 알바니아 귀족들은 비잔틴 황제와 동맹을 맺었다.
위그 드 쉴리의 원정 실패로 앙주 출신 샤를은 육로를 통한 비잔틴 제국 침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해상 원정을 고려했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1281년 7월 오르비에토 조약을 통해 협력을 공식화했다. 조약의 목적은 라틴 황제 쿠르트네의 필리프를 옹립하고 그리스 정교회를 교황의 권위 아래 두는 것이었지만, 주요 동기는 앙주 지배 하에 라틴 제국을 재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베네치아 상업 특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조약 조건에 따라 필리프와 샤를은 8,000명의 병력과 기병, 충분한 선박을 제공해야 했다. 필리프, 베네치아 도제 조반니 단돌로, 샤를 또는 그의 아들 살레르노 공자 샤를이 직접 원정에 동행해야 했다. 베네치아인들은 1283년 4월까지 브린디시에서 출항할 침공 함대를 호위하기 위해 40척의 갤리를 제공할 예정이었다. 필리프가 왕위에 복귀하면, 그는 비테르보 조약의 양보와 로마니아 분할에서 라틴 제국 건국 시 베네치아에 부여된 특권을 확정해야 했다.
1283년의 주요 원정에 앞서 선봉대를 조직하기 위한 두 번째 문서도 작성되었다. 샤를과 필리프는 약 300명의 병력과 말을 태운 15척의 선박과 10척의 수송선을 제공해야 했고, 베네치아인들은 일 년 중 7개월 동안 15척의 군함을 제공해야 했다. 이들은 1282년 5월 1일까지 코르푸에서 만나 다음 해의 침공을 위한 길을 열 예정이었다.
두 조약은 1281년 7월 3일 샤를과 필리프에 의해 서명되었으며, 1281년 8월 2일 베네치아 도제에 의해 비준되었다.
3. 2. 시칠리아 만종과 알바니아 왕국의 위기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앙주 가문의 샤를 1세는 아라곤 왕국에 시칠리아를 빼앗기며 큰 타격을 입었다.[2] 이 사건으로 샤를 1세의 비잔티움 제국 공격 계획은 좌절되었고, 알바니아에서 앙주 가문의 지배력 또한 약화되었다. 1282년 시칠리아 만종 봉기 당시, 샤를 1세는 메시나 항구에 함대를 집결시켜 비잔티움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봉기로 인해 함대가 파괴되고 시칠리아를 잃는 등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2]앙주 가문은 알바니아 왕국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베라트 공방전 (1280-1281)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패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앙주 가문의 지배 영역은 두라초 주변으로 축소되었고, 두라초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토피아 가문을 비롯한 알바니아 귀족 세력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토피아 가문은 알바니아 중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앙주 가문과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의 압력에 대항했다.[2] 1336~1337년에는 두라초 공작 카를이 알바니아 중부에서 세르비아 군대에 맞서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2]
4. 알바니아 왕국의 종말
카를 토피아는 1368년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 앙주 가문으로부터 두러스를 빼앗아 알바니아 공국을 세웠다.[3] 1376년 에브뢰 공작 루이가 두러스 원정을 통해 도시를 점령했지만, 1383년 카를 토피아가 다시 도시를 장악했다.[3]
1385년 발샤 2세가 두러스를 점령하자, 카를 토피아는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여 사브라 전투에서 발샤 2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두러스를 탈환했다. 이후 두러스의 영주 게르기에게 상속되었으나 1392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도시를 넘겨주었다.[4]
4. 1. 두라초 공국의 멸망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
카를 토피아는 1368년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 앙주 가문으로부터 두러스를 빼앗아 알바니아 공국을 세웠다.[3] 1376년, 에브뢰 공작 루이가 두러스 원정을 통해 도시를 점령했지만, 1383년 카를 토피아가 다시 도시를 장악했다.[3]1385년, 발샤 2세가 두러스를 점령하자, 카를 토피아는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여 사브라 전투에서 발샤 2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카를 토피아는 같은 해에 두러스를 탈환하여 1388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 이후 두러스는 그의 아들 두러스의 영주 게르기에게 상속되었다. 1392년, 두러스의 영주 게르기는 두러스 시와 자신의 영토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넘겨주면서[4] 베네치아 공화국의 알바니아 지배가 시작되었다.
5. 알바니아 왕국의 통치 구조
알바니아 왕국은 나폴리 왕국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군사 중심의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두러스에 정부 기구를 두었으며, 이 기구의 수장은 부왕의 지위를 가진 사령관이었다. 이들은 보통 ''capitaneus et vicarius generalis''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군대 지휘권도 가졌다. 현지 군대는 ''marescallus in partibus Albaniae''라는 칭호를 가진 인물이 지휘했다.[2]
왕실 재원은 소금 생산과 무역에서 발생하는 수입으로 충당되었고, 두러스 항구와 해상 무역이 중요했다. 항구는 ''prothontius''가 지휘했으며, 알바니아 함대는 자체적인 사령관을 두었다. 부왕의 권한 아래 다른 관직들도 운영되었다.[2] 왕국 영토가 축소되면서 사령관들은 두러스 총독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2]
앙주가는 알바니아 영주들을 군사 구조에 통합했다. 1304년 타란토의 필리포는 굴리엘름 블리니스티를 알바니아 왕국 앙주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1318년에는 안드레아 1세 무자카가 뒤를 이었다. 앙주가는 알바니아 영주들에게 서방 귀족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다.[2] 중앙 집권적인 국가 기구를 설치하려 했지만, 알바니아 도시들에게는 상당한 자치를 남겨두었다. 1272년 앙주가의 샤를 1세는 두러스 공동체의 옛 특권을 인정했다.
5. 1. 중앙 정부와 지방 행정
알바니아 왕국의 수도는 두러스였으며, 왕의 대리인이 통치했다. 이 대리인은 'capitaneus et vicarius generalis'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군대 지휘권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2] 현지 군대는 'marescallus in partibus Albaniae'라는 칭호를 가진 지휘관이 이끌었다.[2]왕실 재정은 주로 소금 생산 및 무역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충당되었으며, 이는 알바니아의 'thesaurius'에게 납부되었다.[2] 두러스 항구와 해상 무역은 왕국 경제에 매우 중요했다.[2] 항구는 'prothontius'가 관리했고, 알바니아 함대는 별도의 사령관을 두었다.[2] 그 외에도 다양한 관직이 부왕의 지휘 아래 설치되어 운영되었다.[2]
왕국의 영토가 줄어들면서, 왕의 대리인으로 임명된 인물들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었고, 이들은 왕의 대표라기보다는 두러스의 총독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2]
지역 알바니아 영주들의 영향력은 점차 커졌으며, 앙주가는 이들을 군사 체계에 통합하려 했다. 1304년, 타란토의 필리포는 알바니아 귀족인 굴리엘름 블리니스티를 'marascallum regnie Albaniae'라는 칭호를 가진 알바니아 왕국 앙주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2] 1318년에는 안드레아 1세 무자카가 이 직책을 이어받았다.[2] 앙주가는 알바니아 영주들에게 서방 귀족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다.[2]
앙주가는 중앙 집권적인 통치를 추구했지만, 알바니아 도시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했다. 1272년, 앙주가의 샤를 1세는 두러스 공동체의 옛 특권을 인정했다.
5. 2. 경제와 사회
중세 알바니아 왕국의 왕실 재정은 주로 소금 생산과 무역에서 나오는 수입에 의존했다.[2] 두러스 항구와 해상 무역은 왕국 경제에 매우 중요했다. 왕실 재정은 'thesaurius'라는 관리가 담당했으며, 'prothontius'라는 직책과 함대 사령관도 존재했다.[2]
당시 알바니아 사회는 비잔틴 제국의 프로노이아 제도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앙주 왕가는 서유럽식 봉건제를 도입하려 시도했다. 13세기와 14세기에 프로노이아르들은 많은 특권과 권한을 얻어 중앙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토지세를 직접 징수하고, 행정 및 사법 권한까지 행사하며 국가의 역할을 대체했다.[2] 14세기에 이르러 프로노이아는 상속, 분할, 판매가 가능한 봉건적 소유지로 변화했고, 이는 국가의 군사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우가 드물어졌다.[2]
농민들은 봉건적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현물과 현금 납부 방식을 모두 사용했다. 13세기에는 귀족 세력 강화로 현금 납부 비중이 증가했다. 귀족들은 평야뿐 아니라 산악 지역까지 통제하며 숲, 목초지, 어업 등 공동 지역까지 봉건적 소유에 포함시켰다.[2]
13세기 알바니아의 많은 도시들은 군사 요새에서 도시 중심으로 변화했다. 도시 성벽 밖으로 확장하면서 'proastion'과 'suburbium'이라는 경제 중심지가 형성되었고, 이곳에 상점과 작업장이 집중되었다. 14세기 전반, 두러스는 25,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등 도시 인구가 크게 증가했고, 농촌 인구를 끌어들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주변 지역 귀족들도 도시로 이주하여 시민이 되고 정부 직책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2]
6. 알바니아 왕국의 종교
역사적으로 알바니아 왕국이 위치한 영토는 안티바리 대교구, 두러스, 오흐리드 정교 대주교구, 니코폴리스와 같은 다양한 대도시 권역의 지배를 받았다. 이 지역에서 가톨릭교, 그리스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및 불가리아 정교회가 각자 또는 때로는 함께 그들의 권력을 번갈아 행사했다. 왕국의 존재는 두러스 지역뿐만 아니라 알바니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가톨릭교의 영향력과 가톨릭교로의 개종을 강화했다.[2]
두러스 대주교구는 알바니아의 주요 주교구 중 하나였으며, 1054년의 대분열 이전에 15개의 주교 관할 구역을 가지고 있었다. 분열 이후 동방 교회의 권한 아래에 남아 있었지만, 로마 교회는 라틴 전례로 개종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204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1208년, 두러스 대주교구에 가톨릭 부제장이 선출되었다. 1214년 에피루스 전제 공국에 의해 두러스가 재정복된 후, 두러스의 라틴 대주교는 정교회 대주교로 교체되었다. 1225년 그의 사망 이후, 인근의 다양한 대도시 권력이 공석이 된 자리를 놓고 다퉜다. 마침내 1256년에 니케아 대주교가 임명되었지만, 1258년에 도시가 만프레드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크루여는 가톨릭교 확산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 주교구는 1167년부터 가톨릭이었고, 교황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으며, 주교를 서임한 사람은 바로 교황 자신이었다. 지역 알바니아 귀족들은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스테판 두샨이 알바니아를 통치하는 동안 가톨릭교는 어려움을 겪었다. 가톨릭 전례는 "라틴 이단"이라고 불렸고, 두샨 법전에는 그들에 대한 가혹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349년 법전이 반포되었을 때가 아니라, 훨씬 전인 적어도 14세기 초부터 현지 가톨릭 알바니아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지 가톨릭 알바니아인과 교황청 간의 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1350년에서 1370년 사이에, 알바니아의 가톨릭교 확산은 절정에 달했다. 그 시기에 알바니아에는 약 17개의 가톨릭 주교구가 있었는데, 이들은 알바니아 내 가톨릭 개혁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교황의 허가를 받아 인근 지역의 선교 활동 중심지 역할도 했다.[5]
6. 1. 가톨릭 세력의 확장과 종교적 갈등
동서 교회 분열 이후 가톨릭교와 동방 정교회는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알바니아 왕국 건국 이후 가톨릭 세력이 확장되었고, 두러스는 가톨릭 대주교구가 재설립되었다.[1] 안주의 헬렌의 지원으로 북알바니아에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이 활발하게 건립되었다.[3]1272년 알바니아 왕국이 건국된 후, 가톨릭 정치 체제는 교황의 발칸 반도 가톨릭교 확산 계획의 좋은 기반이 되었다. 이 계획은 북알바니아에서 영토를 통치하고 있던 세르비아 왕국의 왕비인 안주의 헬렌의 지지를 받았다.[3]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북알바니아와 세르비아에 약 30개의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이 세워졌다.[3]
두러스는 1272년에 다시 가톨릭 대주교구가 되었다.[4] 알바니아 왕국의 다른 영토 역시 가톨릭 중심지가 되었다. 남쪽의 부트린트는 코르푸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4세기 동안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다. 알바니아 왕국이 건국되자마자 블로러와 크루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4]
새로운 가톨릭 교구, 교회 및 수도원이 세워졌고, 다양한 종교 단체가 알바니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교황의 선교사들 또한 알바니아 왕국 영토에 도달했다.[5] 중부 및 북부 알바니아에서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개종했고, 많은 알바니아 성직자와 수도사들이 달마티아 가톨릭 기관에 있었다.[5]
그러나 두러스에서는 앙주가의 정복 후에도 한동안 비잔틴 전례가 계속 존재했다. 이러한 이중 권위 체제는 지역 주민들에게 혼란을 야기했으며, 당시 알바니아를 방문한 사람은 알바니아인들을 "그들은 완전히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완전히 분열주의자도 아니다"라고 묘사했다. 이러한 종교적 모호성을 해결하기 위해, 1304년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은 교황 베네딕토 11세의 명령에 따라 알바니아에 들어가 라틴 전례를 현지인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 도미니코회 사제들은 또한 블로러와 부트린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알바니아에서 활동했던 가톨릭 수도회 중에는 프란체스코회, 카르멜회, 시토회 및 프레몽트레회가 있었다. 또한 때때로, 교황이 그들 중 가장 선호하는 사람을 지명함에 따라, 지역 주교들은 다른 수도회에서 임명되었다.
6. 2. 알바니아 왕국의 종교적 다양성
두러스에서는 앙주 가문의 통치 기간에도 한동안 비잔틴 전례가 유지되었다. 이러한 이중 권위 체제는 지역 주민들에게 혼란을 야기했으며, 당시 알바니아를 방문한 사람은 알바니아인들을 "완전히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완전히 분열주의자도 아니다"라고 묘사했다. 1304년, 이러한 종교적 모호성을 해결하기 위해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교황 베네딕토 11세의 명령에 따라 알바니아에 들어와 현지인들에게 라틴 전례를 가르치도록 했다. 도미니코회 사제들은 블로러와 부트린트의 주교로도 임명되었다.당시 알바니아에서는 프란체스코회, 카르멜회, 시토회, 프레몽트레회 등의 가톨릭 수도회가 활동했다. 때때로 교황이 가장 선호하는 사람을 지명함에 따라, 지역 주교들이 다른 수도회에서 임명되기도 했다.
7. 알바니아 왕국의 유산
알바니아 왕국은 근대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알바니아 왕국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현대 알바니아 역사학에서는 알바니아 왕국을 중세 알바니아 민족 국가로 신화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샤를 1세는 "알바니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왕국의 경계도 불분명했다는 비판도 있다.[4]
7. 1. 중세 알바니아 국가의 형성과 발전

스테판 두샨의 지도 하에 세르비아 왕국의 압력이 알바니아 왕국에 더욱 커졌다. 왕국의 수도인 두러스시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346년까지 모든 알바니아는 두샨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보고되었다.[3] 1348년, 두라초 공작 샤를은 사촌인 타란토 공자 필리프 2세에 의해 참수되었고, 필리프 2세는 알바니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상속받았다. 한편, 알바니아에서는 두샨의 죽음 이후 그의 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중앙 알바니아에서는 카를 토피아 아래의 토피아 가문이 알바니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스테판 우로시 1세는 앙주의 헬레나와 결혼했고 카를 토피아는 알바니아 백작으로 인정받았다. 카를 토피아는 1368년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 앙주 가문으로부터 두러스를 빼앗았다. 1376년, 에브뢰 공작 루이는 두 번째 부인으로부터 알바니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얻어 두러스 원정 동안 도시를 공격하여 정복했지만, 1383년 토피아가 다시 도시를 장악했다.[3]
1385년 발샤 2세가 두러스시를 점령했다. 토피아는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요청했고, 발샤의 군대는 사브라 전투에서 패배했다. 토피아는 같은 해에 두러스시를 탈환하여 1388년 사망할 때까지 지배했다. 그 후, 두러스시는 그의 아들인 두러스의 영주 게르기에게 상속되었다. 1392년 게르기는 두러스시와 자신의 영토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넘겨주었다.
7. 2. 근대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미친 영향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알바니아 왕국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지배 정당화에 이용했다. 현대 알바니아 역사학에서는 알바니아 왕국을 중세 알바니아 민족 국가로 신화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샤를 1세는 "알바니아의 왕"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왕국의 경계도 불분명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4]8. 역대 군주
Regnum Albaniaela의 군주 목록은 다음과 같다.[1]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카를로 1세 | 1272년~1285년 | |
카를로 2세 | 1285년~1294년 | 1294년 카를로 1세는 알바니아에 대한 권리를 아들 필리포에게 넘겼다. 필리포는 알바니아 왕국의 군주로 통치했다. |
필리포 | 1301년 ~ 1332년 | |
로베르토 | 1332년 | 1332년 알바니아 왕국은 소멸되고 로베르토의 삼촌인 조반니에 의해 두라초 공작으로 명맥이 유지되었다. |
조반니 | 1332년 ~ 1336년 | |
카를로 | 1336년 ~ 1348년 | |
조반나 | 1348년 ~ 1368년 | |
루이지 | 1366년 ~ 1368년 |
1368년 두라초는 카를로 토피아에게 점령되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토피아를 알바니아 공작으로 인정하였다.
8. 1. 알바니아 왕
카를로 1세는 1294년 알바니아에 대한 권리를 아들 필리프에게 넘겼다. 필리프는 '알바니아 왕국의 군주'로 통치했다.[1]
8. 2. 알바니아 왕국의 군주
1332년 알바니아 왕국은 소멸되고 로베르토의 삼촌인 조반니에 의해 두라초 공작으로 명맥이 유지되었다.
8. 3. 두라초 공작
1368년 두라초는 카를로 토피아에게 점령되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토피아를 알바니아 공작으로 인정하였다.
참조
[1]
서적
Intercultural contacts in the medieval Mediterranean
1996
[2]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VI: c. 1300-c. 1415
1996
[3]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A Critical Survey from the Late Twelfth Century to the Ottoman Conquest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4
[4]
간행물
A. Kiesewetter, L'acquisto e l'occupazione del litorale meridionale dell'Albania da parte di re Carlo I d'Angiò (1279–1283). Palaver, Università del Salento, 4 n.s. (2015), n. 1, 255-298
http://siba-ese.unis[...]
[5]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A Critical Survey from the Late Twelfth Century to the Ottoman Conquest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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