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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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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성(山城)은 산을 이용하여 축조한 성곽을 의미하며,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지역에서 나타난다.

고대에는 일본의 다카조, 한국의 산성 등이 존재했으며, 중세에는 일본에서 기병의 확산과 함께 산악 지형을 이용한 성채가 등장했다. 한국의 산성은 포곡식과 테뫼식으로 분류되며, 성문, 장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일본의 산성은 고대, 중세, 근세로 구분되며, 전국 시대에는 산성을 활용한 전술이 발달했다.

전국 시대 후기에는 평지성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전쟁의 상시화, 조총의 도입, 다이묘의 권위 상징 등 여러 요인에 기인한다. 산성은 방어 시설뿐만 아니라 권력의 상징으로도 활용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아크로폴리스, 마추픽추, 마사다 요새 등 다양한 형태의 산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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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 요새
    요새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영토와 인구를 보호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건설된 방어 시설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기술로 발전해 왔으며, 군사적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현재는 유적이나 관광지로 활용된다.
  • 성 - 해자
    해자는 성이나 요새와 같은 방어 시설의 바깥쪽에 굴착된 도랑 형태의 장애물로, 공성 무기의 접근을 어렵게 하고 굴착을 방해하며 필요에 따라 물을 채워 사용하기도 한다.
산성 (건축)
개요
유형요새
위치언덕 또는 산
특징
특징전략적 위치
강화된 방어
주변 지형 조망
정의
정의주변 지형보다 높은 자연적 특징 위에 건설된 성
유형
유형환상 산성
정식 산성
목적
목적방어
감시
통제
구조
구조성벽
망루
성문
기타 방어 시설
위치 선정 고려 사항
위치 선정 고려 사항지형적 이점
식수원 확보 용이성
건축 자재 접근성

2. 구조

산성은 지형에 따라 다양한 구조를 가진다. 성문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방어 시설로, 큰 돌을 사용해 튼튼하게 구축되었으며 옹성과 적대(敵臺) 등으로 보강되었다.[9] 장대는 전투 지휘를 위한 시설로, 성곽의 규모와 중요성에 따라 설치되었다. 성내에서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위치하며, 필요에 따라 여러 곳에 설치되기도 했다. 장대는 전투 지휘 외에 성 관리와 행정 기능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이며, 보통 단층 형식이지만 남한산성 수어장대나 수원화성처럼 중층 누각 형식도 있다.

2. 1. 한국

한국은 산이 많은 지형 때문에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하였다. 산성은 평야를 앞에 둔 높은 산에 자리잡는 것이 일반적이며, 적이 나타나면 산으로 들어가 농성(籠城)을 하였다. 한편 평지와는 동떨어진 깊은 산중에 산성을 축조하기도 하는데, 이는 외부와 단절된 채 험한 산을 이용하여 지구전을 계속하기 위함이었다. 주로 국도 주변의 산줄기나 지리의 요충지, 도성이나 주요 도시에 접한 산, 국경이나 해안 등에 축조되었다.

산성은 높은 곳에 자리한 지형적 이점을 가지기 때문에 평지에 있는 성보다 방어력이 월등히 높았다. 따라서 방어를 위한 군사 거점으로 사용하거나 유사시 피난을 위한 피난지의 역할로 사용되었다. 고구려 시기부터 평지의 성과 인근 산성을 연계하는 방어 전략을 전통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연계와 같은 방식이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 시대 읍성 인근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산성이 하나 이상 있었다. 산성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시대 전국 읍성의 수가 300개 이상이었으니 산성의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산성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포곡식 산성과 테뫼식 산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 포곡식(包谷式) 산성: 산기슭에서부터 시작하여 능선을 따라 정상 가까이까지 축조한 것으로, 계곡을 하나 또는 여러 개 포함하여 성내의 가용 면적을 넓히고 수원을 확보하여 주민들이 평상시 거주하거나 지구전이 가능하도록 한 산성이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금정산성, 상당산성 등이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 테뫼식 산성: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것으로,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다고 해서 발권식(鉢圈式) 산성, 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성,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다고 해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한다.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이 이에 속하며 이천리 단조산성, 분산성, 성산산성, 검단산성, 증산성, 청마산성 등이 있다.[8]


그밖에 산성이 위치한 지형 조건에 따라 고로봉형(栲栳峰形)·산봉형(蒜峰形)·사모형(紗帽形)·마안형(馬鞍形) 등으로 나누기도 하나 이에 따른 실제적인 구분은 매우 어렵다.

산성과 평지성의 성격을 함께 갖춘 평산성(平山城)은 평지에서부터 배후의 산등성이를 감싸고 축조한 것으로, 이러한 형태는 지형과 취락 입지에 기인한 한국 성곽의 특징이다. 주로 국경 지방의 변방 읍성이 이에 속하며, 한국 대부분의 읍성이 이러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

2. 1. 1. 성문

성문은 성의 안팎을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통로로서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역할을 한다. 성문의 위치에 따라 도시의 가로 체계가 형성되고, 성문의 견고성에 비례하여 성곽의 방호 능력이 평가되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긴다.[9] 성문은 다른 곳에 비해 큰 돌을 사용해 튼튼하게 구축했다. 다른 한국의 성과 같이 산성에서도 성문의 둘레에 옹성과 적대(敵臺) 등을 시설하여 그 취약점을 보완하거나 강화하였다.

2. 1. 2. 장대

장대는 전투시 군사의 지휘에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모든 에 장대를 둔 것은 아니고, 성곽의 규모가 크고 중요한 곳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고려하여 설치하였다. 장대는 성내 지형 중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는데, 성내 면적이 넓고 한곳에서 지휘하기 곤란한 지형에서는 지휘에 편리한 곳에 장대를 추가로 두어 방향에 따라 동, 서, 남, 북 장대라는 이름을 붙여 불렀다. 장대는 전투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에는 성 관리와 행정 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장대의 위치는 성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형에 따라 성벽에 붙여 설치하기도 하였다. 실전에 있어서는 장대 한 곳에서 독전하기 어려워 문루 등으로 나아가 지휘하기도 하였는데, 보통은 규모가 크지 않은 단층 형식이였다. 남한산성의 서장대인 수어장대와 수원화성에서는 중층 누각 형식을 취하고 있다.

3. 형태에 따른 분류

한반도에 존재하는 산성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 '''포곡식(包谷式) 산성''': 계곡을 하나 또는 여러 개 포함하도록 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정상 가까이까지 축조한 산성이다. 성내 가용 면적이 넓고 수원이 포함되어 있어 주민들이 평상시 거주하거나 지구전이 가능하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금정산성, 상당산성 등이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이다.[8]
  • '''테뫼식 산성''':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산성으로,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다고 해서 발권식(鉢圈式) 산성, 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성,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다고 해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한다. 주로 규모가 작은 산성이 이에 속하며, 이천리 단조산성, 단조산성, 분산성, 성산산성, 검단산성, 증산성, 청마산성 등이 있다.[8]


이 외에도 산성의 위치와 지형 조건에 따라 고로봉형(栲栳峰形), 산봉형(蒜峰形), 사모형(紗帽形), 마안형(馬鞍形) 등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실제 구분은 매우 어렵다. 한편, 산성과 평지성의 성격을 모두 갖춘 평산성(平山城)은 평지에서부터 배후의 산등성이를 감싸고 축조한 형태로, 지형과 취락 입지에 기인한 한국 성곽의 특징을 보여준다. 주로 국경 지방의 변방 읍성이 이에 속하며, 한국 대부분의 읍성이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8]

4. 한국의 산성

에 쌓은 성으로, 한국에서는 산이 많은 지형 때문에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하였다. 산성은 평야를 앞에 둔 높은 산에 자리 잡는 것이 일반적이며, 적이 나타나면 산으로 들어가 농성(籠城)을 하였다. 한편 평지와는 동떨어진 깊은 산중에 산성을 축조하기도 하는데, 이는 외부와 단절된 채 험한 산을 이용하여 지구전을 계속하기 위함이었다. 주로 국도 주변의 산줄기나 지리의 요충지, 도성이나 주요 도시에 접한 산, 국경이나 해안 등에 축조되었다.

높은 곳에 자리한 지형적 이점을 가지기 때문에 평지에 있는 성보다 방어력이 월등히 높았다. 따라서 방어를 위한 군사 거점으로 사용하거나 유사시 피난을 위한 피난지의 역할로 사용되었다. 한국의 경우 고구려 시기부터 평지의 성과 인근 산성을 연계하는 방어 전략을 전통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연계와 같은 방식이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 시대 읍성 인근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1개 이상의 산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산성의 정확한 수는 모두 다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조선 시대 전국 읍성의 숫자가 300개 이상이었으니 산성의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산성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포곡식 산성, 테뫼식 산성, 평산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 포곡식(包谷式) 산성: 산기슭에서부터 시작하여 능선을 따라 정상 가까이까지 축조한 것으로 계곡을 하나 또는 여러 개가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내의 가용 면적을 넓히고 성내에 수원이 포함되도록 하여 주민들이 평상시 거주하거나 지구전이 가능하도록 한 산성이다. 서울 외곽의 북한산성남한산성, 부산 금정금정산성, 충북 청주의 상당산성 등은 규모가 큰 포곡식 산성들이다.
  • 테뫼식 산성: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것으로,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다고 해서 발권식(鉢圈式) 산성, 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성,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다고 해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한다.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이 이에 속하며 울산의 이천리 단조산성, 경남 양산의 단조산성[8], 김해분산성, 함안성산산성, 순천검단산성, 부여증산성과 청마산성 등이 있다.
  • 평산성(平山城): 평지에서부터 배후의 산등성이를 감싸고 축조한 것으로, 이러한 형태는 지형과 취락 입지에 기인한 한국 성곽 특징에 속한다. 주로 국경 지방의 변방 읍성이 이에 속하며, 한국 대부분의 읍성이 이러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밖에 산성이 위치한 지형 조건에 따라 고로봉형(栲栳峰形)·산봉형(蒜峰形)·사모형(紗帽形)·마안형(馬鞍形) 등으로 나누기도 하나 이에 따른 실제적인 구분은 매우 어렵다.
대표적인 산성

5. 일본의 산성

고지군사적으로 지형에 의해 의 이동을 방해할 수 있으며, 고지대의 이점으로 시계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유리하다. 이 때문에 산에 성을 쌓는 행위는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아크로폴리스근대의 뤼순 요새 또는 마지노 선도 산에 축조된 요새군이다. 하지만 산성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근대 이전의 일본의 성을 가리키며, 산악부에 만들어진 콘크리트제 엄폐호를 보통 산성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산성이라는 말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성이 산성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전국 시대의 일본에서 영주는 성주라고 불렸다. 성주는 평시에는 산기슭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산 위의 성에 틀어박히는 방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토목 기술, 특히 토지 조성 기술이 미숙했던 시대에 발전하여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살기에는 불편하고, 거주지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전시의 농성용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가 지나면서 큰 해자나 고지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산악부를 이용하지 않고도 중요한 가도를 차단하는 지점에 요새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투의 주력은 기병에서 화포로 바뀌면서 산성의 역할은 끝났다.

현재도 산악부에 요새를 건설하는 움직임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산성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일본의 산성에는 다음의 3 종류가 있다.



고대에는 다카조가 유명하다. 그 이후, 일본 국내에서도 기병의 확대에 따라 산악부에 성채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중세의 산성은 산 위에 성곽, 기슭에 시모야카타(거관)를 구축했다고 한다. 산 위의 성은 주로 전시의 방어 시설이며, 일상생활은 기슭의 관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산 위의 성에는, 굴립주 건축이나 간이적인 망루를 세웠을 뿐 장기간 거주하기 위한 건물은 세워지지 않았던 듯하다.

소규모 성의 경우, 산 정상에 간단한 건물을 짓고 식량, 무기를 보관하는 것뿐, 나머지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적절히 산 각지에 울타리, 해자, 토담을 설치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중규모 성에서는 봉우리마다 혼마루, 니노마루와 같은 구루와를 만들고, 거주용 시설도 갖추어, 장기간의 농성에 견딜 수 있도록 했다. 대규모 성에서는 주변 산들에 지성을 설치하고, 산계 전체를 요새로 삼았다. 지형상의 문제로 경사지에는 깊은 해자를 파지 못했다. 해자에 떨어진 공격측 병사를 수비측 병사가 창으로 찌르는 공격이 가능한 편이 방어상의 이점이 컸다는 사정도 있다. 또한, 이것들은 빈 해자였으며, 나중에 보이는 수해자는 없었다. 게다가 흙을 쌓아 성곽을 넓히는 석축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성은 좁았다.

평성, 평산성에 비해 산성의 규모는 작은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도시 개발을 면하는 예도 많아, 갓산 토다성, 마스야마성, 다케다성, 다카토리성, 오카성 등에서는 중세의 광대한 성역 전체의 유구가 보존되어 있다.

전국 시대의 산성을 그린 그림(가스가야마 성・에치고국)


특히 유명한 일본의 산성을 다룬 "일본 5대 산성"이 있다.

일본 5대 산성
령제국명성 이름주요 성주소재지
에치고국가스가야마 성우에스기 겐신니가타현 조에쓰시 나카야시키
이즈모국갓산토다 성아마고 쓰네히사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 정 도다
오미국간논지 성롯카쿠 요시카타시가현 오미하치만시 아즈치 정
오미국오다니 성아사이 나가마사시가현 나가하마시 고호쿠 정 이베
노토국나나오 성하타케야마 요시쓰나이시카와현 나나오시 고조 정



오다니 성 대신 하치오지 성을 넣은 "일본 5대 산악성"(2004년)도 있다.

일본 5대 산악성
령제국명성 이름주요 성주소재지
이즈모국갓산토다 성아마고 쓰네히사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 정 도다
노토국나나오 성하타케야마 요시쓰나이시카와현 나나오시 고조 정
오미국간논지 성롯카쿠 요시카타시가현 오미하치만시 아즈치 정
에치고국가스가야마 성우에스기 겐신니가타현 조에쓰시 나카야시키
무사시국하치오지 성호조 우지테루도쿄도 하치오지시 모토하치오지 정



모두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5. 1. 역사

일본에서 산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야요이 시대의 고지성 취락이다. 그 후, 아스카 시대부터 나라 시대에 걸쳐 당나라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서일본 각지에 고대 산성이 축조되었다.[2]

중세에는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고다이고 천황이 이끄는 반 막부 세력이 막부에 저항하기 위해 산에 축성을 시작했다. 최초의 예로 여겨지는 것은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치하야 성이나 아카사카 성(가미아카사카 성, 시모아카사카 성), 또는 산악 사찰인 킨타이지를 이용한 킨타이지 성이다. 그 후, 남조도 그것들을 따라 각지에 산성을 축조했다. 무사가 산기슭의 평지에 거관을, 배후의 산에 산성을 축조하여 전투가 벌어지면 산성에 틀어박히는 양식이 일반화되었다.[2]

전국 시대가 되면서 싸움이 상시화되었기에, 산 위의 성에도 항구적인 시설을 세워 장기전에 견딜 수 있도록 대비했다. 전국 후기에는 산 위의 주곡륜에 영주의 거관을 짓고, 중턱에 가신들과 인질로 그 일족을 살게 했다.[2]

16세기 중기 이후의 합전에서는 대군을 산 위에 집결시켜 위치적 우위를 이용하여 평야부의 적을 위압하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독트린("산성 운용 독트린")이 확립되었다는 지적이 있다.[3] 적이 쳐들어오면 방어를 굳게 하고 막고, 적이 후퇴하는 것을 보아 산 위에서 출격하는 전술은 당시의 일반적인 운용법이었다고 추측된다. 산성 운용 독트린의 시원은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가와나카지마 주변에 운용된 산성군으로 여겨지며, 1570년의 시가의 진에서는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이 히에이 산에 군세를 올려 오다 노부나가 군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1582년의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 군이 자군의 승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덴노 산을 적보다 먼저 점령했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산 위에서의 용병을 교묘하게 행한 하시바 히데요시 군이 승리했으며,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헌상한 것은 세키가하라를 내려다보며 견고하게 성곽화된 마쓰오 산에 포진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있으며, "산을 제압하는 자가 천하를 제압한다"라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3]

5. 2. 평지성으로의 이행

일본에서 산에 군사적 방어 시설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야요이 시대의 고지성 취락이다. 그 후, 아스카 시대부터 나라 시대에 걸쳐 당나라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서일본 각지에 고대 산성이 축조되었다.

중세에는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고다이고 천황이 이끄는 반 막부 세력이 막부에 저항하기 위해 산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예로 여겨지는 것은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치하야 성이나 아카사카 성(가미아카사카 성, 시모아카사카 성), 또는 산악 사찰인 킨타이지를 이용한 킨타이지 성이다. 그 후, 남조도 그것들을 따라 각지에 산성을 축조했다. 무사가 산기슭의 평지에 거관을 두고, 배후의 산에 산성을 축조하여 전투가 벌어지면 산성에 틀어박히는 양식이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전국 시대가 되면서 싸움이 상시화되었기에, 산 위의 성에도 항구적인 시설을 세워 장기전에 견딜 수 있도록 대비했다. 전국 후기에는 산 위의 주곡륜에 영주의 거관을 짓고, 중턱에 가신들과 인질로 그 일족을 살게 했다[2]

16세기 중기 이후의 전투에서는 대군을 산 위에 집결시켜 위치적 우위를 이용하여 평야부의 적을 위압하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독트린("산성 운용 독트린")이 확립되었다는 지적이 있다[3]。적이 쳐들어오면 방어를 굳게 하고 막고, 적이 후퇴하는 것을 보아 산 위에서 출격하는 전술은 당시의 일반적인 운용법이었다고 추측된다. 산성 운용 독트린의 시원은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가와나카지마 주변에 운용된 산성군으로 여겨지며, 1570년의 시가의 진에서는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이 히에이 산에 군세를 올려 오다 노부나가 군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1582년의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 군이 자군의 승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덴노 산을 적보다 먼저 점령했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산 위에서의 용병을 교묘하게 행한 하시바 히데요시 군이 승리했으며,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헌상한 것은 세키가하라를 내려다보며 견고하게 성곽화된 마쓰오 산에 포진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있으며, "산을 제압하는 자가 천하를 제압한다"라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3]

전국 후기에 들어서면서 성시를 동반하는 평산성・평성이 주류가 되었다.

산성에서 평성이 주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평성이 이전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헤이조쿄헤이안쿄는 해자와 담장을 갖추고 있어 일종의 평성이었다. 즉, 산성과 평성은 동시에 존재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혁명적인 평성이 나타나 산성의 역할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산성의 중요성이 낮아지고, 상대적으로 중요했던 평지의 시설, 평성으로 회귀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 전쟁의 상시화: 산성은 거주성이 낮고, 그곳까지 이동해야 하며 즉응성이 낮다. 상시화된 전투에는 신속한 전투로의 이행, 준비가 요구되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면서 일본 국내를 통치하는 세력이 없어 각지에서 전투가 상시화되었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산성으로 이동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시카가 요시테루, 오다 노부나가 등은 가신의 배신으로 산성으로 이동할 수 없어 전사했다. 혹은 산성을 가지지 않은 세력은 시역 방어를 목표로 했다. 사카이나 사찰 세력은 평지에 해자와 울타리, 망루 등을 건설하여 환호 집락을 형성했다. 적의 기습, 가신의 배신, 전투의 상시화로 인해 전시에만 산성으로 이동하는 형태가 쇠퇴하고, 항상 수비병에 의해 지켜지고 거주성과 즉응성이 높은 이러한 평지의 방어 시설이 거대해졌다.
  • 전국의 종언: 도요토미 시대 이후, 기나이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전투가 끝나고, 이윽고 에도 막부가 되자 잇키 외에는 전투가 없어졌다. 여전히 돌발적인 전투에 대비할 필요는 있지만, 예상되는 적의 병력은 훨씬 적게 추산되었다. 또한 잇키에 참가하는 농민이나 막정에 불만을 품은 무사가 대규모 기병을 준비할 수 없었고, 이러한 비대칭 전쟁에서 기병 전투를 주안으로 하는 산성의 중요성이 낮아졌다. 실제로 전장은 교외에서 시가지로 옮겨, 이시다 미쓰나리를 노린 칠장 습격 사건, 아코 낭사의 기라 저택 습격, 미즈노 타다쿠니 습격 현장은 그들의 저택이었다.
  • 센고쿠 다이묘의 권위의 상징: 통치자를 '성주'라고 부르듯이 다이묘와 성곽은 결합되었다. 지배자인 센고쿠 다이묘의 권위를 민중에게 알리기 위해,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악부에서 평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거대한 건조물이 시역에 만들어지는 것은 센고쿠 말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특히 거대한 천수각은 본래의 감시용 망루로서의 기능을 벗어나 화려하게 장식되고 거대화, 고층화되어 상징적인 건조물이 되었다.
  • 조총의 도입: 나무 울타리와 얕은 해자로 방어한 산성은 조총에 의한 공격에 취약했다. 이를 막기 위해 몇 겹의 깊은 해자와 담장으로 방어하게 되었다. 또한 수비측도 조총으로 공성측의 병사를 요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해자의 깊이를 굳이 창이 닿는 정도로 할 필요가 없어졌다[4]。더욱이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공격 부대였던 기병이 화포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기병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산악부에 성채를 쌓을 필요성이 낮아졌다.
  • 대규모화: 성은 방위 시설에서 정청사로서의 역할로 이행해 갔다. 센고쿠 다이묘가 지배권을 확립하고, 광대한 영지를 다스리게 되자 각지에 할거하고 있던 주변의 구니진 영주 등을 완전히 가신으로 편입하여 성하 마을에 집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도 대규모화할 필요가 있었지만, 산성에서는 규모에 한계가 있었다. 또한 군사적인 면에서도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킬 필요가 생겨, 지금까지의 산성보다 큰 성채가 요구되었다. 호조씨의 오다와라 성, 도요토미씨의 오사카 성, 도쿠가와씨의 에도 성은 시가지 전체를 방어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 석축의 도입: 산성의 시대부터 돌을 쌓아 흙을 돋우는 기술은 존재했다. 그러나 오다・도요토미 시대 이후에는 석축 기술이 향상되어 지금까지보다 대규모 토지 조성이 가능해졌다. 평지에서도 고지를 만들 수 있게 되자 중요한 가도에 가까운 장소에 적의 이동을 방해하고,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고지를 만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불편한 산악부에 굳이 산성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산성에서 평산성・평성으로 이행함에 있어서, 산기슭에 새롭게 주곽을 쌓고, 기존의 산성을 '쓰메노성'으로 삼는 예(하기 성 등)나, 성곽을 낮은 언덕이나 평지로 이전하는 예(빈고후쿠야마 성 등)가 있었다. 또한 오다와라 성처럼, 원래는 산성이었지만, 성과 산기슭의 성하 마을이 확장을 거듭한 결과, 양자가 일체화되어, 성하 마을 전체를 총구로 둘러싼 대규모의 평산성으로 발전한 예도 있다.

물론, 모든 산성을 평산성이나 평성으로 대체할 필요는 없었다. 평성화는 다이묘 자신이 거주하는 대규모의 거성에 국한되었고, 각지의 산성은 건재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기존의 산성을 그대로 평산성・평성으로 이행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산성 중에는 석축을 도입하거나 조총 등에 대응하기 위해 오히려 종전보다 발전한 예도 있다. 예를 들어 서국에서는 방사상 수직 해자의 도입이 활발해졌다. 더욱이 기존의 나무 울타리가 아닌 평산성이나 평성의 건축 양식을 도입하고, 틈새를 가진 토담으로 둘러싸인, 마치 토치카와 같은 철벽의 요새가 된 산성도 있다(타카토리 성 등).

성의 대부분이 평산성・평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일국일성령에 의해 각지의 산성을 파각하는 에도 시대 이후가 된다. 그러나 에도시대의 다이묘의 거성에서도 산기슭의 거관과 전투 시에 농성하는 배후의 산성의 조합이라는 중세적 양식을 계승한 성도 많고, 이요마쓰야마 성, 돗토리 성, 쓰와노 성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기 성처럼 평성 이행 후에도 산성 시대의 건조물을 '쓰메노성'으로 잔존시킨 것도 있다. 센다이 성처럼 에도시대에 들어서 산성을 건조하고, 후에 확장에 의해 평산성으로 이행한 예도 있다.

5. 3. 일본 5대 산성 및 5대 산악성

특히 유명한 일본의 산성을 다룬 "일본 5대 산성"이 있다.

일본 5대 산성
령제국명성 이름주요 성주소재지
에치고국가스가야마 성우에스기 겐신니가타현 조에쓰시 나카야시키
이즈모국갓산토다 성아마고 쓰네히사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 정 도다
오미국간논지 성롯카쿠 요시카타시가현 오미하치만시 아즈치 정
오미국오다니 성아사이 나가마사시가현 나가하마시 고호쿠 정 이베
노토국나나오 성하타케야마 요시쓰나이시카와현 나나오시 고조 정



오다니 성 대신 하치오지 성을 넣은 "일본 5대 산악성"(2004년)도 있다.

일본 5대 산악성
령제국명성 이름주요 성주소재지
이즈모국갓산토다 성아마고 쓰네히사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 정 도다
노토국나나오 성하타케야마 요시쓰나이시카와현 나나오시 고조 정
오미국간논지 성롯카쿠 요시카타시가현 오미하치만시 아즈치 정
에치고국가스가야마 성우에스기 겐신니가타현 조에쓰시 나카야시키
무사시국하치오지 성호조 우지테루도쿄도 하치오지시 모토하치오지 정



모두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6. 세계의 산성

고지군사적으로 지형에 의해 의 이동을 방해할 수 있으며, 고지대의 이점으로 시계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유리하다. 이 때문에 산에 성을 쌓는 행위는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아크로폴리스근대의 뤼순 요새 또는 마지노 선도 산에 축조된 요새군이다. 하지만 산성이라는 말은 근대 이전의 일본 성을 가리키며, 산악부에 만들어진 콘크리트제 엄폐호를 보통 산성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산성이라는 말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성이 산성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산성이라는 구분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고유의 용어이다. 그러나 산악부에 건설된 시설이라는 개념으로 적용되는 해외의 성은 존재한다.

근세 이전에 건설된 해외의 산성으로는,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아크로폴리스가 유명하다. 방어 시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남아메리카의 마추픽추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유대 전쟁에서 사용된 마사다 요새는 주변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그 외에도 크라크 데 슈발리에 등이 있다.

약간 이 개념에서 벗어나지만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근세 이후의 유명한 해외 산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팔라티노 언덕과 그 외 몇몇 언덕을 방어 시설로 건설했다. 로마 시민은 외적의 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이 언덕을 이용했다. 즉, 로마 시 자체가 산성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특히 팔라티노 언덕은 건국의 시조인 로물루스와 관련이 있었다. 로마 시민이 원로원과 대립하여 성산 사건을 일으켰을 때 아벤티노 언덕에 시민들이 농성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시내에 있는 바티칸 언덕에 후세에 산탄젤로 성과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건설되어 중세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로마가 공격을 받았을 때 요새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현재 바티칸 시국으로 알려져 있다.

7. 참고 문헌


  • 호르스트 볼프강 뵈메, 라인하르트 프리드리히, 바바라 쇼크-베르너 (편집): ''성, 궁전 및 요새 사전''. 레클람, 슈투트가르트 2004, p. 156.
  • 프리드리히-빌헬름 크라헤: ''중세 독일의 성과 주거 탑''. 제 1권. 토르베케, 슈투트가르트 2002, pp. 21–23.

참조

[1] 서적 Burgen und Wohntürme des deutschen Mittelalters
[2] 서적 城郭の見方・調べ方ハンドブック 東京堂出版 2008
[3] 논문 川中島合戦と城郭(続)―関連城郭から展望する合戦の実像― 中世城郭研究会 2007
[4] 서적 城 6 中国 毎日新聞社 1996
[5] 서적 戦国大名浅井氏と小谷城 湖北町教育委員会 1992
[6] 서적 近江の山城ベスト50を歩く サンライズ出版 2006
[7] 서적 戦国の山城をゆく 集英社新書 2004-04
[8] 문서 통도사 8경 중의 하나로 ‘단성낙조(丹城落照)’로 유명
[9] 웹사이트 한국의 성곽문《두산백과사전》 http://download.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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