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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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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창흡은 1786년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다. 1821년 콜레라 창궐 시기에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1839년 사위 조신철이 가져온 성물로 인해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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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흡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창흡 베드로
출생일1786년
사망일1839년 12월 29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지서울
사망지서울 서소문
직업순교자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인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 생애

최창흡은 1786년경 한양의 중인 신분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1801년 신유박해로 집안이 파산하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손소벽과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9명은 어릴 때 사망하였다.[1]

천주교 교리 수업을 받았으나, 박해로 인해 세례를 받지 못하고 교우들과 멀어져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815년 천주교 공동체에 입회하여 교리를 다시 배웠고, 1821년 조선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 최창흡은 독실한 신자로 알려졌다. 그는 "젊어서 저지른 를 속죄하고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 죽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1839년 6월, 사위 조신철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성물이 발견되면서 체포되었다.[1] 주뢰형과 주장질을 받고 태형 150대를 맞았지만, 배교하지 않고 교우들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았다.[1] 형조에서도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심으로 견뎌냈다.[1]

사형장으로 가기 직전, 최창흡은 형졸에게 아내와 딸에게 울지 말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순교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청했다.[1]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여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1]

2. 1. 출생과 가정 환경

최창흡은 1786년경 한양의 중인 신분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1801년 신유박해로 집안이 파산하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손소벽과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9명은 어릴 때 사망하였다.[1]

2. 2. 천주교 입교와 신앙 생활

최창흡은 1786년경 한양의 한 중인 신분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3살일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천주교 교리 수업을 시작했지만, 세례는 받지 않았다. 박해로 인해 교우들과 멀어져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815년에 그는 한 천주교 공동체에 입회하여 교리를 다시 배웠다. 그는 온화한 성품을 지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1801년 신유년의 박해 동안 그의 집안은 파산하였다. 그러한 곤궁한 상황 속에서 손소벽과 결혼하여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들 중 아홉 명은 어릴 때 운명을 달리했다. 1821년, 조선콜레라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최창흡은 그 무렵에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의 모든 의무를 지켰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 최창흡은 가장 독실한 신자들 중 한 명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저는 제가 젊어서 저지른 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들을 속죄하고 제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 죽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2. 3. 체포와 순교

1839년 6월, 최창흡은 사위 조신철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성물이 발견되면서 체포되었다.[1] 그는 일곱 차례나 주뢰형과 주장질을 받고 태형 150대를 맞았지만, 배교하지 않고 교우들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았다.[1] 형조에서도 세 차례나 더 극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심으로 견뎌냈다.[1]

최창흡은 사형장으로 압송되기 직전에 형졸을 불러 수감되어 있는 아내와 딸에게 울지 말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순교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청했다.[1]

1839년 12월 29일, 최창흡은 서소문 밖에서 여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1]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1]

3. 시복 및 시성

최창흡 베드로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시복되었고,[3]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1-23
[3]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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