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소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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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소벽은 한양에서 태어난 천주교 신자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녀는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후 외할머니와 함께 자랐으며, 17세에 최창흡과 결혼하여 교리를 배우고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비상 세례를 받았다. 기해박해 당시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지키며 순교했다. 1840년 1월 31일, 39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되었으며,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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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소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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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손소벽 막달레나 |
출생일 | 1801년 |
사망일 | 1840년 1월 31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서울 |
사망지 | 서울 당고개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상징 | 해당 정보 없음 |
수호 | 해당 정보 없음 |
매장지 | 해당 정보 없음 |
성당 | 해당 정보 없음 |
기도 | 해당 정보 없음 |
2. 생애
손소벽은 한양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가 유배 후 순교하고 어머니마저 일찍 여의면서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다른 신자들과 교류가 적어 천주교 교리를 늦게 배우게 되었다.
17세에 최창흡과 혼인하여 남편과 함께 본격적으로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821년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자 남편과 함께 비상 세례를 받았다. 남편 최창흡은 훗날 손소벽보다 먼저 순교하였다. 부부는 슬하에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아홉 명을 어린 나이에 잃는 아픔을 겪었다. 손소벽은 온화한 성품과 상냥한 말씨를 지녔으며, 바느질과 수놓기 솜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친척 집에 피신했으나 6월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심문과 혹독한 고문(주뢰형, 곤장 등)을 당하면서도 동료 신자들의 이름을 대거나 배교하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특히 사위 조신철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교회 물품의 출처에 대한 추궁으로 더욱 심한 고초를 겪었다.
감옥에 두 살 된 막내딸과 함께 있었으나, 열악한 환경과 순교 의지가 약해질 것을 염려하여 친척에게 맡겼다. 모든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낸 손소벽은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1840년 1월 31일 한양 근교의 당고개 형장에서 다른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 1. 출생과 가족
손소벽은 한양의 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형에 처해진 후 순교하고, 얼마 못가 어머니 마저도 세상을 떠난 뒤로, 그녀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가족의 불행한 상황은 그녀를 소심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다른 천주교인들과 떨어져 지냈으므로, 천주교 교리를 늦게 배웠다.그녀는 17세에 최창흡과 결혼하여 함께 교리를 배웠다. 1821년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비상 세례를 받았다. 남편 최창흡은 후일에 그녀보다 먼저 순교한다. 그들은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들 중 아홉 명은 유아기 때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온화한 성품과 상냥한 말씨를 지녔었으며, 바느질과 수놓기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2. 2. 신앙 생활과 결혼
손소벽은 한양의 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형에 처해진 후 순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러한 가정 환경의 영향으로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되었고,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의 교류가 적어 교리를 비교적 늦게 접하게 되었다.17세에 최창흡과 혼인하였으며, 남편과 함께 교리를 배우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21년 조선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을 때, 남편과 함께 비상 세례를 받았다. 남편 최창흡은 훗날 그녀보다 먼저 순교하였다. 부부는 슬하에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안타깝게도 아홉 명은 어린 나이에 잃는 아픔을 겪었다. 손소벽은 온화한 성품과 상냥한 말투를 지녔으며, 바느질과 수놓기 솜씨가 뛰어나 주변에 알려졌다.
2. 3. 기해박해와 체포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손소벽은 친척 집에 몸을 숨겼으나 그해 6월에 가족과 함께 포도청 관원에게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그녀는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관리가 동료 천주교 신자들의 거처를 대라고 추궁하자, 손소벽은 "저는 제 동료 교우들이 있는 곳을 발설하여 그들에게 해를 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절대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신앙을 지켰다. 관리가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녀는 "제 삶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삶을 구원 받기 위하여 제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라며 끝까지 거부했다.손소벽은 사위인 조신철이 베이징에서 들여와 그녀에게 맡긴 성물의 출처를 대라는 요구와 함께 더욱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총 일곱 차례의 심문과 세 차례의 주뢰형을 당했으며, 260여 대의 곤장을 맞았다. 이러한 고문으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감옥에는 두 살배기 막내딸도 함께 있었으나, 열악한 환경과 더불어 딸의 존재가 자신의 순교 의지를 약하게 만들 것을 염려하여 결국 친척에게 맡겼다. 이후 형조로 이송되어 세 차례의 고문을 더 견뎌낸 후 사형 판결을 받았다.
관찬 기록(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손소벽은 1840년 1월 31일에 한양 근교의 당고개 형장으로 끌려가 다른 다섯 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 4. 심문과 고문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손소벽은 친척집에 숨어 지냈으나, 6월에 결국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장은 그녀를 심문하며 동료 천주교 신자들의 행방을 대라고 요구했다. "네 동료 천주교도들이 어딨는지 불어라." 하지만 손소벽은 "저는 제 동료 교우들이 있는 곳을 발설하여 그들에게 해를 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절대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신앙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포장이 배교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가족과 함께 살게 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제 삶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삶을 구원 받기 위하여 제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라며 끝까지 거부했다.손소벽은 사위 조신철이 베이징에서 가져와 맡긴 교회 물품의 출처를 대라는 추궁을 받으며 극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총 일곱 차례의 심문을 받았고, 세 차례의 주뢰형과 260여 대의 곤장을 맞았다. 혹독한 고문으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고통을 견딜 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신앙을 잃지 않았다. 이후 형조로 옮겨진 뒤에도 세 차례의 고문을 더 견뎌내야 했다.
2. 5. 순교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손소벽은 친척집에 숨어 지냈으나, 6월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장은 그녀에게 동료 천주교 신자들의 위치를 대라고 심문했지만, 손소벽은 동료들에게 해를 입힐 수 없고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포장이 하느님을 부정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그녀는 자신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구원을 위해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다고 답하며 신앙을 지켰다.손소벽은 사위 조신철이 베이징에서 가져와 맡긴 교회 물품의 출처를 대라는 추궁을 받으며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일곱 차례의 심문과 세 차례의 주뢰형, 260여 대의 곤장을 맞았다.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고통을 견딜 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신앙을 잃지 않았다.
감옥 생활 중, 손소벽은 두 살 된 막내딸을 데리고 있었으나, 열악한 환경과 딸로 인해 순교 의지가 약해질 것을 염려하여 친척에게 맡겼다. 이후 형조로 이송되어 세 차례의 고문을 더 견뎌낸 후 사형 판결을 받았다.
관찬기록인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손소벽은 1840년 1월 31일 한양 근교의 당고개로 끌려가 다른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3. 시복 및 시성
손소벽 막달레나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2]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3]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2-14
[3]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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