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종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최흥종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 전쟁 시기에 걸쳐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목회자, 사회운동가이다. 그는 광주 지역에서 3·1 운동을 주도하고, 신간회 광주지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센병 환자와 걸인들을 위한 봉사 활동으로 "걸인, 나환자의 아버지"로 불렸다. 또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YMCA 회장, 호남신문 회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 활동에 헌신했다. 말년에는 오방(五放) 사상을 실천하며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고 금식하다 1966년 별세했다.
최흥종은 1880년 5월 4일 전라남도 광주읍 불로동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친어머니를 여의고, 12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20대 초반까지 장터에서 싸움꾼으로 알려졌고 건달패들과 어울렸다.
최흥종은 1935년 자신의 아호를 五放|오방중국어이라 정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망 통고서를 돌려 죽은 사람으로 행세했다. 오방은 '다섯 가지를 놓아버린다'는 의미로, 집착을 떨쳐버린다는 뜻이었다. 그는 "지상의 일에서 떠나 오직 하나님 속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선언했다.
2. 생애
1904년 유진 벨 선교사 등의 영향으로 개신교에 입교하여 광주선교부의 최초 신자가 되었다. 이후 술과 담배를 끊고 건달 생활을 청산했다. 1909년 포사이트 선교사가 나병 환자를 돌보는 모습에 감동받아 나병 환자 치료에 헌신하게 되었다. 1912년 봉선리에 땅을 기증하여 광주나병원과 나병원 교회를 설립했다.
1907년 순검으로 취직했으나, 을사늑약에 항의하여 일어난 의병들을 풀어준 사건으로 경찰을 그만두었다. 이후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에서 나병 환자를 돕는 일을 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광주 지역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소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24년부터 광주 YMCA 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광주 YMCA 발전에 기여했다. 1927년 신간회 광주지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2년 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1945년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곧 좌익 중심으로 운영되자 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미군정청의 도정 고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호남신문 회장을 맡기도 했다. 같은 해 전남 나주에 한센병 치유자들을 위한 시설인 호혜원을 설립하였다. 1951년 '전국사회사업협회' 회장을 맡았다. 1955년 허백련과 함께 '삼애학원'을 설립하였다. 1958년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시설인 '송등원'을 설립하고, 송등원 옆에 무등원 교회를 세웠다.
1966년 예수의 삶을 따르지 않는 교회의 현실을 개탄하는 경고문을 발표하고 절필하였다. 같은 해 5월 14일 87세로 별세하였고, 광주 지역사회는 사회장을 결정하고 광주공원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였다.
2. 1. 청년 시절
최흥종은 1880년 5월 4일 전라남도 광주읍 불로동에서 아버지 최학신과 어머니 국씨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형이 한 명 있었으나 어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상 장남으로 불렸다. 그는 다섯 살 무렵에 친어머니 국씨를 여의고, 얼마 뒤 새어머니 공씨 밑에서 자랐다. 12년 만에 아버지 최학신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6년 무렵의 조선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었고, 고종이 러시아로 아관파천을 하는 등 외세에 의해 국운이 크게 위협받던 시절이었다. 최흥종은 17세 때부터 계모 공씨와 어린 이복동생들과 함께 세상에 남겨졌다. 그는 이십 대 초반까지도 장터에서 잘 알려진 싸움꾼이었고 건달패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친구 최재익과 함께 광주 장날에 온 사람들에게서 술값을 뜯는 깡패 짓을 하기도 했다.
1904년 12월 25일, 유진 벨 선교사 부부, 오원 의사, 윌슨 선교사/의사, 포사이트 선교사/의사, 변창연 부부, 김총순 부부 등이 목포선교부에서 이주해와 광주군 부동방면 양림리에 광주선교부(광주교회)를 세우고 첫 예배를 드렸다. 이때 선교사들의 조력자인 김총순 부부의 인도로,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와 오언(Clement Owen, 한국명: 오원/吳元) 의사/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하여 광주선교부의 최초의 신자가 된다.
그는 유진 벨 선교사(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실장 존 린튼의 외증조부)의 헌신적인 삶에서 예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느꼈다. 기독교에 입교한 후 술과 담배를 끊고 건달패 생활도 완전히 청산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1909년 4월, 장흥지역에서 선교활동 중이던 오원 선교사가 급성폐렴에 걸려 제중원으로 이송될 때, 목포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 포사이트(W. H. Forsythe)에게 광주로 오라는 전보가 갔다. 유진 벨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최흥종은 자신에게 기독교를 전도했던 김총순(金總巡)과 함께 영산포에서 광주읍으로 들어오는 효천까지 마중을 나갔다. 효천에서 포사이트 선교사를 만나 광주로 돌아오는 도중, 산비탈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나병(한센병) 환자를 만났다. 이 환자는 김총순과 최흥종이 효천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보았던 사람이었다.
이때 포사이트 선교사가 그 나병환자를 자신이 타고 왔던 나귀 위에 태우고, 자신의 털 외투를 벗어 입혔다. 그리고는 나귀의 고삐를 이끌고 광주로 들어왔다. 이 광경을 본 최흥종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는 그의 일생의 신앙생활의 나침반이 되었다. 이 나병환자는 지금의 광주기독병원 맞은편 주차장 인근에 있었던 벽돌가마터에 격리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2주 만에 사망하였다. 이를 계기로 최흥종은 윌슨 선교사와 함께 나병 환자 치료에 헌신하게 되었으며, 1912년에는 봉선리에 1200평의 땅을 기증하여 광주나병원과 나병원 교회를 설립한다.
1906년 봄, 광주읍 북문안(北門內, 현재 광주시 충장로 파출소 옆)에 광주의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고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라 하였다.
1907년 김윤수 집사의 소개로 순검(巡檢)으로 취직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을사조약에 항의하여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1908년 보성지역의 의병장 안계홍(安桂洪)의 부하 12명을 화순으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의병 12명을 풀어주었다. 몇 달 뒤, 순창에서 총살 직전의 의병 6명을 밤에 몰래 유치장 문을 열어 도망치게 하였다. 당시 광주 경무서에는 일본인 고문 1명, 경부(경정 상당) 2명이 조선인 순검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1907년 대한제국이 일본에서 빌린 국채가 13000000KRW에 도달했다. 이 차관의 이자 상환 때문에 대한제국 조정이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되자, 독립을 위해 국가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를 중심으로 1907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광주에서도 최성기(1948년-54년 전남 초대 사세(司稅) 청장(현 지방국세청 청장)이었던 최태근의 부친) 등이 주동이 되어 이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광주에서 10000KRW이 모아졌다. 두 번의 의병 탈출 사건으로 최흥종을 의심하던 일본 경무 고문은 광주 지역 국채보상운동 주모자들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최흥종은 곧 사직서를 내고 1907년 경찰을 떠났다.
이후 윌슨 선교사의 강력한 권유로 1905년 11월 20일에 창설된 제중원(濟衆院, 현 광주기독병원)에서 1908년부터 조수 겸 나병 환자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제중원장은 윌슨이었다. 제중원은 1909년 4월 이후부터 나병 환자(한센병 환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포사이트와 나병 환자 사건을 통해 나병 환자를 따뜻하게 도와준 일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1900년대-1950년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나병 환자가 무척 많았다. 윌슨과 포사이트가 이들의 치료를 맡았고, 김총순 부부와 최흥종이 이들을 돌보았다. 전국의 나병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려고 몰려들어 광주군 봉선리에는 나병 환자 부락이 형성되었다. 1912년 나병원으로 발전하였고, 1926년 여수로 옮겨 애양원이 되었다.
2. 2. 목회 활동과 항일 운동
최흥종은 1904년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원(오긍선) 선교사의 감화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광주선교부의 최초 신자가 되었다. 그는 유진 벨 선교사의 헌신적인 삶에서 예수의 사랑을 체험하고, 기독교인이 된 후 술과 담배를 끊고 건달 생활을 청산했다.
1909년, 오원 선교사가 급성 폐렴으로 위독해지자, 최흥종은 김총순과 함께 포사이트(윌리엄 해리슨 포사이드) 선교사를 마중 나갔다. 이 과정에서 포사이트 선교사가 나병(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이후 나병(한센병) 환자 치료에 헌신하게 된다. 1912년에는 봉선리에 땅을 기증하여 광주나병원과 나병원 교회를 설립했다.
1906년 봄, 광주읍 북문안(현 광주제일교회)에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고 북문안교회라 하였다. 1912년, 최흥종은 김윤수 집사와 함께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
1907년, 최흥종은 순검으로 취직했으나, 을사늑약에 항의하여 일어난 의병들을 풀어준 사건으로 경찰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에서 나병(한센병) 환자를 돕는 일을 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광주 지역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소 후, 유진 벨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 광주 YMCA 제3대 회장을 역임했고, 이후에도 제5대(1932년), 8대(1945년), 10대 회장을 역임하며 광주 YMCA 발전에 기여했다.
1927년, 민족유일당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여 광주지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2년 후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최흥종은 "걸인, 나병(한센병) 환자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헌신적으로 소외된 이웃을 돌보았으며, 그의 목회 활동은 광주 지역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 3. 해방 이후의 활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8월 17일 광주에서 좌우익을 망라하여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에서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최흥종은 광주 지역에서 좌우익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전남 건국준비위원회는 위원장에 최흥종 목사, 부위원장에 김시중(신간회 장성지회장/후일 한민당)과 강해석(고려공산청년회 전남도책), 총무부장에 국기열(전 동아일보 편집인), 조직부장에 김범수(공산당 광주지역 지하조직책임), 재무부장에 고광표(대창석유 대표/후일 한민당 전남위원장), 선전부장에 최인식(전 조선일보 전남특파원/후일 호남신문 편집국장), 치안부장에 이덕우(변호사), 학무부장에 신순언(변호사/후일 한독당 전남 부위원장), 산업부장에 한길상(제4차 조선공산당사건 징역) 등이 선임되었다. 서울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익과 중간파만으로 조직되어 우익이 배제된 것과 달리, 최초의 전남 건준은 좌우익 모두가 참여한 순수한 건국 준비체였다. 그러나 1945년 9월 6일 중앙 건준이 '인민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좌익 중심으로 운영되자, 광주에서도 9월 20일을 기하여 우익들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배제되고 좌익만의 인민위원회로 바뀌게 된다.
1945년 9월 20일 최흥종은 건준위원장 자리를 박준규(광양의 노농운동가)에게 물려주고, 다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1945년 9월 10일 미군정청 군대(책임자 길버트 소령)가 광주에 진주하자, 길버트 소령은 최흥종 목사를 가장 신뢰할 만한 도정 협의자로 여겨 도정 고문위원으로 위촉했다. 도정 고문위원은 최흥종 목사, 최종섭(신간회 광주지회 부회장/후일 한민당), 장용태(후일 조흥은행장)였다. 미군은 도지사에 최흥종 목사의 동생이자 미국 유학생 출신의 의사 최영욱(일제하 광주 YWCA의 지도자 김필례 여사의 부군)을 임명했다.
해방 이후 광주 YMCA가 재건되자 최흥종 목사가 광주 YMCA 회장을 맡았다. 조선 YMCA는 1938년 일본의 동화정책에 따라 일본 YMCA 산하조직으로 강제 편입되었으며, 1944년 조선 YMCA는 자진 폐회 조치하였다. 동시에 광주YWCA도 재건되면서 최흥종의 제수(弟嫂)이자 최영욱 도지사의 부인인 김필례(황해도인)가 총무로 선출되었다.
군정 기간 중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함석헌이 광주에 내려오면 꼭 최흥종 목사를 만났다. 이승만 박사는 그의 진실한 기독교인의 삶에 감동되어 대통령 재임 중에도 전남 인사를 만나면 최흥종 목사의 안부를 물었다. 김구는 최흥종 목사가 정치를 떠난 것을 아쉬워했으며, 함석헌은 그를 '무등산의 은자(隱者)'라고 불렀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적산재산(敵産財産)이었던 호남신문의 회장(사장은 이은상, 편집국장은 최인식)을 맡기도 했다.
1948년 최흥종 목사는 전남 나주에 '음성 나환자'(한센병을 앓았다가 치유된 사람)들을 위한 시설인 호혜원(互惠院)을 설립하였다. 1951년에는 그의 나환자들을 돕는 사업이 전국적인 인정을 받아 '전국사회사업협회' 회장을 맡았다. 1955년에는 허백련 화백과 함께 '청년들에게 농업전문교육을 시키는' '삼애(三愛/하나님, 이웃, 자연 사랑)학원'을 설립하였다. 최흥종 목사가 교장을 맡고, 허백련 화백이 부교장을 맡았다. 이 학교는 그 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1958년에는 6.25 전쟁 이후 늘어난 폐결핵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인 '송등원(松燈院)'을 무등산 자락 원효사 부근에 만들고 운영하였다. 송등원은 최흥종 목사의 인격에 감복한 미국인 선교사 Cardington의 재정적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송등원 옆에 무등원(無等院)교회를 세웠다. 여기서 그는 성경과 노자의 도덕경만을 읽었다.
1966년 2월 전국 교회에 보내는 경고문을 보낸 후 절필(絶筆)하였다. 이 경고문에서 그는 예수의 삶을 따르지 않고 명목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많은 교회의 현실을 개탄하였다. 이 일로 전국 기독교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1966년 2월 10일부터 34일간 금식하자 광주 YMCA 등 광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강제로 최흥종 목사를 무등산 칩거에서 광주 시내의 아들 집으로 데려왔다.
1966년 5월 14일 87세로 별세하였다. 광주 지역사회는 사회장(社會葬)을 결정하고 명예위원장에 이갑성(광복회 회장), 위원장에 허백련, 부위원장에 최상채(전남대총장), 백영흠(광주중앙교회목사), 양명순(광주YWCA 회장)이 선정되었다.
1966년 5월 18일 광주공원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200여 명이 넘는 음성 나환자들과 수십 명의 걸인들이 몰려들어 "아버지, 어찌하여 우리만 남기고 가십니까?"라고 통곡하여 장례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였다.
3. 사상
3. 1. 오방(五放) 사상
1935년, 최흥종은 자신의 아호를 五放중국어이라 정하고, 주위 지인들에게 자신의 사망 통고서를 돌려, 죽은 사람으로 행세했다. 五放중국어이란 '다섯 가지를 놓아버린다'는 의미로, 집착을 떨쳐버린다는 뜻이었다. 그가 놓아버린 다섯 가지는 집안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이었다. 그는 "지상의 일에서 떠나 오직 하나님 속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선언했다.
4. 가족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최학신 | ? ~ 1897년 |
친어머니 | 국씨 | ? ~ 1885년 |
양어머니 | 공씨 | ? ~ ?, 1885년 ~ 1897년까지 최학신과 살음 |
누나 | 최영온 | 1873년 ~ ? |
매형 | 정해업 | 1873년 ~ ? |
조카 | 정율성 | 1914년 ~ 1976년 |
이복남동생 | 최영욱 | 1891년 ~ 1950년 |
이복제수 | 김필례 | 1891년 ~ 1983년 |
부인 | 강명환 | 1895년 ~ 1900년 사이에 결혼 |
최흥종은 7남매 중 차남이었으나 윗형은 요절하였다.
5. 평가 및 영향
최흥종은 1945년 8월 17일 광주에서 좌우익을 망라하여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 위원장으로 추대될 정도로 광주 지역에서 좌우익 모두에게 존경받았다. 전남 건국준비위원회는 처음에는 좌우익 모두가 참여했지만, 1945년 9월 6일 중앙 건준이 '인민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좌익 중심으로 재편되자, 9월 20일 최흥종은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다시 전념하였다.
미군정청 군대는 최흥종을 가장 신뢰할 만한 도정 협의자로 여겨 도정 고문위원으로 위촉했고, 광주 YMCA가 재건되자 회장을 맡았다. 이승만, 김구, 함석헌 등 주요 인사들이 광주에 방문하면 최흥종을 만났으며, 이승만은 그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에 감동하여 대통령 재임 중에도 최흥종의 안부를 물었다. 김구는 최흥종이 정치를 떠난 것을 아쉬워했고, 함석헌은 그를 '무등산의 은자'라고 불렀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적산재산이었던 호남신문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같은 해 전남 나주에 한센병 치유자들을 위한 시설인 호혜원을 설립했고, 1951년에는 전국사회사업협회 회장을 맡았다. 1955년에는 허백련과 함께 청년들에게 농업전문교육을 시키는 삼애학원을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다. 1958년에는 6.25 전쟁 이후 늘어난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시설인 송등원을 무등산 자락에 만들고 운영하였다.
1966년 2월, 최흥종은 예수의 삶을 따르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많은 교회의 현실을 개탄하는 경고문을 전국 교회에 보낸 후 절필했다. 같은 해 5월 14일 별세하자 광주 지역사회는 사회장을 결정했고, 장례식에는 200여 명이 넘는 한센병 치유자들과 수십 명의 걸인들이 몰려와 통곡하였다.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