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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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는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의 아들로, 샤를마뉴의 증손자이다. 그는 864년 슈바벤 공작, 865년 알레만니아의 분봉왕이 되었고, 879년 형 카를만에게 이탈리아 왕위를 양도받았으며, 881년 로마 황제로 대관했다. 882년에는 동프랑크를 통일하고, 884년 서프랑크 왕위를 차지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으나, 무능함과 건강 악화로 인해 887년 폐위되었으며, 88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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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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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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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기간 | 881년 2월 12일 – 887년 11월 |
대관식 | 881년 2월 12일, 로마 |
이전 통치자 | 카롤루스 2세 (877년) |
다음 통치자 | 구이도 디 스폴레토 (891년) |
서프랑크 왕 및 아키텐 왕 통치 기간 | 884년 12월 12일 – 887년 11월 |
서프랑크 왕 및 아키텐 왕 대관식 | 885년 5월 20일, 그랑 |
서프랑크 왕 및 아키텐 왕 이전 통치자 | 카를로마누스 2세 |
서프랑크 왕 및 아키텐 왕 다음 통치자 | 외드 라눌프 2세 |
이탈리아 왕 통치 기간 | 880년 3월 22일 – 887년 11월 |
이탈리아 왕 대관식 | 880년 4월 12일, 라벤나 |
이탈리아 왕 이전 통치자 | 카를로만 |
이탈리아 왕 다음 통치자 | 베렌가리오 1세 |
동프랑크 왕 및 알레만니 왕 통치 기간 | 876년 8월 28일 – 887년 11월 |
동프랑크 왕 및 알레만니 왕 이전 통치자 | 루트비히 2세 |
동프랑크 왕 및 알레만니 왕 다음 통치자 | 아르눌프 |
공동 통치자 | 카를로만 (876년–880년) 루트비히 3세 (876년–882년) |
출생일 | 839년 |
출생지 | 노이딩겐 |
사망일 | 888년 1월 13일 (48–49세) |
사망지 | 도나우에싱엔, 카롤링거 제국 |
매장지 | 라이헤나우 수도원, 보덴호 (현재 독일) |
배우자 | 리차르디스 (862년 결혼) |
자녀 | 베른하르트 (사생아) |
왕조 | 카롤링거 왕조 |
아버지 | 루트비히 2세 |
어머니 | 헤마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칭호 | |
다른 이름 | 카를 3세 |
별칭 | 비만왕 |
2. 생애
카롤루스 3세는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와 왕후 엠마의 아들로, 876년 아버지 사후 알레마니아(후의 슈바벤)를 상속받았다. 879년 형 카를만에게서 이탈리아 왕위를, 881년 교황 요한 8세에게서 로마 황제위를 받았다. 882년 루트비히 3세의 유산을 상속받아 동프랑크 전체를, 884년 카를로만의 사망으로 서프랑크 왕위를 위임받아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카롤루스 3세는 간질을 앓았고, 사라센의 침입에 맞서 이탈리아 원정을 반복했지만 실패했다. 886년 파리에 침공한 바이킹에게는 약 317.51kg의 은을 지불하고 강화를 맺었다. 서자 베른하르트와 보소의 아들 루이 3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887년 11월, 조카 아르눌프의 반란으로 카롤루스 3세는 퇴위했고, 888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다시는 통일되지 않았다.
2. 1. 생애 초반
카롤루스 3세는 839년 동프랑크 왕국(동프랑크) 독일인 루트비히와 바이에른의 엠므의 셋째 아들로 바이에른에서 태어났다. 샤를마뉴의 증손이자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다.어린 시절부터 간질을 앓는 등 병약했던 카롤루스는 "비만왕"(Carolus Crassusla)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12세기에 처음 사용된 표현이다. 슈바벤의 리첼다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얻지 못했고, 서자 베른하르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859년 브라이스가우 백작, 864년 슈바벤 공작과 라이티아 백작, 865년 알레마니아 분봉왕을 거쳐, 876년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 사후 알레마니아(후의 슈바벤)를 상속받았다.
2. 1. 1. 출생과 젊은 시절
카롤루스 3세는 839년 6월 13일 동프랑크 왕국(동프랑크)의 국왕 독일인 루트비히와 바이에른과 아르톨프의 공작 구엘프의 딸인 바이에른의 엠므의 셋째 아들로 바이에른에서 태어났다. 라틴어로는 Carolusla, 독일어로는 Karlde, 프랑스어로는 Charles프랑스어로 불렸다. 샤를마뉴의 증손자이자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다. 어머니 바이에른의 엠므는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계비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친여동생이기도 하다.카를은 유아기 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카를이 태어난 직후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세례를 받으러 갔을 때, 갑자기 거품을 물고 실신했다. 그는 제단으로 끌려가 치료를 받았다. 이로써 한때 그의 영혼에 악마가 깃들었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독실한 신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성가대에 들었고, 끊임없이 기도와 성가를 연습했다 한다. 또한 성서와 교회의 계명대로 삶을 살았다. 나중에 프랑크족 역사가들은 그를 가리켜 '하느님과 교회에 순종적이고, 기도와 찬양을 쉬지 않았으며, 관대한 기부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하여 Christian prince영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비만이었던 그는 나중에 뚱보왕(Charles the Fat영어), 큰 사람(Kral le Grose프랑스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큰 덩치와는 다르게 카를은 유년 시절부터 몸이 상당히 병약했으며, 간질을 앓았다. 그는 나중에 서프랑크도 다스렸는데, 그리하여 서프랑크에는 두 명의 샤를 3세가 존재하게 되었다.
859년 바이에른 왕국의 분국왕인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알레만니아의 일부와 로트링겐의 남부를 합쳐 브라이스가우(Breisgau)라는 지역을 신설하고 카를을 브라이스가우 백작으로 임명했다.[5] 863년 맏형 카를만이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반란을 기도하다가 실패하자, 카를은 관망하다가 864년 둘째 형 소 루트비히와 함께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때 형 카를만은 그에게 바이에른의 공동 국왕직을 제의하기도 했다. 862년 카를은 알라홀핑 가문 출신이며 팔라틴 백작 에르찬가르(Erchanger)의 딸 슈바벤의 리첼다와 결혼했다. 그러나 슈바벤의 리첼다에게서는 자녀가 없었고, 카를은 사생아 몇 명만을 두게 되었다. 서자 알레만의 카를만은 876년 어려서 사망했고, 다른 서자 베른하르트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황태자로 삼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비만왕" (''Carolus Crassus''la)이라는 별명은 동시대에 사용된 것이 아니다. 12세기에 익명의 "작센 연대기 작가"가 처음 사용했다. 찰스의 신체적 크기에 대한 동시대의 언급은 없지만, 이 별명은 굳어져 대부분의 현대 유럽 언어에서 일반적인 이름으로 사용된다(''Charles le Gros''프랑스어, ''Karl der Dicke''de, ''Carlo il Grosso''it).[3]
그의 숫자는 거의 동시대에 사용되었다. 찰스의 죽음을 기록한 동시대인인 프륌의 레기노는 그를 "동일한 이름과 품위의 세 번째 황제 찰스" (''Carolus imperator, tertius huius nominis et dignitatis''la)라고 불렀다.[4]
2. 1. 2. 슈바벤과 알레만니아의 영주
864년 카를은 슈바벤 공작과 라이티아 백작에 임명되었고, 865년에는 알레만니아의 분봉왕이 되었다.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는 세 아들들에게 각자 차지할 땅을 지목하도록 했는데, 카를만은 바이에른을, 청년 루트비히는 작센과 프랑켄, 튀링겐을, 뚱보 카를은 알레만니아와 슈바벤, 라이티아(독일 바이에른주 남부와 오스트리아 포어아를베르크주 전역,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걸쳐 있는 티롤 지방 전역 및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북동부)를 지목했다.[5] 프랑크푸르트 지역은 삼형제가 공유하기로 했다.카를은 자신의 영지인 슈바벤과 알레만니아의 군대 일부를 이탈리아로 데려와 교황 요한 8세에게 봉헌하여, 사라센의 침략에 대비한 교황 직속 해군 창설을 지원했다.
876년 8월 28일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카를은 슈바벤을 상속받아 슈바벤의 왕이 되었다. 이때 알자스 지역도 추가로 상속받았다. 879년 11월부터 뇌졸중, 쥐나는 병, 마비 증후군으로 병석에 누운 맏형 카를만을 대신하여 이탈리아를 다스렸으며, 카를만에게서 바이에른의 통치권을 위임받기도 했다. 바이에른은 그의 형이자 카를만의 동생인 청년 루트비히에게 넘어갔지만, 882년 1월 20일 청년 루트비히의 아들들이 일찍 죽고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다시 카를에게 돌아왔다.
859년, 카를루스는 알레만족의 변경백인 브라이스가우 백작이 되었다.[5] 863년, 맏형 카를만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듬해 루트비히 3세도 카를만을 따라 반란을 일으켰고, 카를루스도 합류했다. 카를만은 바이에른 공작 영지를 받았다. 865년, 루트비히 2세는 남은 영토를 상속자들에게 분할해야 했다. 작센 공작령(프랑켄 공작령 및 튀링겐 공작령과 함께)은 루트비히에게, 알레만니아(슈바벤 공작령 및 레티아와 함께)는 카를루스에게 주어졌고, 로타링기아는 두 아들 사이에 분할될 예정이었다.
876년,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카를 3세는 형인 카를만, 루트비히 3세와 함께 아버지의 유산을 분할하여 알레마니아(후의 슈바벤)를 상속받았다.
2. 2. 이탈리아의 통치자
879년 맏형 카를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이탈리아를 물려받았고,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리[33]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이미 성인이었던 카를만의 서자 케른텐 공작 아르눌프는 이에 반발하기도 했다. 뚱보 카를은 886년까지 재위 기간 대부분을 이탈리아를 왕래하며, 이탈리아에서도 일정 기간 체류하였다. 880년에는 서프랑크의 루이 3세, 샤를로망 형제와 자신의 친형 루트비히 3세 등과 함께 로트링겐에서 리베몽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그때까지 루트비히 3세가 차지한 로트링겐의 영토는 모두 루트비히 3세의 것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로타르 2세의 서자였던 알자스 공작 위그는 877년, 878년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했지만 묵살당했고, 880년 리베몽 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자신의 상속권을 요구했다. 리베몽 조약에서 뚱보 카를과 서프랑크의 루이 3세, 샤를로망 형제와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는 보소 축출 및 위그 추방을 결의하였다. 이 회의의 공증인의 동생 테이바우트(Thiébaut)를 보내 위그를 토벌할 군대를 결성하였다.880년 여름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열린 이탈리아 귀족 회의에서 정식으로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880년 카를은 서프랑크의 서프랑크의 루이 2세와 샤를로망 형제와 함께 리베몽에서 로트링겐의 영토 분할 조약(리베몽 조약)을 체결하는 데 참석하였다. 그해 8월과 9월에는 서프랑크의 서프랑크의 루이 2세와 샤를로망 형제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비엔나를 침공, 스스로 프로방스의 왕을 자처하는 보소를 공격했으나 제거하지 못했다.[34] 카를은 보소의 친척인 오툉의 리사르를 시켜 882년 9월 보소의 영역을 공략하고, 그를 비엔나로 추방하는데 성공한다. 이때부터 보소의 영향력은 비엔나와 주변으로 국한되었다. 887년 1월 보소가 사망하자 보소의 처이자 카를의 사촌누이이기도 한 이르밍가르트의 보호 요청으로, 뚱보 카를은 보소의 아들 맹인 루트비히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이고 후견인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의 영향력은 단기간이지만 이탈리아와 서프랑크에까지 미쳤다.
880년 8월 뚱보 카를은 서프랑크의 루이 3세, 샤를로망과 함께 보소 토벌을 목적으로 프로방스를 공격했다. 프로방스와 마콘(Macon)을 점령한 카를과 루이 3세, 샤를로망의 연합군은 보소를 비엔나로 추방했고, 같은 달 비엔나까지 점령했다. 카를은 비엔나 성의 왼쪽에서 공격을 맡았지만, 그러나 곧 연합군에서 이탈하여 되돌아갔는데, 881년 2월 12일 황제관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서였다.
876년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879년 카를만으로부터 이탈리아 왕위를 양도받았다.
2. 3. 치세기간 중
880년대 초, 알프레드 대왕에게 878년 에탄던 전투에서 패배한 대 이교도 군대의 잔당이 저지대 국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카롤루스의 형제 동프랑크의 루이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그들에 맞서 싸웠지만, 882년 1월 20일 짧은 원정 후 사망하여 카롤루스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카롤루스는 전체 동프랑크 왕국을 재통합했다.[11]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후, 카롤루스는 바이킹을 처리하기 위해 보름스에서 회의를 열었다. 카린티아의 아르눌프와 작센의 하인리히 아래 여름에 동프랑크 전역에서 군대가 소집되었다. 주요 바이킹 캠프는 그 후 아셀트 포위전에서 포위되었다. 카롤루스는 그 후 바이킹 지도자 프리슬란트의 고트프리트와 지크프리트와 협상을 시작했다. 고트프리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카롤루스의 봉신이 되었다. 그는 로타르 2세의 딸인 기젤라와 결혼했다. 지크프리트는 매수되었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의 암시에도 불구하고, 이 캠페인 동안 카롤루스의 행동을 비판하는 동시대 기록은 없었다.[11] 885년, 카롤루스는 고트프리트와 그의 처남인 알자스의 위그를 두려워하여 로비트 근처 스피이크에서 회담을 열었고, 그곳에서 바이킹 지도자는 그의 함정에 빠졌다. 고트프리트는 처형되었고, 위그는 눈이 멀어 프륌으로 보내졌다.
882년부터 884년까지 빌헬미너 전쟁이 판노니아 변경백령 (후에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을 휩쓸었다. 카롤루스의 서자 조카인 카린티아의 아르눌프는 반란군 엔겔스찰크 2세와 동맹을 맺어, 이 지역에서 카롤루스가 임명한 변경백인 오스트리아의 아리보에 대항했다. 대 모라비아의 통치자 스바토플루크 1세는 아리보를 돕기로 동의하고 884년 카움베르크에서 카롤루스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황제는 빌헬미너 가문의 봉신들을 잃고 조카와의 관계가 끊어졌지만, 모라비아의 ''공작''과 이 지역의 다른 슬라브 ''공작''들로부터 강력한 새로운 동맹국을 얻었다.

884년 12월 12일 서프랑크의 카를로만 2세가 사망하자, 왕국의 귀족들은 카를에게 왕위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카를은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가 차지한 세 번째 왕국이었다.[12]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카를은 브르타뉴를 제외한 카를로만의 모든 왕국을 계승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13] 카를은 885년 5월 20일 남부 로렌의 보주 산맥에 있는 그랑에서 ''갈리아의 왕(rex in Gallia)''으로 랑그르의 주교 게일로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을 가능성이 높다.[14] 게일로는 그를 위해 특별한 서프랑크 씰까지 개발했지만, 서프랑크에서의 카를의 통치는 항상 매우 느슨했고, 그는 대부분의 일상적인 업무를 고위 귀족들에게 맡겼다.
서프랑크(훗날의 프랑스)는 저지대 국가에 비해 바이킹의 위협을 덜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885년, 시그프레드가 이끄는 거대한 함대가 수년 만에 처음으로 센 강을 거슬러 올라와 파리를 포위했다. 시그프레드는 다시 뇌물을 요구했지만, 이번에는 카를이 거절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에 있었고, 파리의 백작 오도는 적진을 몰래 통과하여 그의 도움을 구했다. 카를은 작센의 헨리를 파리로 보냈다. 886년, 질병이 파리에 퍼지기 시작하자 오도 자신이 카를을 찾아 지원을 요청했다. 카를은 대군을 이끌고 롤로의 군대를 포위하고 몽마르트르에 진영을 세웠다. 그러나 카를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 그는 공격자들을 센 강으로 보내 반란을 일으킨 부르고뉴를 약탈하게 했다. 바이킹이 다음 해 봄에 프랑스에서 철수했을 때, 그는 그들에게 약속한 은 약 317.51kg를 주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의 카를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다.
카를은 포위 기간 동안과 이후 파리에 머무는 동안 서프랑크 수혜자들에게 여러 헌장을 발행했다. 그는 스페인 변경주와 프로방스에서, 특히 노르망디에서 그의 선임자들이 부여한 권리와 특권을 인정했는데, 브르타뉴 공작 알랭 1세가 낭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 그는 낭트와 접촉했다. 카를은 알랭에게 ''왕(rex)''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권리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13] 황제로서 그는 그 특권을 가졌을 것이고, 알랭이 그 칭호를 사용한 것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897년에서 900년 사이에 작성된 헌장에는 알랭이 레동 수도원에서 기도하도록 명령한 ''카롤루스''의 영혼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는 아마도 뚱보 카를일 것이다.
카를 3세는 황후 슈바벤의 리첼다(Richardis)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서자 알레만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정식 계승자로 선포하려 했으나, 주교, 대주교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카를은 교황 하드리아노 3세를 보름스 제국 의회에 초대했으나, 하드리아노 3세는 885년 10월 포 강에서 사망했다. 주교들은 카를이 교황을 죽였다고 의심했고, 그는 알레만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정식 후계자로 선포했다.
886년 초, 카를은 교황 스테파노 5세를 독일 바이브링엔으로 초대하여 베른하르트 승인을 요구하려 했으나, 스테파노 5세는 887년 4월 30일 참석을 취소했다. 카를은 여러 번 교황청에 사람을 보내 베른하르트 승인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2. 3. 1. 이탈리아 원정과 서로마 황제 즉위
뚱보 카를은 교황과 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881년 7월 18일 교황 요한 8세는 바티칸을 위협하는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에게 반발하여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황제관을 약속했다.[26] 가톨릭 신앙인이었던 카를을 주목한 교황은 그를 황제관을 받을 적임자로 보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관을 수여했다. 882년 2월 12일 그는 로마 황제로 선언되었다. 그는 10개월 만에 로마로 가서 제관을 받았고, 그해 요한네스 8세의 초청으로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갔다. 881년 12월 교황에게 로마에 도착, 요한네스 8세의 축성세례를 받고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바로 회군, 베르덩으로 돌아왔다.[25] 그는 비만인데다가 평소 몸이 약해, 자주 병을 앓아 정사를 돌보는데 무기력했다 한다.
이에 앞서 11월에 이탈리아에 사자를 보내 귀도 3세에게 불법으로 교황을 위협하지 말도록 크게 엄포를 놓기도 했다. 881년 봄과 겨울 제국의 북동부 네덜란드에 바이킹이 침략, 카를은 이들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879년 카를만으로부터 이탈리아 왕위를 양도받았다.[25]
880년 7월 18일, 교황 요한 8세는 스폴레토의 가이 2세에게 평화를 구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공작은 이를 무시하고 교황령을 침략했다. 요한은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샤를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881년 2월 12일 샤를을 황제로 대관했다. 이는 서유럽의 전반적인 부흥에 대한 기대를 동반했지만, 샤를은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 부적합했다. 샤를은 가이 2세에 맞서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11월까지 교황 서신은 여전히 샤를에게 조치를 간청했다.
882년 2월, 샤를은 라벤나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공작, 황제, 교황은 평화를 맺었고 가이와 그의 삼촌 가이 3세는 교황령을 반환하겠다고 맹세했다. 3월 샤를에게 보낸 서신에서 요한은 그 맹세가 지켜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883년, 가이 3세가 된 스폴레토 공작 가이 3세는 5월 말 노난툴라에서 열린 제국 종교 회의에서 반역죄로 기소되었다.[10] 그는 스폴레토로 돌아가 사라센족과 동맹을 맺었다. 샤를은 베렌가리오를 가이 3세에 대항하여 보냈다. 베렌가리오는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이탈리아 전역을 휩쓴 전염병으로 인해 퇴각해야 했다.[10]
883년, 샤를은 베네치아 공작 조반니 2세 파르테치파치오와 조약을 맺어 공작 암살범이 제국 영토로 도망칠 경우 금 100 파운드를 벌금으로 부과하고 추방하기로 했다.
2. 3. 2. 통일 전쟁과 이민족과의 전쟁

한편 교황 요한 8세는 귀도 3세에게 계속 시달렸고 카롤루스 3세에게 지원병을 요청했지만, 그는 군대를 보내지 못하고 사절만 여러 번 보냈다. 880년 7월 18일 교황 요한 8세는 스폴레토의 귀도 2세에게 평화 협정을 요청했으나, 귀도 2세는 이를 무시하고 교황령을 침략했다. 교황은 880년 11월까지 계속 지원을 요청했다.[11] 881년 2월 12일 황제로 즉위한 후, 카롤루스 3세는 그해 여름부터 알자스 셀레스타트(Sélestat)에 샤를마뉴의 아헨 황궁을 본뜬 새 황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882년 이후 그는 이탈리아 문제에 거의 관여하지 못했다. 카롤루스 3세는 친척인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를 시켜 귀도 3세를 공격하게 했지만, 전염병과 추위로 인해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881년 여름 바이킹이 네덜란드를 침략하자 카롤루스 3세는 간신히 그들을 물리쳐 패퇴시켰다. 882년 2월, 그는 라벤나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스폴레토의 귀도 2세와 그의 삼촌 카메리노의 귀도 백작을 소환했다. 여기서 카롤루스 3세는 스폴레토의 귀도 2세와 카메리노의 귀도에게 교황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해 3월의 편지에서 교황 요한 8세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882년 1월 20일, 형 소 루트비히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카롤루스 3세는 작센과 바이에른을 차지하여 동프랑크를 통일했다. 프로방스를 다스리던 보소가 881년 스스로 독립하여 왕을 자처하자, 루이 3세, 샤를로망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 형제와 함께 프로방스와 부르고뉴를 침략하여 보소를 공격했다. 883년 5월 말, 카롤루스 3세는 노난툴리아에서 의회를 열고 사라센과 동맹을 맺은 스폴레토 공작을 반역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귀도의 작위를 박탈하기 위해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에게 군사를 보내 귀도를 공격하게 했다. 베렝가리오 1세는 스폴레토를 공격하며 스폴레토 공작에게 은퇴를 종용했다.
882년 카롤루스 3세는 라인란트를 습격한 바이킹을 아셀트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바이킹은 계속 그의 제국에 출몰했다. 882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후, 카롤루스 3세는 보름스로 침략한 바이킹을 처리하기 위해 보름스 의회를 개최했다. 그는 케른텐 공작 아르눌프와 작센 공작 하인리히를 동프랑크 왕국 전체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바이킹과 싸우게 했다. 아르눌프와 하인리히의 군대는 아셀트(Asselt)에서 바이킹을 포위했다. 얼마 후, 카롤루스 3세는 바이킹 족장과 협상하여 바이킹 족장 고드프리와 시그프리드에게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고드프리는 가톨릭 세례를 받고 개종한 뒤 카롤루스 3세의 봉신이 되었으며, 뫼즈강변 에슬루의 영주로 임명되었다. 고드프리는 곧 카롤루스 3세의 사촌형제인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의 딸 기셀라와 결혼했다. 시그프리드에게도 영지를 주어 돌려보냈다.[11]
882년 카롤루스 3세는 부르군트의 리샤르를 보내 프로방스를 차지하고 자립한 보소를 공격하게 했다. 883년 귀도를 피해 정치 망명한 이탈리아군 사령관 베니스 공작 조반니 2세 드 파르키티파치오에게는 벌금 100 데나리우스를 물린 뒤 이탈리아로 추방했다.
882년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884년 11월 12일 샤를로망이 죽자, 그들의 이복동생이자 카롤루스 3세 자신의 미성년 5촌 조카인 샤를 3세를 대신하여 서프랑크의 왕위까지 차지했다. 아베(Abbé)의 위그는 말더듬이왕 루이의 유복자 아들인 어린 단순왕 샤를 3세 생쁠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보고, 카롤루스 3세를 초청할 것을 제의했고, 이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884년 12월 12일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카롤루스 3세를 왕으로 받들고 그를 초청했다. 카롤루스 3세는 자신의 휘하에 두겠다며 수락했다. 885년 5월 20일 랑그르의 주교 게일은 로트링겐에서 카롤루스 3세를 렉스 갈리아노룸(갈리아의 왕)이라 선언했다.[14]
884년 12월 12일 서프랑크의 카를로만 2세가 사망하자, 왕국의 귀족들은 카를에게 왕위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카를은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12]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카를은 브르타뉴를 제외한 카를로만의 모든 왕국을 계승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13]
서프랑크(훗날의 프랑스)는 저지대 국가에 비해 바이킹의 위협을 덜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885년, 시그프레드가 이끄는 거대한 함대가 수년 만에 처음으로 센 강을 거슬러 올라와 파리를 포위했다. 시그프레드는 다시 뇌물을 요구했지만, 이번에는 카롤루스 3세가 거절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에 있었고, 파리의 백작 오도는 적진을 몰래 통과하여 그의 도움을 구했다. 카롤루스 3세는 작센의 헨리를 파리로 보냈다. 886년, 질병이 파리에 퍼지기 시작하자 오도 자신이 카롤루스 3세를 찾아 지원을 요청했다. 카롤루스 3세는 대군을 이끌고 롤로의 군대를 포위하고 몽마르트르에 진영을 세웠다. 그러나 카롤루스 3세는 싸울 의지가 없었다. 그는 공격자들을 센 강으로 보내 반란을 일으킨 부르고뉴를 약탈하게 했다. 바이킹이 다음 해 봄에 프랑스에서 철수했을 때, 그는 그들에게 약속한 은 약 317.51kg를 주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의 카롤루스 3세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다.
2. 3. 3. 제국 재통일과 내분
882년부터 884년까지 동부 공국에서 빌헬마이너 전쟁이라 불리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판노니아의 후작 엔켈샬크 2세와 카를의 조카인 케른텐의 아르눌프가 주도했다. 이 전쟁에서 카를을 도운 대모라바 왕국의 스바토풀크 1세는 884년 카움스부르크에서 카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전쟁 이후 아르눌프는 카를의 정적이 되었지만, 카를은 대모라바 왕국이라는 강력한 동맹을 얻었다. 884년, 카를은 샤를로망 3세의 유복자이자 당시 5세였던 샤를 르 생플을 대신해 서프랑크의 왕위를 겸하며 카롤루스 대제의 영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카를은 간질과 뇌졸중으로 인해 무기력해졌다.885년 랑그르 주교 게일로(Geilo)에 의해 서프랑크 왕국의 왕관을 받았지만, 카를은 서프랑크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건강 문제로 서프랑크 문제에 쉽게 개입할 수 없었다. 같은 해 초, 시그프리드가 이끄는 바이킹 함대가 센강을 거슬러 파리를 포위했다. 카를은 시그프리드의 금전 요구를 거부했고, 파리 백작 외드는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바이킹에 맞섰다. 카를은 작센 공작 하인리히를 파리에 보냈다. 885년 6월, 카를은 프로방스 백작 보소가 세운 프로방스와 부르군트를 제외한 샤를마뉴 시대의 프랑크 왕국 영토를 모두 획득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노르망디, 폴란드, 프로이센 일대의 바이킹,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을 약탈하던 슬라브족과 마자르족을 돈으로 매수하여 돌려보냈다.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을 돈으로 매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후들과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885년 7월 9일 교황 하드리아노 3세가 사망하고, 9월에 교황 스테파노 5세가 선출되었다. 교황 스테파노 5세는 카를 3세의 승인 없이 주교로 서임되고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카를 3세가 그의 선출에 찬성했기 때문에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스테파노 5세의 보호 요청을 카를 3세가 거부하자, 스폴레토의 공작 구이도가 이탈리아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885년 초 덴마크의 바이킹 수령 지그프리드(Sigfred)와 시르니크(Sinric)는 서프랑크 왕국 북동부 해안가를 약탈했다. 지그프리드는 카를에게 뇌물을 요구했지만, 카를은 거절했다. 지그프리드는 700척의 배와 3~4만 명의 바이킹을 이끌고 센강 강변을 약탈했다. 같은 해 바이킹이 파리 외곽을 점령하고 공물을 요구했고, 885년 10월부터 886년 2월까지 네우스트리아를 공격하고 파리를 약탈했다. 886년 파리에 질병이 돌았고, 외드는 이탈리아에 있던 카를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카를은 몽마르트르에 진영을 설치했지만, 롤로와 싸울 마음은 없었다. 885년 11월부터 886년에 걸친 파리 공성전 (885–886년)에서 외드는 바이킹을 몰아내고 서프랑크 귀족들의 신망을 얻었다. 카를은 외드를 보내 부르군트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고, 바이킹족과 협상했다. 887년 봄, 바이킹들은 철수하면서 700 데나리온 또는 은을 요구했다. 부르군트 반란군을 평정한 외드는 카를의 약속을 듣고 실망하여 이행을 주저했고, 카를의 명성은 타격을 입었다.
카를은 황후 슈바벤의 리첼다(Richardis)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885년 봄, 서자 알레만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정식 계승자로 선포하려 했으나, 주교, 대주교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카를은 교황 하드리아노 3세를 보름스 제국 의회에 초대했으나, 하드리아노 3세는 885년 10월 포강에서 사망했다. 주교들은 카를이 교황을 죽였다고 의심했고, 그는 알레만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정식 후계자로 선포했다.
886년 초, 카를은 교황 스테파노 5세를 독일 바이브링엔으로 초대하여 베른하르트 승인을 요구하려 했으나, 스테파노 5세는 887년 4월 30일 참석을 취소했다. 카를은 여러 번 교황청에 사람을 보내 베른하르트 승인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같은 해 바이킹이 파리에 쳐들어오자, 외드는 카를 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를은 메츠 지역을 탈환하고 파리시를 구하기로 결정, 프랑켄 공작 알레만니아의 하인리히를 보냈지만, 하인리히는 886년 8월 28일 바이킹군에 살해되었다. 카를은 부르군트 반란을 진압하고 10월에 파리에 도착, 바이킹 지도자를 면담했다. 시그프리드는 700 데나리온을 요구했고, 카를은 돈을 부르고뉴산 자루에 넣어 전달했다.
카를 3세는 리치가르드와의 결혼에서 자녀가 없었기에, 사생아 베른하르트를 885년에 후계자로 인정받으려 했으나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교황 하드리아노 3세의 지지를 받았고, 885년 10월 보름스 회의에 초대했지만, 교황은 포 강을 건너다 사망했다.[15] 하드리아노 3세는 카를을 위해 주교들을 제거하고 베른하르트를 합법화하려 했다.[15] 마인츠 대주교 리우트베르트가 주요 반대자였을 것이다. 카를은 베른하르트를 로타링기아 왕으로 만들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6] 말더듬이 노케르는 베른하르트를 잠재적 후계자로 여겼다.[16]
카를은 "proles"(자손)라는 용어를 헌장에 삽입하여 베른하르트를 합법화하려 했다.[17] 886년 초, 교황 스테파노 5세를 만나 사생아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 협상했다. 887년 4월과 5월에 바이블링겐 회의가 계획되었으나, 교황은 887년 4월 30일 참석을 취소했다. 베렌가르는 887년 5월 초 황제와 화해하고 보상했다.[18]
카를은 베른하르트 계획을 포기하고 프로방스 루이를 887년 5월 키르헨 회의에서 아들로 입양했다.[19] 루이와의 합의는 로타링기아에서 베른하르트 부왕직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6월 또는 7월에 베렌가르가 키르헨에 도착했는데, 카를 후계자로 선언되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는 카를 폐위 직후 이탈리아 왕이 되었을 수 있다.[20] 파리 백작 오도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키르헨에서 카를을 방문했을 수 있다.[20] 이 회의들은 카를의 사생아 아들을 후계자로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21]
2. 4. 퇴위 이후
카를 3세는 887년 말, 아들의 계승 계획을 포기하고 친척인 프리울리의 변경백 베렌가리오를 궁정으로 맞이했다. 그는 베렌가리오를 상속자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23] 이후 그의 측근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먼저 아내 리카르드가 리우트바르트 베르첼리 주교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리카르드는 화형 재판으로 무죄를 증명하고[22] 수도원 생활을 위해 그를 떠났다. 카를은 미움을 받던 리우트바르트를 해임하고 리우트베르트 (마인츠 대주교)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같은 해, 프로방스의 에르멩가르트가 아들 맹인 루이를 카를에게 보호받도록 데려왔다. 카를은 루이를 프로방스 왕으로 확정하고(입양했을 수도 있다) 궁정에서 살도록 허락했다. 그는 루이를 왕국 전체와 "제국"의 상속자로 만들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1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의회를 소집했으나, 조카 카린티아의 아르눌프가 반란을 일으켜 독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동프랑크 왕국에서 그의 모든 지지가 무너졌다. 알레만니는 그를 끝까지 지지했지만, 로타링기아는 그의 폐위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다. 11월 17일까지 카를은 권력을 잃었지만, 정확한 사건 전개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아르눌프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병이 났었지만 베르나르와 루이에게 보살핌을 맡겼다. 그는 남은 생을 보낼 수 있도록 슈바벤에 영지를 요청하여 나우딩겐 (도나우에싱겐)을 받았다. 그곳에서 6주 후인 888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23]
프뤼의 레기노에 따르면, 제국은 붕괴되어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고, 왕국의 각 부분은 그들 자신의 "내장"에서 "소왕"을 선출했다. 그는 죽은 후 라이헤나우 수도원에 명예롭게 매장되었고, ''풀다 연대기''는 그의 경건함과 신성을 칭찬했다. 카를에 대한 동시대의 의견은 이후의 역사 기록보다 더 호의적이며, 그의 성공 부족은 질병과 허약함의 결과라는 현대의 제안이 있다.[23]
카를은 루이 맹인의 대의를 옹호하고 카롤링거 왕조에게 "신성한"(교회) 호의를 받지 못하면 통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고안된 라틴어 산문, ''비시오 카롤리 그로시''의 주제였다.[23]
2. 4. 1. 반란과 몰락
리첼다 황후가 아키텐츨러(총리대신)와 간통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리첼다 황후는 결백을 주장하며 불고문을 통해 무죄를 증명했다. 리우트바드 주교는 왕비의 결백을 인정했고, 리첼다는 안드라우 수도원으로 떠났다.[35] 리우트바드는 교황 스테파노 5세에게 왕비의 결백을 보고했다. 카를은 리우트바드를 왕실 자문관에서 해임하고 마인츠의 대주교 리우트베르트를 대신 임명했다.886년 파리를 침입한 바이킹족을 돈으로 매수해 돌려보냈고, 887년 1월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에서 반란을 일으킨 보소 5세가 사망하자, 이탈리아의 이르멘가르트의 요청으로 그의 아들 맹인왕 루이를 보호하였다. 네우스트리아의 후작 강력공 로베르는 카를의 무능력함에 염증을 느껴 아르눌프의 편에 섰다. 아르눌프는 카를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서프랑크 귀족들도 라울 등을 중심으로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반란에 가담했다.
카를 3세는 서자 베른하르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교황 하드리아노 3세의 지지를 얻어 보름스 회의를 소집했으나, 교황이 가는 길에 사망하면서 실패했다.[15] 마인츠 대주교 리우트베르트가 반대의 중심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카를은 베른하르트를 로타링기아 왕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16] 말더듬이 노케르는 저서에서 베른하르트가 칼을 찬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카를 3세에게 바이킹의 프름 수도원 약탈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언급했다.[16]
카를은 다시 베른하르트를 합법화하려 시도했고, 886년 초 교황 스테파노 5세와 협상하여 다음 해 바이블링겐에서 회의를 계획했으나, 교황이 참석을 취소하면서 무산되었다.[18] 베렌가르는 황제와 화해하고 많은 선물을 바쳤다.[18]
카를은 결국 베른하르트 대신 프로방스 루이를 키르헨 회의에서 아들로 입양했다.[19] 파리 백작 오도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키르헨을 방문했을 수 있다.[20] 이러한 회의들은 카를의 사생아 아들을 후계자로 확정하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루이를 대신 확정하기 위해 필요했을 수 있다.[21]
876년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카를 3세는 알레마니아(후의 슈바벤)을 상속했고, 879년 카를만으로부터 이탈리아 왕위를, 881년 로마 황제위를 받았다. 882년 루트비히 3세의 유산을 상속받아 동프랑크 전체를, 884년 서프랑크 왕위를 받아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그는 간질을 앓고 있었고, 사라센 침입에 대한 이탈리아 원정은 실패했으며, 886년 바이킹에게 700리브르를 지불하고 강화를 맺었다. 서자 베른하르트와 루이 3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887년 11월, 조카 아르눌프의 반란으로 퇴위했고, 888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고 다시 통일되지 않았다.
2. 4. 2. 은퇴와 최후
887년 11월, 카를은 동프랑크 동부에서 왕을 자처한 아르눌프의 군사가 아헨에 입성하여, 11월 11일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르눌프에 의해 개최된 제국회의에서 폐위되었다.[36] 그는 11월 17일 퇴위를 종용당하고 알레만니아로 은퇴하였다. 아르눌프에게 노이딩겐에서 살 수 있는 몇 채의 집을 요구했는데, 이는 샤를마뉴가 이룩한 제국의 몰락을 의미했다.만년의 카를은 뇌졸중과 간질 등의 병마와 빈곤으로 고통받았다. 888년 1월에는 이름뿐인 황제직에서도 물러나 알레만니아 노이딩겐(Neudingen)으로 가 병석에 누웠고, 곧 병마와 빈곤으로 고생하다가 1월 13일에 사망하였다. 어려서부터 간질로 오랫동안 고생했으며, 일설에는 노이딩겐에서 그를 수행하던 종이 갑자기 그를 목졸라 죽였다고도 한다.[36]

카를이 무능하고 무기력하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887년 말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해 여름, 아들의 계승 계획을 포기한 카를은 그의 궁정에 프리울리의 변경백 베렌가리오를 맞이했다. 그는 이들 중 한 명 또는 두 명 모두를 각 왕국의 상속자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러자 그의 측근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그의 아내 리카르드가 그의 수석 장관이자 대주교, 리우트바르트, 베르첼리 주교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그녀는 화형 재판에서 무죄를 입증하고[22] 수도원 생활을 위해 그를 떠났다. 그는 그 다음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던 리우트바르트를 반대하며 그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리우트베르트 (마인츠 대주교)를 임명했다.
그 해, 그의 종손녀인 프로방스의 에르멩가르트, 황제 루이 2세의 딸이자 프로방스의 보소의 아내는 그녀의 아들 맹인 루이를 그에게 보호를 받도록 데려왔다. 카를은 루이를 프로방스에서 확정하고(그를 입양했을 수도 있다) 그들이 그의 궁정에서 살도록 허락했다. 그는 아마도 루이를 왕국 전체와 "제국"의 상속자로 만들 의도였을 것이다. 11월,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그곳에서 그는 야심찬 조카인 카린티아의 아르눌프가 반란을 선동하여 바이에른인과 슬라브족의 군대를 이끌고 독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다음 주에 동 프랑크 왕국에서 그의 모든 지지가 무너졌다. 그를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충성스러운 알레만니였지만, 로타링기아의 사람들은 그의 폐위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는 듯하다. 11월 17일까지 카를은 권력을 잃었지만 정확한 사건의 전개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그의 불충실함을 꾸짖는 것 외에는 아르눌프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에 다시 병이 났었지만, 베르나르에게 그의 보살핌을 맡기고 아마도 루이에게도 맡겼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을 보낼 수 있도록 슈바벤에 몇몇 영지를 요청했고, 그리하여 나우딩겐 (도나우에싱겐)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6주 후인 888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
제국은 붕괴되어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다. 프뤼의 레기노에 따르면, 왕국의 각 부분은 그들 자신의 "내장"에서 "소왕"을 선출했는데, 내장은 왕국 내부의 지역을 의미했다.
그는 죽은 후 라이헤나우 수도원에서 명예롭게 매장되었고, ''풀다 연대기''는 그의 경건함과 신성을 칭찬했다. 실제로 카를에 대한 동시대의 의견은 이후의 역사 기록보다 일관되게 더 호의적이며, 그의 뚜렷한 성공의 부족은 거의 끊임없는 질병과 허약함의 용서할 수 있는 결과라는 것은 현대의 제안이다.
카를은 루이 맹인의 대의를 옹호하고 카롤링거에게 그들이 "신성한"(즉, 교회) 호의를 받지 못하면 그들의 지속적인 통치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고안된 라틴어 산문, ''비시오 카롤리 그로시''의 주제였다.[23]
3. 가계
- 조부: 경건왕 루트비히
- 조모: 히스파니아의 에르망가르트
- 부왕: 독일왕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의 왕: 843~876, 바이에른의 왕: 817~875)
- 모후: 엠마 드 바이에른 (802~876)
- 형: 바이에른의 카를만 (828~880) (바이에른의 공작: 876~880, 이탈리아의 왕: 877~880)
- * 조카: 케른텐의 아르눌프 (850~899)
- 형: 소 루트비히 (830~882) (동프랑크와 작센의 왕: 876~882, 바이에른의 왕: 880~882)
- 누나: 힐데가르트 (Hildegard)
- 여동생: 이르멘가르트 (Irmangard) (소 루트비히 2세와 결혼)
- 여동생: 기셀라 (Gisela of Franks) (슈바벤의 베르크톨드(Berchtold, 841~912?)와 결혼)
- 여동생: 베르타 (Bertha)
- 왕후: 슈바벤의 리첼다 (Richardis, 840년경~909)
- 후궁: 미상
- * 아들: 알레만의 베른하르트 (Bernhard, 860년경 ~ 891년)
- * 아들: 알레만의 카를만 (Karlmann de Alemanni, ? ~ 876년 사망)
카롤루스 3세는 슈바벤 백작 엘항거의 딸로 추정되는 리히야르디스와 결혼했지만[31], 적자는 얻지 못했다. 슬하에 서자는 다음과 같다[32]。
- 베른하르트 (? - 891년?)
4. 통일 과정
880년 맏형인 바이에른과 이탈리아의 카를만에게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882년 둘째 형 소 루트비히가 아들 없이 사망했으며, 서프랑크를 다스리던 조카 샤를로망 역시 미성년으로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그는 프랑크 왕국의 전 영토를 무리 없이 상속받을 수 있었다.
876년 아버지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카를 3세는 형인 카를만, 루트비히 3세와 함께 아버지의 유산을 분할하여 알레마니아(후의 슈바벤)를 상속받았다. 879년에는 카를만으로부터 이탈리아 왕위를 양도받았고, 881년 2월 21일에는 로마에서 교황 요한 8세로부터 로마 황제로 대관했다. 882년에는 사망한 루트비히 3세의 유산을 상속하여 동프랑크 전토를 손에 넣었다. 884년, 서프랑크 왕 카를로만이 사망하고, 서프랑크의 정치를 담당하던 주미에주 수도원장 고즐랭으로부터 서프랑크를 위임받아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카를 3세는 프랑크 왕국의 통일을 달성했다.
참조
[1]
간행물
Les cisterciens et Charles V
http://www.jstor.org[...]
2007
[2]
웹사이트
Karl III
https://www.deutsche[...]
[3]
문서
MacLean, 2
[4]
문서
Airlie, 129
[5]
문서
Reuter, 72
[6]
문서
AF, 875 (p. 77 and n8)
[7]
문서
MacLean, 70
[8]
서적
Early Medieval Italy: Central Power and Local Society, 400–1000
Macmillan
1981
[9]
문서
MacLean, 187–188
[10]
문서
AF(B), 883 (p. 107 and nn6–7)
[11]
문서
Reuter
[12]
문서
MacLean, pp. 166–168, quoting Regino of Prüm
[13]
문서
Smith, 192
[14]
문서
MacLean, 127
[15]
문서
Reuter, 116–117. AF(M), 885 (pp. 98–99 and nn6–7) and AF(B), 885 (p. 111 and n2)
[16]
문서
MacLean, 131
[17]
문서
MacLean, 132
[18]
문서
AF(B), 887 (p. 113 and nn3–4)
[19]
문서
MacLean, 167
[20]
문서
Reuter, 119
[21]
문서
MacLean, pp. 167–168
[22]
서적
A Dictionary of Saintly Women
https://books.google[...]
Bell
[23]
문서
Paul Edward Dutton. "Charles the Fat's Constitutional Dreams", in The Politics of Dreaming in the Carolingian Empire. Lincoln, N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4, 225–251
[24]
문서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カルル3世(肥満王)
[25]
문서
成瀬 他、pp. 52 - 53
[26]
문서
瀬原、p. 55
[27]
문서
柴田 他、p. 171
[28]
문서
瀬原、p. 56
[29]
문서
堀越 他、p. 83
[30]
문서
カラー世界史百科、p. 127
[31]
문서
Reuter, p. 73
[32]
문서
Reuter, p. 336
[33]
문서
카를만은 비정통 황제였다
[34]
문서
프로방스와 부르고뉴는 863년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였다
[35]
문서
맹인왕 루트비히의 외조부인 황제 루트비히 2세나, 독일인 루트비히의 딸 외조모 이르멘가르트 모두 카롤링거 출신이었다
[36]
서적
Les morts mystérieuses de l'histoire, volum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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