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투리아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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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8세기 초 코바동가 전투 이후 건설된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이다. 칸타브리아 산맥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켈트족, 로마 제국, 서고트족의 영향을 받았다. 펠라요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초기에는 무슬림 세력에 대항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알폰소 2세 시대에 수도를 오비에도로 옮기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개척하여 종교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레온 왕국, 갈리시아 왕국과 통합되어 레온 왕국으로 발전했으며, 아스투리아스 전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발상지로서 문화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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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지역에 위치했던 왕국으로, 바스크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어 독립 왕국으로 발전하고 여러 왕조를 거치며 번영과 분열을 겪다가 스페인과 프랑스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스페인의 자치 지방으로 남아있다. - 스페인의 중세사 - 그라나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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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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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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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
일반 명칭 | 아스투리아스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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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Hoc Signo Tuetur Pius, Hoc Signo Vincitur Inimicus |
시대 | 중세 초기 |
정치 체제 | 절대군주제 선거군주제 (842년까지) 절대군주제 세습군주제 (842년부터) |
수도 | 칸가스 데 오니스 산마르틴델레이아우렐리오 프라비아 오비에도 |
공용어 | 라틴어 속라틴어 (아스투리아스-레온어, 카스티야어, 갈리시아-포르투갈어) 동게르만어 계통 (소수의 서고트어 및 반달어 사용자) 바스크어족의 방언 가능성 |
종교 | 가톨릭교 (국교) |
역사 | |
건국 | 718년 |
왕국 세습 | 842년 |
멸망 | 레온 왕국에 합병 |
멸망일 | 924년 |
갈라시아 왕국 및 레온 왕국 생성 | 910년 |
군주 | |
초대 군주 | 펠라기우스 |
초대 군주 재위 기간 | 718년–737년 |
마지막 군주 | 프루엘라 2세 |
마지막 군주 재위 기간 | 910년–924년 |
군주 칭호 | 국왕 |
기타 정보 | |
현재 국가 | 스페인 포르투갈 |
계승 정보 | |
이전 국가 | 서고트 왕국 |
계승 국가 | 갈리시아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백국 |
2. 역사적 배경
711년 과달레테 전투 이후 이베리아 반도가 이슬람 세력(우마이야 칼리파국)에게 정복되면서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서고트 왕국의 귀족으로 여겨지는 펠라요는 북부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 건국의 기반을 다졌다. 722년 코바돈가 전투에서의 승리는 왕국의 독립을 지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초기 수도는 캉가스 데 오니스였다.
알폰소 2세 시대에는 갈리시아 지방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건설하는 등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수도를 오비에도로 옮겨 지배 체제를 강화했으며, 이 무렵부터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후 가르시아 1세 시대에 수도가 레온으로 옮겨지면서, 왕국은 레온 왕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 1. 원주민 배경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칸타브리아 산맥의 서부와 중앙 지역, 특히 피코스 데 에우로파와 아스투리아스 중앙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왕국 초기의 주요 정치 및 군사 활동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스트라본, 카시우스 디오 등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기독교 시대 초기 아스투리아스 지역에는 여러 켈트계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주요 민족들은 다음과 같다.
민족 이름 | 주요 거주 지역 | 비고 |
---|---|---|
바디니엔세스 (Vadinienses) | 피코스 데 에우로파 지역 (칸타브리족의 일파) | 시간이 지나며 남쪽으로 이주 |
오르게노메스키 (Orgenomesci) | 아스투리아스 동부 해안 | |
사엘리니 (Saelini) | 셀라 계곡 (아스투레스족의 일파) | |
루고네스 (Luggones) | 셀라 강과 냐론 강 사이 (수도: 루쿠스 아스투룸) | |
아스투레스 (Astures) | 필로냐와 칸가스 델 나르세아 사이 내륙 지역 | 좁은 의미의 아스투레스족 |
파에시키 (Paesici) | 나비아 강 어귀 ~ 히혼 사이 서부 해안 |
고전 지리학자들은 이 민족들의 분포, 특히 아스투레스족과 칸타브리아족의 경계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을 남겼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스투레스족이 현재 아스투리아스 중앙 지역인 나비아 강과 셀라 강 사이에 살았으며, 셀라 강이 칸타브리아족과의 경계라고 보았다. 반면, 율리우스 호노리우스는 그의 ''코스모그라피아(Cosmographia)''에서 에브로 강의 발원지가 아스투레스족의 영토(''sub asturibus'') 안에 있다고 기록하여 경계를 더 동쪽으로 보았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서 유사한 정치 행정 문화가 도입되면서, 이베리아 북부 민족들 사이의 씨족적 구분이나 민족적 경계는 점차 그 중요성을 잃어갔다.
이러한 상황은 후기 로마 제국 시대와 초기 중세를 거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고트족 및 수에비 왕국과의 수세기 동안 이어진 갈등은 칸타브리아 산맥 지역의 여러 민족들이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스트로 유적인 라 카리사(레나 시) 발굴 조사를 통해, 메세타 고원에서 파하레스 고개를 넘어오는 침략자들로부터 아스투리아스 중부 계곡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선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남쪽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아스투리아스 공동체들이 높은 수준의 조직력과 협력 체계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이 방어 시설은 서기 675년에서 725년 사이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아스투리아스 지역을 향한 두 차례의 주요 원정이 있었는데, 하나는 서고트 왕 밤바(재위 672~680년)가 이끌었고, 다른 하나는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 당시 무슬림 총독 무사 빈 누사이르가 이 지역에 주둔지를 설치하며 진행되었다.
이처럼 점진적으로 형성된 아스투리아스 정체성은 8세기 초, 코바동가 전투에서 무슬림 군대를 격퇴하고 펠라요가 왕으로 추대되면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당시의 기록인 ''크로니카 알벨덴세(Chronica Albeldense)''는 코바동가에서의 사건을 설명하며 "신의 섭리가 아스투리아스의 왕을 탄생시킨다"고 기록했다.
2. 2. 우마이야 왕조의 점령과 아스투리아스 반란

711년 과달레테 전투에서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고 이베리아 반도가 이슬람 세력(우마이야 칼리파국)에게 정복당하기 시작했다. 타리크 이븐 지야드의 초기 침략 이후, 712년 이프리키야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대규모 정복 작전을 벌여 메리다, 톨레도, 사라고사 등을 함락시켰다. 714년경 무사 이븐 누사이르는 반도 북서부까지 진출하여 아스토르가와 히혼을 장악했고, 아스투리아스 역시 효과적인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12] 당시 북부 산악 지대는 도시 중심지가 거의 없어 계곡별로 정복이 이루어졌으며, 무슬림 군대는 인질을 잡는 방식으로 지역을 통제하려 했다. 히혼에는 총독 무누자 휘하의 소규모 베르베르 부대가 주둔하며 아스투리아스에 대한 무슬림 지배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한 인물은 귀족 펠라요이다. 그의 정확한 신분은 불분명하지만, 아스투리아스 토착 귀족이거나 과달레테 전투 이후 북부 산악 지대로 피신한 서고트 귀족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다른 귀족들에 의해 아스투레스(Astures)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고도 한다.[13][14] 펠라요 역시 다른 귀족들처럼 코르도바에 인질을 보내야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누이가 현지 베르베르 지도자와의 결혼 동맹 대상으로 요구되었고, 나중에 무누자는 코르도바의 아랍 상관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한다. 당시 베르베르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랍인이나 시리아인에 비해 차별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펠라요의 반란은 717년에서 718년 사이, 알-후르 이븐 압드 알-라흐만 알-타카피 총독 시절에 그가 코르도바에서 탈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15][16] 그의 아스투리아스 귀환은 히혼의 무슬림 당국에 대한 반란을 촉발했다. 당시 필로냐 지역 브레스에 거주하던 펠라요를 체포하기 위해 무누자는 알-카마가 지휘하는 군대를 보냈다. 무슬림 군대의 접근 소식을 들은 펠라요와 그의 동료들은 필로냐 강을 건너 방어에 유리한 아우세바 산의 좁은 계곡으로 이동하여 코바돈가 동굴에 피신했다.

이곳에서 벌어진 코바돈가 전투(722년경 추정)는 아스투리아스 독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후대의 기독교 기록은 이 전투를 서사시적으로 묘사하지만, 이슬람 기록은 작은 충돌로 간주한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가설은 무슬림 군대가 좁은 계곡에서 공격을 받고 후퇴하던 중 매복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건을 기록한 거의 유일한 동시대 기록인 754년 기독교 연대기에는 이 전투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베르베르 병사를 상대로 거둔 이 승리는 펠라요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고,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의 다른 귀족들이 그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귀족들은 펠라요를 왕 또는 군사 지도자(둑스)로 추대했다.
코바돈가 전투 이후 펠라요의 세력은 점차 커져갔다. 펠라요의 지도 아래 베르베르족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자, 고립감을 느낀 히혼 총독 무누자는 도시를 버리고 메세타 고원으로 탈출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라도 지역의 올랄리에스에서 아스투레스 군대에 붙잡혀 살해되었다. 펠라요는 아스투리아스 동부 계곡에서 무슬림 세력을 몰아낸 후,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의 주요 도시였던 레온을 공격하여 산악 통로를 확보하고 무슬림의 공격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했다. 그는 아스투리아스 산맥 북쪽에 남아 있던 베르베르족을 계속 공격하여 철수시켰는데, 이는 코르도바의 아랍 통제에 대한 베르베르인들의 광범위한 반란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최근 호몬 산과 라 카리사(후에르나와 파하레스 계곡 근처)에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건설된 요새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요새들은 약 2m 높이의 감시탑과 해자를 갖추고 있어, 건설과 방어에 수백 명의 인력과 높은 수준의 조직력, 그리고 펠라요와 같은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음을 시사한다.[17] 전문가들은 이 방어선이 메세타 고원에서 파하레스 산악 통로를 통해 아스투리아스로 진입하려는 무슬림의 시도를 막기 위해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18]
펠라요의 승리로 아스투리아스 산악 지대에 작은 독립 영토가 세워졌고, 이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기원이 되었다. 초기 아스투리아스 왕들은 자신들을 princeps|프린켑스la(제후)라고 칭하다가 나중에 rex|렉스la(왕)라고 불렀는데, '렉스' 칭호는 알폰소 2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확고히 자리 잡았다. '프린켑스' 칭호는 북부 스페인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갈리시아와 칸타브리아의 비문에서도 발견된다.[19][20]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로마인과 서고트족에게 저항했던 칸타브리아 해안 지역 세력들의 지도력 중심지로 시작되었으며,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으려 했다. 알안달루스에서 피난 온 남부 이주민들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고트족의 영향을 미쳤지만, 9세기 초 알폰소 2세는 유언에서 히스파니아 상실의 책임을 물어 서고트족을 비난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대한 지식은 주로 알폰소 3세 통치 기간에 쓰인 후대 연대기(세바스티엔시안 연대기, 알벨덴시안 연대기, 로텐시안 연대기)에 의존하는데, 이 연대기들은 고트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초기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여러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약했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다른 유력 가문들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세력을 강화해야 했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펠라요는 자신의 딸 에르메신다를 당시 독립적이었던 칸타브리아 공국의 주요 귀족인 페테르 공작의 아들 알폰소 1세와 결혼시켰다.
3. 초기 확장
알폰소 1세는 펠라요의 딸 에르메신다와의 결혼을 통해 파빌라의 뒤를 이어 아스투리아스 왕위를 계승했다. 《알벨덴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알폰소는 코바동가 전투 직후 에르메신다와 결혼하기 위해 왕국에 도착했다고 한다. 파빌라의 죽음은 알폰소의 즉위를 가능하게 했고, 아스투리아스 왕국 내 강력한 가문 중 하나인 칸타브리아 가문의 부상을 이끌었다. 초기에는 알폰소만 캉가스 데 오니스의 궁정으로 이주했지만, 칸타브리아 공국의 주요 거점(아마야, 트리시오, 칸타브리아 시 등)이 있던 고원 지대와 에브로 강 중류 계곡의 인구가 점차 줄어들면서, 페트로 공작의 후손들은 리오하에서 칸타브리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결국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알폰소 1세는 피코스 데 에우로파에 위치한 초기 수도에서 왕국의 영토 확장을 시작했다. 그는 서쪽으로는 갈리시아 방향으로, 남쪽으로는 두에로 강 계곡으로 계속 진출하여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북쪽의 안전한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 과정은 고원 지대의 전략적인 인구 감소를 가져왔고, 이슬람 세력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선으로서 두에로 사막을 형성하게 되었다.[21]
클라우디오 산체스-알보르노스가 주장한 이러한 인구 감소 현상에 대해서는 오늘날 그 규모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21] 주요 반박 근거로는 여러 지역에서 옛 지명이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점과 칸타브리아 지역 주민과 중앙 고원 지대 주민 사이에 생물학적, 문화적 차이가 있다는 점이 제시된다. 분명한 사실은 8세기 전반기에 도시 생활이 쇠퇴하고 목축을 중심으로 한 작은 공동체 위주로 농촌 사회가 재편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는 아랍 정복으로 인한 후기 로마 제국 시대 지중해 경제 시스템의 완전한 붕괴, 해당 지역의 지속적인 전염병 확산, 740~741년 반란 이후 베르베르족 병력의 알-안달루스 이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인구 밀도가 낮고 조직화되지 않은 지역이 생겨났으며, 이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게 점진적으로 세력을 강화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알폰소 1세와 그의 아들 프루엘라 1세가 두에로 계곡에서 벌인 원정은 로마 시대 이전에 아스투리아스인들이 같은 지역에서 행했던 습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초기 확장은 주로 칸타브리아 지역(갈리시아에서 비스카이까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칸타브리아 산맥 남쪽 지역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게 된 것은 오르도뇨 1세와 알폰소 3세의 통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알폰소 1세의 아들인 프루엘라 1세는 아버지의 영토를 공고히 하고 확장했으나, 칸타브리아 가문과 연관된 귀족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4. 사회 및 정치적 변혁
아우렐리오, 실로, 마우레가투스, 베르무도 1세가 통치했던 23년(768년 ~ 791년)은 종종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침체기 또는 암흑기로 여겨진다. 이 시기 알안달루스에 대한 대규모 군사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게으른 왕들'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왕국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내부 변화들이 있었다.
첫째, 783년부터 788년까지 마우레가토가 주도한 첫 번째 내란이 발생했다. 이 반란으로 알폰소 2세가 잠시 왕위에서 물러났지만(그는 791년에 다시 왕이 된다), 이는 지역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힘을 키운 귀족 세력과 지주들이 펠라요 가문의 통치에 도전하는 일련의 반란의 시작이었다. 이후 라미로 1세 (842년 ~ 850년) 시대에 일어난 네포시아노, 알드로이토, 피니올로 등의 주요 반란들은 8세기와 9세기에 걸쳐 진행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변혁 과정의 일부였다.
둘째, 이웃한 바스크인과 갈리시아인의 반란이 있었으나 아스투리아스 왕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들은 아스투리아스 중부와 동부의 혼란을 이용하여 때때로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알폰소 2세가 알라바로 피신했을 때 그곳에서 도움을 받았고, 네포시아노의 반란을 일부 지역에서 지원했으며, 갈리시아인들은 라미로 1세의 편에 서기도 했다.
셋째, 다른 증거들도 이 시기에 중요한 내부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우렐리오 1세 통치 시기에는 해방된 노예들(''serbi'', ''servilis orico'', ''libertini'')의 반란이 있었다. 이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재산 관계가 점차 약화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역할 증대와 핵가족의 확산, 그리고 대가족 제도의 약화와 함께 8세기 말과 9세기 초 아스투리아스에서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프루엘라 1세 (757년 ~ 768년)의 뒤를 이어 아우렐리오 (768년 ~ 774년)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칸타브리아의 프루엘라의 아들이자 칸타브리아의 페테르의 손자였다. 아우렐리오는 현재의 산마르틴델레이아우렐리오에 궁정을 세웠다. 그의 사후에는 실로 (774년 ~ 783년)가 왕위를 계승하여 궁정을 프라비아로 옮겼다. 실로는 알폰소 1세의 딸이자 펠라요의 손녀인 아도신다와 결혼했다.
실로가 죽자 알폰소 2세가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마우레가토가 강력한 세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알폰소 2세를 알라바(그의 어머니 무니아는 바스크인이었다)로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마우레가토는 역사가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당시 왕국의 중요한 문화적 인물이었던 리에바나의 베아투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입양설에 맞서는 그의 활동을 지원했다. 전설에 따르면 마우레가토는 알폰소 1세와 무어인 여성 사이의 사생아였으며, 무어인에게 매년 100명의 처녀를 바쳤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우렐리오의 형제인 베르무도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집사'라고 불렸던 베르무도 1세는 아마 가벼운 서원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군사적 패배 이후 왕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5. 인정과 공고화
알폰소 2세(791년~842년)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국은 비로소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는 실로가 정복했던 갈리시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쪽 바스크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22] 이 시기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과 더욱 가깝고 빈번한 관계를 맺었으며, 알폰소 2세의 사절단은 샤를마뉴에게 797년 리스본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을 바치기도 했다. 알폰소 2세는 자신을 "샤를마뉴 황제의 신하"라고 칭했는데,[23] 이는 일종의 종속적인 관계를 인정하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24]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국가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토착 전통에 대한 반발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스투리아스 궁정에는 이전 서고트 왕국의 질서와 의례가 도입되었다.[23] 알폰소 2세는 또한 갈리시아, 레온, 카스티야 일부 지역을 재건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편입시켰고, 바스크 일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확립했다. 수도는 코바돈가 전투 근처의 캉가스 데 오니스에서 실로 왕 시대에 프라비아로 옮겨졌다가, 알폰소 2세 때인 약 789년경 그의 출생지인 오비에도가 최종적인 수도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갈리시아의 이리아 플라비아(Iria Flavia)에서 발견되었다고 선포되었고, 당시 교황은 이를 진품으로 인정했다. 이는 이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주요 종교적 숭배 대상은 오비에도에 안치된 메리다의 에울라리아(Eulalia of Mérida)의 유해였다.
알폰소 2세의 뒤를 이은 라미로 1세는 여러 왕위 계승 경쟁자들을 사로잡아 눈을 멀게 한 뒤 수도원에 감금하며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전사로서 코루냐에 상륙한 바이킹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무어인들과도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라미로의 아들 오르도뇨 1세(850년~866년)는 왕국 동부에서 일어난 바스크의 주요 반란을 진압했다. 859년에는 코르도바에 반기를 들고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톨레도의 지배자가 된 바누 카시 가문의 무사 이븐 무사가 건설한 알벨다 요새를 포위했다. 무사는 자신의 매부이자 팜플로나의 왕인 가르시아 이니게스와 동맹을 맺고 포위를 풀려 했으나, 이어진 알벨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귀중한 보물을 빼앗겼다. 이 보물 중 일부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 대머리 왕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전투 승리 7일 후 알벨다는 함락되었고, 기록에 따르면 "그곳의 전사들은 칼에 죽고 요새는 기초까지 파괴되었다." 무사는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862년 또는 86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이자 톨레도 총독이었던 루브(Lubb)는 오르도뇨의 통치 기간 동안 아스투리아스 왕에게 복종했다.
알폰소 3세의 아들들이 910년에 그의 퇴위를 강요하면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레온 왕국, 갈리시아 왕국, 아스투리아스로 분열되었다. 이 세 왕국은 924년에 레온 왕관 아래 다시 통합되었으며(레온과 갈리시아는 914년 통합), 이후 레온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르시아 1세 시대에는 수도가 오비에도에서 레온으로 옮겨졌다. 레온 왕국은 1230년 페르난도 3세가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의 공동 왕이 되면서 카스티야 왕국에 최종적으로 병합될 때까지 존속했다.
6. 바이킹의 침략
844년, 바이킹이 갈리시아를 침략했으나, 라미로 1세 군대에 의해 코루냐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26] 이 전투에서 많은 바이킹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갈리시아인들이 사용한 발리스타(거대한 석궁과 유사한 강력한 투석 무기) 때문이었다.[26][25] 바이킹의 롱쉽 70척은 해변에서 노획되어 불태워졌다.[26][27][28]
몇 달 후, 또 다른 바이킹 함대가 세비야를 공격했다. 당시 세비야에는 여전히 서고트족과 로마-스페인계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29] 서고트족은 안달루시아 에미르국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30] 서고트족 출신의 유력한 무왈라드 가문이었던 무사 이븐 무사는 타블라다 전투에서 바이킹을 격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859년, 오르도뇨 1세의 통치 시기에 바이킹은 다시 갈리시아를 침략했다. 오르도뇨 1세는 당시 무어인과의 전투에 집중하고 있었으나, 지방 백작인 도니 페드로가 바이킹을 공격하여 큰 손실을 입히고 패배시켰다.[31][32] 오르도뇨 1세의 뒤를 이은 알폰소 3세는 바이킹이나 무어인의 공격으로부터 왕국의 해안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968년, 노르웨이의 군로드가 100척의 배와 8,000명의 전사를 이끌고 갈리시아를 다시 침공했다.[33] 이들은 수년 동안 갈리시아 지역을 자유롭게 활보하며 심지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971년, 서고트족 출신의 갈리시아 백작 곤살로 산체스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바이킹과 맞서 싸웠다. 격렬한 전투 끝에 곤살로 산체스는 승리했고, 군로드를 사로잡아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처형함으로써 갈리시아에서의 바이킹 시대는 막을 내렸다.
7. 종교
711년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으로 서고트 왕국이 멸망한 후,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기독교 세력의 주요 저항 거점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종교는 왕국의 정체성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초기 왕국의 중심지였던 캉가스 데 오니스 인근에는 기독교 이전 시대의 이교적 전통이 남아 있었으며, 이는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도 혼합되어 나타났다.
특히 알폰소 2세 시대에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전승과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건설되었다. 이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기독교 세계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고, 유럽 전역에서 찾아오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 리에바나의 베아투스와 같은 학자들은 입양설과 같은 신학 논쟁에 참여하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며 천년왕국설 사상을 발전시키는 등,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독특한 종교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왕국의 건국 영웅 펠라요나 코바동가 전투와 관련된 신화 속에서도 다양한 종교적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7. 1. 메갈리스와 켈트 이교의 잔재
아스투리아스에서 기독교 예배의 가장 초기 증거는 5세기부터 나타나지만, 복음 전파는 6세기 중반까지는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리에바나의 투리비오와 같은 은둔자들이나 산 프룩투오소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이 칸타브리아 산맥에 점차 정착하며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진전이 이루어졌다.아스투리아스의 기독교화는 더디게 진행되었고, 고대의 이교 신들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유럽의 다른 지역처럼 새로운 종교는 기존의 토착 신앙과 혼합되어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6세기 산 마르틴 데 브라가 주교는 그의 저서 『시골 사람들의 교정에 관하여』에서 갈리시아 농민들이 기독교 이전의 신앙을 고수하는 것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늘에서 쫓겨난 많은 악마들이 바다, 강, 샘, 숲에 자리 잡아 무지한 사람들에게 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그들은 바다에서는 넵투누스를, 강에서는 라미아스를, 샘에서는 님프를, 숲에서는 디아나를 부르며 제물을 바친다."[34]

캉가스 데 오니스가 위치한 셀라 계곡 중앙에는 거석기 시대(기원전 4000년~2000년 추정)에 만들어진 돌멘 지역이 존재했다. 특히 산타 크루스 돌멘은 이 지역 족장들의 의례적인 매장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로마 제국과 서고트 왕국의 정복 이후에도 이어져, 8세기에는 파빌라 왕이 부족 지도자들의 시신과 함께 이곳에 묻히기도 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이곳에 교회를 세워 기독교화를 추진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산타 크루스 돌멘과 관련된 이교적 전통이 남아 있다. 방문객들에게는 '자나'(아스투리아스 요정)가 나타난다고 전해지며, 그곳의 흙에는 마법적인 힘이 있다고 여겨진다.

산타 크루스 교회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이 교회는 738년에 봉헌되었으며 아스테리오라는 '바테스'(Vates|바테스la)가 의식을 주재했다고 한다. '바테스'라는 용어는 가톨릭 문서에서는 드물게 사용되며, 보통 기독교 사제를 뜻하는 '프레스비테루스'(presbyterus|프레스비테루스la)가 쓰인다. '바테스'는 예지력을 가진 시인을 뜻하는 라틴어였으며, 고대 그리스 작가 스트라보, 디오도로스 시켈루스, 포시도니우스에 따르면 '바테스'(ουατεις|바테스grc)는 드루이드, 바드와 함께 켈트족 사제의 세 계급 중 하나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스테리오가 이교와 기독교적 요소가 결합된 종교적 직책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그가 6세기 브리토니아(갈리시아)에 정착한 브리튼 난민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수에비 왕국의 행정 문서인 『Parrochiale Suevorum|수에비 교구록la』에는 아스투리아스 지역이 브리토니아 교구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켈트 기독교의 일부 특징이 스페인 북부로 전파되었음을 시사한다. 톨레도 제4차 공의회에서 서고트족 주교들이 비난했던 켈트식 삭발 역시 이러한 영향의 증거로 여겨진다.[35]
현재까지 남아있는 갈리시아 전설 중에는 산 아마로, 트레젠조니오 또는 『아르멘테이라의 에로 전설』처럼 수도사들이 바다를 건너 낙원의 섬으로 떠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성 브렌단의 항해, 웨일스의 성 말로, 그리고 아일랜드의 임람 설화와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아스투리아스의 왕들은 기독교를 장려했지만, 메르시아의 펜다나 비두킨트와 같은 다른 중세 유럽 군주들처럼 토착 종교 전통에도 권력의 기반을 두었다. 동시에 요한계시록, 에스겔서, 다니엘서와 같은 기독교 성경과 교부들의 사상에 의존하여 새로운 왕조의 기초 신화를 제공했다. 법률 제정에 있어서는 서고트 법전이 주요 참고 자료였으며, 770년대 이후 알안달루스에서 온 망명자들과 포로들, 그리고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과의 교류(알쿠인-리에바나의 베아투스)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도입되었다.
7. 2. 입양설
아스투리아스 문화와 고대 중세 시대 기독교 스페인의 기초는 실로와 마우레가투스의 통치 기간에 놓였다.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들은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에미르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었다. 이 시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가장 저명한 기독교 학자는 리에바나의 베아투스였으며, 그의 저술은 레콩키스타의 기독교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아투스는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고, 신에 의해 입양되어 수난과 부활 후에야 비로소 신성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입양설 논쟁에 직접 참여했다. 베아투스는 톨레도 주교 엘리판도와 같은 인물들이 옹호한 이 신학적 입장을 반박했다.
입양설 신학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 서고트족의 아리우스파와, 죽음 후 신격화를 이룬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들의 사례가 있는 헬레니즘 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엘리판두스의 톨레도 주교구가 당시 코르도바의 이슬람 칼리파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예언자로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로는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 신앙이 입양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베아투스는 산토 토리비오 데 리에바나의 수도원에서 입양론 신학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동시에 베아투스는 아스투리아스, 교황청, 그리고 카롤링거 제국 간의 유대를 강화했으며, 교황과 카롤링거 궁정에 정착한 앵글로색슨 학자 요크의 알쿠인의 지원을 받았다.
7. 3. 천년왕국설

베아투스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그의 ''묵시록 주석''으로, 후대에 ''베아티''라 불리는 사본으로 복사되었다.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이에 대해 "그 훌륭한 이미지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우상학적 사건을 낳았다"고 말했다.[36] 베아투스는 이 주석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제시하며, 구약성경, 교부들의 인용문과 매혹적인 삽화를 곁들였다.
이 ''주석''에서는 묵시록적 기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시된다. 바빌론은 더 이상 로마 도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알안달루스의 우마이야 왕조 에미르들의 중심지인 코르도바를 나타낸다. 한때 로마 제국의 상징이었던 짐승은 이 시기에 서방 기독교를 파괴하려고 위협했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영토를 침략했던 이슬람 침략자들을 상징한다.
''주석'' 제2권 서문에는 고중세 문화의 최고의 ''세계지도'' 사례 중 하나인 베아투스 지도가 들어 있다. 이 지도의 목적은 세계를 지리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초기 수십 년 동안 사도들의 전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베아투스는 세비야의 이시도르, 프톨레마이오스와 성경의 작품에서 자료를 얻었다. 세계는 대양으로 둘러싸인 육지 원반으로 묘사되며, 아시아(상반원), 유럽(하좌사분면), 아프리카(하우사분면)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지중해(유럽-아프리카), 나일강(아프리카-아시아), 에게해, 보스포루스 해협(유럽-아시아)은 서로 다른 대륙의 경계로 설정되었다.
베아투스는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묵시록이 임박했으며, 그 후 적그리스도의 1290년 지배가 뒤따를 것이라고 믿었다. 베아투스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따랐는데, 그의 작품인 ''신국론''은 세계 역사가 여섯 시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를 따르는 ''주석''에 영향을 미쳤다. 처음 다섯 시대는 아담의 창조부터 예수의 수난까지 이어지며, 여섯 번째 시대는 그리스도 이후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사건이 벌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당시 유럽에서는 천년 왕국 운동이 매우 흔했다. 760년에서 780년 사이에 일련의 우주적 현상이 골 지역 주민들에게 공황을 불러일으켰다. 예언가 수도사인 요한은 샤를마뉴 통치 기간에 최후의 심판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시기에 다니엘 묵시록이 나타났는데, 이는 시리아어로 쓰여진 텍스트로, 아테네의 이레네 황후 통치 기간에 작성되었으며, 아랍인, 비잔틴인, 북방 민족 간의 전쟁이 예언되어 있다. 이 전쟁은 적그리스도의 도래로 끝날 것이다.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슬람 지배, 입양주의 이단, 모자랍의 점진적인 동화)은 베아투스에게는 임박한 묵시록의 신호였다. 엘리판두스가 그의 ''스페인 주교들의 갈리아 형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설명하듯이, 산토 토리비오 수도원장은 800년 부활절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그의 동포들에게 선포하기까지 했다. 그날 새벽, 수백 명의 농민들이 산토 토리비오 수도원 주변에 모여 예언의 성취를 두려워하며 기다렸다. 그들은 하루 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다가, 오르도니오라는 사람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배부르게 먹고 마시자!"라고 외쳤다.
베아투스의 예언적이고 천년 왕국적인 비전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약 880년에 쓰여진 ''예언 연대기''는 코르도바 에미르국의 최종 몰락과 알폰소 3세 왕에 의한 이베리아 반도 전체의 정복과 구원을 예언했다. 천년 왕국 이미지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주요 상징인 승리의 십자가 상징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파트모스의 요한이 재림의 환상을 이야기하는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다. 그는 그의 위엄 속에 앉아 구름으로 둘러싸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주가 말하노라 나는 있는 자요 있었던 자요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니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38] 라바룸의 사용이 아스투리아스에 국한되지 않았고 밀비우스 다리 전투 당시 이 상징을 사용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승리의 십자가는 아스투리아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거의 모든 전로마네스크 교회에 이 상징이 새겨져 있으며,[39][40] 종종 "Hoc signo tuetur pius, in hoc signo vincitur inimicus|혹 시그노 투에투르 피우스, 인 혹 시그노 빈치투르 인이미쿠스lat" (이 표식으로 경건한 자를 보호하고, 이 표식으로 적을 무찌른다)라는 표현과 함께 새겨져 있는데,[41] 이는 아스투리아스 군주들의 왕실 모토가 되었다.
7. 4. 산티아고 순례길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주요 정신적 유산 중 하나는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화 전승 경로 중 하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창설이다. 스페인에서 성 야고보의 설교를 언급한 최초의 문서는 6세기 문서인 ''Breviarius de Hyerosolima|브레비아리우스 데 히에로솔리마la''으로, 사도가 'Arca Marmórica|아르카 마르모리카gl'라는 수수께끼 같은 장소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의 저서 ''De ortu et obitu patrium''에서 이 이론을 지지했다. 150년 후, 마우레가토 시대에 ''O Dei Verbum'' 찬가는 성 야고보를 "스페인의 황금 머리, 우리의 수호자이자 국가 수호성인"으로 묘사하며 초기 기독교 시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그의 설교를 언급하고 있다. 일부는 이 찬가를 베아투스의 작품으로 돌리지만, 이는 여전히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다.성 야고보의 전설은 알폰소 2세 치세 동안 지지를 얻었다.[23] 이 시기는 알폰소 2세가 샤를마뉴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고 유사한 왕실 의식과 정부 구조를 도입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갈리시아의 펠라지우스(Pelagius the Hermit)는 이리아 플라비아 교구의 Libredón|리브레돈gl 숲 위에서 여러 밤 동안 신비로운 빛을 관찰했다고 주장했다. 천사의 노래가 빛과 함께했다. 이 현상에 감명을 받은 펠라요는 이리아 플라비아의 주교인 테오데미르(Theodemir of Iria) 앞에 나타났고, 주교는 은둔자의 말을 들은 후 그의 수행원과 함께 그 장소를 방문했다. 전설에 따르면 숲 속 깊은 곳에서 세 구의 시체가 있는 돌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야고보 사도, 그리고 그의 두 제자 테오도루스(Theodorus)와 아타나시우스(Atanasius)의 시체로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알폰소 왕은 사도를 만나러 온 최초의 순례자였다. 여행 중 그는 밤에 은하수의 인도를 받았는데, 그 이후로 은하수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 야고보의 무덤 발견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제 아스투리아스는 예수의 사도 중 한 명의 시신을 보유한 영광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에베소에 요한 사도가 묻힌 아시아와 베드로 사도와 바울의 시신이 안치된 로마와만 공유하는 특권이었다. 12세기 초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로마와 예루살렘과 함께 기독교의 세 성지 중 하나로 성장했다. 후대에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부터 오크어 서정시에 이르기까지 많은 중앙 유럽 문화적 영향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이베리아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사도의 유해 "발견" 이야기는 몇 가지 의문점을 안고 있다. 무덤은 서로마 제국 말기부터 묘지로 사용된 곳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그 시신은 그 지역의 저명한 인물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영국 역사가 헨리 채드윅(Henry Chadwick)은 콤포스텔라의 무덤이 실제로 프리스킬리아누스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역사가 로저 콜린스(Roger Collins)는 유물(어쨌든 완전한 시신과는 거리가 멀다)을 성 야고보와 동일시한 것은 여러 성인의 이름이 나열된 메리다의 6세기 교회 제단 아래에서 발견된 유해의 이전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콘스탄티노 카발(Constantino Cabal)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피코 사크로(Pico Sacro), 페드라 다 바르카(Pedra da Barca, 뮤시아), 산 안드레스 데 테이시도(San Andrés de Teixido)와 같은 여러 갈리시아 지역이 이미 로마 이전 시대에 이교 순례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교도의 믿음은 이러한 장소를 세계의 끝과 켈트 이계의 입구로 여겼다. 성 야고보의 무덤 발견 후, 이러한 순례길의 점진적인 기독교화가 시작되었다.
7. 5. 신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연대기는 코바동가 전투 이후 1세기 반이나 지나서 쓰여졌기 때문에, 초기 아스투리아스 국왕들에 대한 많은 측면은 여전히 신화와 전설에 싸여 있다.펠라요의 역사적 실존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를 묘사하는 역사적 서술에는 많은 민담과 전설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무슬림 침략 이전에 펠라요가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순례 여행을 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승리의 십자가( ''Cruz de la Victoria'')가 처음에는 벼락에 맞은 참나무 통나무에 새겨졌다고도 한다.[42] 이 이야기의 핵심에는 아스투리아스 민속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담겨 있다. 한편, 벼락은 고대 아스투르 신 타라니스의 상징이었고, 아스투리아스 신화에서는 구름과 비와 바람의 신 누베루가 만들었다고 여겨졌다. 다른 한편, 참나무는 아스투리아스 왕실의 상징이며, 펠라요가 묻힌 아바미아 교회의 부조에는 그 나무의 잎이 그려져 있다.
코바동가 지역은 또한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코바동가 호수(에놀 호수와 에르시나 호수)가 있는 곳에 위치한 목자 마을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순례자로 변장하여 그 마을을 방문하여 모든 집에서 음식과 숙소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녀는 친절한 목자 한 명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거절당했다. 그 목자는 그녀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따뜻하게 나누어 주었다. 다음 날, 그들의 불친절에 대한 벌로 신성한 기원의 홍수가 마을을 휩쓸었고, 선량한 목자의 오두막을 제외한 모든 것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그의 앞에서 신비한 손님은 울기 시작했고, 그녀의 눈물은 바닥에 떨어지자 꽃이 되었다. 그때 목자는 순례자가 사실 마리아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교도적 전통이 아닌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둔 아스투리아스 왕조에 대한 신화도 있다. ''Chronica ad Sebastianum''은 알폰소 1세가 죽었을 때 일어난 특별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귀족들이 그의 추모식을 열고 있을 때, 천사들이 부르는 천상의 노래가 들렸다. 그들은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모사라베식 사제들이 성토요일의 철야 기도 중에 낭송했던 것과 같은 구절)을 낭송했다.
:내가 말하기를, 내 날이 끊어지니, 나는 무덤 문으로 갈 것이라, 내 해의 남은 것이 빼앗겼도다 하였나니
내가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를 보지 못할 것이요, 살아 있는 땅에서 여호와를 보지 못할 것이요, 다시는 세상 사람을 보지 못할 것이라 하였도다
나의 시대가 없어지며, 나에게서 떠났으니, 목자의 장막과 같도다, 내가 베 짜는 자 같이 나의 생명을 끊었으니, 그는 나를 쇠약하게 하여 끊으시리로다, 날이 저물도록 나를 끊으시리로다
내가 아침까지 계산하였으니, 사자 같이 그는 내 모든 뼈를 꺾으시리로다, 날이 저물도록 나를 끊으시리로다
두루미나 제비 같이 나는 중얼거리고,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위를 향하여 쇠하였도다, 여호와여, 내가 압박을 당하오니, 나를 위하여 일어나소서.
— 이사야서 38:10–14
이 노래는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된 후 유다 왕 히즈키야가 낭송했다. 이 구절에서 왕은 유대인의 저승인 스올로 떠나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며 후회했는데, 그곳은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이나 사람을 보지 못하는 어두운 곳이었다.
아스투리아스는 또한 산 속의 왕 신화의 사례를 가지고 있다. 전통에 따르면 오늘날에도 오비에도 대성당의 일부인 왕들의 정원(''Jardín de los Reyes Caudillos'')[43]에서 프루엘라 1세 왕이 산책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의 손자인 유명한 기사 베르나르도 델 카르피오는 아스투리아스 산맥의 동굴에서 잠자고 있다고 한다.[44]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한 농부가 길을 잃은 소를 찾으려고 어떤 동굴에 들어갔는데, 롱세발 전투에서 프랑크족을 물리친 승리자 베르나르도 델 카르피오라고 밝힌 강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44] 그는 그 동굴에서 수세기 동안 혼자 살았다고 말한 후 농부에게 "당신의 손을 내게 주십시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겁에 질린 목자는 소의 뿔을 주었는데, 거대한 남자가 잡자 곧바로 부러졌다. 불쌍한 마을 사람은 겁에 질려 도망쳤지만, 베르나르도가 "지금 사람들은 롱세발에서 나를 도와 프랑스인을 죽이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듣지 않고서는 도망칠 수 없었다.[45][46]
8. 유산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유럽 중세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미친 아스투리아스 전(前)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상지이다. 이 건축 양식은 람미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작은 왕국은 입양설 이단에 맞선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리에바나의 베아투스가 주요 인물이었다. 알폰소 2세 시대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성지가 "발견"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Camiño de Santiago)은 유럽 내 주요 순례길 중 하나였으며,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에 아스투리아스를 통과하며 지역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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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istory of the Viking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8-10-24
[28]
서적
England Before the Norman Conquest
Рипол Классик
1924
[29]
문서
Cf. Levi-Provencal, L'Espagne Muselmane au Xe siecle, 36; Histoire, 1 78
[30]
문서
Levi-Provencal, Histoire, III 184ff
[31]
서적
The Viking Age
Jovian Press
[32]
서적
A History of the Viking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8-10-24
[33]
웹사이트
10 Most Savage Viking Voyages Of All Time
http://eskify.com/10[...]
2017-12-29
[34]
문서
In Latin: "Et in mare quidem Neptunum appellant, in fluminibus Lamias, in fontibus Nymphas, in silvis Dianas, quae omnia maligni daemones et spiritus nequam sunt, qui homines infideles, qui signaculo crucis nesciunt se munire, nocent et vexant".
[35]
서적
Historia de los heterodoxos españoles I
[36]
서적
Beato di Liebana
1976
[37]
성경
요한계시록
[38]
성경
요한계시록 1장 8절
[39]
웹사이트
The ''Cruz de la Victoria'' engraved in stone
https://web.archive.[...]
2014-01-21
[40]
웹사이트
http://www.comarcava[...]
[41]
문서
[42]
서적
Simbología mágico-tradicional
[43]
논문
Relatos legendarios sobre los orígenes políticos de Asturias y Vizcaya en la Edad Media
[44]
문서
[45]
웹사이트
Bernardo del Carpiu y otros guerreros durmientes
http://www.lne.es/se[...]
2017-12
[46]
서적
Los maestros asturianos
1931
[47]
서적
The Arab Conquest of Spain 710–797
Blackwell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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