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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널리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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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널리 열은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지하며 파시스트 국민파에 맞서 싸운 아일랜드인 의용군 부대이다. 아일랜드 좌파 단체와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결성되었으며, 아일랜드 내전 당시 조약 반대파 출신, 기독교 사제에서 전향한 공산주의자 등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이 참여했다. 코널리 열은 제15국제여단에 배속되어 마드리드 전투, 하라마 전투, 브루네테 전투, 벨치테 전투, 테루엘 전투, 에브로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1938년 국제여단 해산과 함께 아일랜드로 귀환했다. 부대 규모는 문헌마다 차이가 있으며, 크리스티 무어의 노래를 통해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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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널리 열
개요
이름코널리 열
원어 이름 (아일랜드어)Colún Uí Chonghaile (콜룬 이 콩갈러)
원어 이름 (스페인어)Columna Connolly (콜룸나 코놀리)
활동 기간1936년 12월 – 1938년 9월
국가스페인 제2공화국
병과보병
규모중대급 (약 145명)
명령 체계제15국제여단 제16대대
지휘관
주요 지휘관프렌시어스 오 리안
참전
참전 전투스페인 내전
마드리드 전투
하라마 전투
브루네테 전투
벨치테 전투 (1937년)
테루엘 전투
간데사 전투
아라곤 공세
에브로 전투

2. 모집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전 세계 좌파 조직들은 스페인 제2공화국 지지를 선언했고, 같은 해 9월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여단이 창설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일랜드의 좌파 단체들 사이에서도 호응을 얻어 의용병 모집으로 이어졌다.

아일랜드에서의 국제여단 참여 조직은 주로 산 머레이, 파더르 오 도우널, 프렌시어스 오 리안 등이 주도했다. 머레이는 당시 아일랜드 공산당(CPI) 서기장이었고,[29] 오 도우널은 전 타흐터 달러(의회의원)이자 사회주의 성향의 공화주의자였으며,[29] 오 리안은 아일랜드 내전 참전 경험이 있는 공화회의 회원이었다.[29] 이들은 각자의 조직과 네트워크를 통해 스페인 내전에 참여할 의용병을 모집하는 데 힘썼다.

모집된 아일랜드 의용병 대부분은 공산주의 성향의 공화주의 조직인 공화회의 출신이었다. 1925년에서 1931년 사이 소련영국미국 정탐을 대가로 아일랜드 공화국군 조약 반대파(ATIRA)에 자금을 지원했으며,[25] 많은 CPI 당원들이 ATIRA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화주의와 공산주의 결합 시도가 실패하면서 공화회의가 창설되었다. 이들의 참전 동기에는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지지와 연대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 국민파에 가담했던 파시스트 성향의 아일랜드인 여단에 대한 반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아일랜드 내에서의 정치적, 이념적 갈등(아일랜드 내전, 청의사와의 충돌 등)이 스페인 내전이라는 국제적 무대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코널리 열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기독교 사제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로버트 마틴 힐러드나 법무장관 암살에 연루되었던 빌 개넌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 1. 아일랜드 좌파의 국제여단 참여 배경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전 세계의 좌파 조직들은 스페인 제2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같은 해 9월, 파시스트 국민파 반군에 맞서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여단이 창설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일랜드의 좌파 단체들 사이에서도 공감을 얻었다.

아일랜드에서 국제여단 참여를 조직한 주요 인물로는 산 머레이(Seán Murray), 파더르 오 도우널(Peadar O'Donnell), 프렌시어스 오 리안(Frank Ryan) 등이 있었다. 머레이는 당시 아일랜드 공산당(CPI) 서기장이었으나,[29] 다른 자료에서는 의장으로도 언급된다.[2] 그는 텔만 대대 소속 빌 스콧(Bill Scott)과의 연락망을 통해 스페인 상황을 정기적으로 전달받아 당 기관지인 ''The Worker''에 게재했다.[29][2] 사회주의자이자 아일랜드 공화주의자[3]였던 오 도우널은 전 타흐터 달러(의회의원)이기도 했다.[29] 그는 나치 독일 치하 베를린에서 열린 1936년 하계 올림픽에 반대하여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인민올림픽에 참여하러 갔다가,[29][3] 도시에서 쿠데타 시도를 분쇄한 무정부주의 성향 노동자 민병대에 합류하여 아라곤 전선으로 갔다.[29][3] 아일랜드로 돌아온 후, 그는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아일랜드인 의용군 편성을 촉구했다.[29][3] 오 리안은 아일랜드 내전 당시 아일랜드 공화국군 조약 반대파(ATIRA) 편에서 싸웠고,[29] 다른 자료에서는 아일랜드 공화군 소속으로도 언급되며,[4] 공산주의 성향의 공화회의 회원이었다.[29][4] 그 역시 국제여단에 참여할 의용병 모집에 힘썼다.

아일랜드 의용병 대부분은 공화회의 출신이었다. IRA는 1925년부터 1931년까지 영국미국에 대한 간첩 활동을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다.[25][5] 이 과정에서 많은 아일랜드 공산당(CPI) 당원들이 IRA에 합류했고, ''스르 에이레''(Saor Éire)와 같은 통일전선 조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공화주의와 공산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실패했으며, 1930년대 초 IRA 내부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약화되자 이들은 별도의 공화회의를 창설하게 되었다.

아일랜드 좌파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주요 동기는 스페인 제2공화국에 대한 지지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 스페인으로 건너가 국민파에 가담한 파시스트 성향의 아일랜드인 여단에 대한 반감도 크게 작용했다. 약 800명 규모의 이 아일랜드인 여단과 ATIRA 사이의 적대감은 아일랜드 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ATIRA와 청의사(Blueshirts)는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거리에서 몽둥이나 총기를 동원한 물리적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 두 집단 모두에게 스페인 내전은 아일랜드 내전의 연장선으로 여겨졌다.

참가자 중에는 기독교 사제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로버트 마틴 힐러드(Robert Martin Hilliard)나, 1927년 법무장관 키빈 크리스토르 오 히긴 암살에 연루된 빌 개넌(Bill Gannon)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2. 2. 주요 인물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전 세계의 좌파 단체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를 지지했다. 같은 해 9월, 공화국 정부와 함께 파시스트 국민파 반군에 맞서 싸우기 위한 의용병 부대인 국제여단이 창설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일랜드의 좌파 단체들 사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코널리 열 조직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 숀 머레이: 당시 아일랜드 공산당(CPI) 의장이었던 머레이는 뛰어난 연설가였다. 그는 탈만 대대에 참여한 의용병 빌 스콧(Bill Scott)과 연락을 유지하며 스페인 상황에 대한 정기적인 보고를 받았다. 머레이는 이 정보를 공산당 기관지인 ''The Worker''에 게재하여 아일랜드 내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2]

  • 피더 오도넬: 사회주의자이자 아일랜드 공화주의자였던 오도넬은 나치 독일 치하의 베를린에서 열린 1936년 하계 올림픽에 반대하여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인민올림픽에 참석 중이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쿠데타 시도를 분쇄한 아나키스트 노동자 민병대의 모습에 감화되어 아라곤 전선에서 그들과 함께 싸웠다. 아일랜드로 돌아온 오도넬은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아일랜드 의용병 부대 창설을 강력히 촉구했다.[3]

  • 프랭크 라이언: 아일랜드 내전 참전 경험이 있는 라이언은 공산주의 성향의 공화국 회의 회원이자 아일랜드 공화군(IRA)의 일원이기도 했다.[4] 그는 국제여단에 합류하여 파시즘에 맞서 싸울 아일랜드 의용병들을 모집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아일랜드 의용병들은 프랭크 라이언이 속한 공화국 회의를 통해 모집되었다. 공화국 회의는 1930년대 초, IRA 내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이전 시기(1925년~1931년)에 IRA는 영국미국에 대한 정탐 활동을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바 있으며[5], 이 과정에서 많은 아일랜드 공산당원들이 IRA에 합류하고 ''사르 에이레''와 같은 통일전선 조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5] 그러나 공화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결국 공산주의 성향의 인사들은 공화국 회의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들 좌파 아일랜드인들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같은 시기 스페인 국민파에 가담한 파시스트 성향의 아일랜드인 여단에 대한 강한 반감이었다. 약 800명 규모의 아일랜드인 여단과 코널리 열 의용병들 사이의 적대감은 아일랜드 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것이었다.

2. 3. 모집 과정과 동기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전 세계의 좌파 조직들은 스페인 제2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같은 해 9월, 공화파 정부와 함께 파시스트 국민파 반군에 맞서 싸우기 위한 의용병 부대인 국제여단이 창설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일랜드의 좌파 단체들 사이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다. 아일랜드에서 국제여단 참여를 조직한 주요 인물로는 산 머레이, 파더르 오 도우널, 프랭크 라이언 등이 있었다.

머레이는 당시 아일랜드 공산당(CPI) 서기장이었으며, 텔만 대대에서 활동하던 빌 스콧(Bill Scott)과의 연락망을 통해 스페인 상황에 대한 정기적인 보고를 받았다. 그는 이 정보를 공산당 기관지인 ''The Worker''에 게재하며 상황을 알렸다.[29][2] 사회주의자이자 아일랜드 공화주의자였던 오 도우널은 나치 독일 치하 베를린에서 열린 1936년 하계 올림픽에 반대하여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인민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스페인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무정부주의 성향의 노동자 민병대가 군부 쿠데타 시도를 분쇄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의 투쟁에 동참하여 아라곤 전선으로 향했다. 아일랜드로 돌아온 오 도우널은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아일랜드인 의용병 부대 창설 운동을 벌였다.[29][3] 라이언은 아일랜드 내전 당시 아일랜드 공화국군 조약 반대파(ATIRA) 편에서 싸웠던 인물로, 공산주의 성향의 공화회의 회원이자 아일랜드 공화군(IRA) 소속이기도 했다.[29][4] 그 역시 국제여단에 합류하여 싸울 의용병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

아일랜드 의용병의 대다수는 라이언이 속했던 공화회의를 통해 모집되었다. 공화회의는 1930년대 초, IRA 내부에서 공화주의와 공산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공산주의 세력이 약화되자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앞서 1925년부터 1931년 사이 IRA는 영국미국에 대한 첩보 활동을 수행하는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도 했으며,[25][5] 이 과정에서 많은 아일랜드 공산당원들이 IRA에 합류하고 스르 에이레와 같은 통일전선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아일랜드 좌파들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동기는 복합적이었다. 우선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에 대한 연대와 지지가 기본적인 동기였다. 여기에 더해, 1936년 말 국민파에 가담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간 아일랜드인 여단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분노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약 800명 규모의 아일랜드인 여단은 파시스트 성향의 아일랜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코널리 열에 참여한 이들과 아일랜드인 여단 사이의 적대감은 1922-23년 아일랜드 내전 당시 이들의 전신 조직들이 서로 반대편에서 싸웠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실제로 1932년과 1933년 사이, IRA 조직원들과 파시스트 성향의 청의사(Blueshirts)는 거리에서 주먹과 몽둥이, 때로는 총기까지 동원한 물리적 충돌을 벌이곤 했다. 양측의 일부는 스페인 내전을 아일랜드 내전의 연장선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코널리 열에 참여한 의용병들의 배경은 다양했다. 모든 참가자가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사회주의와 좌익 이념의 여러 흐름을 포괄했다. 참가자 중에는 기독교 사제였다가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로버트 마틴 힐러드 같은 독특한 이력의 인물도 있었다. 또한, 1927년 법무장관 케빈 오히긴스 암살에 가담했던 전 IRA 회원이자 이후 아일랜드 공산당에 입당한 빌 개넌은 의용병 모집과 조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 전사(戰史)

코널리 열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파시즘에 맞서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해 싸운 아일랜드인 자원병 부대이다. 아일랜드 공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인 프랭크 라이언의 주도로 1936년 12월 결성되었으며, 사회주의 지도자 제임스 코널리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29][11]

국제여단 소속으로 편성된 코널리 열은 안달루시아 전선과 마드리드 전투를 시작으로,[29][13] 하라마 전투, 브루네테 전투, 벨치테 전투, 테루엘 전투, 아라곤 공세, 에브로 전투 등 내전의 주요 격전지에 지속적으로 투입되어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 싸웠다.[29][16][17][18][19][21]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부대 지휘관 프랭크 라이언이 부상을 입거나 포로가 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29][20]

1938년 9월,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국제여단 해산 결정에 따라 코널리 열 역시 해체되었고, 생존 대원들은 아일랜드로 귀환했다.[29][21] 비록 작은 규모의 부대였으나, 파시즘에 대항한 이들의 투쟁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대의 정확한 규모와 전사자 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30][31]

3. 1. 초기 활동

1936년 12월, 프랭크 라이언이 이끄는 80명의 자원병 그룹이 스페인에 도착했다.[6] 이들 중 대다수는 아일랜드 자유국 출신이었지만, 벨파스트북아일랜드의 다른 지역에서 온 공화주의 및 사회주의 성향의 인원들도 있었다. 참가자 중에는 마이클 오리어던, 찰스 도넬리, 프랭크 콘로이, 에디 오플라허티, 폴 번스, 재키 헌트, 빌 헨리, 에이먼 맥그로티, 빌 비티, 패디 로 맥러플린, 피터 오코너,[7] 피터 파워, 조니 파워, 리엄 터밀슨,[8] 짐 스트래니, 윌리 오한론, 벤 머레이,[9] 프레드 맥마흔 등이 포함되었으며, 17세의 토미 우드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아일랜드 공산당 당원이었고, 우드는 청년 조직인 피아나 에이린의 일원이었다.[10]

프랑스 남부 페르피냥까지 열차로 이동한 후, 그들은 스페인 마드리게라스에 집결하여 1936년 12월 국제여단의 '제임스 코널리 부대'(Centuria|센투리아es)를 결성했으며, 이는 통칭 '코널리 열'로 알려지게 되었다.[11] 이 부대는 처음에 제12(프랑스)IB대대에 배속되어 코르도바 근교의 안달루시아 전선에 배치되었고, 그곳에서 국민파의 공세를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12] 같은 달 말에는 마드리드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13]

1937년 1월, 부대는 아일랜드 등지에서 온 새로운 지원병들로 보강되어 재편되었고, 새로 창설된 제15국제여단(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에 배속되었다. 코널리 열은 제16대대(영국인 대대, 삭라트발라 대대) 산하의 1개 중대를 구성했다. 그러나 일부 아일랜드 자원병들은 자신들의 아일랜드 공화주의 신념을 이유로 영국인 대대 소속으로 복무하는 것에 반발했다. 중대장 라이언은 민족 감정보다 노동자 계급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원들을 설득하려 했으나,[14] 그 자신도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악명 높았던 블랙 앤 탠스 출신의 영국인 자원병을 발견하고 분노하여 총으로 쏘겠다고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내부 갈등으로 인해 일부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 대대를 떠나 제15여단 내 다른 부대인 제17대대(미국인 대대, 링컨 대대)로 옮겨갔다. 하지만 이들은 링컨 대대 내에서 정식 부대로 편성되지는 않았다.

제15여단 소속으로 코널리 열은 1937년 2월 마드리드 근교에서 벌어진 하라마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15] 이 전투에서 찰리 도넬리, 에이먼 맥그로티, 빌 헨리, 리엄 터밀슨, 빌 비티 등이 전사했다.[16] 프랭크 라이언 역시 하라마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요양을 위해 아일랜드로 귀국해야 했다. 이후 스페인으로 돌아온 라이언은 공화국군 장군 호세 미아하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3. 2. 제15국제여단 재편성과 하라마 전투

1937년 1월, 코널리 부대는 아일랜드 및 다른 지역에서 온 신병들과 함께 재편성되어, 새로 창설된 제15국제여단에 배속되었다. 코널리 열은 제16대대(영국인 대대) 산하의 한 개 중대를 이루었다.[11] 그러나 일부 아일랜드 자원병들은 자신들의 아일랜드 공화주의 신념 때문에 영국인 대대에서 복무하기를 거부했다. 부대 지휘관 프랭크 라이언은 민족 감정보다 노동자 계급의 연대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대원들을 설득하려 했지만,[14] 정작 자신도 아일랜드 독립 전쟁 당시 악명 높았던 블랙 앤 탠스 출신 영국 자원병을 알게 되자 격분하여 총으로 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러한 내부 긴장으로 인해 일부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 대대를 떠나 제15여단의 다른 부대인 제17대대(미국인 대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이들은 해당 대대에서 정식 부대로 편성되지는 못했다.

제15여단 소속으로 코널리 열은 1937년 2월 마드리드 근교에서 벌어진 하라마 전투에 참전하여 큰 손실을 입었다.[15] 이 전투에서 찰리 도넬리, 에이먼 맥그로티, 빌 헨리, 리엄 툴민슨, 빌 비티가 모두 전사했다.[16]

프랭크 라이언 역시 1937년 2월 하라마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 요양을 위해 아일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스페인으로 돌아온 그는 공화파 장군 호세 미아하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3. 3. 이후 전투와 해산

패디 오데어, 코널리 열의 고위 장교


1937년 1월, 코널리 열은 다른 국제여단 의용병들과 함께 새로 창설된 제15국제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코널리 부대는 제16대대(영국인 대대) 산하의 한 개 중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부 아일랜드 자원병들은 자신들의 아일랜드 공화주의 신념 때문에 영국인 대대에서 복무하는 것을 거부했다. 중대장 프랭크 라이언은 민족 감정보다 노동자 계급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원들을 설득했지만,[14][29] 그 자신도 한 영국인 자원병이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악명 높았던 블랙 앤 탠스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총으로 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러한 긴장으로 인해 일부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 대대를 떠나 미국인들이 주축인 제17대대 링컨 대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은 링컨 대대 내에서 정식 부대로 편성되지는 못했다.[16]

코널리 열은 1937년 2월 마드리드 근교에서 벌어진 하라마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15] 이 전투에서 찰리 도넬리, 에이먼 맥그로티, 빌 헨리, 리엄 툴민슨, 빌 비티 등 많은 대원이 전사했다.[16][29] 프랭크 라이언 역시 하라마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어 치료를 위해 아일랜드로 잠시 귀국해야 했다.[29] 스페인으로 돌아온 라이언은 공화국군 장군 호세 미아하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6월, 코널리 열은 예비대로 돌려졌고, 스페인 남부 포소블랑코 근처에서 싸웠던 제20대대의 영국계 미국인 중대원들이 합류했다. 7월에는 제15국제여단 소속으로 브루네테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제16대대는 450명의 사상자를 냈고, 코널리 열은 빌라누에바 데 카나다 주변에서 싸우다 7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17][29] 8월에는 벨치테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 중 피터 데일리가 부상을 입자 패디 오데어가 영국인 대대 전체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18][29]

10월, 코널리 열은 비교적 전선이 안정된 아라곤 지역으로 이동했다. 해가 바뀐 1938년 1월에는 테루엘 전투에 참가했다.[19][29] 그러나 3월 간데사 전투에서 국민파의 공세로 전선이 붕괴되면서 코널리 열도 후퇴해야 했다.[20][29] 이 과정에서 프랭크 라이언은 4월 1일 아라곤 공세 중 포로로 잡혀 미란다 델 에브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29]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에이먼 데 벌레라 아일랜드 총리의 탄원으로 30년 중노동형으로 감형되었다.

1938년 7월, 코널리 열은 에브로 전투에 참여하며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에브로 전투는 공화파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21][29]

살아남은 아일랜드 자원병들은 스페인 공화 정부의 국제여단 해산 방침에 따라 1938년 9월 이후 아일랜드로 송환되었다. 공화 정부는 국제여단을 해산하면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지원을 얻거나, 최소한 독일이탈리아 군대가 철수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코널리 열은 작은 규모의 부대였지만, 참전 인원과 전사자 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국제여단 영국인-아일랜드인 표창자 명단에는 아일랜드인 전사자가 3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22][30] 참전했던 마이클 오리어던은 총 145명이 참전했고 그중 61명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회고했다.[23][31] 더블린으로 돌아온 코널리 열 생존자들을 맞이한 것은 미할 오 플란나간 신부 한 명뿐이었으며, 그는 이들을 기리는 현수막을 들고 환영했다.[24][32]

아일랜드의 포크 가수 크리스티 무어는 마이클 오리어던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코널리 열의 의용병들을 기리는 노래 〈제5여단 만세(Viva la Quinta Brigada)〉를 만들었다.

3. 4. 전후 평가 및 논란

코널리 열은 작은 규모의 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문헌에 따라 기록된 병력 수에 차이가 있다. 국제여단의 영국인-아일랜드인 표창자 명단에는 아일랜드인 36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30] 반면, 참전했던 미할 오 리르단은 부대원이 총 145명이었으며 그중 61명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회고했다.[31]

1938년 9월,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국제여단 해산을 결정하면서 살아남은 아일랜드인 의용병들은 아일랜드로 송환되었다. 공화국 정부는 국제여단 해산을 통해 다른 민주 국가들의 군사 개입이나 독일군이탈리아군의 철수를 유도하려 했지만, 이러한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다.

더블린으로 귀환한 코널리 열 대원들을 마중 나온 이는 미할 오 플란나간 신부 한 명뿐이었다.[32] 이는 당시 아일랜드 사회 내에서 이들의 참전에 대한 복잡한 시각이나 무관심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코널리 열의 이야기는 후대에 예술 작품을 통해 기억되고 있다. 가수 크리스티 무어는 미할 오 리르단의 회고록 ''코널리 열''에 영감을 받아,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 여단과 함께 파시즘에 맞서 싸운 아일랜드 의용군을 기리는 노래 "비바 라 킨세 브리가다"(Viva la Quinta Brigada|비바 라 킨타 브리가다es)를 발표했다.

참조

[1] 뉴스 Memorial to honour six Limerick men who fought in the Spanish Civil War http://www.thejourna[...] TheJournal.ie 2014-09-14
[2] 문서 O'Riordan p29
[3] 문서 O'Riordan p34
[4] 문서 O'Riordan p56-57
[5] 뉴스 The secret IRA–Soviet agreement, 1925 http://www.historyir[...] History Ireland 2015-02-08
[6] 문서 O'Riordan p55
[7] 웹사이트 Peter O'Connor http://irelandscw.co[...] 2009-12-22
[8] 웹사이트 Liam Tumilson http://irelandscw.co[...]
[9] 웹사이트 Ben Murray http://irelandscw.co[...]
[10] 학위논문 "''Na Fianna Éireann'': A Case Study of a Political Youth Organisation" University of Glasgow 1981
[11] 문서 O'Riordan p58
[12] 문서 O'Riordan p58-60
[13] 문서 O'Riordan p61-64
[14] 문서 O'Riordan p67-68
[15] 문서 O'Riordan p70-72
[16] 문서 O'Riordan p73
[17] 문서 O'Riordan p83-89
[18] 문서 O'Riordan p91
[19] 문서 O'Riordan p110
[20] 문서 O'Riordan p118
[21] 문서 O'Riordan p126-128
[22] 웹사이트 Roll of Honour http://www.internati[...]
[23] 웹사이트 Review of O'Riordan's memoir http://www.historyir[...] 2012-04-20
[24] 서적 They Have Fooled You Again The Columba Press
[25] 뉴스 The secret IRA–Soviet agreement, 1925 http://www.historyir[...] History Ireland 201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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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웹사이트 Ben Murray http://irelandscw.co[...]
[29] 서적 Connolly Column: The story of the Irishmen who fought for the Spanish Republic 1936–1939 Warren & Pell 2005
[30] 웹사이트 Roll of Honour http://www.internati[...]
[31] 웹인용 Review of O'Riordan's memoir http://www.historyir[...] 2019-10-23
[32] 서적 They Have Fooled You Again The Columb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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