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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남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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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평양 전쟁 (남아메리카)은 19세기 말 남아메리카에서 칠레, 페루, 볼리비아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초석과 구아노 등 자원 확보를 위한 아타카마 사막 영유권 분쟁이 주요 원인이었다. 칠레는 해상 우위를 바탕으로 육상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페루로부터 타라파카를, 볼리비아로부터 해안 지역을 획득했다. 이로 인해 볼리비아는 내륙국이 되었고, 칠레는 경제적 성장을 이루며 남미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전쟁은 관련 국가들의 사회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볼리비아와 칠레 간의 영토 분쟁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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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남아메리카)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명칭태평양 전쟁
다른 명칭살리트레 전쟁
로마자 표기Guerra del Pacífico
날짜1879년 4월 5일 – 1883년 10월 20일
장소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 페루볼리비아
결과칠레의 승리
볼리비아내륙국이 됨
페루 내전 (1884년-1885년) 발발
페루에서 칠레의 영향력 증가 (1885년까지)
태평양 전쟁 지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영토 변화를 보여주는 지도. 1879년 이전 지도는 볼리비아페루, 볼리비아아르헨티나 사이의 다른 국경선을 보여준다.
교전 세력
교전국 1볼리비아
교전국 2칠레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볼리비아 대통령
이랄리온 다사 (1876–1879)
페드로 호세 도밍고 데 게라 (1879)
나르시소 캄페로 (1879–1884)
페루 대통령
마리아노 이그나시오 프라도 (1876–1879)
루이스 라 푸에르타 (1879)
니콜라스 데 피에롤라 (1879–1881)
프란시스코 가르시아 칼데론 (1881)
리사르도 몬테로 플로레스 (1881–1883)
미겔 이글레시아스 (1882–1885)
교전국 2 지휘관칠레 대통령
아니발 핀토 (1876–1881)
도밍고 산타 마리아 (1881–1886)
병력
교전국 1 병력 (1879년, 전쟁 전)
볼리비아 육군: 1,687명

페루 육군: 5,557명
페루 해군: 철갑함 4척, 목재 선박 7척, 어뢰정 2척
교전국 1 병력 (1880년)페루 육군: 25,000–35,000명 (리마 육군)
페루 해군: 철갑함 3척, 목재 선박 7척, 어뢰정 2척
교전국 2 병력 (1879년, 전쟁 전)
칠레 육군: 2,440명
칠레 해군: 철갑함 2척, 목재 선박 9척, 어뢰정 4척
교전국 2 병력 (1880년)칠레 육군: 27,000명 (리마 이전), 8,000명 (점령군), 6,000명 (본토)
칠레 해군: 철갑함 3척, 목재 선박 8척, 어뢰정 10척
사상자
교전국 1 사상자사망 및 부상자: 약 25,000명
포로: 약 9,000명
교전국 2 사상자사망자: 2,791–2,825명
부상자: 7,193–7,347명
관련 전투
해상 전투1차 이키케
치파나
피사과
1차 칼라오
2차 이키케
푼타 그루에사
와스카르
1차 안토파가스타
3차 이키케
리마크
2차 안토파가스타
푼타 아레나스
앙가모스
필코마요
아리카
아리카 해전
봉쇄 돌파
2차 칼라오
육상 전투로아 선 및 알티플라노 전역
칼라마
리오그란데
킬라과
탐빌로
타라파카 전역
피사과
팜파 헤르마니아
산프란시스코
타라파카
타크나 및 아리카 전역
이로 및 파코차
모케과
몰렌도
로스앙헬레스
로쿰바
부에나비스타
타크나
아리카
타라타
린치 원정
리마 전역
칠카
예르바 부에나
부자마
우마이
엘만사노
라린코나다데아테
산후안 및 초릴로스
미라플로레스
리마
칠레의 페루 점령
브레냐 전역
시에라 제1차 칠레 원정
산헤로니모
레텔리에 원정
상그라르
베루가스
1차 푸르와이
칼리엔테스
1차 파치아
시에네기야
모투페
과달루페
시에라 제2차 칠레 원정
1차 푸카라
아쿠치마이
시에랄루미
우아리팜파
요클라팜파
추파카
라오로야
2차 푸카라
라콘셉시온
산파블로
타르마탐보
2차 푸르와이
우아만탕가
안데스 산맥 횡단
시에라 제3차 칠레 원정
우아마추코
이스쿠차카
2차 파치아
아레키파-푸노 전선
아레키파
티티카카 호수
조약
관련 조약칠레-페루 평화 조약
볼리비아-칠레 휴전 조약 (1884년)
볼리비아 평화 조약 (1904년 10월 20일)
영토 변화
영토 변화리토랄 주 (안토파가스타)는 1879년부터 칠레가 점령, 1904년에 볼리비아가 칠레에 할양.
타라파카 주는 1879년부터 칠레가 점령, 1884년에 페루칠레에 할양.
푸나데아타카마는 1889년과 1899년에 볼리비아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할양.
타크나 주는 1880년부터 칠레가 점령, 1929년에 페루에 반환.
아리카 주는 1880년부터 칠레가 점령, 1929년에 칠레에 할양.
관련 정보
관련 정보로날드 브루스 세인트 존은 "아타카마 사막의 볼리비아-칠레-페루 분쟁"에서 1873년 조약과 10센타보 세금 부과가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었지만, 1879년 적대 행위 발발에 더 깊고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언급한다.

2. 역사적 배경

16세기, 남아메리카는 스페인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19세기, 프랑스 혁명 등의 영향으로 남아메리카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818년 호세 데 산마르틴에 의해 칠레가, 1822년에는 페루가 독립했다. 시몬 볼리바르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는 북쪽 베네수엘라에서 남아메리카 해방 전쟁을 이끌었고, 1825년 스페인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토 페루(현 볼리비아)를 해방시켰다. 알토 페루 지도자들은 볼리바르를 기려 국명을 볼리비아로 정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에도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권력 다툼과 카우딜료(지방 군사 지도자) 간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1836년 볼리비아의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 대통령은 페루를 정복하고 페루-볼리비아 연합을 성립시켰으나, 1839년 칠레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의 공격으로 연합은 붕괴되었다.

1845년, 페루에서는 라몬 카스티야가 혼란을 수습하고 영국 자본으로 구아노를 개발하여 경제 안정을 이루었다. 1860년대 스페인은 페루 재침략을 시도했으나, 1866년 5월 2일 카야오 해전에서 페루군이 승리하여 실패했다. 그러나 1870년대 철도 건설로 인한 적자와 채무 증가로 페루 내정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볼리비아에서는 1864년 마리아노 멜가레호가 마누엘 이시드로 베르수를 암살하고 대통령이 되면서 혼란이 극에 달했다. 멜가레호는 사치를 위해 지폐를 남발하고 아타카마의 초석 채굴권을 칠레에 팔았다. 인디오 공유지를 해체하고 자유 무역을 도입하여 수공업을 붕괴시켰으며, 티티카카호 주변 인디오를 학살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1871년 멜가레호는 추방되었지만, 정치적 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볼리비아와 칠레 간 아타카마 사막 국경 분쟁 (1825년–1879년)


칠레는 디에고 포르탈레스 등 보수파 지도 아래 1833년 헌법을 제정하고 국가 안정과 강국 정책을 추진했다. 아라우카니아 평정 작전으로 남부 파타고니아 원주민 마푸체족을 토벌하고, 아타카마 사막에서 초석과 철광석 광맥을 개발했다. 영국 자본 지원을 받은 칠레 기업은 볼리비아 국경 지대에 진출하여 안토파가스타 주와 타라파카 주에서 채굴권을 얻었다.

볼리비아와 페루는 재정난 타개를 위해 초석 채굴에 주목했다. 1873년 양국은 칠레 초석 지대 방위를 위한 비밀 동맹(상호 방위 조약 (페루-볼리비아))을 맺었다. 1874년 볼리비아와 칠레는 안토파가스타 주에서 볼리비아가 칠레-영국계 기업에 대한 수출세율을 인상하지 않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1875년 페루는 타라파카의 칠레계 기업을 유상 몰수했다.

1878년 12월, 볼리비아의 이라리온 다사 대통령은 칠레계 기업에 수출세를 부과했다. 칠레가 1874년 협정 위반이라며 반발하자 볼리비아는 초석 수출을 금지하고 칠레 기업을 몰수했다. 1879년 2월, 칠레는 5000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안토파가스타를 점령하고 볼리비아의 태평양 지역을 제압했다. 4월 5일, 칠레는 페루-볼리비아 양국 간 비밀 조약 파기를 요구하며 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2. 1. 인류의 숙원 사업과 맬서스의 경고

산업혁명으로 근대화되기 이전 농경 중심 사회에서는 농업 생산력 증대가 주된 관심사였다. 농경 기술 발전으로 생산량이 늘기도 했지만, 기술 발전과 황무지 개간만으로는 생산량 증가에 한계가 있었다.[213] 결국 곡물 생산량은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인류는 항상 기아에 시달렸고, 흉년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도 발생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감자, 고구마, 옥수수, 카사바 같은 구황작물이 전래되면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한정된 식량 자원에 비해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인구와 식량 간의 불균형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의 경고가 1798년에 나오기도 했다.[214][215]

2. 2. 구아노와 리비히의 '식물 무기 영양론'

훔볼트는 1804년 남아메리카 탐험을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온 후, 페루의 구아노를 비료로 사용하면 농작물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216] 그러나 1841년, '농예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학자 리비히가 '식물의 무기 영양론'을 발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217][218] 리비히는 식물이 이산화탄소와 뿌리에서 얻는 질소 화합물, 미네랄을 통해 성장하며,[219][220] 비료의 가장 중요한 성분이 질소라는 사실을 밝혔다.

구아노는 일반적인 퇴비보다 질소와 인 함량이 훨씬 높았다.[221] 건조한 해안 지방에서 바닷새의 배설물이 오랫동안 쌓이면서 질소가 많이 농축되었기 때문이다.[222] 리비히의 발표 이후 유럽에서는 구아노 수입이 증가했다. 구아노 속 질소는 화약 제조에도 필요했기 때문에,[223] 구아노의 경제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이를 수출하는 페루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2. 3. 태평양 전쟁의 발발 배경

19세기 남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이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을 때, 특히 새로 독립한 국가들의 외딴 지역과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는 국경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볼리비아와 칠레 간의 아타카마 사막 국경 분쟁(남위 23°~24° 사이의 해안 지역)은 남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여러 장기간의 국경 분쟁 중 하나였다.[12]

코비하, 파포소, 메히요네스 그리고 안토파가스타 지역은 1793년 안드레스 발레아토의 지도와 1799년 스페인 해군 지도에 칠레 관할권 안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로아 강을 칠레와 페루 사이 스페인 제국의 내부 경계로 표시하여 차르카스가 해안에 접근할 수 없게 한다.[13][14]

1793년 안드레스 발레아토의 지도. 스페인 제국 내 페루와 칠레의 국경을 보여준다.


페루와 볼리비아 해안의 건조한 기후는 대량의 고품질 구아노 매장량과 칠산염의 축적과 보존을 가능하게 했다. 1840년대 유럽인들은 구아노와 칠산염의 비료로서의 가치와 폭발물에서의 초석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아타카마 사막은 경제적으로 중요해졌다. 볼리비아, 칠레, 페루는 세계가 요구하는 자원의 가장 큰 매장량 지역에 있었다. 친차 제도 전쟁(1864년–1866년) 동안 이사벨 2세 여왕 통치하의 스페인은 페루에서 스페인 시민과 관련된 사건을 이용하여 구아노가 풍부한 친차 제도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립하려고 시도했다.

1830년대 칠레의 은광 붐부터 아타카마 지역은 칠레인들에 의해 탐사되고 거주되었다.[15] 이 지역의 칠레 및 외국 기업들은 결국 페루의 칠산염 광산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 페루의 타라파카 지역에서는 페루인들이 칠레인과 볼리비아인보다 소수였다.[16]

1874년, 칠레와 볼리비아는 1866년 경계 조약을 대체하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경계선을 남위 24도에 유지하되, 볼리비아가 남위 23도와 24도 사이의 모든 세수입을 거둘 권한을 부여했다. 칠레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칠레 상업 이익과 수출에 대한 세금 인상을 25년간 보장받았다. 제4조는 25년간 칠레 기업에 대한 세금 인상을 명시적으로 금지했으며, 조약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분쟁은 중재를 통해 해결되었다.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의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 여러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 등의 영향으로 19세기에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호세 데 산마르틴에 의해 1818년에는 칠레가, 1822년에는 페루가 독립했다. 이후 산마르틴을 대신하여 북쪽의 베네수엘라에서 누에바 그라나다, 과야킬, 키토까지 해방 전쟁을 진행했던 시몬 볼리바르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에 의해 스페인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알토 페루는 1825년에 해방되었고, 남아메리카의 해방 전쟁이 끝났다. 같은 해 알토 페루의 지도자들은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를 기념하여 국명을 볼리비아로 바꾸고 독립했다.

이들 국가에서는 독립 후에도 주도권 다툼이 발생했고,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카우딜료(지방의 군사 지도자) 간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1836년에는 볼리비아의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 대통령이 페루를 정복하여 페루-볼리비아 연합이 성립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공격으로 1839년에 이 연합이 붕괴되자 이후 다시 내전과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었다.

페루에서는 1845년에 라몬 카스티야가 이 혼란을 수습했고, 영국 자본의 차관으로 구아노가 개발되면서 그 자금을 바탕으로 1868년경까지 경제적으로도 안정되고, 공공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철도가 여러 곳에 건설되었다. 1860년대에 스페인은 페루 재침략을 시도했지만, 1866년 5월 2일의 페루군 승리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재식민지화 시도는 분쇄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철도 건설은 막대한 적자를 발생시켰고, 그로 인해 대외 채무는 더욱 증가했으며, 내정 또한 혼란에 빠졌다.

한편 볼리비아에서는 1855년에 포풀리즘적인 마누엘 이시드로 베르수 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사실상의 지배자로 베르수가 군림하고 있었지만, 1864년에 베르수를 암살하고 대통령이 된 마리아노 멜가레호 시대에 국가 혼란은 정점에 달했다. 멜가레호는 사치에 빠지기 위해 지폐를 남발했고, 심지어 아타카마의 초석 채굴권까지 칠레에 팔아넘겼다. 인디오의 공유지를 해체하여 대지주에게 분배하고, 자유 무역을 도입하여 그동안 보호받았던 수공업을 붕괴시켰으며, 이러한 정책에 반대한 티티카카호 주변의 인디오를 학살하는 등 인종 간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이렇게 폭정을 행한 멜가레호는 1871년에 추방되었지만, 그 후에도 정치는 안정되지 않았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파라과이와 함께 독립 후 자유당과 보수당 간의 내전과 무정부 상태를 피했던 칠레는 디에고 포르탈레스를 비롯한 보수파의 강력한 지도 아래 1833년 헌법을 제정하고, 보수파의 지도 아래 국가의 안정과 강국 정책을 실현했다. 이후 남부 파타고니아 원주민, 마푸체족을 토벌하여 영토를 안정시키고(아라우카니아 평정 작전), 경제 정책으로 초석을 비롯한 광산 개발을 시작했다. 아타카마 사막에서 초석과 철광석 광맥이 발견되자 영국 자본의 지원을 받은 칠레 기업이 볼리비아 국경 지대에 진출하여 볼리비아령 안토파가스타 주, 페루령 타라파카 주에서 채굴권을 얻어 개발을 시작했다.

멜가레호 추방 후 재정난에 직면했던 볼리비아와 구아노의 고갈과 가격 폭락에 직면했던 페루는 초석 채굴에 주목했다. 1873년 페루와 볼리비아 양국은 칠레 초석 지대 방위를 위한 비밀 동맹을 맺었다. 1874년 볼리비아와 칠레는 안토파가스타 주에 대해 볼리비아가 칠레-영국계 기업에 대한 수출세율을 더 이상 인상하지 않기로 한 조약을 체결했다. 1875년에는 페루가 타라파카의 칠레계 기업을 유상 몰수했다.

1878년 12월, 비밀 동맹을 배경으로 한 볼리비아의 이라리온 다사 대통령은 칠레계 기업에 수출세를 부과했다. 칠레가 이를 1874년 협정 위반이라며 거부하자 볼리비아는 초석 수출을 금지하고 칠레 기업을 몰수했다. 1879년 2월, 초석 기업 보호를 위해 칠레가 5000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안토파가스타를 군사 점령하고 볼리비아의 태평양 지역을 제압했다. 볼리비아의 다사 대통령은 페루에 원군을 요청하려 했기 때문에, 4월 5일 칠레는 페루-볼리비아 양국 간의 비밀 조약 파기를 강요하며 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3. 전쟁의 전개

1880년 1월부터 6월까지 탁나 아리카 전역에서 칠레 및 연합군의 상륙 및 배치.


1880년 11월부터 1881년 1월까지 리마 전역 중 칠레군의 상륙 및 배치. 피스코에서 칠카까지의 먼 거리는 린치 여단만이 이동했다.


전쟁 전 리마 귀족들의 선호하는 해변 휴양지였던 초릴로스는 초릴로스 전투 중 페루 방어선이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포격을 받고 불이 붙고 약탈당하며 폐허로 변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 모든 폐허와 거리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앙가모스 해전(그림: 토마스 소머스케일즈)


미라플로레스 전투


초릴로스와 전쟁의 결과. 1881년 1월


칠레는 발파라이소에서 페루 해역으로 두 함대를 파견, 타라파카 주 이키케를 해상 봉쇄했다. 5월, 페루 해군이 집결한 칼라오 기습을 시도했으나, 미구엘 그라우 제독이 이끄는 페루 함대는 아리카로 병력을 수송하는 임무로 출항하여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페루 함대는 이키케 봉쇄를 풀기 위해 남하, 5월 21일 이키케 해전이 발발했다. 페루 장갑함 와스칼이 칠레 함선 1척을 격침시켰으나, 페루 역시 주력함 1척을 잃었다.[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46][47][48][200] 이로써 제해권은 칠레에게 유리해졌고, 페루 해군은 그라우 제독의 "와스칼"을 중심으로 제한적인 작전만 수행했다.

10월 8일, 안토파가스타 해역에서 벌어진 앙가모스 해전에서 그라우 제독이 전사하고 "와스칼"이 나포되면서, 제해권은 완전히 칠레에게 넘어갔다.[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46][47][48][200]

제해권을 장악한 칠레군은[123] 1880년 6월 페루령 아리카와 타크나를 점령하고, 10월에는 남부 피스코에 상륙, 이카를 점령했다. 페루군과 원주민들은 각지에서 결사 항전을 이어갔지만, 칠레군은 1881년 1월 리마를 공격,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함락시켰다.[137] 페루 정부는 안데스 산맥으로 피신하여 저항을 계속했으나, 미구엘 데 이글레시아스가 새 대통령이 되면서 항복했다.

한편, 칠레는 탁나 아리카 전역을 계속했다. 11월 28일 아리카를 해상 봉쇄했고, 12월 31일에는 600명의 칠레군이 탁나 북쪽 일로에서 강습작전을 실시, 정찰 후 철수했다.[123]

페루 남부(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 점령과 린치 원정으로 페루군은 국가 방어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페루 정부는 평화 협상에 나서지 않았다. 볼리비아는 국고가 비었음에도 1880년 6월 16일 전쟁 지속을 결의했고, 페루에서는 6월 11일 페루-볼리비아 합중국 창설 문서에 서명했지만,[133] 피에롤라는 투쟁을 계속했다. W. 세이터는 "피에롤라가 1880년 6월에 평화를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면 수많은 페루인의 목숨과 국가의 재산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134]

칠레 정부는 전쟁 종식과 평화 확보를 위해 리마 점령을 계획했다.[135]

;피스코, 칠카, 쿠라야코, 루린 상륙

칠레-마푸체 국경 요새에서 리마 외곽까지 2만 명의 병력이 증원되어 칠레군 병력은 명에 달했다.[136] 칠레군은 리마 전역을 시작, 선박 부족으로 인해 단계적 상륙을 결정했다. 피스코가 첫 상륙 지점으로, 11월 19일 8800명의 병력과 보급품이 도착했다. 400명이 항구 근처에 상륙, 3000명의 페루군 방어를 확인했다. 칠레 선발대는 파라카스에 상륙, 피스코를 점령했고, 11월 20일 나머지 칠레군이 상륙, 이카 주를 장악했다.

12월 2일, 3500명의 병력과 416마리의 말이 피스코에 추가 상륙했다. 12월 15일, 명의 칠레군이 아리카에서 북쪽으로 출발했다. 바케다노 사령관은 린치 여단만 북쪽으로 약 88.51km 떨어진 칠카로 진군시키고, 나머지는 피스코에서 칠카로 해상 수송하기로 결정했다. 칠레군은 12월 22일 칠카 북쪽 쿠라야코에 상륙했고, 포병은 루린에 상륙, 신속히 진격했다.

피에롤라는 리마 북쪽 상륙을 예상, 초릴로스와 미라플로레스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페루 정규군이 초릴로스에서 칠레군을 격퇴하고, 실패하면 예비군이 미라플로레스에서 저지할 계획이었다. 페루군은 명에서 명 규모였다.[137]

주요 방어선은 초릴로스에서 모로 솔라르, 산타 테레사, 산 후안, 팜플로나(언덕)를 거쳐 몬테리코 치코까지 15km 길이였다. 개틀링 건, 포병, 요새, 참호, 지뢰밭 등이 페루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두 번째 방어선은 더 약했으며, 7개의 요새로 구성되어 있었다.

칠레 참모본부는 두 가지 공격 계획을 가졌다. 바케다노는 타블라다 데 루린을 통한 정면 공격을, 베르가라 전쟁 장관은 동쪽으로 우회하는 포위 기동을 주장했다. 바케다노의 계획은 짧은 이동 거리, 후퇴 경로, 해군 지원, 물 공급 등의 장점이 있었고, 베르가라의 계획은 정면 공격 회피, 방어 시설 우회, 페루군 후퇴 경로 차단 등의 장점이 있었으나, 도로, 물 부족, 병목 현상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결국 바케다노의 계획이 채택되었다.

;초릴로스 전투와 미라플로레스 전투

1881년 1월 12일 오후, 세 개의 칠레 부대가 루린에서 초릴로스로 출발, 다음 날 새벽 공격을 시작했다. 린치 사단은 이글레시아스, 소토마요르 부대는 카세레스, 라고스 사단은 다빌라 구역을 공격했다. 칠레군과 페루군은 백병전을 벌였다. 초기에 소토마요르의 배치가 늦어지고 린치의 진격이 격퇴되었으나, 예비 여단 투입으로 린치의 측면을 구출했다. 오전 8시 페루군은 모로 솔라르와 초릴로스로 후퇴했고, 정오에 모로 솔라르가 함락, 오후 2시에 초릴로스가 함락되었다. 초릴로스 전투에서 칠레군은 페루 정규군을 격파하고 첫 번째 방어선을 제거했다. 이틀 후 미라플로레스 전투에서 두 번째 방어선도 돌파되었다.

피에롤라의 병력 분산은 칠레 분석가 프란시스코 마추카의 비판을 받았다.[138] 초릴로스 전투와 미라플로레스 전투는 전투원 수(초릴로스 명, 미라플로레스 명)를 고려할 때 남미에서 가장 큰 전투 중 일부였다. 추정 사망자 수는 명에서 명이며, 부상자는 10144명이다.[139]

리마 함락 후에도 페루의 카우딜로들은 게릴라전을 통해 저항했다. 칠레는 안데스 산맥 계곡으로 원정대를 파견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질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69]

3. 1. 해상 전투

칠레는 두 개의 함대를 발파라이소에서 페루 해역으로 파견하여 타라파카 주 이키케를 해상 봉쇄했다. 5월에는 페루 해군이 집결해 있던 칼라오를 기습하려 했지만, 칼라오의 페루 함대(미구엘 그라우 제독)는 아리카 주로 향하는 병력 수송 호위 임무로 출항하여 전투는 회피되었다. 두 개의 페루 함대는 수송 임무를 마치고 이키케의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 남하하여 5월 21일에는 만입에서 이키케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페루 측의 장갑함 와스칼의 돌격으로 칠레 함선 1척을 격침시켰지만, 페루 측도 주력함 1척을 좌초로 잃었다.[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46][47][48][200] 이 결과, 제해권은 칠레 측에 유리하게 되었고, 페루 해군의 행동은 그라우 제독이 탑승한 "와스칼"의 수송선에 대한 포격과 항만 시설 공격 등으로 제한되었다.

10월 8일, 안토파가스타 해역에서 벌어진 앙가모스 해전에서 그라우 제독 등이 전사하고 "와스칼"이 나포되면서 제해권은 완전히 칠레 측에 넘어갔다.[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46][47][48][200]

3. 2. 육상 전투

칠레는 피사과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타라파카 주, 아리카-타크나, 리마를 차례로 점령했다.[123][133][134] 페루와 볼리비아 연합군은 산 프란시스코 전투, 타라파카 전투 등에서 패배하고 후퇴했다.[123] 칠레는 리마를 점령했고, 페루 정부는 안데스 산맥으로 도피하여 저항을 계속했다.[134]

앙가모스 해전에서 페루 해군을 격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한 칠레군은[123], 1880년 6월에는 페루령 아리카와 타크나를 점령했고, 10월에는 남부 피스코에 상륙하여 이카를 점령했다. 페루군 병사와 인디오들은 각지에서 결사대 전투를 계속했지만, 칠레군은 페루 수도 리마로 진격했다. 이듬해인 1881년 1월에는 공격이 시작되었고, 같은 달 칠레군 명이 시내로 진격했다.[137]

페루 정부는 안데스 산맥으로 도피하여 저항을 계속했지만, 새로 페루 대통령이 된 미구엘 데 이글레시아스는 항복했다.

한편 칠레는 탁나 아리카 전역에서 계속해서 진격을 이어갔다. 산 프란시스코 전투 10일 후인 11월 28일, 칠레는 아리카에 대한 공식적인 해상봉쇄를 선포했다. 12월 31일, 칠레 군인 600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탁나 북쪽의 일로에서 강습작전을 수행하여 정찰을 실시하고 같은 날 철수했다.[123]

페루 남부 지역(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 점령과 린치 원정은 페루군이 더 이상 국가를 방어할 수 있는 숙련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페루 정부를 설득하여 평화를 위한 소송을 제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패배한 동맹국들은 자신의 상황을 깨닫지 못했고, 볼리비아 국고가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880년 6월 16일 볼리비아 국회는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1880년 6월 11일 페루에서는 페루-볼리비아 합중국의 창설을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되었지만,[133] 피에롤라는 계속해서 투쟁을 이어갔다. W. 세이터는 "피에롤라가 1880년 6월에 평화를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면 수많은 페루인의 목숨과 국가의 재산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134]

칠레 정부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확보하려는 국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상황은 칠레 정부가 리마 점령을 계획하게 만들었다.[135]

;피스코, 칠카, 쿠라야코, 루린 상륙

칠레-마푸체 국경의 요새에서 리마 외곽까지 2만 명의 병력이 증원되어 칠레군 병력이 명에 도달하자,[136] 칠레군은 리마 전역을 시작했다. 아리카에서 모든 병력을 한꺼번에 수송할 수 있는 배가 부족했던 칠레인들은 한 부대를 상륙시킨 다음 나머지 군대를 단계적으로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선박 부족으로 인해 리마에 즉시 상륙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대신 리마에서 남쪽으로 약 떨어진 피스코가 첫 번째 상륙 지점이 되었다.

11월 19일, 8800명의 병력, 20문의 대포와 보급품이 피스코에 도착했다. 400명의 병력이 항구 근처에 상륙했고, 그들은 3000명의 병력이 피스코를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스코를 우회하려면 항구에 직접 상륙해야 했기 때문에 칠레 선발대가 남쪽으로 10마일 떨어진 파라카스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피스코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11월 20일 나머지 칠레군이 상륙하여 나중에 인근의 다른 여러 해안 도시를 점령하여 칠레인들에게 이카 주에 대한 사실상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12월 2일, 추가 병력 3500명과 말 416마리가 피스코에 상륙했다. 약 2주 후인 12월 15일, 칠레군 명, 말과 노새 2400마리, 그리고 보급품이 아리카에서 북쪽으로 출발했다. 칠레군 사령관 바케다노는 피스코 지역의 린치 여단만이 북쪽으로 약 88.51km 떨어진 해안 도시 칠카로 진군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칠카는 리마에서 단지 약 72.42km 떨어져 있다. 다른 모든 칠레군은 피스코에서 재승선하여 칠카로 해상 수송될 예정이었다. 칠레군은 1880년 12월 22일 칠카 북쪽의 쿠라야코에 상륙했다. 포병은 나중에 리마 남부 외곽의 루린에 상륙했으며, 칠레군은 상륙 후 신속하게 진격할 수 있었다.

리마 북쪽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했던 피에롤라는 초릴로스와 미라플로레스에 두 개의 평행한 페루 방어선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페루 정규군이 초릴로스에서 칠레군을 물리칠 것으로 기대했다. 만약 그 조치가 실패하면, 초릴로스와 칼라오 부대의 잔여 병력으로 증강된 예비군이 미라플로레스에서 칠레군의 진격을 저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페루군은 약 명에서 명에 달했고 리마 군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137]

주요 페루 방어선은 초릴로스 해변 휴양지에서 모로 솔라르, 산타 테레사, 산 후안, 팜플로나(언덕)를 거쳐 몬테리코 치코까지 이어지는 약 15km 길이의 방어선이었다. 개틀링 건, 포병, 방어 요새, 가파른 자연 언덕(모로 솔라르 280m, 산타 테레사와 산 후안 170m[138]) 꼭대기에 위치한 참호, 그리고 산 후안과 산타 테레사 마을을 가로지르는 리마로 가는 도로 주변의 지뢰밭이 페루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페루군은 산 후안과 산타 테레사가 칠레군 공격의 중요한 목표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두 번째 방어선은 더 약했으며, 보병과 포병을 위한 7개의 요새(800m마다 하나씩)로 구성되어 있었고, 페루인들은 이것이 칠레군의 공세를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

칠레 참모본부는 공격 계획을 두 가지 가지고 있었다. 육군 사령관 바케다노는 타블라다 데 루린을 통한 직접적인 정면 공격을 주장했다. 이 지역은 초릴로스 방어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평한 지형이 넓게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진격 경로의 장점은 이동 거리가 짧고, 후퇴 경로가 있으며, 칠레 해군의 지원 가능성, 루린의 물 공급, 그리고 진격과 이후 공격을 통제하기 위한 훈련과 복잡한 칠레식 훈련의 필요성 감소였다. 전쟁 장관 호세 프란시스코 베르가라의 대안 계획은 동쪽에서 더 멀리 공격하여 페루 방어선을 우회하는 포위 기동 작전이었다. 루린 계곡을 통해 찬타이를 지나 아테에서 리마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저항 없이 리마를 점령하거나 두 방어선을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베르가라의 계획은 피비린내 나는 정면 공격을 피하고, 모든 방어 시설을 우회하며, 험준한 안데스 산맥으로 동쪽으로 후퇴하는 페루군의 모든 후퇴 경로를 차단하고, 페루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그러나 칠레 포병과 수하물의 이동을 위한 안정적인 도로가 없었고, 해군 지원을 허용할 물이 없었으며, 소규모 부대가 리마로 가는 길이나 후퇴해야 할 경우 칠레군 전체를 막을 수 있는 병목 현상이 많았다. 게다가 베르가라의 계획은 훈련이 잘 되고 규율 있는 군대를 필요로 했다. 바케다노는 압력을 가했고 결국 자신의 계획을 채택하는 데 성공했다.

;초릴로스 전투와 미라플로레스 전투

1881년 1월 12일 오후, 세 개의 칠레 부대(사단으로 지칭됨)가 루린에서 초릴로스를 향해 오후 4시경 출발하여 다음 날 새벽 3시경 공격 위치에 도착했다. 오전 5시 페루 요새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린치 사단은 이글레시아스의 위치(모로 솔라르에서 산타 테레사까지), 소토마요르의 부대는 카세레스 구역(산타 테레사에서 산 후안까지), 라고스 사단은 다빌라 구역(산 후안에서 몬테리코 치코까지)을 공격했다. 칠레군과 페루군 병사들은 백병전을 벌였고 소총, 총검, 돌, 심지어 맨손으로 서로 공격했다. 초기에 소토마요르는 제시간에 배치할 수 없었고 린치의 진격은 격퇴되었다. 바케다노는 예비 여단을 투입하여 린치의 측면을 구출해야 했다. 오전 8시 페루 방어군은 산 후안과 산타 테레사에서 모로 솔라르와 초릴로스(도시)로 후퇴해야 했다. 정오에 모로 솔라르가 함락되었고 전투는 초릴로스로 계속되었으며 오후 2시에 함락되었다. 초릴로스 전투 중 칠레군은 리마의 첫 번째 방어선을 제거하며 페루 정규군에게 혹독한 패배를 안겼다. 이틀 후 두 번째 방어선도 미라플로레스 전투에서 돌파당했다.

피에롤라의 두 방어선으로의 병력 분산은 칠레 분석가 프란시스코 마추카의 비판을 받았다.[138] 그러한 비판이 정당한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곤살로 불네스에 따르면 초릴로스 전투와 미라플로레스 전투는 전투원 수(초릴로스 명, 미라플로레스 명)를 고려할 때 남미에서 가장 큰 전투 중 일부였다. 추정 사망자 수는 명에서 명이며, 부상자는 10144명 더 있다.[139]

3. 3. 시에라 전역

리마 함락 이후에도 페루의 카우딜로들은 게릴라전을 통해 저항을 계속했다. 칠레는 안데스 산맥 계곡으로 원정대를 파견하여 저항 세력을 진압하려 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질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69]

4. 전쟁의 결과 및 영향

1883년 안콘 조약과 1884년 발파라이소 조약 체결로 전쟁은 종식되었다.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로부터 영토를 할양받아 광물 자원 수출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제1차 세계 대전까지 ABC 삼국의 일원으로 남미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볼리비아는 해안 지역을 상실하여 내륙국이 되었으나, 여전히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 볼리비아는 칠레와 국교를 회복하지 못하고 천연가스 수출로를 아르헨티나를 통해 대서양으로 연결하고 있다. 반면 칠레와 페루는 국교를 회복하고 철도와 범미주 고속도로를 통해 연결되었다.

4. 1. 평화 조약 체결

1883년 10월 20일, 칠레와 페루는 안콘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냈다. 페루는 타라파카 주를 칠레에 할양했다. 또한 타크나와 아리카 주는 10년간 칠레가 점령하고, 이후 국민 투표로 귀속을 결정하기로 했으나, 양국은 투표 조건에 합의하지 못했다. 1929년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리마 조약이 체결되어 칠레는 아리카를, 페루는 타크나를 획득했다.[30]

1884년 볼리비아는 발파라이소 조약을 체결, 칠레의 볼리비아 해안 점령을 인정했다. 1904년 평화 우호 조약으로 안토파가스타 지역 전체가 칠레에 할양되었다. 칠레는 아리카-라파스 철도 건설과 칠레 항구 및 영토를 통한 볼리비아 상업의 통행의 자유를 보장했다.[30]

4. 2. 전쟁의 영향

이 전쟁은 관련된 모든 국가의 사회에 심오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토 할양에 관한 협상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지만, 전쟁은 모든 실질적인 목적으로 1884년에 종식되었다.[210] 여러 저자들은 이 전쟁을 페루와 볼리비아의 외상으로 언급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 해안 주권을 회복하려는 열망은 볼리비아의 국내외 정책에서 반복되는 주제였으며, 칠레와의 긴장의 일반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21세기에도 외교 관계가 단절되고 국제 법정에 요구가 제기되는 시기가 있었다. 볼리비아는 2009년 헌법에 현재 칠레 영토에 대한 불가침 권리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의 칠레에 대한 볼리비아의 헤이그 제소에서 기존 조약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지지받지 못했다.

리마 조약 이후 칠레와 페루 간의 관계는 칠레와 볼리비아 간의 관계보다 더 원만했지만, 외교적 마찰이 있었다. 그러나 두 국가는 지속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국제 무역에서 협력하며, 상호 통합과 아시아와의 공동 전략 무역을 증진하기 위한 태평양 동맹의 일원이며, 서로에게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이는 두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증가하는 문화 교류를 가져왔다.

남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연안의 자원 지역을 둘러싼 전쟁으로, 분쟁 3개국의 주요 광물이 초석이었기 때문에 "'''초석 전쟁''' (Guerra del Salitre|과라 델 살리트레es)"이라고도 불린다. "태평양 전쟁"은 스페인어 "Guerra del Pacífico"의 번역어이며("Guerra"는 "전쟁", "El Pacífico"는 "태평양"을 의미함), 주로 해전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1883년 10월 20일 안콘에서 강화 조약( 안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듬해 1884년 4월 4일, 볼리비아 또한 칠레와 휴전하여 발파라이소에서 휴전 조약( 발파라이소 조약)을 체결했지만, 공식적으로 강화된 것은 1904년이 되어서였다.

칠레는 페루로부터 타라파카 주를, 볼리비아로부터 안토파가스타 주 등 해안 지역을 할양받았고, 더 나아가 페루령이었던 타쿠나 주와 아리카 주를 획득했다(타쿠나는 1929년에 페루에 반환됨). 전쟁 결과, 광물 자원 수출로 칠레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남미의 강국으로 여겨지게 되어 제1차 세계 대전까지 ABC 삼국으로서 브라질 제국아르헨티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해안 지역을 잃은 볼리비아는 내륙국이 되었지만, 주력은 해병대이지만 현재에도 독립적인 해군(Fuerza Naval Boliviana)을 보유하고 있으며, 주로 티티카카 호아마존강대서양에 전개하고 있다.

현재에도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공식적인 국교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천연가스 수출용 파이프라인을 아르헨티나 영토를 넘어 멀리 대서양 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한편, 칠레-페루 간의 국교는 회복되었으며, 양국 간에 철도가 설치되었고, 범미주 고속도로의 일부가 아리카와 타쿠나를 통과하고 있다.

5. 전후 처리

칠레는 1883년 10월 20일 페루와 안콘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고 타라파카 주를 할양받았다.[164] 1884년 4월 4일에는 볼리비아와 발파라이소 조약을 체결하여 휴전했지만,[210] 1904년 평화 우호 조약을 통해 안토파가스타 지역 전체를 할양받았다. 그 대가로 칠레는 아리카-라파스 철도 건설에 동의했고, 칠레 항구와 영토를 통한 볼리비아 상업의 통행의 자유를 보장했다.[210]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해안 접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210] 21세기에도 외교 관계 단절과 국제 법정에 요구를 제기하는 시기가 있었다. 2009년 헌법에 현재 칠레 영토에 대한 불가침 권리를 포함시켰지만,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의 칠레에 대한 볼리비아의 헤이그 제소에서 이러한 주장은 지지받지 못했다.[210]

칠레와 페루는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 경제, 문화 교류를 증진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등 요소가 남아있다.[210] 리마 조약 이후 칠레와 페루 간의 관계는 칠레와 볼리비아 간의 관계보다는 원만했지만, 외교적 마찰이 있었다. 그러나 두 국가는 지속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국제 무역에서 협력하며, 상호 통합과 아시아와의 공동 전략 무역을 증진하기 위한 태평양 동맹의 일원이며, 서로에게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이는 두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증가하는 문화 교류를 가져왔다.[210]

5. 1. 전후 복구

칠레 점령군이 페루에서 저지른 약탈과 전쟁 배상 문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란거리였다. 칠레에서는 이를 간과했지만, 페루에서는 반칠레 감정의 원인이 되었다. 칠레 역사가 밀턴 고도이 오레야나는[206] 촉릴로스와 미라플로레스 전투 이후의 약탈, 칠레군이 리마에 진입하기 전 페루인들의 리마 약탈, 그리고 칠레군의 기관차, 레일, 인쇄기, 무기 등 파괴를 구분한다. 칠레 정부는 "전쟁 기여금 징수국"을 통해 이를 통제하려고 시도했는데, 이 기관의 임무는 몰수된 물품을 목록화하고 확인하여 칠레로 운송, 목적지, 발송인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주장에 따르면 그 전략적 목적은 평화를 얻는 것이었다. 약탈된 물품의 전체 목록은 없지만, 많은 물품의 운송은 개인 및 공식 서한, 신문 기사, 선하 증권 등에 기록되었다. 또한 칠레인과 페루인에 의한 페루 문화재 약탈이 발생했는데, 문화재 보호에 관한 국제법의 발전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문화재 보호의 아이디어는 18세기에 유럽에서 처음 등장했다.[207]

1863년 리버 규약은 무장 분쟁 중 예술 작품을 무조건 보호했지만(35조), 문화재를 전쟁 배상으로 사용하는 것에 명시적으로 동의했다(36조).[208] 세르히오 비야로보스는 1817년 미국이 예술 작품 몰수를 수용했지만 1874년 전쟁 법규 및 관습에 관한 국제 선언 초안은 문화재가 보호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1년 3월 칠레 정부는 페루 국립도서관(Biblioteca Nacional del Perú)을 압수하기 시작했고, 4만 5천 권의 책이 압수되었다. 하지만 일부 책은 페루인들에 의해 리마에서 판매되었으므로 칠레군이 얼마나 많은 전리품을 가져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881년 3월 말 일부 책이 칠레에 도착했고, 언론은 유화, 책, 조각상 등의 약탈 또는 "국제적 강도질"의 정당성에 대해 보도하고 논의하기 시작했다. "La Epoca"의 한 기자는 이를 "국제적 강도질"이라고 묘사했다.

1883년 1월 4일 칠레 의회 회의에서 아우구스토 마테 페레스 의원은 내무장관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에게 페루 문화재의 "불명예스럽고 굴욕적인" 반출에 대해 질문했다. 몬트는 자산의 반환을 요구했고 맥클루어와 푸엘마 의원의 지지를 받았다. 장관은 추가적인 착취를 막고 논의된 물건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맹세했다. 외관상 그는 그렇게 했고, 반출은 중단되었으며 언급된 조각상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칠레가 도난당한 3,778권의 책을 페루 국립도서관에 반환한 것은 2007년 11월이 되어서였다.[209] 비야로보스는 "도난에 대한 정당한 이유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칠레의 영토 확장


또 다른 문제는 중립국 국민이 소유한 재산에 대한 전쟁 행위로 인한 피해였다. 1884년 청구 국가가 임명한 칠레 판사와 영국(118건), 이탈리아(440건), 프랑스(89건) 시민의 청구를 처리하기 위해 브라질 판사로 구성된 ''중재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1886년 독일 시민을 위한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이탈리아" 재판소는 벨기에 시민의 사건도 처리했고, "독일" 재판소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시민의 사건을 처리했다. 스페인은 재판소의 도움 없이 칠레 국가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미국은 당시 동의하지 않았다.

국제법에 따르면, 외국 시민의 ''animus manendi'' 청구는 피해 재산이 실제 전투 지역(아리카, 촉릴로스, 미라플로레스와 같이 피사구아와 타크나도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경우에만 제기될 수 있었지만, 개인 또는 산발적인 병사에 의해 발생한 피해는 기각되었다. 청구된 가치의 3.6%(1,080,562 칠레 페소)만 재판소에서 인정되었다. 비야로보스에 따르면, 판결은 칠레군에 대한 비난이 페루인들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외국 시민들의 금전적 이익 때문에 과장되었음을 증명했다.

5. 2. 전후 국제 관계

1883년 10월 20일 칠레와 페루는 안콘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페루는 타라파카 주를 칠레에 할양해야 했다.[164] 1884년 4월 4일, 볼리비아는 칠레와 발파라이소 조약을 체결하여 휴전했지만,[210] 1904년 평화 우호 조약을 통해 안토파가스타 지역 전체를 칠레에 할양했다. 그 대가로 칠레는 아리카-라파스 철도 건설에 동의했고, 칠레 항구와 영토를 통한 볼리비아 상업의 통행의 자유를 보장했다.[210]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해안 접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210] 21세기에도 외교 관계 단절과 국제 법정에 요구를 제기하는 시기가 있었다. 볼리비아는 2009년 헌법에 현재 칠레 영토에 대한 불가침 권리를 포함시켰지만,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의 칠레에 대한 볼리비아의 헤이그 제소에서 이러한 주장은 지지받지 못했다.[210]

칠레와 페루는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 경제, 문화 교류를 증진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등 요소가 남아있다.[210] 리마 조약 이후 칠레와 페루 간의 관계는 칠레와 볼리비아 간의 관계보다 원만했지만, 외교적 마찰이 있었다. 그러나 두 국가는 지속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국제 무역에서 협력하며, 상호 통합과 아시아와의 공동 전략 무역을 증진하기 위한 태평양 동맹의 일원이며, 서로에게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이는 두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증가하는 문화 교류를 가져왔다.[210]

6. 문화적 영향

태평양 전쟁은 관련된 국가들의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소설, 노래 등이 제작되었다.

Día del Mares(해의 날)은 볼리비아에서 3월 23일에 기념되는 날로, 일주일간 지속되는 해의 주간(Semana del Mar)의 마지막 날 라파스의 아바로아 광장(Plaza Abaroa)에서 전쟁 영웅 에두아르도 아바로아를 기리는 기념식이 거행되며, 전국적으로도 같은 기념식이 열린다.[13]

해군 영광의 날(Naval Glories Day)은 칠레에서 1879년 5월 21일 수요일에 일어난 두 차례의 해전을 기념하는 기념일이다. 하나는 이키케 해전으로, 프리깃 함장 아르투로 프랫이 페루의 모니터 함 와스카르의 사령관 미겔 그라우의 지휘하에 침몰된 코르벳 함 에스메랄다의 전 승무원과 함께 전사한 전투이다. 다른 하나는 푼타 그루에사 해전으로, 카를로스 콘델의 지휘하에 있는 schooner 코바동가가 후안 기예르모 모레의 지휘하에 있는 페루의 철갑선 인데펜덴시아를 푼타 그루에사의 암초에 좌초시킨 전투이다.[13]

1969년 칠레에서는 헬비오 소토 감독의 ''칼리체 상그리엔토(Caliche sangriento)''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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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논문 ''La gestión diplomática peruana en 1873 ante la Cancillería de Bolivia fue en el sentido de que aprovechara los momentos anteriores a la llegada de los blindados chilenos para terminar las fatigosas disputas sobre el tratado de 1866 y de que lo denunciase para sustituirlo por un arreglo más conveniente, o bien para dar lugar, con la ruptura de las negociaciones, a la mediación del Perú y la Argentina.'' o en ''La alianza al crear el eje Lima-La Paz con ánimo de convertirlo en un eje Lima-La Paz-Buenos Aires, pretendió forjar un instrumento para garantizar la paz y la estabilidad en las fronteras americanas buscando la defensa del equilibrio continental como había propugnado "La Patria" de Lima.''(Ch. 1, p. 8) anteriormente Basadre expuso lo explicado por "La Patria": ''El Perú, según este articulista, tenía derecho para pedir la reconsideración del tratado de 1866. La anexión de Atacama a Chile (así como también la de Patagonia) envolvía una trascendencia muy vasta y conducía a complicaciones muy graves contra la familia hispanoamericana. El Perú defendiendo a Bolivia, a sí mismo y al Derecho, debía presidir la coalición de todos los Estados interesados para reducir a Chile al límite que quería sobrepasar, en agravio general del uti possidetis en el Pacífico. La paz continental debía basarse en el equilibrio continental.'' ... Se publicaron estas palabras en vísperas de que fuese suscrito el tratado secreto peruano-boliviano.(Ch. 1, p. 6)
[24] 논문 ''Tan profundamente convencido estaba el gobierno peruano de la necesidad que había de perfeccionar la adhesión de la Argentina al Tratado de alianza Peru-boliviano, antes de que recibiera Chile sus blindados, a fin de poderle exigir a este país pacíficamente el sometimiento al arbitraje de sus pretensiones territoriales, que, apenas fueron recibidas en Lima las observaciones formuladas por el Canciller Tejedor, se correspondió a ellas en los siguientes términos...'' (p. 129)
[25] 논문 Cap. XXVII, La maniobra leguleyesca
[26] 논문 Chapter 1, "Significado del tratado de la alian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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