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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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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는 스페인의 작곡가로, 르네상스 후기 종교 음악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스페인 신비주의와 종교의 열정을 음악에 담아냈으며, 1587년 스페인으로 귀국하여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에서 봉사했다. 그의 작품은 20세기에 재조명되어 많은 녹음이 이루어졌으며, 대표작으로는 장례 미사(Officium Defunctorum)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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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기본 정보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본명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출생1548년 경, 시구에로스
사망1611년 8월 27일, 마드리드
국적스페인
직업작곡가, 오르가니스트, 가톨릭 사제
활동 시기르네상스
장르르네상스 음악, 종교 음악
스승
스승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Escobedo, Soto de Langa
영향
영향 받은 음악가제1비엔나 악파
서명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서명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서명

2. 생애와 경력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는 어린 시절 아빌라 대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적 기초를 다졌다. 삼촌 후안 루이스는 빅토리아의 후견인이자 음악적 스승 역할을 했다. 빅토리아는 아빌라의 성 자일스 소년 학교에서 고전 교육을 받았으며, 이 학교는 아빌라의 테레사 등 저명인사들로부터 칭송받았다.[1]

1565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지원으로 로마로 유학을 떠난 빅토리아는 독일 대학에서 칸토르로 활동하며 팔레스트리나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 1573년부터 독일 대학과 교황청 로마 신학교에서 예배당 지휘자 및 단성가 강사로 활동했으며, 1571년에는 독일 대학 교사로 임명되어 안정적인 수입을 얻었다.[1] 1574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1] 1575년에는 산 아폴리나레 성당의 마에스트로 디 카펠라로 임명되었다.[1]

1586년 스페인으로 귀국한 빅토리아는 마리아 여황후의 개인 채플린으로 임명되어 마드리드의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수도원에서 채플린,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로 활동하며 24년간 봉사했다.[1] 빅토리아는 수도원으로부터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자유롭게 여행할 권한도 부여받았다.[1] 1611년 사망 후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나, 현재 그의 무덤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1]

2. 1. 가족 배경과 초기 생애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는 1548년경 아빌라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정확한 출생지는 세례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산치드리안이라는 마을이 또 다른 출생지로 제안되기도 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가문이 산치드리안에 정착한 것은 토마스의 맏형이 가족과 함께 이사한 이후였다.

빅토리아 가문의 기원은 할아버지인 에르난 루이스 다빌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6세기 초 아빌라에서 처음으로 문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빅토리아라는 이름은 에르난의 아내인 레오노르 데 비토리아에서 유래했다. 당시 스페인 관례에 따라 자녀들은 선호하는 순서대로 성을 결합하거나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원래 철자인 비토리아(같은 이름의 도시에서 유래)는 토마스를 제외한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사용했지만, 그는 라틴어화된 "빅토리아"를 채택했다.

에르난 루이스 다빌라는 성공한 천 상인이었고, 아빌라 주 전역에 광대한 부동산을 소유했다. 빅토리아 가문은 칼레 데 로스 카바예로스에 살았으며, 그들의 집은 산 후안 바티스타 교회 맞은편, 도시의 주요 시장 광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빅토리아는 프란시스코 루이스 데 비토리아와 프란시스카 수아레스 데 라 콘차 사이에서 태어난 9명의 자녀 중 일곱째였다. 그의 어머니 가족은 세고비아에 기반을 둔 유대인 출신의 부유한 양모 상인이자 은행가였다. 프란시스카의 증조부 야코브 갈폰은 유대인 추방 이후 포르투갈로 갔지만, 1492년 말 왕의 허가를 받아 세고비아로 돌아와 기독교로 개종하고 페드로 수아레스 데 라 콘차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수아레스 데 라 콘차 가문은 귀족으로 승격되어 로소야 후작 칭호를 얻었다.

토마스의 아버지 프란시스코는 아빌라에서 공증인으로 일했으며, 가족 토지 임대료와 사채업으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도박으로 가족 재산이 쇠퇴했고, 프란시스코가 사망하자 맏아들 에르난은 아빌라의 집을 팔고 산치드리안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가문은 곧 다시 자리를 잡고 수아레스 데 라 콘차 사촌 및 메디나 델 캄포에 기반을 둔 사람들과 연계하여 은행업에 참여했다. 에르난은 관례를 깨고 자신의 유산을 나누어 형제자매들이 교육과 지참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토마스는 삼촌인 사제 후안 루이스 데 빅토리아의 지원과 함께 아빌라 대성당 학교에서 초기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2. 2. 교육과 초기 경력

1557년 아버지의 사망 후, 그의 삼촌 후안 루이스가 토마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는 아빌라 대성당에서 성가대원이었다. 대성당 기록에 따르면, 그의 삼촌 후안 루이스는 빅토리아의 《리베르 프리무스》를 교회에 헌정하면서 빅토리아가 아빌라 대성당에서 자랐다는 점을 상기시켰다.[1]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아빌라의 선생님으로부터 어린 나이에 건반 악기 공부를 시작했다고 믿는다.[1] 빅토리아는 아마도 아빌라의 소년 학교인 성 자일스에서 "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것이며,[1] 이 학교는 아빌라의 테레사와 음악계의 존경받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

1565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후, 빅토리아는 로마로 가서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설립한 독일 대학에서 칸토르가 되었다.[1] 이 무렵 그는 팔레스트리나에게서 공부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증거는 정황적이다.[1] 확실히 그는 이탈리아인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1] 1573년부터 빅토리아는 독일 대학과 교황청 로마 신학교에서 두 개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예배당 지휘자이자 단성가 강사직을 맡았다.[1] 1571년, 그는 독일 대학에 교사로 고용되어 처음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시작했다.[1] 팔레스트리나가 신학교를 떠난 후, 빅토리아는 마에스트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1] 빅토리아는 1574년 토마스 골드웰 주교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았다.[1] 이전에 그는 부제가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부제는 곧 사제가 되기 때문에 그 직책을 오래 맡지는 않았다.[1] 1575년, 빅토리아는 산 아폴리나레의 마에스트로 디 카펠라로 임명되었다.[1]

2. 3. 로마에서의 활동

1564년경에 로마로 가서 예수회 회원이 되었다. 이때 팔레스트리나에게 사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정황 증거만 남아있다. 그렇지만 빅토리아가 팔레스트리나의 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빅토리아는 예수회의 수도원에서 일련의 악장직을 맡은 후, 1575년사제로 서품되었다.

2. 4. 스페인으로의 귀환

1587년 펠리페 2세는 빅토리아가 고국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소망을 존중하여 그를 그의 여동생인 과부 마리아 여황후의 채플린으로 임명했다.[1] 마리아는 카를 5세의 딸로, 1581년부터 딸 마르가리타 공주와 함께 마드리드의 산타 클라라 데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었다.[1] 1591년, 빅토리아는 그의 형제 후안 루이스의 딸인 이사벨 데 빅토리아의 대부가 되었다.[1] 빅토리아는 데스칼사스 레알레스에서 24년 동안 일했으며, 여황후의 채플린으로 17년, 그리고 수녀원 오르간 연주자로 봉사했다.[1] 그는 데스칼사스 레알레스에서 대성당 예배당 지휘자로서 벌었을 수입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지급받았으며, 1587년부터 1611년까지 부재 수입으로부터 연간 소득을 받았다.[1] 1603년 마리아 여황제가 사망했을 때, 그녀는 수도원에 세 개의 채플린직을 유증했고, 그중 하나는 빅토리아에게 돌아갔다.[1] 빅토리아에 따르면, 그는 예배당 지휘자로서 추가 수당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예배당 지휘자보다는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고 한다.[1] 그가 존경받았던 정도는 그의 계약이 그가 수도원에서 자주 여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것이다.[1] 그는 1593년 로마를 방문하여 2년 동안 팔레스트리나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 1611년 채플린의 거주지에서 사망했으며 수도원에 묻혔지만, 그의 무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1]

3. 음악

빅토리아의 미사곡, ''Alma Redemptoris mater''의 악보 사본


빅토리아는 반종교개혁 시기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였으며, 르네상스 후기 종교 음악 작곡가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오로지 종교 음악 작곡에만 전념했다.[1] 그의 음악은 스페인의 신비주의와 종교적 열정을 담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2] 파드레 마르티니는 빅토리아의 멜로디와 참신한 아이디어를 칭찬하기도 했다.[3] 그의 작품은 20세기에 들어 재조명되어, 현재까지 다양한 연주와 녹음이 이루어지고 있다.

빅토리아는 소년기에 세고비아에서 바르톨로메 데 에스코베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1564년로마로 건너가 예수회에 들어갔으며, 팔레스트리나에게 음악을 배웠다는 추측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빅토리아의 음악 양식에서 팔레스트리나의 영향을 받은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빅토리아는 예수회 수도원에서 여러 직책을 맡은 후, 1575년사제로 서품되었다.

1586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빅토리아는 마드리드의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여자 수도회에서 황태후 마리아를 섬기게 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수도원에 머물며 사제, 작곡가, 합창 지휘자, 오르가니스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황태후 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왕비이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이었다.

빅토리아는 1572년에 첫 번째 모테트집을 출판했다.[4] 1585년에는 가톨릭 전례의 성주간 축제를 위한 37개의 작품이 포함된 ''Officium Hebdomadae Sanctae''를 작곡했는데, 여기에는 ''어둠의 응답가'' 18개의 모테트가 포함되어 있다.[5]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걸작으로 평가받는 ''장례 미사''는 레퀴엠으로, 마리아 황후를 위해 작곡되었다.

3. 1. 특징

빅토리아는 스페인 반종교개혁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이자, 르네상스 후기 종교 음악의 가장 훌륭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이 장르에 전념했다.[1] 그의 음악은 스페인 신비주의와 종교의 열정을 반영한다.[2] 파드레 마르티니는 그의 멜로디 구절과 즐거운 발상을 칭찬했다.[3] 그의 작품은 20세기에 부활하여 수많은 최신 녹음이 이루어졌다.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에서 신비로운 강렬함과 직접적인 감정적 호소를 듣는데, 이는 팔레스트리나의 음악보다 리듬과 화성이 더 차분하다고 여겨지는 음악에서는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품질이다. 멜로디 처리와 4분음표 불협화음과 같은 작곡 스타일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4]

빅토리아는 점차적으로 리듬 거리를 줄여가며 여러 파트로 합창단을 중첩하고 분할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목소리를 위한 복잡한 파트를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오르간은 많은 그의 합창 작품에서 거의 독주자처럼 다루어진다.[5] 시편 설정이나 두 개의 합창단을 위한 안티폰 개발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레퍼토리의 인기를 이어가고 높였다.[6] 그는 이전에 출판된 작품을 재출판했으며 각 재발행본에 개정을 통합했다.

양식적으로, 그의 음악은 많은 동시대 사람들의 정교한 대위법을 피하고, 단순한 선율과 동성적 질감을 선호하지만, 리듬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때로는 강렬하고 놀라운 대비를 포함한다. 그의 멜로디 작법과 불협화음의 사용은 팔레스트리나의 것보다 더 자유롭다. 때때로 그는 16세기 대위법의 엄격한 적용에서 금지된 음정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오름차순 장육도, 심지어 때때로 감4도(예를 들어, 그의 모테트 ''Sancta Maria, occurred''에서 슬픔을 나타내는 멜로디 감4도가 나타난다)를 사용하기도 했다. 빅토리아는 때때로 마드리갈에서만 발견되는 종류의 극적인 어구 묘사를 사용한다. 그의 종교 음악 중 일부는 악기를 사용하고(16세기 스페인 종교 음악에서는 흔한 일이 아님), 또한 베네치아 악파의 작곡가들처럼 공간적으로 분리된 여러 그룹의 가수를 위한 다중 합창 작품을 썼으며, 그들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에서 활동했다.

3. 2. 작곡 기법

빅토리아는 스페인 반종교개혁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이자, 르네상스 후기 종교 음악의 가장 훌륭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그는 이 장르에 전념했다. 빅토리아의 음악은 그의 개성을 반영하여 스페인 신비주의와 종교의 열정을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20세기에 부활하여 수많은 최신 녹음이 이루어졌다.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에서 신비로운 강렬함과 직접적인 감정적 호소를 듣는데, 이는 팔레스트리나의 음악보다 리듬과 화성이 더 차분하다고 여겨지는 음악에서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품질이다. 멜로디 처리와 4분음표 불협화음과 같은 작곡 스타일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3]

빅토리아는 점차적으로 리듬 거리를 줄여가며 여러 파트로 합창단을 중첩하고 분할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목소리를 위한 복잡한 파트를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오르간은 많은 그의 합창 작품에서 거의 독주자처럼 다루어진다.[4] 빅토리아는 시편 설정이나 두 개의 합창단을 위한 안티폰 개발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레퍼토리의 인기를 이어가고 높였다.[5]

양식적으로, 그의 음악은 많은 동시대 사람들의 정교한 대위법을 피하고, 단순한 선율과 동성적 질감을 선호하지만, 리듬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때로는 강렬하고 놀라운 대비를 포함한다. 그의 멜로디 작법과 불협화음의 사용은 팔레스트리나의 것보다 더 자유롭다. 때때로 그는 16세기 대위법의 엄격한 적용에서 금지된 음정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오름차순 장육도, 심지어 때때로 감4도(예를 들어, 그의 모테트 ''Sancta Maria, occurred''에서 슬픔을 나타내는 멜로디 감4도가 나타난다)를 사용하기도 했다. 빅토리아는 때때로 마드리갈에서만 발견되는 종류의 극적인 어구 묘사를 사용한다. 그의 종교 음악 중 일부는 악기를 사용하고(16세기 스페인 종교 음악에서는 흔한 일이 아님), 또한 베네치아 악파의 작곡가들처럼 공간적으로 분리된 여러 그룹의 가수를 위한 다중 합창 작품을 썼으며, 그들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에서 활동했다.

3. 3. 주요 작품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는 스페인 반종교개혁 시대의 주요 작곡가이자 르네상스 후기 종교 음악의 뛰어난 작곡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음악은 스페인 신비주의와 종교적 열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20세기에 들어 그의 작품이 재조명되어 다양한 녹음이 제작되었다.[4]

빅토리아는 팔레스트리나보다 자유로운 멜로디 작법과 불협화음을 사용했고, 16세기 대위법에서 금지된 음정을 사용하기도 했다. 마드리갈에서 사용되는 극적인 어구 묘사를 사용하거나, 악기를 사용한 종교 음악을 작곡하고, 베네치아 악파처럼 다중 합창 작품을 쓰기도 했다.[5] 그의 대표작으로는 마리아 황후를 위한 장례 미사곡인 ''장례 미사''가 있다.

3. 3. 1. 미사곡

제목성부
Alma redemptoris mater|알마 레뎀프토리스 마테르la8
Ascendens Christus|아센덴스 크리스투스la5
Ave maris stella|아베 마리스 스텔라la4
Ave regina coelorum|아베 레지나 첼로룸la8
De Beata Maria Virgine|데 베아타 마리아 비르기네la5
Dum complerentur|둠 콤플레렌투르la6
Gaudeamus|가우데아무스la6
Laetatus sum|라에타투스 숨la12
O magnum mysterium|오 마그눔 미스테리움la4
O quam gloriosum|오 쾀 글로리오섬la4
Pro defunctis|프로 데풍크티스la4
Pro defunctis|프로 데풍크티스la6
Pro Victoria|프로 빅토리아la9
Quam pulchra sunt|쾀 풀크라 순트la4
Quarti toni|콰르티 토니la4
Salve regina|살베 레지나la8
Simile est regnum coelorum|시밀레 에스트 레그눔 첼로룸la4
Surge propera|수르게 프로페라la5
Trahe me post te|트라헤 메 포스트 테la5
Vidi speciosam|비디 스페치오섬la6



'''위작(僞作)'''

제목성부
Dominicalis|도미니칼리스la4
Pange lingua|팡게 링구아la4


3. 3. 2. 모테트

빅토리아는 1572년에 첫 번째 모테트집을 출판했다.[4] 1585년에는 가톨릭 전례의 성주간 축제의 일부인 37개의 작품을 포함하는 ''Officium Hebdomadae Sanctae''를 썼으며, 여기에는 ''어둠의 응답가''의 18개의 모테트가 포함되었다.[5]

그의 음악은 많은 동시대 사람들의 정교한 대위법을 피하고, 단순한 선율과 동성적 질감을 선호하지만, 리듬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때로는 강렬하고 놀라운 대비를 포함한다. 그의 멜로디 작법과 불협화음의 사용은 팔레스트리나의 것보다 더 자유롭다. 때때로 그는 16세기 대위법의 엄격한 적용에서 금지된 음정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오름차순 장육도, 심지어 때때로 감4도(예를 들어, 그의 모테트 ''Sancta Maria, occurred''에서 슬픔을 나타내는 멜로디 감4도가 나타난다)를 사용했다. 빅토리아는 때때로 마드리갈에서만 발견되는 종류의 극적인 어구 묘사를 사용한다. 그의 종교 음악 중 일부는 악기를 사용하고(16세기 스페인 종교 음악에서는 흔한 일이 아님), 또한 베네치아 악파의 작곡가들처럼 공간적으로 분리된 여러 그룹의 가수를 위한 다중 합창 작품을 썼으며, 그들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에서 활동했다.

다음은 빅토리아의 모테트 목록이다.

'''4성부'''

  • 깨끗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Beati inmaculatin)
  • 주님을 찬미하리(Benedicam Dominum)
  • 그에게 열매를 주어라(Date ei de fructu)
  • 착한 스승, 하느님의 친구 안드레아(Doctor bonus amicus Dei Andreas)
  • 주님, 저는 합당하지 않습니다(Domine non sum dignus)
  • 두 세라핌이 외치다(Duo seraphim clamabant)
  • 보라, 위대한 사제(Ecce sacerdos magnus)
  • 나는 생명의 빵이다(Ego sum panis vivus)
  • 전쟁에서 용감해지라(Estote fortes in bello)
  • 성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기뻐하네(Gaudent in coelis animae Sanctorum)
  • 세상을 멸시하는 이 사람(Hic vir despiciens mundum)
  • 이 성인은 율법을 위해(Iste sanctus pro lege)
  •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았네(Magi viderunt stellam)
  • 두려워 마라, 마리아(Ne timeas, Maria)
  • 오, 사도적 영광(O decus apostolicum)
  • 오, 최고의 스승(O doctor optime)
  • 오, 위대한 신비(O magnum mysterium)
  • 오, 얼마나 영광스러운 왕국인가(O quam gloriosum est regnum)
  • 오, 얼마나 두려운가(O quam metuendus)
  • 오, 천국의 왕국(O regnum coeli)
  • 오, 거룩한 만찬(O sacrum convivium)
  • 오, 너희 모두(O vos omnes)
  • 히브리 소년들(Pueri Hebraeorum)
  • 네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Quam pulchri sunt grassus tui)
  • 성모 마리아, 불쌍한 자들을 도와주소서(Sancta Maria, succurre miseris)
  • 늙은이가 아이를 품에 안고(Senex puerum portabet)
  • 오라, 그리스도의 신부(Veni, sponsa Christi)
  • 진실로 우리의 고통(Vere languores nostros)


'''5성부'''

  • 그리스도께서 높이 오르시니(Ascendens Christus in altum)
  • 복된 이그나티우스와 함께(Cum beatus Ignatius)
  • 주님의 천사가 내려왔다(Descendit angelus Domini)
  • 오순절 날이 다 찼을 때(Dum complerentur dies Pentecostes)
  • 보라, 주님께서 오시리라(Ecce Dominus veniet)
  • 기뻐하라, 동정녀 마리아(Gaude, Maria virgo)
  • 오, 스페인의 빛과 영광(O lux et decus Hispaniae)
  • 그의 얼굴이 빛나다(Resplenduit facies ejus)


'''6성부'''

  • 내 마음은 불타고 있네(Ardens est cor meum)
  •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Beata es Virgo Maria)
  • 복되신 삼위일체시여(Benedicta sit Sancta Trinitas)
  • 나를 축하해주오(Congratulamini mihi)
  • 나는 검다(Nigra sum)
  •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O Domine Jesu Christe)
  • 오, 거룩한 만찬(O sacrum convivium)
  • 너희는 누구를 보았느냐, 목자들이여(Quem vidistis, pastores)
  • 선한 목자가 부활하셨네(Surrexit PastorBonus)
  • 나를 따라 오소서(Trahe me post te)
  • 너는 베드로다(Tu es Petrus)
  • 가서, 성읍을 두루 다니리라(Vadam, et circumibo civitatem)
  •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네(Vidi speciosam)
  • 슬픔으로 변했네(Versa est in luctum)


'''8성부'''

  • 아베 마리아(Ave Maria)
  • 주님, 주의 힘으로(Domine in virtute tua)
  • 오, 일데폰소(O Ildephonse)
  •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네(Vidi speciosam)


'''기타'''

번호성부제목비고
1268Nisi Dominus
1368Super flumina Babylonis
1098Dixit Dominus
1128Laudate pueri Dominum
1168Laudate Dominum omnes gentes
12112Laudate sum
1358Ecce nunc benedicite
1094Dixit DominusI, 홀수
1104Confitebor tibi Domine4, 홀수
1114Beatus vir8, 짝수
1124Laudate pueri Dominum6, 짝수
1474Lauda Jerusalem7, 홀수
1104Confitebor tibi Domine4, 짝수
1114Beatus vir8, 홀수
1264Nisi Dominus8, 홀수
1154Credidi6, 홀수


3. 3. 3. 기타 작품

빅토리아는 1572년에 첫 번째 모테트집을 출판했다.[3] 1585년에는 가톨릭 전례의 성주간 축제의 일부인 37개의 작품을 포함하는 ''Officium Hebdomadae Sanctae''를 썼으며, 여기에는 ''어둠의 응답가''의 18개의 모테트가 포함되었다.[4]

양식적으로, 그의 음악은 많은 동시대 사람들의 정교한 대위법을 피하고, 단순한 선율과 동성적 질감을 선호하지만, 리듬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때로는 강렬하고 놀라운 대비를 포함한다. 그의 멜로디 작법과 불협화음의 사용은 팔레스트리나의 것보다 더 자유롭다. 때때로 그는 16세기 대위법의 엄격한 적용에서 금지된 음정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오름차순 장육도, 심지어 때때로 감4도(예를 들어, 그의 모테트 ''Sancta Maria, occurred''에서 슬픔을 나타내는 멜로디 감4도가 나타난다)를 사용했다. 빅토리아는 때때로 마드리갈에서만 발견되는 종류의 극적인 어구 묘사를 사용한다. 그의 종교 음악 중 일부는 악기를 사용하고(16세기 스페인 종교 음악에서는 흔한 일이 아님), 또한 베네치아 악파의 작곡가들처럼 공간적으로 분리된 여러 그룹의 가수를 위한 다중 합창 작품을 썼으며, 그들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에서 활동했다.

그의 작품 목록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주님을 찬미하소서(Benedictus Dominus)
  • 이제는 주님의(Nunc dimittis) (4)
  • 이제는 주님의(Nunc dimittis) (5)
  • 성 목요일
  • 예레미야의 애가 시작(4)
  • 그리고 그는 나갔다(4)
  • 그의 손(5)
  • 성 금요일
  • 주님을 묵상했다(4)
  • 그들의 어머니에게 말했다(4)
  • 나는 고통받는 사람이다(5)
  • 성 토요일
  • 주님의 자비(4)
  • 어찌 그리 어두워졌는가(4)
  • 예레미야의 기도 시작(6)
  • 강독
  • 내 영혼이 지쳤다
  • 연도
  •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
  • 목요일 아침 기도
  • 나의 친구
  • 유다는 최악의 상인
  • 내 제자 중 하나
  • 목요일 아침 찬미가
  • 나는 어린 양 같았다
  • 한 시간
  • 백성의 장로들
  • 금요일 아침 기도
  • 강도에게 하듯
  • 어둠이 드리웠다
  • 나의 사랑하는 영혼
  • 금요일 아침 찬미가
  • 그들이 나를 넘겨주었다
  • 예수를 배반한 불경한 자
  • 내 눈이 흐려졌다
  • 토요일 아침 기도
  • 우리 목자가 떠나갔다
  • 너희 모두
  • 보라, 의인이 어떻게 죽는가
  • 토요일 아침 찬미가
  • 세상의 왕들이 섰다
  • 나는 평가받았다
  • 주께서 묻히시니
  • 라우다 시온 살바토렘 (8)
  • 빅티매 파스칼리 (8)
  • 베니 산체 스피리투스 (8)

참조

[1] 논문 Tomás Luis de Victoria (Ávila, 1548 – Madrid, 1611) y su linaje converso
[2] 간행물 היהודי הראשון שחזר לספרד (1492)? / De La Diáspora Hacia Sefarad: ¿ La Primera Carta De Regreso De Un Judio Convertido? https://www.jstor.or[...] 1989
[3] 논문 Tomás Luis de Victoria (1611-2011). Homenaje en el IV centenario de su muerte
[4] 논문 Tomás Luis de Victoria, pasión por la música
[5] 웹사이트 Roberto QUIRÓS ROSADO, Génesis y consolidación de un linaje financiero castellano: Los Victoria https://www.academia[...]
[6] 웹사이트 Tomás Luis de Victoria – a 400th-anniversary profile http://www.gramophon[...] Gramophone online 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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