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폰티우스 필라투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26년부터 36년까지 로마 제국 유대 속주의 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기독교 신약성서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들을 학대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예수의 재판에서 십자가형을 선고하는 역할을 했다. 유대인과의 갈등, 예수 처형 관련 기록, 그리고 다양한 예술 작품과 문학, 영화에서의 묘사를 통해,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권력과 도덕적 갈등을 보여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유다이아 총독 - 루시우스 퀴에투스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베르베르 출신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고 기병대 장교, 유대 총독 등을 역임했으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 유다이아 총독 - 가이우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바수스는 페르가몬 출신으로 아탈로스 왕조 및 갈라티아 대족장 가문 출신인 로마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게미나 제13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시작해 여러 속주의 관직과 군단 레가투스를 거쳐 유대 속주 총독, 집정관, 여러 지역의 총독을 역임하다 다키아 반란 당시 다키아 속주의 황제 총독으로 사망했다.
  • 테라모도 출신 - 프란코 탄크레디
    프란코 탄크레디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로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AS 로마에서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주전 골키퍼로 세리에 A 우승 1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 4회를 달성하고, 은퇴 후에는 골키퍼 코치로 활동했다.
  • 테라모도 출신 - 브루노 마르텔라
    브루노 마르텔라는 이탈리아의 수비수이며,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팀에서 시작하여 페스카라, 삼프도리아 등 여러 팀을 거쳐 2023년 페랄피살로로 임대 이적했다.
  • 39년 사망 - 헤로디아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손녀로, 헤롯 2세와 결혼하여 딸 살로메를 낳았으며, 이복 삼촌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하여 세례자 요한의 처형에 관여하고 유배 생활을 하다 사망한 인물이다.
  • 39년 사망 -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 갈릴리와 페레아 지역을 통치하는 분봉왕이었으며,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고 37년에 추방되어 사망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안토니오 시세리의 '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 폰티우스 필라투스(그림 가운데)가 좌측의 예수를 군중들에게 가리키고 있다.
안토니오 시세리의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폰티우스 필라투스(그림 가운데)가 좌측의 예수를 군중들에게 가리키고 있다.
이름폰티우스 필라투스
원어 이름
로마자 표기Pontius Pilatus (폰티우스 필라투스)
직책
직위유다이아 총독
대수5대
임기 시작기원후 26년경
임기 종료기원후 36년
군주티베리우스
전임발레리우스 그라투스
후임마르켈루스
개인 정보
국적로마 제국
배우자알려지지 않음
업적
주요 업적빌라도의 법정

2. 경력

본티오 빌라도는 로마 기사 계급 출신으로,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유대 속주의 총독을 역임했다. 그의 정확한 임기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대략 기원후 26년부터 36년까지로 추정된다.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유대 총독이 되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자료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성(姓) '필라투스'(Pilatus)는 "던지는 창에 능숙한 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 만약 "던지는 창에 능숙한 자"라는 뜻이라면, 필라투스가 로마 군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이 성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필라투스는 교육을 받았고, 어느 정도 부유했으며, 정치적,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의 아내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전설로 여겨진다.

1세기에 폰티우스 필라투스 총독 시절 유대 속주의 지도


필라투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유대 속주의 다섯 번째 총독이었다. 요세푸스는 필라투스가 10년 동안 통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이 기간은 기원후 26년부터 36/37년까지로 추정된다.

로마 총독으로서 그는 사법 제도의 수장이었다. 그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있었고, 공물과 세금을 징수하고, 화폐 주조를 포함한 자금을 분배할 책임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어느 정도의 지역 통제를 허용했기 때문에, 필라투스는 유대인 산헤드린과 제한적인 민사 및 종교적 권한을 공유했다.

총독으로서 필라투스는 유대인 대제사장을 임명할 권한이 있었고, 또한 대제사장의 제의를 공식적으로 통제했다. 그의 전임자와 달리, 필라투스는 그의 임기 전체 동안 같은 대제사장인 요셉 벤 가야바를 유지했다. 이는 가야바와 사두개파의 제사장들이 필라투스에게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필라투스는 "카이사르의 친구"라는 칭호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빌라도의 통치 기간은 유대인들과의 잦은 충돌로 얼룩져 있다. 그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고 유대교 전통을 무시하는 정책을 펼쳐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다. 대표적인 사건은 다음과 같다.

  •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유대인들의 항의를 받았으나, 결국 철거했다.
  • 예루살렘 수도 공사 비용을 성전 헌금으로 충당하려다 유대인들의 반발을 사 무력 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 사마리아인들을 로마에 대한 반란 미수로 오인하여 공격, 살상했다. 이 사건으로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는 필라투스에게 로마로 돌아가 해명하라고 명령했다.

2. 1. 유대인과의 갈등

본티오 빌라도는 유대 속주의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유대인들과 여러 차례 갈등을 빚었다.[29]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을 무시하고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을 강요하여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는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유대인들을 자극했다. 유대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빌라도는 군대를 동원하여 위협했지만, 유대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항하자 결국 깃발을 철거했다.[29]

또한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도교 건설 비용을 성전 헌금에서 충당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유대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필론의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는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금박 방패를 예루살렘의 총독 관저에 걸어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다. 유대 귀족들과 헤롯 대왕의 아들들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직접 탄원하여, 결국 방패를 카이사레아의 아우구스투스 신전으로 옮기게 했다.[17]

이러한 사건들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문화적 특수성을 존중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을 강요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예수 처형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누가복음 13장 1절에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갈릴리 사람들의 제물에 섞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그의 잔혹함을 보여준다.[20]

다음은 폰티우스 필라투스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표이다.

사건내용자료
황제 깃발 사건카이사르의 형상이 새겨진 황제 깃발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함. 유대인들의 저항으로 5일 후 깃발 제거.요세푸스, 유대 전쟁(2.9.2)과 유대 고대사(18.3.1)
금 방패 사건예루살렘에 금 방패를 가져와 헤롯 궁전에 배치하여 유대 율법을 어김. 헤롯 대왕의 아들들이 황제에게 청원하여 방패 제거.필론, 가이우스에게 보내는 사절단 (38)
수도교 건설 사건예루살렘으로 가는 새로운 수도교를 건설하기 위해 성전 보물 창고(korbanos|코르바노스grc)를 사용하여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함. 군중에게 곤봉으로 때리라고 명령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타를 당하거나 말에 짓밟혀 죽음.유대 전쟁(2.9.4)과 유대 고대사(18.3.2)
갈릴리인 학살갈릴리인들 "곧 빌라도가 그들의 피를 그들의 희생물에 섞은" 사건누가복음 13:1


2. 2. 예수 처형

사도신경에 따르면 예수는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형을 당했는데, 사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며 예수를 놓아주려 한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사두가이파 제사장들이 빌라도를 겁박하자, 빌라도는 손을 씻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22] 요한복음서 18장 38절에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고, 유대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23] 이 외에도 요한복음서 18:31, 누가복음서 23:20~23, 마태복음서 27:24~25, 마 27:19에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두초,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 c. 1310, 그의 ''마에스타'' (시에나에 있음)


서기 30년 또는 33년 유월절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처형하라고 선고했다.[3] 십자가형에 대한 주요 자료는 4개의 정경 복음서인데, 그 내용은 서로 다르다. 복음서 저자들은 빌라도를 묘사할 때 자신의 신학적, 변증적 관점을 반영했으며, 전설이나 신학적 내용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광범위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저자들은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일치하는데, 이는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반영할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을 선고하는 역할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증언했다. 타키투스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인 박해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창시자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선고에 따라 사형을 당했다"라고 기록했다. 요세푸스도 예수의 처형을 유력한 유대인들의 요청에 의해 빌라도가 집행했다고 언급했다.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 미하이 뭉카치, 1881


복음서가 묘사하는 빌라도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묘사와 크게 다르다. 복음서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하는 것을 꺼리고 군중과 유대 당국자들의 압력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묘사된다. 그러나 존 P. 메이어는 요세푸스에서는 "빌라도 혼자 [...]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선고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복음서의 내용이 신뢰할 수 없다고 믿는다. S. G. F. 브랜든은 빌라도가 예수를 반역자로 즉시 처형했다고 주장했다. 폴 윈터는 기독교인들이 로마 당국에 의한 기독교인 박해가 증가함에 따라 빌라도를 예수의 무죄를 증언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바트 어만은 초기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는 유대인과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하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후기 복음서에서는 점차 빌라도의 죄책감을 줄여서, 결국 빌라도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고 주장한다.

레이먼드 E. 브라운은 복음서의 빌라도 묘사는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빌라도는 다른 자료에서 항상 잔혹하고 완고한 사람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또한 빌라도가 손을 씻는 행위의 역사성을 거부하며, 이러한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4]

누가 복음서 13장 1절에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갈릴리 사람들의 제물에 섞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빌라도는 잔혹했지만,[20] 재판에서의 빌라도의 행동은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21][26]

빌라도의 질문 "진리가 무엇인가" 요한 복음서 18:38 (1890년 러시아, 니콜라이 게)


신약성서에 묘사된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의 처형에 소극적이었다.[25] 복음서 기자들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23] 누가 복음서 23장 4절에는 "나는 이 사람에게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소"라고 빌라도가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 복음서 19장 6절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 죄를 찾지 못하겠소"라고 말하며 예수의 무죄를 명백히 밝힌다. 마태오 복음서 27장 19절에서는 빌라도의 아내가 등장하여, 사형을 선고하기 전날 밤 꿈 속에서 고통을 겪었기에 "저 의로운 사람"과 상관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누가 복음서 23장 1절부터 12절에 따르면 빌라도는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예수를 보냈고, 예수는 헤로데의 심문을 받는다. 헤로데는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모욕하고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는데, 이로 인해 그 전까지 적대적이었던 빌라도와 헤로데는 화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손을 씻는 빌라도 (17세기 후반 네덜란드, 니콜라스 마스)


빌라도는 손을 씻어 자신에게 책임이 없음을 보이려 했지만, 무죄임을 알면서도 군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당한 사형 판결을 인정했다.[24] 마가 복음서 15장 1절부터 15절과 요한 복음서 19장에는 군중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예수의 처형을 단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빌라도의 동기에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지키려는 의도와 로마에 유대 지방의 상황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는 바람이 있었다고 여겨진다.[25][21][26]

3. 성서 및 기타 기록

사도신경니케아 신경에 따르면 예수는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묻히셨다.[29] 예수 당시 사건을 기록한 사복음서에서는 본티오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며, 예수를 놓아주려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두가이파 제사장들이 "만일 예수를 처형하지 않는다면, 총독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구가 아니다."라고 겁박하자, 손을 씻음으로써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

>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요한의 복음서 18:38)’

이 외에도 요한 복음서 18:31, 누가복음서 23:20~23, 마태복음서 27:24~25, 마 27:19에 관련 내용이 나와 있다.

본티오는 이탈리아 남부 중앙에 있던 고대 부족 집단 삼니움 주민이 사용한 가족 성(姓) 중 하나로서, 삼니움 주민은 나중에 로마인이 되었다. 빌라도의 생애에 관해서는 기원후 26년에서 36년까지 로마 제국의 변경 행정구역의 하나인 유대 속주의 총독을 지낸 것과 기독교 신약성서의 짧은 기록 및 몇몇 역사가들이 언급한 그의 유다인 학대 정책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타키투스, 실록 15,44;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유다전쟁 2,9,4;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2,7)

그는 성격이 잔인하고 가혹해서 횡포를 휘둘렀고 반역자는 법적 판결 심사없이 처형했다. 갈릴리인의 학살은 그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눅 13:1).[29] 그래서 본티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증하고 풀어주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나라라는 대안공동체를 주장하는 예수를 로마 제국의 통치를 위협하는 인물로 보아 처형하는 모습이 실제 역사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 예수가 처형될 때,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왕(Rex Iudaeorum Iesus)"라고 팻말을 형틀에 걸었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18권에서 빌라도와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소동으로 세 가지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 그전까지 유대 총독들이 자제했던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군기를 밤에 카이사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에 걸어두었으나, 사람들의 탄원과 태도에 굴복하여 철거했다.
  • 예루살렘에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도 공사에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돈의 일부를 사용하고, 공사 중지를 호소하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켜 사상자가 발생했다.
  •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고발당한 예수에게 십자가형 판결을 내렸다.


(덧붙여 『유대 전쟁사』 제II권에도 예수의 처형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외에는 거의 동일한 내용의 기술이 있다.)

신약성서에 묘사된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의 처형에 소극적이었다.[22]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누가 23:4, 요한 13:38).[25] 『누가 복음서』(23:4)에는 "나는 이 사람에게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소"[23]라고 빌라도가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 복음서』(19:6)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 죄를 찾지 못하겠소"[23]라고 말하며 예수의 무죄를 명백히 밝힌다. 『마태오 복음서』(27:19)에서는 빌라도의 아내가 등장하여, 사형을 선고하기 전날 밤 꿈 속에서 고통을 겪었기에 "저 의로운 사람"과 상관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빌라도는 손을 씻어 자신에게 책임이 없음을 보이려 했지만, 그는 무죄임을 알면서도 군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당한 사형 판결을 인정했으므로, 제임스 패커는 이를 가장 어리석은 제스처로 평가했다.[24]

3. 1. 외경 및 전승

기독교 외경과 전승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일부 전승에서는 그가 예수의 처형을 후회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는 빌라투스를 성인으로 추대하기도 한다.[26] 이러한 긍정적인 전승은 동방 기독교, 특히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자주 나타난다.[26]

초기 기독교 전통은 후기 전통보다 빌라도를 더 긍정적으로 묘사하는데,[26] 이는 밀라노 칙령(312) 이후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세기 말, 2세기 초 기독교 작가 테르툴리아누스는 빌라도가 "이미 그의 양심 속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후회하는 빌라도가 자살을 준비한다. 19세기 초 G. 모체티의 B. 피넬리 조각.


반면, 일부 전승에서는 빌라도가 유배되어 자살하거나 저주받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27] 4세기 초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빌라도가 로마로 소환된 후 자신의 수치 때문에 자살했다는 "전승"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른 기록에서는 뒷받침되지 않는다.

필라투스 산 전설에 따르면, 빌라도가 자결한 후 악령이 그의 시신에 몰려들어 사람들이 유해에 가까이 갈 수 없었고, 강에 버려도 강이 끓어 넘쳐 그를 토해내는 듯하여, 결국 산으로 둘러싸인 묘혈에 시신을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산이 필라투스 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27]

외경인 니고데모 복음(일명 ''빌라도 행전'')에서는 빌라도가 유대인에 의해 예수를 처형하도록 강요받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베드로 복음은 십자가형에 대해 빌라도를 완전히 면죄하고, 헤롯 안티파스가 십자가형을 집행했다고 묘사한다.

게에즈어로만 보존된 수탉의 서라는 외경에서는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을 피하려 노력하고, 그의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에티오피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성주간 동안 읽힌다.

4. 유산 및 평가

본시오 빌라도는 니케아 신경사도신경에 모두 십자가형에 관여한 것으로 언급된다. 사도신경은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라고 진술한다.[12] 니케아 신경은 "우리 (예수)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라고 진술한다.[13] 이 신경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매주 암송한다. 빌라도는 예수마리아 외에 신경에서 이름으로 언급된 유일한 인물이다. 신경에서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은 수난을 역사적 사건으로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 6월 19일에 축일이 있는 성인으로 존경받으며, 역사적으로는 콥트 정교회에서 6월 25일을 축일로 존경받았다.

마태복음 27장 24절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씻는 빌라도의 모습은 대중의 상상 속에 흔히 나타나는 이미지이며, 무언가에 대한 더 이상의 관여나 책임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영어 표현 "to wash one's hands of (the matter)"의 기원이다. 요한복음에서 빌라도에게 귀속된 대화의 일부는 특히 불가타의 라틴어 버전에서 인용되어 유명한 말이 되었다. 여기에는 numquid ego Iudaeus sum?|내가 유대인인가?la, 요한복음 18:38 (Quid est veritas?|진리가 무엇인가?la), 요한복음 19:5 (Ecce homo|보라, 이 사람이로다!la), Ecce rex vester|보라, 너희 왕이다!la, 그리고 Quod scripsi, scripsi|내가 쓴 것을 썼다la가 포함된다.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책임을 빌라도로부터 유대인에게 돌리는 복음서의 내용은 중세 시대부터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반유대주의를 조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대한 주요 고대 자료들은 그의 통치와 인격에 대해 매우 상반된 견해를 제시한다. 필로는 적대적이고, 요세푸스는 대체로 중립적이며, 복음서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이다. 이는 필라투스의 긴 재임 기간에 대한 정보 부족과 결합되어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평가를 낳았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야기한 많은 위법 행위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필라투스가 특히 나쁜 총독이었다고 본다. M. P. 찰스워스는 필라투스가 "그의 성격과 능력이 일반적인 지방 관리보다 뒤떨어진 사람 [...] 10년 동안 그는 자신이 통치하도록 파견된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오해 속에서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폴 마이어는 필라투스가 유대 총독으로 오랫동안 재임했다는 사실은 그가 상당히 유능한 행정관이었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반면, 헨리 맥아담은 "[유대 전쟁 이전의] 유대 총독들 중에서 필라투스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유능하다고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필라투스가 유대인들과의 교류에서 문화적으로 무감각했을 뿐이며, 이러한 점에서 전형적인 로마 관료였다고 주장해 왔다.

1948년 E. 스타우퍼를 시작으로 일부 학자들은 필라투스가 세야누스에 의해 임명되었을 가능성을 근거로, 필라투스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위법 행위는 세야누스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과 그들의 국가를 파괴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으며, 필라투스의 동전에 새겨진 이교도적 이미지가 이를 뒷받침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원후 31년 세야누스가 처형되고 티베리우스가 그의 지지자들을 숙청한 후, 필라투스는 자신도 제거될까 두려워하여 훨씬 더 신중해졌으며, 이는 예수 재판에서 그의 분명히 약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설명해 준다. 헬렌 본드는 "[유대 주화의 역사를 볼 때, 특히 헤롯과 그라투스의 주화를 보면, 필라투스의 동전은 의도적으로 공격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그 동전은 필라투스와 세야누스 사이의 어떠한 연결성에 대한 증거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카터는 이 이론이 홀로코스트의 여파 속에서 등장했으며, 세야누스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증거는 전적으로 필로에 의존하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이 필라투스에 대한 정확하거나 공정한 그림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빌라도는 손을 씻어 자신에게 책임이 없음을 보이려 했지만, 그는 무죄임을 알면서도 군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당한 사형 판결을 인정했으므로, 제임스 패커는 이를 가장 어리석은 제스처로 평가했다.[24] 『마가 복음서』(15:1-15)와 『요한 복음서』(19장)에는 군중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예수의 처형을 단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빌라도의 동기에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지키려는 의도(요한 19:12)와 로마에 유대 지방의 상황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는 바람이 있었다고 여겨진다.[25][21][26]

유대 총독을 지낸 것 외에는, 빌라도의 사적에 관해 사료에는 없지만, 기독교로마 제국에 퍼지면서 빌라도라는 인물은 역사 편찬자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2세기경에 만들어진 위조된 서간에는 빌라도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예수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고 보고하는 내용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빌라도가 당시 은밀하게 기독교도였으며, 티베리우스에게 예수를 판테온에 추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는 설(Apologeticum21,24・5:2)을 주장했다. 신약 외경의 『니고데모 복음서』(『빌라도 행전』이라고도 불림)에서는 그가 예수를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한 공식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고 칭하며, 정경 복음서보다 더욱 예수에게 동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 빌라도의 평판이 절정에 달한 것은 동방 정교회(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그를 성인으로 지정했을 때이며, 빌라도가 죄를 뉘우치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는 전승을 보존하고 있다.[26]

한편,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저작 속에서 빌라도가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갈리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자살했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으며(에우세비우스, 『교회사』II:7), 그 이후 빌라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황제에게 처형당하는(처형자는 네로이거나 티베리우스인 경우도 있음) 등의 이야기도 퍼졌다. 자살설은 히에로니무스 등에게서도 보이지만, 규모가 큰 것으로는 필라투스 산의 전설이 있다.

하지만, 사토 켄은 교부의 기술이 확실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28] 또한, 사토 켄 등은 마르코 15:1-15절에 대해서도, 이는 실제 빌라도의 사적이나 심정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로마 제국이 아닌 유대교 지도자에게 전가하려는 호교적 기술이 아닌가 하고 보고 있다.[28]

4. 1. 현대 문화

빌라도는 수많은 예술 작품, 문학, 영화에서 다양하게 묘사되어 왔다. 그는 종종 권력에 굴복하거나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지며, 그의 행동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미하일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빌라도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여,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죄책감과 구원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1930년대에 쓰여졌지만 작가의 사후 26년이 지난 1966년에 출판되었다.[11] 헨리 I. 맥아담은 이 소설을 "빌라도 관련 소설의 '컬트 클래식'"이라고 묘사한다.[11] 소설은 "거장"이라고만 불리는 작가가 폰티우스 필라투스와 예수(예슈아 하-노츠리)의 만남을 다룬 소설 속의 소설을 담고 있다. 이 주제 때문에 거장은 소련 문학계로부터 "필라투스주의"로 공격받았다. 소설의 다섯 개의 챕터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챕터로 등장한다. 그 안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구하고 싶어하지만 그의 카리스마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너무 비겁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1960년대 러시아 비평가들은 이 빌라도를 "스탈린 시대 러시아의 무기력한 지방 관료의 전형"으로 해석했다.[11] 빌라도는 예수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11] 자신의 도덕을 따르고 예수를 풀어주고 싶은 욕망을 배반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영원히 고통받아야 한다.[11] 빌라도의 죄책감은 불가코프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거장을 만나면서 마침내 해소된다.[11]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도 빌라도는 고뇌하는 인물로 등장하여, 예수의 처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을 보여준다. 1973년 영화 ''Jesus Christ Superstar''는 1970년 록 오페라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예수의 재판은 로마 극장의 폐허에서 열리는데, 이는 로마 권위의 붕괴와 "정치적이든 아니든 모든 권위의 붕괴"를 암시한다.[11] 영화에서 배리 데넨이 연기한 빌라도는 요한복음 18:38을 확장하여 예수에게 진실에 대해 질문하며, 맥도너의 관점에서 "도덕적 상대주의의 불안한 대표"로 나타난다.[11]

이 외에도 1959년 미국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의 양아버지 아리우스의 친구로 등장하며, 전차 경주로 민족의 영웅이 된 벤허에게 처음에는 월계관을 선물하고 칭찬하지만, 로마제국의 통치에 위협이 됨을 깨닫고는 유대 땅을 떠나라고 경고한다.

참조

[1] 서적 For the Freedom of Zion: the Great Revolt of Jews against Romans, 66-74 CE Yale University Press 2021
[2] 웹사이트 The Pilate Stone at the ''Inscriptions of Israel-Palestine'' project https://library.brow[...] 2019
[3] 서적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 HarperOne
[4] 서적 The Death of the Messiah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08
[5] 서적 Jesus, the Final Days: What Really Happened https://books.goog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01-01
[6] 서적 For the Freedom of Zion: the Great Revolt of Jews against Romans, 66-74 CE Yale University Press 2021
[7] 문서 Experiencing Old Age in Ancient Rome
[8] 뉴스 Notorious Pontius Pilate Is the One Who Built Jerusalem Aqueduct, Study Finds https://www.haaretz.[...] 2022-06-23
[9] 뉴스 Pontius Pilate's Scottish roots 'a joke' https://www.thetimes[...] 2020-01-17
[10] 뉴스 Mystery of the '5,000-year-old' yew of Fortingall https://www.scotsman[...] 2020-01-17
[11] 웹사이트 The Way of the Cross http://www.newadvent[...] 1907
[12] 웹사이트 The Apostles' Creed https://www.cardinal[...] Cardinal Newman Catechist Consultants 2019-07-15
[13] 문서 Nicene Creed in English s:Nicene Creed (ECUS[...]
[14] 서적 イエス・キリスト時代のユダヤ民族史 II 株式会社教文館
[15] 서적 ユダヤ古代誌6 新約時代編[XVIII][XIX][XX] 株式会社筑摩書房
[16] 기타
[17] 서적 イエス・キリスト時代のユダヤ民族史 II 株式会社教文館
[18] 서적 まことの神、まことの人 いのちのことば社
[19] 서적 キリスト教とは何か?
[20] 성경 新改訳聖書
[21] 서적 新聖書辞典 いのちのことば社
[22] 서적 聖書の概説 羊群社
[23] 성경 新共同訳聖書
[24] 서적 使徒信条 いのちのことば社
[25] 서적 現代カトリック事典 エンデルレ書店
[26] 서적 キリスト教大事典 教文館
[27] 서적 イエス・キリスト時代のユダヤ民族史 II 株式会社教文館
[28] 서적 岩波キリスト教辞典 岩波書店
[29] 사전 그리스도대사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